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숫자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는 부류이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고등학교 이학 년 올라가면서 수학을 포기했다. 미분이 뭔지 적분이 뭔지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는 나 같은 학생들이 많았다. 과외 금지 시대였기 때문에 사교육 열풍 같은 건 없었다. 따라서 상위 그룹 몇몇을 제외하곤 다들 고만고만한 수학 실력을 자랑(?)했다. 수학 좀 못한다고 대학 가는데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으니 행운시기였다고 해도 될라나.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얘기다. 아직도 꿈속에선 수학 때문에 힘겨웠던 학창시절을 자주 만난다. 수학 또는 숫자에 대한 이런 내 트라우마를 이해 못하는 아들 딸 때문에 가끔 서운할 때가 있다.

 

  네 식구 다 모였다. 건강이나 근황 등 일상적인 얘기 몇 마디를 하고 나면 별 할 말이 없다. 서로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는데 동상이몽이다. 나는 미뤄둔 일거리를 어떻게 해결하나 고심 중이고, 남편은 운동 트레이닝 방식 변경에 신경 쓰는 중이고, 아들은 학창 시절 마지막 축제 준비로 들떠있고, 딸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드라마 주제 피아노곡만 무한 반복 연습 중이다. 진작 가족 공통 관심사를 개발하거나 공통 취미를 연마해둘 걸, 참 따로따로 노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한데 간식 먹을 때,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숫자나 퍼즐 맞추기 게임이 나오자 아들과 딸은 신이 났다. 지들 관심 있는 거 나오니까 저렇게 재밌어한다. 숫자나 도형의 조합을 위해 골머리를 썩이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유도하는 대화에는 시큰둥하다가 하잘것없어 뵈는 숫자 놀이에 몰입하는 게 서운하기만 하다. 오랜만에 모였는데, 내가 낄 자리는 없다.

 

 

  오전에 참석했던 한 특강이 떠올랐다. <3 +4 = ? > 와 <? +? = 7>두 유형에 관한 부분이었다. 어떤 이는 정답이 딱딱 떨어지는 사유체계를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정답이야 비록 정해져 있더라도 그 길로 가는 여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전자의 경우 애매모호한 것을 못견뎌한다. 정답이 두 개 이상 같아 뵈는 언어 영역 문제들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래서 정답이 딱 나와야 안심이 되는 수학 과학 같은 과목을 좋아한다. 나 같은 이는 그 반대다. 정답이 똑 떨어지는 수학적, 과학적 경험을 한 적이 거의 없으니 그런 건 생각만 해도 갑갑하고 두렵다. 대신 여러 생각이 가지치기하는 인문학적 책 읽기는 위안도 되고, 소화하기도 쉽다.

                      

 

 

 

 

 

 

 

 

 

 

 

 

 

  한 집안 두 방식이 공존하는 게 신기하다.  나와 성향이 완전히 다른 아이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지만 거꾸로 걔들 또한 내가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르치거나 강요한다고 성향이 굳어지는 건 아니다. 후천적으로 영향을 받긴 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성향은 선천적인 게 더 강한 것 같다. 그 선천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명랑한 소통을 모색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다. 식구끼리도 충분히 다를 수 있다. 그건 절대 틀린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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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 자연스럽게 당당하기 프로젝트

 

  그녀는 혼자 뼈다귀해장국집에도 들어갈 줄 안다. 이제 식당에 혼자 들러 삼인 분의 삼겹살을 시켜 먹을 뻔치도 생겼다. 두 판 짜리 세트 피자를 주문하는 일도, 통닭 배달이 늦는 것에 대해 적당히 항의하는 것도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되기까지 몇 개월의 실전 연습이 필요했다. 그녀는 열일곱 살이다.

 

  열일곱은 어른도 아이도 아닌 나이다. 상대가 부모가 아닌 제 삼자의 어른이라면 소통에 아주 난감한 나이가 열일곱 살이다. 상대가 어른이라면 열일곱은 참 애매한 나이이다. 어른을 상대로 단독자로 뭔가를 요청하기엔 시건방져 보일까 걱정하고, 단체로 뭔가를 어필하기에도 반항끼 있어 보일까 애태우는 나이이다. 되바라지지 못한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기성 사회에 편입하는 과정이 쑥스럽고 불편스럽기만 하다.

 

  한 아이를 상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심각한 고민은 아니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적응기를 지켜봐주기만 하면 된다. 전형적 모범생인 그녀 고민의 예는 이런 거다. 배가 고파 분식점에 들어간다 치자. 종업원이 정중히 다가와 주문을 요청하는 일도 없지만, 왠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시키면 분식점 주인에게 버릇없게 보일까봐 스스로 주방까지 걸어가 우동 한 그릇이요, 하고 조심스레 주문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을 공경하라고 배웠고, 될 수 있으면 모범생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으니까.

 

  주방까지 가서 공손히 음식을 주문한 내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으면 괜찮다. 한데 뭔지 모르게 속이 뒤틀리고 대접 받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자신이 싫다. 어른에게 모범생이고 싶은 욕구와 손님으로서 대접 받고 싶은 당당함이 상충한 것이다. 왠지 당당함을 선택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때부터 홀로서기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피자가 먹고 싶어도 엄마가 시켜주지 않으면 전화 한 통 못하고, 어른 상대라면 혼자서는 스타킹 한 짝도 사기가 어렵다. 어른 도움 없이 식당에 들러 한 끼 사먹는다는 것은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어른들에게 먹히는 것이 싫은데, 자신도 모르게 그들이 원하는 행동에 길들여져 버린다.

 

  그런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 부러 친구들과 삼겹살도 먹으러 가고, 물횟집에도 들러 본다. 뼈다귀해장국집 문도 열어 보고, 피자집에도 주문 전화를 넣어본다. 생각보다 어렵진 않다. 예의를 벗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당당한 소비자 역할을 시도해본다. 의외로 아무렇지 않다. 어른 세계 어느 누구도 당당한 소비자 연습을 하는 열일곱을 질타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당연한 소비자 역할하기가 이리도 어렵다면 그건 기성 사회의 잘못이다.

 

  어른처럼 당당한 열입곱을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착한 이미지에 죽고, 모범생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열일곱은 행동거지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열일곱이 위선을 선택하는 건 욕할 일은 아니지만 칭찬할 것도 아니다. 억압된 위선의 부산물이 모범으로 비칠 수 있는 사회라면 그건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그들에게 자연스런 당당함을 연습시키는 건 기성세대가 할 일이다. 연습을 시켜서라도 열일곱 식 자연스러운 당당함은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플라톤을 배우고 공자를 익히는 것만큼 실전 연습이 필요하다.

 

  17세라면 지금 당장, 엄마 손 빌리지 않고 피자 시키기 프로젝트를 수행할 일이다. 물론, 이미 그런 연습이 필요치 않은 당신들, 17세들도 많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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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22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열일곱은 위선이 어울리지 않지요.
차라리 건방이 낫지 싶어요.^^(어른 관점이지만)
좀 착하지 않게 보여도 당당하고 용감하면 좋겠구요.
나의 열일곱이 생각나네요. 조금은 성숙하고 당차고 생각이 많았던, 베레모 그 시절.^^


다크아이즈 2012-11-24 17:18   좋아요 0 | URL
프레님, 저 아이의 사소한 고민이 공감 됐던 건, 다 큰 우리딸도 아직 당당하고 의연한 소비자 역할에서 한참 멀거든요. 피자 한 판 시키는데도 매끄럽지 못해요. 속에 천불 납니다. 시간이 해결하겠지요?

저 아인 스스로 깨치고 예행 연습을 하고 있어서 무척 신선하게 보였답니다.

댈러웨이 2012-11-23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는 열일곱 살에 이런 고민 안 했던 것 같아요. 모범생처럼은 보이고 싶긴 했지만요. 날라리였나? --; (매일 새벽 이렇게 글 쓰시잖아요. 이보다 더한 자극이 어디 있겠어요, 팜므느와르님!)

다크아이즈 2012-11-24 17:22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빙고~~ 저도 소심한 청소년기였는데 의외로 할 말은 할 수 있었던 체질(?)이었던 것 같은데, 소비자로서 안절부절못하거나 지나치게 굽신 모드인 울 아들 같은 놈 보면 약간의 연습이 필요하단 생각이...
저 학생의 사소한 고민이 무척 공감되었답니다.

매혹적인 자극제라면 댈러웨이님 윈!! ^^&
 

 

 

  인터넷 서점을 클릭하면 서재 코너가 있다. 누구나 원하면 자신만의 서재를 가질 수 있다. 그 서재의 여러 역할 중 가장 매력적인 것은 누구나 그곳에 독후감을 올릴 수 있다는 거다. 한데 그곳을 들락거리면서 의아했던 점은 타 분야에 비해 시집 리뷰가 드물다는 것이다.

 

 

  인터넷 서재를 벗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반 문학 사이트나 개인 블로그에는 그야말로 시가 넘쳐 난다. 우리나라엔 시인만 해도 삼만 명이 넘는다니 그럴 만도 하다. 시인이 많은 나라이니 시집을 읽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들이 감상문을 올린다면 긴 글에 비해 더 많은 편수가 인터넷 서재에 등록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시집 리뷰가 드문 건, 시를 자기 식으로 해설한다는 게 쉽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신춘문예의 계절이 다가온다. 예비 문학도들이 가장 예민해질 시기이다. 젊은 시절부터 신춘문예 당선시집은 웬만하면 사 모았다. 당선시들 중 내 취향에 맞는 작품들을 만나면 심사위원께 큰절을 하고 싶을 정도이다. 어쩜 이리 탁월한 선택을 했을까 싶어서다. 풀썩이는 맘 자락에 단비를 주는 시를 발견하는 시안(詩眼)이라니.

 

 

  나아가 어쩌면 나도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가늠해보곤 했다. 작은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시는 짓는 게 아니라 절로 써지는 거다. 한마디로 그분이 오셔야 된다.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만들어진 시인은 시인이라 불릴 수는 있겠지만 진짜 시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생래적 시인이 못되는 나 같은 사람은 좋은 시를 찾아 감상하면 된다. 시작의 고통을 덜 수 있는데다 영혼의 요기까지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한데 요즘 유행하는 시들을 곁에 두고 읽자니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천상 시인인 사람들이 사라졌을 리는 없다. 문제는 내게 있다. 참신하고 재기발랄한 시들을 접수하기엔 내 문학적 상상력이 너무 늙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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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2-11-2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에 빵 터졌어요. 시는, 어려워서, 한 편 한 편 붙잡고 있으면, 마음이 또 심란해지기도 해서, 쉽지가 않아요, 다시 손에 잡기가.

그나저나 저는 팜므느와르님의 어떤 페이퍼를 보고 선생님이라고 갑자기 부르고 싶어졌어요. ㅎㅎ

다크아이즈 2012-11-22 01:14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맞아요. 시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심란해서 감히 리뷰를 안 올리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 크~ 글에서 빵 터져야 되는데 태그 보고 터지는 분들 더러 있으니 난감일세~ 입니다. ㅎㅎㅎ

선생님과는 거리가 먼 걸요. 크~~
 

 

 

 

 

 

 

 

 

 

 

 

 

 

 

 

 

 

  가끔 내가 두 자녀의 엄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아니, 그것을 넘어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잊고 살 때도 많다. 결혼했다는 것과 남편이 있다는 것까지는 입력이 되는데 ‘엄마’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루 종일 얽힌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긴 하다. 그 복잡함들이 자식에 대한 관심이나 걱정에 관한 거면 좋겠는데, 나만의 영양가 없는 공상 때문이니 그게 문제다. 언제나 개별자로서의 자아가 모성을 가진 자로서의 나를 앞선다.

 

  보통 ‘엄마’라면 무슨 일을 하건 어떤 상황에 있던 자식 생각이 우선일 것이다. 오히려 그게 너무 족쇄처럼 느껴져 한 번쯤 아이들에게서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기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는 엄마라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딸이나 아들에게서 전화가 오면 그제야 아참, 내가 엄마였지, 하고 당혹해한다.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환절기라 감기에 걸렸단다. 아프면 가족 생각이 더 나기 마련이니 엄마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을 것이다. 통화하는 순간은 엄마로서 최선의 모성을 발휘한다. 병원은 가봤나, 아파도 밥 굶지 마라, 심하면 수업 듣지 말고 잠 푹 자라 등 짠한 맘에 말이 절로 많아진다. 이 짠한 맘이 하루 종일 지속되면 좋으련만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밤늦게 걱정하는 남편을 보고서야 아픈 딸내미가 떠올라 자책한다.

 

 

  이쯤 되면 혼란스럽다. 내게 모성이 없는 걸까? 모성은 본능일까, 아니면 사회화 과정의 산물일까? 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살갑게 챙기고 알뜰히 보살피는 모성지상주의파는 아니다. 방임을 가장한 허용적인 엄마이고, 권위적이지 않고 시쳇말로 쿨한 척하는 엄마다. 자식에게 밀착하지도 집착하지도 않는다. 엄마가 이래도 되나? 모름지기 엄마라면 그 무엇보다 자식을 최상의 자리에 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얻은 결론은 나 역시 모성이 없는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 다만 사회가 부여한 모성의 방식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을 뿐이다. 왼종일 자식 생각으로 가득하지 않다고 해서 모성이 부족한 건 아니다. 모성을 천성이나 운명의 자리로 묶어두고 길들이는 사회 때문에 내 모성을 스스로 의심했을 수도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성 신화를 버려야  다양한 모성 모델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래도  단기기억상실증이란 마법에 걸리지 말고,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좀 더 자주 떠올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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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23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개별자로서의 자아가 모성을 가진 자로서의 나를 앞선다."
- 이것, 공감합니다. 저도 그렇거든요.ㅋㅋ
한때 제가 이상하게 생각했던 게, 왜 나는 자식들의 장래보다 내 장래가 어떻게 될지에 더 관심을 두고 사는 가, 였어요. 그리고 내린 결론은 자식들의 장래는 아직 멀리 있고, 또 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서가 아닐까, 였어요. 그러면서 약간의 죄의식을 상쇄해 나갔죠.

그런데 큰애가 그러더군요. 저의 그런 점이 좋대요. 너무 자식에세 집착하고 간섭하는 엄마는 싫대요. 요즘 작은애도 비숫한 말을 하네요. 이것이 위안이 돼요.

또 하나의 위안은 내 자식들도 나중에 결혼해서 엄마의 자리에 있게 될 때 나처럼 살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 이에요. (나처럼 살기를 바란다는 것은 결코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의미하지 않을까요?) ^^

다크아이즈 2012-11-24 17:26   좋아요 0 | URL
앗, 페크님 공감해줘서 감사요.
모성보다 앞서는 자의식 때문에 당황할 때가 있는데, 저만 그런 것 아니었다는 위안이...

다행히 울 자식들도 이런 저를 마이(경상도 버전, 많이) 이해하는 듯.
대신 엄마한테도 애면글면하지 않으니 쌤쌤인가요? 크~
특히 딸내미는 엄마한테도 시크하옵니다. 그래서 서운하옵니다.
 

 

 

 

  방과 후 문예교실에서였다. 기억에 남을 만한 선생님에 관한 단상 써오기를 숙제로 냈었다. 학생다운 재기발랄하고 감수성 풍부한 글들이 발표되었다. 남학생들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게 한 선생님에 대한 서운함, 정신적 동질감을 주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 감성적인 격려의 메시지를 아끼지 않는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 등이 주된 이야기였다.

 

 

  그 중 한 학생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머핀과 초콜릿을 준비했단다. 기회를 봐서 교무실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 선생님이 안 계실 경우 다른 선생님을 후보로 새겨뒀다. 그냥 나오면 제 맘도 들키는데다, 다른 선생님에 대한 예의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교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바라던 선생님은 안 보이고 평소 무섭고 냉정하게 보이던 한 선생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엉겁결에 ‘선생님 드세요.’ 하고 쫓기듯 선물을 드리고 나왔다. 맘에도 없는 일이라 그리곤 잊고 있었단다.

 

 

  한데 며칠 뒤 그 선생님께서 이름을 부르시더니 정성 깃든 편지와 작은 선물을 주시더란다. 놀람과 감동이 동시에 밀려오더란다. 냉정하게만 보이던 선생님이 제 이름을 기억해준 것만도 고마운데, 편지까지 주셨으니 눈물이 날 지경이더란다. 그 글의 제목은 ‘우연이 준 선물’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우연을 통해 한 사람의 진가를 발견하기도 한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현상일 뿐 실체가 아닐 수도 있다. 타인을 규정할 수 있는 명백한 객관성이란 인간 앞에서는 없다. 경험한 만큼만 보기 때문에 우리는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으로 타자를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 감성적 동물이다. 따라서 한 대상을 바라볼 때 제 삼자의 말에 휘둘릴 필요도 내 안의 편견에 내몰릴 이유도 없다.

 

 

  멀리서 본 높고 험한 산의 위용보다 가까이서 본 나무 잎새 뒷면의 떨림이 훨씬 더 실체에 가까울 때가 많다.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그런 선물이라면 자주 주고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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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18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리서 본 높고 험한 산의 위용보다 가까이서 본 나무 잎새 뒷면의 떨림이 훨씬 더 실체에 가까울 때가 많다."
- 이 문장에 반하고 갑니다.
이런 글은 추천을 열 개쯤 누르고 싶어요. (백 개 아니라 열 개... 왜냐하면 제 스케일이 좀 작아서...)ㅋㅋ

다크아이즈 2012-11-18 22:24   좋아요 0 | URL
언제나 후한 페크님. ㅋ
저도 스케일이 좀 작습니다.
그래서 쪼잔하고, 미세하고, 예민하기도 하지만

일상에서는 터프하고, 무심하고, 흘리고 다녀서 쿠사리(!) 많이 먹습니다.
저는 페크님 글 편편마다 백만 송이 장미를 꽃는 걸요.

프레이야 2012-11-18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크님의 추천 열개에 더하기 열개 하고 싶어요.ㅎㅎ
간략하면서도 정곡을 시원하게 찌르는 글에 늘 반합니다.
우연이 준 선물! 정말 우리들의 삶은 우연이 90% 이상 작용하여 이어져 나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정확한 수치는 아니에요 ㅋㅋ)

다크아이즈 2012-11-18 22:2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마저 이러시면 저는 부끄러워 하산해야 할 판...
오래 버티고 싶은데 언제까지 일지 걱정하는 제게
용기 주는 말씀이라 생각할게요.
오늘따라 프님의 로고 장미꽃이 확 당깁니다.
당근 옆지기님의 작품이겠지요? 크~

2012-11-18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8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