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에 가면 신라가 보인다
윤석홍 지음 / 산악문화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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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끈한 시집을 선물 받았다. 윤석홍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을 낸지 십여 년 만이란다. 소리 소문 없이 출간된 시집 제목은 ‘경주 남산에 가면 신라가 보인다’(산악문화, 2010)이다. 남산에 그렇게 많은 골짜기가 있다는 걸 시인의 시집을 통해 알았다. 남산에 대한 내 무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의 시편이 나는 미덥다. 산이 좋아 골골마다 행장 꾸리고 나섰을 시인의 모습이 시집과 오버랩 된다.

  아직 몇 편 밖에 못 읽었지만 그래도 리뷰 쓰고 싶은 욕심에 덜컥 연필을 들었다. 이런 시는 한꺼번에 몰아 읽어서는 안 된다. 숨겨 논 추파춥스를 혀끝으로 녹여먹듯 야금야금 읽어야 제격이다. 리뷰 제목 ‘시 한 편 건졌다’는 시인의 시 한 구절에서 따왔다. ‘비석대골’ (87쪽) 마지막 행에서 빌렸음을 밝힌다.

  나는 시를 잘 모른다. 하지만 내 취향에 맞는 시를 발견하면 긴 글에서 맛볼 수 없는 야릇한 희열을 느끼곤 한다. 그리하여 오늘도 시의 변방을 기웃거린다. 짓는 자가 아닌 읽는 자로서의 그 서성거림이 언제나 즐겁다. 세상에 시인은 많고, 좋은 시 또한 지천이니 입맛 따라 시를 고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어쩌면 나는 윤석홍 시인의 시보다 그 인품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시보다 더 시적인 그 행보를 좇다보면 머리에 푸른 잎 돋고 이 봄날은 마냥 계속될 것만 같다. 산을 좋아하는 그의 생에 대한 눈썰미는 산에서 완성된다. ‘나비의 겹눈은 명확한 상을 버리는 대신 / 세밀한 움직임을 얻는다 했지요 / 무엇 하나 고정된 것 없는 봄날 / 거짓 없는 진행형을 봅니다 / 그렇습니다, 흔들리는 봄날도 진짜입니다’ (43쪽)라고 시인은 남산 정우골에서 읊조린다. 나비의 겹눈으로 보이는, 혼곤히 흔들리는 봄날마저 세밀하게 보면 진짜 봄날인 게다. 시인의 눈에만 이런 발견이 쉽게 친구 되는 것 같아 질투가 날 정도이다.

  몇 년 전 시인의 소식을 한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일 년 간 모아온 원고료 전액을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기부했다는 기사였다. 당시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큰 돈 아닌 원고료를 차곡차곡 모은 것도, 그것을 좋은 일에 쓰려고 맘먹었다는 것도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인이 존경스러워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씩 발표하는 시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덕이 쌓이고 / 시간이 흐를수록 / 영혼이 맑아진다면 / 어느 날엔 깨달음의 / 소리도 들리’(37쪽)는 시인의 목소리는 그의 가슴이 내는 소리다. 시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다만 시가 시인의 영혼을 불러내고 있 것이다. 

  잠깐의 산행에서도 그의 성품이 드러난다. 사람을 아끼는 나머지 동료들에게 비옷이나 사탕을 나눠 주는 것은 당연하고, 산을 좋아한 나머지 널브러진 쓰레기와 빈 깡통을 줍는 것은 취미가 되어버릴 정도이다. 언젠가부터 시인의 기부 선행을 벤치마킹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심한지 몇 년 만에 드디어 나도 시인의 흉내를 내볼 수 있었다. 내가 봉사하는 교도소의 회원들에게 일정 금액의 영치금을 넣은 것이다. 열세 명의 회원들에게, 내가 일 년 간 노동해서 번 돈의 일정 퍼센트를 기부했다. 그런 기특한 짓을 하고 가장 먼저 자랑한 사람은 물론 윤석홍 시인이었다. 착한 사람에게 착한 일 했다는 칭찬을 듣는 것만큼 기쁜 것도 없었다.

  ‘마음의 눈으로 살펴보고 싶은 / 이 환장한 봄밤’ (86쪽)을 가끔씩 맛볼 수 있다면 그건 순전히 윤석홍 시인 같은 맑은 영혼의 소유자들 덕분이다. 착한 사람들은 덜 착한 나 같은 사람을 깨쳐줄 의무가 있다. 그것도 한 편의 시를 통해서라면 더 말해 무엇 하랴. ‘몇 번이고 돌아가야 하는 길 대신 / 사방에 길을 내어 빠르게 오른다면 / 우린 우리의 길을 잊을지 모른다 / 그 길에 두고 온 / 마음 한 자락마저 잃’ (92쪽)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오래 묵혀가며 그의 시집을 들춰볼 것이다. 몸살 앓는 봄밤에 끙끙대면서도 이 글을 달갑게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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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양장) -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혼마 야스코 지음, 이훈 옮김 / 역사공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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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과 극은 통한다. 지나치게 활발하거나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제 안의 우울을 감추기 위해 그런 행동양식을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울을 포장할 매혹적인 통제력마저 놓쳐버린다면? 맥 풀린 그 우울은 ‘말’까지 버리라고 강요할지도 모른다. 혼마 야스코의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역사공간, 2008)를 읽으면서 공권력의 횡포 앞에서 개별자의 운명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은 ‘할 말 없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인간이 존엄하다고 말할 때, 그 존엄은 개별자로서의 존엄을 말하지 힘의 논리 앞에서 그것을 양보하거나 희생해도 좋은 존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언제나 개별자의 인권은 권력의 마수 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덕혜옹주도 그런 길을 걸었다.

  혼마 야스코가 쓴 이 평전은 제목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덕혜옹주와 소 타케유키’ 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덕혜옹주 못지않게 남편 소 타케유키에 관한 변호가 많은 내용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어떤 제목으로 출간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덕혜옹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었던 소 타케유키를 위한 평전의 몫도 크다는 것이다.

  타의에 의해 뒤틀린 그들의 운명은 그 둘에게서 ‘말’이란 것을 뺏어가 버렸다. 혼마 야스코는 시종일관 혼신을 다해 그 둘에게서 연민의 시선을 떼지 않는다. 덕혜옹주의 일본 시절후견인 역할을 했던, 배다른 오라버니 이은 왕세자와 올케 이방자 여사에게는 서운함을 내비칠 정도로 덕혜옹주의 입장이 되어 그녀를 이해하고 재조명한다. 대마번주의 아들이라는 백작 신분으로, 한 왕국의 공주(비록 망국의 왕족이긴 하지만)와 정략결혼해야 했던 소 타케유키도 운명의 희생자였음을 작가의 시선은 놓치지 않고 있다.

  사춘기 시절부터 앓고 있던 덕혜옹주의 정신분열증은 그들 결혼 생활에 치명적인 방해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라 잃고 부모 잃고, 말 설고 사람 선 이국땅에서 우울이 깊어지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남편 소 타케유키의 배려와 관심이 있었다 한들 근원적인 아픔과 고통이 제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을 덕혜옹주에겐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끝내 정신병원까지 가게 되고, 이혼을 거쳐, 말까지 잃게 되는 건 당연한 순서처럼 보였다.

  소 타케유키 역시 덕혜옹주 못지않은 부침의 세월을 보냈다. 귀족 신분으로 태어나 평탄한 세월을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권력의 희생자라는 면에서는 아무리 연민해도 지나치지 않다. 소 타케유키로서는 최선을 다한 결혼 생활이었다.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왕녀의 지참금을 보고 결혼한 것도 아니고, 덕혜옹주에게 비정한 사람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다만 운명이, 상황이 그들을 갈라놓았을 뿐이다.

  덕혜옹주와의 사이에 유일한 혈육이었던 마사에마저 신혼 생활 몇 개월 만에 자발적 행방불명이 되었을 땐, 마지막 희망마저 놓친 심정이었을까? 소 다케유키 역시 하찮은 말을 버려버렸다. 대학 교수로서 학자로서 말년에 인정받는 삶을 살았지만, 소 타케유키는 죽을 때까지 덕혜옹주에 관한한 그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 다만 몇 편의 시로 그 시절을 안타까운 은유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197쪽)

   덕혜옹주가 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었다면, 소 타케유키는 말을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경우였다. 말 못하는 자와 말 하지 않는 자의 내면은 상통한다. 개별자의 우울이 공권력 앞에 무너질 때, 말을 버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항거가 없는 모양이다. 말 버린 자들은 말이 없는데, 말 많은 자  이렇게 남아, 그 둘의 실어를 공감하는 말을 휘갈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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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8-05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 다케유키도 말을 버렸군요.
낙선재로 덕혜옹주를 만나러 왔었는데 돌보던 이가 끝내 허락하지 않아서 못 보고 돌아갔하고...한국사 전에 나왔어요. 그는 마지막으로 옹주를 보고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겠죠...

다크아이즈 2010-07-23 04:17   좋아요 0 | URL
8월 말에 소설 덕혜옹주로 공개토론회 하는데, 저는 이 책에 더 구미가 당기네요. 주관은 개입되었되, 감정 과잉이 덜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여자란 무엇인가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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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철이다. 6․2지방 선거를 앞두고 홍보 전략도 각 당의 노선만큼이나 다양하다. 그 중 홈페이지에 올린 여당의 한 동영상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인기 있는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을 패러디한 ‘선거 탐구생활’이란 홍보 영상물인데, 하필이면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이란다. 여성 유권자 및 야당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건 당연하다.

  논란이 증폭되자 해당 동영상은 이틀 만에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다행한 일이나 여성유권자들에 대한 사과보다 변명이 앞서는 것도 영 마뜩찮다. 영상 제작 관계자에 따르면 ‘정치에 관심이 없는 20대 여주인공이 정치와 한나라당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는 점을 원작을 빌려 말하려고 했던 것’이라나? 남녀의 차이점을 꼬집어 공감을 산 원작과 여성을 노골적으로 비하한 패러디물은 그 거리가 한참이나 멀다는 것을 그들만 모르는 것일까. 

  “뉴스 좀 보고 살아라, 그러니까 아는 게 하나도 없지.”

  “여자는 뉴스를 바퀴벌레 다음으로 싫어해요.”

  동영상에 나오는 여성 비하 발언 내용 중 일부분이다. 여자는 현 정부가 원전수주 계약한 나라 이름을 힌트까지 줘도 못 맞힐 뿐만 아니라, 공약보다는 후보자의 외모를 기준으로 투표 한단다. ‘드라마는 재방 삼방까지 보지만 뉴스는 절대 안보는 여자’라서 시사 문제와 공약집은 수능보다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여자가 드라마에 빠질 때, 남자는 스포츠에 빠지고, 반대로 여자가 스포츠 채널에 관심 가질 때, 드라마에 몰입하는 남자도 있을 수 있는 게 사람살이 아닌가. 남녀의 다름을 비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느 한 쪽의 우위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다. 여성의 비정치적, 비시사적 성향이 도마 위에 올라야 할 이유도 없거니와, 여성이 비정치적, 비시사적이라는 그 생각마저 편견이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 것인가.

  “여자가 아는 건 쥐뿔 없어요.”  

  그러니 선거할 때, 무엇이든 잘 아는 남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것도 여당 후보를 찍어야 한다는 것일까? 선거에 무지한 여성 유권자를 겨냥한 여당의 흡인 전략으로 이런 동영상을 기획했다면 타깃을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다. 선거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것은 개별자 나름의 사정이지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사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뉴스를 싫어하고, 상식에 엉뚱한 대답을 하고, 무식하다고 자책하는 여성이 대다수 여성 유권자를 대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을 남성적 시각으로 보려는 서구의 정치적 상황이 이런 편협한 생각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도올 김용옥은 ‘여자란 무엇인가’(통나무,2000)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구 문명은 바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철저한 부정, 즉 여성의 비존재라고 하는 여성성의 부정으로 귀착된다.’ 부연 설명하자면 유목으로 대표되는 남성 중심적 문화가, 농경으로 상징되는 여성 중심적 문화를 지배하게 된 것이 서양 역사의 자연스런 흐름이란다. 신의 인간 창조에 여자가 끼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들의 신이 철저히 여성성을 부정함으로써만 그 존립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선거제도 역시 서구에서 유입된 것이니 예의 남성 위주의 생각도 자연스레 따라온 것일까. 

  반면, 도올에 의하면 동양은 여성과 남성의 조화 문명이었다. 철저한 남녀 평등적 철학구조를 가졌다. 선거제도에서 여성성의 회복을 인정하는 열린 시각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이번 선거는 어느 한 성만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성의 조화로운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한다. 투표를 통해 여성의 인권과 정치수준이 결코 그들이 생각하는 저급한 것이 아님을 보였으면 한다. 여성 유권자들의 소중한 한 표가 상생을 위해 나아가는 조화로운 날갯짓임을 분명히 알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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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노니는 집 - 제9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30
이영서 지음, 김동성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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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맘껏 읽고 싶다는 욕심 앞에서 언제나 게으름이 방해꾼이다. 이 명백한 사실이 부끄러워 ‘바빠서 못 읽는다’ 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슬쩍 갖다 붙이기도 하는 것이다. 급기야 어렵고 두꺼운 책보다는 쉽고 간편한 책을 찾기에 이르렀다. 못 읽는 것보다는 그래도 읽는 게 낫다는 허영이 그런 타협을 불러왔다. 그 타협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필요에 의해서든, 한 박자 쉬어 가고 싶은 마음에서든, 집어 들게 되는 어린이 도서들에서 의외의 책 맛을 발견한다. 

  이영서 작가의 ‘책과 노니는 집’(문학동네, 2009)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한 편의 동화가 그 어떤 읽을거리보다 많은 것을 독자들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주인공 장이는 유일한 가족인 필사쟁이 아버지마저 잃는다. 금서인 천주학 책을 필사했다는 이유로 관아에 끌려가 산송장이 되도록 맞아 장독이 올라 앓다 죽는다. 천애고아인 장이가 만나는 주변인들 덕에 장이는 몸과 맘이 한 뼘씩 커간다. 

  양아버지 역할을 해주는 최 서쾌의 엄격함과 단호함도 미덥고, 다사롭고 이해심 많은 홍 교리의 심성은 죽은 아버지를 닮아 있어 독자로서 감정이입이 금방 된다. 대상에 대한 연민과 다정이 넘치는 기생 미적이가 장이 곁에 있는 것도 다행이고, 못생기고 당돌한 낙심이의 동심은 순수해서 정감이 간다. 똑부러지고 야무진 여동생 같은 낙심이에게 장이는 한없는 우애를 보여준다. 남동생 백일 값을 대신해 팔려온, 가난한 딸 부잣집의 낙심이. 상처를 꽁꽁 동여맨 낙심의 존재를 장이만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장이는 낙심을 동생처럼 끌어안는다.

  이 책을 읽어보라고 적극 추천해준 이가 낙심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주영이었다. 주영이는 내가 진행하는 어린이 독서교실의 회원이다. 야무지고 당찬 주영이는 ‘책과 노니는 집’을 꼭 읽어봐야 한다고 했다. 장이와 낙심이에게 희망을 주는 어른들이 많이 나온다고 했다. “책이 현실보다 훨씬 좋아요.” 책을 권하면서 주영이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냐고 물었다. “현실에서는 홍 교리 같은 어른이 없잖아요. 미적 언니 같은 고운 사람도 만나기 힘들고요.”

  상대적으로 소외된 계층 아이들이 모인 곳이라서 그런지 쉽게 마음 문을 열지는 않았다. 사람에 대한, 특히 어른들에 대한 불신이 말 속에 장전되어 있었다. 뭔가 모를 뜨끔함이 가슴을 후렸다. 주영이 뿐만 아니라 대체적으로 아이들이 내뱉는 말들은 희망적이기 보단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주영이처럼 자신이 관심 있게 읽은 책 이야기를 할 때는 확실한 자기 의견을 말할 줄도 알았다. 양반이면서도 하찮은 필사쟁이 아들인 장이와 깊은 대화를 주고받는 홍 교리, 낙심이 같은 천덕꾸러기를 상대해주는 기품 있는 기생 미적이 같은 사람을 책 속에서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책을 읽으면 기쁘지만 책 속에서 벗어나면 이건 현실이 아니야, 라고 슬퍼진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환경적 요인으로 마음을 다친 아이들은 현실보단 책이란 도피 속에서 위안을 얻으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내겐 다행이자 안타까움으로 비친다. 책이 있어서, 좋은 동화가 있어서 자신들의 감정을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은 다행이지만, 그것이 도리어 현실을 부정하는 기제가 되는 것은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책을 사 모으느라 몰골이 누추하다. 책이랑 정분이라도 난 것인지 읽고 싶은 책을 못 얻으면 안절부절못하지.> (85쪽) 책을 좋아하는 홍 교리의 말처럼 아이들이 책 속에서라도 위안을 얻고, 나아가 현실에서도 그런 위안을 고스란히 얻어갈 수 있기를 감히 바라본다. 홍 교리처럼, 미적처럼 장이를 챙기는 어른이 많은 세상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다. 책을 통해 동심을 열게 하는 시중이야말로 큰 보람 중 하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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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7-21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영주라는 아이 말에 참 미안해지는... 품격있는 리뷰에요.

다크아이즈 2010-07-23 04:24   좋아요 0 | URL
뭔, 품격씩이나~ 숱한 주영이들이 우리 언저리에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발견했다는 충격으로 몇 달 심란했지요. 순오기님이라면 이런 혼란을 미리 겪었을 것 같은 예감이...
 
의형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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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역지사지 




  지인들과 영화를 봤다. 두 팀으로 나눠졌다. 각자의 취향 또는 사정에 따라 관람한 뒤 ‘헤쳐모여’ 하기로 했다. 내가 속한 쪽 영화가 조금 빨리 마쳤다. 나중 팀이 나오려면 일이십 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내 기준으로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일정이 빠듯한 사람들에게는 그 시간도 아까웠으리라. 먼저 점심 먹으러 가잔다. 내 맘이야 조금 기다리고 싶다. 하지만 다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바쁜 사람들도 있고, 감기 걸린 이도 있어 따뜻한 곳으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급히 식당으로 옮긴다. 거기서도 기다렸다 같이 주문하자고 말하지도 못한다. 다들 사정이 있으니. 시킨 음식을 먹고 있는데 늦은 일행이 들어온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 부러 늦은 것도, 긴 시간도 아닌데, 좀 더 기다리자고 말할 걸. 내가 뒷팀 멤버였더라도 기분이 좋았을 것 같지는 않다.

  오묘한 게 인간이라 우리는 사소한 것에서 맘 상하기 쉽다. 작은 것부터 역지사지하는 게 원만한 인간관계의 기본인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내 비겁을 탓하며 삼키는 비빔밥이 계란껍질 섞인 것처럼 껄끄럽기만 하다.

  불편한 맘을 걷어내고, 혹 맘 상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커피집에 들른다. 기분 좋게 커피 한 잔씩 마셔도 되는데, 커피 값 지불하는 입장을 생각하는 아줌마표 배려가 발동해 사람 수에 못 미치는 커피를 시킨다. 카운터의 기꺼운 동의를 구했음에도 ‘어딜 가나 아줌마들 매너 없다’라는 책잡힐까 또 맘이 불편하다. 가장 꼴불견 손님들 중 하나가 자리 값 안 내고 커피 마시는 사람이라고, 커피숍 하는 지인에게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커피숍은 커피만 마시는 곳이 아니라 여타 다른 서비스(이를 테면 안락한 의자, 커피 향, 분위기, 음악)를 제공하는 대가를 요구하는 곳이니 일행 중 누군가 커피 안 마시고 자리 차지하는 것은 내 생각에도 결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사람 수대로 커피 값을 다 받지 않은 주인의 영업 마인드에 감격까지 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에어컨 바람에 노출되니 콧물이 난다. 구석진 자리라 다른 일행을 지나 냅킨을 가져오기가 영 불편하다. 마침 냅킨 코너에서 정리하는 종업원이 보인다. 휴지 좀 주세요, 했더니 바로 자신의 코앞에 있는 냅킨을 턱으로 가리킨다. 셀프 서비스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셀프서비스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해석한 어린 종업원이 괘씸하기만 하다. 바로 앞에 있는 냅킨 한 장도 손님에게 갖다 줄 수 없는 게 셀프 서비스의 기본 정신인가 하는 서운한 맘이 생긴다. 사람 머릿수대로 시키지 않은 커피 때문에 이런 불친절을 당하나 싶어 괜히 소심해진다. 

  역지사지해서 종업원 맘이 되어본다. 우루루 몰려온 아줌마들, 커피는 사람 수 반 만 시켜놓고, 쓸 데 없어 뵈는 수다만 늘어놓는다. 남편 흉, 음담패설, 자식자랑 등 뱉어내는 얘기마다 뼈와 살이 되는 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에라, 모르겠다. 교양 없는 저 아줌마들에게 불친절로 응대하는 건 당연하다. 이런 맘이었을까. 이십대 초반엔 결코 완벽하게 공감할 수 없는 아줌마들의 세계가 있으니 그 종업원을 이해하도록 하자. 아줌마가 될 것 같지 않은 어린 아가씨도 언젠가는 제 엄마가 걸었던 아줌마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영입된다. 그 때, 지금은 추태로만 보이는 아줌마들의 절절한 일상을 뼛속 깊이 이해하게 되리라. 

  기분 좋은 아줌마표 수다가 끝나고 나오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내일 행사 관련 차편 문의 전화다. 모일 장소가 정해졌는데도 자신이 있는 곳을 버스가 경유해갔으면 하는 논의를 해온다. 정해진 몇몇 장소가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지점에 차가 서주기를 바란다. 전혀 악의 없는 그 문의를 운전하는 사람 입장 생각해서 거절해야 하는 맘 역시 불편하다. 봉사차원에서 운전해주는 분더러 우리들의 고용인이 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 하루 잘잘한 일과에서 책 한 권 보다 귀한 것을 얻는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또 헤아리는 것. 그것만이 사람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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