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 없이 살 수 없는 인간 특성 상 참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서로 챙기면서 믿음을 유지하는 관계도 있고, 가끔 만나 담소를 나누는 경우도 있고,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얼굴도 있고, 만나지 않아도 좋았을 우연한 만남도 있다.

 

 

  오전 일정을 끝내고 콧노래를 부르며 차에 올랐다. 힘든 일을 마친 뒤라, 친구와 점심 겸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 생각에 기분이 최고조였다. 그것도 잠시, 교차로에 진입하는 순간, 시커먼 물체가 허공에 날리는가 싶더니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차를 멈췄다. 바로 옆 차끼리 접촉사고가 났는데 떨어져 나온 범퍼가 공중제비를 하면서 내 차 옆구리를 찍었던 것이다.

 

 

  날씨도 추운데 점심 약속마저 깨지게 됐다. 하지만 별 소소한 일이 생기는 게 인간사인지라 수습될 때까지 덤덤하게 기다리기로 한다. 한데 사고 당사자 두 사람의 대처 방식이 극명하게 달랐다. 그 재미난 사실을 관찰하느라 추워도 추운 줄 모르고, 배고파도 배고픈 줄 모르겠다. 한 사람은 조심스레 대화를 시도하고 다른 한 사람은 모든 게 귀찮다는 태도다. 뭔가 어색한 분위기가 싫은지 한쪽에서 말을 건네자, 손사래를 치며 단박에 말을 잘라 버린다. 보험사 담당자들이 오면 그들끼리 알아서 하면 된단다. 오로지 어디 더 흠집난데 없나하고 자신의 차에만 눈길을 준다. 맞는 말이긴 하다. 당사자들끼리 이러쿵저러쿵 해봤자 입만 아프고 성과는 없을 테니.

 

 

  당사자끼리 말할 필요 없다는 택시 기사는 이런 일을 대처하는 확실한 매뉴얼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자꾸만 대화를 시도하려는 한쪽은 그 상황에서 누구나 하게 되는 일반적인 대처 방식이었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 격인 내게도 전자는 그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후자는 내게 필요 이상으로 미안함을 표시한다. 남의 시간 뺏어서 어쩌나, 오늘 하루 일진이 안 좋다 생각해라 등 나름 인간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아무리 봐도 잘못은 ‘입 다물어’파가 더 큰 것 같은데, 배려는 ‘수다쟁이’ 파가 앞섰다.

 

 

  왠지 씁쓸했다.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배짱 좋게 뻗대는 노회함보다는 뭔가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노력하는 진솔함이 훨씬 보기 좋았다. 기계적이고 합리적인 사회 시스템을 따른다고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간적인 배려도 없고, 역지사지를 모른다면 그게 잘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흠집난 제 차를 살피는 것보다 맘 불편할 상대를 먼저 헤아리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꽃보다도 아름다운 게 사람이라 했거늘 차보다도 못한 게 사람이라면 어디 살 맛 나겠나.

 

 

 

 

  각설하고, 점심 약속이 한 시간이나 늦었다. 이미 주문해버려 물릴 수도 없는 음식은 뚜껑이 덮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일정이 촉박해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었던 친구는 먼저 밥을 먹은 상태에서 걱정 반 초조함 반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춥고 배고픈 나머지 나는 이렇게 소리 질렀다. - 자동차보다는 꽃, 꽃보다는 사람이다. 하지만 춥고 배고플 땐 사람보단 역시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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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15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요. 차보다도 꽃보다도 사람이죠!! 차 운전 하다보면 별별일을 맞닥뜨리게 되는 거 같아요. 조심하거나 예방하기도 어려운,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경우요.
느와르님 오후는 무탈히 잘 지내고 계시겠죠. ^^
청명한 초겨울 11월의 한허리에 있네요 오늘. ~~

다크아이즈 2012-11-15 22:10   좋아요 0 | URL
저 아무래도 후유증인가 봐요. 오늘 모 고등학교 특강 있었는데,
자료를 다른 것 갖고 가서 넘 당황했어요. 임기응변 대처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어제 범퍼 날아온 충격과 기계적 반응을 보이던 기사 아저씨 때문에
쇼크 먹은 게 틀림 없어요.

역시 프레이야님 위로가 필요한 밤이예요.
님도 감기 조심, 차 조심 하세요.

2012-11-15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8 0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8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2-11-16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요2, 입니다.
"자동차보다는 꽃, 꽃보다는 사람이다. 하지만 춥고 배고플 땐 사람보단 역시 밥이다!!"
- 이에 동의합니다요.^^

"흠집난 제 차를 살피는 것보다 맘 불편할 상대를 먼저 헤아리는 게"
- 이 말씀이 (당연한데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그만큼 각박하게 살고 있다는 얘기 같아요.


다크아이즈 2012-11-18 02:22   좋아요 0 | URL
페크님 글치요?
인간에 대한 연민 없이 살 수도 있는데 그건 인간적인 게 아니잖아요.
근데 교통 사고 하도 많이 겪는 택시 기사 같은 경우엔 저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페크님 춥고 배고플 땐 역시 밥 맞지요? ㅋ

라로 2012-11-17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요3 로 시작해야 할듯,,ㅎㅎ

근데 많이 놀라셨겠다. 떨어져 나온 범퍼가 날아온거에요???님의 차에???와~~~그만하기 천만 다행이라 해야할까요????ㅠㅠ

근데 님 글 잘쓰시는구나!!!!

다크아이즈 2012-11-18 02:25   좋아요 0 | URL
나비님, 날아온 범퍼, 유리에 안 맞고 그나마 차 옆구리 맞은 게 다행이지요?
덕분에 분수에 맞지 않게 요 며칠 보험회사에서 나온 대체차량,빵빵한 것 타고 댕깁니다.크~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할 순 없다. 거꾸로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원하는 대로 사랑하고 바라는 만큼 사랑받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종교는 왜 필요하고 철학은 왜 생겨났겠는가. 심술 많은 창조자는 태초에 인간을 만들 때 그 형상을 빌려주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인품까지 내어주지는 않았다. 불완전한 인간을 만들어야 자신의 존재 가치가 증명되니 그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갈등하고 번민하는 건 생래적 인간 운명이다. 간사하고, 변덕스럽고, 던적스러울수록 신이 관장하기엔 좋은 인간형이다. 완전무결한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신은 바라지 않을 것이기에.

 

 

 

 

 

 

 

 

 

 

 

 

 

 

 

이처럼 태초부터 예견된 인간 운명의 불완전성을 이해한다면 사람 사이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그야말로 ‘인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이니 그럴 수 있다는 말은 사람은 신과 달리 허술하고, 따라서 실수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인간적’으로 접근하는 관계의 이해 방식이다.

 

신이 아닌 ‘인간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나름 노력한다. 갈등을 줄일 수 있는 나만의 몇 가지 원칙을 훈련하고 있는 중이다. 그 방법이 옳은지 그른지는 관심이 없다. 다면 살면서 나름 터득한 그 원칙들을 점진적으로 연마하고 실천하고 싶다. 언제나 실천이 어렵긴 하지만.

 

우선, 논쟁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억지로 소통하려고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다. 논쟁으로 해결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한두 번 시도해보고 소통이 안 된다 싶으면 포기하는 게 현명하다. 상대를 설득하려 해서도, 내가 양보해서도 안 되는 불통의 상황이 오면 그냥 놓아 버리는 게 최선의 평화다.

 

둘째, 어떤 상황에서 양자택일할 경우 내가 손해나는 쪽을 택한다. 상대가 이익을 가져갔다고 결코 그 상대가 이긴 게 아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건 시간이 조그만 지나면 알게 된다.

셋째, 리액션이나 피드백은 필수다.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최대한 공감을 한다. 반대로 내 쪽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렇게 하면 될까, 하고 상대의 진솔한 생각을 요청한다. 모든 타인은 나보다는 객관적이다.

 

넷째, 혼자 결정하지 않는다. 특히, 어떤 상황에서 리더를 맡아야 할 경우, 일은 무조건 타인에게 맡겨라. 리더는 일을 잘 하는 자가 아니라 멍석을 잘 까는 자여야 한다. 신명나게 일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배려하고, 의논하고, 믿어주는 게 리더의 역할이다.

 

다섯째, 인정하고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 시샘과 부러움 없는 사람이 있으랴. 하지만 타인의 장점을 높이 사고 인정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에 대해 절로 존경심이 인다. 어느 순간 그 장점을 따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몇 가지 사실만 맘에 새겨도 사람 사이에서 오는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아직 만족할만한 실천 단계는 아니지만 노력 중이다. 가끔 인간사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 다섯 가지 실천 사항 중 어느 하나가 삐걱댔기 때문이란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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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14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살기 아니고 잘지내기였네요. 그거나 그거나죠. ^^ 잘 지내요 우리♥

다크아이즈 2012-11-14 22:39   좋아요 0 | URL
넹 프레이야님, 잘 지내요 우리♥
따뜻하고 다사로운 님...
많이 의지할게요. 아프지 마세요, 멀리 가지 마세요...

라로 2012-11-14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즐찾 추가했어요!!헤헤~~
위에 프님이 제 글에 자주 다시는 '잘 지내요 우리'를 보니까 갑자기 훈훈해요!!^^
팜님~~잘 지내요 우리♥

다크아이즈 2012-11-14 22:43   좋아요 0 | URL
우리 프레이야님이 프님으로 통한다는 걸 나비님이 깨쳐주시는 군요.
나비님도 프님 더불어, 잘 지내요 우리♥
감히 나비님께 즐찾 클릭을 하게 하는 영광을 누리다니...
오늘 저는 밥 안 먹어도 만삭 같은 배 유지하게 됐네요~~

프레이야 2012-11-16 00:16   좋아요 0 | URL
아핫~ 팔랑나비님^^
저의 "잘 지내요"는 "잘 살고 있다가 만나자"는 뜻의
'잘 지내요, 우리'였어요. ㅎㅎ
그치만 여기선 그야말로 "잘 지내요, 우리!" 이 말도 유효해요.
나여사, 팜여사, 프야~~ 우리 모두*^^* 굿나잇~~
 

 

   ‘책과 창녀는 무척 젊게 만들어준다.’ 발터 벤야민이 한 말이다. 그의 사유집『일방통행로』의 「13 번지」소제목은 책과 창녀의 공통점에 대한 부분인데 ‘벤야민다운’ 독창적 생각으로 차 있다. 이 말이 갑자기 떠오른 건 오래된 친구들을 너무 오랜만에 만나고 난 뒤 회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그 말을 내 식으로 바꿔 말하면 ‘오랜 친구는 무척 젊게 만들어준다.’가 될 것이다.

 

  나를 무척 젊게 만들어주는 ‘오랜 친구’는 한 가지 단서를 달고 있어야 한다. 자주 만난 오랜 친구가 아니라 아주 오랜 만에 만난 오랜 친구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삼십 년 정도는 못 만났던 친구라야 나를 젊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오랜 친구라도 자주 만나면 늙음을 공유하는 편한 사이가 되고, 오랜 친구를 삼십 년 만에 만나면 ‘젊음’을 환기시키는 설레는 자극제가 된다. 육체적 현실은 늙었으나 심적 현상은 그때 그대로 임을 확인하는 청량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간 동창 열댓 명이 거의 삼십 년 만에 만났다. 이것저것 다급해진 궁금증만큼 섞어 마신 술 때문에 누군가는 빨리 취했다. 민낯을 드러낸 채 싱크대 앞에서 칫솔질까지 해대는 여자 동창들의 뻔뻔함도 남자애들의 무람없는 너털웃음 속에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삼십 년이 무색할 정도로 모두 청춘으로 돌아가 추억을 공유했다.

 

 

  아내를 잃은 이도, 자식을 먼저 보낸 이도 있었다. 잘난 마누라와 착한 남편을 만난 이도, 게으른 마누라와 보수적인 남편을 거느린 이도 있었다. 사회적으로 앞장서는 이도, 주변부에서 겉도는 이도 있었다. 다양한 세상만큼 저마다 각양각색의 삶을 변주하고 있었다. 다 다른 사람끼리 다만 같은 이십대를 살았다는 공감대 하나만으로 웃고 떠들며 제 젊은 날을 상기했다.

 

 

  그 시절이 떠오르는 음악이 담소의 배경으로 깔렸다. 평소의 나 같으면 신경이 거슬렸을 것이다. 나는 음악이 배경으로 물러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어한다. 음악이면 음악이고 담소면 담소지, 담소하는 가운데 흐르는 음악은 소음공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기꺼이 참을 수 있었다. 끄려고도 꺼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담소에 떼밀린, 배경으로서의 음악 또한 그 시절을 환기시키는 귀한 매개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삼십 년 시간의 강을 용케 건너온 우리는, 각자 아팠거나 느꺼웠을 그 시절을 돌아가며 풀어내었다. 앞으로 쌓아갈 나머지 삼십 년도 그렇게 과장 없이, 침잠도 없이 담담하게 맞고 싶다. 늦가을 바람에 흩어지던 낙엽비 아래서 제 젊음을 사고 싶다면, 오래 만나지 못한 청춘의 친구를 소집할 일이다. 책과 창녀 못지 않게 나를 젊게 만들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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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14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너무 좋아요. 글도 사람도. 정말 우리는 그만큼의 시간을건너왔는데 다시 그 시절을 환기하기엔 늦었고 그렇다고 철이 든 것도 아니고ᆢ 삼십년 전의 저를 한번 불러보게 하는 글이에요. 마음이랑 짝하지 마라는 책도있지만 오늘은 구르는 낙엽처럼 딱 그런 마음이랑 짝꿍하고 싶네요. 님도 저도 어느 하나 매인 데 없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잘 지내자구요^^ 잘살기 페이퍼에 감동 먹고 여기다 수다를ㅎㅎ 잘살기 페이퍼는 추천만 누르고 별찜해서 늘 보고 저를 가다듬을 거에요. 현명한 사랑, 사랑을 부릴줄 알아야한다는 페이퍼도요. 고마워요♥

다크아이즈 2012-11-14 22:47   좋아요 0 | URL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는 게 더 나은 표현일지도...
체력이 바닥이라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어서 열정 넘치는 모든 분들이 저는 부러울 뿐...
프레이야님 알게 돼서 그나마 용기를 얻습니다.
많이 배울게요. 제가 고마울 뿐이지요♥

삼십 년 세월 흘렀어도 몸만 흘렀지 맘은 그대로더군요.
프레이야님도 오랜만에 동창회 가보시어요. 나름 재밌었어요.
 

 

 

 

 

사랑하지 않아야 사랑이 온다. 사랑하면 그 사랑은 달아나기 십상이다.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첫사랑은 실패로 남는다. 사랑을 이론서 안에서만 이해하려 한 치들은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사람들을 기만해왔다. 사랑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혼란이다. 대개 어느 한쪽의 괴로움을 수반하는 심리적 기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이런 주제를 다루었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충만해진다는 것도 거짓이다. 그런 건 신 앞에 모든 걸 맡긴 종교인에게나 가능하다. 실제 더 많이 사랑할수록 패배자일 뿐이다. 덜 사랑해야 승리자가 된다고 통찰 있는 작가들은 말해준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상대에게 무의미하다. 상처가 되지도 않는다. 효력 발생 가능성 제로인 그 비참한 선언은 선언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반대로 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진의를 밝히는 건 상대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다. 당연히 상처가 된다. 효력 발생 가능성 백퍼센트가 될 그 무정한 선언은 선언으로서의 가치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심리적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모든 걸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의 속성은 불편부당함에 있다.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상처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가 첫사랑에 백전백패하는 이유는 사랑을 주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사랑에 저울추가 없다고 믿었던 순정함이 사랑을 그르친 것이다. 사랑만큼 저울추가 확실히 기울어지는 것도 없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연민과 자책은 없을 수 없겠지만, 사랑 앞에서 괴로움 따위는 친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더 사랑하는 쪽은 상대의 연민과 자책을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사랑 앞에서 늘 괴로움을 친구 삼을 수밖에 없다.

 

몇 십 년 만에 동창 친구들이 모였다. 일분 스피치 시간 동안 어떤 친구가 말했다. 누군가를 사랑했는데 그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안타까웠노라고. 우리는 일제히 웃어젖혔다. 그 친구가 남몰래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생각한 것은 그만의 착각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말하지 않았어도 그가 사랑한 사람이 누군지를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어려서 순정했던 그 미세한 떨림은 비밀스러울 수가 없었다. 순정할수록 감춘 마음은 더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사람은 말보다 몸짓과 표정으로 먼저 말한다는 것을 당사자만 몰랐을 뿐이었다.

 

 

현명한 자는 사랑을 부릴 줄 안다. 상처뿐인 순정은 가장 순수한 사랑일지 모르지만 사랑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상처뿐인 사랑이라면 그것은 사랑일 수가 없다. 제 사랑을 온전하게 주관하지 못하는 사랑을 어떻게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상대 눈빛의 선처에 일희일비하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아픔일 뿐이다.

 

사랑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걸 안 뒤의 사랑이어야 정녕 아름다울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을 버리고서야 온다. 안타깝게도 모든 현명한 것들은 너무 늦게 알게 된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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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12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공감하며 읽었어요. 사랑 참ᆢ

다크아이즈 2012-11-13 07:56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사랑 참 어렵지만 알고 덤비면 덜 상처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간의 노하우(!)를 아들에게 전수하려니 강력 거부하네요.^^
하기야 체험해야 자기 것이 되지, 질러 가서 피한다고 세련된 사랑관이 나올 것 같지도 않네요. 사랑은 원래 구질구질하고, 던적스러운 거잖아요.

프레이야 2012-11-13 09:5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던적스러운 그놈, 그 이름 사랑ㅎㅎ
노하우 전수는 불가라고 생각해요.ㅋㅋ
사랑은 사람수만큼이나 다르게 제각각 있으니ᆢ
근데 던적스러운, 이거 김훈의 공무도하에서 읽고
오랜만에 보는 표현^^ 사람뿐만 아니라 사랑에 딱 맞는 표현같아요.

라로 2012-11-13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공감하며 읽었어요. 더구나 누구를 생각하면서,,ㅎㅎㅎ

다크아이즈 2012-11-13 08:03   좋아요 0 | URL
앗, 나비님 <누구를 생각하면서> 구절, 제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ㅎㅎㅎ
왜 그땐 어설펐을까요? 돌이킬 수 없는 희망을 희망하던 모든 것을 (첫)사랑의 속성에 추가해봅니다.
 

 

 

시험이 끝났다. 시험장에다 날개를 떼어놓고 오기라도 한 것일까. 한풀 꺾인 새처럼 교문을 나서는 그들 어깨 위로 저녁 안개가 내려앉고 있었다. 아무렴, 대책 없이 다사로운 햇살보다는 눈치껏 감싸주는 안개가 그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 우르르 몰려나오는 수험생들 가운데 울상 짓는 몇몇의 실루엣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꿈을 얻기 위해 몇 년을 달려왔다. 하지만 아뜩하기만 한 지문(地文) 앞에서 그들은 몇 번이고 그 꿈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부정적 정의를 환기시켰을지도 모른다. 꿈은 꾸는 것이지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너무 어려워 절망의 예고편처럼 읽히는 시험지 앞에서 자조적 탄식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방천지 유리벽인데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은 더해가고, 그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맘 아플 몇몇 수험생들에게 자꾸만 감정이입이 된다. 먼 시절을 돌이키면 그 때 내 심정이 딱 저랬다. 이제껏 맛보았을 몸과 마음의 가장 큰 상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낙담은 이르다. 입시는 가장 큰 현재형 고통일지 모르지만 가장 우스운 미래형 코미디이기도 하니까. 힘겨울 그들의 ‘지금’에게 용도 폐기용 충고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건 너무 늦은 깨달음들이 세상엔 널렸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삶은 지속된다. 희망을 버린 절망의 나날보다는 절망을 이긴 앞날이 그래도 더 많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건, 문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문을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볼 수도 없었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고군분투했을 그들이 위로받았으면 좋겠다. 며칠만 힘겹다가 툭 털고 일어나, 내팽겨 쳐 둔 날개를 가지러 갔으면 좋겠다. 들숨날숨 한 호흡 크게 쉬고 새벽길 나서는 그들 어깨를 상상한다. 안개 자욱한 그 길, 귀 열고 눈 뜨고 가다 보면 언젠가는 날개 돋는 시절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니까.

 

 

 

 

*음화홧, 위로 페이펀데 소개 상품은 수능 만점에 관한 거다.

  이런 뒤지럴스런 모순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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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09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화홧, 위로 페이펀데 소개 상품은 수능 만점에 관한 거다.
이런 뒤지럴스런 모순이라니..."

이 글에서 저, 빵 터졌어요.


다크아이즈 2012-11-11 08:42   좋아요 0 | URL
페크님, 써놓고도 이 따위 페이퍼가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스스로나 위로하렵니다. 이것도 모순 맞지요? 크~

2012-11-09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에 추천 꾹~^^

다크아이즈 2012-11-11 08:44   좋아요 0 | URL
섬님, 제가 생각해도 이 잡스런 단상은 내용보다 태그가 더 낫다는 생각이...
만나 뵈서 반갑습니다. 저도 찾아 뵐게요.

프레이야 2012-11-09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순도 가지가지ㅎㅎ 뒤지럴스런 ㅋㅋ 요런 발랄한 표현을요! 친구 딸도 생각보다 못 나왔다고 좀 걱정하네요. 에효ᆢ

다크아이즈 2012-11-11 08:46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발랄하다기 보다, 가끔 제가 장소와 때에 맞지 않게 분위기를 망친다는 생각은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님의 위로가 필요할 때. 에효..

2012-11-11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1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4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4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5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2-11-1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짧은 페이퍼 참 따뜻하고 좋다, 이러면서 읽어나가다가 덧붙이신 글에서 화들짝! 터프한 분이셨군요! ^^

다크아이즈 2012-11-12 01:44   좋아요 0 | URL
네,역시 댈러웨이님 예리하시네요.
암만 생각해도 따뜻한 면 보단 터프한 게 제 실체인 건 맞습니다.
따뜻하고 싶습니다...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