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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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리뷰에 올려야 할지 페이퍼에 올려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내 맘대로식 리뷰로 보기엔 객관적 정보가 너무 많고, 잡설 페이퍼로 보기엔 책에 관한 얘기가 많고... 내 서재니까 내 맘대로 할란다.  

 

이 리뷰는 내가 진행하는 방송의 스물여섯 번째 시간에 전파를 탄 로쟈의 '인문학 서재' 소개글이다. 시간이 좀 지났구나. 김훈은 일찍이 말했다. 책은 팔려야 그 효용을 다하는 거라고.내 깐에는 최선을 다해 소개했는데, 글쎄 내가 사는 이곳에서는 얼마나 먹혔는지 모르겠다. 인문학은 어려워서가 아니라 관심이 덜 해서 덜 읽힌다고 로쟈님이 말씀하던데, 솔직히 말해서 뭘 모르는 나 같은 이한테는 어렵다. 그래도 자꾸 접하다 보면 나아지지는 않겠나? 

  

이 책, 현재 대박행진 중인 걸로 안다.  그래도 김훈식으로 '알라디너들아, 책 좀 사가라' 

그리하여 책 쓰는 이들이 밥벌이의 비루함에서 조금은 보상받았으면 좋겠다.   

  

 

 

A. S  // 오프닝

A. 오늘 들고 오신 책은 제법 두꺼워 보이는데 어떤 종류의 책인가요?

S. 네, 산책자에서 발간한 로쟈의 인문학 서재라는 책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본명보다는 로쟈라는 닉네임으로 더 알려진 이현우 작가가 쓴 서평 모음집입니다. 인터넷 서점 상의 대중 지성이 오프라인 서재로 옮겨간 대표적인 경우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A. 인터넷 서평꾼이 오프라인으로 진출해 책을 낸 경우군요. 로쟈라는 닉네임의 작가에 대해서 소개해주실까요?

S. 네, 저도 인턴넷 서점을 애용하고, 거기에서 제공하는 블로그 형식의 개인 공간도 갖고 있는데요, 그 인터넷 서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용한 인문학적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 분이 서울대 노어노문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이현우라는 노문학자이자 인문학자인데 로쟈라는 필명으로 활동을 합니다. 그가 써내려간 전천후 인문학 독서의 후기가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단시간에 독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 예술, 철학에 대한 진지한 에세이와 철학자 지젝 읽기, 그리고 번역비평에 관한 주요 글들을 망라해 놓았습니다.




A. 책이 나온지 몇 개월 되지 않는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S. 네, 책머리에 나오는 작가의식에서 살짝 그것을 엿볼 수 있는데요, <나는 하녀고 광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다만 읽고 쓰고 떠들겠다. 뭔가 같이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아지면 지금보다는 조금 나은 세상이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없는 건 아니다. 지금보다 조금은 더 견딜 만한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당신에게 끼니가 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대단찮은 것이어도 ‘겸손한 식사’ 정도는 될 수 있다면 말이다.>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인문학적 갈증에 목말라 하는 일반 독자들에게 청량한 우물 같은 역할을 한 게 좋은 반응을 얻게 된 계기 같습니다.




A. 인문학 하면 철학과 더불어 학문적이고 딱딱한 느낌이 들어 일반 독자들이 접하기엔 쉬운 영역이 아닌데 어떤 부분에서 독자들과 소통이 되었을까요? 

S. 인터넷 서점 상에서는 사실 ‘로쟈’라는 이름은 전설이자 유령입니다. ‘로쟈에게 물어보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터넷 상에서는 인문학 방면의 ‘가장 영향력 있는’ 멘토 역할을 충실히 해냈습니다. 그의 유명한 서재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 가면 인문학 책읽기에 관한 독자로서 궁금한 모든 것이 해결될 정도로 방대한 자료들이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춤꾼 니진스키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블로그를 방문했다가 알게 된 경우입니다. 그의 전공은 노어노문학이지만 전공하지 않은 분야들까지도 많은 정보를 갖고 있고, 그 정보들은 대중지성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정색하고 인문학이란 이런 것이라고 고리타분한 태도를 취하는 게 아니라 제 멋대로 읽고, 삐딱하게 생각하는 인문주의자를 표방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광범위하고 삐딱한 인문학자의 시선에 사람들이 신선함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하루에 천 명 이상이 꾸준히 접속하여 인문학 관련 신간 소식을 접하고, 지적인 갈증을 해소하고 있는데요, 블로그를 슬쩍 훔쳐보면 특별한 사람이라는 찬사가 절로 나옵니다.

A.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나요?

S. 네 거의 모든 인문학적 책들에 대한 서평이 모여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만화와 리빙, 자기개발서 분야를 제외한 모든 지식 분야를 넘나들고 있는데, 예의 제가 말한 니진스키의 영혼의 절규, 를 비롯한 여러 서평들을 접할 수 있는데요, 특히 슬로베니아 출신 사상가 슬라보에 지젝에 관한 관심이 많은 작가로 보입니다. 이단적이고 독특한 지젝의 철학에 매료되어 그에 대한 오해를 푸는데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한국 독자들의 지젝 이해를 위한 징검돌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대한 독자들의 애정은 그가 번역 비평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간 번역서가 나올 때마다 독자들은 로쟈가 평하는 번역 비판에 귀를 쫑긋 세웁니다. 때론 울부짖고, 때론 무모하고, 더러 용감해 보이기도 하는 번역 오류에 대한 그의 비판의 눈은 독자들을 일깨우기에 충분합니다. 번역 비평에 과감하게 실명을 거론하며 번역 교정을 선보이는데요, 그의 고군분투 활약을 통해 번역의 소중함과 책 만드는 일의 윤리성에 대한 공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A. 인문학만으로 독자들을 책읽기의 장으로 이끄는 데는 한계가 있을 텐데요,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S. 네. 읽기와 쓰기에 대한 재미와 문체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며 즐거운 저항이니, 악착같이 즐겁게 책을 읽으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의 문체는 친절합니다. 밑줄과 부연설명과 다양한 눈요기 자료를 덧붙여줍니다. 광기에 가까운 활달함이 가득한 로쟈의 글쓰기는 딱딱함보다는 자유로움이 철학적 사유보다는 시적 환유를 앞세웁니다. 쉽고 경쾌한 문체로 어렵고 심오한 내용을 말하기 때문에 독자들로서는 충분한 배려를 받는 느낌이 듭니다. 지독한 성실성도 한몫합니다. 강의와 집필, 독서와 번역 그 바쁜 와중에도 꼬박꼬박 서재에 새 글을 올리고 문답을 답니다. 이 불타는 사명감은 바로 대중지성에 대한 그의 열망을 말해줍니다. 사라져가는 인문 지성의 숲을 무성하게 일구고자 하는 힘이 느껴집니다.




A. 다재다능한 로쟈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S. 네, 우선 저부터 경계 없이 지적 유영을 즐기는 저자가  부럽기 짝이 없는데요, 매일 책을 읽고 리뷰를 쓰고 독자들에게 신선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그야말로 부러움에서 그칠 뿐입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김훈의 소설 문체에 대해 분석한 것이 흥미를 끄는데요, 그에 의하면 김훈의 아름다운 문체와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은 소설 문법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 질투어린 시선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는 저자의 견해가 왜 그리 신선하게 보이는지요? 산문적 일상을 묘사하는 소설가는 자신만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게 지당하게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지나친 아름다운 문체여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의견이 참 와 닿았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 생활 마찬가지로 산문적이기 때문이라는 그의 통찰에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도구이자 형식인 문체가 내용을 압도해서는 안 된다는 거잖아요.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읽고 쓰고, 떠들고, 생각하고, 주저하고, 이 모든 것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좋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A, S //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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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0 2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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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0 2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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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1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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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16: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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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1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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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0 23: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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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0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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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1-21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야금야금 읽고 있습니다. 빨리 읽을 수 없는 책이잖아요. ^^
근데, 로쟈님이 '독서평설'에는 글을 되따 쉽게 쓰시는데, 이 책에선 좀 '세미나'티가 나요. ㅎㅎ
많이 팔리기엔 그런 한계가 좀 있을 듯...
김훈을 저렇게 말했군여. 저도 저렇게 생각했는데, 뭐라고 말을 못했지요. ^^
그저, 기자같은 말투라고 적고 말았는데...

다크아이즈 2010-01-21 00:27   좋아요 0 | URL
독서평설은 학생 상대니까 쉽게 써줘야 애들이 당황하지 않잖아요. 저도 밥벌이 하느라 애들 논술지도할 때 독서평설 가끔 부교재로 활용했는데, 로쟈님 것은 그래도 어렵달까봐 감히 시도도 안 했다는... 어쩌면 제가 이해 못해서 피했는지도... ㅋㅋ

그건 그렇고, 김훈, 고종석, 김규항 셋의 문체를 비교한 로쟈님의 에세이는 이미 명문이 되어 세상을 유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로쟈님 그런 식으로 써주면 저 같은 평범 독자들도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데... 읽고 읽어도 그 부분은 너무 와 닿아요.
 
고우영 삼국지 三國志 1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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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중2아들놈 잘 때 읽으라고 열권으로 된 전집을 샀다. 한데 웬 걸, 지 말로는 시시해서 못 읽겠단다. 만화로 된 건 도서관에서 신물나도록 여러 버전으로 읽었단다. 결국 요즘은 이문열 버전으로 잠자리 들기 전에 조금씩 읽는 것을 봤다. 이것도 놈이 6학년 때 샀는데, 책꽂이 너무 높이 있어서 못 읽었다는 핑계가 있지만 실은 지 아무리 똑똑한 녀석이라도 6학년이 읽기엔 무리일 것 같아 요즘 제 방 책상에 가져다 놓았더니 읽기 시작한다.  

나는 삼국지 그 어느 버전도 다 읽지 못했다. 무지를 면하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더 쉬울 고우영 것부터 야금야금 읽기 시작한다.  한 권에 한 개씩만 건져도 되겠다, 싶은 심정으로.  

1권에서는 쪼다 한 명 발견한 걸로 만족이다. 유비 쪼다야 당근 패스. 유비가 쪼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니니. 하기야 적벽대전 영화에서도 그렇게 보이더라, 누구나 유비 같은 쪼다 기질이 드러날 때가 많으니 차라리 인간적이다. 고우영이 오죽하면 책상 앞 펜대 든 쪼다인 자신이야말로 유비라고 동일시하겠는가! (고우영식 표기법은 유비 "쬬다"이다. 진정 매력적인 쪼다다) 

십상시 환관들 치맛자락(?)에 휘둘린 영제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쪼다였다. 십상시는 후한말 영제 때에 정권을 잡아 조정을 농락한 10여 명의 중상시, 즉 환관들을 말한다. 십상시들은 많은 봉토를 거느리고 그 위세가 대단하였단다. 특히 그들의 곁에서 훈육된 영제는 십상시의 수장인 장랑을 아버지, 부수장인 조충을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니 쪼다의 반열 중에 가히 황제급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영제 쪼다를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실은 십상시에 관해서 말하고 싶었나보다. 인간 속성은 자고로 권력(돈) 지향적이다. 특히 권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속성을 직접 체험한 십상시들은 거세된 남성성을 보상받기 위한 차선으로 그 권력을 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자 없는 설움에 돈과 권력보다 나은 위안은 없다. 비록 파국이 예견되더라도...

≪후한서(後漢書)≫권78 <환자열전(宦者列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부풍 사람 맹타는 재산이 많았으며, 장양(張讓)의 종과 친구가 되어, 자주 찾아 선물을 하며 안부를 묻는데 아낌이 없었다. 종들은 모두 그가 덕이 있다고 여겨서 맹타에게 '그대는 무얼 원하시오? 힘써 처리해보리다'라고 물었다.

맹타가 '저는 당신들이 나를 위해 절을 한번 해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빈객이 장양을 만나기를 원하는 수레가 항상 수천 대가 되었는데, 맹타는 그때 장양을 만나기 바랐지만 뒤에 왔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노비 감독관이 여러 노비를 이끌고 길에서 맹타에게 절을 하고, 마침내 모든 수레가 문안으로 들어갔다. 빈객이 모두 놀라, 맹타가 장양과 아주 친하다고 여겨서, 진귀한 물건을 그에게 선물하였다. 맹타는 이것을 나누어 장양에게 선물하니, 장양이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맹타를 양주자사로 삼았다."  

권력에 파생되는 이런 코메디적 에피소들이야말로 권력의 속성을 제대로 말해주고 있다. 주인이 왕이면 그 집 종도 왕이다. 처세에 능한 저마다의 '맹타'들은 어디를 공략해야 그 권력 가까이 갈 수 있는지를 제대로 안다. 권력(장양)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종과 친구하는 맹타가 되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루하나 현명하기(?) 그지없는 맹타들의 맹렬한 줄서기... 이게 현실이고, 정치이고 곧 삶이다.  

각자 버전의 삼국연의를 읽는 의의가 이런 데 있는 모양이다. 고전을 읽으면서 현재를 해석하라고 누군가 뻔한 충고를 하지 않아도 그렇게 자기해설을 하게 만드는 것. 읽는 권 수가 한 권씩 늘어날 때마다 한 개씩만 머리에 담아보자. 그렇게 도돌이표 하다 보면 얼추 무식함은 벗어나지 않겠는가?  아직 삼국지 제대로 안 읽은 나 같은 사람은 이처럼 만화로 된 것 먼저 읽고, 풀어 쓴 것 읽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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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물 - 이성복 사진에세이
이성복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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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니 이름을 불러줘야 의미가 된다고  말한 시인이 있었다. 이성복 시인의 에세이 타오르는 물은 그렇게 말한 시인의 또 다른 버전이다. 사람 대신 형체, 즉 사진이 등장하는... 은유(의미)없는 형체는 숲 속에서 저 혼자 쓰러지는 나무 같단다. 사진 에세이, 라는 타이틀이 붙은 책은 사진 없어도 가능한 글들로 모였다. 굳이 이경홍 사진작가의 도움을 받은 건 모든 형체에서 은유를 찾는 시인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다.   

  엄지 손톱만한 사진, 형체 불분명해 온갖 주해를 갖다 붙여도 좋을 한 장의 사진을 왼쪽 모두에 배치한 채 시인의 에세이는 시작된다. 더러 손바닥만한 사진이 덤으로 붙어오긴 하지만 그건 여백을 메우기 위한 편집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독자로서는 작은 사진 만으로도 시인이 하고 싶은 얘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사진 작품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빌미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되새기려는 의도'로 에세이를 썼다고 밝히고 있다.  

  구상체가 아닌 추상체, 거기다 흑백인 작은 형체(사진) 안에서 시인은 존재들의 고독과 무력감을 읽어낸다. 긍정보다는 부정을, 행복보다는 불행의 은유를 자아낸다. 이런 시인은 허무주의자일까?  '진실을 구하는 것 또한 허위를 자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망상일 따름이다.' (16쪽)라는 시인의 중얼거림이 어떤 시적 변용을 가져올까? 구체성을 획득한 시어로 이런 아포리즘이 재현되는 시인의 시를 만난다면 침 질질흘리며 책을 핥아도 좋으리라.  

  따뜻함이나 위안을 얻기 위해 이 에세이를 집어드는 자는 그저 실수다. 늙은이의 코 고는 소리, 구더기가 끓는 다리의 화농을 핥는 사자, 한쪽 날개를 잃은 그 어떤 형상, 등 연민과 공포와 절망을 노래하고 싶거나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무의미한 세 개의 나무토막, 저 먼 우주 속으로 날아갈 것만 같은 그저 그래보이는 그림 한 점을 연상하면서 '종합은 이미 분석된 것을 결정적으로 통합하는 것이고, 분석은 이미 결정화된 것을 재분석하는 것으로서, <미적 쾌감을 해체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103쪽)라고 주석한다.  

  이를 테면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없는 것의 근원인 있는 것은 없는 것의 없는 것이며 어둠의 근원인 빛은 어둠의 어둠이라 할 만하다. 빛은 어둠 없이 있을 수 있지만 빛 없이 어둠은 있을 수 없다.' (106쪽) - 무와 유, 빛과 어둠의 유기적 관계를 이딴 식으로 꼬아놓는다. 어차리 시인의 역할은  어떤 현상을 은유의 말장난으로 불장난처럼 저지르는 족속들이다. 그러려니 하고 읽어내려갈 철학적 사유를 즐기는 자들에게는 권할 만한 책이다. 그런 사유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 같은 독자들에게도 희망은 있다. 고통, 연민, 어둠, 외설, 욕망 등등에 관한 코드를 시인은 어떻게 응대하고 있는가, 라는 호기심만으로도 건질 건 있는 에세이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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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무르익은 과실처럼 저절로 입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오토바이
조두진 지음 / 예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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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 처마실 술을 내가 왜 사는데? (56쪽)  


  단지, 자신을  배려하려고 술 자리에 앉히려는 한기철 일행에게 저렇게 쏘아 붙이는 아버지 엄시현. 융통성 없는 소갈머리의 소유자. 엄시헌에게  밥벌이의 비루함과 숭고함은 오직 가족의 무사를 위한 것이란다. 가부장적 책임감은 원만한 사회성에의 요청보다 앞서는 것일까?   


  엄시헌은 지나치게 내부적(가족지향주의적) 가부장 제도에 함몰되어 있다. 러셀 할배가 말했다.  '행복의 비결은 되도록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관심을 끄는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라고.  또 이런 말도 했다. '부모에게 사랑받은 것과 같은 특별한 종류의 행복은 만인이 당연히 누려야 할 타고난 권리다.' (버트란트 러셀, 행복의 정복) 엄시헌은 러셀 할배의 조언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안과 밖의 긍정적 환유가 없는 삶이란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가장의 역할 자체가 맹목적이라 해도 숨 돌려 가며 주변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적의 없는 동료에게(오히려 호의적인) 공격적인 언사로 자기 방어를 해대는 것이 가족을 위한 밥벌기의 온당한 변명은 되지 않을 것이다. 엄시헌이 실제 내 아버지라면? 글쎄 이런 적극적인 변명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시헌은 그 자신이 여러 가지 표정을 지어야 하는 사람이었기에 미스 정이 지어야 하는 여러 가지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61쪽)  - 자신의 이해관계가 맞닿는 곳에서만 엄시헌의 이런 캐릭터가 적용된다. 씁쓸하지 않은가? 그 이유도 오직 아들 둘을 위한 것이었으니. 살아남아야 하는 자의 핍진한 삶의 방식에 내 공감대는 조금씩 무너진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읽는다. 작가가 하고픈 이야기 - 가족을 거두기 위한 가장의 지난한 일상의 숭고함 - 를 넘어서는 뭔가가 있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읽어내려 간다.   

 

  엄시헌은 살아생전 내 아버지의 삶과 달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구차할 정도로 검약했던, 그래서 언제나 내 삶의 괄호 밖이기를 원했던 아버지는 타인에 대한 배려는 깊었다. 써야할 땐 썼다. 그것이 타인을 향하든, 가족을 위한 것이든.... 아버지 삶의 끄나풀에서 벗어나고자 그토록 원했으면서도 그런 면 때문에 내 아버지에겐 그 어떤 뚜렷한 잘못의 혐의가 없었다. 세상에 대한 도의와 가족에 대한 도리를 동시에 감내했던(엄시헌은 오직 후자에만 치중) 내 아버지 식 삶이 더 온당하다고 느껴지는 건 엄시헌이란 캐릭터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진 것보다 궁색함을 표방했던 내 아버지를 싫어했지만, 가족 제일주의인 엄시헌이 내 아버지라면 경멸했을지도 모르겠다.   


  미스 정과 함께 '인부들이 먹다가 남긴 반병쯤 되는 소주를 비우'(63쪽)려는 알뜰한 쩨쩨함 같은 걸 나는 못 견뎌 한다. 내 어릴 적 겪었던 아버지들의 그 비루한 일상이 내겐 치욕의 저장고나 마찬가지이다. 그 간접 고통이 주는 풍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골방에 앉아 글을 쓰거나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야 했다. 단절이나 침잠은 누가 뭐래도 경제적 고통이 주범이다. 그렇다고 내 안위를 위해 타인이 고통을 무시하거나 이용해도 될까? 내(가족)가 살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줘도 안 되고, 이타적이기 위해 그 고통이 가족을 향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오직 자식을 위해서란다. 저처럼 밑바닥 인생인 동료들을 상대로 도박장을 개설하고 운영하는 것이. 그게 인간의 비루함이라는 걸 깨치란다. 그 야만적 비루함은 언제나 맘에 걸리는 큰아들의 생계와 둘째놈의 공부를 위한 변명거리가 되어준다. 오매불망 내 새끼만 찾는 가족제일주의를 혐오하는(그 대표 격으로 김훈이 있다.) 사람들은 엄시헌을 덜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엄시헌은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기보다 그렇게 살도록 규정지어진 사람이다. 꼭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이 아니라도 세상엔 그런 기질 자체로 태어난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시종일관 담담하게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엄시헌의 아내는 없다. 아버지 처세의 곤고함을 강조하다 보니 어머니의 부재는 당연한 것일까? 오랜 세월, 가족 먹여 살리기 위해 귀가하지 않는 아버지 집 문풍지는 한겨우내 몹시도 울었겠다. 감사할 생계비가 있으니 아버지 부재의 가계를 이끄는 고통은 사치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가족을 먹여 살린다, 는 명분이 있으나 내가 보기엔 가부장적 권위가 부여한 또 다른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엄시헌의 가족  사랑은 일방통행이다. 방죽 정비에 나선 일개 노동자인데, 굳이 그 긴 시간 동안 가족과 헤어져 살 이유가 있을까? 일이 년 외곽에서 마련한 종자돈으로 당연히 가족이 있는 서울에 터전을 잡아야 했었다. 그래야 가족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이 증명된다. 포장마차가 됐든, 작은 분식집이 됐든 지방에서 하는 천변 정비 사업이나 술집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토록 가족의 생계를 걱정한다면 가족애가 남달랐을 터인데, 그 가족애는 아내가 아닌 자식들에게만 할당됐던 것일까? 어느 누가 정지용의 향수에 아내가 덜 부각된 게(누이보다 엄마보다!) 불가사의하다 했는데, 그런 심정이랄까?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멀리서 돈 붙이며, 편지 속에서나 존재하는 아버지여서는 안 되지 않나?  


  오로지 '가족 먹여 살리기 프로젝트'만이 목적이었다는 게 엄시헌의 한계다. 그것을 뛰어 넘지 못한 걸 보면 실재했던 우리 아버지들의 초상과 작가가 구현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이 약간은 엇박자를 낸 게 아닌가 싶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한 아버지의 노고는 위대했으나, 꼭 그것만이 엄시헌의 존재이유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엄시헌 자체의 부조리를 독자에게 이해시킬 때 큰아들을 태운 엄시헌의 오토바이는 좀 더 자유롭게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엄종세의 후배 김경한 또한 엄시헌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짧은 단문일수록 중언부언하지 않아야 하는데 확인 차 앞에 나온 내용을 뒤에 다시 설명하는 부분은 구성상 긴장감이 떨어진다. (김경한의 각서 요구 부분 같은 경우) 기왕 쓰는 것 김훈처럼 얄밉게 쓰면 안 되나? 

  감상문을 떠나 문장이나 문체 면에서는 건질 게 많은 작가이다.   

 

 

  질서와 훈육의 특성 속에는 그런 면이 있었다. 공허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치고 질서에 제대로 편입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마찬가지로 질서에 제대로 안착한 사람치고 좋은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래서 엄종세는 최고 우등생보다 여백이 있는 우등생이 팀원이 되기를 원했다. 입맛에 딱 맞는 직원은 없었다. 차선으로 택한 인물이 김경한이었다. (119~ 120쪽)

  남자에게 일이란 그랬다. 일이 없으니 동료가 없고, 동료가 없으니 초상집마저 썰렁했다. 일과 사람은 함께 왔고 함께 사라졌다. 하나씩 차례로 온다면 양쪽 모두에 충실할 수 있겠는데, 한꺼번에 왔다가 한꺼번에 사라지니 직장에 다니던 시절엔 가정에 소홀했고, 직장을 떠난 후에는 가정에 민망했다. (132쪽)  


  이런 문장들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책을 놓기가 쉽지 않다. 글 자체를 잘 쓰는 작가이기 때문에  군더더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문장이 미덥다는 건 그 만큼 작가적 내공을 쌓았다는 증거다. 그가 신문기자라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훈을 빌렸으나(도모유키가 심했고, 능소화나 이번 작품은 극복하고자 했으나 잔재가 남아 있다.) 그 만큼 세련되지 않고, 김경욱만큼 지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먼지 훌훌 털어낸 뒤 잘 말린 홑이불(솜이불 말고) 같은 단정함이 있다. 그 정도로도 인정받기 충분하다. 성실한 작가는 부지런히 집필 중이다. 그것 또한 미덥다.   

 

  아버지 된 자의 손은 궂은일과 마른일을 가리지 않는다.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비의 손과 궂은일을 하는 손은 별개가 아니다. 너도 이제 아버지가 됐으니 네 손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가리지 마라. 그리고 네 손이 하는 수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마라. 아버지 된 자, 남편 된 자가 처자식을 먹이고 입히는 일은 칭찬이나 상 받을 일이 아니다. 네 처자식이 네 평생의 상장임을 잊지 마라. (166쪽)  


  아들 엄종세가 첫 아이 낳았을 때 엄시헌이 보낸 편지글이다. 서글펐다. 왜곡된 가부장주의의 전형을 만나는 것 같아 맘이 편치 않다. 밥벌이를 위한 아버지의 노고가 숭고한 건 사실이지만 이런 생각이 전적으로 온당한 것일까? 이런 시각이라면 거꾸로 여자인 어머니에 대한 희생 또한 너무나 당연한 걸로 받아들여야 하니까. '여성이 겪어야 하는 부당한 대접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가족들 옆에서 충실하게 의무를 수행한 대가로 가족의 사랑을 잃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 여성이 가족을 소홀히 여기고 쾌활하고 매력적인 생활을 유지했다면 아마 가족들은 이 여성을 사랑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러셀(행복의 정복 205쪽)의 충고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엄시헌도 결국 죽어서야 가족에게 이해받는 쪽 아니었나? 가부장적 책임의식이 자신의 비굴하고 야비한 삶을 변명해줄 순 있어도 그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개별자이다. 아버지 또한 그 개별자로서의 존재 증명이 되어야 한단 말이다. 시종일관 작가는 말한다. 시헌이 개차반 같은 일을 서슴지 않았던 건 오직 하나 가족(특히 아들 둘) 때문이라고. 아버지 친구 장기풍의 입을 빌려 이런 설교는 계속 리바이벌된다. 이건 뭐 예수님이 인간 대신 죽어줬으니 평생 그 죗값 하며 살아라, 하는 협박과 뭐가 다른가? 부도덕하고 치사하고 개차반 같은 행동을 해도 자식을 위한 것이었으니 입 닥치라고 훈수 두는 장기풍은 곧 작가의 다른 목소리이다.  


  비슷한 처지의 타인의 고통을 발판 삼아(외면한 게 아니라 이용했다) 가족애를 도모해야 하는 부정은 진정한 의미의 부성애는 아니지 않는가? 거창하게 인류애 어쩌고 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사람이니까 사람에 대한 연민이 가족애에만 한정된다면 그게 사람일까? 그런 아버지 때문에 먹고 살만해졌으니 입 닥치라고? 엄시헌처럼 살지 않아도 자식 교육 시키고, 사람 도의 지키며 사는 이들이 훨씬 많다. 밥 먹여준 아버지는 위대하나 꼭 엄시헌처럼 일 필요는 없다.   


  작가의 말처럼 '아버지를 미화하거나 복고를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부성의 희생에다 점수를 주려고 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 희생이 온전히 가족을 위한 것이라 쳐도 그 방식에 대한 면죄부나 공감은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처럼 엄마를 부탁해, 같은 책에도 알러지가 있는 독자에게라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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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3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3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0-01-15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도서가 백만부 팔리는 날이면 진정 '대한민국 독서강국'이 되겠죠? ㅋㅋ

공 들인 건 아니고, 잘 쓰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은 걸려요. 그래서 잘 쓰는 여우님 같은 분을 존경해요. 먼 발치서 응원할게요. 화이팅~
 
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읽는 기쁨, 쓰는 고통

 


  오랜만에 흡인력 있는 소설 한 편을 만났다. 정유정의 ‘내 심장을 쏴라’ (은행나무, 2009)이다. 내 부러운 눈길은 이미 뒷면 출판 정보를 읊고 있었다. 내가 산 책이 14쇄이니 출간 날짜에 비해 잘 팔리는 편이다. 신예작가로선 날개를 단 셈이다.

  읽으면서, 좀 더 압축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300여 페이지를 훌쩍 넘기는데,  200 페이지 정도로 줄이는 게 나았을 것이다. 작가의 시선이 옹골차 한 장면에 너무 많은 사건을 담으려 하다 보니 가독성이 떨어질 수밖에. 이런 바람은 독자로서의 작은 불만일 뿐, 진실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소설적 재능이 빼어난 작가라는 것. 그 성과가 훈련의 산물이 아니라 태생적 요청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절망 섞인 부러움이 인다.

   구성 상 ‘내면화된 단문’을 겨냥하는 단편과 달리 작가의 문체는 ‘행동체 단문’이다. 이야기 흐름을 따라 짧은 호흡으로 손끝을 놀릴 뿐인데, 그게 문장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끝내 독자의 심장을 향해 뭔가를 겨냥한다. 무엇을 보다는 어떻게 위주로 쓰는 단편을 읽을 때 느끼는 갑갑함이 없다. 생동감 있는 문장은 일정 시점을 지나면 술술 읽힌다. 예단컨대, 작가는 아포리즘을 남발하거나, 내면을 낭창하게 읊조리는 작가는 되지 못할(않을!) 것이다. 장편에서 독자를 효과적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아포리즘이란 칵테일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하지만 그미는 인간 존재의 근원 같은 것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않아도 용서된다. 대신 블랙유머와 눙치는 눈썰미와 앙다문 입 속에 예리한 칼날을 숨기고 있으니까. 

  어지간한 작가다. 주인공들의 탈출기 한 장면, 특히 손목시계로 만든 흉기 장면을 그리면서 이십 여 페이지씩이나 녹여낸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독자로서의 불만은 접어두고라도, 그런 줄줄이 사탕식 연결이 현장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 세밀하고 자연스럽다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작가적 저력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손끝에 다음 문장이 스무고개처럼 물려 있고, 혀끝에 다음 대사가 칡넝쿨처럼 휘감겨 오는 것이다. 작가가 글을 짓는 게 아니라 글이 그저 이야기를 잣는다고나 할까? 이런 걸 작가적 재능이라는 말 대신 뭐라고 표현할 수 있나?

  그렇다면 재능 없는 자들은 쓰기를 그만 둬야 할까? 재능에 비견할 바는 아니지만 엉덩이 굳히기,라는 미련한 방법도 있으니 그리 절망할 일은 아니다. 재능 있는 자 쓰기를 즐기고, 딸리는 자 다만, 엉덩이 의자에 붙여라. 그리하여 최선을 다해 손끝 바지런히 놀릴지어다. - 이런 절망스런 감상문을 쓰게 만드는 작가이다. 

  적어도 어떻게 쓰냐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작가일 것이다. 그저 무엇을, 왜 쓸 것인가만 생각하면 되는 작가로 보인다. 이건 독자로서 신진 작가에게 보내는 최대의 찬사이다. 그미의 성공 조짐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공의 문제라기보다 성향의 문제라고 본다.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작가가 아니라 예견된, 될 성 부른 떡잎이다. 복을 타고난, 천상 작가를 만난 기쁨은 내 절망을 재촉한다.

  읽는 잔재미도 쏠쏠하다. <다들 같은 이름을 쓰는 소식통을 정보 출처로 댔다. ‘정통한’ 소식통이라고.> (130쪽), <현선엄마는 현선이를 불렀고, 나는 애타게 잠을 불렀다.>(130쪽)  영화로도 제작된다니 작가의 의도와 잘 맞아떨어진 게 아닐까? 읽을수록 디테일한 장면들은 영화를 염두에 둔 혐의가 짙다.

  불만이 있다면, 넘치는 현장감과 모자람 없는 묘사가 번뜩임에도 가끔씩 독해력이 딸리는 부분이 있더라는 것이다. 필시 독자의 자리를 자신과 동일시한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리라. 친절한 설명은 독자를 모독하는 것이라 해도 의도하지 않게 생략된 부분이 과도한 현장을 밀어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더라면 가열찬 가독성을 보장하지 않았을까 하고 인상 한 번 써보는 것이다.   (전 리뷰 수정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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穀雨(곡우) 2010-01-2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풀어 보고픈 이야기만 콕콕 짚어서 쓰셨네요.
작년 가을즈음에 읽고 대어를 만난 기분. 하도 맛깔나게 잘써서
이 작가의 약력이 문득 궁금하더라구요. 건강보험관리공단 심사평가원.
아마 전직 간호사지 싶더군요. 해서 경험없는 실체는 작위적일 수밖에
없기에 역시 몸으로 부딪힌 실체가 있어야 하겠지하고
혼자 생각과 위안을....ㅋㅋ(이것도 부러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0-01-21 16:27   좋아요 0 | URL
너무 많은 걸 담으려해서 그렇지 정말 잘 쓰는 작가는 맞더라구요. 남 잘 쓰는 것 부러워만 하면 진다는데 사실인 걸 어떡해요?ㅋㅋ

전직 간호사에 일주일간 정신병원 체험도 했으니 오죽하겠어요? 재능있는데다 탐구정신(?)까지 있으면 게임오버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