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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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추천으로 읽게 된 작품. ‘7년의 밤‘으로 검증된 작가의 내공을 떠올리며 즐거운 내용은 아니지만 즐겁게 읽었다. 언제부턴가 책을 고를 때 아무런 정보 없이 집어 들다 보니 실패 확률이 높아졌는데, 이 책도 초반만 보고 실패한 줄 알았다. 7년의 밤과 스타일이 크게 다른 것도 있었고, 초중반까지는 장르가 파악이 안돼서였다. 이래서 기본 소개 글이라도 읽어야 하는 거구나. 많은 서사를 담고 있지만 결국 이 책은 디스토피아이다. 그동안의 여러 리뷰를 통해 디스토피아 장르를 가장 좋아한다고 몇 번 말했는데, 한국의 디스토피아 소설은 처음 접해본다. 잘 알던 외국 스타일과 많이 달라서 그런지 익숙함과 낯섦의 만감이 여러 번 교차했다. 작가는 자신이 만든 세계에 독자를 데려다 놓고 싶다는 말을 했던데, 과연 그 말대로 나는 정유정 세계에 갇혀서 캐릭터들과 똑같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런 게 문학의 힘이요, 정유정 작가의 마력이다. 올해에는 정유정 소설 도장 깨기나 해볼까나.


늑대개한테 물린 사람의 눈이 검붉게 충혈되고 폐에 고인 피를 토하며 죽는 전염병이 도시 곳곳에 퍼져나간다. 이 원인모를 병의 증상은 개와 사람이 동일하여 개들은 거리에 버려졌고 병원에는 입원 환자가 줄을 섰다. 도시 전역에 감염자들이 넘쳐나고, 그 수를 감당 못한 소방대원들과 의료팀들도 감염되어 거의 다 죽었다. 정부는 화양시를 봉쇄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모든 유기견의 살처분을 선포한다. 무간지옥에 갇힌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강도질과 살인과 강간이 이어진다. 여기서 병에 걸리지 않은 네 명의 남녀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소방대원 한기준, 수의사 서재형, 간호사 노수진, 기자 김윤주. 그리고 사이코 박동해와 투견 출신의 늑대개 링고. 각자의 트라우마와 서로의 감정들이 부딪혀 발생하는 갈등과 사건들. 작가는 화양시와 이들을 통해서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7년의 밤‘ 때도 느낀 건데 정유정 작품은 어쩐지 리뷰 쓰기가 버겁다. 이 책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다른 리뷰들을 읽어봤는데 세상에, 작품만큼이나 수준 높은 리뷰가 가득했다. 작가의 서늘하면서도 담담하고 전문성 담긴 문체가 독자들의 글에서도 고스란히 보였다. 아 점점 글쓰기 싫어진다. 먼저 이 책은 주인공이 따로 없다. 바꿔 말하면 모두가 주인공이다. 이런 멀티 시점의 플롯은 젠가 놀이처럼 하나만 잘못 건들어도 와장창 무너지기 쉬운데, 우려한 게 무색할 만큼 개연성이나 캐릭터의 균형이 완벽했다. 그 많은 인물 중에서 주인공은 아마도 김윤주가 아니었나 싶은데, 그녀의 눈과 귀를 통해서 이 재난의 시작과 끝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걸린 가축과 동일 취급받고 버려진 인간들, 정부의 무책임한 방안, 꺼진 희망 속에 자라나는 인간의 동물적인 모습 등등 전쟁터에서 중계하는 특파원처럼 사건의 중심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내가 쓰는 소설도 이렇게 살아있는 캐릭터라야 할 텐데.


동해의 분노가 아버지에서 반려견으로, 재형으로, 가족과 세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광기는, 엘리트만 좋아하는 현대 부모가 낳은 결과를 상징한다는 작품 해설에 소름 돋았다. 워낙 악역의 광기를 정교하고 세밀하게 표현해서인지 정유정의 소설이 부담된다는 분들이 꽤 있더라. 그 기분 나도 뭔지는 알 거 같다. 정유정은 필력이 뛰어난 작가는 아니다. 필력보다는 분위기로 압도하는 스타일이다. 그녀의 날카로운 묘사를 못 견뎌하는 여린 독자가 많은데도 팬층은 두터우니 희한한 일이다. 아무튼 작가 고유의 분위기가 ‘미나토 가나에‘하고 비슷한데 그보다는 좀 더 세다. 미나토 가나에가 송곳 같다면, 정유정은 톱 같다고나 할까. 하아, 무서운 언니들...


앞에서 말한 작가 고유의 디테일에 대해서 좀 더 적겠다. 디테일이 돋보이는 많은 장면 중 베스트는, 사이코 박동해가 병에 걸린 엄마와 마주했을 때였다. 사실 엄마는 동해의 계획에 없는 인물이나 마찬가지라서 꼴좋다는 한 마디로 싱겁게 끝날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자존심을 부여잡고 숨죽인 채 발악하였고, 동해는 그렇게 고상한척하던 이 집안도 별 수 없다는 마음과 엄마에 대한 배신감을 표출했다. 서로가 가만히 말만 주고받았던 이 장면은 정적이면서도 동시에 동적인 형용 못할 그림이었다. 이 그림에 대한 감상은 정성스레 빚은 도자기에 고대 문양을 새겨 넣는 듯한 장인의 손길을 보는 것 같았다. 뭐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작가의 손길은, 과하다고 느낄 경계선을 넘는 법이 없다. 마치 죽은 동료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던 노수진의 심경처럼, 힘겹지만 어떻게든 버티면서 썼다는 인상을 주는 작가였다. 


진짜 너무하다 싶을 만큼 희망이라곤 1%도 없는 무자비한 작품이다. 과거나 현재나 사랑하는 개들을 전부 잃은 수의사 재형. 가족이 개한테 물려죽어 괴로운 소방관 기준.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기다리며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 수진. 자신의 기사 때문에 멀쩡한 개들이 집단 살처분 당하는 것을 보고 절망하는 기자 윤주. 이들 중에 누구의 슬픔이 더 무거울까. 모든 이들의 슬픔의 모양이 다 달라도 사랑하는 대상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동일했다. 작가는 이들을 통하여 ‘생명‘의 가치를 다양한 각도로 보여주는데, 전혀 상반되는 가치관까지도 다루었다. 몰살되는 보호소 개들을 보며 진작에 풀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재형과, 사람을 물어 죽이는 개들을 보며 거리에 맹수를 풀어놓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노인. 일방적으로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같았지만 입장과 생각은 정반대였다. 작가는 수년 전 구제역에 걸린 가축들을 산 채로 매장하는 장면을 보며 생명의 가치를 돌아보게 되었고, 그 계기로 이 책이 만들어졌단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인간도 똑같이 생매장 당하고 살처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치 동물의 생명을 폐기물처럼 보는 인간에게 벌을 내리듯이. 그렇게 반려동물과 가축의 생명 또한 인간과 다르지 않다고 작가는 말한다.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항상 강조되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화양시 사람들은 전염병을 무서워하면서도 집에 있기보다 병동에 모여있길 원했다. 그것은 사람이 그리워서였다. 다 죽고 혼자 남는 과정에서 서로를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지만, 그 불씨는 언제 꺼질지 알 수 없었다. 재형과 윤주가 그랬고, 기준과 수진이 그랬고, 시민 모두가 그러했다. 전혀 모르던 사이였고 좋은 만남도 아니었지만 서로서로가 유일한 안식처와 탈출구가 되어주곤 했다. 근데 아이러니한 것은 한 개인의 내면세계를 무너뜨리는 역할도, 누군가를 잃은 아픔을 달래는 역할도 모두 ‘사람‘이란 거였다. 중공업체 D사에서 사람이 미래라고 하던데 요즘 뉴스를 보면 정말 그럴까 의심이 들지만, 난 그래도 인간의 악한 면보단 선한 면을 더 믿고 싶다. 아이고, 글이 엄청 길어졌네. 뭘 써야 할지 몰라서 아무거나 쓰다가 분량 조절 실패했다.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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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 2019-04-03 09:07   좋아요 1 | URL
7년의 밤을 힘겹지만 재밌게 읽었는데 28도 도전해봐야겠내요. 항상 물감님 서재에서 재밌는 책

추천 받아 읽고 있습니다^^

물감 2019-04-03 10:03   좋아요 1 | URL
제 리뷰가 이런 감사한 댓글 달리기 정말 어려운데, 도움이 된다니 참 기쁩니다^^ 요즘 컨디션이 좋지않았는데 패스파인더님 댓글로 위로 받았네요. 감사합니다ㅎㅎ

chl25kr 2019-11-26 16:17   좋아요 1 | URL
제가 <28>에서 느꼈던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이렇게 글로 보게되니 반갑네요 너무나도 공감되는 글이었습니다. 물감님의 적절한 비유와 재밌는 표현들덕분에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은 리뷰였습니다.

덕분에 책을 읽고 표현할 엄두를 내지 못한 제 감정을 조금은 알 것만 같아요. 저도 이제 리뷰쓰러 가겠습니다 뿅

물감 2019-11-26 17:50   좋아요 1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이 된다니 기쁘네요^^ 글에서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을 글로 적는다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입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언젠가 이웃님의 리뷰도 볼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 소실형 레드 문 클럽 Red Moon Club
가지오 신지 지음, 안소현 옮김 / 살림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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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한지 오래된 작가인데 국내에는 한두 권밖에 안 나온 것이 이상하다. 옛날 분이라 그런지 요즘 일본 작가들과 달리 필력도 좋고 무게감도 있다. 진짜 이 정도만 되어도 내가 일본 문학을 열렬히 사랑해줄 텐데. 이번에도 제목에 끌려서 고른 건데, 생각해보면 제목이 좋았던 책들은 실패한 적이 거의 없었다. 당분간은 제목 위주로만 검색을 해볼까나. 일단 소재도 신선하고 리얼리티도 꽤 좋았던 작품이다. 그러나 그 좋은 소재를 잘 살렸다는 느낌은 없었고, 다 괜찮았는데 역시나 마무리가 부족하다. 길이 막힌 느낌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싶은 결말이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읽은 사회파 소설이라 배운 게 많은 책이니 그걸로 만족하련다.


일본의 모든 교도소는 더 이상 죄수를 수용할 수 없을 만큼 꽉 차있다. 그래서 나온 대체 방법이 형기를 줄여주는 ‘소실형‘이다. 1년 징역형이던 주인공이 택한 이 소실형은 징역형과 달리 몸은 자유로운 대신 목에 배니싱 링을 달고 지내야 한다. 이 특수한 링은 주변 사람들의 뇌에 전파를 보내어 링 착용자를 못 보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려고 하면 목을 콱 조여버린다. 그래서 전화도 채팅도 편지도 금지되고, 인간과 접촉도 안되고, 거주 지역도 벗어나면 안 된다. 이미 집에는 TV, 컴퓨터, 라디오 등등 의사 전달이 가능한 수단은 전부 치워져있다. 그냥 조용히 썩다가 형기가 다 되면 링이 자동 해제가 되는 시범 제도인데, 이걸 버티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여차여차해서 형기는 끝났지만 링이 고장 나서 해제되지 않는 비상사태가 되어 교도소를 찾아갔으나 건물이 통째로 사라졌다. 링은 계속 작동되는데 도와줄 사람도, 요청할 방법도 없다. 우려하던 공포가 결국 현실이 되었다. 이 불쌍한 영혼에게 기적이 일어날 확률은 몇 %나 될까.


솔직히 처음에는 컴퓨터만 있으면 할만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PC, TV를 다 뺏어가고 시간 때울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이건 뭐 대략 난감이다. 뭐 어쩌겠는가. 주인공은 그냥 밥 먹고 똥 싸는 기계처럼 8개월을 보냈어야 했다. 그랬으면 조용히 자유의 신분을 만끽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이 책은 전혀 재미가 없었겠지. 소실형은 세상에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형벌이었다. 먹고 자고 숨 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죽은 사람처럼 지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인간이 살면서 당연하게 하던 것들이 제한될 때 그동안 얼마나 복에 겨웠는지를 알게 해준다. 어디든지 내 맘대로 돌아다니고, 모르는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고, 메신저나 SNS로 간단한 소통도 하고, 먹고 싶으면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이런 일상들. 사는 게 지쳐서 차라리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이 책을 보니 인간은 절대 혼자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단순히 투명인간이 된 자신을 한탄하는 내용이 전부가 아니다. 소실형을 선고받은 후로는 인적 없는 거리만 돌다 보니 노숙자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 노숙자들을 보고 느낀 감상이 크게 와닿았다. 노숙자는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고 휴대폰이나 컴퓨터 같은 것도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노숙자나 소실형 죄수나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둘 다 북적거리는 도심 속에서 고독함에 빠져 미쳐버리다가 자살을 택할 수도 있다. 소실형이 되고 나서 주인공이 가장 갈망하고 갈급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그립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섭다는 말처럼, 은따보다 차라리 왕따가 낫다는 말처럼,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은 말로 설명 못 할 무서운 일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길가에 자라난 들풀하고 뭐가 다를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면 소실형이 얼마나 무서운 벌인지 실감할 수 있다.


나는 처음부터 배니싱 링이 형기가 끝나고도 해방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소실형을 택한 자의 말로는 결코 좋게 끝나지 않을 거란건 안 봐도 비디오였다. 딱 에덴동산의 선악과 이야기 아닌가. 먹음직해 보이던 선악과를 택하고 자유를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엄중한 형벌. 정말로 주인공은 형량이 끝나면 자유가 될 거라고 믿었단 말인가? 링이 자동으로 풀린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데? 어떻게 단 한 번도 그 제도에 의심을 안 할 수가 있지? 나라면 절대 소실형을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에서는 시스템 오류인지 고장인지 형기가 끝났는데도 링이 해제되지 않은 걸로 나왔지만, 이 불완전한 시스템을 절대 믿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범죄자의 편을 들어주는 것일까? 보통 일반인 입장에서는 죄인에게 내려진 형벌보다 더 심한 처벌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대다수인데 말이지. 이것도 참 아이러니하네.


이 답도 없는 이야기의 결말을 어떻게 장식할 건지 궁금했는데, 투명인간 주인공에게 누군가가 텔레파시를 보낸다. 그 목소리를 찾아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면서 자신의 정체도 밝힌다. 자신이 직접 나서면 링이 방해하기 때문에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그 수단이 향수였던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향수만으로 주인공이 지나간 길을 경찰들이 잘 맡고 따라간다는 게 무리수였다. 후각이 거의 훈련견 수준이시던데 그냥. 여튼 스토리가 아쉬워도 뼈 있는 교훈이 가득한 이런 작품은 얼마든지 환영이다. 역시 짬밥은 무시할 수 없당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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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카멜레온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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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등단 10년을 기념하며 2015년도에 나온 작품이지만 국내에는 최근에 나온 신간 도서이다. 제목만 보고서는 내용도 장르도 감이 안 잡힌다. 이 작가는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한 권밖에 안 읽었는데 어찌나 실망했었는지, 이 작가를 계속 봐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다행인 건지 이번엔 중박이었다. 다만 장담하건대 10년 기념 어쩌고 하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 정도의 작품은 절대 아니다. 작가는 실컷 울고 웃다가 결말에 모든 재미를 뒤엎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 의도대로 각종 엔터테인먼트가 가득한 작품이긴 한데 별 여운도 남지 않고, 웃음과 감동 포인트도 찾지 못했다는 거. 소설은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문학 입문용으로 권해줄 정도는 된다. 그러나 문학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에겐 수준이 너무 낮지 않나 싶다.


라디오 DJ인 주인공은 못생긴 데다 아웃사이더이다. 단골 바에서 첫사랑을 닮은 여자가 나타나 술집 직원을 주인공으로 착각하고 호감을 표시해온다. 그녀의 환상을 지켜주려고 술집 사람들끼리 연극을 하다가 들통나서 여성팬은 뚜껑이 열린다. 열받은 그녀는 자신을 속인 술집 사람들에게 자신을 도우라며 협박한다. 자살한 아버지의 회사를 무너뜨린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 그녀. 모태솔로인 주인공은 여성팬을 어이없어 하면서도 홀딱 반해서 적극 돕기로 한다. 그러나 계획은 번번이 실패하고 여성팬은 그 원수에게 납치되고 만다. 주인공 일행들은 그녀를 무사히 구해내고 해피엔딩을 얻을 수 있을까.


일명 ‘찐따‘인 남주가 활발한 여주에게 휘둘리고 여기저기 사건에 얽히는 것. 전형적인 일본 애니메이션 스토리 아닌가? 그래서 이 책도 그런 애니메이션 같은 이미지가 그려졌다. 일본 애니의 남주를 볼 때마다 아무리 애니라지만 너무 현실성이 없는 거 아닌가 싶은데, 소설에도 그런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는 걸 보면 일본에는 진짜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나 보다. 이 책도 어리바리한 남주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녀의 요구대로 다 받아준다. 영상으로 볼 땐 그런 캐릭터도 그저 귀엽게 보였는데, 책으로 읽으려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닌가! 이런 작품을 읽고 있자면 라이트 노벨과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 10주년이든 50주년이든 라이트 한 일본 문학은 내게 큰 차이가 없다. 나는 영화가 소설/원작을 뛰어넘지 못한다고 보는 1인인데, 애니메이션만큼은 원작을 이길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책도 애니화 되었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대중들이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일상에서 절대 불가능한 사건이나 판타지? 현실성 제로와 허구성 100%의 짬뽕 드라마? 네이버 사전에는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이라고 명시되어있다. 그 말대로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이 가장 중요한데, 그 상상력이 잘 먹힐수록 ‘이런 게 소설이지‘라는 말이 나오는 거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그런 말이 나오지 않더라. 평소에 영미소설 위주로만 읽어선지 일본 소설은 큰 재미를 못 느끼는 편인데, 나에게도 가끔은 가볍지만 호쾌하게 느껴지는 책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오베라는 남자‘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같은 책들. 그러면 호쾌한 소설과 라이트 한 소설을 나누는 기준이 뭘까. 나는 그것을 ‘휴머니즘‘으로 꼽는다. 스토리가 빈약해도 휴머니즘이 깃든 소설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다. ‘투명 카멜레온‘도 갈피를 못 잡고 산으로 가는 듯한 흐름과, 한 여자한테 모두가 휘둘리는 억지 설정 등등, 마이너스 요소가 많지만 이 휴머니즘 때문에 대중들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작가의 명성에 비하면 이 책은 수준이 낮아도 너무 낮다. 삼 세 판이니까 한 권만 더 읽어보자. 그것마저 실망하면 이별하는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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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남겨두고 간 소녀
조조 모예스 지음, 송은주 옮김 / 살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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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1차 세계대전, 파리의 남자들은 대부분 전쟁에 나가고, 여자들은 독일군 지배하에 살아간다. 가난한 화가의 아내인 소피가 운영하는 멋진 호텔은 독일의 점령 후로 허름한 건물이 되어버렸다. 식량도 없는데 독일군 사령관은 부하들과 호텔에서 먹을 식사를 매번 준비시켰다. 사심 갖고 들이대는 사령관에게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소피는, 독일군에게 빌붙고 프랑스를 배신했다는 이웃들의 오해를 산다. 억울함도 잠시, 남편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령관을 찾아가 남편이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를 주면서 남편을 살려달라 사정하지만 기적은 없었다. 이 그림은 세월이 흘러 2006년 런던에 사는 리브의 손에 들어왔다. 남편을 잃고 돈도 없는 리브에게 나타난 한 남자는 그녀의 집에 걸린 소피의 초상화를 보고 기겁을 한다. 이 남자는 도난당한 미술품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소피의 가족이 초상화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리브는 정당하게 구매했으니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한다. 결국 두 사람은 법정까지 가서 소유권을 두고 싸운다. 그러나 세상은 초상화를 반환하지 않는 리브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리브는 외로운 싸움 속에서 그림을 지켜낼 수 있을까.


조조 모예스는 로맨스 작가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책도 ‘미 비포 유‘와 비슷한 줄 알았는데 그것과 완전히 대조되는 분위기다. 1부 소피의 내용만 보면 별 5개까지도 줄 수 있었는데, 2부 리브의 내용을 보면 같은 작가가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문체도 분위기도 싹 바뀐다. 2부부터는 리브가 남편 잃고 돈도 잃고 미납금 밀려서 힘들어하는 내용뿐, 스토리는 계속 제자리걸음이었다. 잠깐 등장하는 인물들도 많아서 분위기는 또 되게 산만하다. 그러다가 그림을 보고 태도가 돌변한 남자의 시점부터 작품의 페이스를 되찾는다. 발동이 걸리는데 꽤 오래 걸렸음. 리브는 생각한다. 다들 그림의 물질적 가치만 생각한다고. 그러나 자신은 그림 속 소피의 삶을 끝까지 지켜주는 거라고. 그림을 내어주면 소피는 조국을 배신한 여자로 평생 남는 거라고. 그러나 자신의 고집 때문에 죽은 남편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어 스스로도 괴로워한다. 남편과 소피를 지켜주고 싶은데 갈수록 자신의 행동이 잘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든다. 독자 대신 룸메가 이제 그만 버티라고 말렸지만 절대 듣지를 않더군. 어휴, 답답해서 혼났네.


현대에 와서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동화책들을 다른 시각으로 재해석한 경우가 많다. 그것처럼 나는 이 작품을 재해석해 보았다. 먼저 리브가 법정 싸움으로 빈털터리가 되면서까지 그림을 지키는 게 과연 옳은 행동이었을까? 소피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 때문에 세상에게 미움받는 것을 남편이 원할까? 이런 리브의 편을 들어줄 독자가 몇이나 될까? 솔직히 현실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녀의 곁에서 도움 주던 친구마저도 결국 떠나게 만드는 리브는 너무나도 감정적이었다. 원래 사람이 멘붕 오면 이성적인 판단이 안될 수도 있는데, 리브처럼 집도 돈도 인맥도 다 잃을 정도로 분별을 못하는 건 좀 아이러니했다. 그런데 소피도 리브랑 똑같이 전혀 이성적이지 못했다. 독일군에게 끌려가면서도, 조국에서 멀어지면서도, 탈출할 기회가 왔어도 사령관이 자기를 남편에게 데려다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목숨이 여러 번 위태로웠다. 내 눈에는 그것이 위대한 순애보인지 미련한 건지 잘 모르겠더라. 결과적으로는 두 사람 다 잘 되었지만. 


다 읽고 나니 리브의 이야기는 굳이 넣을 필요가 있었나 싶다. 차라리 소피의 이야기만 다뤘으면 좋았을 텐데. 2부에서 가끔씩 과거의 내용이 나오는데 그게 훨씬 재미있었다. 나는 그림의 소유권으로 싸우는 스토리가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정통 법정 소설이 아니다 보니 법정물 특유의 쫄깃쫄깃 함이 없어서 스릴도 떨어지고 전체적으로 밋밋했다. 로맨스 작가답게 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로맨스를 싹 틔워내지만 글쎄,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세 마리를 놓친 기분이 든다. 로맨스가 아니라 거의 코미디가 돼버렸드만? 글맛도 많이 잃어버린 거 같고. 여하튼 독자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냥 쏘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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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리치 지음, 이윤진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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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대 없이 집어 들었는데 은근히 재미있다.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서 신과 천사들이 인간을 어떤 식으로 돕고 세상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등등 천국을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이다. 일단 유쾌해서 좋다. 전 세계를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신들의 세계와는 많이 다르다. 인간미 가득한 거룩하지 않은 신과, 허당끼 있는 천사들은 인간과 별반 다른게 없다는 설정이다. 요나스 요나손 같은 병맛소설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냄새는 난다. 요즘 날씨도 우중충한데 이런 작품을 읽어줘야 우울함이 물러가지 않을까 싶다.


천사 일라이저는 인간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고 놀기만 하는 하느님에게 비난 아닌 비난을 했다. 인간 프로젝트에 흥미를 잃은 하느님은 그냥 지구를 파괴하고 천국 레스토랑 사업을 하겠다고 선포한다. 천사 일라이저와 크레이크는 쌓여있는 기도문 중 하나를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면 지구를 놔두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따낸다. 단 억지가 아닌 우연 같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임무를 완수해내야 한다. 많고 많은 기도문 중에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해달라는 기도 주문서를 뽑아 임무수행에 들어간 두 천사는, 한 달 뒤 지구종말 전까지 두 사람을 데이트하게 만들어야 한다. 두 남녀는 서로 좋아하니까 다 된밥에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건데 세상에, 사람과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것은 로또 맞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큐피드 화살이라도 날리고 싶지만, 하느님은 무조건 자연스럽게 좋아하도록 만들길 원한다. 과연 두 천사는 이 남녀를 사랑하게 만들고 지구 종말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제목에 약간 낚인 기분이 든다. 나는 대기업 같은 천국 안에서 일어나는 좌충우돌 사건들이 궁금했다. 그런 내용은 잠깐이고, 지상세계를 관장하는 내용과 두 남녀의 만남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하느님의 지구 파괴 선언 이후 천사들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마냥 신나있다. 두 명의 천사만 빼고. 지구 종말이 본인들 탓이라는 죄책감 때문에 불타는 사명감으로 두 남녀를 에스코트하기 시작하는 두 천사. 남녀의 만남을 성사시키는 것 자체도 어려운데, 멍석을 깔아줘도 싱겁게 헤어져서 진도가 영 나가질 않는다. 결국 종말 2일 전이 되어서야 겨우 커피 한 잔 하자는 말이 나와, 남은 48시간에 승부를 걸기로 한 천사들은 몸 안에 수분이 다 말라간다. 분명 긴박한 상황인데 인간들은 그걸 모르니 분위기가 고조되지 않아 아쉽다. 그래도 상관없다. 재미있으면 됐지. ​


두 남녀를 돕는 과정에서 속출하는 주변 피해를 보고 이걸 웃어넘길지 말지 고민했다. 둘리보다 고길동이 불쌍하다고 느끼면 나이 든 증거라던데, 나는 이런 유머 가득한 소설도 진지하게 읽고 있구나. 흑흑. 여하튼 간만에 코믹한 작품 읽어서 좋았다. 적당한 유머와 스피디한 전개와 신선한 소재. 쏘 굳. 연차 내고 머리 좀 식힐 때 읽으면 좋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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