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독서본능 - 책 읽기 고수 '파란여우'의 종횡무진 독서기
윤미화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나 고수가 되는 건 아니다 




  종횡무진 리뷰판을 벌이는 파란여우의 꼬리를 잡으러 간다. 숨차고 머리 어질하다. 내 드문 리뷰에 가문 덧글은 당연하다. 그래도 그 덧글 중 가장 강열한 인상을 준 이가 ‘깐깐한 독서본능’을 쓴 파란여우였다. 장정일과 박정만(시인) 덕분이다. 그 둘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동년배라는 걸 눈치챘던 것이다. 그미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혹, 자신의 숨은 동창 친구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물어온 적도 있다. 칠십 년대에 초등학교(국민학교란 말이다!)와 중학교를 다녔고, 팔십 년대에 고등학교와 대학을 누빈 자의 우연한 공통분모가 그런 착각을 불러 온 것이리라. 같은 시간을 건너온 자의 먼지 한 톨 같은 공유의식이 실제론 멀지만 가상공간에선 가까운 친구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내가 서재를 방치하는 동안 그녀가 책을 냈고, 다시 몇 글자씩 끼적이게 됐을 때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하고 있음을 현장 목도하고 있다. 스테디셀러가 되기를 조용히 응원한다. 그 응원의 한 갈래로 당장 책을 샀고,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느려터진 내 읽기 속도로 며칠 더 걸릴 것이다. 반 이상은 읽었으니 설사 더 늦어질지라도 조급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읽은 이는 알겠지만 이 책은 단숨에 읽어 내릴 책이 아니다. 자신의 책 무더기 주변,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읽는 자의 길잡이 노릇을 하게 해도 썩 괜찮다.  



  솔직하자면 내 빈약한 독서 이력에는 걸맞지 않는 책이다. 하지만 그건 내 지성의 ‘빈약함’ 때문이지 내 독서취향과는 별개의 문제다. 어쭙잖게 독자로서 작가에게 빌붙는 변명을 하자면 나도 장정일과 김훈과 수전 손택 이야기엔 흥분한다. 장정일의 형형하고도 순정한 눈빛과 작가정신을 미더워하고, 우수수 잎 떨어진 겨울나무 같은 김훈의 스트레이트 미문을 죽도록 흠모하며, 수전 손택의 개별자의 고통과 아픔을 살피는 그 눅눅한 통찰과 인심을 존경한다. 그러니 앞서가고 달려가는 그미의 독서법이 다소 벅찬 독자라도 충분히 그녀식 읽기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다.  



  궁금한 자, 호기심 어린 자, 다 ‘깐깐한 독서본능’에 모여라. 나 잡아봐라, 폭설 맞은 꼬리를 털어내며 저만치 내달리는 파란여우 잡으로 가자.

  불만이 없다면 주례사 비평으로 몰릴까 두려우니 억지로라도 찾아보자.  

  저자, 출판사 이름 정도는 책 사진 밑이나, 리뷰 내용 중에 삽입했어야 했다. 편집 상 세련미를 고집한 때문일까? 편집자의 눈썰미가 아쉽다. 책 안내자 역할을 하는 리뷰성 글인데, 불편한 편집 때문에 독자의 읽는 수고를 더욱 짐지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읽으면서 저자와 출판사를 확인하느라 저 앞면의 ‘소개되는 책’으로 끊임없이 되돌이표를 해야만 했다. 작가 이름이 내용에 언급되나 싶으면, 출판사 이름이 빠져 있으니 덜 꿰맨 이름표를 달고 책상 앞에 앉은 꼴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편지’ 같은 경우 끝까지 읽어도 그 책의 겉표지 정보를 꿰차지 않은 상태에서는 책의 정체성에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결국, ‘정민, 박동욱 엮음’, ‘김영사’라는 정보를 얻기 위해 앞 부분 ‘소개되는 책’란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책 읽기 고수들에게는 그런 수고가 별 것 아니겠지만, 일반 독자들에겐 짜증을 불러낼만한 편집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도서목록을 한쪽에 몰아두는(감춰두는) 것이, 이번 목록에 끼지 못한 다른 책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 것일까? 제법 두꺼운 책이라 읽을 때 조금만 부주의해도 지면이 자꾸만 엎어진다. 거기다 양 손으로 지탱해가며 확인 차 앞뒤로 왔다 갔다 하려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이래저래 재바르지 못한 사람, 인내심 테스트 하는 것 같아 살짝 서운하다.    

 

 

 

  만연체를 구사하다 보니 더러 비문이 보이는 것도 옥에 티다. (흔한 건 아니고 몇 군데 보인다. 잘 살펴 다시 흔적 남길 수 있어야 할텐데...) 김훈의 문체를 이해하는 작가의 세심한 눈길이 털털한 문체 - 제목에서 ‘깐깐한’이라는 관형사를 사용했는데, 이건 내용상 그렇다는 뜻일 것이다. 저자의 문체는 확실히 털털한 편이다. - 와 조화를 이룬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글쓰기가 될 것이다. <6년 전, 황야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놀던 무식한 나에게 책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책의 문을 열면서 나는 내 황폐한 영혼의 ‘빵꾸’를 수리하고 시력을 교체했다>(59쪽) 같은 표현이야말로 작가의 털털함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앞으로 책 안내자의 역할을 넘는 글쓰기가 작가에게 요청될 것 같다. 충분한 자격이 있는 작가의 앞날에 또 한 번 박수를 보낸다. 좋든 싫든 이제 작가는 글 써서 염소 먹이 파는 밥벌이의 비루함(위대함!) 대열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부디 다음 책도 건재하기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 2010-01-12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님,김정만 시인이 아니라, 박정만 시인입니다.ㅎㅎ
진정성 베인 리뷰 잘 읽었습니다.편집의 아쉬움과 더불어 제 글의 빈약함까지 고언을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다크아이즈 2010-01-1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고, 이런 실수를... 고칠게요. 세월 가니 박정만 시인도 가물가물~ 재혼부인 염미혜 씨 이름이 더 기억남으니 아무래도 '미세스 염'을 질투했나 봅니다. ㅋㅋ 그리고 감히 누가 여우님 글의 빈약함을 운운할 수 있을까요?
 
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좀 더 압축했으면 좋았겠다. 300여 페이지인데 200여 페이지 정도로 압축했으면 가독성이 더 나았을 텐데. 이런 바람은 독자로서의 작은 불만일 뿐, 진실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소설적 재능이 빼어난 작가라는 것. 그 성과가 훈련의 산물이 아니라 태생적 요청이 아니었을까, 하는 부러움이 인다는 것.

  그미의 문체는 ‘행동체 단문’이다. 그저 이야기 흐름을 따라 손끝을 놀릴 뿐이다. 그게 문장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끝내 독자의 심장을 펄떡이게 만든다. 단편 작가들은 의도적으로  ‘내면화된 단문’을 겨냥한다. 문체로 승부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무엇을, 보다는 어떻게,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자칫 깊어 보이는 그 방식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정유정의 문체는 그것을 극복해서 술술 읽힌다.

  예단컨대, 그미는 아포리즘을 남발하거나, 내면을 낭창하게 읊조리는 작가는 되지 못할(않을!) 것이다. 장편에서 독자를 더 잘 끌어들이는 조건으로 아포리즘이란 칵테일이 적절하게 요구된다. 김연수나 윤대녕 류가 그런 조건을 잘 갖췄다. 하지만 그미는 존재의 근원 따위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않아도 용서된다. 대신 블랙유머와 눙치는 눈썰미와 앙다문 입 속에 예리한 혀의 칼날도 숨기고 있으니까.  




  어지간한 작가다. 탈출하기 위해 시계 흉기 장면을 등장시키면서 승민과 최기훈이 대치하는 부분을 이십여 페이지씩이나 녹아낸다는 것 -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독자로서의 불만은 접어두고- 그런 고구마 줄기 캐기식 연결이 현장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 그런 장면들이 너무나 세밀하고 자연스럽다는 것, 그것이 작가적 저력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한마디로 손끝에 다음 문장이 줄줄이 사탕처럼 물려 있고, 혀끝에 다음 대사가 칡넝쿨처럼 휘감겨 오는 것이다. 작가가 글을 짓는 게 아니라 글이 그저 이야기를 잣는다고나 할까? 이런 걸 작가적 재능이라는 말 대신 뭐라고 표현할 수 있나?

  그렇다면 재능 없는 자들은 쓰기를 그만 둬야 할까? 재능에 비견되는 엉덩이 굳히기,라는 미련한 방법도 있으니 그리 절망할 일은 아니다. 재능 있는 자 쓰기를 즐기고, 딸리는 자 엉덩이 의자에 붙여라. 그리하여 전자처럼 손끝 바지런히 놀릴지어다. 이런 절망스런 감상문을 쓰게 만드는 작가(소설이 아니라!)이다. 

  적어도 어떻게 쓰냐를 고민하지 않아도 될 작가다. 그저 무엇을, 왜 쓸 것인가, 만 고민하면 되는 작가로 보인다. 이건 독자로서 신진 작가에게 보내는 최대의 찬사이자 부러움이다. 그미의 성공 조짐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공의 문제라기보다 성향의 문제라고 본다.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작가가 아니라 예견된 될 성 부른 떡잎이었다. 등단 한참인 작가들도 ‘무엇을’ 보다는, ‘어떻게’ 때문에 쓰기를 고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가운데 복 받은 작가, 천상 작가이고 말 작가를 오랜 만에 만났다고나 할까.




  문장, 일단 잔재미가 있다. 

 다들 같은이름을 쓰는 소식통을 정보 출처로 댔다. ‘정통한’ 소식통이라고. (130쪽)

 현선엄마는 현선이를 불렀고, 나는 애타게 잠을 불렀다. (130쪽)




 다행하게도 영화로도 제작된다니 작가의 의도와 잘 맞아떨어진 게 아닐까? - 읽을수록 디테일한 장면들은 영화를 염두에 둔 혐의가 짙다.

  불만이 있다면 넘치는 현장감과 모자람 없는 묘사나 대화에도 가끔씩 독해력이 딸리더라는 것이다. 필시 작가가 독자의 수준을 자신과 동일시한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리라. 친절한 설명은 독자를 모독하는 것이라 해도 과감한 생략 부분이 과도한 현장을 밀어내고 제 자리를 찾았더라면 가열찬 가독성을 보장하지 않았을까 인상 한 번 써보는 것이다.  




  비켜, 왜 하필 ‘비켜’였던가. 모르겠다. 그 순간 내 몸을 꿰뚫었던 것이 무언지만 안다. 통쾌함이었다. 해방감이었다. 깨달음이었다. 내 심장도 승민처럼 살아 있었다. 흉곽 속에서 아프게 요동하고 있는 것은 분명 내 심장이었다. 보트 한 대가 왼편을 스쳐갔다. 나는 핸들을 잡은 채 일어났다. 앞 유리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내 안에서 들끓는 것들을 토해냈다. 추격자들을 향해, 드넓은 호수를 향해, 수리 희망 병원 501호를 향해. 내가 떠나온 세상을 향해.

  “비켜, 다 비켜!”  (268쪽)




  사람들이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갈망의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 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그리하여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꿈꾸던 희망이 세상 속 진실보다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기억의 땅으로 남을 뿐이다. 옛날, 옛날, 내가 한때 그쪽에 살았을 때 일인데……. (292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샘 2010-01-0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느낌이 맞아요. 300페이지를 200페이지로 줄일 수 있으면... 그런 바람.
저만 한 게 아니었군요.
이전의 소설도 그랬습니다. 스프링캠프...

다크아이즈 2010-01-08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신예로서의 호기 정도로 보면 될까요? 가지치기를 끝낸 작가가 휘두를 필력이란 칼날을 생각하면 아, 여기서 그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질투심이...ㅋㅋ
 
펜끝으로 훔쳐본 세상
세노 갓파 지음, 박국영 옮김 / 서해문집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품절 책 구하기




  고양이 한 마리로 시작한 연상놀이가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면 분리수거함 옆, 자동차 밑에 숨어 있던 들고양이가 인기척에 놀라 도망가곤 한다. 뚜껑이 덮여 있어 끼니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언제나 고양이는 쓰레기통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며칠 전에 본 고양이는 한쪽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다친 지 오래인지 무덤덤한 절뚝거림이 도리어 연민을 자아냈다. 서러운 듯 영민한 그 눈빛이 잔상처럼 어리어 카스테라빵을 들고 다시 내려가 봤다. 고양이는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그날 밤 ‘버려진 고양이, 다친 고양이, 길고양이 키우기’ 등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비염을 앓는다는 핑계 때문에 집에 들여 키울 수는 없지만, 어릴 적 고양이와 쌓은 정 때문에 나도 모르게 측은지심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고양이 검색 놀이는 급기야 일본의 ‘고양이 빌딩’까지 미쳤다. 고양이들이 사는 아파트인가 싶었는데, 그 유명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 빌딩 이름이란다. 책이 좋아 생업까지 포기한 채 책을 모으고, 읽고, 쓰기만 한다는 다카시의 책방 건물이었다. 자신만의 책 빌딩을 갖고 있다는 것에 찬사와 부러움을 표하는 이들이 많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책은 모으는 것보다 잘 버리는 것이 좋다’ 쪽이기 때문에 책 많은 그가 부럽진 않다. 물론 많이 읽고, 잘 쓰는 그가 존경스럽긴 하지만.  



  정작 내가 부러운 이는 따로 있었다. 세노 갓파였다. 세상에! 책 빌딩 외관에 커다란 검은 고양이를 그린이가 세노 갓파란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책벌레 친구를 위해 그 프로젝트를 수행했단다. ‘방심할 수 없는 검은 고양이’의 눈빛을 그리기 위해 고심했다는 갓파의 필치를 보면서 몇 년 전에 만난 그의 책 한 권을 떠올렸다.  


  내게 세노 갓파는 길에서 만난 작가였다. 언젠가 대구행 버스 옆자리 아가씨가 세노 갓파를 읽고 있었다. 상세 그림이 곁들인 가로가 긴 듯한 특이한 장정의 책이었다. 섬세한 그림에다 손수 쓴 듯한 글씨는 훔쳐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그림 잘 그리는 작가의 에세이라고 답해준 아가씨는 친절하게도 그 책을 훑어볼 기회까지 주었다. ‘펜 끝으로 훔쳐 본 세상’(서해문집,1999)이란 책이었는데, 어감에서 오는 강열한 포스 때문에 ‘갓파’라는 작가 이름도 금방 기억할 수 있었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유머가 있되 가볍지 않고, 세밀하나 아프게 찔러대지는 않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성과 감성이 적절히 배합된 그 책에 감질 맛을 느꼈다. 당장 수첩에다 작가와 책 제목을 적었다. 꼭 사서 꼼꼼하게 읽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잊거나 귀찮아하는 동안 여기까지 왔다.  



  그날 고양이가 아니었다면 세노 갓파에 대한 내 관심은 더 미뤄졌을 것이다. 당장 ‘펜 끝으로 훔쳐 본 세상’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는 순간 기대는 무너졌다. 품절이란 빨간 글씨가 뜬다. 품절- 물건이 다 팔리고 없다, 는 뜻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재출간 될 수도 있다는 뜻인가? 출판사의 자발적 철회를 의미하는 절판이 아니니 기대해도 되는 것일까? 혼란을 가다듬고 인터넷 중고서점을 쏘다녔다. 절판된 책 구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갓파의 다른 책을 검색해본다. 오호라, ‘소년H’란 책이 보인다. 역시 그림 곁들인 책이라 구미가 당긴다. 오랜 세월 간판장이로 현장을 누린 그가 쓰고 그렸다는 이 자전 소설로라도 내 관심을 대신해야겠다. 혹, 그대들이여, 세노 갓파의 ‘펜 끝으로 훔쳐 본 세상’을 보거든 연락 좀 주시라. 길에서 우연히 만난 갓파, 또 다른 운명의 길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아참, 그날 이후로 뵈지 않는 그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품절 책 소식만큼이나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긍정의 힘 - 믿는 대로 된다
조엘 오스틴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긍정의 즐거움




  김장철이다. 가사노동(어쩌면 모든 노동을!)을 버거워하는 편이지만 해마다 김장김치만은 손수 담가왔다. 내 어설픈 살림솜씨를 아는 지인들은 내손으로 김장을 했다고 하면 의외라는 눈치다. 시댁에서 가져오거나 친정 덕을 볼 거라고 생각한다. 그도 아니면  파는 김치를 애용할거라고 지레짐작한다. 그간 돼먹잖은 ‘가사노동에서의 해방’이라는 핑계로 제 게으름을 선전하고 다닌 때문이리라. 시댁 김치를 가져다먹기엔 양심 찾을 중년이고, 홀로이신 친정 엄마는 이웃에게 얻은 김치만으로도 차고 넘치니 딸을 위해 부러 김장할 일은 없다. 그렇다고 김치를 사먹을 만큼 생업에 바쁜 처지도 아니니 그간 좋든 싫든 김장을 해왔다. 밥상 차리기, 라는 주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이 김치이기 때문에 김장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허전한 식탁에 올릴 김치라도 냉장고 가득해야 안심되니까.   


  지난 주 드디어 김장을 했다. 내 생애 최초로 김장행사에 이웃사촌들을 초대까지 했다. 선하고 배려 많은 사람들이라, 나 아니라도 김장 도와주러 갈 이웃이 많았겠지만 기꺼이 함께 해주겠단다. 사실 스무 포기 남짓한 절임배추로 김장을 하는 건 한나절도 걸리지 않는다. 해서 그간에는 휴일을 이용해 남편과 함께 했다. 능률면에서는 남편과 후딱 해치우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웃과 함께 할 달콤한 시간이 기대되기도 했다. 남편은 ‘진작에 그렇게 할 것이지’ 라며 반색했다.  



  정성껏 김치를 버무려 줄 이웃을 초대해놓고 보니 점심 걱정이 앞섰다. 갓 담근 김치에다 굴 곁들인 보쌈으로 해결하면 된다지만 수육조차 제대로 삶아 본 기억이 없다. 보쌈을 시켜먹는 최악의 경우만은 피하고 싶었다. 숫제, 김장은 뒷전이고 보쌈용 편육 삶기가 최대 과제가 되어버렸다. 인터넷을 뒤진다, 이웃에게 물어 본다, 궁리 끝에 독서모임의 인생 선배 한 분의 가르침을 접목한 편육 요리(?)에 도전하기로 했다.

  착하고 다정한 이웃들이 배추 속을 넣는 동안 나는 주부라면 익히 알고 있을 돼지고기 삶기에 도전했다. 인생 선배의 노하우는 압력솥과 통후추와 월계수잎이었다. 압력솥 자박한 물에 고기를 넣고 통후추와 월계수 잎 넣는 것만 잊지 않아도 실패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기본에다 된장, 커피, 와인, 바질, 양파, 생강, 대파, 마늘 등 다국적 양념 및 향신료를 조심스레 첨가했다. 깊은 맛은 못 내더라도 누린내라도 없애야겠다는 맘이었다.  



  맑은 햇살이 창을 뚫고 마루로 전진해왔다. 압력솥 추가 돌아가고 고기 익는 냄새가 집안에 감돌았다. 김장 속같이 걸쭉하고 매콤한 얘기들이 덩달아 쏟아졌다. 있는 그대로 서로를 인정하는 아줌마표 수다가 이어졌다. 저마다의 일상을 얘기하는, 굵거나 잔잔한 목소리 속에는 큰 울림이 숨어 있었다. 괜히 마음 한구석이 충만해졌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긍정의힘, 2005) 한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 마음은 자동차 변속기와 비슷하다. 자동차 변속기에는 전진기어와 후진 기어가 있는데, 우리는 차를 운전할 때 어떤 기어를 넣을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뜻대로 인생의 행로를 결정할 수 있다.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하나님의 복에 마음을 두기로 결정하면 어떤 어둠의 세력도 목적지에 이르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을 품고 불가능만 바라보는 것은 후진 기어를 넣고 승리에서 멀어지는 일이다.’ (127쪽)  


  옳은 말만 하는 인생지침서를 보면 옳은 말만 떠벌이고 실천하지 못하는 여러 상황들이 떠올라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흐트러지고 무너지기 쉬운 하루, 내면의 동요를 느낄 때 스스로를 다독이는 처방전으로 이런 책이 필요할 때도 있다. 긍정의 감기약 같은 이 책 한 구절이 이웃들과의 다정한 한 때와 겹쳐진다.  



  뒷설거지가 끝나고, 몇 통 가득한 김치는 냉장고로 들어가고, 된장과 월계수잎 냄새가  밴 편육 보쌈이 식탁을 점령한다. 어설픈 솜씨에 설익은 고기를 다시 쪄내야했지만 김장 끝에 싸먹는 보쌈은 감질나기만 했다. 흔한 말이지만 즐거움은 가까이 있고, 내 안에 있다. 이웃과 함께 하는 사소한 긍정이 보쌈 양념으로 얹히는 일, 그게 행복인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처받은 아이들 동문선 문예신서 2002
니콜 파브르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첫 아르바이트




  수능 시험을 마친 고3들, 요즘 자유 시간을 주체할 수 없다. 막바지 대입 전략으로 마음 부담은 크겠지만, 물리적으로 주어진 시간이 많다 보니 괜한 고민들을 한다. 내 딸아이와 친구들도 그런 상황이다. 각자 운전을 배운다, 헬스클럽을 다닌다, 영어 학원을 다닌다 해도 늦은 밤까지 공부하던 때에 비하면 여유만만이다.    



  성정이 재바른 친구들은 벌써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도 했단다. 주로 패스트푸드점이나 삼겹살집, 치킨집에서 서빙을 한단다. 호기심이 생긴 딸아이도 물어온다. 동네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생 구한다는데……. 말끝을 흐리는 품새가 자신도 아르바이트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완곡한 표현일 게다. 작년에 이런 과정을 먼저 겪은 친구가 생각나 나는 속으로 웃었다. 호텔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던 친구딸은 사흘을 견디지 못했다. 난생 처음 신어보는 하이힐에다 정장차림으로 대여섯 시간동안 고객을 상대한다는 건 어려운 경험 없던 열아홉에겐 무리였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아르바이트 치고는 혹독한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한참을 거슬러 내 시절은 어떠했는가? 입시를 마친 그 겨울, 한 옷가게에서 생애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학생이라면 대개 용돈이 궁할 시절이었다. 그런 딸을 위해 오지랖 넓은 엄마가 손수 아르바이트 자리를 주선해주었다. 궁해서 시작한 아르바이트였지만 그래도 일말의 낭만 같은 걸 기대했던 나는 첫날부터 그런 생각을 접어야했다. 사회는 냉혹했고,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인 나 말고 정식 여직원이 둘 있었다. 그 둘은 미묘한 경쟁 관계였다. 아니, 한쪽이 일방적으로 사장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신상품 가격을 책정하고, 할인율을 정할 때 사장만큼 입김을 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하루 매출 장부를 기입 검토한다는데 대한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활기차고 당찰수록 상대적으로 일의 주도권을 갖지 못한 나머지 여직원은 주눅이 들었다. 덩달아 감정이입이 된 나도 침체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옷가지를 제 때 개켜놓지 못해서 눈치 봐야 했고, 그 많은 종류의 옷에 붙인, 암호로 새겨진 일본식 가격표를 해독하지 못해 맘 졸여야 했다. 매출이 신통찮아도, 재고 현황 아귀가 맞지 않아도 사장을 대신한 그녀는 주눅녀에게 짜증을 냈다. 곁에 있는 나는 덩달아 그 분노를 감내해야 했다. 어쩌다 그건 아니고, 라는 반발이 주눅녀에게서 나오면 그녀는 항상 이렇게 되받아쳤다. - 너, 아버지 없다고 나 무시하니?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제 아버지의 부재를 타인에게 각인시킴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인정받지 못한 스물아홉의 주눅녀와 사회를 미처 알지 못한 열아홉의 나는 그런 말을 하는 그녀도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공감하곤 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토록 힘들었으면서 왜 쉽게 일을 그만두지 못했을까? 그건 절실함의 문제였다. 나남할 것 없이 풍족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한 번 시작한 아르바이트를 그만 둔다는 생각을 쉽게 하지 못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상황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어 달 남짓한 아르바이트가 끝났을 때까지도 신뢰녀의 행동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훨씬 뒤 나는 그 답을 니콜 파브르의 ‘상처받은 아이들’(동문선, 2003)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얻을 수 있었다. ‘죽은 나무들은 버려야지. 살아 있는 나무만 필요해. 살아 있는 나무들로 모든 사람을 꼼짝 못하게 가둘 거예요.’(87쪽). 아버지 얼굴을 못보고 자랐다는 그녀도 책 속의 파스칼처럼 아버지 같은 무가치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자신을 단련시켰던 것이다. 오직 자신의 기준으로 싹수가 노란 모든 것들은 가지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말끝마다 내뱉던 아버지 부재에 대한 절규는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왜곡된 정서의 발현이 아니었을까.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딸아이의 아르바이트에 관한 낭만적 호기심은 잠시 미루는 게 좋겠다고 말할 참이다. 절실해도 상처받기 쉬운 욕망은 절실하지 않을 때 실패를 담보하기 쉬우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