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거두기




  엄마집 근처에 갈 일이 있었다. 볼일이 끝나서야 혼자 계실 엄마 생각이 났다. 바쁘게 뛰어다닌 탓인지 목이 칼칼해지고 기침마저 돋는다. 당신 좋아하는 회를 사드리고 엄마집에서 한 숨 쉬고 가야지 하는 맘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노구를 이끌고 멀리야 가셨겠나 싶어 일단은 들렀다.

  혼자 사는 노인의 살림살이는 옹색하기 그지없다. 원체 바지런하고 정갈한 여인이었지만 늙으니 별 수 없구나 싶다. 다섯 남매 바지주름이 난초 뒷결처럼 날렵했다는 젊은 날의 엄마 자화자찬성 회고는 옛말이 되어버렸다. 씻어 엎어놓은 커피잔 바닥엔 물때가 끼어 있고, 금 간 밥공기엔 더께 낀 시간의 흔적이 선명하다. 다리에 힘 빠지고, 손놀림이 굼떠진데다 눈마저 침침한 당신에게 예전의 살림솜씨를 기대할 수는 없으리라. 

  엄마의 세간이 두서없이 보이는 건 연세 탓도 있지만 도무지 뭘 버리지 못하는 성정 때문이기도 하다. 음식물쓰레기 줄이는 것을 국민 된 최대의 도리로 알고 있는 선량한 엄마는 콩나물대가리 하나, 밥찌끼 한 알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 당신에게 뭔가를 버린다는 건, 악마의 유혹에 빠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몇 십 년은 넘었을 재봉틀부터 앞코가 다 헤진 효도화까지 내 눈엔 버려야 할 것투성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병적인 버리기의 명수 아니던가. 갑자기 신성한 소제욕이 발동한다. 저 남루하고 허섭스레기 같은 세간들을 표 안 나게 치워버려야지. 엄마의 쾌적한 주거 환경을 위해 친정을 다녀가는 식구들 그 누구라도 그런 적이 있다. 귀 떨어진 냄비, 효용성을 다한 겨울 내복, 굽 뭉그러진 구두 등 그동안 엄마 몰래 우리 형제들이 처리한(?) 물건들은 종류도 다양했다. 버리다 들킨 적도 있는데 그 땐 무슨 보물을 없애기라도 한 것처럼 분해하신다. 그 물건들을 원상 복귀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신 들키지만 않으면 당신은 그 물건들이 없어진 지도 잘 모른다. 그걸로 보아 엄마에게 그 잡동사니들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저 어려운 한 시절을 보낸 어른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습관적으로 쉽게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시간은 가도 엄마는 오지 않는다. 피곤 끼로 기침이 잦아졌지만 버리기의 달인은 신이 났다. 낡은 비로드 저고리랑 구멍이 숭숭 난 여름 내의, 유행지난 털 슬리퍼까지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추억조차 되지 못할 남루의 표식들을 하나 가득 채우니 배고픈 것도 잊겠다. 엄마 몰래 내 차에다 싣고 올 참이었다. 그 때 엄마가 돌아왔다. 봉투를 치울 새도 없이 들켜버렸다. 아직 멀쩡한 것들을 왜 버리느냐고 정색을 하신다. 자식들이 사다 나른 새 찻잔, 새 내의, 새 신발은 아껴서 뭐하느냐고 당신 앞에서 말해봤자 통할 리 없다. 체념하고 쓰레기봉투의 짐들을 되부린다. 좀 슨 벨벳 저고리도, 낡은 런닝셔츠도, 찌그러진 털신발도 엄마 품을 파고드는 굶은 새처럼 제 자리로 돌아간다.

  멋쩍어진 나는 찬바람 도는데 어딜 그리 다니시냐고 심통을 내본다. 배낭에서 은행알 봉지가 나온다. 그제야 기관지가 약한 딸 주려고 늦가을마다 은행을 준비하는 엄마가 떠오른다. 오늘도 은행을 가져가라는 친구를 만나고 오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목감기 중이라 기침을 숨기려 해도 엄마 앞에서 더욱 잦아질 뿐이다. 내 몸을 나보다 더 알고 계시는 노구의 엄마. 원래 자식은 버리고 부모는 거두는 것일까. 하잘 것 없는 자식이란 짐을 함부로 내치지 않고 보물인양 그러안는 일, 그게 엄마란 이름의 업보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된 마당에, 깨지고 금가고 먼지 많은 내 영혼의 남루마저 잠시나마 엄마 앞에 부려놓기로 한다.  초췌를 다 부리기도 전에 엄마의 일갈이 내 기침소리를 넘어선다. -엄마 걱정하지 말고 니 몸이나 건사해라. 지발 내년에는 은행 안 구해도 되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간만에 서재에 들렀다.  

이쁜  작가와 경주에서 만나 사진을 죽도록 찍었는데 

내 평생에 기꺼이 모델이 되주기는 첨이었다, 라고 

쓰려는데 글쎄,

내 서재 <마이리뷰>란 본문글이 사라졌다!!!  

유명 알라디너가 아니니, 해킹 당했을리는 없고 

그냥 검은 바탕 설정이라 안 보이는 거겠지. 

좌우당간 덧글만 남아 더덩실 출렁이누나. 

컴맹인 나는 그저 기다려 보기로 한다. 

내일, 아니 담 번 들를 때까지는 살아나겠지. 

바탕화면을 알라딘에서 설정해준 대로 내비둬서 그런가? 

이래저래 컴맹은 배짱을 가장한 체념, 포기로 산다. 

실제로는 게을러빠진 게지... 

빨리 서재 글을 살리도, 알라딘아~  

 

 

라고, 쓰고 저장하고 돌아서니 우라질~ 

화면이 바뀌면서 죽은 글이 살아났도다.  

자정 넘어가나 보다. 하여간 검은 바탕은 싫단다, 알라딘아.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꼼미 2010-11-26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어요.^^; 컴에서 문제가 발생 했을 때 대처 방안이 저와 무척 비슷하신듯 하여서 말이죠. '이쁜 작가와 사진을 죽도록 찍은 시간'이라... 참 특별한 시간이었을 것 같은 느낌이네요.
 

별들이 늪으로 흩어질 때

                                   




  한 순간이었다. 커브 길을 지날 때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마주 오던 버스의 속도감에 짓눌려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에 발이 올라갔다. 자갈 깔린 갓길에 닿은 바퀴는 순식간에 튕겨 올랐다. 제어불능 상태가 된 핸들은 갈지자로 휘청거렸다. 맞은편에서 통근 버스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다음엔 트럭 차례였다. 노련한 트럭 운전수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상태에서 급히 내 차를 피해갔다. 속도를 줄였다면 도리어 충돌이 일어났을 것이다. 승용차 한 대가 뒤이어 지날 때 나는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최종적으로 차가 닿은 곳은 빗물 가득한 하수통로였다. 외곽길이라 정비되지 않은 늪 같은 하수도로 차가 서서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전날 비가 와 노면은 미끄러웠고, 하수량은 불어나 있었다. 구십도 각도로 기울어진 운전석으로 물이 금세 들어찼다. 살려주세요. 분명히 소리쳤지만 차 유리에 부딪힌 절규는 가슴팍으로 되돌아와 꽂혔다. 밖으로 퍼지지 않는 말의 무용함이 칼날처럼 휘감겼다.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다. 휴대전화기가 들어 있는 핸드백에 손을 뻗쳤지만 허사였다. 충격으로 꽉 조인 안전벨트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물이 점점 차올랐다. 이렇게 죽는구나, 이것이 죽음의 실체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또렷해졌다. 차 오디오 데크에서는 영어 이솝우화가 불라불라 흘러나왔다. 무심결에 듣던 유쾌한 테이프가 장송곡처럼 들렸다. 손만 닿을 수 있다면 구조 전화를 거는 것보다 저 테이프의 스톱 버튼을 먼저 누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일 먼저 아들 얼굴이 떠올랐다.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아들의 뱃살마저 살갑게 다가왔다. 아들아, 미안하다. 네 살도 못 뺐는데 이렇게 엄마가 힘들어하는구나. 아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자괴감이 빠르게 스쳤다. 예쁘지만 공부에 전념하지 않는 딸내미 얼굴도 어른거렸다. 딸아, 공부 안 한다고 눈 내리깔고 얼음장 분위기 만들던 엄마를 용서해라. 무뚝뚝한 남편도 생각났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것만 빼면 언제나 내 편인 남편 옆에서 마음껏 웃어주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제 맘껏 쓰지 못하고 언제나 용돈을 구걸하던 남편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고 싶었다.

 

  겨우 발바닥까지 물이 찼을 뿐인데 심리적으로는 목울대까지 압박감을 느꼈다. 왜 글을 쓰겠다고 자신을 괴롭혔는지 가슴이 아파왔다. 차라리 아이들에게 맛난 것 해주고, 남편 출근길에 마음껏 배웅해주는 다사로운 엄마나 마누라가 될 것을. 재능도 없는데 실한 엉덩이만 믿고 자판기 앞에서 끙끙댔다니. 비록 눈썰미는 얕으나 날선 통찰이 있으니 언젠가는 글이 되지 않을까 고군분투해온 자신이 가엾기만 했다. 밑줄 쳐가며 두 번째 읽던 김훈의 남한산성 분홍빛 표지도 떠올랐다. 소설가의 문장으로만 보기 아까운 김훈. 어느 평론가처럼 에세이스트나 문장가라 불리는 게 나을 얄미운 작가. 그에 대한 문체 분석도 덜 끝났는데 왜 나는 늪으로 가야만 하나? 내 볼품없는 문장에 회의하고, 작가가 될 마음조차 없는 세상의 완벽한 글쟁이들에게 느껴야 할 질투나 절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반짝이기를 기다리는 별들 - 아이들, 남편, 좋은 주변인 그리고 아쉽기만 한 글에 대한 내 열정. 아직 제대로 불러보지도 못했는데 왜 별들은 늪으로 가야 하나? 나를 조롱하듯 이솝우화 테이프는 잘도 돌아갔다. 양치기 소년을 지나 서울쥐 시골쥐를 거쳐 떡갈나무와 갈대에 이르기까지 윙윙대는 이국의 목소리는 내 욕망의 부질없음을 끝없이 질타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나를 구하러 와서 저 테이프 소리를 듣는다면? 너무 부끄러웠다. 하지만 꼼짝할 수 없다. 간신히 발로 낚아챈 가방에서 휴대 전화기를 찾았다. 위급할 때 일일이를 누르는 거지. 어처구니없이 허튼 버튼을 눌러대고 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정 여럿이 내 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물이 안 깊어요. 이상하리만치 바깥 소리가 안으로 잘 들렸다. 구급대원들이 오기도 전에 출근하던 장정들이 수렁에서 차를 들어 올렸다. 창을 열고 물기 묻은 옷깃을 여미는데 창피했다. 아이 슈드 비 어쉐임드 옵 마이셀프! 부끄러운 게 많은 내가 기도처럼 외워둔 한마디가 절로 나왔다. 다친 데는 없어요? 누군가 물었다. 왜 다치지 않았겠어요. 마음을 다친 걸요. 내 무사함을 알리려 고개를 저으면서 나는 속울음을 삼켰다.    

 

  가끔, 커브 길에서 흩어진 별들은 늪으로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별이 소중한 거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10-05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실점




  “김장 마늘 찌났다.(찌어 놓았다). 필요하면 가져가고 안 그라만 이웃들 나나(나줘) 주께.”  



  엄마의 전화 목소리. 김장철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웬 김장 타령인가 싶지만 나는 엄마의 그 맘을 안다. 차례 지낸다는 핑계로 추석에 찾아 뵙지도 못한 딸년에게 엄마는 그렇게 미끼를 툭 던져 보는 것이다. 엄마 식 표현대로 살림에 ‘게실러빠진’ 나는 그 실용적인 미끼를 덥석 물 수밖에.  



  “알았어요, 엄마. 박서방 하고 오후에 잠깐 들를게요. 마늘 딴 사람 주지마.”  



  엄마식 자식 사랑법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 나는 짐짓 마늘이 아쉬운 척한다. 당신 손수 사서 까고 찧은 마늘이 엄마집 냉동실에서 기다린다는 사실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팔순 엄마에겐 아직도 손 가야할 막내딸년이 있는 것이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효녀는 못 된다. 아쉬운 게 없으니 먼저 전화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궁금한 엄마가 안부를 물어오면 그제야 내가 무심했구나, 하고 반성을 하는 정도이다. 오죽하면 엄마는 ‘니한테서는 전화 오는 기 더 걱정된다. 무슨 안 좋은 일 있나 싶어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하는 말은 니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엄마에게 가는, 멀지도 않은 그 길을 선심 쓰듯 달려간다. ‘과부 할매들의 사랑방’이라고 내가 부르는 엄마집 마당에 들어서자 윷놀이를 즐기던 할머니들이 우르르 자리를 피하신다. 주인집 사위가 들어서니 배려한다고 괜히 어려워들 하는 것이다.  



  친정집엔 엄마처럼 남편을 먼저 보낸 할머니들이 하루걸러 진을 친다. 주로 십 원짜리 윷놀이를 하는데 할머니들만의 노하우로 만든 싸리나무 윷가락은 좀 과장하자면 던졌다 하면 모나 윷이다. 엄마의 성당 동료들이기도 한 할머니들은 연령대도 다양한데 질리지도 않는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엄마의 사랑방을 찾는다.  



  이웃을 맞이하는 것도 피곤할 때가 있단다. 그때 엄마는 이불집으로 피정하듯 떠난다.  그곳은 엄마만의 또 다른 사랑방이다. 자투리 천으로 베개와 쿠션과 조각보를 만들며 노동의 신성함을 즐기신다. 폐품 활용한 엄마만의 작품 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오르면 원앙금침을 얻은 듯 충만해진단다. 살뜰한 엄마의 작품들은 자식들이나 이웃들에게 좋은 선물이 된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병원 입원은커녕 몸져누운 적조차 없었다. 언제나 강인했다. 약한 몫은 차라리 아버지 차지였다. 지병을 달고 살았던 아버지를 대신하자면 엄마는 더 강해지고 더 자식들을 챙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호미도 날이지만 낫과 같이 잘 들 까닭이 없고, 아버지도 어버이시지만 어머니 같이 사랑하실 이 없다’는 고려가요 사모곡은 딱 우리엄마를 두고 한 노래였다.   


  그런 엄마도 이제 몰라보게 쇠약해졌다. 그건 이번에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엄마와 집 앞 방죽에 올랐다. 출렁다리를 건너 건너편 유원지까지 가서 저녁을 먹고 올 참이었다. 사위와 손자의 호위를 받으며 딸과 손잡고 걷는 것에 엄마는 꽤 만족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숨이 차고 무릎이 시큰거린다고 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언제까지나 다부지고 강한 엄마일줄 알았는데 세월 이기는 장사 없었던 것이다. 팔순 노구의 엄마를 철없게도 나는 여전히 건강한 엄마, 강한 엄마로 생각했던 것이다.  



  유원지 나들이를 포기하는 대신 가까이 있는 중국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근사한 식당에서 그럴듯한 요리를 앞에 두고도 엄마는 쉬이 젓가락을 입에 대지 못하신다. 물컹한 해물을 사위와 손자와 딸년 접시에 옮기느라 바쁘다. 엄마에게 가족과 함께 하는 식사는 ‘밥’ 이상의 그 무엇임이 전해지는 순간이다. 무심하고 딱딱하기만 한 내 속내도 뭔가 물컹한 것으로 차오른다.   
 


   엄마의 마늘 보따리를 안고 귀갓길에 오른다. 사위가 마련한 용돈을 엄마는 손에 잡히는 만큼 뚝 떼서 ‘뚱가 과자값 해라’ 하시며 차안으로 던지신다. 그리곤 골목으로 물러나 꼼짝 않고 서 계신다. 딸년 탄 차가 멀어지도록 하염없이 그대로. 그 모습 돌아보기 힘들어 나는 창을 열고 냅다 소리를 지른다.  



  “엄마, 빨리 들어가. 그래야 내 맘이 편하다고!” 
 


  대답 대신 괜찮다는 엄마의 손사래만 차창 넘어 아롱진다. 매운 생을 돌아온 엄마 같은 마늘 냄새가 차안에 진동한다. 맵싸한 눈물이 자꾸 맺힌다. 어스름 속, 갈바람에 일렁이는 대추나무 아래서 엄마는 그렇게 한 점 소실점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10-10-03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점 멀어져 소실점으로 남는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네요.
엄마의 도움이 여전히 필요한 자녀를 보면서 당신들은 보람과 행복을 느끼시겠죠...
우리 친정엄마도 작년 다르고 올 다르고...이제 늙고 기운이 쇠하여지는 모습 보는 거 힘들어요.ㅜㅜ

다크아이즈 2010-10-05 21:15   좋아요 0 | URL
여전히 잘 계시는 님... 힘이 되는 바지런한 님.. 제 게으름을 이해해줄 것만 같은 순오기님.

글샘 2010-10-03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내 맘 편한대로... 그렇게 살고 있죠.

다크아이즈 2010-10-05 21:17   좋아요 0 | URL
글샘님은 효자시지요? 너무 효자라도 사모님이 곤란하겠지만... ㅎㅎ

꼼미 2010-10-15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셔도 그립고 안계셔도 그리운게 엄마인 것 같죠. 그래도 건강히 곁에 계신 어머니가 있으신 님이 부러워요...^^

다크아이즈 2010-10-15 19:37   좋아요 0 | URL
앗, 꼼미님 언제 들어도 정겨운 이름. 미시건에도 가을이 왔나요?

꼼미 2010-10-20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미시건에도 가을이 왔습니다. 주말에 짧은 여행 다녀왔는데 제 개인 블로그에 사진을 몇장 올려 놓았죠. 팜므님도 특별한 가을 만드시길...
 

 

책 맨 앞에 쓰는 짧은, 작가가 인용한 문구를 뭐라 하나? 권두문? 

타인의 고통, 에서 수잔 손태그는    

보들레르  --- "......정복당한 자들을!" 이란 문구와

테니슨의 말을 인용했다. - "체험이라는 추잡한 보모......" 

체험이라는 추잡한 보모, 매혹적인 문구다.   

친절하게도 원문까지 소개해 놓았다. - 돼지라굽쇼?...... 소인도 잘 나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체험이라는 추잡한 보모가 저를 더럽혔을 뿐이죠. 

체험이라는 추잡한 보모야말로 인간 고통의 근원이 아닐까?  

손태그는 어떤 생각으로 이 문구를 택했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꼼미 2010-05-19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붙잡고 싶은 것은 반대로 '생의 모든 고통은 생의 모든 아름다움이다. 체험이라는 모든 추잡한 보모까지도'네요. 이 모든 모순과 더러움과 고통 속에서도 인간 생의 아름다움을 붙들고 싶은 건 내가 너무 약하고 못나서인지... 잘 지내시지요?

다크아이즈 2010-07-2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운 꼼미님... 제 무심함을, 게으름을 용서하세요. 여차저차하다는 핑계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