내가 사는 도시에는 작은도서관이란 게 숱하게 많다. 적어도 스무 개 이상?

 

  시에서 마을마다 만들어준 도서관인데 우리 아파트 안에도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요것이 얼마나 편리한지 내 책방에 있는 책도 분류가 안 되 찾기 힘든 건 포기하고 도서관에 전화해서 있다고 하면 조르르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며칠 전 <토니오 크뢰거> 급하게 필요했는데 내 책방에는 어디 처박혀 있는지 모르겠고 막 도서관으로 달려갔더니 싱싱한 채로 책꽂이에 꽂혀 있다. 얼마나 요긴한지. 행정 당국이 모든 걸 잘 하는 건 아니겠지만 이런 머리 쓴 건 참 인정해주고 싶다. 각설하고

 

  며칠 전, 우리집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도서관에 볼일이 있었다. 우연히 내 눈앞에 보이는 책장에서 위의 책을 발견했다. 저자 이름이 낯익어서 한눈에 띄었다. 플라시보님의 필명이 독특해서 금세 눈에 띄었다. 도서관 오픈하면서 신간으로 사들인 것 같았다. 책 내용과는 상관없이 반가운 이름이다. 내가 알라디너로 입문할 시절 내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었던 ~디너들이 몇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플라시보님이다. 왠지 빌려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볼일 보다 먼저 책을 빌렸다. 연애서적을 빌리는 중년 아지매를 담당자가 뜨악한 눈으로 쳐다봤다. 연애 따윈 관심도 없지만 없는 새초롬함을 빌려 왜, 아줌마는 연애에 대해서 좀 알면 안 돼? 하는 표정을 지어줬다.

 

  플라시보님 책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니고, 그 때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알라디너 네 명 중 세 명이 알라딘을 떠난 것 같다. 차례로 그 네 분은 플라시보님, 주드님, 파란여우님, 로쟈님인데 로쟈님만 남아 있고 다른 분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거나 휴지기 중인 것 같다. 그들의 글은 각기 특징이 있었다. 번득이는 상황 묘사에 능한 플라시보님 글은 재미를 주었고, 주드님 글은 깨질듯한 민감한 감성이 무기였다. 내가 편집자라면 주드님을 꼬드겨 다듬어서 책을 내게 하고 싶을 정도로 예민한 글을 썼었다. 파란여우님은 현장성이 뛰어난 전투적 문체를 갖고 있었는데 동년배인 님에게 공감하기가 쉬워서 내가 좋아했었다. 로쟈님이야 뵌 적 없지만 디너들이 인정하는 최고수이니 존경의 헌사 한마디로도 함축 될 수 있을 터고...

 

  그때 뭐 이런 괴물들이 활동하나 싶어서 신기했다. 지금은 더한 고수들이 득시글거리니 가끔은 책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정글인 알라딘이 무서울 때가 있다. 글께나 쓴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알라딘 서재를 많이 권한다. 글 안 쓰더라도 거기 가보면 무림고수들이 한 자리씩 꿰차고 있어 배울 게 많거나 스스로 초라하거나. 전자라야 견딜만한데 나는 후자의 감정이 많기 때문에 언제나 그들이 부럽다. 부러우면 지는건데 알라디너들에게 지는 거야 영광이라 생각한다. 

 

  쉬다가다 하는 나야  떠날 일도 없지만  열심히 하던 분들이 사정상 안 보이니 많이 그립다. 실은 눈물나도록 그립다. 독자로서 그 글들이 내뿜는 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오직 글로써 그리운 것이다.

마을도서관에 꽂힌 낯익은 플라시보님 책 때문에 옛 생각이 나서 몇 자 끼적여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뫼르소의 태양

 

  강렬한 태양을 벗어나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은 일탈을 꿈꾼다. 고작해야 계곡이나 바다 찾아 발 한 번 담그는 정도의 일탈이겠지만 일상의 틀을 훌훌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거다. 그도 잠시 결국은 세상이 원하는 삶, 가족이 바라는 생활, 본인 스스로가 규정한 테두리 속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게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여기 제대로 된 일탈 종결자가 있다.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문제적 인간 뫼르소. 엄마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흘리지 않고, 연애를 하되 깊이 사랑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하며, 타는 듯한 태양빛에 홀려 살인을 저지르는 사내다. 평범하고 규범적인 인간 군상과 자신이 왜 다른지조차 자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천상 자유인. 자신이 일탈적 선상에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는 실존적 인간형이다.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뫼르소에겐 사랑, 도덕, 가족애, 신념 그리고 종교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이다. 도덕적으로 계산할 줄도 모르고, 종교적 원죄의식엔 물들지도 않았다. 애초에 인간에 관한 연민이나 사회가 부여한 관습이나 질서 따위에 한없이 무관심할 뿐이다. 우발적 살인으로 재판정에 섰지만 자기변명마저 혐오한다. 자신을 위한 재판이건만 스스로 제 3자가 되어버리는 부조리한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한 여름이면 이 작품이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격렬하게 이마에 내리꽂히던 뫼르소만의 실존적 태양 때문이리라. 실존주의는 누가 뭐래도 개별자의 삶을 우선한다. 타인에게 상처나 방해 없는 실존이라면 나도 기꺼이 그 배에 승선하리라. 개인의 자유의지가 존중되는 사회야말로 가장 건강한 집단이라 생각하므로.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게 솔직하기 위해 타자에게 유해한 손짓을 가한 뫼르소는 내 식의 부조리 연극의 주인공이 되기엔 한참 부족할 수도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물넷의 질주 - 신은 내게서 두 다리를 앗아갔지만 나는 달리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스카 피스토리우스.지아니 메를로 지음, 정미현 옮김 / 작은씨앗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에게 장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배턴을 받을 때부터 꼴찌였던 레이스를 역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주자로 나선 그에게 관중들은 환호했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순간이었다. 남자 육상 1600미터 계주 결승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앵커로 나선 의족 스프린터 피스토리우스. 그의 질주를 통해 지구촌 사람들은 인간 존엄과 불굴의 의지를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다리 절단 장애인이 패럴림픽을 넘어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의족을 찼다는 건 그의 외적인 모습일 뿐 실제 그는 몸이 불편하다는 의식을 거의 하지 않는단다. 무릎 아래 뼈가 없이 태어난 그는 돌도 되기 전 종아리를 절단해야 했다. 자라면서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패배의식 같은 걸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단다. 처음부터 그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호기심 많고 적극적인 보통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가족 덕이다.

 

 

  ‘패배자는 결승선을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사람이 아니라 달려보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갓난아기 때 써 뒀다는 어머니의 이 한마디는 그의 평생 좌우명이 되었다. 가족의 긍정적이고 열린 시선이 그를 낙천적이고 도전적인 청년으로 이끌었다. 장애인 선수가 아니라 육상선수일 뿐이라는 그의 신념이 마음자락을 잡아끈다.

 

  탄소섬유 보철의 달리기 효과를 주장하는 일부 시각을 잠재우고 올림픽 무대에 섰다는 것 자체로 그는 주목 받아 마땅하다. 스스로 바라보는 만큼 타인도 그 사람을 바라봐준다. 당당한 자기만의 길을 내며 달리는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치타 닮은 그의 의족을 곁눈질할 게 아니라 여름밤 서늘한 바람 같은 그의 영혼을 보듬을 일이다. 어떻게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하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밝은 방 동문선 문예신서 326
롤랑 바르트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책 좀 읽으려고 폈다하면 벤야민이 어쩌고, 괜찮은 사유들을 들출라 치면 바르트가 저쩌구(이것들 뿐이랴, 들뢰즈, 레비나스, 데리다, 푸코, 하이데거, 심지어 고진까지...).... 저마다 이러는 통에 무식한 독자는 머리가 터질라 칸다. 이참에 저 위대한 것들이 연필로 뭔 짓을 해놨길래 글 좀 쓰는 자들은 저토록 저들의 이름을 들먹이는지 알아봐야겠다 싶다.

 

  우선 롤랑 바르트의 <밝은방>과 이미지 컷으로 된 <롤랑바르트, 필립 소디, 김영사>를 샀다. (물론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도 뒤늦게 샀다.) 금세 읽었다. 뭔 말인지 모르겠다. 내 독해력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역자를 원망하고 싶다. 실은 뭔 말인지 모르겠는 게 아니고, 역자가 뭔 말인지 모르도록 번역해 놨다고 보면 된다. 충분히 공부하고, 담뿍 이해하고 연필(아니 자판)을 내지를 것이지... 역자 후기만 읽어도 역자에 대한 신뢰감이 떨어진다. 어려운 텍스트를 번역한다는 게 얼마나 힘겨운지는 알겠으나, 역자 스스로 먼저 번역되어 나온 책(카메라 루시다)을 참고했다고 했는데도 이 정도라니 안타깝다. 비문이라도 좀 덜 생산하는 역자를 만나고 싶다. 절판되었다는 카메라 루시다를 구해서 비교해 보고 싶다.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개념을 이해하게 된 건 그나마 다행이다. 나남 할 것 없이 특정 사진에 대해 떠오르는 공통된 심상, 또는 작가의 의도 등을 스투디움이라 한다면 구경꾼 개별자의 폐부 깊숙이 찌르는 뭔가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푼크툼이라 부를 수 있다. 전자가 객관적이고, 평면적이고, 대중적이며, 이해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입체적이며, 개별자적이며, 소통 부재해도 되는 것이다.

 

   ...어떤 '세부 요소'가 나를 끌어당긴다. 나는 그것이 다만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사진 읽기가 변하고 있음을, 또 내가 바라보는 것이 훌륭한 가치가 새겨진 새로운 사진임을 느낀다. 이 '세부 요소'는 푼크툼(나를 찌르는 것)이다. -59쪽

 

  스투디움이 의식적이라면 푼쿠툼은 무의식적이다. 스투디움이 대중적 갈망의 표현이라면 푼쿠툼은 개별자의 숨겨진 욕망이다. 갑자기 생각난 것 두 가지. 아주 먼 옛날 사진들을 하나하나 불러내 나만의 푼크툼을 섬세하게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푼크툼은 사금파리로 팔뚝을 문질렀을 때 생기는 상처 같은 것이므로 아, 생각만해도 서늘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마추어 말고 식자입네 하는 사진가들 대개가 스투디움과 푼크툼을  생각하며 사진 작업을 하는지 궁금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꼼미 2012-07-3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위대한 것들'에 대한 책읽기는 어찌 돼가고 계신지^^ 더운 여름 잘 보내고 계세요? 미시건도 무척 더웠답니다.

다크아이즈 2012-08-13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운 꼼미님 미시건에는 가을이 오고 있겠지요? 갱년기 앓느라 땀만 삐질, 서재질은 뒷전. 숙제하듯 분발해볼까 싶어요. 위대한 것들, 이 여전히 괴롭히지만 안 위대한 독자가 달려가야지요. 어쩌겠어요.
 
애도예찬 - 문학에 나타난 그리움의 방식들 예찬 시리즈
왕은철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연을 쫓는 아이를 번역한 왕은철 작가 책이라 무조건 믿고 삽니다. 선 구매 후 리뷰 해야겠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