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 후 원더그라운드
윌리엄 R. 포르스첸 지음, 전미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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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는 우리 일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사회의 시스템을 바꿔놓았다. 전 세계를 골고루 강타한 이번 재앙이 주는 여러 가지 교훈 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사전 대비의 중요성을 꼽는다. 인간의 힘으로 재앙 자체를 차단하는 건 불가하나 대비만 잘해도 피해가 줄어들 테니.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상 징조를 보고도 안일하게 생각하여 대처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먹구름을 보고도 소나기일 뿐이라며 우산 없이 나갔다가 비를 쫄딱 맞은 미련한 자와도 같다. 왜 리뷰 시작부터 이런 말을 하냐면, 이 책 역시도 아무런 대비 없이 대재앙을 직면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내가 읽었던 재난 소설 중에서 이 작품의 재난이 역대 최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는 이 내용에 비벼보지도 못한다. 자, 이제 젖과 꿀이 흐르던 땅이 1초 후에 황폐한 지옥으로 뒤바뀐 천조국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라.


갑자기 찾아온 정전으로 미국의 일상은 정지해버렸다. 거리의 자동차들이 멈추었고, 전자기기들도 먹통이었으며, 비상 전력과 배터리들도 무반응이었다. 이 모든 상황은 전자기 충격파(emp)로 발생한 재난의 시작이었다. 공중에서 터진 핵폭발로 감마선 에너지가 방출하고 전자기의 회로가 파괴되어 모든 전자 시스템이 마비된 것이다. 이제 생계에 위협을 감지한 사람들은 사재기를 하고 약탈과 폭동을 시작한다. 그렇게 고립된 미국의 소도시는 구멍 난 배처럼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장르가 장르인 만큼 시종일관 분위기가 어둡다. 전기를 못 쓴다는 게 이렇게까지 힘들 줄 상상도 못했다. 전기의 부재는 인류의 문명을 청동기 시대로 되돌려놓았고, 현대인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위기에 손도 못써보고 죽어갔다. 죽음에 가장 가까운 건 역시 환자들이다. 맨 먼저 의료시설에 의존하는 노인들의 죽음부터 시작되었다. 병원과 약국이 전부 강도 맞은 탓에 병자들도 줄줄이 죽었다. 술 담배가 끊어지자 중독자들은 정신 질환을 일으키고, 물과 식량 부족으로 성직자마저 이성을 잃기 시작한다. 이윽고 계엄령이 내려졌지만 붕괴 중인 사회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통제불능인 사람들로 기관 및 시설들은 제구실이 불가할뿐더러 직원들도 전부 달아나 수습할 수도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벅찬데 피난 오는 외지인도 막아야 하고, 구호물품 거래도 해야 했다. 또한 질병 보균자가 있다면 전염병이 퍼질 것도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굶주린 개들이 언제 맹수로 돌변할지 몰라 사전에 죽이자는 제안도 나왔다. 하나부터 열까지 미국 답지 않은 생각과 정책들로 미칠 지경이었지만 감정적인 판단은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죽어가고, 식량과 약품은 바닥치고, 외지인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지도자들 간에 의견 충돌에서 주인공은 길잡이가 되고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작가는 주인공에게 역사학자라는 타이틀을 주어서 과거에 있었던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한부 인생의 딸 걱정으로 이기적인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설정도 주었다. 겉사람은 모두를 살리기 위한 지도자의 입장이었지만, 속사람은 가족을 먼저 살리려는 한 아버지의 입장이었다. 가족이 우선인 게 당연하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이 혼돈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 회복될 미국의 역사 속에 수치스러운 오점을 남길 것이었다. 그래서 당장의 존망을 해결하기도 숨 막혔지만 지도자로써 먼 훗날의 비전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실체가 없는 적과의 싸움은 이 얼마나 소모적인가. 승리에 대한 기쁨도 없었고, 어디가 끝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쪽에서는 사이비 신흥교가 일어나 지구 종말을 외치고, 저쪽에서는 인간 말종들이 강도 짓을 하고 다닌다. 미쳐돌아가는 세상이었고, 다들 죽지 못해 사는 꼴이었다. 반려동물마저 잡아먹어야 하는 악몽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미국 전역을 파괴하고 다니는 단체가 쳐들어와 전쟁을 치른다. 운 좋게 이겼다지만 대다수가 사망했고 부상자들도 치료약이 없어 서서히 죽음을 맞이했다. 같은 미국인들과의 살육전이라니, 참담한 현실이었다. 적들은 겨우 EMP 하나 터뜨렸을 뿐인데, 미국은 서로 싸우고 자멸한 것이다. 전자기 펄스 폭발은 식량난에서 민족 전쟁으로, 마침내는 전염병으로 이어졌다. 거리에 방치된 수많은 시체와, 오랫동안 치료받지 못한 질병 보균자들로 인해 면역이 약해진 사람들은 치료제 없이 병마와 싸우다 죽는다. 사랑하는 이가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최소한의 존엄마저도 지켜줄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지.


게임에서만 보던 EMP 충격파가 현실에서는 이렇게나 위험한 것이었다니. 이 모든 시나리오는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작가는 말하였다. 읽어보시면 이 책의 재난이 핵 전쟁이나 코로나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다는 내 말이 이해될 것이다. 약이 없어 죽고, 굶어죽고, 강도 맞아 죽고, 전쟁으로 죽고, 역병으로 죽고, 또다시 아사하고... 그렇게 죽음은 당장이라도 산 자를 데려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보통의 재난 소설들이 디스토피아로 바뀌는 과정에서 많은 내용을 생략하고, 몰락한 시점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그러나 이 책은 시민들이 공황상태가 되고 사회가 붕괴되는 과정을 매우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있다. 오늘이 지나면 이런 일이, 내일이 지나면 저런 일이 발생하는 연쇄 사건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정말 철저히 준비했다는 인상을 받았고, 의도한 대로 독자에게 충분한 경각심을 갖게 한다. 문학적인 시각에서 보면 부자연스러운 설정이 다소 있지만 크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니다. 과학소설이 다 그렇지 뭐, 잘 알잖소? 


사막에서는 금보다 물이 귀하다는 말이 있다. 작중에서는 굶주림 끝에 인육까지 먹는 자들도 등장한다. 그런 괴물이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사람이 현실에서는 몇이나 될까. 디스토피아 문학이 다루는 인간 군상을 보면 완전히 타락하여 짐승의 탈을 쓴 자도 있고, 아싸리 다 포기하여 추악할 대로 추악해진 자도 있고, 생존을 위해 더럽고 꺼림칙한 것도 다 받아들인 자도 있다. 우리는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이들을 마냥 혐오하고, 가족을 위해 남을 헤치는 자들을 욕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들처럼 되지 않겠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물론 작가가 인간의 존엄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도 아니고,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준 현대 시스템에 감사하라고 쓴 것도 아니다.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이 재난의 경고를 무시했다가는 우리도 청동기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니 비 맞기 전에 우산은 미리미리 준비해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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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4-25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굶주림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인육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감 2020-04-25 23:03   좋아요 0 | URL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니 뭐니 하지만 재앙 앞에서는 들판의 짐승들과 다름이 없음을 느낍니다. 오히려 어떤 법도 규정도 없는 미물들의 세계가 인간보다 더 질서있으니까요. 비관주의를 말하는 건 아니지만 메시지가 워낙 강렬해서 말이죠... 😥
 
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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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학을 위주로 읽는 편이지만 어쩌다 가끔씩 국내 문학이 땡길 때가 있다. 밖에서 온종일 놀다가도 역시 집이 최고라고 느끼는 것과 비슷하달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한국소설을 고를 때면 배스킨라빈스에서 한 가지의 맛을 정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신중해진다. 그리하여 벼르고 벼르던 선우 행님의 두 번째 작품이자 세계문학상 대상작인 저스티스맨을 읽어주었다. 넘나 정의로운 제목에 비해 시리어스한 표지 디자인은 이번에도 심상치 않은 이야기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과연 무엇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뺏었는지 어디 한 번 잘근잘근 씹어보리다.


일곱 명이 죽은 연쇄살인사건 발생. 피살자들의 이마에 나있는 두 개의 총구멍. 수사는 좀처럼 맥을 못 추었고, 국민들은 경찰에 질타와 비난으로 각자의 두려움을 해소했다. 그러던 중 ‘저스티스맨‘이라는 닉네임의 카페 유저가 사건의 전말을 각색하여 올린 글들이 화제가 된다. 그는 피살자들이 전부 사회의 썩은 생선들이었음을 드러내었고, 따라서 살인마는 마땅히 죽어야 할 인간들만을 죽인 꼴이 되었다. 비록 한 유저의 각색한 글에 불과하지만 제시한 근거들이 워낙에 팩트였으므로, 피살자가 늘어나고 추리 글이 올라올 때마다 누리꾼들은 점점 더 저스티스맨을 신뢰하게 된다. 그러나 경찰도 모르는 피살자들의 정보를 안다는 이유로 저스티스맨이 살인마가 아니냐는 갑론을박이 펼쳐지는데...


정유정 작가가 악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도선우 작가는 정의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그의 데뷔작 ‘스파링‘에서도 정의에 대한 본질과 통찰이 끊이질 않았었다. 단순히 정의의 부재가 악이 되는 건 아닐 테지만 이 둘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분명하다. ‘스파링‘에서 지켜주지 못한 정의와 그것이 낳은 결과를 주로 다뤘었다면, 저스티스맨에서는 과도한 정의가 양성하는 피해를 주로 다루고 있다. 알다시피 온라인에선 남녀노소가 평등하다. 그것이 익명의 위력이다. 일상에서는 루저 취급받던 사람도 웹에서는 전지전능한 신의 보좌에 앉는다. 어떤 글이든 악성 댓글을 다는 키보드 워리어들도 있지만, 반대로 정의를 외치는 일에 선을 넘는 에너자이저들도 많다. 이 책은 후자들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저스티스맨은 확실치도 않은 대상을 질타하고 그것이 정의 구현이라도 되는 것마냥 여기는 것을 지적하였고, 정의라는 이름이 또 다른 피해자를 낳을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 그것처럼 온라인에서는 과도한 정의가 마녀사냥으로 이어졌고, 오프라인에서는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졌다. ‘스파링‘에서도 얘기했었던 정의의 범위는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저스티스맨의 조사 결과에 의거하면 피살자들은 하나같이 정의 구현을 한답시고 추악한 짓을 일삼던 자였고, 살인마는 그런 부류만을 죽여왔던 터라 자연스럽게 사회적 영웅으로 둔갑하였다.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건만, 법이 해결해주지 못한 일들을 대신 해결해주고 있었기에 살인마는 추앙받는 입장이 된 것이다. 결국 이것마저도 저스티스맨의 말대로 과도한 정의감이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은 안된다는 파와, 그럼 그냥 당하고 살란 말이냐는 파로 나뉘어 독자들에게 선택 아닌 선택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나라의 허수아비 법률과 솜방망이 처벌을 보고 있노라면 의적 홍길동에 열광하는 대중이 이해 안 될 것도 없단 말이다. 법을 세우는 자들이 오히려 도덕과 윤리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상황에서 국민의 광분함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말할 수 있을까. 나랏님들의 답변이 듣고 싶다.


수면 위에서 자신의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이 수면 아래서는 온갖 더럽고 추악한 수단과 방법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누구라도 익명이라는 감투를 통해 권위자가 될 수 있었고, 그들은 현실에서도 타인의 약점을 잡아서 쥐락펴락하며 권력을 행사하곤 했다. 반대로 약점이 잡힌 자들은 궁지에 몰리다 끝내 극단적인 선택까지 한다. 이 약자들은 작품 속 피살자들이 괴롭혀오던 대상이었다. 각자 사연은 다르지만 그 대상들이 전부 똑같은 패턴으로 고통받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개인에게만 찍혔던 약자들이 나중 가서는 사회의 악이라는 누명을 썼고 집단의 공격을 받아 사회에서 생매장을 당하였다. 물론 가해자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악을 처단했다 믿고 있으니 진실의 여부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옳다고 하면 그것이 곧 정답이었고 정의였으므로. 현실이 이러하니 법보다 주먹이 가깝단 말까지 나온 게 아닌가. 나랏님들도 어디 한번 반문해보시라.


일반적인 소설의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평론가들의 해설문 혹은 연작 시사칼럼 같은 성격의 작품이다. 장강명 작가와 비슷한 케이스라 보면 된다. 이런 스타일의 장점은 가려운 곳들을 시원시원하게 긁어준다는 것이고, 단점은 메시지 전달의 목적이 다분하여 문학적인 맛은 쏘쏘하다는 것이다. 추가로 피살자들의 사연과 추측한 내용이 되게 리얼해서 몰입감이 쩌는데에 비해 너무 짧은 분량으로 호흡이 끊기는 점도 아쉬웠다. 무엇보다 저스티스맨의 정체와 허무한 결말이 유일한 반전이었다. 사실 주인공이 필요 없는 구성이었지만 그래도 저스티스맨이 매 챕터의 중심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웃돼버리다니. 스토리는 계속되지만 어쩐지 모호해진 방향에 당황하고 말았다. 이후 뒷이야기는 직접 읽어보시길 바란다.


도선우 작가의 광팬으로써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어 몇 자 적어본다. ‘스파링‘ 때도 느낀 건데 작가가 자주 쓰는 접속사가 있다. ‘그러므로, 이를테면, 그러니까‘ 같은 것들인데 이걸 대부분 쉼표 뒤에 넣다 보니 흔치 않은 문장이 되어서 금방 눈에 띈다. 분명히 고급 스킬이지만 여러 번 반복되고 있어 작가의 개성이 아닌 습관 중 하나로만 비춰진다. 사실 어떤 독자가 그렇게까지 분석할까 싶지만서도 행여 작가 고유의 색깔이나 매력이 가려질까 염려 아닌 염려가 든다. 또 다른 아쉬움은 글의 수준이 너무 높아졌다는 것. 과거 비토씨는 초등생도 이해할 눈높이의 리뷰를 쓰겠다 선언하였고, 과연 읽기 쉬우면서도 내공 빵빵한 글들로 ‘좋아요‘를 휩쓸곤 했었다. 그런데 작품에서는 어려운 문장과 문법, 일상에서 잘 안 쓰이는 단어들, 난이도 있는 비유 예시 등등, 하이레벨의 기교로 가득하여 버겁다고 느낄 독자도 있을 것 같다. ‘스파링‘ 역시 마찬가지였고. 어쩐지 독자 연령을 너무 높게 잡은 듯한데, 이건 뭐 행님께서 생각한 바가 있으실 테니 이쯤 적고요, 아무튼 이번에도 축하가 늦었습니다. 연속 수상이라니, 행님의 덕후이자 빠돌이인 제가 참 자랑스럽슴다ㅎㅎㅎ 올해도 좋은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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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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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읽어야 하나 오랫동안 망설였던 책이다. 장르소설 매니아층에서는 필독서로 알려져 있는 듯한데, 어쩐지 그럴수록 더 손이 안가더랬다. 우연히도 회사 도서관에 고이 잠들어있길래 함 가져와봤는데 세상에 이리 재밌는 걸 왜 이제야 읽게 된 것인지 참으로 한심하도다, 나님이여. 노래도 옛것이 좋았듯이, 소설도 그렇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시겠다. 심지어 내가 싫어하는 독일문학이라니? 이 정도 수준이면 삐뚤어진 내 선입견도 고쳐볼 만하겠는데. 역시 거장은 레벨이 다르다 이겁니까. 분위기나 문체는 ‘주제 사라마구‘와 비슷하고, 비유와 표현력은 ‘토머스 쿡‘의 느낌이며, 재미와 속도감은 ‘장용민‘을 닮아있다. 사기캐를 발견했으니 저자의 다른 책들도 섭렵해봐야겠다. 벌써 기분 좋고 난리다.


어려서부터 후각에 천부적 재능을 가졌으나 정작 제 몸엔 아무 냄새가 없어 늘 기피 대상이었던 주인공. 고아 출신의 소년은 훗날 향수 제조인의 길을 걸으며 무형의 재능을 유형으로 바꾸어 세상을 놀래킨다. 반면 냄새의 수집을 위해 충동적으로 살인을 한 그의 내면에는 엄청난 악마가 깨어나고 있었다. 이제 그는 궁극의 향수 제조와 냄새 수집을 위해 세상을 떠돌며 인간 사냥을 시작한다. 점차 세상을 공포로 몰아가는 이 애정결핍 히키코모리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이 작품은 관점에 따라 냄새에 환장한 변태의 유치뽕짝 이야기일 수도 있고, 전례 없었던 고전과 스릴러를 혼합한 퓨전 판타지 장르일 수도 있다. 일단 만물의 냄새를 맡는다는 설정부터가 비현실적이라 취향 면에서 갈릴만 하다. 그래서 주인공을 선이 아닌 악으로 세워서 살인자의 이야기를 쓴듯싶다. 후각이라는 소재로 뭘 얼마나 보여줄지 기대는 안 했는데 이거 원 예측불가한 참신함의 연속이었다. 보통 악역 시점의 작품들이 심리 쪽도 같이 다루는데 비해 이 책은 감정이 결여된 캐릭터라 심리 장면이 전혀 없다. 그래서 더더욱 앞을 예상하지 못한다. 근데 이렇게 끌려다니기만 하는 플롯도 은근한 매력이 있었다. 


그는 후각으로 세상을 배워나갔다. 사물의 존재를 냄새로 인식한 다음 머리에 입력하였다. 그렇게 점차 모든 냄새를 수집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그의 광기는 깊어져만 갔다. 일생을 혐오 속에서 살아왔지만 그의 광기는 타인의 멸시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첫째는 향에 대한 갈망으로 빚어진 순수함이 악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래서 살인을 했어도 그게 죄인지 몰랐고, 향수로 타인을 속이거나 조종하는 행위도 무엇이 잘못인지를 몰랐다. 둘째는 자신의 무(無) 존재에 대한 수치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이 두려워 7년의 동굴 생활을 떠나 마을을 찾아가고, 인체 향수를 만들어 자신의 무체취를 감추는 등 인간적인 모습도 여러 번 보여준다. 반면 향수 제조를 위한 계획을 실천하는 치밀함도 보여주며 독자를 계속 들었다 놓는다.


냄새에 마음을 뺏겨 살인에 손을 댄 주인공은 마치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였다. 죄악의 눈이 열린 이상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향기에 미칠 대로 미친 그는 결국 연쇄살인을 저지르며 인간의 냄새를 수집한다. 과거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살인이 나비효과가 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순수한 욕망일 뿐이어서 허무하게 붙잡혀버린다. 이쯤부터 점점 텐션이 떨어져 이 책도 용두사미인가 했는데 또 한번 판을 뒤집어놓는다. 이 살인자는 궁극의 향수로 모든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죄인으로 만들어버린다. 무력을 쓰지 않고도 세상을 정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자신은 사랑이 아닌 증오 속에서 만족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모든 계획을 성취했는데 이젠 뭘 할까 싶던 차에, 작가는 기발한 방법으로 주인공의 운명을 던져주고 깔끔하게 마무리하였다. 살인자의 이야기가 이렇게 재밌어도 되나, 기분 참 이상하네.


휴대폰만 보고 있는 사람은 머리 위의 만발한 벚꽃을 보지 못한다. 이 책의 살인자도 그런 케이스이다. 냄새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 외엔 아무것도 보질 못하고 있다. 그게 어째서 안타까웠냐면 어렸을 땐 나름 감정이란 게 있기는 했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비위를 맞추거나 기쁘게 해줄 줄도 알았다. 허나 아무도 케어해주지 않았으니 올바른 길이 어딘지 누가 알랴. 그 결과 악의가 전혀 없는 그의 행동은 극악무도한 범죄가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 살인자가 요즘 핫이슈인 N번방 사건의 조 모씨와 여러모로 캐릭터 겹치는 듯. 이런 악마는 소설만으로도 충분한데 말이다. 아무튼 오랜만에 즐거운 독서였고,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쥐스킨트 작품 추천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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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shac2 2021-03-26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너무잘쓰셔서 쓰신거 다보고있어요ㅋㅋ별4개이상인건 다읽어보려구요 감사합니다~@

물감 2021-03-26 18: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ㅎㅎ이웃님 같은 분들이 있어 글쓰는 맛이 납니다^^
 
잉그리 빈테르의 아주 멋진 불행
얀네 S. 드랑스홀트 지음, 손화수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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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로 냄새가 진동하는 제목만 보고 또 다른 글로벌 병맛 작가의 등장인가 싶어 냉큼 집어 들었다. 연속으로 하드한 책만 읽어서 확 달궈진 전두엽을 식혀주기에 딱 좋아 보였다. 요즘은 음식도 단짠단짠이 디폴트 아닙니까. 암튼 내가 이 책에 흥미를 가진 건 노르웨이 문학에서 유머와 위트를 다룬다는 의외성 때문이었다. 노르웨이의 문학 컬러가 비비드한 딥 블랙이라고 어디서 들은 건 있었거든. 뭐가 되었건 제목만으로도 한 명 낚았으니 마케팅 성공한 거지 머. 나는 이렇게 문학으로 웃음 주는 작가들을 진정으로 존경한다. 요즘처럼 웃을 일 없는 시대에 작게나마 피식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런 건 언제든지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바이다. 그럼 이제 주인공께서 어디 얼마나 불행하신지 함 진찰해드립죠.


대학교수인 주인공은 곧 정리 해고되기 직전이다. 또한 경매로 비싼 집을 더 비싸게 구하고, 현재 집은 안 팔려서 죽을 맛이다. 직장에서는 무능한 직원으로, 집에서는 미련한 아내로 낙인찍혀버린 그녀. 가뜩이나 심각한데 해고를 반대하고자 하극상을 꾸몄다는 누명까지 쓴다. 결국 학과장은 주인공을 자매결연 사절단으로 러시아에 보내버린다. 이후 나사 빠진 파트너들 덕분에 국제 범죄자가 되어 뉴스 헤드라인을 찍게 생긴 빈테르 여사. 대체 불행의 여신께서는 언제쯤 그녀를 떠나시렵니까...


흠. 이것이 노르웨이가 보여줄 수 있는 유머의 한계구나. 나는 요나스 요나손처럼 심각한 상황을 연출하고 능구렁이처럼 사태를 넘어가면서 나오는 유머를 기대했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고 그저 사태의 심각함을 가볍게만 다루고 있다. 이건 뭐 어설픈 블랙 코미디만도 못한데 노르웨이에서는 걸작의 탄생이라며 바다 건너 한국까지 왔다는 게 사실입니까.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웃픈 상황의 연속인데, 이런 해프닝을 작정하고 썼다는 사실이 더 웃프시다. 근데 진짜 제목대로 개인의 불행한 이야기가 전부였다니. 제목으로 기대감 잔뜩 올려놓은 거에 비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트콤 같은 코믹 장르도 아니고, 주인공의 성장 드라마도 아니고, 기승전결도 엉망이고 거참 작품의 성격을 모르겠음. 번데기가 되다 만 애벌레 같은 모습이랄까.


어김없이 이번에도 주인공을 신랄하게 까 보겠다. 하기 싫은 컨퍼런스 준비를 최대한 미루고, 툭하면 연구실 문밖에 ‘시험 중‘ 팻말을 걸어놓고 딴짓하며,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거짓말과 변명을 늘어놓는 등 전형적인 뺀질이 캐릭터인데 정작 자신은 품위 있는 컨셉을 유지하고 있다. 어쩐지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를 구상하신 듯한데, 글쎄요. 아무리 봐도 사랑스러운 구석이 없는걸요? 한국에서는 씨알도 안 먹힐 거 같아서 큰일이네. 암튼 직장 문제, 부동산 문제는 충분히 불행하다 볼 수 있지만, 워낙 분위기를 라이트 하게 깔고 있어, 누구나 겪는 고생 가지고 너무 오버한다 싶더군. 미안하지만 한국에선 매우 흔한 일상이라서요. 나름 빵 터뜨리려는 작가의 노력이 곳곳에 보였지만 컨텐츠부터 이미 실패였음. 당신의 웃음 코드는 애석하게도 전혀 와닿지 않았다요. 겨우 이 정도로 배꼽 잡다니, 노르웨이 국민들은 정말 순수한가 봐.


잠깐 옆길로 샜는데 다시 주인공을 까 보자면, 캐릭터 설정 자체가 큰 모순이었다. 원래부터 그녀가 어리바리하고 미숙하고 칠칠치 못한 게 아니었다. 뭔가를 계획할 때면 별별 상상을 다 하고 최악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둘 줄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멀쩡한 주인공이 왜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사고 회로가 멈추고 분위기에 휩쓸리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집을 경매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집안 재정을 계산할 정도로 정신머리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뭔가에 홀린 듯이 금액을 올리고 낙찰에 목숨을 건다는 게 말이 돼? 전혀 단가가 맞지 않는 설정이었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스스로도 선을 넘으면 불행할 것을 잘 안다는 사실. 이건 뭐 지킬 앤 하이드도 아니고요, 매력도 없는 캐릭터에 설정 붕괴까지? 이 분도 헛개수 드링킹이 좀 필요해 보임. 의식의 흐름대로 가는 것도 정도껏 하셔야 욕먹지 않습니다요.


주인공이 다양한 불행을 겪는 동안 변화할 기회나 계기가 많았음에도 어중간한 컨셉 때문인지 달라질 시도조차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본인이 문제가 생길만한 곳에 항상 발을 담그려 하는 경향이 있단 걸 스스로도 알고 있단 게 유일한 킬링 포인트라 하겠다. 물론 상황들이 그녀에게 워낙 비협조적이지만 자신이 리드해나가는 게 하나도 없고 계속 끌려다니고만 있어, 애교로 봐주던 독자들도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라. 이런 언밸런스를 보고 난 다음부턴 아무런 기대감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어서 차라리 속 편하고 좋았음. 그래, 이럴 때 낙관적인 독서 습관도 좀 길러보지 뭐. 적어도 한국인을 흡족시키려면 한참은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드랑스홀트 쓰앵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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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면 - 숨기지 마라, 드러내면 강해진다
브레네 브라운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1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부서에서 신청한 두 번째 도서다. 미국에서 대인관계 분야 5년 연속 1위라는 책인데, 주로 인간의 수치심과 취약성을 연구하는 내용이다. 깊이감도 있고, 퀄리티도 좋고, 문제점 파악과 피드백도 명확하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마저 과감히 드러내며 강연을 하는 저자의 진솔함이 참 매력적이었다. 저자는 삶에 불이 붙으려면 마음가면을 벗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벗어버리느냐, 바로 수치심을 마주하는 것. 엥? 수치스러움을 권장하다니, 당신 제정신입니까? 삐삑, 정상입니다. 저자의 핵심은 이것이다. 내가 무엇을 아는 것보다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 그러려면 마음가면을 벗고 기꺼이 취약해지라고 말한다. 자 그럼 저자가 줄곧 강조하는 취약성에 대해 알아보자.


첫 챕터부터 흥미롭다. 아픈 사람 혹은 문제적 사람을 보고 쟤는 이렇다,라며 규정하는 것은 전혀 치료나 변화를 줄 수 없다는 것. 진단을 내리면 더 큰 수치심이 생기기 때문이란다. 오히려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패턴을 관찰해야 한다. 우리 집 가족 중에는 엄청 예민한 성격을 가져서 무슨 말만 하면 방어적으로 나오고, 하루도 신경질을 안내는 날이 없는 사람이 있다. 이런 케이스를 두고 저자는 말하길,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정의했다. 더 나아가 평범해질 수 없었던 환경에서 살아온 것의 영향이 큰데, 여기서 자신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강하게 박힌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취약함이 곧 나약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더욱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단다. 와 진짜 족집게시네요.


인간이 취약성을 싫어하는 건 어두운 감정과 연결되어서이다. 본능적으로 어두운 감정을 꺼리므로 취약성에 쉽게 뛰어들지를 못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노출하고 나를 내려놓음으로써 사랑도 기쁨도 공감도 얻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쓰는 나의 글이 누군가는 공감이 안된다며 비난과 쓴소리를 한다면 나는 취약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나약함과는 별개이다. 나의 취약함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원천이 되고 간절함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취약한 상태 그대로 세상에 참여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살면서 이런 식으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저자의 관점이 참 신선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고 인정하는 건 내가 나약하다는 걸 증명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코 다른 것이며 그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하였다. 우리는 타인의 진솔한 모습을 원하지만 자신의 솔직함은 보여주길 두려워한다. 어째서 남의 취약성은 용기이고 나의 취약성은 약점이 되는가. 아마도 실패를 두려워하는 현대인의 고질병 때문이렸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이름 좀 날린 사람들은 실패하더라도 끊임없이 도전한 케이스가 많다. 즉 실패해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서이다. 여기에서 용기를 얻고 부족함에서 벗어날 답을 찾게 된다. 부족함은 그만큼 채워서만이 풍족해지고 완전해지는 게 아니란 말이다.


챕터 4가 가장 인상 깊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누구나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는다. 그게 오래되면 마치 원래의 몸이고 피부인 것처럼 돼버려 벗지도 못한다. 저자는 수많은 상담자들이 갑옷과 가면을 벗으라는 제안에 겁먹고 있음을 보았다. 다들 가면 쓴 내 모습이 진짜라고 믿어줬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 기회에 나의 가면도 한 번 돌아본다. 나는 남자치고 살짝 하이텐션이다. 대화를 좋아하고 리액션도 저절로 나간다. 또 타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일할 때는 조급하고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허나 진짜 내 모습은 매우 저텐션에다, 남들이 뭐라 하건 신경 쓰지도 않으며, 느긋한 템포로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내 캐릭터를 알면서도 가면 쓴 채로 지내는 걸 택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게 내 생긴 대로 살려면 무인도 가서 혼자 지내지 않는 이상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 있어 불편함이 너무 많단 말이다. 둘 다 잘하면 좋겠지만 세상에는 얻기 위해서 포기해야 할 게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따라서 가면과 갑옷을 무조건 벗어던지는 건 불가능하므로 자신을 주기적으로 돌아봐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저자는 ‘나는 지금 충분하다‘라는 생각을 가졌을 때 속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 과거에 열등감 덩어리였던 나도 변화하고자 많은 훈련을 했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 연습을 했고, 부족함을 채우기보다 잘하는 걸 발전시켜나갔다. 이 과정에서 조금씩 자신감을 얻었고, 주변에서 좋게 봐줄 때마다 역시 사람은 하기 나름이라는 걸 배웠다. 역시 인생은 실전이라니까.


저자는 강연 중에 영업사원이 질문한 취약성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것이야말로 취약성을 끌어안은 적절한 예라 하겠다. 영업같이 타인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분야에서 신뢰를 주는 것은 신속 정확한 처리도 있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도 포함된다. 나 또한 회사 서비스 담당자 중 한 명으로써 고객들의 난처한 문의를 자주 받는다. 전문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불확실한 내용도 맞는 것처럼 답변했다가 오 안내로 사과드린 적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왜 그런 객기를 부렸나 후회한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다 보니 이제는 모른 걸 모른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사로잡혀서 가면을 써왔는데 오히려 그게 더 힘들기만 했다. 멀쩡한 척, 문제없는 척, 멋있는 척 등등. 이런 건 나하고 맞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가면을 벗어던지니 훨씬 더 마음이 편했다. 저자가 강조한 ‘취약성에 빠져들라‘는 것을 나는 이미 실천하고 있었던 거다. 성공이나 출세가 목표인 분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평화롭게 사는 게 더 중요하거든. 물론 마음 좀 편하게 먹는다고 당장 생계가 해결되고 틀어진 인간관계가 좋아지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가면을 써도 그건 마찬가지다. 아무튼 평생 가면을 벗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상황에 맞게 썼다가 벗을 줄 아는 컨트롤이 먼저겠다. 뭐 이리 복잡하냐며 때려치지 마시고 치킨 한 마리 뜯으면서 천천히 생각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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