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 푸른숲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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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헛갈릴 때가 있다. 가족제도 안에서의 여성에 대한 내 연민의 근원이 제 게으름을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 때문인지, 저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여성성에 대한 강한 자의식 때문인지.

  지난 주말에 친정 엄마의 팔순모임이 있었다. 이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는 즐거움에 앞선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행사의 행동요원(?)격에 해당하는 여성들의 불합리한 상황과 그것에 대한 내 연민 때문이다. 우리집 여성 요원들의 간략한 행태를 소개해보자. 자유분방한 큰올케가 대안 없이 뒤로 빠지는 동안, 전통적 가부장질서에 충실한 둘째올케의 가없는 효부정신이 발휘된다. 좋은 게 좋은 셋째올케와 멀리 사는 언니는 묵묵히 대세를 따른다.  전 여성행동요원의 정신적, 노동적 민주화를 꿈꾸는 나는 나름 합리적 대안을 제시한다. 집안이 아닌 밖에서 모여, 여성들도 우아하게 즐기자는 내 의견은 효 문화의 온당한 기치 앞에서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웃자란 신인류의 감성쯤으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집안 어른들의 행동요원에 대한 평가가 이어진다. 유교적 가풍의 끄나풀을 놓을 맘이 전혀 없는 그들은 더 야무진 도리를 하는 요원에게 찬사의 입말을 아끼지 않는다. 뒷전에서 그 찬사를,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쪽에서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겉으로 보기에 행사는 무사히 치러진다. 하지만 뭔지 모를 미묘한 앙금이 남는다. 관심과 노동과 시간을 많이 할애한 쪽에서는 본인이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제 맘을 다 보상받지 못한데 대한 서운함이 생기고, 그렇지 못한 쪽에서는 행사의 주체적 실체가 되지 못한데 대한 자격지심과 소외감 때문에 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합리적 대안은 애초에 있지도 않다. 또한 그 과정을 도출하는데 대한 위험부담 때문에 이런 갈등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뿐이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에서 남자는 제외된다는 사실이다. (여성들 스스로가 남성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런 미묘한 감정의 혼선에 있는 여성 행동대원들을 위해 (실은 나를 위해) 나는 기어이 잔다르크가 되기를 자청한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모든 식구들이 함께 즐기자는 내 요구가 받아들여져 우아한 잔칫상을 마주한 뒤에라도 그놈의 ‘도리’의 끝자락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여성(특히 며느리 입장)에게 집안 행사는 즐기는 자로서의 여유보다는 도리로서의 의무감을 요구하고 있다. 남자들이 여성에게 강요한 적도 없고, 심지어 그들은 이런 감정에 무신경하기조차 한데, 여성들만이 감지하는 이 부조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이유에 대한 답은 타계한 정치학자 전인권이 쓴 ‘남자의 탄생’(푸른숲, 2003)에서 얻을 수 있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유년시절부터 학습된 우리의 가족제도는 한국형 남성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주력해왔다는 것이다.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질서는 남성적 삶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었으며 이는 기본적으로 ‘동굴 속 황제’ 라는 인간형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여성에 대해 편협하고 왜곡된 정보를 전제하는 이러한 권위는 충격적이게도 여자 특히, 한 집안의 어머니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작가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적 가정에서의 남자의 권위는 아버지가 만드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주도한다는 사실이다. 어머니가 차린 동굴 속 황제를 위한 밥상에 아버지가 숟갈을 들면서 가부장질서가 고착되고 그 과정에서 모성의 희생과 여성의 도리라는 개념이 고착되어 왔다는 것이다. 별 비판 없이 여성들이 이러한 학습과정의 동굴에 머무르는 동안 남성들은 또 다른 자신들만의 동굴 속 황제로 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백적, 반성적 회고를 통해 작가는 말한다. ‘내 안의 남성을 죽여라’고. 이미 남성들 스스로 그 부담스런 ‘남성적 권위’를 반납하는 사회 구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군림하려 하지 않고, 제 안의 부조리한 남성을 죽여 가며 고백하는 남성들 앞에서 여자들 스스로 통렬한 성찰을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나은 독서는 없을 것이다.

  여성적 의무 이데올로기라는 동굴을 벗어나려는 최적임자는 누구인가? 명쾌한 답이 여기 있다. 그 답이야말로 여성 스스로라는 것을 역설적이게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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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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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 치료 프로그램 추천 도서 목록을 찾고 있었는데 이 책이 대부분 추천 목록에 들어가 있다. 그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책이었다.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김형경 작가에 대한 애정(? 또는 관심)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그의 또 다른 장편인 <세월>에서 약간 밝힌 바가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도서관에 들를 때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제목도 긴 이 책이 얌전하고도 깨끗한 상태로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언제나 다른 책에 우선 순위가 밀리곤 했다. 두 권으로 분권되어 있는 게 독자로서는 조금 부담이 됐을 수도 있겠다.  

  긴 제목만큼이나 사랑에 대해서 그만큼 할 말이 많아서 두 권으로 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한데, 그것도 잠시 그건 작가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겠다. 세월,을 읽을 때도 그랬고, 이 책도 그렇고 근본적으로 작가는 길게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다 읽고 나면 굳이 두 권짜리로 쓸 필요가 있을까 싶게 동어반복에 중언부언하는 면이 없지 않다. (예를 들어서 그렇지만 깔끔하게 접근하는 김훈이나, 천운영 스타일이라면 이렇게 글이 늘어지게 놔두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별 불만없이 읽히는 건 글을 조직해가는 작가의 내공에 미더움이 가기 때문이다.  

  얼핏 제목만 보면 연애 소설인가 싶은데 그것보다는 이 땅에서 여성적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자기 정체성 찾기를 그리는 심리소설이라 할 수 있다. 삼십대 중반, 현재는 싱글인 세진과 인혜가 소설의 중심 인물이다. 우리에게 덧씌인 사랑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고, 삶의 겉치레인 휴머니즘의 장막을 벗어나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권력이라는 통찰에 깊이 공감한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권력 지향, 혹은 그 위계질서에 의해 조종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다. 인간 관계의 모든 뼈대는 욕망이고, 그 욕망이 주체적 삶이 되게 하는 건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을 성찰하게도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사랑이란 말이 들어간 제목이지만 사랑의 실체는 환상이나 로맨스가 아니라 욕망에 가깝다는 그의 해석이 흥미롭다. 소설 전개 방식은 물론 일반 소설과는 다르다. 상처 많은 삼십대 여성의 심리치료 과정을 소설 기법으로 차용하고 있는데, 유능한 건축사 세진은 누가 뭐래도 작가의 분신이다. 정신 분석 내용을 토대로 여성들의 성과 가치관, 타인과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면담자인 의사와 세진의 정신분석 과정은 경직되어 있지 않고, 현실감있게  묘사 된다. 세진의 여러 문제, 예를 들면 어린 시절의 부모의 이혼과 이십대의 성폭행 에피소드 등은 여성들에게 충분한 공감대를 얻어내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세진의 일부나마 독자들에게 투사되어 심리적 위안을 받기를 바라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세진의 심리치료 필요 조건은 유아기 이래의 상처와 결핍에 기인한다.  그녀로선 부모의 이혼이 가장 큰 트라우마가 되겠다. 언제나 인간 결핍의 원천은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주변인ㅡ특히, 부모라는 걸 확인시켜 준다. 심리치료책을 읽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이런 공공연한 비밀을 깨칠 때마다 마음밭이 환해지는 걸 느낀다. 절대적 관계자들과의 상충 과정에서 자신의 콤플렉스가 형성되고 , 그것이 또 다른 욕망의 출발선이 된다는 점은 매우 공감이 간다. 예를 들면, 아버지 같은 무심한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남성관이나, 엄마처럼 희생적인 길을 걷지 않겠다는 내면화 과정도 콤플렉스의 산물이라는 게 작가의 관점(아니, 심리학자들의 관점)이다.  

  이혼 경험이 있는 인혜는 단순하고, 관계지향적인 반면, 독신녀인 세진은 완벽주의자이며 자주적, 독립적인 캐릭터이다. 내가 볼 때 이 둘은 작가의 이중분신에 다름 아니다. 작가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글로 썼기 때문에 상당한 리얼리티를 확보한 것이 느껴지지만 그 과정이 다소 동어반복되어 지루한 감도 없지 않다. 해서 책을 읽다 보면 몰입되어 공감할 때도 많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굳이 비판적 책 읽기를 한다면 세진과 인혜라는 인물에 완전히 공감하기는 힘들었다. 작가의 실제적 자아와 많이 닮은 세진과 그 대척점에 있는 또 다른 인물인 인혜는 경험의 다양성 측면에서 볼 때, 독자 역시 별개의 존재자이므로 완전히 공감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지나치게 완벽주의자이자 타인의 시선에 대한 장악력마저 지닌 세진이 그토록 자신이 겪은 상처를 동어반복으로 변주하는 것도 약간 지겨웠고, 세진에 비해 단순하고 온정주의자이자 남성 포용주의자(?)이기도 한 인혜가 세진의 입김에 좌지우지 되는 걸 보면서 현실감각을 놓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뭍 여성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에서 제목처럼 여성들이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있다. 두 주인공이 활동하는 모임인 '오늘의 여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란 오여사 클럽을 통해 여성들의 사랑에 대한 자의식을 건너다 보자. 어떤 이는 사랑을 <권력욕이라 하고, 어떤 이는 생존 본능, 어떤 이는 미적 체험, 또 다른 이는 인간 사이의 소통...>등등으로 다양한 사랑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다. 한데, 흥미로운 것은 심리치료를 받고 있는 주인공 세진이 명쾌하게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결국 사랑은 노이로제나 광기이며, 자기 콤플렉스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예를 들면 가난을 상처로 가진 사람은 부자를 찾고, 학력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고학력자를, 스스로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권력자를 선망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각자의 정의가 곧 자신의 상처나 콤플렉스가 된다는 작가의 그 말에 밑줄을 그었도다! 

  심리치료 전문가들이 권하는 책인만큼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부모의 이혼, 성폭행에 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을 작가는 밤송이에 비유하고 있다. <밤송이 하나를 받아들고, 그것이 인생이라 여기며 쩔쩔매게 됩니다. 손바닥 뿐 아니라 온몸을 찔러대는 그것을 버릴 수도, 감싸쥘 수도 없는 상태에서 심리치료라는 과정을 통해>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삶은 반복되는 시행착오의 부산물이다. 문제는 그 경험들을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 하는 일이다. 그 일련의 과정 자체의 기록이 독자들에게는 또 다른 방식의 소설 읽기를 경험하게 하고, 내면의 공감을 자아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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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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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책이 소개되는 것을 보았다. 당장 구입했다. 이런 책 발견하면 마치 살얼음 낀 동치미 맛이 혀끝을 지나 빠른 시간에 뇌로 전달되는 기분이다. 패널이자 저자인 김상봉 교수는 한국 사회의 일보전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로 도덕교육을 꼽는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국정 교과서인 도덕 과목은 낡은 노예적 가치관을 주입시키는 선봉에 서 있다. 이 테크놀러지의 첨단을 향유하는 현대인에게 개인의 자발적 선택을 무시한 채 전통과 질서의 옷자락만 부여잡으라고 설교하는 측면에서는 일리있는 주장이다.

  딸 아이 때문에 자연스레 접한 중학교 도덕 교과서(중 1 기준)는 거의 반이 '예절'에 할애되어 있다. 저자의 비판처럼 우리의 예절교육은 약자가 강자에게 바치는 일방적인 헌사를 의미한다. 진정한 예절은 상호 호환성에 있지 않았던가. 예절에 대한 강자의 그 어떤 역할도 약자만큼 구체성과 강제성이 따르지는 않는다. 제도권의 이러한 지속적이고고 뭉근한 교육의 힘(?)은 약자에게 근거 없는 주눅과 스트레스라는 원하지 않는 선물을 안기고야 만다.

  일례로 우리의 도덕 교육에 따르자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른에게 먼저 인사하지 않는다는 같잖은 이유만으로도 어린아이는 졸지에 버릇없는 자, 가정 교육이 엉망인 자가 되기 십상이다. 공자가 강조하는 예의 본질이 인간 심성의 참된 교류에 있지 결코 위계질서의 선후를 따지는 치졸함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도덕 교육은 나아가 여성을 보는 시각조차 편벽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도덕 교과서에는 여자가 결혼을 하면 시댁의 어린 여자에게는 '아가씨', 자신보다 어린 미혼 남자에게는 '도련님', 기혼인 남자에게는 '아주버님'과 '서방님'으로 부르라고 친절하게도 가르쳐주고 있다. 사회 통념적으로 학습되어 익히 알고 있는(하지만 분명 개선할 여지가 있는) 이런 호칭 교육이 도덕 교과서에까지 오르는 것은 아무리 봐도 시대착오적이고 비생산적이다.  호칭대로라면 아무리 귀하게 자란 여성도 결혼만 하면 시가의 하녀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호칭의 뉘앙스로만 봐도 아가씨, 도련님과 새언니, 형수님을 맞바꾸기에는 어딘가 격이 맞지 않다. 굴욕감과 노예근성을 주입시키는 이러한 교과서을 단지 시험이라는 통과의례 때문에 투덜대며(혹은 개념없이) 외워야 하는 디지털 세대의 선봉에 선 딸들이 가엾다.

  유교문화와 일제 강점기도 모자라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우리의 노예도덕은 더 깊은 뿌리를 내렸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도덕 교과서의이러한 파시즘적 이데올로기는 분명 문제제기 되어야 마땅하다. 한데도 가부장적인 질서와 사고에 익숙해진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노에 교육의 전면에 서 있는지조차도 자각하지 못한다.(않는다!)  여성들에게 극히 제한된 무대가 되고 있는 저 높은 영역에 다다른 여성들이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히려 그 소수의 클레오파트라들마저도 '명예남자'가 되고 싶어 안달이다.

  왜? 축적된 체험을 통해 그들은 더 이상 여성들은 역사의 주인공도, 사회의 진정한 주체도 될 수 없음을 항복하듯이 순순히 인정해버리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당연 남근주의 리무진에 합승하는 일이다. (얼마 전 김규항을 읽으면서도 이런 클레오파트라적 페미니즘(내 식 언어조합)을 비판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 때문에 욕 많이 얻어 먹은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그 생각 때문이 아니라 몇몇 문구 때문에 반발심을 사지 않았을까 싶다.) 

  명예남자를 자처하는 극히 제한된 여성들은 자신이 여성임을 그야말로 무의식적으로 부정한다. 여성성을 버리고 싶은 자아는 뭇 남성들이 그러하듯 함바집 여주인은 작부와 동일시해도 무방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는 진한 농지거리를 자초한다고 단정지어버린다.  차라리 하층민 여성들이 남성들을 위한 인간 정수기 역할 쯤을 해주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폭로하는 김기덕류의 영화처럼 솔직해지던지.

  자신도 한 때 억압받은 여자였음을 아니, 현재도 그러하다는 것을 잊은 채 남성적 코드로 세상을 읽는 '그미들'이 이 책을 우선적으로 읽었으면 좋겠다. (실은 여성성의 자각에 대해서 이 책이 직접적이고도 노골적으로 선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없다.  아마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도덕 전반에 관한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파헤치는 장면 장면을 볼 때마다 내 여성적 자각이 꿈틀댔음을 고백해야겠다.)

  잘못된 도덕 교육으로 여성의 욕망은 어디까지나 내밀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욕망의 주체는 언제나 남성의 것이라고 면죄부까지 쥐어주었다. 여성의 온당한 주체성보다는 모성의 희생이야말로 진정한 여성성이라고 교묘하게 왜곡하는 현실 앞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우리의 오래된 관습적, 교과서적 여성 교육에 그 혐의가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여성이 더 이상 기득권 사회의 억압이나, 남성의 육체적 환타지 대상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여성 스스로가 바랄 때 여성의 위상은 그나마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명예남자들이 더 인식할 때!  - 그들이 진정 남성적, 보수적 프리즘을 벗어던지고 아직은 약자인 여자의 입장에서 자매애와 동지애를 발휘할 때에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 쓰고 보니  '도덕 교육의 파시즘' 의 폐해 중 너무 여성 문제에 집착한 것 같다.  아무래도  피해의식이 남아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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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7-01-20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글 참 잘 쓰지 않아요? 전 이 사람이 쓴 "학벌사회" 를 읽었는데 그 논리 전개에 감탄했답니다 이 책도 보관함에 넣어야겠네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다크아이즈 2007-01-20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 덕에 저도 '학벌사회' 찜합니다. 기억이 가물하긴 한데 화면에 비친 모습도 신뢰감이 가더군요.

2007-02-10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07-02-11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님과 같은 생각을 하신 분들이 현장을 접수하는 날을 기대해봅니다. 멀고 먼 얘기겠지요? 맞아요. 1학년은 예절교육, 2학년은 국가주의. 허헛! 딸내미 교과서보고 기절하고 싶더군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김상봉식 생각을 전혀 고려할 마음조차 없는 '교육계의 기득권'이 문제지요.
즐찾에 님 서재 달랑 훔쳐다놓기만 했는데 이렇게 용기를 주시니 '생각 키우기' 내공에 더욱 힘쓸게요. 감사^^*
 
글쓰기의 공중부양
이외수 지음 / 동방미디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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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고를 때 그런 경우가 있다. 돈 주고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고 보기는 아깝지만 호기심 때문에 읽지 않을 수는 없는 책.  이외수 선생에게는 무례한 짓거리가 되겠지만 이 책이 내겐 그런 종류였다.  참고로 나는 이외수 선생의 소설을 무척 좋아하고 그의 모든 책을 신뢰한다.  마니아 정도는 아니지만 아주 젊은 시절 소설 읽기를 시작할 때 감성적인 부분의 대가 두 사람을 꼽으라면 한수산과 이외수를 치곤 했다. 한수산의 감성은 한없이 여리고 아름다웠고, 이외수의 감성은 연민이 묻어나면서도 풍자를 잊지 않았다. 물론, 한수산을 잊을 때쯤에도 이외수는 내게 살아 남았다. 온전히 그의 감성적 문체 때문이었다.

  그의 감성은 문장마다 살아 있되, 싸구려가 아니었고, 그의 문체는 물방울처럼 튀어오르되, 흙탕물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군대 간(6개월 군인도 군인이다!) 오라버니가 말년에 무료함을 달래며 사서 읽다가 남겨온 책이 '꿈꾸는 식물'이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고급한 감성적 문체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구나, 싶어 화들짝 놀란 기억이 난다.  (정말이지 싸구려 감성도 역겨운데 거기다가 비문으로 점철된 문장을 쓰는 작가들이 하 얼마던고.)

  서론이 길었다. 어쨌든 그가 개설한 공중부양 강좌의 청강생이 될 기회가 주어졌다. 누군가 가지고 있던 책을 빌릴 수 있었는데 내 판단이 맞다 싶었다.  독자로서 모든 챕터가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내게는 3부 창작의 장이 현실감 있게 와 닿았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작품을 예로 들어가며 살아있는 인물을 소설로 만드는 과정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훈장, 개미귀신, 고수 등 오래된 그의 작품을 단편적으로나마 다시 접하니 숨죽어가던  감성이 새벽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 작가가 가르쳐준대로 실천만 한다면  끝내 미유기를 소금구이하는 여자(책을 읽어보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된다. 책도 사지 않은 주제에 스포일러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가 등장하는 소설 한 편은 쓰게 되지 않을까.  굳이 싱거운 스포일러가 되자면, 글쓰기의  공중부양은 부단한 노력 끝에 나온다고 작가는 거듭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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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1-18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유기를 안 갈쳐주시니 궁금증만 *.*
결국 사서 읽어봐야 한다는 거죠? 그래도 살짝 갈쳐 주세용요용용용

다크아이즈 2007-01-18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부지런한 여우님. 오랜만이에요. 미유기 별 거 없어요. 이렇게라도 책 안 산 미안함을 덜어보려고...
 
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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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많이 불온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일개 독자로서 충분히 불편하고 부끄럽기를 바랐다. 소나기 속으로 뛰어든  미친년처럼 그의 '불온한' 장대비를 흠뻑 맞았다.  다 읽고 난 지금 독자로서 충분히 불편하고, 부끄럽다.  하지만 그가 전혀 불온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좀 더 불온해도 좋았을 것을.  불온하다고  고백하는 그의 위악은 되려 온건이 지나쳐 따뜻하기까지 하다. 그는 예리한 칼날을 제 주먹껏 움켜쥐고 세상을 향해 디민다.  예상대로라면 그의 손과 세상 사람들 - 많이 가진 자, 조금 덜 가진 자를 말한다. 물론 아주 적게 가진 자나 못 가진자는 제외 - 의 어깨뼈 어디쯤에 핏물이 스쳐야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스한 칼날로 벼린 그의 글은 필연적으로 그가 전혀 불온할 조짐조차 없음을 반증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가진 자들에게 성찰과 반성을 친구 삼게 만들거나 요구하는 것이 어찌 불온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좀 더 불온해지더라도 나는 그를 따뜻한 온건주의자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강준만을 읽으면서도, 진중권을 스치면서도, 혹은 고종석을 거치면서도 잘 이해되지 않던 계급적, 혹은 정치적 용어들을 어렴풋이나마 정리할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수고 덕이다.  예를 들면 '개혁'과 '진보'가 엄청나게 다른 개념이라는 것과, '자본주의'보다  '신자유주의' 가 더 무지막지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은 것. 어디 가서 내 무식이 탄로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이다.

  쉽게 쓰려는 방식은 고종석과 닮았다, (아마 둘 다 이오덕 선생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그 유연한 대처 방식에서는 고종석이 한 발 더 나아간 듯하다.)  강준만의 대책없는 아집을 넘어서고, 시니컬과 독설이 진중권에 못미치는 것에서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된다.  체험의 물살에서 길어내는 그의 언어가 근본적으로 휴머니즘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 수정해야겠다. 여기서 '체험의 물살' 운운하는 건 그의 가정사가 등장하는 장면, 특히 딸과의 관계를 훔쳐볼 때에 더 해당하는 말이다.

  어느 존경받는 진보적 인사가 정작 제 식구들, 특히 제 딸에게서 전혀 존경받지 못하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저렇게 훌륭한 아버지를 왜 존경하지 않는 걸까?' 얼마가 지나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흔히 짐작하듯(그리고 그런 인사들의 가장 편리한 면죄부인) '세상에 헌신하느라 가족에게 소홀해서'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실은 매우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딸은 단지 딸아들 하는 자식 중의 하나가 아니다. 딸은 한 남자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가장 정교하게 알아낼 수 있는(폭로하는) '삶의 시험지'다. 한 남자가 '딸에게서 존경받는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면 그의 삶은 좀더 근사해질 것이다.  (175쪽)

  흔히들 '운동'을 했다(한다)하면 가정과 신념을 분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혹은 용서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가 미더운 것은  아동인권, 여성문제(기득권 남성과 똑 같은 권력을 얻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그의 칼날은 단호하다. 이미 기득권 남성이 되어버린 여성 권력들을 나 또한 혐오한다. 그들은 그들의 여성성을 자각하지 않으며  소수자 여성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혹 주게 되더라도 교묘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의 기득권만은 포기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의 몇몇 문구에 무척 거부감이 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소수인 약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그의 애정이 상대적으로 넘친다는 걸 알기에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인간으로서의 예수, 생태 문제를 일관성 있게 자분거려주기 때문이다. 그것도 알아먹기 쉽도록.

  스스로 나는 E급 좌파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통해 한갖 보수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다.  보수에는 개혁과 수구가 있을지 모르지만 제 아무리 개혁을 외치는 자라도  김규항 같은 좌파에게는 '씨팔'  '좆같이'  - 이 두 욕은 그의 귀여운 딸 김단이도 쓴다! -  똑 같은 보수에 지나지 않으므로.

  각설하고, 그가 발행한다는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 구미가 확 당긴다. 내 아들 딸이 아니라 내가!  또, 어디선가 인터뷰한 것을 봤는데 '예수전'을 기획하고 있다는데  그 책이 나오면 빠른 독자가 되고 말리라. 미사 시간에 강론은 듣지 않고 성서 읽기에 골몰하는 나로서는 당근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궁굼치 않겠는가. 

  참, '좋은 글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며,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251쪽)는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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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1-18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불.편 하신건 맞군요^^
땡스투는 당연히 못 해드립니다. 저도 이미 사서 읽어버렸으니^^
대신에 추천만 살포시.

2007-01-18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07-01-18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파란여우님, 정말이지 불편하고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E급 좌파도 못 되는 제게 달라질 건 없다는 거죠.
* 속삭인 님, 꼭 리뷰 써줘요. 김규항이 말했잖아요. '칼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제 멋대로 해석!) 글이야말로 좋은 글인 걸요. 그에게도 반성(?)할 기회를 줘야 하는데 죄다 뻑 가는 리뷰만 올린다면 그는 계속해서 골방에서 이런 글만 올릴걸요. 그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니랍니다. '칼맞지' 않으니까 신선한 님의 생각 던져 주세요.

마법천자문 2007-01-2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A+급 좌파인 저의 어깨가 무거워지는군요.(에구에구~ 돌 날라온다~~~)

다크아이즈 2007-01-23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애리님 센스 만점! 근데 불멸의 나애리랑 A+급 좌파랑 어울리는 조합인가?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