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범우문고 2
법정스님 지음 / 범우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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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유의 고통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마무리 되었다. 화면에 비춰진 장례의식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장중한 관도 화려한 만장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듯한 기단마저 마련되지 않은 장작더미 속에서 한줌 뼈로 변해가는 스님의 마지막 길은 그래서 더욱 존엄하게 다가왔다. 수습된 유골은 길상사와 송광사 불일암에 나누어 안치된다고 한다. 스님과 조금이라도 더 호흡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쇄골과 산골작업은 49재 이후로 연기한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언론마다 하나같이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다 떠나신 법정스님이라고 소개한다. 스님의 무소유 철학은 온 국민에게 회자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정작 나는 스님의 책 한 권 변변하게 읽은 적이 없다. 유명세 때문에 읽지 않아도 마치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책이 ‘무소유’ 같은 종류가 아닐까 싶다. 조촐한 다비식이 주는 장엄한 울림 덕분에 뒤늦게나마 책을 사기로 결심했다.

  인터넷 서점에서 ‘무소유’(범우사, 1999)를 클릭한다. 망설임 없이 장바구니에 담으려니 의미심장한 안내 멘트가 뜬다. 판매중지란다. 절판, 품절, 일시품절 등의 출판 관련 용어에는 익숙해져 있지만 판매중지라는 말은 생경하기만 하다. 아무래도 입적을 앞두고 남겼다는 법정스님의 유지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풀어 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것들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절히 부탁한다.’는 말을 스님께서 하셨단다. 그 뜻을 출판사측에서 받아들여 신중하게 대처하는 것일까.

  판매중지라는 인터넷 서점의 정보를 보고 있자니 몇 가지 생각이 스친다. 무소유를 설파한 스님은 어쩌면 당신 스스로 쓴 책이 가져다 준 소유의 고통 때문에 번민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스님도 지극히 인간적인 고민을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은 수많은 책을 집필했고, 그 대부분의 책들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고 나아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진정한 무소유를 주창했던 스님에게 그 자체가 고통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책 판매 수익금으로 스님은 장학 사업을 하고, 남몰래 불우이웃을 도왔다. 그렇게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느라 마지막 가는 길엔 입원비도 낼 형편이 못 돼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억척스레 무소유를 살다간 스님도 근원적인 삶의 번민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스님 고통의 근원은 소유 없는 베품은 가능한가라는 주제가 아니었을까? 현실 사회에서는 소유 없인 베품도 없다.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가진 게 없는 이가 어떻게 베풀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스님은 베품을 전제하는 그 소유마저도 진정한 무소유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스님을 진정으로 좇는 독자라면 당신이 풀어 놓은 말들을 ‘빚’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그 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감히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님 스스로 빚이라고 한 말 대부분이 무소유에 관한 것인데, 그것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 사실이라면 역설적으로 그것을 실천하는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그리할까 하는 생각에 미치는 것이다.

  매몰차게도 스님은 당신이 쓴 책마저 죽음과 함께 거두어들이고자 하셨단다. 모든 소유의 번민에서 훨훨 날아 열반에 드신 스님을 이해하면서도 한편, 예비 독자로서 스님이 유언했다는 ‘출간 중지 요청’만은 오보이기를 바란다. 설사 사실 보도라 할지라도 판매중지라는 야릇한 팻말만은 보고 싶지 않다. 그건 스님이 바라는 진심도 아니다. 다음 수를 노리는 출판사의 꼼수가 아니기 만을 바랄 뿐. 스님의 다양한 출간물들을 앞에 두고 독자들끼리 품귀현상이란 귀신에 홀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상업성에 휘둘리는 것이야말로 소유의 고통이란 번뇌에 발 담그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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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15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달랑 '무소유' 하나 읽었고 그 하나만 갖고 있어요.
우리 아들녀석 불교재단 학교에 다니는데 법정스님이 2회 졸업생이라고, 교문에 현수막이 붙어다네요. 그래서 녀석도 그분의 책에 관심을 표하니 '무소유'를 읽어보라 건넸어요.

다크아이즈 2010-03-16 01:44   좋아요 0 | URL
아드님 대단한 인연이네요. 법정스님과 동문이라면 어디가서 어깨 힘 좀 줘도 되겠어요. ㅎㅎ

2010-03-15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6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0-03-15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님의 책이라면 무엇이든 다 읽었고, 다른 책은 다 버렸어도 스님 책은 서가에 오롯이 모아 두었지요. 왠지 스님의 책들을 모아두고 바라보면, 흐뭇한 소유의 즐거움이 느껴지거든요. 우습게도...

다크아이즈 2010-03-16 01:48   좋아요 0 | URL
헉, <흐믓한 소유의 즐거움>은 법정스님한테서 제가 얻고 싶은 것이었는데... 역시 글샘님은 한수 위! 법정스님을 존경하셨군요.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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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르웨이의 숲을 지날 때




  딸내미, 짐을 꾸린다. 기숙사 입사 준비물을 챙기는 딸아이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드라이기, 화장품, 머플러 심지어 손톱깎이까지 살뜰히 챙기는 딸아이의 손끝이 야문 듯 재바르다. 나는 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야문 손놀림이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라는 것을. ‘학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라는 핑계가 아니더라도, 열아홉 나이라면 대개 집 떠나 독립하고 싶어 하리라. 오직 설렘으로 짐을 챙기는 딸아이를 보면서 야릇한 서운함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내 본심이 아니고, 실은 노파심에서 오는 걱정 때문에 잔소리만 잦아진다.

  청춘을 건너는 통과의례가 얼마나 아름답고 동시에 잔인한 것인가는 그 시절을 다 보낸 뒤에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미 노르웨이의 숲을 휘돌아 넓고 깊은 강물을 먼저 건너온 기성의 부모로서, 그 청춘 불발의 시간들을 최대한 줄이도록 조언하고 싶은 것이다. 화려한 듯 남루하고 활짝 편 듯 오그라들기만 그 힘겨운 시간들을 건너는 법에 대해서.

  비전을 가져라. 시간 낭비하지 마라. 건실한 남자 사귀어라. 동아리 활동 열심히 해라. 몇 가지 강조하는 엄마로서의 얘기를 딸아이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내게 이런 충고를 일찍이 해줬더라면 더 나은 숲과 강을 건너는 법을 체득했을 것 같은데,  이 실속 있는(?) 충고를 딸아이는 엄마의 성가신 잔소리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하기야 부모로서의 이 모든 노파심은 무소용하다. 왜냐면 청춘은 타인의 충고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오직 자신의 체험으로 완성해가는 것이므로. 어쭙잖은 엄마로서의 안내 역할보다는 차라리 한 권의 청춘 입문서가 딸아이에게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문학사상사, 2000)에서 우리는 다양한 청춘 군상을 만날 수 있다. 주인공 와타나베 역시 딸아이처럼 집을 떠나고 싶어 하고, 대학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다.

  소심하지만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신뢰로 주변 인물들을 끌어안는 주인공 와타나베, 알 수 없는 트라우마로 예기치 못할 죽음으로 향하는 기즈키, 한 번쯤 누구나의 첫사랑이었을 나오코, 그 첫사랑을 극복할 만큼의 슬픔조차 승화한 재기발랄한 미도리, 모든 것을 갖춰 오만함마저 카리스마로 비춰지는 나가사와, 나쁜 남자임을 알면서도 순정한 마음 때문에 질척이는 하쓰미, 특별한 상처로 인해 타인을 이해할 줄 아는 인생 선배 레이코, 자신 만의 세계에 몰입하며 세상 물정에 어눌한 돌격대 등을 통해 간접 청춘을 경험할 수 있다. 시대적 상황을 떠나 등장인물 하나하나는 이십대의 현실에서 만남직한 캐릭터들이다.

  청춘의 숲을 휘도는 동안, 내 딸을 비롯한 그들이 와타나베처럼 따뜻한 감성을 지니되 소극적이지 않았으면 좋겠고, 상처를 두려워하진 않되 그게 잦지 않기를 바라고, 누군가의 첫사랑이 되거나 누군가를 사랑하기를 바라지만 그 상처를 극복할 만큼의 의연함을 잃지 않기를 기도한다. 절대, 치기로라도 나쁜 남자 따위는 관심조차 갖지 않기를 바라고 그런 남자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하쓰미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모든 걱정이 부모로서의 쓸 데 없는 걱정거리가 되고 말리라. 언제나 충고보다는 경험이 앞서므로.   

  하루키 식 표현에 의하면 ‘고민하지 말아요.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입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지요. 인생이란 그런 거예요. 대단한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와타나베 군도 그런 인생살이를 슬슬 배워도 좋을 때라고 생각하세요.’

  인생 선배인 레이코 누님이 와타나베에게 하는 충고야 말로 청춘을 건너는 자들에게 가장 자명한 충고이다. 노르웨이의 숲을 지나 저 상실의 강을 건넌 뒤에야, 기어이 숭고한 삶의 의미를 되짚게 될 이 땅의 청춘들에게 특별한 봄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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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개정판)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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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할레드 호세이니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으로 먼저 만났다. 의무적으로 책 소개를 해야 하는 것 때문에 만난 책이지만 쉽게 쓴 책이지만 괜찮네, 정도였다. 역시 필요에 의해 (독서토론 모임 때문에) 읽은 '연을 쫓는 아이'는 그 이상이었다. 처음 누군가가 이 책을 토론 도서로 추천했을 때 하마터면 나는 이 책 대신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선정할 뻔했다. 같은 작가라면 이미 읽은 책이 다루기가 쉬울 것 같았다. 한데 알라딘 검색 도중 반값 세일하는 것을 알고 이 참에 욕심 좀 내자 싶어 덜컥 사버렸고, 결국 토론도서로 정했다. 결론은 참 잘했어요, 이다.   

  가끔씩 리뷰를 쓰면서 별을 클릭하라고 알라딘에서 앙탈을 부릴 때 웬만해선 그 다섯을 다 칠해주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야박한 건 아니다. 쓰는 행위가 내 안의 악마와 힘겹게 싸운 결과물임을 알기에 웬만하면 별 넷을 준다. 악마를 몰아낸 힘겨움만으로도 별 넷은 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오만했을 땐 별 셋도 준 적 있는데 그건 쓴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쓴다는 것의 찬란함에 대해 별 시덥잖게 생각했을 때의 내 흔적이라고 봐도 좋다. 뭐, 말이 길어지긴 하지만 결론은 이렇다. 쓰는 이들 모두 위대하지만 정말로 내 취향에 맞는 글에는 별 다섯을 아낌없이 준다. 오랜만에 연을 쫓는 하산에게 별 다섯 개를 줘본다. 전혀 아깝지 않다. 오히려 모자라는 감이다.  

  별 다섯인 이유는 스토리텔러로서 완벽한 기능을 하는 호세이니 때문이다. 이야기 자체가 재밌고 감동적이어서 소설에 이끌리는 경우는 내게 있어서 굉장히 드문 편이다. 나는 이야기에 연연하는 독자가 아니라 언제나 방식에 목말라하는 쪽이었다. 해서 아무리 좋은 얘기도 내가 원하는 방식이나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가 아니면 맘이 가지 않는다. 굳이 밝히자면 그의 문체만큼 평범하다 못해 무색무취한 경우도 드물다. 폴 오스터처럼 도회적 세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헤밍웨이처럼 깔끔한 문체의 소유자도 아니다.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방식의 이 작가가 내게 눈물을 자아내는 건 이야기 그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고백하건대, 나는 할레드 호세이니를 벤치마킹할 것이다. 편안한 스토리텔러로서의 그 재능은 문체와 방식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하산을 찾아 간 라힘 칸의 장면에선 기어이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남들 다 울었다는 신파를 자랑하는 엄마 부탁하는 모 소설 같은 경우에도 절대 눈물 따위 흐르지 않았다. 압록강은 흐른다, 를 읽을 때 이후 소설 읽으면서 처음 눈물 지었다. 그걸로도 호세이니는 내게 충분하다. 바바를 모시듯 그의 미더운 친구인 라힘 칸에게 하룻 밤 묵어가라고 권하는 하산을 마주할 때 마구 눈물이 흘렀다. 저한테 두 번째 아버지라고 말하는 순정한 하산을 보면서 비겁함과 죄의식에 시달리는 아미르는 진작에 가장 공감가는 캐릭터로 다가왔다. 살면서 우리는 누구나 아미르이기 쉽고, 숱하게 크고 작은 하산들을 배신한다.   

  호세이니의 등장인물도를 정리하면서 장편은 이렇게 쓰는구나, 벤치마킹한다. 적재적소의 바바와 알리와 아미르와 하산이라니! 심지어 악역인 아세프까지 끝까지 책임지는 그 소설적 안배에 머리가 서늘해진다. 극한 상황, 비겁한 침묵, 양심의 소리, 배반의 괴로움, 오랜 죄책감, 행동하는 양심에 이르기까지 소설이 주는 감동과 재미를 이토록 쉽게 보장하는 작가라니. 덕분에 아프간 내전을 둘런 싼 제 상황과 아프간인의 생활 상도 좀 더 알 수 있게 됐으니 일석이조라고나 할까. 그렇게 따지면 911테러가 없었다면 이 작품이 기획자의 눈에 덜 띄었을 수도 있으니 이래저래 잘 팔리는 소설은 우선 잘 써야하겠지만 기획력의 승리라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겠다. 요즘도 여전히 베스트셀러 손가락 안에 든다고 오늘자 신문에서 봤다. 장하다, 호세이니. 그의 책 두 권을 샀으니 난민들을 돕기 위한 단체에서 활동하는 그를 위한 작은 응원이 되었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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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15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영화도 책도 못 봤어요. 중학교도서실에서 빌려와 아이들만 보고 반납했는데...
읽어야 될, 읽고 싶은 책은 너무 많은데... 알라딘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여야 될 듯.^^

다크아이즈 2010-02-21 01:43   좋아요 0 | URL
서재 들어올 시간조차 쉽지 않은 나날이네요. 순오기님알라딘에서 보내는 시간 줄이지 마세요. 전 개인적으로 여기 오는 시간이 엄청 좋은데 것도 맘대로 안 되네요.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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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수는 이십대 때 한 여자를 사랑했지. 청춘을 지나온, 하자 없는 대부분의 독자가 그러했듯이. 연수의 사랑은 언제나 파국을 예견하곤 했지. 사랑이 온전하지 않은 것임을 미처 몰랐던 누구나의 이십대가 그러했듯이. 잘 뻗은 메타세쿼이아, 그 적막한 그늘 벤치에 함께 앉았을지라도 그 사랑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그런 시절을 건너는 것이 삶의 톱니바퀴이기도 하지. 그럴 때 연수는 노래했지. "사랑은 저처럼 뒤늦게 닿기만 하면, 닿기만 하면 흔적도 없이, 자욱도 없이 삼월의 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지.    

  소설을 쓰기 전 연수는 시를 (오래) 쓴 적이 있었지. 그때 '세계의 끝 여자친구'가 등장하는 시 한 편을 쓴 적이 있지. 그 시의 제목이 꼭 세계의 끝 여자친구일 필요는 없었어. 중요한 건 그날의 데이트 여정 중에 메타세쿼이아의 이미지가 연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거지. 실제로  그 나무 아래 벤치를 서성였는지, 그 올곧은 나무를 연상케 하는 여자의 잘 다려진 스커트 때문에 그 나무를 떠올렸는지는 역시 중요하지 않아. 메타세쿼이아 한그루를 가슴에서 뿌리칠 수 없었던 연수는 급기야 도서관에서 '메카세쿼이아, 살아 있는 화석'이란 책까지 빌리게 되지. 시상은 떠오르고 그 시적 완성미를 위해 책을 활용해야 했던 거지.  

  딱히 연애랄 것도 없는, 지리멸렬하기만 한 연수의 만남에 위안을 주는 것은 이를테면 이런 거야. '이따금 그 메타세쿼이아 쪽을 바라보면서 호수 주위를 달렸으며, 생각날 때마다 매번은 아니고 세 번에 한 번꼴로 <나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미니책자 27쪽)내는 거지. 그리하여 '나의 미래는 여전히 전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같은 책 27쪽)지는 거지. 애인이든, 대타 여성이든 모든 만남은 여전히 전혀 내 것이 아니어야 스물다섯 시절이라 할 수 있지. 그걸 아는 연수는 결국 시 한 편을 건너 뛰어 단편 하나를 완성하기로 하지. 이름하여 세계의 끝 여자친구, 라는 제목이 탄생되는 순간이지. 연수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시를 쓴 시인으로 분하고, 시집 두 권을 낸 경력이 있는 그 시인은 암 투병 중 죽게 되는 거지.  

  마침 그를 아끼고 사랑한 스승이 있어 그 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작중 화자는 그것을 알린 사람에 대한 막연한 흑심으로 시 읽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그 사람이 시인의 국어선생이지 늙어버린 김희선씨라는 걸 알게 되지. 김희선 할머니(아니 김희선씨)는 죽은 제자 시인이 화자와 닮은 것에 놀라고, 화자는 자신의 애인과 할머니가 이름이 김희선으로 같다는 것을 알게 되지. 비록 탈렌트 김희선 만큼 아름답진 않지만 작중화자에겐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었던... 이제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껴안을 것인가는 자명해졌어. 김희선씨와 작중 화자는 서로를 이해하게 될 거야. 유방암을 앓는 김희선씨(굳이 할머니는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지)와 사랑 앓이에 혼란스러웠던 화자는 한 그루의 메타세쿼이어를 향해 걸어가는 거지. 그 거리에 관념적 사랑은 영원히 남고, '수만 년이 흐르고,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같은책자 31쪽)른다는 자기확신을 되새기며.  

  사랑이란, 집 근처 공원, 그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 메타세쿼이어 나무 한 그루까지 온전하게 함께 닿는 길을 말하지. 하지만 삼십 분도 걸리지 않는 그 길이 실은 세상의 끝에 다다르는 것 만큼 힘겹기만 하지. 그래서 사랑은 모호하고, 불길하며 흔적이 없을 수도 있는 게야. 정작 사랑은 어디에도 없는데. 다만 우리의 환상이 저 메타세쿼이어 우듬지 어디에 그것이 있고, 그것이 곧 세계의 끝이라 우기고 싶은 거지.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 모두는 헛똑똑이가 되는 것이지. '모두 헛똑똑이들이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아는 것들이다.' (같은책 24쪽) 사랑이 버거운 건  '내 쪽에서 아는 것'에서 메타세쿼이어 끝을 꿈꾸기 때문인 거지. 삼월의 눈발처럼 사라지는 그 몹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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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연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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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아프고, 모두 다 상처 받고, 그렇게 홀로이나 그래도 추억하거나 살아내거나 살 만한 것에 관한 단편집, 으로 나는 읽었다.    

 

  김연수 -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은 읽은 지 오래 되기도 했지만 별로 남은 게 없다. 누구나 아프다. 사는 게 고통이다. 때로는 그 번민으로 불면의 밤을 보낸다. 뭐 그런 주인공이 산책으로 돌파구를 찾아나선다. 산책하면 다섯 가지 즐거움이 생길까? 글쎄다. 짧은 시간에 척척, 코끼리도 재울 수 있으며, 침대에서는 잠만 자고 섹스만 하고, 결국 혼자서 길을 걸어가게 도리 것이며, 거리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될 것이다. 이건 뭐 또 뻔하잖아. 김연수를 읽으면서 생각외로 여성적 코드가 보이는 게 흥미롭다. 사는 건 고통이자 아픔이다. 그러니 오래 고민하지 말고, 무거운 짐도 훌훌 털어내고, 단순해지고, 누구나 혼자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니, 거리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라. - 뭐 이렇게 정리한다. 작가가 뭐라고 의도했던 난 내 식대로 읽는다. 김연수는 재미있는 작가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생각하게 만든다. 소설가가 진지하면 독자 떨어지기 십상인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그의 자선작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  연애소설(아마도 첫사랑 쯤)을 표방한 세태소설이다. 1980년대 후반기를 주석한다는 것만으로도 김연수식 후일담 쯤 되겠다. 아무래도 젊었을 때 쓰거나 자료 수집을 한 것으로 재가공한 소설 같다. 김연수는 자료을 멋드러지게 가공하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그 자료만으로도 소설 잘 쓰는 작가로 내게는 각인되어 있다. 마치 왕오천축국전을 주해하는 소설 속 나처럼, 김연수식 주해가 능한 작가이다. 재미라는 것은 별개로 하고라도. 

 

  이혜경 - 축제, 는 새롭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인척 뻘 남자에게 성폭행 당한 나의 상처 극복기 같은 거다. 상처를 극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끝내 옴 샨티 즉,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이라는 주문을 외는 것, 그 힘겨운 타협이 저마다의 상처 끌어안기 방식임을 알게 될 뿐이다. 발리라는 매개지가 등장하고 여러 명의 주변인들이 등장해도 그것 모두 상처와 치유의 상관 관계 속에서 배치된다. 기성이니 용서되는 소설이지 신예가 이런 소설 쓰면 일단 참신성에서 탈락이다. 아무래도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내레이션 방식에 점수를 주는 내 읽기 취향도 문제가 있다. 무뎌진 펜끝으로도 이상문학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이 기성의 특권이다. 억울하면 잘 써서 간택받으면 된다!  

 

  정지아 - 봄날 오후, 과부 셋. 금세 읽힌다. 잘 썼다. 이렇게 쓰고 싶다. 누구나 에이코가 되어 그 허한 마음을 다독이며 산다. 마음을 주고도 마음으로 받지 못하는 한 생의 씁쓸한 봄날 오후.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빚을 갚듯 하루코는 장을 담갔을 것이다. 아무것도 주지 않은 사다코가 얻어먹은 콩물은 빚이 아니라 마음이었다.'(130쪽) 마음 얻는다는 것이야말로 사람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가난한 친구 하루코에게 책방 차려주고 재기하도록 도와준 것은 에이코지만,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그 마음 가져간 이는 한 것 없는, 가진 것이라곤 새침한 입무거움과 은근히 잘난척인 전형적인 모범생 사다코이다. 노년의 삶을 빌려와 사람살이의 그 오묘한 관계를 그려내는 과정이 여간 아니다. 인품이란 건 제 의지와 상관없이 저마다의 성정대로 발현된다. 그 모순의 귓불이 붉어지는 상태를 우리는 '인간적'이라고 자위하는지도 모르겠다. 정지아가 말한다.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성품이다.'(130쪽)라고.   

정지아 소설답게 사상 얘기는 양념으로 곁들인다. '사상이고 뭐고, 살아보니 다 덧 없다. 죽으면 한 줌 재지뭐.' 그렇게 말하는 사다코의 곁에는 여전히 '통일광장'이라는 잡지가 놓여있다. 이런 장치들도 소설가로서의 정지아의 정체성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이라 독자로선 용인되다 못해 반갑다.  

염장녀 하루코, 완벽녀 사다코, 오지랖녀이자 나레이터인 그녀(에이코) 중 단연 에이코에게 감정이입된다. 작가가 그리하라고 시켰으므로. 끝까지 그녀의 오리랖은 잦아들지 못한다. 생삼겹을 사러 자청하는 길 뒤에도 나머지 둘의 속닥임은 계속될 것이니. 그녀의 눈물겨운 오지랖이 그래도 봄날 오후 같은 건 '김 영감 팔베개를 베고 자다 죽는'(137쪽) 꿈이 있기 때문이다.   

 

  공선옥 - 보리밭에 부는 바람, 은 친근하다. 동년배가 그리는 시골 풍광 속으로 잠시 빠져 들게 하는 맛. 시골살이는 내게 너무 짧았던가? 물장구치고, 아이 들쳐업고 동네를 헤매던 70년대의 산골 풍경엔 반공 이데올로기 또한 제격이었다. 수요 발표회 속에서도 간첩 식별하는 법 등은 단골 메뉴였다. 어쩌면 빨갱이로 몰려 숨어지낸(월북했다 남파된 간첩일지도 모를) 작은 아버지의 급작스런 방문은 주인공 어린 나에게는 영원한 비밀이 되어야 할 시대였다. 그렇게 '보리밭이 젖고 망초꽃이 젖고 여우가 젖고 내가 젖'는 시절이 있었다. 눈을 뜨면 '지린내' 대신 '낯선 비린내'가 나고, 그렇게 기성에 한 발짝 다가서기 위한 전초전으로 '형이 세수를 하고 있는 우물가로 달려'(161쪽) 나갔던 것이다. 30년은 훌쩍 넘어간 풍광을 보듬는 작가의 시선 역시 공선옥답다, 이다. 

 

  전성태 - 두 번째 왈츠. 내용은 접고, 시집이 팔리지 않으나(인구가 워낙 적어서) 시낭송대회의 관람료가 비싼 나라가 몽골이란다. 낭만적이다. 몽골은 시의 나라였구나. 일찍이 김경욱이 천년의 왕국, 에서 조선은 시의 나라, 시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관료제의 전형인 과거 제도를 빗대어) 곳이라고 예찬한 이래, 그 맥을 잇는 나라가 몽골이구나. 하는 생각. 근데 그 시 낭송 문화는 '율격의 지나친 강세, 그리고 쉬운 표현을 요구하는 대중성으로 시를 죽이고 있'(171쪽)단다. 결국 몽골도 '듣는 시가 아니라 읽는 시가 자신들의 정신을, 현대의 몽골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171쪽)하단다. 읽는 시의 교조성보다 듣는 시의 낭만성이 더 좋은데, 정치색(혹은 국민성 개조)이나 신념 앞에서는 그 전통도 무색하길 바라나 보다. 

몽골에 사는 북한여자 취재기가 주인공 나의 가장 큰 목적이다. 하지만 체제 변화 이후에 감도는 몽골의 분위기와 특히, 안내여성 냐마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 연정을 두 번째 왈츠로 명명한 것일까? 찾던 여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냐마의 울음 속에서 두 여자에 대한 '주체할 수없는 질투심이 끓어'오르는 것은 생의 한 시절 숨 트이고 싶은 강열한 열망 때문인지도... 

 

  조용호 - 신천옹. 소설로 읽히지 않고 담담한 고백록으로 읽힌다. 괜찮지 아니한가? 모든 소설이 소설적 기법과 그럴듯한 사기에 열을 올린다면 그 또한 낭패지. 진정성을 구현하는 이런 '남자로서 세상에 부대껴 보기' 같은 소설도 필요하다. 그런데 읽다 보니 두 남자 이야기이다. 나레이터도 두 친구가 번갈아 나,로 나온다. 굳이 독자에게 혼돈을 주는 이런 방식을 취한 이유는? 이야기가 담담체인데, 기법은 어설픈 포스트모더니즘인가? 막걸리에다 치즈 안주 들이미는 격이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작가라 판단유보. 정주를 꿈꾸는 여자와 유목을 허하라는 친구의 삶을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인 나의 갈팡질팡 중년기 쯤으로 읽힌다. 누구나 자신만의 앨버트로스를 꿈꾼다. 한데 소설 속에서 그 정체성은 모호하다. 여자에게는 떠나거나 정주하거나 간에 함께 하는 것으로(원래 평생 같이하는 금슬 좋은 새란다) , 남자에게는 떠나는 것으로(그래서 또 다른 이름이 나그네새인가), 주인공 나레이터에게는 그저 꿈꾸는 것으로.

 

  박민규 - 말 많을 절.(용용자 네 개 붙이면 이런 한자된단다. 우라질리아~) 정말이지 박민규 만은 피하고 싶다. 적응 안 된다. 박민규 답지 않게 고삽한 순우리말 들고 나와서 한물간 무림 천하를 융통한다. '윤슬 같고 는개 같아진'(221쪽), 해심, 해미까지는 용납하겠다. 운김, 드레 같은 낱말은 부러 찾아야 했다. 내 무지보다 소설 읽는데 사전까지 찾아가면서 수수께끼 풀어야 할 필요 있나, 부아가 치민다. 박민규는 옆에 순우리말 사전 끼고 이 소설 끼적였음에 틀림없다. 그건 박민규답지 않은 반칙이다. 슈룹은 우산이란다. 용린은 용비늘 하면 되지 이게 뭔 지랄을 떠는가 싶다. 지랄떠는 게 박민규식 소설의 강점이니 용서하자.  곤두박질치는 무림고수들 이야기니 고삽한 순우리말 고어 정도는 감내하자. 그러고 보니 가장 이상적인 이상문학상 후보가 아닌가 싶다.  

 

  윤이형 - 완전한 항해. 이건 뭐 소설 아바타 쯤 되겠다. 아바타 에디션이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자아로 형성되어 있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에디션은 상대의 모든 것을 흡수하여 새롭고 완전한 존재로 태어나는 과정이란다. 루족 창은 결국 에디션을 거부하고 창공을 향해 날아오른다, 파국의 의미는 역사상 달에 가장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이라나. 가장 멀리, 가장 빠르게... 이런 소설에 적응 안 되는 것 보면 내가 기성세대라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다. 울어야 할지 자위해야할지 역시 판단보류.   

 

  다시는 단편집 같은 것 들고 리뷰 도전 안 할 것 같다. 필요에 의해서 읽은 거지만 리뷰는 간단치 않다. 점점 단편들이 재미없게 느껴진다. 늙는 징후이다.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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穀雨(곡우) 2010-01-2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흐름이 좋으네요. 전 매번 막히고 얽혀서 혼자 미로속을 걷는 기분인데...
다녀간 흔적 보고 잠깐 들른다는 것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전 김연수작가의 만물장수처럼 술술 뽑아져 나오는 이야기의 샘물이 좋더군요.
<밤은 노래한다>의 연변에 가 보기라도 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지요.
아, 그리고 좋은 이야기 많이 들쳐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다크아이즈 2010-01-21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잘 정돈된 리뷰보고 팬이 됐다는 것 아닙니까? 영광이에요. <술술 뽑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을 제가 질투한답니다. 그 중에 물론 김연수도 있지요.

곡우님 많은 것 배우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