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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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오스터를 만나러 가는 길은 망설임의 연속이었다.   팬 혹은 매니아층을  다수 확보한 작가일수록 그간 나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입소문이 무성하던 무라카미 하루키에 입문할 때처럼 폴 오스터도 뭔가 찜찜함을 가져다주는 작가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어쨌거나 <빵 굽는 타자기>를 비롯해 <신탁의 밤>을 거쳐 <달의 궁전>까지 세 권을 주문했다.  엄격하게 말하면 달의 궁전과 신탁의 밤은 공공을 위한 책이고, 빵 굽는 타자기는 나만을 위한 책이다.  한 모임에서 전자 두 권을 원했기 때문에 공금으로 샀는데 산 김에 먼저 읽어 버렸다. 후자는 내가 원하던 나만의 책이기에 느긋하게 읽어도 좋다.  두 권을 읽은 결론? 찜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나 당신 팬이 되었소' 할 정도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 오스터는  내게 강렬한 파장을 남긴다.  천상 이야기꾼에다 타고난 글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으므로.

  우연의 남발과 꿰맞춘듯한 구성은 황당무계함 속에서도 나름의 질서를 갖춘 헐리웃 액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몰입하게 되는 이유는 기본기를 갖춘 문장력과 묘사력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타고난 글쟁이로서의 길을 선택했지, 고매한 예술가를 원한 것 같지는 않다.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소설가로서 그가 이해된다는 뜻이다.

  오호통재라!  세상에 이 소설을 삼부작으로 봤을 때, 차라리 나머지 두 뒷 부분은 없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일었다. 주인공 포그와 빅터 삼촌과 짐머 그리고 더러 등장하는 키티까지만 있는 이야기가 더 소설답다. 나머지는 내 식으로 봤을 때 사족이다.  작위로 범벅이 된 토마스 에핑과 솔로몬 바버를 위한 액자는 영화 시나리오를 의식한 것 같은 억지처럼 눈길이 덜 간다.

  폭우 속에 내동댕이 친 빅터 삼촌의 클라리넷,  그 삼촌이 남긴 유품인 천 권의 책더미로 만든 침대 받침, 그것을 빼내어 생계 수단을 삼는 포그,  살아 있는 헌 책방 영감에 관한 묘사... 포그편(내 임의로 포그, 에핑, 바버  삼부로 나누었을 때) 만으로도 이토록 날 것이 가득한데 더 이상 무엇을 욕심낸단 말인가.  에핑과 바버에 관한 부분에선 과도한 허세가 우연의 장광설이란 다리를 넘은 것 같아 아쉽다. 

  그럼에도 그가 훌륭한 작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음과 같은 통찰이 빛나는 감식안 때문이다. 섬뜩할 정도로!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여, '묘사의 섬세함'과 '문장의 조화'를 공부하고 싶은가? 폴 오스터를 읽어라.

  그런데 이제는 내가 곤경에 빠진 만큼, 짐머는 어쩌면 그것을 자기가 우위를 점하기 위한 기회, 즉 우리의 우정에서 내면적 균형을 이루기 위한 기회를 보았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어느 정도 우월감이 배어 있었다. 또 그가 나를 조롱하는 데서 즐거움을 끌어낸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129쪽 ~ 130쪽)    -   포그에 대한 짐머의 호의 장면.  순수한 우정 속에 숨어 있을 인간 내면의 심통을 이처럼 통찰할 수 있는 작가를 만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외에도 밑줄 그을 명장면은 수도 없이 많다.  애석하게도 지금 내 손엔 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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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7-01-23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력, 참 좋죠? 타고난 이야기꾼이예요 전 이 사람 보면서 자꾸 이문열이 생각났답니다 건 그렇고... 전 에핑이 사막의 동굴에서 책 읽고 그림 그리면서 사는 삶이 그렇게 인상적일 수가 없었어요 바버도 그렇고 포그도 그렇지만 이 삼대의 인물들은 모두 책을 도피처로 삼고 나중에는 그 안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완성하잖아요 "환상의 책" 보셨어요? 거기서도 헐리우드 배우였다가 부둣가 노동자로 전락한 헥터만이 뉴욕 공공 도서관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점을 생생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제가 폴 오스터를 좋아해요^^
 
구별짓기 -상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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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술문제집 제시문 중 하나로 이 책의 일부가 인용된 걸 보았다.  이 책을 제대로 읽은 학생들이 있을까 싶다. 아니, 이 책을 제대로 읽은 논술 선생들이 있을까 싶다. 설사 누군가 필독서 목록에 올려놓은 걸 보고 읽기를 시도했더라도 중도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학생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난해하고, 선생들이 읽기엔 어처구니 없이 생뚱맞다.  이유?  오로지 오역 또는 무성의한 번역에 있다고 본다.

 

  일개 평범한 독자에 지나지 않아서 불어원본이나 영역본을 들이밀며 논리정연하게 질의할 수 없는 게 안타깝지만 적어도 고등학생용 논술 제시문으로 활용할 정도의 번역서는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내 힘없는 분노는 번역자를 겨냥한 것 못지않게, 제시문으로 활용한 문제 제출자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전공자나 인문학자를 위한 번역이라면 그들은 적어도 원본 또는 영역본 정도는 끼고 텍스트를 대할 것이기에 오역이나 비문이 나와도 그러려니 할 것이다. 우리의 번역 풍토를 잘 아는 고급 독자들이 번역자들에게 거는 기대가 때로는 포기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문화의 다양성과 거기서 야기되는 제 문제점에 관한  논술문 쓰기인데  <문명의 충돌>, <문화의 패턴>등의 책을 인용한 다른 제시문은 고등학생이 독해하는데 그리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한데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세심하게 보살피지 않고 제시문으로 활용한 것은 넌센스다. 꼭 따와야 했다면 그래도 덜 오역되거나 비문이 덜한 부분을 택해(그런 부분이 있을까?)  학생들이 명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겠나, 이 말이다.

 

  개인의 문화적 취향과 사회적 위치(계급)와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 부분을 인용한 것 같은데, 문자 자체에 대한 번역에 내몰린 탓에 깔끔하지 않다. 이런 부주의한 제시문을 고등학생들이 단 몇 분만에 읽고 이해하고, 자신의 견해까지 선명하게(!) 쓰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번역자여, 이해하시라. 정말이지 이 글은 제시문으로 활용한 문제 제출자에 대한 분노가 더 크다!) 이어령이 말했던가? 각 대학에서 뿌린 모의 논술 문제를 보고 글쓰기 전문가인 자신도 손대지  못할 정도였다고.

 

  실제로 현실이나 허구와 관계를 맺는 다양한 방식, 그리고 허구와 이들 허구가 빚어내는 현실을 믿게 되는 다양한 방식은 각 방식의 전제조건을 이루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매개로 사회 공간에서 각 요소들이 차지하는 여러 위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각 계급과 계급분파마다 특이하게 나타나는 성향의 체계(아비투스)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취향은 구분하고, 분류하는 자를 분류한다. (중략, 페이지 생략)

  양과 질, 화려하게 꾸민 식사와 격의없는 식사, 실내용물과 형식간의 대립은 필수품에 대한 기호, 즉 가장 '영양가가 많으며' 가장 경제적인(즉 값이 싼) 식품을 선호하기 마련인 기호와 자유소비재 또는 사치품에 대한 기호 즉 매너(요리를 내놓는 방식, 서비스 방식, 식사법 등)를 강조하고 기능을 부정하고 양식화된 형식을 선화하는 취향 간의 대립과 상응하며, 생활필수품으로부터의 다양한 거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페이지 생략)

 

  두 어 단락만 옮겨보았다.  '취향은 구분하고, 분류하는 자를 분류한다'니? 원문없인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 ... 기능을 부정하고 양식화된 형식을 선호하는 취향간의 대립과 상응하며, 생필품으로부터의 다양한 거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니!  이런 불분명한 어휘 구조를 어떻게 순수한 학생들더러 이해하라는 것인지?  물론, 조금 깊이 생각하면 단락 간의 의미 연결을 통해 주제문을 유추해낼 수는 있다.  하지만 고문 수준의 제시문을 통해 학생들의 인내심을 단련하는 것이 논술 시험이 아니라면 이런 것은 마땅히 피해야 하지 않을까.

 

  번역의 질에 상관없이 저자의 유명세만 보고 제시문으로 따오는 일,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민다. 이것이 일개 연습 문제니까 덜 하지만, 실제 시험 현장에서도 없다고는 단정짓지 못할 것이다.  불분명한 제시문(오역 또는 무성의한 번역으로 인한)을 접하고서도 자신의 독해력을 탓하지, 출제자의 무성의를 탓하지는 않을 순진한 학생들 보면 괜히 내가 미안해진다.

 

  제발 논술 출제자 여러분,  번역서에서 제시문 활용할 때 선명하고 오해없는 텍스트를 활용해주소서. 그리고 자신들 교양에 잣대를 맞추지 말고 평균적 고등학생 교양을 갖춘 학생들이 해독할 수 있는 텍스트를 선정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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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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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도 출근 시간이 있다. 월급을 받는 직장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내세울만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스스로가 정한 출근 시간을 지키려고 애쓴다. 남편과 아이들이 각각 직장과 학교로 떠난 집안을 후다닥 정리하면 아홉시. 보무도 당당히 컴퓨터가 있는 나만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우리집 방 중 가장 큰 면적을 자랑한다.) 말하자면 나만의 출근인 셈이다.

  근무처(?)에서 내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업무는 당연 글쓰기이다. 대가들(박완서나 김원일이나 오르한 파묵 등)처럼 하루에 원고지 열 장 내지 스무 장씩 정해놓고 써야지, 하고 다짐을 한 적도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직장인의 업무처럼 글쓰기도 자연스레 내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라 의지대로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모니터 앞에만 앉으면 미숙한 업무처리로 질책을 앞둔 직장인처럼 안절부절못한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대가들을 벤치마킹하겠다던 불타던 의지는 온데간데 없다. 고백컨대, 정해진 원고 매수를 채우겠다는 그 약속은 지키는 날보다 지키지 못하는 날이 더 많다. 책상에 앉으면 곧바로 글쓰기 작업 파일을 클릭해야 하는 것이 순서일텐데 박약한 의지력은 언제나 인터넷에 먼저 접속하고야 한다. 이런저런 세상사, 간접 경험이라도 해야 쓸거리가 주어진다는 변명을 준비한 채...  움직이는 걸 지독히도 싫어하는 나에게 '간접경험'이라는 핑계는 더할나위 없는 방어벽이 되어준다.

  그러니 자연스레 의문 하나가 생긴다. 체험과 쓰는 것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함수관계가 있나?  가만 생각하면 요즘 작가들은 90년대 이전의 작가들에 비해 체험의 리얼리티가  - 비록 시대적, 상황적 요청이 전제되긴 했지만 -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체험의 현장성이 문학적 소재의 우위를 점하던 시대가 끝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세기가 바뀐 만큼 다양한 문학적 시선들이 창작의 여러 경계를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다.

  일례로 독자들에게 여전히 어필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김연수에 대해서 들어보자.  <나는 유령입니다>라는 작품집에서 일관되게 작가가 주장하는 것은 '체험의 직접성'이 아니라 '자료의 재구성력' 내지는 '자료의 작가적 해석'이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실크로드든 히말라야든 꼭 그 현장성을 획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각종 텍스트나 미디어 등 일련의 정보가 제공해주는 간접 자료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작품집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체험이 아니라 글쓰기 자체의 순도純度이다.

  이러한 주장을 증거라도 하듯 한 문학지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스스로 '대필작가'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작가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은 이미 과거에 있었거나 현재에 있는 것들이다. 작가란 주어진 자료를 자기 식으로 재구성하는 순수한 욕망의 대필자일 뿐이다. 결국 체험의 직접성이 문제가 아니라 자료의 해석을 밑바탕한 나름의 세계관이야말로 한 작가의 존재감을 말해준다. 작가의 직접 체험이 문학적 도구로 활용된다해도 그 자체가 소설이나 문학이 될 수는 없다. 거짓의 옷을 입은 진실, 즉 픽션이라는 가공을 거치지 않고서야 차라리 르포나, 수기를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굳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의 진본은 언제나 동굴 밖에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림자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깨닫는다. 따라서 진본을 찾는 끝없는 여정이 글쓰기의 숙명이라면 그것이 직접 체험이든, 간접 체험이든 그리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소설 쓰기의 돌이킬 수 없는  매력 중 하나는 허구의 합법적 담보에 있다. 소설 쓰기의 고통은 체험의 현장성 유무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가의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숱하게 제공되는 날것의 자료들로 진실한 거짓을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살아있는 창작의 과정이라고 김연수는(아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험의 깊이와 폭이 다양할수록 좋은 글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직접 체험인지 간접 체험인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문제는 게으름 때문에 그 중 어느 것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있을 뿐.

  글이 써지지 않아 원고지를 붙잡고 울 수밖에 없는 것은 체험의 종류나 순도 때문이 아니라, 게으름 탓이라는 게 자명해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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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17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저자 서명본 책 읽다가 문장이 지겨워서 중단했거든요.
예전에는 이 작가의 옛 글 산책 같은 걸 참 좋아했는데..
이 책은 진도 안나가 죽을뻔했어요. 결국 지금도 손이 선뜻 안가는 책인데
대단하세요!

다크아이즈 2006-12-1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뿌넝숴, 다시 한달을 가고~ 등은 문학적 성과와 상관없이 지겹긴해요. 잘 써야겠다는 강박 때문인지, 부러 순우리말의 향연을 펼친 노고가 그 지겨움에 일조한듯도 해요.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
남재일 지음 / 강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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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재일을 알게 된 건 행운이다. 영화 관련 책을 뒤지다 만나게 되었는데 우선 영화 이야기로 읽히지 않아서 좋다. 사람을, 사회를 영화를 빌려 이야기하면서 이토록 밑줄 긋게 만드는 작가를 일찌기 만나본 적 없다.  송준의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이 좀 더 영화 평론에 가깝고  이왕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가 영화를 빌려 철학을 말하고 있다면 남재일은 이 책에서 인간, 아니 오로지 인간이고자 하는 개인을 이야기한다. 당연히 밑줄 그을 일이 많다. 밑줄 강요하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 아니던가.

  그가 소개하는 영화가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무던히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내가 발견하지 못한, 혹은 발견했지만 미처 내 언어가 되지 못한 숱한 말들이 질서정연하게 꼬리를 문다.

  이 순교의 이미지 자체는 분명 감동적이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순교의 탈을 쓴 순장이었기 때문이다. 순교는 핍박받고 남루한 것들을 위한 소리 없는 희생이지 '대의'의 폭력과 교설로 개인을 매장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34쪽)

  이 영화가 '대의'를 수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즐거움을 얻을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빨리 천하통일을 이루어야 하고, 그러기 위애서는 절대적 권력을 누군가에게 위임해야 한다는 논리는 정말 지겹다. (35쪽)

  남루함은 선악을 넘어 인간 감각이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영원한 타자의 질감이다. 그래서 남루함을 화면에 들이밀면 관객은 반사적으로 불편해진다.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관객을 불편하게 한 것도 중증 뇌성소아마비 처녀를 전면에 들이밀기 때문일 것이다. (45 ~46쪽)

  사람의 인격을 판단할 수 있는 세 가지 순간이 있다. 첫째는 먹이가 걸렸을 때, 둘째 작별할 때, 셋째 적이 급소를 보였을 때. 이 가정에 따르면, 진지한 인격은 자기 밥그릇을 양보하면 생색을 내고, 초면의 친절이나 아첨보다 작별의 예의를 중시하고, 상대가 급소를 보이면 전의가 연민으로 바뀐다. 물론 이 길은 멀고 험하다. (51쪽)

   격동기의 남자들은 집을 비운다. 여자들은 숨을 죽이고 일만 한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풀꽃처럼 자란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언덕 너머의 풍문이고 잠결에 잠시 스쳐가는 바람이다. 한국의 근대는 줄곧 그랬다.(58쪽)

  영화평인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대한 통찰이 보이는가 하면 정갈한 미문으로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읽는 자로서 항상 느끼지만, 읽는 즐거움이 클수록 절망감 또한 깊어진다는 사실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들처럼 쓸 수 없을 거라는 깊은 절망 때문에 괴로운 나날이다. 김훈이 그랬고, 이왕주도 그러했고, 천운영도 예외가 아니었고, 고종석을 거쳐 남재일에 이르러 또 몇의 강을 건너야 내게 희망의 불빛이 보이는 것일까.

  남재일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그 통찰의 신선함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균형감각 때문이다. 제목부터 보라!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  그가 얘기하는 어떤 말도 이 제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사랑은 인간 관계를 조직하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이자 인간 조건의 심연을 복개하는 강력한 판타지이다. 그런 만큼 지배 이데올로기는 입맛에 맞게 사회를 요리하면서 사랑을 단골 메뉴로 끌어온다. 박애, 가족애, 남녀 간의 사랑은 대개 탈정치적 휴머니즘, 가족주의, 낭만적 사랑이라는 그릇 속에 담긴 채 영화라는 식탁에 오른다. '비판적 사회학자'는 이 그릇을 깨버리거나 다른 그릇으로 바꾸고 싶어한다. 적어도 사랑의 존재를 믿는다. - 중략 - 하지만 계보학자는 사랑의 존재 자체에 회의적이다.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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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6-12-04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괜찮은가 보네요 보관함에만 담아 두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인데...

다크아이즈 2006-12-04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 영화평론서로만 읽지 않는다면 참 괜찮은 책이에요.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엘리자베스 키스 외 지음, 송영달 옮김 / 책과함께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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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새로 썼기 때문에 지웁니다. 

귀한 댓글 흔적은 그대로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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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6-12-04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흥미가 확 당기네요

다크아이즈 2006-12-1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 책을 함부로 대하는 저 같은 이도 '아끼고 싶은' 책이 생기더라니까요.

아영엄마 2006-12-14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크아이즈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

다크아이즈 2006-12-15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감사합니다. 간만에 알라딘 와보니 별일이(!). 좋은 책 만나 몇 글자 주절거린 죄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