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워크
스티븐 킹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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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삼대 욕구는 식욕, 성욕, 수면욕이지만 이게 부족하다 해서 욕구불만이 생기진 않는다. 그럼 언제 욕구불만이 생기느냐. 집 없고, 직장 없고, 자신이 쓸모없을 때다. 적어도 내가 사는 현대에서는 그렇다. 이 중에 하나라도 가지기 어려워 N포세대가 생겨났고 포기하면 편하다는 관념에 지배되기 시작했다. 이미 수 년 전에 시작된 과도기가 해마다 갱신되는 한국은 참 어메이징한 국가이다. 서두에 이런 우울한 얘기를 꺼낸 것은 이번에 나온 스티븐 킹의 신작이 한 사람의 인생 파탄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어서이다. 인생은 외로운 원맨쇼라 했던가. 과연 그 말이 딱이었다. 


남자의 집과 직장이 있는 지역은 고속도로 확장공사가 들어설 예정이다. 회사 건물도, 집도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 긴 시간을 함께한 남자는 회사도 집도 비켜줄 생각이 없다. 결국 회사에 사표 내고 아내와도 갈라섰지만 절대 마음은 꺾이지 않는다. 불행을 지긋지긋하게 겪어온 주인공의 불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모든 불행을 끌어안으며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한 그는 혼자서 세상을 왕따시키기로 결심한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자기 연민, 자기혐오가 너무나 강렬해서 그것만 보다가 진짜 핵심을 놓치기 딱 좋다. 과연 작가가 한 개인의 불행을 보여주려고 이런 장편의 글을 썼을까. 흔한 내용일수록 심드렁하기보다 작가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나는 이 책의 포인트를 크게 두 가지로 간추렸다. 첫 번째는 인생의 굴레이다. 사춘기가 뭔지 모르는 친구들도 세상의 불공정함을 잘 안다. 인맥과 관계, 경험과 직감, 운과 노력, 하다못해 타이밍까지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이 세상은 우리가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SF 영화 세트장 같은 것이다. 따라서 왜 나는 불행할까,가 아니라 원래 인생의 사이클은 불행한 게 정상이다. 심지어 잘 살고 멀쩡한 사람도 불행하다고 말하거든. 하물며 이 책의 주인공은 어떤가. 직장을 잃고, 가족과 멀어지고, 터전도 뺏기게 생겼다. 철저하게 고립된 그는 술과 약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작가가 너무 진흙탕에 쑤셔 넣는 기분도 들지만 그보다도 정제되지 않은 삶의 날것을 골고루 먹여주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마치 세상은 원래 시궁창이고, 인간은 발버둥 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듯하다. 사실 이 같은 메시지는 타 작품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 더 크게 와닿는 이유는 주인공이 스스로 고립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같은 남자로서 참 마음 찢어진다.


두 번째로는 주인공의 부성애이다. 오래된 집에 온갖 추억이 깃들어서 차마 떠날 수 없다는 마음은 이해한다. 그런데 직장도 관두고 아내와 헤어지면서까지 해서 집을 지키려는 그의 행동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화염병 던지고 총질하는 무법자가 되어 정부와 싸우려는 건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데 관점을 달리하면 이 남자의 외로운 투쟁이 옳지는 않아도 납득은 된다. 사람은 누구나 제 목숨만큼 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다. 주인공처럼 소중한 기억일 수도 있고, 굳건한 신념이 될 수도 있고, 나를 살려준 은사의 말 한마디가 될 때도 있다. 반대로 그것들이 당사자의 발작 버튼이라서 건들었다간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 평소 조용한 사람이 빡 돌면 더 무섭듯이 말이다. 그럼 다시 작품 얘기로 돌아와서, 남자가 지키려던 건 병으로 떠나버린 자식과의 시간들이었다. 아들을 지키지 못하고 그렇게 보냈는데, 이제는 집까지 못 지키고 떠나보내게 생겼다. 그에게 집은 곧 자식이나 다름없으며, 집을 지키는 건 곧 아들을 지킨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자식을 빼앗으려는 정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그의 저항은 당연한 거였다. 이걸 캐치하지 못하면 주인공을 그저 정신 나간 사람으로만 보게 될 테니 주의하시길.


놓치면 안 될 또 한 가지는 바로 아내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는 과정이다. 별거 중에도 식을 줄 모르던 아내 사랑이 갑자기 확 식은 건 아내가 아들에 대한 미련을 접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한데 아내는 벌써 아들을 보내줄 준비가 끝나있었다. 아내는 이만 아픔을 정리하려고 집을 나간 거지만 그에게는 자식을 내다 버린 무정한 여자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아내가 다른 누굴 만나서 새 출발을 한다 해도 아무렇지가 않아졌다. 그리고 드디어 자살할 생각도 품게 된다. 어쩌면 그의 발작 버튼을 누른 건 아내였는지도 모른다. 과연 주인공의 말대로 삶이란 그저 지옥으로 가기 전의 준비 장소에 불과한 것일까.


킹 슨생은 본인만의 확고한 철칙과 철학을 가진 글쓰기로 유명하다. 하루키는 ‘문장의 울림‘을 중요시하는 듯하고, 스티븐 킹은 ‘문단의 개연성‘을 더 신경 쓰는 듯하다. 그래서 하루키의 세련된 글은 담백한 순문학에 어울리고, 킹의 계산된 글은 치고 빠지는 장르문학에 적절하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재밌게도 장르소설에 순문학 감성을 입혀놓았다. 정말 스티븐 킹이 괜히 천재 작가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장르소설이 다루는 휴머니즘은 독특한 맛이 있는데, 이런 게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보게 해준다고나 할까. 부디 당신도 이 거칠고 퍽퍽한 작품 속에 숨겨진 따스함을 꼭 발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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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4-17 23: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문장의 울림‘을 중요시하는 듯하고, 스티븐 킹은 ‘문단의 개연성‘을 더 신경 쓰는 듯하다. 그래서 하루키의 세련된 글은 담백한 순문학에 어울리고, 킹의 계산된 글은 치고 빠지는 장르문학에 적절하다]우와! 물감님 두 작가 비교가 정확! 하루키옹은 음악에서 글쓰기를 배웠고 킹슨생은 그야말로 대중들에게 널리 읽혀지는 글이 뭔지 잘 아는 영리한 ㅎㅎ 물감님 리뷰 읽고 난후 곧바로 킨들에서 로드워크 구매 완료 함 ^ㅎ^

물감 2021-04-17 23:50   좋아요 2 | URL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력으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은 확실히 연구하고 분석하는 재미가 있어요ㅎㅎ
어깨너머로 공부를 배우는 기분이랄까요? 단점은 필력 구경하느라 작품에 집중이 잘 안될때가 있어요ㅋㅋㅋ
 
독도함
김태우.배상열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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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가 헬조선의 시대를 살고는 있지만 종종 국뽕에 취한 미국인처럼 애국심이 끓어오를 때가 있다. 신나게 한국을 질겅질겅 씹다가도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었다거나, 한국 비보이 팀이 세계대회에서 1등을 했다거나, BTS가 빌보드 차트를 석권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렇게나 가슴이 웅장해지고 자부심이 벅차오르는 것이다. 좀처럼 보기가 어려운 이런 경험을 문학으로 만나볼 기회가 찾아왔으니 무려 제목부터가 <독도함>이다. 보기 드문 밀리터리 문학인 데다 잠수함 소재라고 하여 궁금함을 자아내었고 결과는 기대 이상의 만족도를 안겨주었다. 일본의 도발로 시작된 한일 전쟁 시나리오인데 만약 이대로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앗 하는 사이에 한국은 전멸이다.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지금의 한중일 그리고 북한과 미국의 관계를 생각해볼 때 어떤 시나리오라도 가벼이 여겨선 안된다.


그런 뜻으로 탄생한 이 작품을 요약하자면 극비리 가운데 진행되었던 프로젝트, 독도함이 마침내 완성된다. 이 신형 잠수함은 한국군이 패하고 한반도가 무너지는 지금, 일본군을 대항할 최후의 희망이다. 김태우 함장과 팀원들은 이 수퍼한 비밀병기로 일본과 배후에 있는 미국까지도 혼쭐 내버린다. 한국을 건들면 누구든 X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선포하며 전쟁은 끝이 난다. 


시작부터 들이닥친 한국의 대 위기, 그리고 강력한 대항수단의 등장, 여기에 어벤저스 팀원들과 시한부 인생의 리더, 그리고 숨어있는 쥐새끼까지. 당장 영화화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플롯의 완성도가 대단하다. 또한 각 군사 기관이나 군의 프로세스나 시스템 등 전문적인 설명과 진행으로 설명하여 퀄리티 면에서도 우수하다. 전쟁을 다루는 작품인데 글이 딱딱하지도 않고, 어려운 용어나 표현이 나와도 이해하는 데에 문제없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게 느껴진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두 저자가 얼마나 많은 조사를 하고 칼을 갈았을지 눈에 훤하다.


평화 헌법 제9조를 폐기하고 독도와 한국을 침공하는 일본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한국군. 여기에 미국이 일본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것은 일본이 중국을 쳐서 아시아를 탈환하려는 빅 픽처가 숨어있다. 일본은 모든 외교채널을 닫아버렸고 대통령은 본때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하여 국가기밀인 독도함을 만들게 하고 김태우 함장에게 임무를 하달한다. 독도함은 스텔스 기능에 외부 소음도 적고 전자파도 없고 급속충전되는 배터리 등등 하여간 킹왕짱굳맨 하이퍼 스펙이란다. 하지만 이걸 타게 되면 자신의 이름은 국가에서 지워지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어야만 하기 때문. 이러나저러나 죽을 거면 싸우다 죽자며 독도함에 오르는 팀원들. 이제 그들은 조국에 대한 충성과 생존 본능 사이에서 수차례 황천길을 넘나들게 된다. 게다가 함장의 뇌종양으로 걸핏하면 정신을 잃어서 작전에 차질이 생긴다. 언제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을 끊임없이 연출하는 저자는 안팎으로 팀원과 독자에게 긴장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모든 스토리가 그러하듯이 사태는 최악의 상황을 밟는다. 독도함을 만든 유조선을 향해 일본 공군이 날아온다. 극비리 프로젝트의 정보가 새나갔다는 뜻이었다. 공군의 폭격으로 유조선은 폭파되고 독도함은 간신히 그곳을 탈출한다. 그리고 스텔스 기능으로 고요하게 다가가 어뢰로 적들을 섬멸하는 독도함. 기습 당한 일본 해군은 엄청난 패닉에 빠지게 된다. 일본에 넘어온 미군 7함대와 사령관은 예상 못 한 상황에 이를 바득바득 간다. 이번 공적으로 차기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에 입성할 계획이었던 사령관은 과거 한국전쟁에서 실패한 맥아더 장군을 떠올린다. 맥아더의 실패 원인을 잘 알고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 사령관은 그제서야 땅을 치며 후회한다. 하다못해 독도함 만이라도 빼앗으려 함장에게 투항을 권장하지만,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독도함 팀원들은 제안을 가볍게 무시하고 최후의 일격을 날린다. 명량대첩의 이순신을 뛰어넘은 독도함은 해군의 후예다운 죽음을 맞는다. 


아무리 독도함이 최강이라도 어뢰가 바닥나면 게임오버였다. 호되게 당했다지만 일본과 미국은 여전히 이길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면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역전시키고 전쟁을 멈추게 할까. 김태우 함장은 적들의 군중심리와 언론을 이용하여 분열을 일으키고 알아서 자멸하도록 작전을 세운다. 이 책은 함장의 리더십과 신념이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훌륭한 판단력을 가진 군인이 실존할지가 의문이다. 암튼 이처럼 주제나 목적이 분명한 작품은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 읽는데 부담이 적다. 다만 빅 스케일에 비해 생략된 장면이 많았고 그래서 진행을 서두르는 것처럼 비춰지는 게 아쉬웠다. 초반에 국정원과 부딪히던 대통령은 어느새 쏙 들어가 버렸고, 폭격 받아 두려워하는 자국민을 다루는 장면하나 없으며, 중국이나 북한의 입장도 일절 다루지 않는다. 스트레이트한 플롯은 입체적이지 못하다는 특징을 또 한번 느꼈다. 그러나 단점보다도 장점이 많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미국이 건방진 중국을 짓누르기 위해 일본을 이용한다는 발상은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실현 가능할 것이다. 이 작품으로 국민 모두가 경각심을 가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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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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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연락 주신 민음사에 무한 감사를 드린다. 빨간 책에 끔찍한 트라우마를 가진 나님이지만 이 작품은 뭐랄까, 품절되기 직전인 유명 브랜드 제품의 유니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랬다. 그냥 끌렸다는 얘기다. 이 작품은 로봇, 즉 안드로이드가 인간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들의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끊임없는 이해와 교감을 시도하고 있다. 로봇은 인간의 어느 부분까지 커버해줄 수 있을까? 이제는 많은 일자리를 로봇이 대신해주고 있지만 인간이 지닌 복잡 미묘한 감정까지도 로봇이 채운다는 건 불가의 영역이다. 로봇의 기능 문제라기보다 로봇을 인간처럼 대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별개의 문제라 하겠다. 인간과 살아가는 로봇 이야기는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런 장르가 꾸준히 사랑받아온 이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조명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절망에 빠진 인간들 가운데서 로봇만이 희망을 노래하고 있어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인간과 로봇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AF(Artificial Friend), 로봇 클라라는 한 소녀의 선택을 받고 친구이자 집사가 된다. 허나 소녀는 몸이 자주 아팠고 집안은 언제나 초상집이었다. 클라라는 인간의 감정을 스캔하는 지능으로 소녀를 지극정성 보살폈으나 병세는 악화되었다. 소녀의 엄마는 클라라에게 어려운 부탁을 청한다. 소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기꺼이 하겠다는 클라라. 과연 로봇은 인간의 빈자리를 얼마나 채워줄 수 있을까.


인간도 인간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는데 로봇이 그걸 캐치해낸다니 어딘가 좀 낯설다. 아직도 말을 잘 못 알아먹는 ‘시리‘나 ‘빅스비‘같은 친구들은 언제 에이에프처럼 될까나. 여하튼 말을 꼭 걸어야만 응답하는 스마트폰 친구들보다는 에이에프가 여러모로 편리하긴 하겠다. 사실 에이에프들이 주인의 친구 컨셉으로 출시되었다곤 하나 팔려가면 얼마 안 되어 시중드는 가정용 로봇이 되고 만다. 빨래걸이가 돼버린 러닝머신처럼 말이다. 그러나 클라라는 인간을 관찰하는 호기심 덕분에 구세대 모델임에도 특별해질 수 있었다. 클라라는 인간의 한가지 표정에서도 다양한 감정이 들어있음을 인식했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탄식, 절규와 희망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얽히고설켜있어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텐데도 이해하려 노력하는 클라라였다. 당연히 인간들은 로봇의 노력을 같잖게 여겼고 무생물에게 동정받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각자의 아픔과 상처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클라라 덕분에 위안을 얻고 닫혔던 마음 문을 열게 된다.


한정된 무대와 적은 인원으로도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다들 소녀를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결국엔 클라라를 통해서 제자리를 찾게 된다. 이미 첫째를 떠나보낸 소녀의 부모는 둘째도 떠나갈까 하는 슬픔에 잠겨있다. 그래서 엄마는 클라라가 딸을 복제해서 그 뒤를 이어가주길, 그렇게라도 해서 삶을 버틸 수 있길 원한다. 그러나 아빠는 로봇이 딸을 대체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한다. 의견 충돌로 멀어진 두 사람은 클라라와의 시간을 가진 후 서로를 존중하고 계획의 타협점을 찾는다. 소녀의 소꿉친구인 소년의 가족도 상황과 입장이 영 좋지 않다. 엄마를 돌보느라 학업도 사교도 뒤떨어진 소년은 자신과 소녀 사이에 벽이 생겨나고 있었고,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계획에서 점점 멀어지는 중이었다. 또한 소녀의 변덕스러운 감정을 받아주다 사이가 확 틀어지기도 한다. 이때 클라라의 메신저 역할로 서로의 본심을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은 클라라를 마음껏 의존하게 된다. 심지어 초 까칠한 가정부조차 우리는 한편이라며 마침내 클라라를 받아준다.


태양광을 자양분으로 삼는 에이에프에게 태양은 우주를 다스리고 주관하는 신의 존재이다. 클라라가 희망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건 태양 덕분이다. 자신이 아직 매장의 전시 상품이었을 때, 다 죽어가던 거지가 햇빛을 받고 생명력을 회복한 장면을 본 후로 태양에게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게 된다. 나름의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응답도 없는 태양에게 소녀의 건강을 빌었고, 인간들의 절망 가운데서 항상 긍정적일 수가 있었다. 인간에게는 한낱 해맑은 로봇이었겠지만 클라라는 인간 못지않은 고민과 근심으로 괴로워하였다. 거기까진 좋은데 그에 따른 클라라의 신념과 행동들이 실은 전부 헛다리 짚는 것이어서 이 순진한 친구는 슬슬 현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변치 않는 클라라의 근성을 보며 독자는 말리지도 않고 응원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지켜보게 된다. 남들이 비웃었던 그 노력이 끝내 보상을 받게 되면서 독자는 크게 한 방 먹는다. 내가 하던 노력들도 보잘것없고 별 볼 일 없이 느껴져서 어느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던가. 이제 보니 진짜 현실을 자각해야 하는 건 우리 인간들이었다.


등장인물들이 전부 ‘소외된 자‘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각자가 어떤 정상적인 범위에 속하지 못하여 상처가 곪고 있다. 건강한 몸을 얻지 못한 소녀, 온전한 가족을 유지 못한 부모, 급이 낮아 교류 모임에 못 어울리는 소년, 감정을 나누어도 인정받지 못하는 로봇.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은 정착 못하고 떠도는 이방인이 된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설자리를 잃어버리면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인간은 스스로를 비난하고 주저앉지만 클라라는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돕는 길을 택한다. 주인을 섬기도록 만들어진 이 로봇의 프로세스는 어쩌면 우리가 이방인일 때 살아가는 지혜를 나타내는 게 아닐까 한다. 서양에서 동양인으로 살아온 작가이기에 이방인의 심정과 소외된다는 것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다. 그래서 작가는 이 작품으로 아픈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이런 작가의 섬세한 감정선을 실컷 볼 수 있는 멋진 작품이므로 독서가라면 절대 놓치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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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01 22: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리뷰 보니 다시 책 생각이^^ 클라라의 감정선이 정말 섬세하게 잘 그려진거 같아요~!

물감 2021-04-01 23:03   좋아요 4 | URL
새파랑님도 읽으셨군요ㅎㅎ
공감하신다니 감사합니다. 이 작가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coolcat329 2021-04-02 13: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아 읽고 싶어라~~적립금 조금이라도 더 모아 사려고 지금 ㅋ 대기중입니당!

물감 2021-04-02 13:38   좋아요 3 | URL
ㅎㅎㅎ조만간 올라올 쿨캣님의 리뷰를 기대하겠습니다😃

붕붕툐툐 2021-04-02 22: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은 홍보 안해도 이미 대박인 거 같던데... 출판사에서 먼저 연락까지 주다닛! 물감님 엄청 대단한 분이시군요!!!!@@

물감 2021-04-02 23:20   좋아요 3 | URL
아니요.. 아닙니다(단호).
알라디너로 지내면서 제가 얼마나 허접한 레벨인지 깨닫고 조용히 짱박혀 살아갈 뿐입니다... 결단코 대단한 사람이 아니옵니다😅
 
모녀귀 - 개정판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9
이종호 지음 / 황금가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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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학창시절에 학교괴담 한두 개쯤은 들어봤을 것으로 안다. 자살한 전교 1등, 폐쇄된 교실, 눈에서 피가 흐르는 동상 같은 이야기들. 나도 괴담의 진실을 확인하러 친구들과 자정 시간에 학교를 찾아갔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면 학교란 곳은 참 온갖 소문과 괴담으로 가득한 곳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괴담은 무서울수록 전달하는 화자에게 묘한 자부심을 갖게 한다. 그래서 세대를 거듭할수록 이야기는 와전되고 완성도를 갖추어서 하나의 실화가 된다. 실화인 듯 실화 아닌 실화 같은 <모녀귀>는 떠도는 괴담들을 모아다 각색한듯한 느낌이라 처음 읽어도 낯설지가 않다. 이 책은 <분신사바>라는 영화의 원작 소설인데 영화보다 더 재미있고 흡인력이 있다. 다만 이제는 워낙 익숙한 내용이라서 별로 무섭지가 않다는 게 단점이다.


왕따를 당한 전학생은 볼펜 점으로 귀신을 불러내어 가해자들을 저주한다. 가해학생들이 의문사를 당하자 학교와 마을은 뒤집어진다. 한편 전근 온 여교사에게 들러붙는 남자들은 30년 전의 불미스러운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외지에서 들어온 모녀가 마을 주민들에게 살해되었고, 사건을 은폐한 채 살아왔던 것이다. 죽은 모녀를 불러온 전학생과 여교사를 마을에서 추방하려 하나 커져만 가는 귀신의 원한을 어찌할 수가 없다. Y읍의 비극은 모두가 죽어야만 끝나는 것일까.


단순하면서도 완성도가 있다. 30년 전 사건과 관련된 Y읍의 사람들은 마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설정이다. 알 수 없는 암묵적인 약속이 마을을 지배 중이었고, 과거를 쉬쉬하며 살아가는 주민 하나하나가 전부 비밀투성이였다. 독자는 외지인의 입장으로써 주민들이 무엇에 두려워하는지를 몰라 긴장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폐쇄 지역인 Y읍은 외지인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과거에는 모녀를 따돌렸고, 현재는 전학생 가족과 여교사를 밀어내려 한다. 외지인들이 마을에 귀신을 불러와서 물을 흐려놨다고 생각하지만, 이 사태의 근원은 주민들에게 있었고 모두가 그걸 알면서도 사실을 부인하는 중이다. 모든 이야기들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향해 가듯 이 작품 또한 그렇다. 주민들이 모녀귀의 한을 풀어줄 생각은 안 하고 신경만 긁어대서 죽음을 자초한다. 지난 잘못에 대해 뉘우침 없이 남탓만 해대는 어리석은 자들은 역시 몽둥이가 약이다.


괴담 이야기는 클리셰를 완벽히 비껴가는 게 불가능한가? 뻔한 전개이지만 나쁘지 않았는데 죽은 모녀의 환생이나 영혼의 빙의 소재는 역시나 진부하다. 아니면 클리셰를 멋지게 뒤집을 장치라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나름대로 인과응보 이야기인데 그 끝에는 정의도 없고 승자도 없다. 배드 엔딩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게 끝났으니 해피엔딩이 되는 걸까. 여튼 마무리되면서 또 다른 괴담으로 남는 결말이 은은한 여운을 준다. 사실 호러물에는 교훈이나 주제가 없어도 된다고 보는데 이 작품으로 인식이 조금 바뀌었다. 괴담물은 성격상 작품 속 구멍들을 일일이 메꾸지 않아도 된다. 듣는 사람이 알아서 해석해줄 것이고 더욱 미스터리한 이야기로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이다. 오늘의 결론, 착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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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 - 탐정 아이제아 퀸타베의 사건노트
조 이데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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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면허 해결사인 흑인 탐정의 탄생이라고 하여 냉큼 서평 이벤트를 신청했다. 흑인으로써 그 많은 제약과 걸림돌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사건을 풀어나갈지가 궁금했는데 과연 기존 경찰/탐정 소설들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맛이 있었다. 미국에서 이런저런 상들을 수상하고 드라마까지 확정된 시리즈라 하니 기대들 하셔도 좋겠다. 출판사는 더욱 열일해주시길!


유명 래퍼의 크루한테 사건 의뢰를 받은 두 친구. 래퍼의 대 저택으로 초대형 핏불 개가 들어와 그를 공격하였고, 그 후로 래퍼는 정신이 나가버려 음반 작업은커녕 일상생활도 불가해졌다. 주인공들은 쉽게 핏불의 주인을 찾아내지만 그를 범인으로 지명하기엔 확증이 부족했다. 갈수록 상태가 악화돼가는 래퍼를 위해서라도 빨리 끝내야 하는데 어째 범인이 두 친구의 계획을 파악하는듯한 기분이다. 게다가 래퍼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크루 멤버들에게서 구린 냄새가 난다. 이들 중 킬러를 고용한 내부자는 누구일까.


주인공도 등장인물들도 흑인인 참신한 시리즈의 탄생이다. 주인공 아이제아는 탐정이나 경찰 같은 직업도 수사권도 없는 평범한 청년이다. 가족을 다 잃고 일찍이 빈민가에서 방탕한 삶을 살아온 터라, 이제껏 봐온 시리즈물의 주인공 이미지와 다르므로 다소 실망할지도 모른다. 타 주인공들은 힘, 계급, 권력, 영향력 등을 갖춘 상태로 나오는 반면 아이제아는 밑바닥 말단 사원으로 시작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인맥이라고는 사고만 치는 무개념 친구 하나뿐이라 대체 시리즈를 어떻게 이어나갈지조차 걱정이 든다. 여튼 1편만으로 시리즈의 색깔을 논하자면 굉장히 자유분방하면서도 와일드하다는 점이다. LA 슬럼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며, 흑인만의 문화생활과 가치관 그리고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까지 잘 녹아있어 작가가 꽤나 심혈을 기울였다는 게 느껴진다.


콤비로 활동하는 시리즈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도 정반대의 캐릭터들이 만나 삐거덕댄다. 주인공 아이제아와 무개념 친구 도슨은 단순히 성격만 다른게 아니라 흑인의 대표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아이제아는 소중했던 형을 사고로 보내고 절망과 괴로움으로 살아온 슬픔의 아이콘이며, 도슨은 대마초 팔고 갱단 활동에 감방을 들락날락하는 화려한 무법자이다. 애증의 관계인 두 친구는 끊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데 본인들은 심각하지만 보는 사람에겐 구경거리인 케미를 보여준다. 이번 편의 내용은 두 가지로 압축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주인공을 입체화 시키는 것인데, 타 작품처럼 신체적 결함이 아닌 트라우마를 핸디캡으로 준 것이 특히 좋았다. 여러 번 말했듯 나는 질병이나 장애로 골골대며 수사하는 주인공들이 지긋지긋하다. 그런데 아이제아는 내가 질색해하던 설정을 따르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 작가가 이 핸디캡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가 아주 기대된다. 두 번째는 힘없고 빽 없는 주인공들의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사회성 제로인 아이제아를 대신해 파트너 도슨이 건수를 잡고서 함께 의뢰를 맡는다. 필요에 따라 물건도 훔치고 불법 침입도 하는 이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경찰/탐정소설의 수사와는 딴판이라 생소하게만 느껴진다. 근데 맨땅에 헤딩하듯 날것으로 승부하니까 확실히 신선한 맛은 있다. 이제는 탐정형 캐릭터가 너무 많아서 더는 새로운 캐릭터가 나오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레드오션을 뚫다니, 작가의 센스가 참 대단하다.


메인 사건은 보기보다 간단하다. 사건 의뢰를 받자마자 핏불의 주인인 암살자의 정체가 금방 드러난다. 하지만 그에게 살해 동기를 발견치 못하자 여기에 조력자가 있다고 확신하나 의뢰인들은 하나같이 비협조적이다. 근데 이들보다도 파트너 도슨의 비협조가 아이제아를 뒤집어놓는다. 도슨은 아이제아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했고, 갱들과의 총 난투극으로 시민들까지 죽게 만들었다. 이렇게나 상극인 두 사람이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분명했다. 아이제아는 트라우마를 지워버리고 싶어서 일을 원했고, 돈이 필요한 도슨은 돈 되는 건수를 아이제아에게 물어다 줘야 했다. 지주였던 형의 부재가 남긴 고통과 방황으로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살아온 아이제아의 모습은, 앞으로 그가 헤쳐나갈 파도의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한다. 여튼 시리즈 첫 편이다 보니 어수선한 감은 있지만 와일드한 감성이 디폴트라서 딱히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여차여차해서 사건이 끝난 뒤 방탕한 생활을 접은 주인공은 좋은 곳에 재능기부하며 살기로 마음먹는다. 아마 2편부터는 인물도 사건도 스타일이 크게 바뀔듯한데 이 역시도 기대가 된다. 작가에게서 투 머치 토커의 기운이 느껴지지만 1편이니 너그럽게 봐주도록 하자. 끝.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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