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을 쫓는 아이 (개정판)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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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레드 호세이니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으로 먼저 만났다. 의무적으로 책 소개를 해야 하는 것 때문에 만난 책이지만 쉽게 쓴 책이지만 괜찮네, 정도였다. 역시 필요에 의해 (독서토론 모임 때문에) 읽은 '연을 쫓는 아이'는 그 이상이었다. 처음 누군가가 이 책을 토론 도서로 추천했을 때 하마터면 나는 이 책 대신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선정할 뻔했다. 같은 작가라면 이미 읽은 책이 다루기가 쉬울 것 같았다. 한데 알라딘 검색 도중 반값 세일하는 것을 알고 이 참에 욕심 좀 내자 싶어 덜컥 사버렸고, 결국 토론도서로 정했다. 결론은 참 잘했어요, 이다.   

  가끔씩 리뷰를 쓰면서 별을 클릭하라고 알라딘에서 앙탈을 부릴 때 웬만해선 그 다섯을 다 칠해주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야박한 건 아니다. 쓰는 행위가 내 안의 악마와 힘겹게 싸운 결과물임을 알기에 웬만하면 별 넷을 준다. 악마를 몰아낸 힘겨움만으로도 별 넷은 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오만했을 땐 별 셋도 준 적 있는데 그건 쓴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쓴다는 것의 찬란함에 대해 별 시덥잖게 생각했을 때의 내 흔적이라고 봐도 좋다. 뭐, 말이 길어지긴 하지만 결론은 이렇다. 쓰는 이들 모두 위대하지만 정말로 내 취향에 맞는 글에는 별 다섯을 아낌없이 준다. 오랜만에 연을 쫓는 하산에게 별 다섯 개를 줘본다. 전혀 아깝지 않다. 오히려 모자라는 감이다.  

  별 다섯인 이유는 스토리텔러로서 완벽한 기능을 하는 호세이니 때문이다. 이야기 자체가 재밌고 감동적이어서 소설에 이끌리는 경우는 내게 있어서 굉장히 드문 편이다. 나는 이야기에 연연하는 독자가 아니라 언제나 방식에 목말라하는 쪽이었다. 해서 아무리 좋은 얘기도 내가 원하는 방식이나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가 아니면 맘이 가지 않는다. 굳이 밝히자면 그의 문체만큼 평범하다 못해 무색무취한 경우도 드물다. 폴 오스터처럼 도회적 세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헤밍웨이처럼 깔끔한 문체의 소유자도 아니다.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방식의 이 작가가 내게 눈물을 자아내는 건 이야기 그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고백하건대, 나는 할레드 호세이니를 벤치마킹할 것이다. 편안한 스토리텔러로서의 그 재능은 문체와 방식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하산을 찾아 간 라힘 칸의 장면에선 기어이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남들 다 울었다는 신파를 자랑하는 엄마 부탁하는 모 소설 같은 경우에도 절대 눈물 따위 흐르지 않았다. 압록강은 흐른다, 를 읽을 때 이후 소설 읽으면서 처음 눈물 지었다. 그걸로도 호세이니는 내게 충분하다. 바바를 모시듯 그의 미더운 친구인 라힘 칸에게 하룻 밤 묵어가라고 권하는 하산을 마주할 때 마구 눈물이 흘렀다. 저한테 두 번째 아버지라고 말하는 순정한 하산을 보면서 비겁함과 죄의식에 시달리는 아미르는 진작에 가장 공감가는 캐릭터로 다가왔다. 살면서 우리는 누구나 아미르이기 쉽고, 숱하게 크고 작은 하산들을 배신한다.   

  호세이니의 등장인물도를 정리하면서 장편은 이렇게 쓰는구나, 벤치마킹한다. 적재적소의 바바와 알리와 아미르와 하산이라니! 심지어 악역인 아세프까지 끝까지 책임지는 그 소설적 안배에 머리가 서늘해진다. 극한 상황, 비겁한 침묵, 양심의 소리, 배반의 괴로움, 오랜 죄책감, 행동하는 양심에 이르기까지 소설이 주는 감동과 재미를 이토록 쉽게 보장하는 작가라니. 덕분에 아프간 내전을 둘런 싼 제 상황과 아프간인의 생활 상도 좀 더 알 수 있게 됐으니 일석이조라고나 할까. 그렇게 따지면 911테러가 없었다면 이 작품이 기획자의 눈에 덜 띄었을 수도 있으니 이래저래 잘 팔리는 소설은 우선 잘 써야하겠지만 기획력의 승리라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겠다. 요즘도 여전히 베스트셀러 손가락 안에 든다고 오늘자 신문에서 봤다. 장하다, 호세이니. 그의 책 두 권을 샀으니 난민들을 돕기 위한 단체에서 활동하는 그를 위한 작은 응원이 되었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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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15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영화도 책도 못 봤어요. 중학교도서실에서 빌려와 아이들만 보고 반납했는데...
읽어야 될, 읽고 싶은 책은 너무 많은데... 알라딘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여야 될 듯.^^

다크아이즈 2010-02-21 01:43   좋아요 0 | URL
서재 들어올 시간조차 쉽지 않은 나날이네요. 순오기님알라딘에서 보내는 시간 줄이지 마세요. 전 개인적으로 여기 오는 시간이 엄청 좋은데 것도 맘대로 안 되네요.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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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수는 이십대 때 한 여자를 사랑했지. 청춘을 지나온, 하자 없는 대부분의 독자가 그러했듯이. 연수의 사랑은 언제나 파국을 예견하곤 했지. 사랑이 온전하지 않은 것임을 미처 몰랐던 누구나의 이십대가 그러했듯이. 잘 뻗은 메타세쿼이아, 그 적막한 그늘 벤치에 함께 앉았을지라도 그 사랑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그런 시절을 건너는 것이 삶의 톱니바퀴이기도 하지. 그럴 때 연수는 노래했지. "사랑은 저처럼 뒤늦게 닿기만 하면, 닿기만 하면 흔적도 없이, 자욱도 없이 삼월의 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지.    

  소설을 쓰기 전 연수는 시를 (오래) 쓴 적이 있었지. 그때 '세계의 끝 여자친구'가 등장하는 시 한 편을 쓴 적이 있지. 그 시의 제목이 꼭 세계의 끝 여자친구일 필요는 없었어. 중요한 건 그날의 데이트 여정 중에 메타세쿼이아의 이미지가 연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거지. 실제로  그 나무 아래 벤치를 서성였는지, 그 올곧은 나무를 연상케 하는 여자의 잘 다려진 스커트 때문에 그 나무를 떠올렸는지는 역시 중요하지 않아. 메타세쿼이아 한그루를 가슴에서 뿌리칠 수 없었던 연수는 급기야 도서관에서 '메카세쿼이아, 살아 있는 화석'이란 책까지 빌리게 되지. 시상은 떠오르고 그 시적 완성미를 위해 책을 활용해야 했던 거지.  

  딱히 연애랄 것도 없는, 지리멸렬하기만 한 연수의 만남에 위안을 주는 것은 이를테면 이런 거야. '이따금 그 메타세쿼이아 쪽을 바라보면서 호수 주위를 달렸으며, 생각날 때마다 매번은 아니고 세 번에 한 번꼴로 <나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미니책자 27쪽)내는 거지. 그리하여 '나의 미래는 여전히 전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같은 책 27쪽)지는 거지. 애인이든, 대타 여성이든 모든 만남은 여전히 전혀 내 것이 아니어야 스물다섯 시절이라 할 수 있지. 그걸 아는 연수는 결국 시 한 편을 건너 뛰어 단편 하나를 완성하기로 하지. 이름하여 세계의 끝 여자친구, 라는 제목이 탄생되는 순간이지. 연수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시를 쓴 시인으로 분하고, 시집 두 권을 낸 경력이 있는 그 시인은 암 투병 중 죽게 되는 거지.  

  마침 그를 아끼고 사랑한 스승이 있어 그 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작중 화자는 그것을 알린 사람에 대한 막연한 흑심으로 시 읽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그 사람이 시인의 국어선생이지 늙어버린 김희선씨라는 걸 알게 되지. 김희선 할머니(아니 김희선씨)는 죽은 제자 시인이 화자와 닮은 것에 놀라고, 화자는 자신의 애인과 할머니가 이름이 김희선으로 같다는 것을 알게 되지. 비록 탈렌트 김희선 만큼 아름답진 않지만 작중화자에겐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었던... 이제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껴안을 것인가는 자명해졌어. 김희선씨와 작중 화자는 서로를 이해하게 될 거야. 유방암을 앓는 김희선씨(굳이 할머니는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지)와 사랑 앓이에 혼란스러웠던 화자는 한 그루의 메타세쿼이어를 향해 걸어가는 거지. 그 거리에 관념적 사랑은 영원히 남고, '수만 년이 흐르고,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같은책자 31쪽)른다는 자기확신을 되새기며.  

  사랑이란, 집 근처 공원, 그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 메타세쿼이어 나무 한 그루까지 온전하게 함께 닿는 길을 말하지. 하지만 삼십 분도 걸리지 않는 그 길이 실은 세상의 끝에 다다르는 것 만큼 힘겹기만 하지. 그래서 사랑은 모호하고, 불길하며 흔적이 없을 수도 있는 게야. 정작 사랑은 어디에도 없는데. 다만 우리의 환상이 저 메타세쿼이어 우듬지 어디에 그것이 있고, 그것이 곧 세계의 끝이라 우기고 싶은 거지.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 모두는 헛똑똑이가 되는 것이지. '모두 헛똑똑이들이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아는 것들이다.' (같은책 24쪽) 사랑이 버거운 건  '내 쪽에서 아는 것'에서 메타세쿼이어 끝을 꿈꾸기 때문인 거지. 삼월의 눈발처럼 사라지는 그 몹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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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연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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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아프고, 모두 다 상처 받고, 그렇게 홀로이나 그래도 추억하거나 살아내거나 살 만한 것에 관한 단편집, 으로 나는 읽었다.    

 

  김연수 -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은 읽은 지 오래 되기도 했지만 별로 남은 게 없다. 누구나 아프다. 사는 게 고통이다. 때로는 그 번민으로 불면의 밤을 보낸다. 뭐 그런 주인공이 산책으로 돌파구를 찾아나선다. 산책하면 다섯 가지 즐거움이 생길까? 글쎄다. 짧은 시간에 척척, 코끼리도 재울 수 있으며, 침대에서는 잠만 자고 섹스만 하고, 결국 혼자서 길을 걸어가게 도리 것이며, 거리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될 것이다. 이건 뭐 또 뻔하잖아. 김연수를 읽으면서 생각외로 여성적 코드가 보이는 게 흥미롭다. 사는 건 고통이자 아픔이다. 그러니 오래 고민하지 말고, 무거운 짐도 훌훌 털어내고, 단순해지고, 누구나 혼자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니, 거리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라. - 뭐 이렇게 정리한다. 작가가 뭐라고 의도했던 난 내 식대로 읽는다. 김연수는 재미있는 작가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생각하게 만든다. 소설가가 진지하면 독자 떨어지기 십상인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그의 자선작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  연애소설(아마도 첫사랑 쯤)을 표방한 세태소설이다. 1980년대 후반기를 주석한다는 것만으로도 김연수식 후일담 쯤 되겠다. 아무래도 젊었을 때 쓰거나 자료 수집을 한 것으로 재가공한 소설 같다. 김연수는 자료을 멋드러지게 가공하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그 자료만으로도 소설 잘 쓰는 작가로 내게는 각인되어 있다. 마치 왕오천축국전을 주해하는 소설 속 나처럼, 김연수식 주해가 능한 작가이다. 재미라는 것은 별개로 하고라도. 

 

  이혜경 - 축제, 는 새롭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인척 뻘 남자에게 성폭행 당한 나의 상처 극복기 같은 거다. 상처를 극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끝내 옴 샨티 즉,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이라는 주문을 외는 것, 그 힘겨운 타협이 저마다의 상처 끌어안기 방식임을 알게 될 뿐이다. 발리라는 매개지가 등장하고 여러 명의 주변인들이 등장해도 그것 모두 상처와 치유의 상관 관계 속에서 배치된다. 기성이니 용서되는 소설이지 신예가 이런 소설 쓰면 일단 참신성에서 탈락이다. 아무래도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내레이션 방식에 점수를 주는 내 읽기 취향도 문제가 있다. 무뎌진 펜끝으로도 이상문학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이 기성의 특권이다. 억울하면 잘 써서 간택받으면 된다!  

 

  정지아 - 봄날 오후, 과부 셋. 금세 읽힌다. 잘 썼다. 이렇게 쓰고 싶다. 누구나 에이코가 되어 그 허한 마음을 다독이며 산다. 마음을 주고도 마음으로 받지 못하는 한 생의 씁쓸한 봄날 오후.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빚을 갚듯 하루코는 장을 담갔을 것이다. 아무것도 주지 않은 사다코가 얻어먹은 콩물은 빚이 아니라 마음이었다.'(130쪽) 마음 얻는다는 것이야말로 사람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가난한 친구 하루코에게 책방 차려주고 재기하도록 도와준 것은 에이코지만,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그 마음 가져간 이는 한 것 없는, 가진 것이라곤 새침한 입무거움과 은근히 잘난척인 전형적인 모범생 사다코이다. 노년의 삶을 빌려와 사람살이의 그 오묘한 관계를 그려내는 과정이 여간 아니다. 인품이란 건 제 의지와 상관없이 저마다의 성정대로 발현된다. 그 모순의 귓불이 붉어지는 상태를 우리는 '인간적'이라고 자위하는지도 모르겠다. 정지아가 말한다.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성품이다.'(130쪽)라고.   

정지아 소설답게 사상 얘기는 양념으로 곁들인다. '사상이고 뭐고, 살아보니 다 덧 없다. 죽으면 한 줌 재지뭐.' 그렇게 말하는 사다코의 곁에는 여전히 '통일광장'이라는 잡지가 놓여있다. 이런 장치들도 소설가로서의 정지아의 정체성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이라 독자로선 용인되다 못해 반갑다.  

염장녀 하루코, 완벽녀 사다코, 오지랖녀이자 나레이터인 그녀(에이코) 중 단연 에이코에게 감정이입된다. 작가가 그리하라고 시켰으므로. 끝까지 그녀의 오리랖은 잦아들지 못한다. 생삼겹을 사러 자청하는 길 뒤에도 나머지 둘의 속닥임은 계속될 것이니. 그녀의 눈물겨운 오지랖이 그래도 봄날 오후 같은 건 '김 영감 팔베개를 베고 자다 죽는'(137쪽) 꿈이 있기 때문이다.   

 

  공선옥 - 보리밭에 부는 바람, 은 친근하다. 동년배가 그리는 시골 풍광 속으로 잠시 빠져 들게 하는 맛. 시골살이는 내게 너무 짧았던가? 물장구치고, 아이 들쳐업고 동네를 헤매던 70년대의 산골 풍경엔 반공 이데올로기 또한 제격이었다. 수요 발표회 속에서도 간첩 식별하는 법 등은 단골 메뉴였다. 어쩌면 빨갱이로 몰려 숨어지낸(월북했다 남파된 간첩일지도 모를) 작은 아버지의 급작스런 방문은 주인공 어린 나에게는 영원한 비밀이 되어야 할 시대였다. 그렇게 '보리밭이 젖고 망초꽃이 젖고 여우가 젖고 내가 젖'는 시절이 있었다. 눈을 뜨면 '지린내' 대신 '낯선 비린내'가 나고, 그렇게 기성에 한 발짝 다가서기 위한 전초전으로 '형이 세수를 하고 있는 우물가로 달려'(161쪽) 나갔던 것이다. 30년은 훌쩍 넘어간 풍광을 보듬는 작가의 시선 역시 공선옥답다, 이다. 

 

  전성태 - 두 번째 왈츠. 내용은 접고, 시집이 팔리지 않으나(인구가 워낙 적어서) 시낭송대회의 관람료가 비싼 나라가 몽골이란다. 낭만적이다. 몽골은 시의 나라였구나. 일찍이 김경욱이 천년의 왕국, 에서 조선은 시의 나라, 시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관료제의 전형인 과거 제도를 빗대어) 곳이라고 예찬한 이래, 그 맥을 잇는 나라가 몽골이구나. 하는 생각. 근데 그 시 낭송 문화는 '율격의 지나친 강세, 그리고 쉬운 표현을 요구하는 대중성으로 시를 죽이고 있'(171쪽)단다. 결국 몽골도 '듣는 시가 아니라 읽는 시가 자신들의 정신을, 현대의 몽골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171쪽)하단다. 읽는 시의 교조성보다 듣는 시의 낭만성이 더 좋은데, 정치색(혹은 국민성 개조)이나 신념 앞에서는 그 전통도 무색하길 바라나 보다. 

몽골에 사는 북한여자 취재기가 주인공 나의 가장 큰 목적이다. 하지만 체제 변화 이후에 감도는 몽골의 분위기와 특히, 안내여성 냐마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 연정을 두 번째 왈츠로 명명한 것일까? 찾던 여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냐마의 울음 속에서 두 여자에 대한 '주체할 수없는 질투심이 끓어'오르는 것은 생의 한 시절 숨 트이고 싶은 강열한 열망 때문인지도... 

 

  조용호 - 신천옹. 소설로 읽히지 않고 담담한 고백록으로 읽힌다. 괜찮지 아니한가? 모든 소설이 소설적 기법과 그럴듯한 사기에 열을 올린다면 그 또한 낭패지. 진정성을 구현하는 이런 '남자로서 세상에 부대껴 보기' 같은 소설도 필요하다. 그런데 읽다 보니 두 남자 이야기이다. 나레이터도 두 친구가 번갈아 나,로 나온다. 굳이 독자에게 혼돈을 주는 이런 방식을 취한 이유는? 이야기가 담담체인데, 기법은 어설픈 포스트모더니즘인가? 막걸리에다 치즈 안주 들이미는 격이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작가라 판단유보. 정주를 꿈꾸는 여자와 유목을 허하라는 친구의 삶을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인 나의 갈팡질팡 중년기 쯤으로 읽힌다. 누구나 자신만의 앨버트로스를 꿈꾼다. 한데 소설 속에서 그 정체성은 모호하다. 여자에게는 떠나거나 정주하거나 간에 함께 하는 것으로(원래 평생 같이하는 금슬 좋은 새란다) , 남자에게는 떠나는 것으로(그래서 또 다른 이름이 나그네새인가), 주인공 나레이터에게는 그저 꿈꾸는 것으로.

 

  박민규 - 말 많을 절.(용용자 네 개 붙이면 이런 한자된단다. 우라질리아~) 정말이지 박민규 만은 피하고 싶다. 적응 안 된다. 박민규 답지 않게 고삽한 순우리말 들고 나와서 한물간 무림 천하를 융통한다. '윤슬 같고 는개 같아진'(221쪽), 해심, 해미까지는 용납하겠다. 운김, 드레 같은 낱말은 부러 찾아야 했다. 내 무지보다 소설 읽는데 사전까지 찾아가면서 수수께끼 풀어야 할 필요 있나, 부아가 치민다. 박민규는 옆에 순우리말 사전 끼고 이 소설 끼적였음에 틀림없다. 그건 박민규답지 않은 반칙이다. 슈룹은 우산이란다. 용린은 용비늘 하면 되지 이게 뭔 지랄을 떠는가 싶다. 지랄떠는 게 박민규식 소설의 강점이니 용서하자.  곤두박질치는 무림고수들 이야기니 고삽한 순우리말 고어 정도는 감내하자. 그러고 보니 가장 이상적인 이상문학상 후보가 아닌가 싶다.  

 

  윤이형 - 완전한 항해. 이건 뭐 소설 아바타 쯤 되겠다. 아바타 에디션이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자아로 형성되어 있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에디션은 상대의 모든 것을 흡수하여 새롭고 완전한 존재로 태어나는 과정이란다. 루족 창은 결국 에디션을 거부하고 창공을 향해 날아오른다, 파국의 의미는 역사상 달에 가장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이라나. 가장 멀리, 가장 빠르게... 이런 소설에 적응 안 되는 것 보면 내가 기성세대라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다. 울어야 할지 자위해야할지 역시 판단보류.   

 

  다시는 단편집 같은 것 들고 리뷰 도전 안 할 것 같다. 필요에 의해서 읽은 거지만 리뷰는 간단치 않다. 점점 단편들이 재미없게 느껴진다. 늙는 징후이다.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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穀雨(곡우) 2010-01-2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흐름이 좋으네요. 전 매번 막히고 얽혀서 혼자 미로속을 걷는 기분인데...
다녀간 흔적 보고 잠깐 들른다는 것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전 김연수작가의 만물장수처럼 술술 뽑아져 나오는 이야기의 샘물이 좋더군요.
<밤은 노래한다>의 연변에 가 보기라도 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지요.
아, 그리고 좋은 이야기 많이 들쳐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다크아이즈 2010-01-21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잘 정돈된 리뷰보고 팬이 됐다는 것 아닙니까? 영광이에요. <술술 뽑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을 제가 질투한답니다. 그 중에 물론 김연수도 있지요.

곡우님 많은 것 배우길 원합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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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리뷰에 올려야 할지 페이퍼에 올려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내 맘대로식 리뷰로 보기엔 객관적 정보가 너무 많고, 잡설 페이퍼로 보기엔 책에 관한 얘기가 많고... 내 서재니까 내 맘대로 할란다.  

 

이 리뷰는 내가 진행하는 방송의 스물여섯 번째 시간에 전파를 탄 로쟈의 '인문학 서재' 소개글이다. 시간이 좀 지났구나. 김훈은 일찍이 말했다. 책은 팔려야 그 효용을 다하는 거라고.내 깐에는 최선을 다해 소개했는데, 글쎄 내가 사는 이곳에서는 얼마나 먹혔는지 모르겠다. 인문학은 어려워서가 아니라 관심이 덜 해서 덜 읽힌다고 로쟈님이 말씀하던데, 솔직히 말해서 뭘 모르는 나 같은 이한테는 어렵다. 그래도 자꾸 접하다 보면 나아지지는 않겠나? 

  

이 책, 현재 대박행진 중인 걸로 안다.  그래도 김훈식으로 '알라디너들아, 책 좀 사가라' 

그리하여 책 쓰는 이들이 밥벌이의 비루함에서 조금은 보상받았으면 좋겠다.   

  

 

 

A. S  // 오프닝

A. 오늘 들고 오신 책은 제법 두꺼워 보이는데 어떤 종류의 책인가요?

S. 네, 산책자에서 발간한 로쟈의 인문학 서재라는 책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본명보다는 로쟈라는 닉네임으로 더 알려진 이현우 작가가 쓴 서평 모음집입니다. 인터넷 서점 상의 대중 지성이 오프라인 서재로 옮겨간 대표적인 경우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A. 인터넷 서평꾼이 오프라인으로 진출해 책을 낸 경우군요. 로쟈라는 닉네임의 작가에 대해서 소개해주실까요?

S. 네, 저도 인턴넷 서점을 애용하고, 거기에서 제공하는 블로그 형식의 개인 공간도 갖고 있는데요, 그 인터넷 서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용한 인문학적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 분이 서울대 노어노문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이현우라는 노문학자이자 인문학자인데 로쟈라는 필명으로 활동을 합니다. 그가 써내려간 전천후 인문학 독서의 후기가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단시간에 독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 예술, 철학에 대한 진지한 에세이와 철학자 지젝 읽기, 그리고 번역비평에 관한 주요 글들을 망라해 놓았습니다.




A. 책이 나온지 몇 개월 되지 않는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S. 네, 책머리에 나오는 작가의식에서 살짝 그것을 엿볼 수 있는데요, <나는 하녀고 광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다만 읽고 쓰고 떠들겠다. 뭔가 같이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아지면 지금보다는 조금 나은 세상이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없는 건 아니다. 지금보다 조금은 더 견딜 만한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당신에게 끼니가 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대단찮은 것이어도 ‘겸손한 식사’ 정도는 될 수 있다면 말이다.>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인문학적 갈증에 목말라 하는 일반 독자들에게 청량한 우물 같은 역할을 한 게 좋은 반응을 얻게 된 계기 같습니다.




A. 인문학 하면 철학과 더불어 학문적이고 딱딱한 느낌이 들어 일반 독자들이 접하기엔 쉬운 영역이 아닌데 어떤 부분에서 독자들과 소통이 되었을까요? 

S. 인터넷 서점 상에서는 사실 ‘로쟈’라는 이름은 전설이자 유령입니다. ‘로쟈에게 물어보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터넷 상에서는 인문학 방면의 ‘가장 영향력 있는’ 멘토 역할을 충실히 해냈습니다. 그의 유명한 서재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 가면 인문학 책읽기에 관한 독자로서 궁금한 모든 것이 해결될 정도로 방대한 자료들이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춤꾼 니진스키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블로그를 방문했다가 알게 된 경우입니다. 그의 전공은 노어노문학이지만 전공하지 않은 분야들까지도 많은 정보를 갖고 있고, 그 정보들은 대중지성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정색하고 인문학이란 이런 것이라고 고리타분한 태도를 취하는 게 아니라 제 멋대로 읽고, 삐딱하게 생각하는 인문주의자를 표방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광범위하고 삐딱한 인문학자의 시선에 사람들이 신선함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하루에 천 명 이상이 꾸준히 접속하여 인문학 관련 신간 소식을 접하고, 지적인 갈증을 해소하고 있는데요, 블로그를 슬쩍 훔쳐보면 특별한 사람이라는 찬사가 절로 나옵니다.

A.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나요?

S. 네 거의 모든 인문학적 책들에 대한 서평이 모여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만화와 리빙, 자기개발서 분야를 제외한 모든 지식 분야를 넘나들고 있는데, 예의 제가 말한 니진스키의 영혼의 절규, 를 비롯한 여러 서평들을 접할 수 있는데요, 특히 슬로베니아 출신 사상가 슬라보에 지젝에 관한 관심이 많은 작가로 보입니다. 이단적이고 독특한 지젝의 철학에 매료되어 그에 대한 오해를 푸는데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한국 독자들의 지젝 이해를 위한 징검돌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대한 독자들의 애정은 그가 번역 비평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간 번역서가 나올 때마다 독자들은 로쟈가 평하는 번역 비판에 귀를 쫑긋 세웁니다. 때론 울부짖고, 때론 무모하고, 더러 용감해 보이기도 하는 번역 오류에 대한 그의 비판의 눈은 독자들을 일깨우기에 충분합니다. 번역 비평에 과감하게 실명을 거론하며 번역 교정을 선보이는데요, 그의 고군분투 활약을 통해 번역의 소중함과 책 만드는 일의 윤리성에 대한 공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A. 인문학만으로 독자들을 책읽기의 장으로 이끄는 데는 한계가 있을 텐데요,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S. 네. 읽기와 쓰기에 대한 재미와 문체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며 즐거운 저항이니, 악착같이 즐겁게 책을 읽으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의 문체는 친절합니다. 밑줄과 부연설명과 다양한 눈요기 자료를 덧붙여줍니다. 광기에 가까운 활달함이 가득한 로쟈의 글쓰기는 딱딱함보다는 자유로움이 철학적 사유보다는 시적 환유를 앞세웁니다. 쉽고 경쾌한 문체로 어렵고 심오한 내용을 말하기 때문에 독자들로서는 충분한 배려를 받는 느낌이 듭니다. 지독한 성실성도 한몫합니다. 강의와 집필, 독서와 번역 그 바쁜 와중에도 꼬박꼬박 서재에 새 글을 올리고 문답을 답니다. 이 불타는 사명감은 바로 대중지성에 대한 그의 열망을 말해줍니다. 사라져가는 인문 지성의 숲을 무성하게 일구고자 하는 힘이 느껴집니다.




A. 다재다능한 로쟈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S. 네, 우선 저부터 경계 없이 지적 유영을 즐기는 저자가  부럽기 짝이 없는데요, 매일 책을 읽고 리뷰를 쓰고 독자들에게 신선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그야말로 부러움에서 그칠 뿐입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김훈의 소설 문체에 대해 분석한 것이 흥미를 끄는데요, 그에 의하면 김훈의 아름다운 문체와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은 소설 문법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 질투어린 시선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는 저자의 견해가 왜 그리 신선하게 보이는지요? 산문적 일상을 묘사하는 소설가는 자신만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게 지당하게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지나친 아름다운 문체여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의견이 참 와 닿았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 생활 마찬가지로 산문적이기 때문이라는 그의 통찰에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도구이자 형식인 문체가 내용을 압도해서는 안 된다는 거잖아요.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읽고 쓰고, 떠들고, 생각하고, 주저하고, 이 모든 것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좋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A, S //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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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0 2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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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0 2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1 1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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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16: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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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1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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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0 23: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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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0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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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1-21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야금야금 읽고 있습니다. 빨리 읽을 수 없는 책이잖아요. ^^
근데, 로쟈님이 '독서평설'에는 글을 되따 쉽게 쓰시는데, 이 책에선 좀 '세미나'티가 나요. ㅎㅎ
많이 팔리기엔 그런 한계가 좀 있을 듯...
김훈을 저렇게 말했군여. 저도 저렇게 생각했는데, 뭐라고 말을 못했지요. ^^
그저, 기자같은 말투라고 적고 말았는데...

다크아이즈 2010-01-21 00:27   좋아요 0 | URL
독서평설은 학생 상대니까 쉽게 써줘야 애들이 당황하지 않잖아요. 저도 밥벌이 하느라 애들 논술지도할 때 독서평설 가끔 부교재로 활용했는데, 로쟈님 것은 그래도 어렵달까봐 감히 시도도 안 했다는... 어쩌면 제가 이해 못해서 피했는지도... ㅋㅋ

그건 그렇고, 김훈, 고종석, 김규항 셋의 문체를 비교한 로쟈님의 에세이는 이미 명문이 되어 세상을 유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로쟈님 그런 식으로 써주면 저 같은 평범 독자들도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데... 읽고 읽어도 그 부분은 너무 와 닿아요.
 
고우영 삼국지 三國志 1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중2아들놈 잘 때 읽으라고 열권으로 된 전집을 샀다. 한데 웬 걸, 지 말로는 시시해서 못 읽겠단다. 만화로 된 건 도서관에서 신물나도록 여러 버전으로 읽었단다. 결국 요즘은 이문열 버전으로 잠자리 들기 전에 조금씩 읽는 것을 봤다. 이것도 놈이 6학년 때 샀는데, 책꽂이 너무 높이 있어서 못 읽었다는 핑계가 있지만 실은 지 아무리 똑똑한 녀석이라도 6학년이 읽기엔 무리일 것 같아 요즘 제 방 책상에 가져다 놓았더니 읽기 시작한다.  

나는 삼국지 그 어느 버전도 다 읽지 못했다. 무지를 면하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더 쉬울 고우영 것부터 야금야금 읽기 시작한다.  한 권에 한 개씩만 건져도 되겠다, 싶은 심정으로.  

1권에서는 쪼다 한 명 발견한 걸로 만족이다. 유비 쪼다야 당근 패스. 유비가 쪼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니니. 하기야 적벽대전 영화에서도 그렇게 보이더라, 누구나 유비 같은 쪼다 기질이 드러날 때가 많으니 차라리 인간적이다. 고우영이 오죽하면 책상 앞 펜대 든 쪼다인 자신이야말로 유비라고 동일시하겠는가! (고우영식 표기법은 유비 "쬬다"이다. 진정 매력적인 쪼다다) 

십상시 환관들 치맛자락(?)에 휘둘린 영제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쪼다였다. 십상시는 후한말 영제 때에 정권을 잡아 조정을 농락한 10여 명의 중상시, 즉 환관들을 말한다. 십상시들은 많은 봉토를 거느리고 그 위세가 대단하였단다. 특히 그들의 곁에서 훈육된 영제는 십상시의 수장인 장랑을 아버지, 부수장인 조충을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니 쪼다의 반열 중에 가히 황제급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영제 쪼다를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실은 십상시에 관해서 말하고 싶었나보다. 인간 속성은 자고로 권력(돈) 지향적이다. 특히 권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속성을 직접 체험한 십상시들은 거세된 남성성을 보상받기 위한 차선으로 그 권력을 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자 없는 설움에 돈과 권력보다 나은 위안은 없다. 비록 파국이 예견되더라도...

≪후한서(後漢書)≫권78 <환자열전(宦者列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부풍 사람 맹타는 재산이 많았으며, 장양(張讓)의 종과 친구가 되어, 자주 찾아 선물을 하며 안부를 묻는데 아낌이 없었다. 종들은 모두 그가 덕이 있다고 여겨서 맹타에게 '그대는 무얼 원하시오? 힘써 처리해보리다'라고 물었다.

맹타가 '저는 당신들이 나를 위해 절을 한번 해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빈객이 장양을 만나기를 원하는 수레가 항상 수천 대가 되었는데, 맹타는 그때 장양을 만나기 바랐지만 뒤에 왔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노비 감독관이 여러 노비를 이끌고 길에서 맹타에게 절을 하고, 마침내 모든 수레가 문안으로 들어갔다. 빈객이 모두 놀라, 맹타가 장양과 아주 친하다고 여겨서, 진귀한 물건을 그에게 선물하였다. 맹타는 이것을 나누어 장양에게 선물하니, 장양이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맹타를 양주자사로 삼았다."  

권력에 파생되는 이런 코메디적 에피소들이야말로 권력의 속성을 제대로 말해주고 있다. 주인이 왕이면 그 집 종도 왕이다. 처세에 능한 저마다의 '맹타'들은 어디를 공략해야 그 권력 가까이 갈 수 있는지를 제대로 안다. 권력(장양)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종과 친구하는 맹타가 되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루하나 현명하기(?) 그지없는 맹타들의 맹렬한 줄서기... 이게 현실이고, 정치이고 곧 삶이다.  

각자 버전의 삼국연의를 읽는 의의가 이런 데 있는 모양이다. 고전을 읽으면서 현재를 해석하라고 누군가 뻔한 충고를 하지 않아도 그렇게 자기해설을 하게 만드는 것. 읽는 권 수가 한 권씩 늘어날 때마다 한 개씩만 머리에 담아보자. 그렇게 도돌이표 하다 보면 얼추 무식함은 벗어나지 않겠는가?  아직 삼국지 제대로 안 읽은 나 같은 사람은 이처럼 만화로 된 것 먼저 읽고, 풀어 쓴 것 읽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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