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ㅣ 헤르만 헤세 컬렉션 (그책)
헤르만 헤세 지음, 배수아 옮김 / 그책 / 2023년 2월
평점 :
미국의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말하길, 사람은 존재의 삶과 소유의 삶 중 한 쪽을 택해서 살아간다고 했다. 쉽게 말해 추상적인 정신세계와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뜻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여서 나 같은 전자들은 음지로 밀려나게 된단다. 다 각자만의 세상에서 사는 거지 뭘 또. 여하튼 수차례 설명한 바, 나는 과몰입 이상주의자라 현실에 그닥 미련이 없다. 내 비공식 별명이 유니콘인데 이 자리를 빌려 몇 가지 적자면, SNS, 술, 담배, 게임, 도박, 주식, 배달음식, 부동산, 덕질, 커뮤니티를 일절 하지 않는 상위 1%의 대 현자다. 이런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나중에 설명키로 하고, 헤세 작품 중 유독 추천이 많았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어보았다. 그런데 얼레, 생각했던 것과 여러 가지로 딴판이어서 두뇌 세팅을 몇 번이고 다시 해야 했던 작품이었다. 이것도 뒤에 가서 설명하겠다.
늘 그렇듯 이번 것도 헤세표 브로맨스 이야기이다. 수도원의 보조교사인 나르치스와 수도원생 골드문트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하지만 영혼이 불안했던 골드문트는 잠깐의 쾌락을 못 이기고 수도원을 떠나버린다. 이후 긴 세월을 유랑하며 만나는 여자마다 사랑을 나누는 픽업 아티스트로 살아간다. 그러다 독일 전역에 역병이 돌고 사망자가 속출하자, 골드문트는 제 영혼의 고향이 바로 저 죽음에 있다고 믿게 된다. 하여 자유를 노래하던 만큼이나 죽음도 신성시하기 시작한다.
<집시 소년의 사춘기, 그리고 페스트>로 제목을 바꿔야 한다. 골드문트의 보헤미안 챌린지로 가득했으니 말이다. 것보다 주제 파악이 영 쉽지 않은 작품이었는데, 헤세가 이것저것 손을 많이 댄 것도 있고, 헤세의 의식과 무의식이 끝도 없어서 아주 그냥 혼쭐이 났다. 일단 헤세의 작품에는 꼭 상반되는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중 나는 어느 쪽인지를 헤아려보게 된다. 나는 비교적 나르치스에 가까웠는데 나르치스가 거의 안 나와서 별 하나 깎았다. 거기다가 둘이 아닌 골드문트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비트박스까지 해 넣는 바람에 질려가지고 그만 별 하나 더 깎았다.
나르치스가 철학, 직관, 질서, 정신의 아버지라면, 골드문트는 피, 자연, 감각, 유희의 어머니였다. 한쪽은 무한한 통찰로써, 다른 한쪽은 유한한 경험으로써 세상을 이해하고 세계를 구축했다. 보조교사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성질을 간파하고, 그가 개화하려면 온전한 뿌리를 찾아내야 된다고 지적했다. 골드문트는 어머니의 흐린 기억을 되살리며 망각에서 겨우 벗어난다. 이제 스스로를 구원코자 세상으로 나아간 그는 둘도 없는 플레이보이가 된다. 여자를 가리지 않고 만나던 그의 무의식 속에는 어머니가 있었고, 저도 모르게 스쳐간 여자들을 종합해서 어머니의 형상을 창조하는 중이었다. 또 그러기 위해 모성과 본능에 지배되어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양껏 들이마셔댔다.
골드문트는 죽지 않기 위해 살인을 한다. 두 손에 묻은 피를 보고서야 자신의 방황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분열과 모순을 겪고 나야 비로소 꽃피운다는 삶에 대하여. 이렇듯 모든 사상과 이론을 체험하면서 이해했던 골드문트. 진리에 도달하려면, 상실된 신비를 찾으려면, 태초의 어머니인 이브가 필요했다. 그 뮤즈를 만나려던 방랑자는 원초적 감정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허무와 번민, 고통만이 화답해 주었고, 어떤 때는 쾌락마저 가벼운 스트레스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알전구가 켜진 순간이 있었는데, 극심한 고통 중인 누군가의 얼굴에서 사랑을 나눴던 여자의 표정을 발견한 거였다. 죽음과 생명, 고통과 쾌락은 하나의 뿌리였고, 따라서 지금까지의 방식만으론 이브에게 접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관능이 주는 자극에는 신비의 한계가 있으니까.
어느 수도원에 있던 조각상을 보고 넋이 나가버린 나그네. 그것은 줄곧 찾았던 신비의 형체였고, 곧바로 제작자를 찾아가 제자의 길을 걷는다. 창조의 행위는 그에게 호흡을 나눠 주었고, 이 예술이야말로 이브의 모성 그 자체였다. 그렇게 재능과 감각이 날마다 약동했으나 영혼의 속삭임을 못 참고 또다시 길을 나선다. 하여간 천재들은 이래서 문제다. 인생의 난이도가 낮은 탓에 세상만사가 시시해 보인다. 살기는 해야겠고 그래서 자극적인 일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결국 골드문트도 관능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이제는 반쯤 놔버린 생이었지만 꼭 막힐 때마다 나르치스의 가르침이 영혼을 멱살 잡고 흔들어댔다. 이 친구가 만든 유일한 작품이 사도 요한 상인데, 이는 나르치스의 영혼을 본따서 만든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을 나르치스와 공유하여 친구의 정신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시도였을 테지. 오래도록 해답을 못 찾은 걸 보면 내 방식이 틀린 건가 싶었을 테고. 그럼에도 한 우물만 계속 파는 골드문트와, 흔들림 없는 수도사의 길을 걷는 나르치스. 둘 중에 누가 더 독종일까.
그는 세상을 흠모하여 하계로 쫓겨난 천사였다. 페스트로 인해 꺼져가는 생명에게서 두려움의 신비와 삶의 경멸을 느끼고 이 두 가지의 조화를 그려보는 골드문트. 신을 향한 부르짖음마저 끊어져 버린 그때에 나르치스가 등장한다. 그것도 무려 수도원장의 직책을 달고서.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두 사람은 여전했다. 수도원장은 오감으로 정신세계를 받아들인 골드문트를, 그토록 기원했던 친구의 개화를 보고 기뻐하였다. 반대로 자신은 평생 숙제였던 오만함을, 옛 친구의 자유분방함 속에 깃든 생명력을 흡수하여 고침 받는다. 매사에 온몸으로 부딪히고 보는 친구에게는 주변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고, 이 운동에너지와 철학이 조화를 이룰 때에 비로소 신성한 삶이 완성되는 거였다. 이렇듯 헤세의 교훈은 언제나 한결같다. 온전한 자신을 만나려면 금지된 것을 끌어안으라 말한다. 더 쉽게 말하자면 나와 안 맞는다고 해서 꼭 멀리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10대는 골드문트로 살았고, 20대는 나르치스로 살았었다. 30대인 지금은 머리는 나르치스로, 가슴은 골드문트로 사는 중이다. 이것이야말로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유머와 초연함을 겸비한 물아일체 인생 모드이다. 생각해 보라. 자석의 N극은 S극에만 달라붙고, 같은 N극끼리는 오히려 밀려난다. 나와 다름을 인지하는 것이 균형이고, 인정하는 것이 곧 조화이다. 그 대상이 내가 되었든 타인이 되었든 간에. 반대로 내면이 불안정하면 나오는 몇몇 특징이 있다. 화가 많다거나, 가만있지를 못하거나, 극도로 조용하거나. 최고의 처방전은 역시 독서와 글쓰기이다. 기존에 잘 실천하는 분들의 경우, 평소 안 읽는 분야의 책을 읽어보고, 내 문체와 정반대의 스타일로 글을 써보시라. 이렇게 틀 자체를 깨부수는 연습을 하다보면 어느새 만족도 높은 존재의 삶의 주인이 된다. 이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