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에서는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교육을 받는다고 들었다. 그런 교육이 모두에게 다 잘 먹히는지는 모르지만 상당수가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자라난다고 한다. 서로 간에 예의를 지키며 조심하는 세상. 이 얼마나 이상적인 유토피아인가. 내 생각, 내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실례이고 상처되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계속 돌아보는 삶. 피곤하게 산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습관화되고 일반화되면 피곤한 게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될 것이다. 이런 얘기를 왜 하고 있냐면, 이 책은 자신의 지난 잘못이 뭐가 문제인지, 자신의 태도가 타인에게 왜 상처인지를 모른 채 살다가 땅을 치며 후회하는 한 남자를 말하고 있어서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한다면 타인이 말하는 말에 조금만 귀 기울여도 고치고 달라질 수 있는 것들인데, 자존심이 밥 먹여준다고 믿는 권위적인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을 생각은 안 하고 외부 요인에서 찾으려고만 한다. 그 생각의 결과가 어떤 문제를 낳았는지, 또 이 사회를 어떻게 더럽혀가는지 알아보자.


항공사 승무원인 딸의 장례식 장면부터 시작한다. 유나는 차를 몰고 저수지에 뛰어들어 익사했다. 딸과 남처럼 지내왔던 공군 대령 출신의 아빠는, 딸이 죽고서야 지난 세월을 돌아본다. 현역 시절부터 전역한 지금까지도 아빠는 가정을 소홀히 했고, 10년간 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울고 싶어도, 화가 치밀어도 그럴 자격이 없는 아빠였다. 그는 딸의 일기장에 적힌 의미심장한 글을 발견하고 딸이 자살하게 된 경위를 조사한다. 그리고 딸이 근무하던 항공사에서 딸과 한 부기장의 스캔들 루머를 듣는다. 또한 진실에 다가갈수록 마주하는 건 딸의 심장에 칼을 꽂은 사람이 바로 아빠 자신이란 사실이었다.


유나와 아빠의 사이가 틀어진 두 사건이 있었다. 먼저 딸과 소문난 부기장은 과거 아빠의 운전병이었다. 그의 아내가 아이를 유산하던 날, 대령은 끝내 운전병을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는 대령에 대한 증오를 분풀이하려 유나를 납치해 집으로 데려간다. 반면 유나는 그의 심경을 이해하고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유나는 납치되었음에도 집에다 가출한 것으로 말했고, 납치된 동안 자발적으로 운전병의 아내를 조리하고 집안일을 도왔다. 아빠 때문에 한 가정이 깨져버린 것을 대신 사과라도 하듯이. 일찍이 철들어 타인의 심경을 이해하고 위로할 줄 아는 성숙한 아이였다.


또 한 사건은, 방산업체가 국방예산을 횡령하는데 동조한 장교들을 폭로하려던 윤 대령의 죽음이다. 그를 압박하여 입을 막고 자살하게 만든 것은 유나 아빠 홍 대령이었고, 이 사건은 사회에 알려져 대령은 불명예 전역했다. 당시 유나는 아빠를 비난했고, 눈 뒤집힌 아빠는 폭력으로 답했다. 한 가정이 무너졌는데 아빠는 고작 딸이 버릇없게 군 것으로 화를 낸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유나. 그 후로 딸과 엄마는 아빠와 따로 살게 된건데 듣자 하니 이건 도저히 커버칠 수가 없다. 나는 잘못한 거 없다는 태도로 나오는 아빠와 누가 같이 살고 싶을까. 더 충격인 건 어떻게 그 방산업체의 경비원으로 들어갈 수가 있지? 자신이 뭐 때문에 군복을 벗었는지 알면서? 그리고 힘들었던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딸한테 지금도 섭섭하다는 대령 이 인간은 진짜 하이킥 좀 맞아야 한다. 왜 아빠는 가족과 싸우고 해결할 생각보다 각자 갈 길을 택했을까?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없고, 선택지도 없다고 판단한 걸까? 자신이 원인이고 가해자라는 인식조차 없으니 해결할 생각을 안 했겠지. 알았다면 딸과 대면해서 풀어볼 기회도 얼마든지 많이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것들은 대령의 집안 사정일 뿐, 유나가 자살을 결심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직원을 고발하여 성과를 올리는 항공사의 엑스맨 제도가 시초였는데, 유나의 스캔들을 보고한 동료는 사과는커녕 오히려 유나가 잘못한 것처럼 몰고 갔다. 여기서 동료의 적반하장 태도가, 과거 아빠의 모습과 겹쳐진다. 똑같은 상황에서 아빠에게 저항했던 그녀는 세상에겐 저항하지 못하고 끝내 패배한다. 단순히 승산 없다는 사실에 분하여 자살한 게 아니다. 위계질서를 따라 비리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아빠가 그제서야 이해된 것이다. 그녀는 군대라는 계급사회를 오랫동안 봐왔으면서도 좀처럼 위계질서 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운전병이 상사의 가족한테까지 기사 노릇하는 게 당연한 건지, 임신한 아줌마를 불러다 일 시키는 엄마의 행동이 당연한 건지 항상 의문이었다. 늘 부조리함에 거침없이 맞서던 그녀였는데, 사회로 나와 겪어보니까 이 바닥의 더러움을 실감했다. 그래서 아빠가 속한 삶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생을 끝냈다.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어 각도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작품이다. 다 읽고 나서야 이 책이 성장 소설이란 걸 알았는데 딸뿐만 아니라 아빠의 성장까지 그려냈다. 딸은 승무원이 되면서 고객들에게 희롱과 폭행을 당하고, 반성문을 쓰고, 근신 처분까지 받으면서 인생은 실전이라는 것과 혼자만 깨끗해봐야 소용없단 걸 어렴풋이 느끼면서 성장한다. 인생 승리하는 흔한 성장이 아닌 순수함에 때가 잔뜩 묻어 현실을 깨닫게 된 마이너 틱한 성장이었다. 반면 아빠는 딸이 죽고서야 걸어온 길이 오물로 얼룩져있었음을 깨닫는다. 수많은 불편한 진실로 부들부들하다가 끝나는 게 아니라 딸을 위해 달라지려는 아빠도 성장한다. 그리고 작가는 두 부녀를 통해 독자까지도 성장시켜준다. 어째 세상은 의로운 사람일수록 가만 놔두지 않으려는 것만 같다. 심지어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더 문제 삼으려는 썩은 인간들도 많다. 똑같은 세상인데 어째서 누군가는 세상이 아름답다 말하고, 누군가는 세상이 더럽다고 말하는가. 적어도 어린이들만은 세상이 더럽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버 코드 메이즈 러너 시리즈
제임스 대시너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리퀄 1편에서 마크가 구해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던 소녀는 ‘사악‘이라는 단체로 들어가 ‘테리사‘라는 이름을 받고, 바이러스 치료제를 만드는 실험체가 된다. 이 단체는 테리사처럼 면역력을 지닌 아이들의 뇌를 연구하여 치료제를 만들고 세계를 구원하려고 한다. 그리고 메이즈러너의 주인공 토머스도 어려서부터 이곳에 들어와 실험체로 자라난다. 방사능으로 뒤덮인 세상을 살릴 수 있는 건 자신들 뿐이란 사실을 잘 아는 토머스와 친구들은, 좋든 싫든 사악에 협조해야 했다. 토머스와 테리사는 본부 지하로 내려가 그들의 미로 프로젝트를 돕는다. 그리고 미로가 완성되면 면역인들이 투입되고 여러 시련을 겪으면서 얻은 뇌 감정의 데이터로 치료제를 만드는 것이 사악의 최종 목표이다.


자신들이 인류를 구원할 치료제를 만든다는 희생정신으로 버텨온 면역체 친구들은, 미로 프로젝트를 숨긴 토머스와 테리사에게 배신감을 표출한다. 두 주인공은 중간 입장에서 사악의 편을 들어야 하는 난처함과 친구들의 비난으로 괴롭기만 하다. 미심쩍긴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사악을 믿었던 토머스의 내면은 점점 무너진다. 사악은 병에 감염되지 않은 가정을 협박하여 아이를 강제로 데려오고, 미로에서 친구들이 죽었는데도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플레어 병은 인구 조절 때문에 사악이 인공적으로 퍼뜨린 거란다. 사악이 밤낮으로 해결하려는 바이러스의 문제는 알고 보니 그들이 싸지른 똥이었고 그 더러운 것을 면역인들이 꾸역꾸역 뒤처리하고 있는 꼴이었다. 이 역겨운 곳에 가담하고 있던 자신에게 화나있는데 공터인들을 광인들이 사는 초열 지역으로 보낸다는 말에 폭발한 토머스는 친구들을 구하러 미로에 투입하기로 한다. 이제야 모든 앞뒤 내용이 전부 파악이 되었다. 


프리퀄까지 다 읽고 나니 이 시리즈는 절대 프리퀄을 먼저 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반드시 메이즈러너 1~3편을 먼저 읽고 프리퀄을 읽어야 훨씬 더 재미있다. 공터나 미로의 비현실적인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왜 토머스와 테리사만 특별했는지, 어째서 뉴트가 나중에 감염되어 죽은 건지 등등 모든 비하인드스토리가 다 들어있다. 그리고 미로를 탈출해서 초열 지역으로 이동했던 게 다 짜인 수순이었던 것까지도. 아무튼 드디어 시리즈 전권을 완독했다. 장편소설 한 권 쓰는 것도 어려운데 여러 권을 쓰고 연결하고 대중성까지 갖추기란 더 어려울 것이다. 그 힘든 것을 제임스 대시너는 멋지게 해냈다. 범죄 기자 출신인 마이클 코넬리가 경찰 소설을 쓰고, 의사 출신인 테스 게리첸이 메디컬 스릴러를 쓴 것처럼 전문 분야에서 책을 쓰는 작가들이 많다. 그런데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닌 것을 다루고 이토록 큰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의 뇌구조는 대체 어떻게 되어있는 걸까.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며, 어떤 뇌 훈련을 하는지 너무 궁금하다. 아무튼 이전 프리퀄 리뷰에 할 말을 다 써서 더는 쓸 게 없다. 끝.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6-21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0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26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0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킬 오더 메이즈 러너 시리즈
제임스 대시너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시리즈를 굉장히 좋아한다. 사실 스토리보다도 작가의 필력을 더 좋아한다는 말이 맞겠다. 이 책은 메이즈러너의 프리퀄 작품이다. 구매한 지는 되게 오래되었는데 이제서야 읽는다. 메이즈러너, 헝거게임, 다이버전트, 파인즈 같은 디스토피아 시리즈물이 예전에는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게 별로 없는듯하다. 아니면 내가 못 찾고 있는 건가. 여하튼 영화도 너무 잘 봤는데 프리퀄도 어서 영화화되었으면.


태양 플레어 현상으로 온 지구가 황폐해져가던 그 시절, 운 좋게 생존한 마크 일행들의 이야기이다.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모여사는 숲속에 헬기가 나타나 모두를 몰살하기 시작한다. 습격 받은 마을은 웬 바이러스가 싹 퍼져서 대부분 죽었다. 이곳을 떠나 적의 본거지를 향해 가던 중 똑같은 습격을 받은 다른 마을에서 유일하게 감염되지 않은 소녀를 만나 데려간다. 그러다 마크가 정찰 중일 때 여자 일행들이 납치되고, 적진에서 연합정부가 세계 인구수를 줄이겠다는 계획을 듣는다. 그리고 그들이 퍼뜨린 바이러스는 100% 전염되어 죽거나 광인이 된다. 붙잡힌 친구들을 위해 악어떼 속으로 돌진하는 마크의 구출작전은 무사히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작가의 책을 읽고 있으면 머리에 아무 생각이 안 든다. 그냥 물 흐르듯 편안하게 읽어내려간다. 딱히 태클 걸만한 것도 없고 심기를 건드리는 것도 없어서 좋다. 일단 분명 속도감이 있는데 절대 과하지 않다. 작가들이 집필하다가 텐션이 오르면 진도가 미친 듯이 팍팍 나가서 개연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은데, 제임스 대시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템포를 유지하며 구멍들을 전부 메운다. 이런 게 진정한 절제의 미학이라 하겠다. 그리고 메이즈러너 시리즈를 읽었을 때도 느꼈던 건데, 이 작가는 진짜 끊는 타이밍의 달인이다. 어떻게 하면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런 건 한국 드라마 작가들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은 넓고 능력자는 많군요.


나는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교차하는 플롯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정신이 사나운 것도 있지만, 잘 보던 채널을 갑자기 다른 데로 돌려서 흐름이 끊어지는 게 싫다. 이 책도 그런 플롯인데 전혀 불편함 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이유는 과거로 넘어갈 때 현재 상황을 뚝 잘라먹는 게 아니라 일시정지를 한 다음에 넘어가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주인공이 잠들거나 정신을 잃은 경우에만 꿈으로 과거 사건들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리고 꿈에서 깨면 자연스레 현재로 넘어오기 때문에 과거와의 연결이 매우 자연스럽다. 그냥 읽어보시면 이해되실 거다.


프리퀄 1권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비상사태가 일어나게 된 경위보다, 병에 감염되어 서서히 변해가는 주인공의 상태변화이다. 인류애 넘치던 마크는 점점 자아를 잃고 흉포한 모습으로 서서히 변해간다. 본인도 그것을 느끼고 초조해하며, 완전히 맛이 가기 전에 트리나를 구출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이 책의 핵심 포인트이다. 정신줄이 점점 끊어져가는 가운데 친구들을 지키려 필사적인 주인공의 위대한 희생정신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제 프리퀄 2편을 읽을 차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은네디 오코라포르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단에는 떨어졌지만 모집할 때부터 관심 가던 작품이었다. 작품 소개 글에서 애정 하는 할레드 호세이니 작가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작가가 미국 출신이지만 부모는 나이지리아 사람이다. 학생 때 운동부상으로 수술받은 후 글 쓰는 쪽으로 전향하여 다양한 글을 쓰며 지금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호세이니와 이력이 비슷하다 해서 글재주까지 닮은 건 아니었다. 일단 내가 싫어하는 글 스타일이 몇 개 있다. 첫째, 몽환적이거나 흐리멍덩한 분위기의 소설. 둘째, 고상한 문장으로 도배된 순문학. 셋째, 어려운 단어와 수식이 가득한 과학소설. 넷째, 상황이나 배경에 대한 설명 부족 및 장면 스킵이 많아 호흡이 뚝뚝 끊기는 글. 이 책은 네 번째에 해당한다. 예전에 ‘연금술사‘를 읽다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 포기했던 게 기억난다. 그런데 이 책에 비하면 연금술사는 가독성이 좋은 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 탓은 아닌 거 같고 아무튼 고대 문자같이 연구가 필요한 문장이 많은 데다가, 생소한 배경/문화/전통/사상을 묘사하는 글이 영 불친절하다.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견디고 딱 절반 즈음에 덮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모래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숨 막혀. 


아프리카에는 ‘아니 여신‘이 있었고 그 아래 백 피부의 누루족과, 흑 피부의 오케케족이 있었다. 누루족은 오케케족을 노예로 부려먹었고, 오케케족을 집단 강간하여 ‘에우‘를 만들었다. 에우는 폭력으로 태어난 아이를 말하며, 주인공 온예손우도 그 중 하나였다. 누루족의 아이라며 오케케족에게 미움을 받으면서도 두 모녀는 꿋꿋하게 살아왔다. 주인공이 할례를 받는 11살 때 몸에서 여러 변화가 생긴다. 몸이 투명해지기도 하고, 새로 변신하기도 하고, 환영을 보기도 하는 그녀 앞에 어느 날 에우 소년이 나타난다. 소년을 통해 오케케족 마법사의 제자가 된 주인공은 몇 년 뒤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생부인 누루족 남자를 복수하러 먼 길을 떠난다.


줄거리만 보면 무슨 모험 장르같이 보이지만 우리가 자주 보던 액션이나 판타지나 스릴감은 전혀 없는 작품이다. 배경이 배경인지라 전반적인 분위기가 약간 쳐져 있고 건조한 편이랄까. 그렇기 때문에 에너지 넘치는 주인공의 성격이 유독 튄다. 온예손우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말도 안 듣고 쉽게 욱하는 성격을 가진 것이 환경 탓인지 유전 탓인지 모르지만, 보는 내내 짜증을 유발해대서 맘에 안 들었다. 에우 소년이 그런 주인공을 보며 제발 멋대로 좀 굴지 말라는 말을 반복한다. 나도 이런 캐릭터를 책 속에서든 책 밖에서든 되게 싫어하는 타입이라 작품에 정을 못 붙이겠더라고. 하긴,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캐릭터가 세상에 어디 있으랴.


읽다 덮은 부분까지는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변화에만 초점이 맞춰질 뿐, 큼직한 사건이나 갈등이랄 게 안 나온다. 오히려 스토리보단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내용이 듬성듬성 나온다. 부족의 전통이라며 할례를 받게 하는 문제와, 여자라서 안된다고 하는 남녀 차등 문제, 타부족과 혼인했다며 따돌림받는 문제 등등. 남녀 차등 문제는 주인공이 ‘여자니까‘라는 이유 따윈 집어치우라고 강력하게 나와주니 시원시원해서 좋았다만, 그 외에는 대부분 잠깐 짚고 넘어가듯 다루어서 작가가 이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 게 맞는지 아닌지 긴가민가할 정도였다. 아무튼 스토리 자체가 강한 인상을 주지 않다 보니 그 외에 것들만 기억이 남는 책이다. 물론 뒤에는 안 읽었으니 이런 말하기엔 이를 수도 있겠다. 아,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 과정이 반지의 제왕 스토리와 너무 비슷해서 설마 따라 한 건가 싶었다. 친구들과 산에 가서 반지를 처분하는 선택받은 호빗과, 동기들과 함께 예언자를 찾아 떠나며 생부를 처벌하러 가는 능력자 주인공...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아무튼 기대가 컸던 작품인데 이렇게까지 나랑 맞지 않을 줄이야. 갑자기 이 갈증을 달래줄 냉면이 너무 먹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샤콘느 2019-07-08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랑도 안맞아요.과대광고에 낚인 거 ㅠ

물감 2019-07-08 15:39   좋아요 0 | URL
우리는 낚였습니다... 요즘 이런 과대광고가 많아서 저는 신간을 읽지 않아요. 검증된 책 위주로 읽습니다. 하하..
 
폭풍의 언덕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 문학 모임 두 번째 선정도서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다. 대중소설은 제목만 봐도 얼추 삘이 오는데, 고전은 도저히 감도 안오는 제목이 많은듯. 읽어보면 알겠지 하고 펼쳐보지만 역시나 난해하고 갈피를 잡기 힘든 게 고전 문학 답다고 할까. 그래서 봐도 봐도 분위기 파악이 안될 때면 남들이 적어놓은 리뷰를 읽는 게 더 빠르다. 원래 선입견 생기는 게 싫어서 완독 전에는 리뷰를 절대 읽지 않는데 고전 문학은 그냥 리뷰를 먼저 보는 게 더 도움이 될 듯하다. 다행히 이 책은 그렇게 예열시간이 길지 않았다. 딱 절반쯤? 게다가 전반전과 후반전의 온도 차이가 엄청 큰 것이 애거서 크리스티 스타일하고 비슷하다. 크게는 1세대 히스클리프의 이야기와, 2세대 자식들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는데, 1부에 비하면 2부는 진짜 진짜 재미있고 이해도 잘 된다. 그만큼 1부는 엉망진창이라 할 만큼 읽기 힘들었음. 아무튼 이걸 어떻게 별점 테러해버릴까 고민하다가 후반부가 전반부의 따분함을 잊어버리게 할 만큼 볼 만해서 별 네 개 준다. 고전문학의 평점이 높은 이유는 진짜 끝까지 읽어봐야만 납득이 감.


이 책은 록우드가 하녀장 엘렌 딘에게 언쇼 가문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폭풍의 언덕은 히스클리프의 집 이름이다. 그는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주인으로, 아주 거칠고 인색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어릴 적 고아였을 때 언쇼에게 거두어졌다. 그에겐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딸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금방 썸 타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입장과 처지와 신분을 직시하게 되어 캐서린을 밀어내기 시작하는 히스클리프. 훗날 캐서린이 다른 남자를 택하자, 사랑보다 깊은 상처를 입은 히스클리프는 집을 나가고 3년 만에 다시 캐서린 앞에 근사한 신사가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질투심에 좋아하지도 않는 캐서린의 남편인 에드거의 여동생과 결혼해버린다. 신경질적이고 이기적인 캐서린은 이 눈꼴 시린 상황에 못 견디고 그만 운명한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던 그는 악마로 각성한다. 더불어 캐서린의 오빠 힌들리도 죽으면서 폭풍의 언덕 주인이 된 히스클리프의 만행은 이제 아무도 막을 자가 없어진다.


사건을 타인에게 건네듣는 형식이라 전부 팩트는 아니라서 의심스러운 내용도 있고 추측이 필요한 장면도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전부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 투성이이다. 그중 대표로 캐서린에 대해 할 말이 너무 많다. 대체 얼마나 오냐오냐하면서 자라야 싸갈국에 밥 말아 먹은 성격 파탄자로 크는 것일까. 떠받들어주는 것에만 익숙했던 그녀는 약혼자의 뺨을 때리고 하녀를 폭행하는 등 히스클리프가 떠난 뒤로 정신병이 날로 심각해지고 날카로워진다. 에드거는 정말로 캐서린을 사랑해서 결혼했을까? 자신에게 손찌검하고 발작하는 캐서린의 상태를 보고도 결혼할 결심을 했다는 게 참 현자도 이런 현자가 없어요.


시누이가 히스클리프를 좋아하자 그녀를 말리는 대목에서 캐서린의 이중인격이 또다시 나온다. 남편에게는 예전의 히스클리프가 아니라고 대변했으면서, 시누이 이사벨라에게는 천하고 교양 없는 남자라서 너와 안 맞는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원래 이기적인 건 알았지만 남한테 주기 싫다는 이유로 히스클리프를 폄하해대는 캐서린에게 없는 정까지 다 떨어진다. 그와 결혼하면 똑같이 천박해질 본인의 신분 때문에 에드거를 택했으면서 말이다. 그녀는 히스클리프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보다 새장에 가둬놓고 관상용으로 즐기려는 기색이 다분했다. 그랬으면서 낮아진 신분으로 히스클리프에게 못해줄 바에는, 에드거와 결혼해서 히스클리프를 챙겨주고 서포트할 계획이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이 무슨 개뼉다귀 논리란 말인가.


서로가 좋아하는데 이루어질 수 없어 택한 길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숭고하고 로맨틱한 게 아니라 더럽고 추악한 복수심을 낳았다. 히스클리프는 에드거를 자극하기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에드거의 여동생과 결혼을 하고 아내를 정신 나가게 만들었다. 캐서린에게 받은 상처가 마침내 그를 지독한 독사로 탄생시킨 것이다. 캐서린의 정신세계를 온전히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히스클리프 자신뿐이란 걸 그도 알았을 텐데 꼭 그녀를 떠나야만 했나. 그렇게 떠났으면 차라리 나타나질 말지. 정녕 그는 모든 결과가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을 몰랐을까? 분명 알고 있었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 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캐서린도 이기적이지만 히스클리프도 이기적이다. 결국 두 사람만의 이야기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모두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었다. 이 정도면 거의 대한민국 아침드라마 막장스토리에 버금갈 수준이다. 


이 두 집안의 비극은 2세들까지 이어졌다. 죽은 힌들리의 아들 헤어턴을 히스클리프가 종처럼 키웠는데, 캐서린의 딸이 그와 사촌지간이란 말에 질겁을 하고 벽을 친다. 게다가 히스클리프를 떠나 도망친 아내 이사벨라가 낳은 아이를 오빠 에드거가 데려왔으나, 히스클리프는 당당히 자신의 아들을 데려가서 헤어턴 못지않은 노예로 키운다. 히스클리프가 얼마나 악질이냐면 헤어턴과 캐서린의 딸을 붙여놓고 연애 감정을 부추김으로써 헤어턴이 안달복달하게 만들었다. 그는 헤어턴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열등감과 자격지심과 괴로움을 느끼는 것을 즐겼다. 헤어턴의 감정들이 과거 본인이 느꼈던 감정과 똑같다면서 말이다. 그렇게 과거에 힌들리가 자신을 괴롭힌 것을 자식에게 앙갚음하듯이. 이제 그의 목적은 단 하나, 에드거의 소유인 티티새 지나는 농원이 자신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경멸하던 린턴가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결혼시키려는 사이코패스 같은 히스클리프. 몸이 아픈 아들이 병으로 죽기 전에 결혼하라고 닦달해대는 진정 인간의 탈을 쓴 악마였다.


그러나 칼에 찔려도 피 흘리지 않을 것만 같던 그도 끝내는 양심에 패한 건지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와 닮은 헤어턴을 볼 때마다 괴로웠던 히스클리프. 그래서 헤어턴을 미친 듯이 괴롭히고 부려먹으면서도 항상 곁에 붙여둔 거였다. 사랑에 실패했다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만큼 억지스럽지만, 요즘 대한민국 보면 애인이 만나 주지 않는다고 염산테러를 하질 않나, 길거리 폭행을 하질 않나. 나사 빠진 정도가 아니라 지능 없는 좀비 같은 인간들이 넘쳐나는 코리아에서 히스클리프 정도면 양반 수준일지도. 여하튼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면 이렇게나 무섭다. 어쩌면 신은 인간의 악마화를 막기 위해 사랑을 내려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비종 2019-06-22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전 문학은 풀꽃이죠.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 사랑스러운.ㅎㅎ 끝까지 읽어봐야 맛을 제대로 보여주네요.
‘사랑보다 깊은 상처‘에서 빵 터졌습니다.ㅋㅋ ‘눈꼴 시린 상황에 못 견디고 그만 운명한다.‘,‘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던 그는 악마로 각성한다.‘에서 물감님의 개성이 뚝뚝 떨어집니다.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한 횟감처럼 팔딱이는 느낌에 유쾌한 마음으로 머물다 갑니다.^^

물감 2019-06-23 14:08   좋아요 1 | URL
이번에도 고비가 많았지만 성공했습니다ㅋㅋ이렇게 몇번을 더 해야 고전문학에 익숙해질라나요ㅋ
저는 이 책에 나오는 다양한 모양의 사랑을 보며 이것이 어떻게 고전문학 반열에 들어갈수 있을까 궁금해졌어요. 이 내용이 요즘에 나왔어도 그만큼의 가치가 생길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술취해 저지른 사고는 어느정도 눈감아주듯이, 사랑해서 저지르는 일들도 이렇게 이해해주거나 봐줄수도 있는걸까요? 저는 아직 문학 내공이 없어서인지 작가가 어떤 내용을 꼬집고 싶은건지는 모르겠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