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고수 한 분이 영어 정복법을 가르쳐줬다. 첫째, 제 수준에 맞는 영문법 책을 서 너번 되풀이한다. 둘째, 역시 수준에 맞는 원문을  A4용지 세 장 분량씩 매일 외운다. 셋째, 재밌는 드라마를 되풀이해서 본다.

  아주 타당한 방법인 것 같아 실천하려고 굳게 마음 먹었다. (아직도 마음만 먹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첫째, 둘째는 문제가 없는데 셋째 방법에서 현실적 장벽에 부닥쳤다. 기존의 비디오 플레이어로는 자막을 선택할 수 없지 않은가?  핑계가 좋아  홈시어터를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며칠 전부터 우리집 아저씨는 스피커 설치한다고 온 마루를 뒤집어 놨다. 영어 공부한다는 애초의 목적은 안중에도 없고, 홈시어터를 주문하면 덤으로 따라오는 '반지의 제왕 확장판' 디브이디를 마수걸이로 본다고 (나 빼고) 나머지 세 식구는 정신이 없다.  거의 환장 무아지경에 빠진 듯하다.  가로늦게 화질과 음질이 뛰어난 영상에 몰입하는 재미가 쏠쏠한 모양이다. 

  나? 판타지를 싫어하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이라는 게 솔직한 고백이겠다.) 시큰둥하다.  사흘에 걸쳐 그 확장판 대장정을 감행하는 동안(합이 12시간 정도 되지 않았을까?)  나는 지겨운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건들거렸고, 만족하지 못한 밥상 앞의 가장처럼 군시렁거렸다.  꿈과 희망과 무한한 창의력을 제공하는 판타지는 내게 너무 먼 당신이다.  어린 아들이 엄마, 이 영화 주제가 뭐야, 했을 때 급기야 나는 이렇게 무식한 발언을 하고야 말았다.  몰라, 한마디로 프로도와 샘의 우정이야. 저렇게 배배 꼬아놨네!

  이렇게 쓰려고 했는데 노선 변경이다.  각 편마다 따라붙는 부록 서플먼트를 잠깐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영화는 더 안 봐도 서플먼트는 두고두고 아껴 보게 될 것이다.  아니, 서플먼트를 찬찬히 보고 나면 반지의 제왕에 푹 빠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 말보다 더 하고 싶었던 것은 원작가 톨킨과 영화작가(왠지 '각색'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이 말이 더 맞는  말 같다.)프렌 월시 혹은 피터 잭슨에 대한 막연한 우러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매니아들 입장에서는 영화가 훨씬 위대했겠지만 글에 관심이 있는 나 같은 사람은 톨킨과 영화작가들에 대한 무한하고도 막연한 존경이 치솟는 것이었다. 물론 이 감정은 영화의 방대한 서플먼트 때문이다. 원작가에 대한 자세한 해설과 영화작가들의 인터뷰를 잠깐 보는 동안 그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참고로 반지의 제왕 확장판 삼부작을 알라딘에 검색해보니 거금 사만원 돈이다. 이걸 투자하고서라도 매니아가 되기를 자청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공짜로(설마? 홈시어터 값에 포함되었겠지.) 새로운 경험을 했으니 괜히 공 돈 생긴 기분이다.

  걱정거리 - 원래는 공부용으로 네티즌들이 가장 많이 권하는 '프렌즈'를  샀는데 이것 역시 내 취향은 아니다. 시트콤이나 판타지도 취향이 아니라니, 도대체 뭘하고 살았는지 스스로 안타깝기는 하다.  화면이 너덜해질 때까지 한 백번은 되풀이해서 봐야 귀가 뚫린다는데 한 번만 봐도 시비걸고 싶은 이 교재로 공부가 될까? 차라리 얼마 전에 논술 교재로 활용한 '오만과 편견'이 훨씬 나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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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6-12-04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렌즈 취향 아니라는 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 영어 공부하려고 셋트로 샀는데 대략 난감이었답니다

다크아이즈 2006-12-04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 저같은 분이 또 있군요. 마구 동지의식이... 그래도 진도는 나가야겠지요?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원고 청탁전화였다.  이곳 문화계의 주된 스폰서인 한  대기업이 마련한 문화행사를 관람하고 난 후기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일해야 하는 내 일정이랑 맞지 않았지만 그 일정을 조정해가면서 관람후기를 써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워낙 성실한 분이라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과외로 들어온 수입, 이를테면 원고료나 강연료 같은 것을 연말이면 불우이웃을 위해 기꺼이 내놓곤 하신다.  그 훌륭한 인품을 보고  나도 언젠가는 저리해야지 하고 결심한 적이 있지만, 과외수입은 커녕 수입 자체가 변변한 아르바이트 인생이다보니 한 번도 그 결심을 실행한 적은 없다. 

  이런저런 안부 인사를 주고 받다가 그 선배 왈.  저 번 고료는 꽤 많이 들어왔지? 한다.  서너 달 전에 선배의 부탁으로 묵은 원고를 건넨 적이 있었다. 관례대로라면 십만원의 원고료에서 세금을 떼고 구만 육천 얼마 정도의 고료가 지급될 터였다. 한데, 너무나 무신경했기에 원고를 넘겨주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해서 얼떨결에 '십만원 넘게 넣으셨어요?' 했더니 아니란다. 거금 오십만원이 입금되었단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원고지 십매 분량의 고료로 오십만원을 주는 기업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동시에 그 사실을 아직도 확인하지 않은 무뎌빠진 스스로를 자책했다. 돈을 좋아하는 속물인 내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 정리된 통장을 찾아보았다.  그런 거금이 입금된 흔적은 없다.  조심스럽게 선배에게 얘기했더니 담당자를 연결해주었다.  담당자의 말인즉슨 행정상 작은 실수로 전표처리가 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모르고 지냈던 내 불찰은 아니구나,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담당자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살다보면 업무상 크고 작은 실수를 하는 게 사람인데, 나 때문에 몇 달 전의 일로 문책이나 당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나로서는 확인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거금이 입금된 걸 확인했다면 나는 당연히 그 선배에게  확인 전화를 했을 것이다.  -  원고료가 너무 과한 것 아니냐고.

  어쨌거나 그쪽에서는 다시 절차를 밟아 고료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고료는 선배가 말한 금액이 맞았다.  대기업이 솔선수범해서 문화 전반에 과감하게 투자하자는 취지로 한시적으로 그 꼭지 고료를 대폭 인상했다고 했다. 세금을 떼고 나면 많이 줄어들긴 하지만 그간  다른 어떤 청탁에서도 그리 큰 고료를 보장하지는 않았었다.  원고료 미입금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했다. 해서 고료를 받지 않겠다고  담당자에게 말했더니 그럴 수는 없단다. 이리하여 생각지도 않은 거금이 생겼다. 꼭 금도끼 은도끼 동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은도끼를 선택했더니(거액의 고료는 생각치 않고 원고를 건넨 일) 금도끼, 은도끼 뿐만 아니라 고대광실까지 얻게 된 사내처럼 얼떨떨하기만 하다.

  선배에게 전화를 드렸다.

  "고료를 입금하겠다는데요. 어떻게 해아할지 모르겠어요."

  "당연히 받아야지. (웃으면서) 불우이웃 도우면 되잖아."

  착실하게 살아오신 선배님다운 충고였다.  하지만 그분은 이것까지는 모른다.  나야말로 불우이웃이라는 것을.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집 아저씨 왈. 

  " 뭐 그리 고민하노? 내가 바로 불우이웃이다!" 

  속물근성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 나는 고민한다.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이 거금, 어찌해야 쓰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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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11-29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크아이즈님~ 제 서재에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당.(- 아, 저도 어린이책 소개글 쓰고 원고료로 이만 얼마 정도 받아본 적 있어요~~ 부끄부끄~ ^^* 고료는 정당하게 받으시고 두루두루 좋은 방향-물론 님에게도 좋은 쪽-으로 쓰시어요.)

다크아이즈 2006-12-04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독하시고 부지런한 님 반이라도 닮고 싶어요, 아영엄마님.
 

  어찌하다 보니 알라딘을 알게 됐고, 다른 사람의 리뷰를 읽다보니 개인 '서재'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매력적이지 않은가. 인터넷 공간에 나만의 서재를 가질 수 있다니. 그 사실에 혹해 멋도 모르고 한 두달 꽤 관심을 가졌었다.

  한데 이 서재가 너무 매혹적이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나름대로 해결해야할 과제가 있는데, 이 서재 때문에 신경이 쓰여 제대로 몰입할 수가 없었다. 노동을 좀 하려고 해도 서재에 신경이 쓰여 온전히 올인하기가 힘들었다. 조금 일하다 서재 한 번 보고, 잡념에 휩싸일 때 서재 두 번 보고... 폐인 수준은 아니더라도 시간 잡아먹기에는 그만인 게 이 서재 관리였다.  내게 서재 관리는 뜨거운 감자였다. 

  해서 큰 맘 먹고 프로젝트 수행할 때까지는 알라딘을 들락거리지 않기로 작정했다.  한데 반만 지킨 약속이 되어버렸다.  책 주문할 때 빼고 알라딘을 하지 않은 것은 맞지만, 결과적으로 프로젝트는 완벽한 실패였다. 지금에야 깨닫는다. 알라디너가 된다고 일을 못하는 게 아니라, 의지가 박약하면 그 무엇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결론?

   빗장을 걸면서까지 뭔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이백프로 실패한다. 순리대로, 물 흐르는 대로 살다보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게 인생사다. 이제 편하게 알다딘도 왔다갔다 하고, 타인의 멋진 생각을 훔쳐보는 일상이 되었으면 한다.  단, 아직도 두렵다. 너무 알라디너의 길에 빠지거나 집착하게 될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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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11-29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가요, 은근히 중독성이 있답니다. 근데 그것도 단계를 거쳐가면서 편안해지더라구요. 좋은 글도 많이 읽을 수 있고, 나와 다르지 않은 자잘한 이웃들의 일상을 접하는 것도 좋구요.. 하실 일은 칼 같이 잘 해내시고, 서재 마실도 편안한 마음으로 다니며 즐기시고 그러세요~ ^^

파란여우 2006-11-29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하셨어요. 문이 잠겨 있는 동안 쓸쓸한 여우털을 한 올씩 뽑아 놓고 갔답니다.

다크아이즈 2006-12-04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은근한 중독성 맞아요. 조절 잘 해야 할텐데 싶어요.
파란여우님, 그래서 빗장 걸린 날만큼의 여우털이 제 서재에 날렸었군요.^^*

크리스탈 2008-06-1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콤 몰래 엿보고 갑니다~
 


                                                                                                          아이 간자키             


  나는 무엇이든지 잘 버린다. 필요치 않은 물건을 방치할 바에야 새 주인을 만나게 해주는 게 낫다는 것이 버리는 자로서의 변명이다. 떠난 물건은 새 주인에게 사랑받아 좋고, 보내는 자는 홀가분해서 좋고, 유행 지난 옷을 재활용 박스에 넣고 나면 속이 후련해진다. 창고에서 자리만 차지하던 오래된 그릇을 처분했을 때는 그릇 무게만큼이나 마음이 가벼워진다.  베란다 한 쪽에 방치해둔 접이용 식탁의자를 가지겠다는 이웃에게는 고마운 나머지 덤으로 화분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이상한 것은 버리고, 주어도 집안에는 금세 버릴 물건이 쌓인다는 것이다. 살림의 노하우가 생겨 웬만한 것은 사지 않는데도 버릴 물건은 복병처럼 숨었다가 불쑥 튀어나온다.  살아 있다는 증거로 버리고 ,쌓고, 다시 버리는 일을 반복하도록 그분(?)은 인간에게 형벌을 내렸나보다.  이렇게 버리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물 건 몇 개가 있기는 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백과사전과 엘피 디스크이다.

 

  구입한 지 십 오년 정도 되는 백과사전은 활용도 면에서는 빵점이다.  그 당시 받은 상금 백만원으로  별 고민 없이 샀건만, 몇 년 새 인터넷 환경이 종이 백과사전을 이렇게 무참하게 밀어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 늘어만 가는 책들 사이에 부피만 크고 유행지난 액세서리처럼 끼어있는 백과사전이 부담스러워, 아이들 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겠다고 했다. 매우 고마워하면서 담당자가 한 말은 직접 배달까지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한 때는 내 분신같았던 책인데 왠지 푸대접받는 기분이라 포기하고 말았다.

 

  언젠가는 이 책도 새 주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책을 진정으로 소우하는 방법은 벗들에게 주어 닳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말을 실천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 유련이 책에다 도장을 찍어 자신의 소유임을 알리려는 것을 보고 이런 멋진 충고를 한 것이 내 맘에 쏙 든다. 책의 효용은 읽힌 다는 것.  따라서 소중한 책 한 권을 마르고 닳을 때까지 새 주인을 만나게 해주는 것은 아주 권장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엘피 디스크. 취미 삼아 뭐 버릴 게 없나 하고 온 집안을 뒤지는데 엘피판들이 쏟아진다. 표지 자켓 안에서 크고, 둥글고, 검은 둥근 판이 나오자 아들 녀석이 신기해한다. 엄마, 이게  뭐예요?  이건 분명 상식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 차이임에 분명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나는 턴테이블에다 엘피판을 올려 음악을 들었다. 그걸 기억해 낼 리 없는 아이에게 턴테이블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싶은데 버리기 좋아하는 내게 있을리 만무.

 

  몇 년 전, 두 번째 이사를 하면서 멀쩡하던 턴테이블과 카트리지 바늘까지 몽땅 버렸다.  그 와중에도, 선물로 받거나 내 발품을 팔아가며 구한, 내 청춘의 신열이 남아있던 엘피판들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턴테이블이 없어서 제 기능을 못하는 엘피판은 아들녀석에게는  한물 간 골동품처럼 비친 모양이다. 그 레코드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나 모짜르트의 미사곡을 함께  들었다는 것을 녀석은 기억하지 못한다. 씨디나 엠피쓰리 같은 디지틀 음악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시켜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버리는 내 성정 때문에 후회한 적은 없는데 이럴 땐 내가 너무 쉽게 추억을 버리고, 향수를 버리고, 시간을 버리고, 급기야 사람까지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아주 오랜 전, 엘피판이 유행하던 시절, 서울로 유학간 친구에게 엘피판을 선물한 적이 있다. 아이 간자키의 로맨틱 플룻이라는 앨범이었다. 그 친구가 답장을 보내왔다. 자취 살림 몇 년에 이사를 다니느라 성가셔 턴테이블을 친척집에 놔뒀단다.  음반이 있어도  들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민구스러움을 이런 위트로 마무리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나.

 

  지금 이 순간 묵은 엘피판들을 들여다보면서 나도 위안을 삼는다. 턴테이블이 없어서 추억에 잠길 수 없다고? 걱정하지 않으련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까. 아이가 엘피판을 가리키며 묻는다. 엄마, 이거 어떻게 들어요?

 

   그거, 듣는 거 아냐. 그냥 눈으로 보는거야.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거든!

   (* 오래된 로맨틱 플루트 앨범 대신 사진은 모짜르트 플룻 협주곡 2번 D단조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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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피아니스트

 나는 잠이 많다. 이제껏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면 '너무 많은 잠' 때문이라고 자가진단을 내릴 정도로.   그래도 가끔씩 새벽녘이면 선잠 때문에 뒤척일 때가 있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기에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어둠 속, 눈 멀뚱거리며 천장의 야광별 찾기 게임을 하는 것도 머쓱한 시간.  그럴 때 다시 잠들기용 수면제로 활용하는 것이 영화채널이다. 펼쳐지는 영상이 내 취향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대개 삼십분 정도가 지나면 다시 깊은 잠에 빠지게 되니 이보다 더 좋은 수면제가 어디 있겠는가.

  프랑스 영화 <라 피아니스트>도 처음엔 수면용이었다. 홀로코스트를 고발하는 헐리웃 영화 '피아니스트'와 제목은 같지만 전혀 별개의 영화이다. 강렬하고 충격적인 영상은 새벽 수면제로 활용하려 했던 내 의도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원하지 않아도 절로 주인공 에리카에게 빨려들고 만다.


   

 

 

 

 

겉으로 드러나는 에리카는 건조하고 냉정한 피아노 선생이다. 하지만 숨겨진 그녀의 욕망은 변태적이고, 대담하며 자기파괴적이기까지 하다. 뭇 남성들의 시선에 무심한듯한 그녀 내면은 정작 욕망으로 끓어넘친다. 성인 영화관을 전전하는 포르노 광에다가, 연인들의 카섹스를 훔쳐보는 관음증이 있으며, 자신의 신체를 칼로 자해하는 파괴적 성향까지 있다.

  그녀의 이러한 뒤틀린 성적 판타지는 평범하지 않은 모녀 관계에서 출발한다. 엄마는 이미 중년에 접어든 딸 에리카의 삶을 쥐락펴락한다.  딸의 일상을 체크하고, 옷차림을 간섭하며, 심지어 같은 침대를 사용하기를 강요한다. 엄마에게 딸은 신이자 악마이다. 에리카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엄마표 애정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그녀에게 집은 엄마라는 스토커와 동거해야 하는 성가시고 불편한 암흑일 뿐이다.

                                      

  불편부당한 것을 감내해야 하는 에리카에게 출구는 있는가. 젊고, 잘 생기고, 진중한 제자 클래머의 등장으로 관객은 한시름 놓는다. 그래, 바로 저거야. 정석대로라면 클래머의 역할은 에리카의 상처와 혼돈을 감싸 안는 것이어야 하리라. 하지만 영화는 보기좋게 순진한 관객의 희망을 묵살한다. 평범한 연인들의 낭만적인 행보를 기대한 클래머에게 자기 파괴적인 고립자인 에리카는 너무 벅찬 상대이다. 외적으로 언제나 정돈되어 있고, 위압적이며, 고고한 그녀에게 클래머는 서서히 지쳐간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해석하는 에리카를 감당하기엔 클래머의 영혼은 너무 젊고 설익었다.

  '사슬에 묶으라구, 내 몸을 쓰러뜨려. 때리고 밟고, 채찍질하라구!' 억압된 그녀 내면의 반어법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연인 클래머는 혐오감과 모멸감에 치를 떤다. 그녀에게 벗어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새디스트가 된다. 슬픔으로 어룽진 폭행을 하며 클래머는 절규한다. '이게 바로 네가 원했던 거야?'  클래머는 결코 그녀만의 존재 방식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밝음 보다는 어두움, 친근 보다는 혐오, 편함 보다는 불편함이 앞서는 이 영화에 '잠'을 헌납하고서라도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노벨문학상을 탄 소설을 영화한 것이라서?   영화로 나온 것이 노벨문학상을 탄 것보다는 훨씬 먼저니까 그런 선입견과는 무관하다. 아마 에리카로 상징되는, 사회적 여성성의 욕망이 어떻게 이지러지고,  왜곡되고, 분출될 수밖에 없는가를 명배우 이자벨 위뻬르가 잘 대변해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실망스럽게도 에리카의 종착역은 새롭지도 충격적이지도 않다. 엄마와 클래머와 세상과 불화하던 에리카가 선택한 것은 소극적 자해라는 파국이었다. 억압의 본질인 세상을 향해 칼을 들이대도 시원찮을 판에 연약한 자신의 어깨를 선택한 것이다. 물살 세던 그녀 내면의 욕망과는 한참 거리가 먼 선택이다.

  연주회를 마친 뒤 칼로 찌른 어깨를 감싸 쥐고, 에리카는 꼿꼿하게 거리를 나선다. 어디로? 그렇게도 벗어나고자 했던 엄마가 살고 있는 '집'으로!   그 암울하고 심연 같은 집의 구멍으로 들어가는 에리카를 그리면서 미카엘 하네케 감독과 작가 옐리네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까? 어찌할 수 없고, 모호하고 실망스러운 선택이야말로 결핍된 한살이를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라고.  라 피아니스트를 떠올리는 새벽이면 통증처럼 따라붙는 불면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

 


        *  사진 위에서 차례로  배우 이자벨 위뻬르,  책 피아노 치는 여자,  라 피아니스트 포스터,  감독 미카엘 하네케,  원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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