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비앤비의 청소부
박생강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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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전에 쓴 <데미안>의 리뷰에서 언급한 나의 바뀐 취향에 대해 이어서 적어본다. 학생 때부터 내가 즐겨듣는 음악 장르는 락이었다. 흔히 말하는 고음병이 도졌었고 그래서 다른 노래들은 전부 시시하게만 들렸다. 그러다 언젠가 <힐링캠프>에서 가수 이선희가 부르는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을 숨죽여 듣다 눈물이 왈칵 흘렀다. 그렇게 죽어있던 감성세포가 깨어나기 시작했고 더 이상 락을 듣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로는 내가 시시하다고 했던 노래들을 즐겨 듣고 있다. 이것과 똑같은 패턴으로 독서의 취향도 변했다. 좋아하는 스릴러 소설만 편식하다 보니 즐거운 독서에도 감성이 죽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장르 불문하고 읽다 보니 반전도 자극도 없는 작품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는 것이었다. 늘 탄산음료만 먹다가 어느 날 전통차의 맛을 알아버린 거지. 그래서 쏘쏘한 이번 작품도 나름의 담백함을 즐기면서 읽었다.


이태원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애인에게 차이는 남자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그는 화풀이로 숙소의 악성 후기를 쓰려고 혼자 방을 잡는다. 뭔가 구차함으로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려는 게 느껴지는데 좀만 더 기다려보자. 남자의 방에 청소부 남청년이 들어와 급 말동무가 된다. 청소부는 깜빵을 다녀와서 이곳의 알바생으로 지내고 있단다. 응 그렇구나. 그러고 헤어지나 했더니 야근할 때마다 에어비앤비로 방을 잡는 남자는 청소부랑 점점 친해진다. 각자의 사연을 주고받으며 삶의 무게를 가늠해보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조금씩 독자의 심금을 휘젓는다. 


멀쩡한 집 놔두고 더러운 숙소로 굳이 가는 건 가족이 불편해서였다. 아버지가 은퇴한 후로 집안 분위기는 더 나빠졌고 각자가 방콕 생활만 한다. 여동생에게 소시오패스라고 불릴 만큼 감정 결핍된 남자는 삶이 무료하다. 현대인의 공감 포인트가 많아서 좋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데 암튼, 아버지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외국 여성이 동업하자는 연락을 받으며 작품 분위기가 변한다. 익명의 상대에게 푹 빠진 아버지를 말리는 가족들. 그게 온라인 사기란 걸 부정하고 돈까지 보내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청소부에게 털어놓는 남자. 그는 말 못 할 얘기들을 누군가에게 꺼낼 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 이어서 청소부도 자신의 사정을 꺼내는데 글쎄, 자신이 쫓기는 신세의 해커란다.


중졸인 청소부는 부모를 잃고 고모네 PC방 알바를 하며 살았다. 거기서 해커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해커 사이트에서 알게 된 블랙 해커의 권유로 중국을 갔다. 나름의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와서 활동하던 중 사업가로 위장한 경찰에게 걸려 빵에 들어갔다. 출소 후에는 그 블랙 해커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얘기였다. 전반의 드라이한 감성이 참 좋았는데 갑자기 시리어스한 전개라니 좀 그렇다. 후반은 청소부의 고해성사라 크게 볼 건 없고, 그 친구 덕분에 주인공이 애인과 다시 잘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대충 요약했지만 딱히 특별한 게 없는 보통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독자의 궁핍한 마음을 미세하게 건드리는 힘이 있다. 갑분싸는 좀 아니었지만.


현대판 상실의 시대라고나 할까. 인물마다 감정 결핍을 앓고 있다. 연애 감정이 없는 주인공은 로맨스를 추구하고, 부모를 잃은 청소부는 타인의 애정을 원하고, 지위를 잃은 부친은 가장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간절히 바랄수록 매몰찬 현실이었다. 주인공만 보더라도 제 뜻대로 악성 후기하나 못 쓰고 있지 않은가. 청소부는 말하길, 계속 살아가려면 자신의 불리함을 감춰야 한다고 했다. 말 그대로 우리 모두는 불리한 삶 속에서 무수한 약점들을 감추고 사느라 바쁘다. 여유가 없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결핍된 채로 그렇게 살아간다. 요즘 같은 때는 더 그렇다. 주인공처럼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털어놓거나, 아버지처럼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는 게 그토록 기쁜 일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공동체 사회에서 개인주의로 사회가 바뀌는 것을 기뻐하는 분도 있겠지만, 각자도생하는 주인공의 가족처럼 되어가는 건 역시 슬프다. 여튼 박생강 작가의 책은 처음인데 은은한 감성이 제법 매력 있었다. 당신도 전통차의 담백함을 느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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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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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내가 맨 처음 읽었던 고전문학이다. 그때는 좋았던 기억은 하나 없고 역시 고전은 어렵다는 좌절만 안겨줬다. 복잡한 내용이 아님에도 뭘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친절하게도 서두에 답이 다 나와있었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각기 다른 모두가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 등등. 온전히 흡수 못한 문장도 많지만 ‘나에게로 가는 길‘을 말하려는 건 충분히 이해했다. 이제야 어디 가서 데미안을 읽어봤다고 얘기할 수 있을 듯. 첫 독서 때는 경치 따윈 보이지도 않던 초행길의 운전 같았는데, 지금은 좋은 울림을 가진 문장들이 눈에 잘 들어온다. 어쩌면 별로라 여겼던 고전들도 훗날엔 대단하다 느낄지 모르겠다. 근데 이 책이 진짜 청소년문학인가? 성장소설치고 지나치게 하이레벨인데. 독일은 어린 친구들도 이만큼 수준이 높은가. 그렇다면 나 너무 자괴감 드는디.


주인공 싱클레어의 유년시절부터 대학생까지를 기록하였다. 소년은 데미안을 만나기도 전에 빛과 어둠의 세계가 공존하고 나란히 붙어있음을 보았다. 늘 그랬듯이 올바른 세계를 추구했지만 금지된 세계 또한 매력적이어서 거짓말을 시작으로 어둠에 발을 담근다. 그리고 기나긴 방황과 출구 없는 절규에 휩싸인다. 죄악의 늪을 인지한 순간 자신의 공존하던 두 세계가 분리됨도 느낀다. 화평과 안정을 주던 삶의 모두는 먼지가 되었고, 자신은 어느 축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과 나그네가 된 것이다. 어둠에 속한 것들이 왜 그렇게 매혹적인지 또 왜 금하는지를 직접 느껴보기 전까지는 감정 없는 글자에 불과하다. 헤세가 말하는 인간이란 그런 생물이다. 헤세는 한 사람을, 그것도 어린아이의 세계를 지독히도 파괴해버린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응당하다는 당연한 말보다 그것을 더 당연하게 말하고 있다. 고작 거짓말 하나 했을 뿐이나 소년에게는 감당 못할 형량이었다. 어둠에 잠식된 아이는 손닿는 곳에 구원의 손길이 있는데도 쉽사리 손을 뻗지도 못한다. 이것은 남녀노소 마찬가지인 인간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소년은 데미안의 도움으로 늪에서 탈출한다. 가족에게 죄를 고백하고 서둘러 아벨의 부류로 돌아간다. 데미안은 그의 구원이었지만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성경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제멋대로 해석하는 괴짜였다. 아벨보다 가인을 변호했고 금지된 세계와 그 부류도 올바르다고 주장했다. 그의 해석은 인류가 신성모독이라고 못 박아둔 전부를 완벽하게 뒤집었다. 소년은 아벨이고 데미안은 가인이었다. 자신을 죽인 자와 어울릴 수 없다는 두려움과 그의 해석이 주는 기쁨의 공존을 느낀 싱클레어. 이후 몇 년간 데미안을 멀리한 그는 아벨의 부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방탕한 삶을 산다. 그러면서도 데미안과의 끈을 놓지 못한 것은 자신이 그에게 구원받았던 일 때문이었다. 결국 그에게로 돌아온 싱클레어는 자신도 가인의 표를 지닌 자임을 인정하게 된다. 더 이상 데미안은 괴짜가 아니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독자들은 데미안의 해석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성경에는 악을 선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구절이 있는데 딱 데미안에게 해당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전에는 나도 그의 이교도적인 주장이 불편해서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때는 사실 뭘 말하려는 건지 파악도 못했다. 두 세계가 모두 거룩하고 존중해야 한다? 각자에게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이 다르다? 금지된 것이 누군가에겐 허용되기도 한다? 이 난해하고 아리송한 말들을 서두에 적힌 답에 기준하여 본다면 쉽게 이해된다. 선에 속한 자나 악에 속한 자나 다 같은 심연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찬송가를 부르는 이에게는 쉬즈곤이 금지된 것이지만 둘의 뿌리는 같다. 누군가에겐 허용된 것으로, 누군가에겐 금지된 것으로 완전한 자신을 찾고 만난다는 말이다. 좀 더 쉽게 풀자면 이렇다. 가인에 대한 해석은 분명한 신성모독이다. 그 해석을 불쾌해하는 부류도 있고 색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여 흥미롭게 보는 부류도 있다. 후자인 싱클레어는 금지된 것이 허용된 것이고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은 셈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고는 자칫 강도나 살인 같은 범죄도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고 오해할 수 있다. 나를 찾는 길을 방해한다면 그건 허용된 것이 아니라 금지된 것이니 모쪼록 잘 분별해야 하겠다.


싱클레어가 탕자 된 것은 데미안의 영향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내 눈에는 소심한 범생이가 늦바람이 든 정도로 보였다. 남들과 어울린다 한들 그들은 자신보다 낮게 여겼고 본인도 자기 경멸에 빠져 살 만큼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또는 두 세계에 걸쳐있는 주인공이었다. 그러다 이상형을 발견하고 성욕에 눈을 뜬 뒤로 다시 정결한 아벨이 된다. 자신을 거룩하고 경건하고 순결하게 만드는 것이 추악하고 음탕하고 쾌락적인 것이라니. 가인의 표식을 가진 그는 데미안의 말을 이해하여 방탕을 끊고 자기 성찰에 들어간다. 이 책으로 헤세는 인간이 가진 무한의 가능성을 언급하려던 게 아닐까 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닫혀진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관점을 배운다. 그리고 교회 오르간 연주자를 통해 닫혀진 세상에서 도약하는 힌트를 얻는다. 헤세는 데미안과 연주자를 통해서 참 인간이 되는 과정을 새와 알의 상관관계로 반복 설명한다. 진정한 나 자신이 되려면 내 안의 기둥이 무너져야 진짜 세계가 펼쳐진다고.


데미안은 알을 깨고서 나오라고, 세계를 깨뜨려서 거듭나라고 했다. 오르간 연주자는 두려움을 이기고 계속해서 날아오르라고 했다. 온몸으로 부딪혀야만 알은 깨어지고, 죽어라 날갯짓을 해야만 비상할 수가 있다. 헤세가 말하는 인간이 지닌 무한의 가능성은 모든 힘의 근원과 연결돼있고 그 독자적인 힘으로 얼마든지 도약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두려움과 위험성을 고려해서 현재를, 알 속의 세계를 만족해하는 자들도 많다. 헤세는 스스로를 개척하고 세계를 바꿀 마음이 없는 자들을 안타까워했던 걸까.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건 분명 두려운 일이다. 이제까지 내가 살아왔던 게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 테니까. 하지만 오늘의 내가 어제와 다르다 한들 부정당할 이유도 실망할 이유도 없다. 여러 경험과 실패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시행착오를 겪어서 나의 참 모습을 찾아가는 연습을 했을 뿐이다. 나만 해도 취향, 입맛, 패션, 취미, 문화, 가치관 등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한때 이것이 나라고 정의했던 것과 전혀 다른 지금의 내 모습이 오히려 더 좋다. 나도 싱클레어처럼 내 몸에 맞는 옷을 찾았기 때문에. 진짜 자신을 찾게 된다면 좋아하는 것에 자극을 받아 엔돌핀이 돌고 도는 게 아니라 공허했던 영혼이 풍요로워지고 안정감을 갖게 된다. 경험해보지 못한 분들에게 어서 알과의 투쟁을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번데기는 나비가 될 준비를 해야지, 송충이 시절을 그리워해선 안된다. 먹고살기 바빠죽겄는데 뭔 나비 타령이냐 하지 마시고 공허한 내 영혼을 진지하게 돌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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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모자 2021-02-22 03: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헤세가 융의 심리 상담을 받고 쓴 책 중 하나가 <데미안>입니다. 융 심리학 해설서인 이부영의 <그림자>를 읽어보면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나눈 대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에요. 꼭 읽어보세요~

물감 2021-02-22 11:10   좋아요 0 | URL
정보감사합니다. 기회되면 찾아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비종 2021-02-27 0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2018년 12월에 썼던 저의 리뷰를 읽고 왔습니다. 공통적인 생각도 군데군데 있지만 오늘 올린 리뷰와 접근 방식부터 다르더군요. 그때의 리뷰가 퀼트의 천 조각 몇 개였다면 이번에는 어설프게나마 장바구니 하나를 만들어낸 느낌이랄까요. 2년을 지나오면서 많이 성장한 제가 기특했습니다.ㅋㅋ^^;
저 역시 청소년 문학의 고퀄에 놀랐다는 ㅎㅎ <어린 왕자>와 비슷한 맥락일까요. 갈수록 보이는 요소들이 창대해지는 책입니다.

거짓말 하나에서 시작해서 늪처럼 빠져들어가는 과정의 심리묘사가 적나라하더군요. 그 상황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하며 측은하면서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고작 한 발짝처럼 보이는 간극을 넘는다는 게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달콤과 씁쓸에서 갈등하다 다크초코 맛의 매력을 알아버린 싱클레어~

저는 데미안을 카인과 아벨의 복합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벨과 카인을 둘 다 인정하는 존재라구요. 신과 악마가 결합된 아프락사스를 상징하는 인물이랄까요.
근데 카인을 가인이라고도 부르는가 봅니다. 종교 쪽은 잘 몰라서^^;;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분별해야 한다는 부분. 저도 인상적으로 읽었어요. 편하게 아무 생각없이 다른 이들을 따라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요. 결국 이 말들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라는 메시지에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더라구요.

소심한 범생이 늦바람ㅋㅋㅋ 공감 척!입니다~
해설을 보면 오르간 연주자가 헤세와 상담하며 정신분석 치료를 담당했던 박사의 아바타 정도의 인물로 언급되더라구요. 연주자의 비중도 만만치 않게 크잖아요. 데미안이 달변이라면 피스토리우스는 다변?ㅋㅋ

어디서 본 지 기억은 안나지만 알의 과학적 구조에 대한 설명이 생각나네요. 밖에서는 잘 안깨지고 안에서 힘을 주어야 잘 깨지게 되어있다고. 은근 철학적인 구조죠? 알까기가.ㅎㅎ

변할 것 같지 않던 내가 돌아보면 변해있더라구요. 몇 십 년 전에는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거든요. 과거의 저는 왜 그리 오만했을까요. 세상 다 아는 것처럼 초월한 인간이라도 된 듯 겉멋만 들어있었어요. 외형적인 면도 그렇지만 특히 내면의 변화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선명해집니다. 절대적인 고정불변의 것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나 싶어요.
알과의 투쟁. 이 말이 참 좋네요. 살아오면서 깨뜨렸던 몇 개의 알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뭐가 그리 어려웠던 건지. 깨고 나면 별것도 아닌데 말이죠.^^

다시 읽으니까 더욱 좋았습니다. 이런 기회를 가져다주신 물감님께 감사드려요~^^

물감 2021-02-27 22:07   좋아요 4 | URL
전에 쓰셨던 리뷰도 읽어봤는데 이번에 쓰신 글과 분위기가 확 다르던데요? 역시 고전은 재독을 해도 새로운 의미를 가지나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제 경우를 생각하면 오히려 성인일때 읽는게 더 이해가 잘되니까 꼭 어릴때 읽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봐요ㅎㅎㅎ

저는 초반 내용이 가장 좋았어요. 싱클레어가 금지된 세계를 알게 되고 자기 파괴에 빠지는 과정이요. 정말 별거 없는 내용인데 웬만한 심리스릴러 소설보다 흡인력이 엄청났어요. 어린 아이의 고뇌가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해지잖아요. 게다가 등장한 데미안이 금지된 세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독자를 확 뒤집어 놓는 것도 너무 좋았고요. 이 책이 왜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지 실감했습니다^^

확실히 종교의 색이 짙은 작품이죠. 성경을 잘 모르는 독자에겐 이해가 안되는 내용도 많고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만이라도 따로 찾아보신 뒤에 다시 읽어보시면 또 새로울 거에요 ㅎㅎ 한글 성경에서는 ‘가인‘이라고 표기되어있습니다. 카인과 같은 말인데 성경 읽는 사람에게는 가인이 더 익숙하죠 ㅋㅋ

작품이 주는 여러 메시지가 있지만 저는 철저하게 ‘나를 찾는 여정‘에 포커스를 두고 읽었어요~ 내가 누군지 모를때는 롤모델을 참 많이도 삼았었어요 ㅋㅋㅋ 생각해보면 늘 나와 정반대인 타입들을 동경했었는데 알과의 투쟁을 할때마다 남을 닮아가려는걸 그만두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다 그만두고보니 지금의 제 모습을 찾았네요.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깊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참 고마운 작품이네요 ^^ 저도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함께해주신 나비종님께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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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를 소재로 한 작품도 꽤 자주 출간되는 듯하다. 역사를 함부로 각색해선 안된다는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나오는 걸 보면 계속 눈길이 가는 선악과 같은 소재가 분명하다. 이 책도 그렇고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도 그렇고, 작가들은 은폐 사건들을 수면 위에 드러내려는 사명으로 펜을 든다지만 솔직히 그 사명만으로 책을 썼다곤 생각되지 않는다. 특히 민감한 역사를 다룰수록 더 그러한데, 어쩌면 세상 때가 많이 묻어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현대인들은 역사 자료와 정보로 나치 정권의 폐해를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책을 쓰려거든 알려진 내용은 간소화하고 주제를 부각시키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한다. 그것이 모호하면 주제 파악은커녕 나치의 독재나 전쟁의 아픔 같은 부수적인 것에만 주목하게 된다. 아쉽지만 이 책도 엄중히 말해서 후자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제작진이 일 잘하기로 소문난 것은 주도면밀하게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서가 아니라 문제를 다각도에서 살펴보고 이해하려는 접근 방식에 답이 있다. 팩트만 전달하는 뉴스는 시청자의 생각을 가둬두기 때문에 개인의 의견을 확장시키지 못한다. 반면에 <그알>제작진은 육하원칙 중 ‘왜why‘에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시청자가 자기만의 생각으로 사건에 개입할 기회를 준다. 그러면 사태를 인지한 시청자는 자연스레 문제에 참여하게 되고 각자의 생각이 모이다 보면 썩 괜찮은 해결안도 나오곤 한다. 문학도 이래야 한다. 독자가 직접 개입하도록 유도하는 저자의 노력이 필요하다. 안 그러면 독자는 저자가 떠먹여주는 것만 먹게 되고 그래서는 뉴스하고 다를 게 없다. 르포 형식이라면 모를까.


작가가 실제 했던 히틀러의 시식가 이야기를 각색했다. 히틀러의 음식 시식가로 강제 발탁된 열 명의 여자는 총통이 먹을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아닌지를 몸소 증명해야 한다. 죽을지도 모르는 음식 앞에서 육체의 배고픔은 너무나도 솔직하다. 이렇게 나치는 식욕이라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해서 그녀들을 사형수로 만든 것이다. 나치의 추종자들은 총통의 은총이라 하겠지만 로자 일행은 생존이 더 중요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제는 욕망과 싸우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기억해두지 않으면 옆길로 샐 수 있으므로 주의할 것.


나치는 가족을 빼앗고 삶을 짓밟고 희망을 지웠다. 그 모든 일의 원흉인 총통의 목숨을 구해야 하는 로자. 어떻게 하면 목숨도 지키고 적들을 이길 수 있을까. 투쟁의 대상은 나치 일원이나 배고픔이 아니라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시스템이다. 절대 바뀌지 않을 그 상황 가운데 갑작스러운 로자의 반격이 시작된다. 남편의 실종 소식에 이성이 끊어져 버린 그녀는 죽음을 향해 거침없이 뛰어든다. 친위 대원도 무섭지 않았고 총통의 음식도 거리낌 없이 삼켰다. 아이러니한 게 살고 싶다는 소망보다 죽고 싶다는 바램이 욕망과 맞서는 반작용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공포에서 해방된 로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치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중반부터는 식욕의 이야기에서 성욕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간다. 전선에 투입된 남자들의 부재로 여자들은 남자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로자 역시 친위대 장교와 몸을 섞으며 정죄를 고독과 맞바꾼다. 죽음에도 저항했던 사람이 성욕 앞에 무릎 꿇은 것이다. 그녀는 그토록 자신이 증오하는 나치의 일원과 밀회하면서 오염된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식욕은 죽음과 맞닿아있다지만 성욕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쾌락과 후회를 반복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그녀는 끝내 지옥을 택한다. 될 대로 돼라,가 아니라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한 것인데 앞전의 모습과 너무 상반되어서 이질감이 든다. 작가가 정녕 실존 인물을 생각하며 이런 설정을 했단 말인가. 이 책은 당사자의 일화를 빌려서 인간의 존엄성을 재조명하는 게 목적이다. 그런데 작가는 목적과 주제를 방해할 만큼 선을 넘고 있다. 아무리 각색이라지만 돌아가신 분에게 큰 실례이다.


초중반의 식욕 파트에서 보여준 페이소스는 정말 대단했다. 아쉽게도 성욕 파트부터는 그 맛을 볼 수가 없었다.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도 이와 똑같았다. 메인 소재에서 서브 소재로 넘어가면서 방향이 틀어지고 탄력도 약해지고 재미도 급감한다. 이런 건 용두사미도 아니고 빛 좋은 개살구에 가깝다. 그럭저럭 끝이 났지만 김빠지도록 못 살린 스토리였다. 이러니 주제를 파악 못하는 독자 탓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튼 이 작품은 다시 한 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한다. 우리는 여태껏 삶의 가치를 높여주는 ‘무언가‘에만 주목해왔다. 허나 삶은 그 무언가가 충족되어야만 제 역할을 하고 존엄성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몰아내려는 필사적인 본능이, 살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있는 한 그것만으로도 삶의 가치는 주어진다. 즉 가치 없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다.


이 책도 결국 사랑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인류를 일으키고 구원하는 건 오직 사랑뿐이라는 흔한 결말. 이런 서사물들은 어쩜 그렇게 똑같은 수순을 밟는걸까. 이젠 그만 바뀔 때도 된 거 같은데 말이다. 작가들이 유연한 사고를 갖지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여튼 이래저래 쓴소리를 했지만 스토리텔링도 나쁘지 않았고 페이소스도 훌륭했다. 저자의 차기작이 나오길 기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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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 김훈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4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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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의 독서 목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내 작품을 많이 읽는 거고 하나는 유명한 작품에 도전하는 것이다. 나의 청개구리 기질로 인해 남들이 다 읽는 책은 일부러 안 읽었는데, 그래도 회자되었던 작품들은 읽고 죽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읽은 책도 남녀노소 다 읽었던 김훈 작가의 대표작이다. 그의 명성은 질리도록 들었다. 일본에 하루키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훈이 있다면서. 그러면 더더욱 내 스타일은 아닐 터. 나는 필력보다 스토리텔링을 더 중시하거든. 의무적으로 읽긴 했지만 충무공의 칼이 부르는 노래를 이제라도 들어서 다행이었다. 이 책은 젊은 친구들이 넘기엔 버거운 허들이다. 산전수전을 겪지 않은 독자가 그의 생애를 과연 흡수할 수나 있을까. 이 작품의 리뷰를 이순신과의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옮겨본다.


* 해군으로써 먼 조상 수병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 수군의 몸은 내 몸이며 내 몸은 수군의 몸이니 나 역시 자네에게 영광이다.


* 이 책은 ‘칼의 노래‘라는 충무공 일대기 입니다. 충무공이 직접 기록한 것처럼 쓰였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신을 기리며 적은 것이니 이견은 없다. 다만 신을 얌전한 고양이처럼 적었던데 본디 나의 성정은 점잖지 않다. 말투도 저서와 전혀 다르다.


* 똑같은 말투십니다. 충무공을 성웅이라 부르는 이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먼저 신은 충무가 아니다. 책을 살피면 알 것이다. 후세대가 떠받들 만큼 내 공로는 크지 않다. 신을 신격화하지 말라.


* 책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셨는데 정녕 임금을 원망하지 않았습니까.
- 장수를 따르지 않는 부하가 없듯 임금을 거스르는 무인이 없다. 사정이 무엇이든 명령 불복종은 임금을 기만한 죄이니 형벌은 마땅하다. 이 몸의 고통으로 병사들의 목숨을 보전했으니 그거면 되었다.


* 출옥 후의 상황을 들려주십시오.
- 히데요시가 온다는 풍문으로 임금의 죽음을 면사 받은 몸이었다. 무인에게는 치욕이었으나 사지를 고를 수 있었으니 부름에 답하였다. 임금의 관심은 오로지 죽인 적의 머릿수였다. 수군에게 육군과 합류하라는 알 수 없는 명을 내렸고, 혼란 중에도 권위를 더 찾았다. 조선의 존망은 전쟁보다 군 내의 부조리에 있었고, 신의 적은 바다 건너에만 있지 않았다. 나는 적에게도 적이요, 나라를 갉아먹는 자들에게도 적이었다.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나의 칼은 울부짖었다. 아무리 적을 베어도 칼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 작품의 제목이 심정을 잘 대변하는 듯합니다. 전쟁 당시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 적들과 내통하는 백성, 부하를 팽개친 탈영 장수, 부녀자를 겁탈하는 군인. 전쟁은 질서를 파괴했고 조선의 성곽은 안팎으로 무너져내렸다. 해상에서 적을 베면 육상에서 피난민들이 죽었다. 적에게 죽느니 나의 칼로 죽여달라며 애곡하는 백성도 보았다. 적은 백성을 포로 삼아 조선의 정보를 훔쳤고, 포로들을 적선의 격군으로 세워 야습해왔다. 포로 된 백성은 제 손으로 본국을 쳐야 했고, 나는 적선에 있는 백성까지 멸해야 했다. 죽음은 끝이 없었다. 적을 베는 나의 칼이 죽음까지 벨 수 없음에 통탄했다. 


* 충무공의 진짜 고뇌는 무엇이었습니까.
- 출옥 후 신은 더 이상 충신이 아니었다. 임금은 여전한 욕망으로 신을 주시했다. 그러나 명을 따르면 적에게 죽고 명을 어기면 임금에게 죽을 것이었다. 무사가 되어 임금의 칼에 죽을 수 없었다. 전쟁과 조정의 부조리함에 칼은 여전히 울었고 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민족을 구하려면 내가 죽어선 안되었다. 승리보다 백성의 안위를 위해 칼을 들었다. 군인에게 불필요한 연민이 버팀목이었다. 칼에 새긴 글자처럼 바다 위를 적의 시체와 피로 염했지만 다음날이면 바다는 흔적을 지워 태초로 돌아갔다. 적도 죽고 부하도 죽고 민족도 죽었다. 거듭된 승리가 허망함을 밀어내지 못했다. 위관들처럼 신도 헛것을 쫓았는지 모른다.


* 마지막 전투에 대해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 죽음을 예견했더라면 진즉 진린을 베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적선의 침투도 없었을 것이고 무수한 죽음도 막았을 터. 바다에서 자연사를 맞았으니 사지로는 썩 나쁘지 않았다. 다만 신의 죽음으로 장졸들이 동요되어선 안되었다. 나의 말이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다. 백성에게 된장을 나눠주고 온 게 다행이었다.


* 끝으로 이제라도 유언을 남기신다면.
- 이미 신의 일기로 적었으니 유언은 됐다. 다시 말하지만 신을 성웅이라 일컫지 말라. 왜군과 싸우다 죽은 수군의 하나로 기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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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21-02-11 0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의 올해 독서 목표의 첫번째 과녁이었군요. 명성은 익히 들어보았으나 아직 안 읽어본 책입니다. 쓰신 리뷰를 보니 제 취향은 아닐 듯하네요.^^; 한 사람의 일대기 형식으로 캐릭터에 집중한 책일 듯은 하지만 총 만큼은 아니라도 피 질질 전쟁은 냄새부터 영~~ㅎㅎ 그나마 감질나는 독서 중에서 필이 꽂히지 않으면 유명한 작품이래도 손이 잘 안가더라구요.

평전 형식의 책은 저자의 관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크다는 점이 위험한 매력인 것 같아요. 어느 정도 깊이가 있는 독자라면 자신의 생각과 저자의 것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느낄 텐데요,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오류가 있는 각인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으니까요. 물감님께서도 그런 점에서 젊은 친구들에게 버거울 수 있다고 우려하신 거겠죠? 네가 그냥 커피라면 산전수전러는 티오피?ㅋㅋㅋ

예나 지금이나 내부의 적이 더 무섭네요. 리뷰에 쓰신 내용만으로도 이순신의 강한 성정, 신념, 당시 상황이 그려집니다. 명령 불복종 어쩌구와 된장 얘기를 보니 테스형이 떠오르네요.ㅎㅎ 그런데 말입니다ㅋ ‘전사‘도 ‘자연사‘라 말할 수 있는 건지요?^^;;

물감 2021-02-11 08:41   좋아요 3 | URL
저도 제 스타일은 아닌 책이었는데요, 초중반까지는 이순신의 고백록처럼 진행되다가 갈수록 특파원의 생중계처럼 공기가 변합니다. 처음처럼 분위기를 유지했다면 별5개가 아깝지 않았을건데요ㅎㅎ

한국사에 문외한인 저에게도 눈에 거슬리는 설정이 보이더라고요. 작품을 위해서 그런것이려니 하다가도, 말씀하신대로 각인될 수 있겠더군요. 그리고 평탄하게 살아온 독자가 이순신의 고뇌를 알면 얼마나 알까 싶어요. 저도 마찬가지죠^^

자연사는 작중 이순신이 직접 한 말입니다. 책을 읽어야만 공감하는 대목이죠. 된장도 그렇고요ㅎㅎ 그나저나 김훈 작가도 필력이 대단하네요. 순수하게 글맛이 당겨서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져요. ^^
 
도로변 십자가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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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개인 정보 피해를 입고 민원을 거는 고객 전화를 받곤 한다. 가장 많은 민원은 명의 도용으로 회원가입이 되었다는 것, 두 번째는 아이디가 해킹되어 금전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런 고객들은 하나같이 본인은 잘못없다고 하는데 분명히 어딘가에서 개인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피해자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알다시피 나 혼자 운전을 잘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 여러 온라인의 피해사례 중 가장 큰 이슈라면 자살 사건이 아닐까. 몇 년 전, SNS 계정에 본인의 노출 사진을 올리던 아이돌 가수가 악플들에 시달리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악플러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거 보통 심각한 게 아님을 느꼈었다. 이 같은 온라인 문제들과 위험성에 대해 스릴러소설로 경고하는 제프리 디버의 작품을 읽었다. 지금까지 읽은 디버 작품 중에서 이 책이 가장 스타일리시했다. 증말 팬심을 제외하고 리뷰를 쓰기가 불가한 그레이트 작가다.


도로변에 십자가가 생길 때마다 발생하는 살인 미수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게임 중독인 남학생의 행방불명. CBI 요원 캐트린 댄스는 한 파워블로그를 통해 소년이 용의자가 된 경위를 파악한다. 자신을 마녀사냥한 블로그 회원들을 노리는 소년의 계획을 알고 다급해진 댄스 요원. 한편 1편에서 환자의 안락사를 도운 게 간호사인 댄스의 모친으로 밝혀져 대중의 비난을 받는 댄스와 가족들. 소년을 찾기도 바쁜데 가족도 보호해야 하고 오해도 풀어야 하는 초난감한 상황. 여태껏 국가와 시민에 헌신해온 그녀는 이대로 모두의 숙적이 되고 마는가.


이번 편의 주 무대는 가상세계, 즉 인터넷이다. 카페, 블로그, SNS, 이메일, 메신저 등등. 모든 온라인 활동 기록이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고 위협하는 화살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삶의 질이 엄청나게 향상되었지만, 반대로 입을 수 있는 피해의 크기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 책은 온라인의 여러 가지 위험성 중에서 마녀사냥 문제를 집중 공략하고 있다. 악플러들이 그럴싸한 거짓 정보를 올려놓으면 음지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다. 그러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것이고, 더 이상 진실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중요한 걸까.


보이지 않는 온라인 상대 앞에서 댄스의 동작학은 무용지물이었다. 거기에 모친의 일까지 겹쳐서 하는 일마다 브레이크가 걸렸다. 소년의 범죄를 멈추기 위해 댄스는 블로그의 중단을 요청했으나 블로거는 표현의 자유를 운운하며 협조를 거절했다. 악플러들이 피해자를 양산하는데도 자유를 들먹인다면 소년의 이유 있는 살인도 타당한 범죄가 된다. 책임지지도 못할 행동에 무슨 자유가 있고 권리를 외친단 말인가. 블로그가 주는 권력에 취한 블로거는 위급 상황 중에도 자신의 목숨보다 블로그에 올릴 안내문 생각부터 한다. 정신 나간 사람 같겠지만 현실은 이것보다 더하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야 당연한 건데, 이 블로거처럼 뭐가 우선인지 분간도 못한다면 그야말로 인터넷의 폐해일 것이다.


작가는 가상세계의 범죄를 현실로 연결하여 개인의 부주의하고 무책임한 행동이 대중의 폭력을 낳고, 개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순환을 지적했다. 그것이 현대에는 흔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보니 다들 무감각해져있다. 그래서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보라고 이 작품을 쓴 게 아닐까. 근데 사실 이런 건 디버의 스타일이 아니다. 지금껏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룬 적은 많았어도 그것을 사회적 이슈로 주제 삼지는 않던 디버였는데 이번에는 정치/사회의 색이 짙은 편이다. 기존의 디버 스타일을 원했던 팬들에게는 다소 어색하고 낯설고 시큰둥할 수도 있겠는데 내게는 작가의 새로운 매력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믿어야 할 사람을 의심하고 엉뚱한 사람을 믿어버린 결과 댄스의 모녀관계는 금이 가고 피해자는 속출했다. 그렇게 반복된 실수와 후회 속에서 자신을 넘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 깨닫고 중심 잡는 법을 터득한 댄스. 전편에 비해서 활약이 대폭 줄었지만 수사관으로서, 또 개인으로서 급성장을 보여준 작품이다. 스릴러소설에서 사건과 상황이 바퀴 역할이라면, 인물의 갈등과 심경 변화는 엔진 역할을 하는데 제프리 디버는 이 균형을 기가 막히게 잘 잡는다. 난장판인 사건과 난도질된 심정 가운데 피어나는 감정의 교차...


인간의 악을 연구하는 정유정 작가는 인간의 심연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빛이 들지 않는 숲이 있는데, 그곳의 야수들이 어떤 계기로 봉인해제가 될 때 인간의 폭력성이 깨어난다고. 그 계기는 타인에 대한 시기나 질투일 수도 있고, 자기방어에서 나올 수도 있다. 아직도 게임에 중독된 청소년들이 범죄자가 되는 거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1차원적인 논리대로라면 프로게이머는 죄다 잠재적 범죄자란 말인가. 정유정 작가의 말대로 폭력적이게 된 계기를 살펴야 한다. 소년은 온/오프라인에서 마녀사냥을 하지 않았나. 그렇게 소년을 향한 대중의 화살은 고스란히 대중에게 돌아와 모두를 떨게 했다. 소년의 두려움이 대중의 몫으로 된 것은 결국 인과응보였음을 잊지 말자. 인간을 죽이는 괴물과 그것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중 누가 더 잘못했을까. 잘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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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21-02-03 01: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 글을 올리다 보면 묘해질 때가 있습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을 경계로 두 개의 세상에 접속해있는 기분이랄까요. 인터넷은 손끝으로 자신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세상인 거죠.
글을 올릴 때마다 종종 생각해요. 인터넷으로 만들어내는 세상이 실제와 얼마나 가까울까. 이게 진짜 나인가. 내가 바라는 모습의 나인가.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걸까. 진실인 듯하지만 진실이 아니기도 한 공간. 그 이중성과 몇 번의 클릭만으로 삭제가 가능하는 점에서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기분이 들어요.

마녀사냥 역시 불안정한 정보로 둘러싸인 외곽에서 출발해서 몇 번의 재가공을 거치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아요. 최초로 재가공한 이의 잘못일까, 도미노로 조금씩 툭툭 던지는 의견들로 힘을 보탠 사람들의 잘못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불안정한 성곽 자체를 지은 이의 잘못일까요. 쓰러지기 직전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람만의 잘못은 아닐테니까 사실 콕 집어내기가 애매하거든요.

정유정 작가는 성악설의 입장이군요. 숲속 야수의 봉인해제로 비유한 내용에 공감이 갑니다. 소설에서 말씀하신 소년의 본성보다 계기에 무게를 두어야한다는 입장이군요. 대중의 화살이나 프랑켄슈타인의 창조 행위도 마찬가지 맥락이구요.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이거예요. 누구도 내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요.^^

물감 2021-02-03 21:52   좋아요 1 | URL
방금전까지 댓글 길게 썼는데 튕겨서 날라갔어요ㅜㅜ 어우 스트레스...

독서활동은 남한테 잘보이려는 의도땜시 온전한 나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고픈말 다 하는 저역시도 그렇고요ㅋㅋ

나비종님도 악에 관심이 참 많으셔요^^ 계기에 대한 관점이 신선해서 적어봤어요. 남을 판단하지 말것,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반대로 남들은 내게 관심이 없다는 말도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