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근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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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만큼이나 실망의 빈도수가 높은 것이 바로 문학 수상작이다. 여러 번 낚이고 보니 이제는 수상작 타이틀이 평범하게만 느껴진다. 그럼에도 매번 기대하며 다시 찾게 되는 걸 보면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듯. 이번 책도 반신반의 심정으로 골랐는데 다행히도 중박 이상이었다. 요즘 날도 덥고 해서 짧고 굵게 읽을만한 책을 찾고 있었는데 때마침 딱 좋은 작품을 만났다. 어그로성 짙은 제목에 비해 내용은 의외로 순한 맛이다. 더우니까 리뷰도 짧고 굵게 쓰겠다.


노인은 백수 남녀 두 명을 데려다 개천에 있는 오리 사진을 찍어오게 한다. 저들 중 한 마리가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를 잡아먹었댄다. 황당한 지시와 달리 진지한 노인은 꼬박꼬박 일당을 챙겨주었다. 뜨거운 땡볕 아래 날마다 오리 사진을 찍는 두 남녀는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인데 돈은 필요하고, 성과도 없이 돈만 받아 가는 것 같아 양심이 찔린다. 그냥 노인을 속여서라도 이 미친 짓을 그만두고 싶은데 눈치 빠른 노인은 절대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과연 고용주와 고용인 중 누가 더 미친 사람일까. 그리고 빌어먹을 오리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모든 직업이 그렇듯 작가에도 끼가 타고난 재능형과, 훈련으로 다져진 노력형이 있다. 자유분방한 전자의 글은 기발하고 통통 튀는 맛이 있고, 철저히 계산된 후자의 글은 스타일리시한 맛이 있다. 둘 다 좋지만 나는 후자 쪽을 더 선호한다. 솔직히 말하면 재능형들의 글은 참 쉽게 쉽게 쓴다는 인상을 줄 때가 많았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치열하게 쓰는 노력형들에 비하면 비교가 되는 게 사실이다. 그런 경험과 데이터로 볼 때 김근우 작가는 전자 같은 후자였다. 먼저 작품의 특징을 보면 등장인물도 적고, 배경과 무대도 좁고, 주목할만한 사건이 발생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제한된 조건에서 재미를 끌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데 작가는 그것을 해냈다. 이런 하이브리드형 작가가 많으면 참 좋을 텐데.


이 간단명료한 서사의 작품은 보기보다 건드릴 게 거의 없다. 일단 두 남녀가 그냥 백수가 아니라 인생의 쓴맛을 본 루저라는 설정이 아주 좋았다. 이들이 만약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에 사로잡혀있었다면 흔한 전재가 되었을 것이다. 돈이 궁한 두 사람은 오리 사진을 찍는 일이 비정상인 줄 알면서도 다단계에 빠진 사람처럼 멈출 수가 없다. 뭔가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이 짓을 계속했으면 하는 두 마음의 대립이 작품의 포인트라 하겠다. 노인은 눈앞에서 자신의 고양이를 잡아먹었다는 오리에 대한 증오가 대단했다. 노망난 할배의 헛소리라 하기엔 너무도 강경한 노인의 태도는 복잡한 가정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내가 위독하자 노인은 사업을 아들에게 위임하였으나 아들은 제 욕심으로 사업을 말아먹었다. 노인은 아내와의 사별 뒤 아들 가족과 절연하였지만 아들은 노인의 재산을 노리며 이런저런 핑계로 계속 찾아온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있을만한 사연인데 뜬금없이 고양이를 먹은 오리는 뭔가 싶은 두 남녀. 어쩌면 노인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한 게 아니었나 하는 결론에 다다르자 더욱 난관에 부딪힌다.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타겟으로 삼은 것은 쉽게 말해 사건을 종결할 마음이 없다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방치 중인 노인의 집은 조만간 폐가로 될 것이었다. 일당만 받아 가면 그만이었던 고용인들은 슬슬 빡치기 시작하더니 시키지도 않은 집안일을 하기 시작한다. 가만두라는 고용주에게 대들면서까지 봉사활동에 전념하는 고용인들과, 그들에게 가족의 정을 느끼고 마음 문을 열게 된 노인. 사람에게 입은 상처는 사람만이 치유해준다는 흔한 교훈이지만 좋으면 그만이지 뭐.


허상을 쫓는 것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다,라는 것을 심어준 참 괜찮았던 소설이다. 처음 보는 작가라서 이력을 찾아보니 주로 다크 판타지물을 쓰신 분이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말랑말랑한 글을 썼다는 것도 놀라운데 수상까지 했다니 정말 능력자이다. 진짜 하이브리드형 작가가 맞다니깐.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 그나저나 여러분, 저 엊그제 백신 맞고 지금 골골대면서 글 쓴 거라 평소보다 허술해도 이해해주십셔. 여파가 어마어마합니다요. 털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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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6-13 00: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쿵~ 백신 후유증 중이시군요! 얼른 가뜬해지시길!! 저도 수상작품은 실망할 때가 많은데도 수상작?하며 눈길 한번 더 가게돼요~ 그래서 작가라면 다들 수상하고 싶은 거겠죠?ㅎㅎ그러구보니, 저도 상 받고 싶네요~ㅎㅎㅎㅎ

물감 2021-06-13 00:56   좋아요 3 | URL
다행히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ㅎㅎ
사실 수상했든 못했든 고생한 작가들은 잘못이 없죠. 출판사와 심사자들의 과도한 찬사가 문제니까요😅 붕붕툐툐님은 알라딘에서 리뷰상 많이많이 받으실거에요ㅎㅎ
 
우리 아버지들의 마지막 나날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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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독서생활을 하다 보면 본인의 취향이 어떤지 잘 알게 된다. 그것은 분야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책이 좋을 수가 없고 세상만사가 관심사일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편협한 독서를 하도록 되어있다. 이것을 알기 전의 나는 편협한 독서에 대한 선입견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으로 보여져 말 그대로 취향 존중을 하게 되었다. 설령 야설 광이라도 다 이해한다. 한때는 나도 스릴러소설만을 고집했었으나 이제는 좀 더 다양한 장르에도 도전해보고 시각이 넓어져 다행이라 느낀다. 그리고 나 역시 확고해진 취향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역사소설하고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있었던 사건을 아무리 각색한들 알려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신선함도 없고 흥미도 생기질 않는다. 그런데 좋아하는 작가가 쓴 작품이라면 내 취향과 상관없이 읽어주는 게 의리 아닌가. 더군다나 이번 신간은 조엘 디케르의 데뷔작이라고 하니 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주인공 폴에밀은 아버지를 홀로 두고 군에 자원입대를 한다. 여차여차해서 영국 첩보요원이 된 그는 전쟁터로 간다. 작전이 실패할 때마다 동기들이 죽었으며, 남은 사람도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전쟁이 길어지자 아버지가 걱정되어 찾아간 주인공은 독일군에 붙잡히고,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요원들을 육성하는 과정은 영화 <킹스맨>을 생각나게 한다. 고된 훈련을 받으며 동기들 간에 트러블도 겪고 낙오자도 생기는 장면들을 상세히 다루어서 저절로 몰입하게 된다. 초반에는 서로 삐걱거리다가 나중에는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이가 된 동기들. 비록 뿔뿔이 흩어졌지만 지겹고 괴로운 전쟁을 버틸 수 있던 것은 함께 했던 동기들 덕분이었다. 어쩌다가 서로 만나거나 혹은 소식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곤 했다. 그러나 긴긴 전시상황으로 육체는 지쳐가고 정신은 병들어버린다. 정상의 삶을 잃어버린 동기들은 서서히 두 그룹으로 나뉜다. 존재의 의미를 전쟁 속에서 찾으려는 무리와, 인류애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무리로. 전자는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단 생각에 갇혀있었고, 후자는 전쟁이 끝난 후의 삶을 그리고 있었다. 여기서 주인공은 전자의 입장에서 후자의 입장으로 넘어간 케이스였다.


주인공 폴에밀은 요원으로나 인간으로나 백 점이었다. 특히 온화한 성품으로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그러나 군의 방침을 어기고 적에게 발각된 것도 그 온화함 때문이었다. 입대 후 한 번도 뵙지 못한 아버지가 너무 그리웠고, 홀로 힘겹게 지낼 아버지가 너무 걱정되었다. 그는 자신의 계급과 신망을 이용해서 아버지에게 안부편지를 보낸다. 해서는 안될 일임을 알았지만 터져버린 감정은 멈출 줄을 몰랐다. 결국 꼬리가 길어져 잡히게 된 그는 동료를 밀고하고 아버지를 살리는 길을 택한다. 국가의 안전보다 아버지의 안전이 중요했던 폴에밀의 선택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일까.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이 최선책이라곤 하나 그게 반드시 정답일 수는 없다. 여튼 이런 내막을 모르는 남은 동기들이 주인공의 죽음을 알리려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남은 날들을 슬픔으로 지새우게 할 수는 없으니까.


제목만 보면 아버지에 관한 작품 같은데 알맹이는 전쟁으로만 가득해서 많이 아쉬웠다. 아버지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데다 주인공을 기다리며 발 동동 하는 장면이 전부였다. 아무리 봐도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작품으로 보여지지 않는데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을까.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주인공의 너무 이른 퇴장이었다. 한번 끊어진 맥은 복구가 불가했고, 동기들만으로는 남은 분량을 채우기에 역부족이었다. 왜 공들여 쌓은 탑을 갑자기 무너뜨리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첫 작인데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나저나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라 그런지 리뷰도 참 재미없게 써지는군. 퍽이나 아름다운 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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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07 00: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과 표지의 괴리인가요? ㅎㅎ 물감님 리뷰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완전 날카로운~!! 물감님은 역사소설하고 안맞는다고 하시는데 저는 중국소설하고 SF가 잘 안맞더라구요. 손이 잘 안감 ㅜㅜ

물감 2021-06-07 08:04   좋아요 3 | URL
ㅋㅋㅋ의미심장한 제목이 내용과는 크게 연관이 없어보였어요.
그러고보니 저는 중국소설을 아예 안읽었네요. SF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요. 저랑 새파랑님은 문과쪽인가 봅니다🙂🙂🙂
 
시인의 계곡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10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0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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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좋아하진 않지만 스릴러소설을 읽기에 이만한 계절도 없다. 요즘같이 축 처지는 날씨엔 속도감 있는 작품을 읽어줘야만 한다. 오랜만에 코넬리옹의 <해리 보슈 시리즈>를 꺼내들었다. 독서 슬럼프를 이겨낼 때 써먹으려고 아껴두고는 있는데 너무 읽는 텀이 길다 보니 앞뒤 내용들이 잘 생각이 안 난다. 근데 생각해보니 웃긴 게 읽으려고 샀으면서 읽기 아깝다고 모셔두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이제는 무조건 맛있는 반찬부터 골라 먹어야겠다. 전 세계 독자들이 찬사를 보내는 코넬리옹 작품이라지만 그 안에는 분명 중박도 있고 쪽박도 있다. 다 그러려니 하겠는데 점점 글에서 독기가 빠지는 걸 보면 확실히 작가가 나이 들긴 했다. 여튼 이번 편은 중박이었지만 읽는 재미는 충분했으므로 사소한 것들은 그냥 눈 감고 넘어가 주겠다.


LA 경찰을 은퇴하고 사립탐정이 된 해리 보슈. 그는 은퇴한 FBI 프로파일러의 죽음에 의혹을 느껴 사건을 수사한다. 피해자는 은퇴 후에도 오랫동안 어느 사건에 매달렸던 것으로 밝혀졌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한편 죽은 줄 알았던 범죄자 ‘시인‘이 귀환하여 FBI에 초비상이 걸린다. 시인의 살인 흔적과 단서를 쫓는 FBI, 죽은 프로파일러의 수사기록을 쫓는 해리 보슈. 양측은 상대편을 교묘히 이용하여 범인에게 다가가려고 한다. 


정말 간만에 푹 빠져읽었던 작품이다. 먼저 작가의 스탠드얼론인 <시인>과 <블러드 워크>를 읽어야만 이번 작품의 깊이를 이해할 수가 있다. 사실 과거에 죽었던 악당을 다시 불러다 쓴다는 건 참 김빠지는 일이다. 그럼에도 울궈먹기를 택했다는 건 작가 나름의 자신이 있었다는 말인데 다 읽고 보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그 증거로 이 두꺼운 분량에서 범인의 등장씬은 10분의 1도 안된다. 그럼 나머지는 뭐냐. 해리와 FBI가 범인을 프로파일링하고 와리가리 하며 개고생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머리 쓰지 말고 그냥 읽으면 된다. 기대가 없어야 그나마 재미있으니 참고하시길. 앞서 말했듯 이번 편은 대체로 싱거웠지만 앙숙 관계인 FBI와 경찰이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먼저 경찰은 힘이 약하지만 수사가 비교적 자유롭고 행동력이 있다. 반면 FBI는 즉각 대처가 늦지만 강한 수사력을 갖고 있다. 이렇게 장단점이 명확한 양쪽이 각자의 입맛대로 상호보완을 해주므로 다소 질질 끄는 전개에도 속도와 텐션을 유지한다. 재미가 약하면 연출로 승부하는 참 대단한 작가이다. 


떠돌이 코요테였던 해리에게 딸이 생기고부터 그는 상남자의 허물을 벗고 아버지다운 모습으로 바뀌어간다. 딸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면서 생겨난 다양한 감정들이 수사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군도 적군도 인간적으로 바라보고 대하게 된 그였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사사로운 감정들은 경찰에게 있어 불리하게 작용하므로 마이너스 요인이 아닐까 싶겠지만, 사실 이 시리즈는 형사 해리의 투쟁보다 인간 해리의 방황에서 더 재미를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별거하는 아내와의 줄다리기나, 복직을 권유하는 후배와의 전화통화나, 은퇴 후 인생 2라운드를 보내는 동료들과의 만남 등등 사건보다도 사람을 대할 때에 그의 존재가 빛을 발한다. 하지만 자신의 복잡한 과거는 청산되지 않았고 현재의 처지도 바뀔 수가 없는지라 고독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해리를 따라다닐 예정이다. 극복을 한 건지 아니면 받아들이고 사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예전만큼 힘겨워하지는 않는 걸 보니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사건에 대한 리뷰는 없고 계속 딴 얘기만 하는 건 그만큼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앞으로의 시리즈 방향을 잡기 위해서 쓴 징검다리 같은 작품이다. 이번 편은 해리가 다시 복직을 해야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그가 형사로 살아갈 운명임을 강조하고 있다. 어서 공권력을 되찾고 예전처럼 슈퍼액션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면서 이만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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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6-01 21: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그런 책 있어요~ 아껴두고 싶은 책. 독서슬럼프 직효약이라니 궁금하네요!ㅎㅎ

물감 2021-06-01 21:27   좋아요 1 | URL
ㅋㅋㅋ그런데 아끼다가 똥되겠어요. 이제는 그냥 다 읽으려고요😀 아마 알라디너들은 슬럼프일때 찾는 작가들이 다 있을거 같은데요ㅋㅋ
 
숨그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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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다. 근래에 우울한 작품을 연달아 읽었더니 울적한 기분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 거기에다 해와 달을 거듭할수록 증가하는 여성호르몬이 나의 감성을 더 여리고 섬세하고 순결하고 산뜻하고 감미롭고 우아하게 바꿔놓았다. 그래서 이제는 예전 같은 삐딱하고 까칠한 글이 나오질 않는다. 알지 못하는 대상에게 나의 캐릭터를 빼앗겨버린 듯한 이 기분, 당신은 알랑가몰라. 그래도 기분이 우울해서 좋은 점은 글이 잘 써진다는 것이다. 요즘같이 비 오고 흐린 날이면 밤새워서라도 글을 쓰고 싶지만 밤 12시에 눈이 감기는 나의 저질 체력 따위를 끄적이는 이유는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그냥 손가락 가는 대로 아무 말이나 적는 중이다. 그러니 시간 아까우신 분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시오.


나에겐 리뷰 쓰기 어려운 세 가지 케이스가 있다. 첫 번째는 내용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을 때. 두 번째는 남들과 겹치는 글 밖에 안 나올 때. 세 번째는 실화가 바탕인 작품일 때이다. 그런데 <숨그네>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해당된다. 내용은 어렵지 않은데 난독증 생길 만큼 가독성이 좋지가 않다. 그래서 문장이 머리에 남질 않고 장면이 잘 그려지질 않는다. 게다가 다각도로 볼 수도 없고, 다양한 해석을 낳는 작품도 아니므로 남들과 겹치지 않는 리뷰를 쓰기도 어렵다. 특히 실화 기반의 작품은 줄거리가 전부라서 할 말도 많지 않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도 멘붕에 빠져있으므로 이번 리뷰는 영혼 없이 써보겠다. 두둥탁.


히틀러의 만행으로 피해 입은 소련은 루마니아에 거주 중인 독일인들을 강제 징집하여 책임을 지게 한다. 독일인들은 소련의 강제 수용소에서 5년 동안 무너진 지역을 재건해야 한다. 다 알다시피 수감자들은 노동과 억압과 배고픔과 탄식의 나날을 보낸다. 눈앞에서 시체가 쏟아져내려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무감각해져버린 수감자들. 이곳 생활에 적응한 이들은 수용소를 제 집으로 여기며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는다. 어느새 영혼의 빈자리는 수고와 고통으로 채워지고, 인간의 존엄성은 빵 한 덩이만도 못한 것이 되었다. 그 모진 시간들을 이기고 마침내 집으로 귀환한 주인공 레오. 모든 게 뒤바뀐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는 자유를 얻고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영혼은 여전히 수용소에 남아있었고, 그의 육체는 러시아식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수용소를 다룬 작품들은 처참하고 끔찍한 냄새가 풀풀 나기 마련이지만 <숨그네>는 그것과 성격이 좀 다른 편이다. 화자인 레오의 성격이 워낙 저텐션이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덤덤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런 잠잠한 주인공과 달리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문장 문장들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것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새어 나오는 감정과 아이러니가 이 작품을 좀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저자는 이 모든 시간과 경험들을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도록 의도하고 있다. 헤르타 뮐러는 슬퍼서 펑펑 우는 이보다, 넋을 잃어 눈물이 나지 않는 이의 절망을 보여주려 하였다. 뮐러는 말과 글로 형용 못할 심정을 자신이 창조한 복합단어로 대변했는데 제목의 <숨그네>는 삶과 죽음을 그네뛰는 숨결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하얀 토끼, 뼈와 가죽의 시간, 배고픈 천사, 심장삽 등등 생소한 단어가 자주 나온다. 뜻이 함축된 시 같은 문장들이 많아서 읽다가 멈추게 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 또한 저자의 의도라고 보면 된다. 애석하게도 순문학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님은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세상에 아무 미련도 없어 보이는 주인공의 생존 의지가 꽤나 질긴 편이다. 벽돌 한 장과 흙 한 줌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타인의 사소한 행동도 특별하게 여길 만큼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수용소 생활의 낙으로 받아들인다. 끝없이 배고픔과 굶주림으로 허덕이면서도 현실을 수긍하고 순응하는 레오. 체념하는 법을 배우고 나서야 인간다운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 그가 독자에게 말한다. 사는 방식이 다르더라도 삶의 의미는 다르지 않다고. 절벽 한가운데 피어나는 꽃에도, 아스팔트에 피어나는 들꽃에도 벌과 나비는 날아든다. 꽃들도 제 역할을 잊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인간의 역할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먹고 자고 싸는 게 전부가 아닌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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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5-24 11: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수년 전에 헤르타 뮐러 작가의 책들이
노벨문학상의 붐을 타고 나왔을 적에
거의 모두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역자가 책마다 다 달라서 그런
지 어쩐지 동질감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작품활동은 하는지 안하는지
신간 소식은 없네요.

그외에도 루마니아 출신이라고 하는데
독일어로 글을 쓴다고 들었는데 정체성
도...

참고로 루마니아군이 나치 독일군과 함
께 동부전선에 투입된 적이 있지요.
왠지 루마니아에 사는 독일계 주민들의
피해자 코스프레가 아닌지 저는 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물감 2021-05-24 13:27   좋아요 3 | URL
역시 정보통 레삭매냐님!
이 책 한 권만으로도 번역 얘기가 많던데 다른 책들도 그렇다면 정말 동질감 느낄수 있겠어요. 개인적으로 문체에 애를 좀 먹었는데 오히려 멋진 문장으로 유명한 작가더라고요. 역시 번역이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말씀하신 피해자 코스프레로도 생각해볼 수 있군요. 혹여 사실이라면 어쩌다 색안경을 갖게 되었는지도 궁금해집니다. 이런 걸 들을때마다 작품성으로만 봐야할지, 저자의 세계관이나 성향을 따져야 할지 혼란스러워요.

나비종 2021-05-27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큰일이다. 여리고 섬세하고 순결하고 산뜻하고 감미롭고 우아하게 탈바꿈했다고 부르짖는 나물 모임 핵심 멤버의 감성에 보조를 맞추지는 못할 망정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시오.‘란 문장에 빵 터지기나하고...

‘울적‘으로부터의 탈출 정도는 진척이 있으신지요?^^; 저 역시 우울한 시기에는 글이 잘 써지더라구요. 우울이 주는 선물일까요? 이번 달에는 저도 우울이 꽤 오래가더라구요. 친한 지인의 톡이나 전화도 한동안 씹었습니다. 다른 이의 말을 들어줄 생각을 하니 갑자기 피곤이 확 몰려오더군요. ‘저 인간은 지 아쉬울 때만 연락하지‘ 하며 삐딱한 생각도 들고, 나를 털어놓을 인간이 한 명도 없다는 생각에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책은 천천히 읽다보니 장면이 감각적으로 많이 와 닿았어요. 저는 오히려 가독성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물감님의 나이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30대이실테니 50대인 제가 살아오면서 얻었을 경험치가 훨씬 많아서 받아들이는 데 차이가 생긴 게 아닐까요. 저는 리뷰에 영혼을 갈아넣었거든요.ㅋㅋㅋ 물감님께서 이 다음에 50대가 되어서 이 책을 다시 접하시면 느낌이 훨씬 다르시리라 예상됩니다.^^

내용 파악 정확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의 영혼은 여전히 수용소에 남아있었고, 그의 육체는 러시아식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에 공감 척!!ㅎㅎ
‘소리 없는 비명‘, ‘감정과 아이러니가 작품을 좀 더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하신 말씀에도 공감합니다.
복합단어 중에서는 ‘심장삽‘이란 말은 굉장히 감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장 모양을 닮은 삽, 빨갛고 뜨겁게 뛰는 심장의 이미지와 겹쳐져 강렬하게 와닿더군요.

물감님과는 관점과 감성이 일치하는 부분이 꽤 많았는데 이번에는 입장 차이가 분명하네요. 이렇게 차이가 나는 시각이 있기에 독서모임이 더욱 재미있어집니다.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거든요.^^

꽃이나 인간이나 결국 생명이라는 하나의 테두리에서 바라보는 커다란 시야가 필요한 듯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겸손해지고 감사한 마음이 퐁퐁 솟아나요.
‘먹고 자고 싸는 게 전부가 아닌 인간‘의 역할을 하기 위해 다음 달에도 열심히 지성미를 쌓아올리겠습니다!! 불.끈.~~
잘 지내세요. 멀리 있는 듣보잡 인간이라도 아쉬운 대로 괜찮으시다면 우울 모드 장착하셨을 때 사소한 벗이 되어드릴게요~^^

물감 2021-05-29 10:34   좋아요 1 | URL
궁시렁궁시렁해도 저는 우울함을 나름 즐기는 편입니다ㅋㅋ사색하는 게 그래도 정신건강에 좋더라고요. 그런 시기를 보내고나면 또 다른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시각이 생겨난다고나 할까요? 저도 한두달간은 아무하고도 연락없이 지냈어요. 역시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더라고요🙂

이번 책만이 아니라 뮐러의 책은 다 번역이나 가독성에 대해 반반 나뉘는거 같아요. 그만큼 저자의 세계가 뚜렷한걸테죠. 그런 경우 항상 파가 극명히 나뉘더군요.ㅋㅋㅋ그래도 작품성이 좋아서 저는 중립이어요. 과연 저도 세월가서 다시 읽으면 다를지 궁금하네요ㅎㅎㅎ

큰 틀은 알기 쉽지만 디테일이 전 조금 어려웠던 책이에요. 작가가 만든 그 단어들과 문장들...알것같으면서 애매한 이해 ㅋㅋㅋ이것도 세월의 빅데이터가 필요하겠군요.

이렇게 다른 시각의 입장을 보고 듣는것도 역시 유익해요. 그래서 같이 읽어야 재밌어요ㅋㅋ잘지내시고 다음 모임으로 뵈어요🙂
 
옥수동 타이거스 - 2013년 제1회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당선작
최지운 지음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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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아무 이유 없이 끌리는 책들이 있다. 내 경우는 제목이 독특할 때 손이 가는 편인데 그런 책들은 높은 확률로 재미가 있다. 반대로 죽어도 손이 가지 않는 책들도 있다. 나의 코드와 감성에 맞지 않으면 베스트셀러든 스테디셀러든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나마 믿을 만한 게 공모전 수상작이나 대회 당선작이다. 상까지 받았으면 일단 검증은 된 거니까 느낌이 오지 않아도 읽어는 본다. 근데 간혹 어떻게 수상했지 싶을 만큼 의심되는 작품들도 있는데 이럴 때면 굉장히 당혹스럽다. 당선이 될만한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어서 당시 심사자들의 수준을 의심하게 되고, 인재가 그 정도로 없었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여하튼 끌리지 않았던 건 다 이유가 있었으며 다시는 내 촉을 무시하지 말자는 값진 교훈을 얻었다. 


이 작품은 서울 옥수동 주변에 다섯 학교 일진들 이야기이다. 그들은 이 구역의 미친개가 누군지를 가리기 위해 날마다 싸운다. 여기서 랭크 1위의 용공고는 전국의 문제아 집합소였고, 정부는 용공고의 폐교와 옥수동의 재개발 계획을 발표한다. 전설의 용공고 일진이 해체 위기라는 소식에 주변 학교 미친개들은 이상한 전우애를 느끼고서 애도한다. 이후 랭크 2위가 마지막 싸움을 걸어와 그들만의 작별 인사를 고한다.


아마추어 웹 소설도 이보단 낫겠다. 화자가 과거 일진들의 활약을 회상하며 기록했는데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대사와 문장을 순화했다. 게다가 일진들의 폭력성은 조폭이나 갱단 못지않은데 이상하게 학생다운 순진함을 갖고 있어 괴리감이 느껴진다. 여튼 화자의 말에 따르면 당시 일진들은 마냥 인간쓰레기가 아니라 지들 나름의 신념을 갖고 행동해서 타 학생들에게 추앙받을만한 존재였단다. 누가 자기네 학생들을 건들면 가차 없이 응징했으니 그야말로 지구방위대 후레쉬맨이나 다름없었다. 여하튼 전반적인 내용은 이렇고, 내가 불만이었던 건 작품의 구성 방식이다. 일진 한 명 한 명을 챕터마다 소개하는데 무슨 게임 캐릭터 가이드북을 보는 기분이었다. A의 성장 배경, 싸움의 승패 및 활약, 인물의 특징 같은 이런 내용들을 내가 왜 읽고 있나 싶었다. 그리고 항상 ‘이날에 있었던 싸움은 XXX 전투로 불리며 XXX은 전설이 되었다‘라는 식으로 끝나는데, 아니 무슨 그리스 로마 신화 쓰신 줄 알겠더라. 차라리 진득하게 어느 일진들의 방황기를 라이브로 들려줬다면 좋았을 듯.


물론 일진들의 이야기 뒤에는 우리 사회의 씁쓸한 민낯이 숨어있다. 옥수동 주변 일대는 더 나은 지역을 만들자는 명분으로 용공고 폐교와 옥수동의 뉴타운 계획을 밀어붙였다. 지역민들의 마음도 이해는 되는 게, 문제아들이 험악한 동네로 만들고, 옥수동 주민들이 지역의 수준과 가치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 대접도 못 받는 옥수동 사람들이 용공고를 옹호해준 것은 이들의 주먹만이 옥수동의 자존심을 지켜줘서였다. 언제나 패자였던 옥수동이 승자로 바뀌는 유일한 상황은, 용공고 일진들이 타 학교들을 때려눕혔을 때다. 이렇게 용공고는 옥수동을 단합시켰고 자신들의 방식대로 학교와 지역을 지켜내려 한다. 정녕 대항수단이 주먹질밖에 없다는 것도 난센스지만 일진이 정의롭고 개념 있다는 것부터가 설정 미스여서 몰입이 깨진다. 일진을 환상의 동물처럼 묘사한 걸로 봐서 이 책은 현실 반영이 필요 없는 판타지 소설이 분명하다.


정작 중요한 옥수동 이야기는 일진들 전투씬에 가려져 평범한 액션 소설이 돼버렸다. 소재들은 따로 노는 데다 소재 간에 비율도 조화도 균형도 영 맞지 않는다. 대부분의 실패작들이 옵션에 문제가 있었지, 이처럼 기본 사양을 문제 삼지는 않았던 터라 아주 신선하게 당황스럽다. 보면 볼수록 심사자들의 뇌구조가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그건 그거고 일진을 대놓고 미화하는 것이 내내 신경을 계속 긁어댔다. 초식하는 사자가 없고 육식하는 소가 없듯이 멀쩡한 일진은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작은 행동과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공포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일방적인 폭력은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가 되지 않는단 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저자의 속을 모르겠다. 언론은 매일같이 학교폭력을 보도하는데 어째서 저자는 한 번도 일진 구경 못 해본 사람처럼 글을 써서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지. 나 이러다 제명에 못 살겄다. 이제는 느낌 없는 책에 절대 도전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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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5-10 22: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별 두개... 맞아요~ 느낌 없는 책은 과감히 제낍시다. 점점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ㅎㅎ

물감 2021-05-10 22:40   좋아요 3 | URL
원하는 책만 읽기도 모자란 세월이니깐요ㅎㅎ

새파랑 2021-05-11 0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단 제목부터 영 끌리지 않는데 리뷰가 확실하네요 ㅋ 물감님 리뷰가 더 재미있는거 같아요^^

물감 2021-05-11 10:02   좋아요 2 | URL
간만에 성격나오게 만드는 책이었습디다... ㅋㅋㅋㅋ
리뷰쓰는동안 커피 두잔 마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