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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아가씨 ㅣ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평점 :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말하길,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상황과 배경은 그렇다 쳐도 그 말의 뿌리까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츠바이크의 <우체국 아가씨>를 통해 자신을 파괴한다는 의미를 겨우 알아듣게 되었다. 다만 그 권리를 알아차렸을 때에 난 이미 파괴된 후였고, 가난한 권리마저 박탈 당했다는 사실에 분개해 보지도 못했다. 츠바이크 또한 불안의 근원과 분노의 방향에 대해서 소송을 걸었고 이 책과 죽음으로써 판결을 내렸다.
<우체국 아가씨>는 전쟁세대의 잃어버린 청춘과 인권에 대한 연가이다. 이모의 초청을 받은 우체국 직원 C양이 스위스 호텔을 찾아가는 것으로 1부가 시작된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그녀는 바깥공기를 맡고 기뻐하기보다 자신의 초라함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호텔에 머물면서 온갖 즐거움을 누렸지만 휴가가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텐데, 후유증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우물 속에서 계속 있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지독한 가난의 해방감과 경험의 희로애락 등 인간의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막아선 안되겠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모친도 잊고 사는 젊은 그대 C양은 누가 보더라도 위험했다.
그럼에도 이모 부부는 저 방정맞은 조카를 말리지 못한다. 시궁창에 빠져있던 청춘을 드디어 건져냈는데 그 기쁨이 오죽했을까. 그렇게 물 만난 물고기는 저도 모르게 수족관 밖으로 튀어나온다. C양의 나쁜 소문에 대해 이모가 둘러대지 말고 제대로 설명했으면 좋았을 것을. 조카의 순수함을 지켜줄 게 아니라, 성인으로서의 교양과 덕목을 심어주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2부에서 그토록 자기 파괴적인 모습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둥지 아래로 떨어진 아기 새처럼 불안해진 C양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거지 같은 시골 처녀로 되돌아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모친이 위독하단 소식에 별 수없이 귀향하지만 어째선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저자는 지칠 대로 지친 그녀의 심정을 꾹꾹 눌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떤 물질이든 외부에서 가해지는 열에 의해 온도가 올라갈 때 그 물질 고유의 임계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물이 끓는 비등점이 있고 쇠가 녹는 용해점이 있듯이, 정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행복감 역시 절정에 이르면 더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 절망, 굴욕, 혐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릇에 물을 부을 때 가득 차면 더는 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234p
총량을 넘긴 감정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슬픔이 슬픔인 줄도 몰랐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슬픔인 줄 알고도 슬프지가 않게 되었다. 분명히 삶을 송두리째 뺏겼는데 누가 뺏어갔는지를 알 수가 없다. 화가 나는데 화를 낼 대상은 보이지 않는다. 같은 하늘 아래서 누구는 풍요롭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가. 어째서 가난은 공평치 못하고 사람 봐가면서 찾아오는 건가. 그것은 철없던 내가 줄곧 하던 생각이었다. 점점 가난을 망각하고 살았더니 여유가 생긴 지금은 뭘 해도 즐겁지가 않다. 그 감정을 모른 지가 너무 오래됐다. 차라리 이대로 계속 몰랐으면 좋겠는데 츠바이크가 전부 다 망쳐놨다. 나쁜 사람.
2부에서는 시궁창 현실로 복귀한 C양의 신세한탄이 펼쳐진다. 호캉스 후로 날카로워진 그녀는 바람 쐬러 간 타 지역에서 형부의 군대 친구인 P군과 친해진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불만과 똑닮은 그의 불행하고 가까워진다. P군은 참전용사의 대우를 받기는커녕 어떠한 혜택도 없이 절망 속에 살아간다. 국가와 전쟁에 바쳤던 자신의 젊음이 잠깐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품만도 못하다니. C양의 폐부를 찌르고 작품 전체를 관통한 P군의 발언을 살펴보자.
"사소한 부상이야, 그렇지 않아? 세계대전을 겪고 시베리아에서 4년간 지내면서 겨우 손가락 두 개 다쳤을 뿐이니. 그런데 죽은 손가락이 살아 있는 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사람들은 잘 몰라. 건축사가 되고 싶은데 그림을 그릴 수도 없고, 사무실에서 타이핑할 수도 없고, 무거운 물건을 들지도 못하지. 가느다란 힘줄 하나가 썩었을 뿐이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꼭 하고 싶은 일들이 그 실처럼 가느다란 힘줄에 매달려 있다는 게 문제야. 집을 설계할 때 도면에서 1밀리미터만 잘못 그려도, 겨우 1밀리미터이지만 집 전체가 붕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야." - 281p
내게서 떨어져 나간 한 줌의 무언가로 인해 삶의 통로가, 세상과의 창구가 닫혀버린 것이다. 나는 멀쩡히 존재하건만 겨우 1%의 결함 때문에 남은 99%를 무가치하다고 판단한 국가였다. 왜 이들은 남들처럼 평범한 인생을 누리지 못하는가. 아픔만 남겨놓고 말없이 떠나간 청춘들을 어디에 가면 보상받을 수 있는가.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한 나는 제한된 일상의 고통과, 소모품으로 살아야만 하는 설움을 너무나도 잘 안다. 쳐다보지도 못하게 된 꿈과 도전들은 질리지도 않고 손짓을 해대는데, 그게 다 희망고문인 줄 알면서도 괜히 연민에 빠져보고 동정 속에 나를 밀어넣어도 봤다. 가난은 나와 C양을 초라하게 만들었고, 신체적 결함은 나와 P군을 세상 밖으로 계속 몰아냈다. 츠바이크도 그렇게 밀려나다가 벼랑 밑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불행한 가정의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고 했지만, 현대사회에 와서는 죄다 비슷비슷해 보인다. 누가 더 불행한지 겨루는 게 무색해진 현실 앞에서 개인의 아픔은 어린아이의 반찬투정 정도로 느껴진다. 글쎄, 나 같은 사람은 건물주나 복권 당첨을 바라지도 않는다. 기본적인 생활 유지와 인권을 보장받는다면 그걸로 족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눈치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고, 남들과의 비교로 나의 불행을 키우는 상황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평등하길 바랄수록 옐로카드만 꺼내드는 세상이다.
나보다 더한 이들한테서 위안을 얻는다는 건 말도 안 될 뿐더러 할 짓도 못된다. 반대로 잘 사는 누군가가 내 아픔을 감당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남녀의 울분은 끝내 복수와 배신으로 이어진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싶다가도 저자의 말로를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나 또한 가슴속에 총 몇 자루씩 품고 살아가니까. 츠바이크가 그린 시대의 자화상이라. 마음이 참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