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습작 - 김탁환의 따듯한 글쓰기 특강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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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을은 ‘읽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쓰는’ 계절이기도 한가 보다. 이맘때면 ‘쓰는 것’에 관심 가진 이들의 고충을 들을 기회가 많아진다. 연중 문학 활동의 결실을 준비하는 때이기도 하고, 계절적으로도 글쓰기로 내면적 욕구를 충족하기를 요청하는 때이기도 하다. 가끔 입문자들이 글쓰기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놓을 때면, 쓴다는 것에 그럴듯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잘 쓰고 싶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 건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장통과 내면세계를 속속들이 알 수 없으므로 어쭙잖은 내 충고는 겉돌기에 지나지 않는다. 고작 한다는 얘기가 맞춤법이나, 문장 호응 관계나, 비문을 걸러 내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돌아서면 허탈하기 그지없다. 문장에 대한 그런 기본적인 공부는 누구나 조금만 신경 써서 읽거나 쓰다 보면 자연스레 터득할 수 있는, 그야말로 ‘문장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글쓰기의 진정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왜 쓰는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서늘한 매혹 때문에 한 계절이 힘겨운 적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진심이 요청하는 글쓰기 때문에, 이 갈 노을빛에도 가슴 타는 고통을 느끼는 자에게 위안이 될 만한 책 한 권이 여기 있다. 김탁환의 ‘천년습작’(살림, 2009)은 여타의 글쓰기 기법을 강조하는 책에서 벗어나 진심으로서의 글쓰기를 말하는 책이다. 겉표지부터 ‘따듯한 글쓰기 특강’이란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따듯한’이란 형용사에 노란색 옷을 입혀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따듯하다 - 감정, 태도, 분위기 따위가 정답고 포근하다. ‘따뜻하다’보다 여린 느낌을 준다, 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그가 말하는 글쓰기의 핵심은 바로 '잔재주 보다는 마음'이라는 걸 알려 주는 문구 같다.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의 핵심은 그럴 듯한 흉내가 아니라 ‘진심 그 자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글쓰기를 테크닉으로만 파악하는 관점에 반대한다. 경험한 것만 쓴다는 아니 에르노처럼, 집필실이 곧 절대 고독의 감옥이었던 발자크처럼, 쓰기만이 가장 좋은 친구라고 여기는 폴 오스터처럼, 글은 곧 자신의 또 다른 삶이어야 한단다.  



  여러 작가들에 기대어 글쓰기의 숭고함에 대해 들려주고 있는데, 그 중에 카프카의 ‘불안’과 ‘매혹’이 공감하기가 쉬웠다. 밤 새워 글을 쓰면서도 욕망의 키 닿기에 미치지 못하는 불안의 시절들이 쓰는 자들에게는 있기 마련이다. 쓴다는 것의 매혹과 자기연민에 대한 불안의 미묘한 줄타기 끝에 작품은 생산되는 것이다. 아이러니는 자신이 생각하는 매혹의 시절과 독자가 생각하는 매혹적인 작품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는 분명 <선고>를 쓰면서 매혹되었는데, 독자들은 <변신>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진정성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쓴다는 것의 진심이 중요하지 작품성 때문에 고민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성은 자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 쓴다는 행위의 개념이 무엇인가도 이 책은 가르쳐 주고 있다. 백년학생, 천년 습작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쓴다고 다음과 같이 확실히 말해준다. <발자크처럼 손으로 쉴 새 없이 집필하는 것, 과잉으로 소설 세계에 빠지는 것만이 뛰어난 소설가가 되는 길입니다. 소설은 '노동'이라고 믿습니다. 소설이 유희라면, 기분 좋을 때만 즐기고, 기분 나쁠 때 하기 싫을 때 하지 않아도 되는 놀이라면, 소설에 헌신할 까닭이 없겠지요. 적당히 즐기다가 떠나면 그만입니다. 따듯함을 지니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이겠지요. 편견 없이 내 앞에 놓인 문장을 하나하나 음미할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관심 역시 따듯한 품기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 가을 쓴다는 것 때문에 나처럼 맘 졸이는 그대들아, 김탁환의 글쓰기 특강을 읽어보자. 그가 무엇을 말했느냐고? 백년학생, 천년습작이라면 그 답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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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워칭 - 보디 랭귀지 연구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동광 옮김 / 까치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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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구나 몸으로 말한다




  학창 시절 동아리 멤버 중에 다독하는 후배가 있었다. 덜 읽어서 섬이었던 나는 많이 읽어서 섬이 된 그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세상과의 불화를 즐길 수 있는 배짱도, 집단에 가린 개별자의 존엄에 대한 인식도 그미의 독서관이 내게 끼친 긍정적 효과였다. 습작에 관심이 있었던 내게 그녀는 자신이 선정한 권장도서 목록을 전해주곤 했다. 졸업하고 결혼한 뒤 서로가 못 만나게 됐을 때도 한동안 그녀는 내게 책 권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주곤 했다.  그 중 한 권의 책에 유독 눈길이 간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맨워칭’(까치, 1994)이 그것이다. 책이든 뭐든 버리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그 책이 아직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책은 인간관계에 대한 섬세하고 밀도 있는 이해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인간 행동, 특히 몸짓에 관한 관찰 보고서인데, 내 경우에는 소설 쓰는데 참고가 되었기 때문에 이 책이 온전하게 자리보전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쓰는 자는 눈썰미가 있어야 한다. 때론 빠르고 더러는 깊게 대상을 읽을 수 있다면 더 잘 쓸 수 있다. 소설 쓰기가 곧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봤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표출하는 행동이나 태도 등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훈련이 제대로 된다면 인간에 대한 오묘한 오해를 넘어 종내는 무한한 이해를 얻어낼 수 있다. ‘인간 행동을 관찰한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그래서 매혹적이다.  

  내가 갖고 있는 책 제목은 맨워칭인데, 요즘은 ‘피플워칭’이란 제목으로 바뀌었다. ‘맨워칭’이란 제목이 남성만을 가리킨다는 오해를 벗어 버리고자 피플워칭으로 개정 증보되어 나오는 모양이다. 동물학자인 데즈먼드 모리스에 의하면 인간성은 곧 동물성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한 마리 새를 관찰하듯 인간의 행동, 특히 몸동작을 현장에서 관찰했다. 정류장, 슈퍼마켓, 공항, 만찬장 등 사람이 행동하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좋다. 인종이나 민족, 또는 개별자의 다양한 일상 행동이나 태도를 관찰하고 분석해놓았는데, 얼핏 복잡해 보이는 그 행동들이 본질적으로는 동물적인 보편성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흥미롭다.

  상대를 의식한다는 면에선 누구나 인간 관찰자가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맛없는 요리 앞에서 안주인이 자꾸 권하면 우리는 정중한 거짓말로 사양한다. 본심을 숨기는 대신 배가 부르거나 다이어트 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완벽한 거짓말을 한다는 건 어렵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손사래나, 입술을 찡그리는 사소한 행동을 보고 안주인은 손님의 거짓말을 알아차린다. 안주인은 그런 상대가 민망하지 않도록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예의 바른 손님 기분을 맞춰 주게 된다. 양쪽 모두 거짓말을 하고, 중요한 건 둘 다 그것을 안다. 말하자면, 상생의 거짓말인데, 많은 사회적 약속 중에 이런 행동 패턴이 은연중에 요구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는 불협화음이 되고 만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몸동작과 언어 신호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진심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 때 오해가 생긴다. 거짓말이 주는 이런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거짓말의 단서를 몸동작과 언어 신호에 실어 보내는 것이다. 협동의 거짓말이야말로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의 필수항목이므로.

  작가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동물로 간주하고 있다. 한데 이것이 사람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인간 사회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좋은 매개체가 된다는 것에 공감이 간다. 우리는 입으로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누구나 몸으로 더 말한다.

  타인에 대한 관용을 높이고 싶은 가을날을 꿈꾸는가? 그 사람의 말이 아닌 동작을 관찰해라. 그가 전하는 몸 언어를 통찰하다보면 어느새 인간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 가을 하늘만큼 드높고 푸르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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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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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꽃가루 날려야 은사시나무지




  첫새벽에 시를 쓴다. 껍질 벗겨진 은사시나무의 실존에 대하여. 아니, 반성문을 쓴다. 그 나무껍질 벗긴 내 죄에 대하여. 내 죄는 부끄러움이나 자책에서 끝날 수 있지만 상대의 실존은 치명타를 입거나 고사(枯死)할 수 있음에 대하여.

   어느 봄날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모 영내 은사시나무 삼십여 그루가 허리 껍질이 벗겨진 채 방치되어 있었단다. 은사시나무에서 꽃가루가 날려 식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둥치에서 사람 허리만큼 올라온 부분의 껍질을 벗겨 방치하면 나무는 고사하는 모양이었다. 꽃가루 날려야 하는 건 은사시나무의 생존방식이고, 그게 방해가 되는 것은 인간의 실존이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자연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대해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거창한 생태주의자나 자연보호주의자 입장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실존’의 문제로 생각해봤을 때도 그 기사는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무리 봐도 ‘방치’가 ‘고사’로 이어지는 일련의 파노라마는 은사시나무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이다. 차라리 적법한 절차나 당국과 협의를 거쳐 은사시나무를 벌채했다면 이런 쓰라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방치와 고사가 주는 비열한 끔찍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은사시나무가 말라가는 동안, 인간들은 아무 일 없이 그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뿌리나 둥치의 고통에 대한 그 어떤 자책이나 미안함보다 제 밥그릇에 꽃가루 날리지 않는 무탈함에 대한 수다를. 

  은사시나무는 적어도 해목(害木)이 되기 위해 자라지는 않았다. 자라기 전 곧장 뽑아주어야 할 나무로는 ‘어린왕자’의 바오밥나무로 족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걷잡을 수 없는 뿌리 번식으로 어린왕자의 별이 파괴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에 비하면 은사시나무는 무죄다. 햇빛 아래, 앞뒤 다른 색으로 반짝이는 잎들은 뭇 사람들에게 노래가 되고 쉼터가 되어주었을  뿐이다. 제 생존 본능을 위해 봄 한철 꽃가루 날린 것이 유죄라면 그건 애교 정도로 봐줄 수 있지 않을까? 그걸 양보 못해 순한 죽음도 아닌 ‘고사하기 까지 방치’하는 그 비열함에 반성문을 쓰고 싶을 뿐이다.

  더러 비열하고, 자주 자책하는 게 인간이다. 의도하지 않은 죄이기에 양심 있는 자는 그 자책이 오래간다. 그 때 망가진 제 영혼을 순진무구한 풀밭에 마냥 풀어놓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이기도 하다.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아름드리미디어,2003)에서 우리는 잠시 위안을 얻어도 좋을 것이다. 성장소설이란 점에서는 ‘라임오렌지나무’와 닮았고, 자연 친화적 요소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어린왕자’에 가깝다. 인간 속성이 아무리 비열하다 해도 자연에의 향수를 쉽게 잊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영혼을 따뜻하게 데워주기에 충분하다. 주인공 ‘작은나무’는 자연의 이치를 할아버지로부터 배운다. 단순하지만 지혜롭게 살아가는 인디언의 모습은 ‘방치’와 ‘고사’를 일삼는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침이 오고 있다. 은사시나무를 위한 내 시는 여전히 미완성이고, 다만 나는 밑줄을 그을 뿐이다. <할머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한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것이다. 몸을 위해서 잠자리나 먹을 것을 마련할 때는 이 마음을 써야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과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 할머니는 이 마음을 영혼의 마음이라고 부르셨다. 만일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교활한 생각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칠 일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이익 볼 생각만 하고 있으면 영혼의 마음은 점점 졸아들어서 밤톨보다 더 작아지게 된다. 몸이 죽으면 몸을 꾸려가는 마음도 함께 죽는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영혼의 마음만은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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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9-10-06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사시나무가 무슨 죄란 말입니까. 사람의 눈에 띄인게 원통할 뿐이지요. 이 책을 읽고 생태와 작가의 이중성을 집중 타격했던 저와는 다르게 말간 감성으로 쓰셔셔 깊은 밤 편하게 읽습니다. 검은 눈동자님! 닉네임을 바꿨어도, 이렇게 간만에 간명한 글로 반갑고 웬만하면 자주좀 뵙고 삽시다.(응? 그러면서 파란여우는 서재 방치 중...--;)

다크아이즈 2010-02-0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을 어떻게 잊겠어요? 장정일과 박정만을 공감하던 님을...
대충 살다보니 서재질이 뜸합니다. 가끔씩 님 서재에도 들러야 하는데 사는 게 영 말이 아니네요. 얼른 들러볼게요. 왜 서재 방치하시는지도 알아낼겸...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리처드 칼슨 지음, 강미경 옮김 / 창작시대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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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걱정은 사소하다 




  오늘 하루 그대 일과는 위대하였고 거기에 파생하는 걱정은 사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그 사소함이, 충분히 위대할 수 있었던 그대 일과를 망쳐버렸다. 실은 일과를 망친 것도 아니다. 망쳤다고 생각하는 건 그대가 느끼는 ‘사소함이란 유령’ 때문이다. 대부분의 걱정은 사소한 것에서 출발하고 그것이 그대 하루를 번민하게 만들므로. 오늘 하루 얼마나  사소함이 그대 영혼을 너덜거리게 했는지를 증명해보자. 

  한 달에 한 번 봉사하러 가는 그대, 오늘도 상담자의 편지를 개봉한다. 기름을 먹인 듯한 반질거리는 편지지에 세로로 정갈하게 써내려간 글엔 가을을 맞는 사내의 우수가 담겨 있다. - 어김없이 가을이 왔네요. 입술은 바싹 말라가고, 책을 읽어도, 글을 써도 예전처럼 집중되지 않아요.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면담자의 아픔은 깊고, 그대 자질은 얕기만 하다. 최선을 다해 들어주었건만 결과는 그대의 이러한 사소한 걱정이 그대를 압도한다는 사실이다. ‘내게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줄 자질이 없는 게 아닐까? 영혼이 아프다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왜 더 많은 것을 주지 못했을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책하고 자책한다. 하지만 자책은 불필요하다. 그대는 성실하게 그의 얘기를 들어주었고, 어쩌면 편지를 쓰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스스로 치유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봉사를 마친 그대는 급하게 공식 자리에 참석할 일이 생겼다. 그제야 그대는 복장을 살핀다. 살짝 찢은 청바지에 흰 점퍼를 입은 그대는 망설일 수밖에 없다. 공식의 밥상에 권위주의라는 주요반찬이 빠진 적이 없으므로 자기검열에 빠진 그대는 또 사소함에 목매기 시작한다. 가을 분위기에 맞는 갈색 원피스를 갈아입고 나오기엔 시간이 촉박하고, 운전대를 잡은 그대는 빨간 신호등에서 교차로를 건널 만큼 찢은 청바지 패션에 골몰한다. 허겁지겁 자리에 앉았건만, 마음이 편치 않으므로 꼬리뼈는 아파오고 지루한 시간이 지속된다. 옆자리 누군가가 흘깃 쳐다만 봐도 찢어진 청바지를 탓하는가 싶어 식은땀이 난다. 실은 갈색 원피스와 찢어진 청바지 사이엔 별 차이가 없다. 투명 비닐 따위를 첨단패션이라고 뒤집어쓰지 않는 한 아무도 그대를 주목하지 않는다. 그대의 고민은 그대가, 혹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허상의 지표를 따라야 한다는 부담에 지나지 않는다.

  행사가 끝난 뒤 그대는 지인들과 정담을 나누기 시작한다. 당신과 따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지인의 눈신호를 보면서 그대는 기꺼이 시간을 할애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사할 사람은 많이 남았고, 그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지인은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그대는 자책한다. 의례적 인사는 접어두고 지인의 얘기를 먼저 들어줄 걸. 하지만 이 역시 사소한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지인은 그대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당신을 기다렸던 것이고, 그 부탁이라는 것은 꼭 오늘 이 자리가 아니어도 가능한 것이다. 그야말로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행복해지고 싶은 우리는 정작 그 행복을 위해 너무나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고 말하는 책이 여기 있다. 리처드 칼슨의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창작시대, 2000)는 알게 모르게 우리가 얼마나 사소한 것들의 일상에 얽매여 사는지를 곱씹게 해준다. 사소한 오해가 가져다주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 생각과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무분별성, 자기 능력을 의심하거나 회의하는 피곤함, 수시로 변하는 기분에 집착하는 자기연민, 스트레스를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환경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자아 등은 모두 인간이 가지는 특질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일수록 이 허상의 우물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 우물에서 질퍽거리는 동안 우리 섬세한 영혼은 잘 보이지도 않는 우물벌레에게 야금야금 갉히고 만다. 작가는 말한다. ‘몸의 주인이 당신인 것처럼 감정의 주인도 당신이다. 행복은 현재 당신 마음속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소한 것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기엔 우리 생이 아직은 환희와 풍요의 나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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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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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를 부탁해




  과히 신드롬이다. 아니,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는 이제 신화가 되었다. 언제나 불황이라는 출판업계의 투정을 가벼이 웃어넘기듯 백만부 판매라는 빅뉴스를 독자들에게 보너스로 주기까지 한다.

  올해 이 도시의 원북 역시 ‘엄마를 부탁해’이다. 원북 행사란 전국 몇몇 공공도서관에서 시행하는 범시민 책읽기 운동의 일종이다. 시민들이 접수한 후보 도서 중 한 권을 각계에서 위촉된 원북 심사위원들이 토론으로 선정하고 도서관측은 그 책을 올해의 원북으로 선포한다. 한마디로 ‘책을 가까이 하는 시민’이 원북 행사의 취지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시민들이 원북을 읽을 수 있도록 도서관측에서는 도서대출 및 교환, 원북 작가와의 행사 그 외 공개토론회 등을 마련해 적극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 

  ‘엄마를 부탁해’가 올해의 원북 도서로 정해진 도시는 서너 곳이 된다고 한다. 백만부가 팔리기까지 이러한 원북 운동도 일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많은 독자의 마음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책 그 자체가 주는 감동 때문이라는 건 의심할 필요가 없다.

  원북 행사의 일환으로 지난주에 공개독서토론회가 있었다. 나를 포함한 시립도서관  주부독서회팀이 주축이 되어 시민들과 자유로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우선 출간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독자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이 책의 미덕은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역시 신경숙 소설의 문체미학과 감성미학이 빠질 수 없었다. ‘부엌 살강에 엎어진 밥그릇’이나 ‘흙담 밑에서 뻗어가는 호박넝쿨’도 놓치지 않는 작가의 미시적 눈썰미와 ‘엄마를 잃은 게 아니라 잊었다’는 감성적 성찰이 그미 소설의 특장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 외 시점 변화의 독창성과 다소 신파인 곰소 아저씨와의 로맨스 등이 충분한 공감과 대중성을 획득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음은 엄마의 희생은 과연 온당한가, 라는 의견을 나눴다. ‘엄마는 멀리서 생각하면 눈물 나고, 가까이서 보면 화가 난다’는 작가의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처음부터 (희생만 하는)엄마로 태어난 게 아’니라 애초에 엄마는 여자였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반어법일 것이다. 엄마의 희생이 전제되어야만 온전한 가정이 지탱될 수 있었던 시절에 대한 회한의 기록은 그대로 엄마에 대한 헌사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많은 독자를 울린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려이기도 하다. 혹여, 이러한 모성의 희생이 가부장적 혐의가 짙은 이들에 의해 현재진행형의 미덕으로 칭송되거나 강요되지나 않을까 하는.

  맏아들로 살아간다는 것의 힘겨움과 나머지 아들들의 정체성 혼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도 의미 있었다. 장자인 형철이 밖으로 도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동안 나머지 두 아들은 둘째놈, 또는 아우라는 보통명사로만 존재한다. 아버지가 쓰던 밥그릇을 큰아들이 물려받고, 장독에 숨겨둔 ‘귀한’ 라면을 큰아들만 먹고, 고구마 캐는 노동에서 맏아들이 면제될 때 나머지 아들들은 절규한다. ‘형만 장땡이냐’고. 남은 두 아들들을 보듬는다고 너희들도 장땡이다, 라고 엄마가 말한들 남겨진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릴 적 상처는 성장한 뒤의 트라우마가 되니까.

 가족애란 이름으로 한량이었던 아버지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타당한 것인가, 라는 주제도 패널과 방청객 모두를 몰입하게 했다. 신경숙 가족소설에는 빈번하게 ‘아버지의 부재’가 나온다. 그미의 책을 읽다보면 그 부분은 의도적이라기보다 경험적,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젊은 여자 때문이든, 역맛살이 낀 팔자 때문이든 집 나간 아버지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든든히 집안을 지키고 있는 아내 품으로 돌아온다. 그 어떤 아내의 힐난도, 이렇다 할 자식들의 반항도 없이... 집안에 아버지는 부재중이지만 언제나 그 아버지는 면죄부를 받는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감히 부탁해본다. 책 속에서 아버지가 맏딸에게 엄마를 부탁하고, 맏딸이 성베드로 성당의 피에타상에게 엄마를 부탁하듯 이제 아버지를 부탁해본다. 아니, 아버지께 부탁한다. 이 세상 아버지(남성)들아, 이 책을 읽고 싱겁다거나 뻔한 얘기라고 옆으로 밀어놓는 일만은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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