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 창비시선 253
문성해 지음 / 창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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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은 충격이다.

  문성해의 시집을 산 지는 한 달이 넘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들춰보았다. 간만에 알라딘에 들어와 독후감을 쓰려고 보니 그 어떤 리뷰도 없다. 조금 충격 받았다. 유명 시인은 아니지만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문성해 시인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매니아 한 두명 정도는 리뷰를 남기지 않았을까, 내심 기대를 했던 것이다. 한데 아무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시집이 나온지 일 년이 훨씬 넘었는데...

  시인이 대중적 인기가 없어서 그런가 싶어 그나마 대중적, 문학적 성과를 거뒀다고 회자되는 문태준 시인의 <맨발>을 클릭해보았다. 웬 걸? 그곳 사정도 여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겨우 세 편 정도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대한민국에 시를 사랑하는 인구가 소설이나, 여타 장르를 사랑하는 인구보다 훨씬 많은 걸로 안다. 한데 독후감 실적은 여타 장르에 비해 영 아니올시다, 이다. 알라디너들만 시에 대한 독후감을 쓰지 않을까, 아니면 시를 공부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은 독후감 따위에는 관심이 덜하다는 것일까. 괜한 호기심 하나 추가이다.

  각설하고, 문성해의 시를 좋아하게 된 것은 '공터에서 찾다'라는 시 때문이다. 언젠가 지방지 신춘문예 당선시에서 그 시를 발견하고  나는 전율에 휩싸였다. 시가 뭔지 잘 모르던 시절, 시를 이렇게 쓰는구나, 라고  한 방 먹이게 한 작품이 바로 '공터에서 찾다'라는 시였다. 혹 내가 시에 대한 편견을 갖고 이런 시를 좋아하나 싶어 심사위원을 살펴보니 이성복 시인이었다. 꼭 대가가 선택했기 때문에 믿음이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단에서 내로라 하는 시인이 뽑은 시를 내가 좋아하게 됐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그 뒤 어느 문예지에서 발견한 '봄밤'이란 시도 나를 매료시켰다. 그 때 결심했다. 이 시인의 첫 시집을 꼭 사야겠다고. 시인은 내 결심에 화답이라도 하듯 몇 년 뒤 중앙지 신춘문예에 재당선 되었고(그 때 제목은 '귀로 듣는 눈'인가 그랬는데 그 시는 개인적으로 별로 와닿지 않았다. 독자로서의 내 마음을 아는지  이번 시집에 그 시가 수록되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늦은 감은 있지만 그녀의 시집이 내 손아귀에 들어온 것 자체가 행복하다. 돈 안 되는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가장 힘이 되는 것은 그들의 시집을 사주는 실존적 행위 자체일 것이다.  이렇게 당신의 시를 사서 읽고 있는 독자들이 있으니 힘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두 번째, 세 번째 시인의 시집이 나오면 기꺼이 사서 읽을 용의가 있다고 고백까지 해보는 것이다.  일반 독자인 나 같은 사람말고 진짜 시를 좋아하거나, 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시에 대한 독후감도 많이 올리기를 바라며.

  이제 고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 의심은 더욱 식욕을 부풀리고 나는 // 이것을 기꺼이 먹기로 작정한다 //  완강하던 페트병에 드디어 금이 가고 //  텅 빈 속살 들여다본 순간, 나는 // 속았음을 직감한다

  어둠 속을 휘적휘적 걸어갈 때 // 앗! 저기 또 푸른 슬리퍼 한 짝이...... //  내 야성의 턱뼈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문성해 - 공터에서 찾다, 부분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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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1-29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성해 시인은 처음 만나요. 허긴 처음 아는 작가가 어디 한 두명이래야 말이죠.
저도 예전에 시집 리뷰 한 세편 썼던가 그래요.
뭐, 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의 책만 썼으니 별로 반응이 없습니다.
한국문학, 특히 소설류에는 와르르 몰리면서 시인에게는 참 인색한 동네에요.
다만, 몇몇분은 시집을 아주 좋아하죠. 많지 않아서 자주 눈에 띄지 않을 뿐에요.
아, 저는 시집을 좋아하지만 '시집'은 가지 않았답니다.(왜 말하는건데?)ㅋ

다크아이즈 2006-11-29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저도 '시집'은 가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살아요. '결혼'은 했구요. 너무 페미니스트적 발언인가?^^*
 
천년의 그림여행 - 양장본
스테파노 추피 지음, 이화진.서현주.주은정 옮김 / 예경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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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이 이래저래 어설프다.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책을 정리하던 딸아이가 화집 한 권을 들춰보인다. 시대별로 짜깁기한 서양 그림책이다.

  "<시녀들>에서 화가가 그리는 초상화는 공주가 아니라 왕 아니에요?"

  뜬금없는 질문에 무슨 소린가 싶다. 말인즉슨,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작품 <시녀들>에 관한 화집의 설명이 그 그림을 직접 보고 온 엄마의 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워낙 중의적인 감각이 내포된 그림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딸이 보던 화집을 같이 들여다본다. 과연 화집 설명만으로 유추하자면 그림 속에 직접 등장하는 벨라스케스가 캔버스에 붓질하는 대상이 공주 마르가리타의 뒷모습일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해설자가 잠시 착각했을 수도 있겠다고 딸아이에게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전면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당연 마르가리타 공주이다.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4세의 첫 아이인 금발머리 소녀는 흰 드레스로 한껏 치장한 채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다소 과장된 듯한 시녀들의호위 속에 오른쪽의 난쟁이 부녀가 관람자의 시선을 강렬하게 붙잡는다. 왕궁 안 어릿광대인 난쟁이는 오늘 만큼은 졸음에 겨운 개 등짝을 후려차도 좋다. 마음껏 귀족 흉내를 내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개를 살짝 돌린 공주의 기품있는 미소는 온전히 국왕부부를 위한 것이다. 그 환한 공주의 재롱을 보며 국왕부부는 궁정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리는 초상화의 모델이 되고 있는 중이다, 궁정 오후의 망중한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결코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펠리페4세 국왕부처의 존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약 그림 속에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유추는 불가능하다. 아니, 화가 벨라스케스만 등장했다 해서 섣불리 그러한 결론에 디다를 수는 없다. 이 그림의 관전 키포인트는 왼쪽 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캔버스와 붓을 든 벨라스케스의 모습이다. 화면을 압도하는 세로의 긴 캔버스는 뒷면만 보여준다. 따라서 그 캔버스 속에 작업하고 있는 화가의 모델은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 때 관전자의 눈이 놓치지 않아야 할 소도구가 있으니 바로 뒷면에 등장하는 벽면의 거울이다. 원경의 거울 속에는 합스부르크 왕가 특유의 긴 얼굴과 주걱턱을 가진 국왕이 왕비와 함께 희미하게 비치는 것이다. 이 상황까지를 이해한다면 감춰진 캔버스 속 화가가 그리는 대상은 결코 공주나 시녀가 아닌 국왕 부처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중 삼중의 액자소설이 이보다 더한 흥미를 가져다줄 것인가. 스페인 여행 당시 프라도 미술관의 보물이라는 이 그림을 보면서 느낀 감흥은 화가 벨라스케스의 예기치 못한 위트와 사물을 보는 세련된 전복의 유희에 박수를 치는 정도였다. 하지만 집에서 들여다보는 그림 속에서 또 다른 벨라스케스의 스승을 발견하는 기쁨까지 누린다. 17세기의 <시녀들>이 풍기는 이 소설적 기지는 이미 한 두세기를 앞선 르네상스 미술에서  시도되었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얀 반 에이크는 '아르놀피니 초상화'에서 이미 화가 자신을 회화 속에 등장시키는 매력적인 작업을 했던 것이다. 의뢰인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배경인 볼록 거울 속에 자신과 조수인 듯한 두 사람을 그려넣었던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 약혼식일지도 모를 아르놀피니의 숨길 수 없는 증거자가 되기로 작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은유적 유머에 만족하지 않고 반 에이크는 볼록 거울 위에다 '얀 반 에이크, 여기에 있다!' 라는 과감한 흔적까지 넣었다. 이보다 더한 엔도르핀 솟구치는 소설이 있을까!

  일찍이 이 그림을 풍문으로라도 접한 벨라스케스는 자신만의 진화를 더해 시녀들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궁정화가의 자리는 그러한 자신의 작업에 날개를 달 수 있는 필요충분이 되었던 것이다.

  '공주의 등을 그리려한다는 화집 해설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내 말에 딸아이의 수긍을 받아내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 편의 명화 속에 정신과 육체가 살아 숨쉬는 화가들을 발견하는  자체야말로  흥미롭고 경이로운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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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9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06-11-29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4:30분 귓속말님) 이런 실수! 고쳤어요. 'ㅈ'이 은근히 외로웠겠어요.^^* 네. 중3 딸내미가 있답니다.
 
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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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나자. 천 오백 년을 훌쩍 거스르는 타임머신을 타고. 이 황홀한 과거 여행을 주선하는 이는 다름 아닌 <미실>과 <측천무후>이다. 아니 그것은 틀린 말이다. 김별아와 샨사라고 해야 옳다. 이 두 소설가로 인해 미실과 측천무후라는 걸출한 여걸을 만나게 됐으니 여행의 공은 마땅히 그들 몫이다.

  7세기 전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천하를 쥐락펴락했던 두 여성.

  일억원 고료의 국내 문학상을 거머쥔 <미실>이나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지지자를 끌어모은 <측천무후>는 분명 다른 소설이다. 그 진휘 여부로 사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필사본 '화랑세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미실과, 사학계뿐만 아니라 영상업계에서도 제법 등장하는 측천무후. 전자는 화랑제도가 숨쉬고 있던 신라시대가 배경이고, 후자는 당나라 초기가 그 무대이다.

  문체에서도 두 작품은 차이가 난다. 우리글로 쓴 미실은 예스럽고 정갈한 문장이 적재적소에 적확하게 구사되고 있다. 고전에서 소재를 따와서 그런지 때론 장점 많은 그 문체들이 고삽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리 큰 단점이 될 수는 없었다. 불어로 발표된 것을 번역한 샨사의 측천무후는 그 담백하고 정갈한 면에서는 미실과 같으나 가끔씩 나타나는 몽환적 분위기는 독자로 하여금 혼란에 빠지게도 한다. 따라서 단단하고 정제된 문체라고 상찬하는 세계 언론에 그다지 동조하고 싶지는 않다. 작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짚어낼 수 없는 번역문학의 한계 때문에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 밴 공통점이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선, 실재했던 두 여걸의 이야기를 여성주의 입장에서 당당하게 이끈 점이 와닿는다. 미실과 측천무후는 본능에 충실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판에 박힌 듯한 요부나 비운의 주인공 역할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운명과 맞섰고, 거침없이 내달렸으며, 끝내 승리했다. 그 승리의 정점에서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야 말았다.

  그간 역사의 모든 주체는 남성이었다. 권력과 야망은 그들의 몫이었고, 복종과 굴종은 여성의 것이었다. 따라서 남성적 역사관에서 본다면 미실과 측천무후는 요부이자, 책략자요, 모사꾼이며 잔인한 모성의 소유자여야만 한다. 하지만 소설에서 그들은 당당한 열정과 솔직한 욕마응 숨기지 않은, 그야말로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고자 했다.

  두 여인이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색공'의 형식디었다는 게 안타깝기는 하다. 성상납을 말하는 색공. 당시의 신분질서나 시대상을 놓고 볼 때 그것은 단순한 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라나 당이나 사정은 비슷했다.) 여성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자발적이고도 고도한 정치적 행위였음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

  누대의 왕과 왕실 남자들을 마음껏 휘둘렀던 미실과 측천무후. 그 둘은 남성중심의 질서에 모반을 꾀하고 스스로 중심이 되고자 했던 당찬 여성들이었다. 절대자로서의 고독들 안으로 잠재우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당돌한 갈망을 희구하던 주체적 삶의 선구자였다.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온당한 여성의 삶인가. 작은 것 하나에도 상처받기 쉬운 영혼이라면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이러한 근본적인 갈들 때문에 편두통이 따를지도 모른다.

  아직도 여성성에 대한 억압과 왜곡이 심심찮게 보이는 이 시대에 미실과 측천무후는 여성은 무엇으로 사는가게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여성상을 복원해낸 두 소설가의 다아나믹한 상상력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고대사를 사료의 한계 밖으로 끌어어 멋진 이야기로 윤색한 두 작가의 성지에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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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렉 버렌트 외 지음, 공경희 옮김 / 해냄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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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프라 윈프리의 게스트 하우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좋은 글을 쓸 확률이 높다. 비단 글쓰기 뿐이겠는가. 미술이든 음악이든 무릇 세상사와 밀접하지 않은 예술은 그 진정성에 의심이 간다. 해서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체험을 중요시한다.

 

 한데 진정한 글쟁이는 엉덩이가 질겨야 한다는 작가들의 충고를 추앙이라도 하듯,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하루 종일 의자나 소파에(더 진실하게는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때가 많다. 직접 경험을 하기 위해 투사처럼 현장으로 나서지 않는 제 게으름을 탓하는 대신,  간접 경험도 경험이다, 는 배짱으로 케이블 티브 체널을 여기저기 돌려 보는 것이다.  왼종일 뮝기적거리면서(?) 얻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야 말로 간접 경험의 오롯한 소산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이름하여 오프라 윈프리 쇼의 한 장면이다. 

 

  결혼을 앞두거나 남자를 사귀고 있는 고민녀들을 초대해 전문가가 상담을 해주는 장면이 눈에 띈다. 마침, 남자를 대하는 여성의 다양한 심리에 대해서 매우 궁금했으므로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이보다 더한 간접 체험은 없다. 쇼에 출연한 상담가는 꽤 현실감과 균형감이 있어 보인다.

 

  고뇌에 찬 여성 출연자들을 상담해주는 이는 의외로 남성이다.  한참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섹스 앤시티의 공동 작가 중 유일한 남자인 그렉 버렌트란다. 결혼 생활에 자신 없다고 말하는 마자, 언제나 할 일이 많은 남자, 이런 상대남을 만나는 여성들엑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 이 책을 쓴 그렉 버튼의 속시원한 충고를 지켜보면서 나는, 바로 이거다 하고 박수를 쳤다. 비록 헐리웃 문화에 익숙한 충경이긴 하지만 우리의 남녀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에 적용시켜도 전혀 무리가 없다.  그날 밤 당장 책을 주문했다.

 

  주변에서도 이런 흔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지 않은가. 갑이라는 여자 왈, 남편 될 사람과 공동명의로 신혼집을 등기하겠다고 했더니 시댁에서 파혼을 선언했어요.  남자 하나만 보면 나무랄 데 없는데, 남자는 부모를 설득할 자신이 없나봐요. 끝내자네요. 어떡하면 좋아요?  을이라는 여자 왈, 제  약혼남은 진국이에요, 그야말로 진국!   절 잘 챙겨줄뿐더러, 뭐든지 솔선수범하죠. 일 처리도 깔끔하구요. 한데 술만 먹으면 폭력을 일삼아요. 그것 하나만 고치면 더 바랄 게 없는데, 어떡하면 좋아요?

 

  만약, 두 고민녀 앞에 그렉 버렌트가 있었다면?  주저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고.

 

  상대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줄도 모르고 여자는 환상을 가진다. 나이에 상관없이 주도권을 빼앗긴 쪽에서는 마음을 다친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한 이 솔직대담한 카운슬러는 허구에 가득찬 여자들의 환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별 볼일 없는 상대에게 매달리는 헛똑똑이  여자들에게, 안절부절하며 헛된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는 바보 애인들에게 그렉 버렌트는 말한다. 여성들이여, 본질을 깨달아라. 제발 헛된 시간의 장난에 눈물 흘리지 말아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며, 나아가 얼마나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들인가를 깨치라고 충고한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이 명쾌한 대답을 얻기까지 여자들은(때론 남자들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불편부당한 시간들을 견뎌냈을 것인가. 아픔이 진행되는 동안엔 어떠한 충고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더한 괴로움만 따를 뿐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렉 버튼의 충고를 눈치챈다.  사랑이 떠난 뒤에야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 땐 이미 너무 늦었다.

 

  당당하고 멋진 삶을 꾸릴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는 여성들이여, 하잘 것 없는 상대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타인이 이끌어가는 삶에 이리저리 휘둘린 적은 없는가. 이런 우리의 연약한 인간성에 유쾌한 상담자 그렉 버튼은 다시금 호소한다.  -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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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탈 2008-06-11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사고, 잡지 뒤에 실릴 글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별을 5개나 주셨네요 ~ ㅎ
 
에곤 실레 시공아트 12
프랭크 휘트포드 지음, 김미정 옮김 / 시공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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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5층짜리 아파트의 맨 위층에 산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이 말한다. 자신은 바깥 출입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닌데,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항상 15층에 멈춤 표시가 있더란다.  ' 그 집에 손님이 많이 오는 모양이죠?' 라고 말하는 이웃의 얼굴엔 불편한 끼가 역력하다. 당황스러웠다. 찔리는 게 없지 않았지만(논술 공부를 하러 몇몇이 드나들기는 한다.) 면전에서 무안을 당하니 마땅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실은 나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9층에 살 때 이런 문제로 시비거는 이웃이 없었으니 15층인들 무에 그리 다를까 싶었던 것이다. 소심한 나는 상처를 입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웃도 나름의 사정은 있을 것이다.

 
이중 자화상

  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이웃아주머니가 기왕에 나를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무안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이웃의 불편을 헤아려 최대한 배려를 하려 애썼을 것이다.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말한 '길들임'에 관한 단상이 떠오른다. 저번 동네에서는 서로의 존재가 용인되고 인정되는 '길들여짐'의 단계에 있었지만, 새로운 동네에서 그들에게 나는 낯선 국외자일 뿐이다. 서로 길들인 적 없는 관계에서 서로 상냥하게 배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이게 바쁜 현대인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다.  맨 위층에 살면서 엘리베이이터를 남보다 자주 사용하는 새 입주자라면 터줏대감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관계에서는 1층이나 3층은 몰라도, 타인의 아까운 시간을 축내는 15층에서 자주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는 것은 용서가 안 되는 게 인간의 마음이기도 한 것이다. 

 

  생각하면 인간만큼 단순하면서도 복잡미묘한 동물도 없다. 서로 길들여지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일단 길들여진 사이는 얼마만큼의 인간적, 사회적 모순이 있어도 그 관계는 매끄럽게 유지된다. 그러한 현상을 나는 인간 본능의 이중성에서 찾는다. 그날 저녁 에곤 실레의 '이중 자화상'이라는 작품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표현주의 화가 중 뭉크나 클림트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그의 그림 세계는 여타 작가들 못지 않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중 인간이 부딪힐 수 있는 한계상황을 포착한 이중자화상을 들여다보면 인생 전반에 대한 그의 혜안이 돋보인다.

 

  그림 속 실레는 두 개의 얼굴로 관객을 내려다본다. 경계와 호기심의 두 얼굴이 아래 위로 뺨을 맞대고 있다. 연필에다 약간의 수채화를 덧칠한 그의 이중자화상은 섬뜩하리만큼 이중적 인간 정서를  대변하는 하나의 코드로 읽힌다. 위쪽의 자화상은 호기심과 연민이 서린 눈빛이고, 아래쪽의 눈은 분노와 욕구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한 발   물러서는 경계와 두 발 다가서는 호기심의 눈을 가진 게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지불식간에 분열된 화가의 자아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관객들을 우롱하는 것만 같다. 두 개의 얼굴은 이 세상은 약간의 이완과 아주 많은 긴장이 필요한, 요지경 같은 곳이라 일깨워준다.  즉, 경계 없이 이완한 눈빛과 긴장하고 위태한 적의의 눈빛이 공존하는 게 인생이라고 말해준다.

 

  아울러 모든 관계의 갈등은 서운함에서 온다는 것을 그 눈빛은 가르쳐주고 있다. '나는 이렇게 해줬는데 상대는 왜 이렇게 밖에 안 해줄까' ,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저이는 왜 저렇게 생각할까', 사람마다 다르고, 그 다른 것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잠시 잠깐의 실수로 겉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도 치달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이 서운함의 정서를 극복하게 해주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실레의 이중 자화상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이중자화상을 제대로 깨치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운 일상이 보장될 수도 있으니까.  내 안에 숨 쉬는 이중 자화상을 잘 갈무리하고 있는 것처럼 뵈는 어떤 사람이 가르쳐준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산은 아니다  (신경림, 산에 대하여)

  '슬그머니 빠져' 나온 산은 이제 고민하리라. 그 이웃에게 어떤 자화상을 그릴 것인가. 세상을 향한 경계와 호기심의 눈이 잘 조화된 그림이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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