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큼 가까이 -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코로나 이전에도 나는 4인 이상 모이기를 꺼려 했다. 사공이 많으면 피곤도 하거니와 알맹이 없는 가벼운 대화만 하게 되는 게 싫었다. 아니, 가벼운 게 싫다기보다 진지함이 없는 관계가 싫은 것이지. 근데 그런 사이들은 알아서 다 떨어져 나가더라. 허무한 인간관계가 씁쓸하기는커녕 오히려 집중할 대상이 줄어드니 편했다. 아끼는 사람만 챙기면 되니까 시간도 절약하고 에너지 낭비도 막을 수 있었다. 그렇게 걸러지고 남은 인맥들은 오랜만에 만나도 편안하고 늘상 대화가 즐겁다. 이처럼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은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을 주제로 하여 수상까지 한 작품을 읽었다. 완성도, 작품성, 대중성 중 어느 것도 빼어난 게 없는데 수상이라니 영 납득이 안 되지만 이런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이라야 말이지. 만약에 청소년문학상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시골 모습이던 파주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고딩들의 이야기. 이만 줄거리는 생략한다. 놀 거리가 많지 않았던 과거에는 확실히 친구를 만나는 횟수가 많았다. 하릴없이 동네를 쏘다니고, 남의 학교 운동장을 어슬렁거리고, 졸업앨범을 구경하러 친구네 놀러 가고, 가까운 산에 올라 동네 구경하고 그랬다. 그냥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 자체가 좋았던 것 같다. 이 책 속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특별한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통 날로 보내고 있지만 개성 있는 절친들 덕분에 무료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것이다. 학업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진로 때문에 고민을 하고, 외모 콤플렉스로 힘들어하는 등 학생이라면 누구나 겪는 평범한 일상과 감정들을 담담하게 기록한 소설이다. 이토록 평범한 작품이 대체 어떻게 수상작으로 뽑혔을까나. 이 책은 미스터리 소설이 분명하다.


확실히 정세랑의 글은 명랑명랑하다. 이렇게 본인만의 탁월한 색깔이 있고 매력을 잘 가꿀 줄 아는 작가가 은근히 보기 어렵다. 어떤 작품이든 읽다 보면 비슷한 유형의 작가나 작품이 연상되는데 정세랑의 작품은 그런 게 없다. 이것은 양날의 검과도 같아서 독보적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하고 고만고만하다는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이 작가는 얼마든지 우물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인데 왜 우물 안 개구리를 자처하는 건지 모르겠다. 소설가는 자신의 주 종목만 잘하면 그만인 운동선수가 아닌데 말이다. 혹여 작가가 지금의 스타일을 고집하겠다면 본인의 장점을 베이스에 사용하기보다 히든카드로 썼으면 한다. 그렇게만 해도 스타일에 큰 변화와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아직은 한가지 캐릭터밖에 연기할 줄 모르는 배우처럼 느껴진다. 어떤 작품을 내놔도 찬양하는 팬들로 인해 타성에 젖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럼 작품을 분석해보자. 이 책은 메인 사건도, 주요 인물도 없다. 고등학생들의 평범한 일상을 차례차례 소개하는 게 전부이다. 큼직한 에피소드가 없어 옴니버스 구성이라 볼 수도 없다. 그냥 여고생의 일기장을 들여다본 듯한 기분이랄까.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이 작품이 수상작에 뽑힌 건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아무리 봐도 평범하기만 하다. 일단 사건이랄 게 없으니 개성 있는 인물들의 티키타카 또는 케미스트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패션 취향이 확고하고 남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친구. 인기 많은 남학생을 짝사랑하느라 맘 고생하는 친구. 딱딱한 가정에서 자라나 표현과 소통이 서툰 친구 등등. 지금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고 누구나 공감할 흔한 감정들을 말하고 있다. 평범한 내용도 얼마든지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 텐데 작가는 일기장 같은 형식으로 저텐션을 유지하였다. 그래서인지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몰입했다기보다 아무런 감흥도 없이 무심하게 읽혔다. 정말로 글만 명랑했다.


졸업한 친구들은 전부 흩어진다.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해외를 가고 이사를 간다. 가끔은 따로 만나기도 하고 모두 모이기도 하면서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한다. 이들은 사랑에 실패하고, 직장을 옮기고, 회의감도 느끼는 등 세상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적응해나간다. 힘든 세상에 이리저리 부딪혀보며 청소년의 탈을 벗고서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 드라마. 작품의 정체성은 그렇다 쳐도 수상할만한 관전 포인트는 여전히 못 찾겠다.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미안하지만 정말 납득이 안되어서 그렇다. 그래도 수상작 타이틀만 빼면 썩 나쁘지 않았던 타 작품들에 비해 이 책은... 아직도 할 말이 많은데 더 썼다간 작가의 팬들이 가만있지 않을 듯싶다. 기호 1번 국민작가 정세랑을 뽑아주십쇼,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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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27 23: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왠지 기대가 큰 만큼 실망하신게 느껴지네요 ㅜㅜ 정세랑 작가님 인기가 많으신 거 같은데 저는 아직 안읽어봐서읽어보고 싶은데 딴 책을 읽어봐야 겠네요~!

물감 2021-06-27 23:54   좋아요 2 | URL
정세랑 작가의 책을 몇 권 읽어본 바, 한 2프로 부족한 느낌의 문장을 즐겨쓰는 타입같더라고요. 저도 다른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han22598 2021-06-28 00: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별로였어요 ..그래서 정세랑 작가에 관심이 제로였다가 보건교사 안은영 읽고 좋아하게
되었어요 ㅎㅎㅎ

물감 2021-06-28 07:11   좋아요 2 | URL
정말 꾸역꾸역 읽었네요..ㅎㅎ
안은영은 이거보단 낫겠죠 모...

Falstaff 2021-06-28 10: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윽. 물감 님하고 자꾸 의견이 겹쳐서.... 이거, 얘기하기 좀 민망하네요. 고의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전 유명세에 따른 계급장 떼고 <호밀밭...>하고 맞짱 한 번 붙여봤으면, 조건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만, 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물론 이긴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승부는 될 거 같아서 말입죠.

ㅋㅋㅋㅋ 재미있습니다.

물감 2021-06-28 09:57   좋아요 3 | URL
의견이 겹친다니 참 영광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계급장 떼고 붙게 해야한다는 생각은 저조차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지 못할 말인데, 역시 고수님들은 다르단 걸 느꼈습니다ㅋㅋㅋㅋㅋ솔직히 호밀밭은 레베루가 너무 다르지 않나 싶다가도 한국의 팬덤이라면, 하는 상상을 해봤습니다...하핳

그보다 이 작가는 아직 국내용이라는 생각이 계속 드네요.
좀만 더하면 국외에서도 먹혀들거 같은데 말이죠~
여튼 힘나는 댓글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6-28 1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시원하네요.

˝완성도, 작품성, 대중성 중 어느 것도 빼어난 게 없는데 수상이라니 영 납득이 안 되지만 이런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이라야 말이지. ˝ ˝이 책은 미스터리 소설이 분명하다.˝ ㅋㅋㅋ 여러 번 빵빵 터집니다.

제가 그 수많은 팬들이 열화와 같은 찬사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태 정세랑 작품을 1도 안 읽은 것이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도 일단 이 작가 작품은 보류해 봅니다.ㅎㅎㅎ

물감 2021-06-28 11:55   좋아요 1 | URL
왜 그런거 있죠, 주변서 너무 극성이라 오히려 반감사는거요...ㅋㅋㅋ
저도 전혀 끌리지는 않았는데 회사에 있길래 함 읽어봤어요. 또 수상작이라니까 괜히 궁금해져서ㅋㅋㅋ

이 책만 본다면 정세랑은 정말 거품작가나 다름없습니다. 그러고보니 귀여니 작가가 생각나네요... 파급력 면에서요ㅋㅋㅋ
 
팔코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1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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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은 화장실에서 클래식 음악이 24시간 흘러나온다. 콘체르토, 앙상블, 소나티네, 서곡, 왈츠, 행진곡, 교향곡, 심지어 성악까지. 볼일 보는 맛이 나서 되게 좋았는데, 얼마 전부터 한 대여섯 곡으로만 계속 재생되더니 이제는 트럼펫 솔로곡 하나만 반복 재생 중이다. 근데 그 곡의 멜로디가 워낙 우울하여 화장실 가는 게 싫어지다 못해 없던 변비까지 생길 지경이다. 그래, 이 정도 낭만은 있어줘야 참된 직장생활이라고 볼 수 있지. 시작부터 변비 가지고 뭔 낭만 타령이냐 하면, 직장보다 더한 낭만으로 가득한 교도소 배경의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난 주인공은 슬기로운 깜빵 라이프의 낭만파이자 비호감의 조건을 골고루 갖춘 캐릭터였다. 늘 그랬듯 고전은 아무 기대 없이 읽을 때에 얻는 깨달음도 크므로 이번에도 그리했더니 아무것도 건진 게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형을 살해한 죄로 팔코너 교도소에 갇힌 주인공은 죄수들과 마음껏 더티 러브를 즐긴다. 또한 마약중독으로 온전치 못한 정신 상태를 보이며, 답이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몸소 증명한다. 이렇게 동공 풀린 주인공의 시점을 실감 나는 글 속에 반영시켜 놓았다. 환각에 빠진 것처럼 몽롱한 분위기에다 주어도 없이 횡설수설하는 문장들이 연속된다. 그리고 매번 삼천포로 빠지듯이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는데, 이런 불친절한 작품은 꽤 오랜만이라 마음이 두근두근하데? 단단히 혹평을 벼르고 있었는데 점점 읽을 만 해지더니 후반부에는 글이 멀쩡해지는 게 아닌가.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을 즈음에 주인공의 약물 중독 상태가 완치가 돼버린다. 그러니까 중독자에서 정상인으로 바뀌는 과정을 글의 변화로 보여준 것인데 이 그라데이션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크게 감탄했다. 근데 이거 말고는 글쎄, 뭐를 말하려는 내용인지 몰라서 그냥 해설에 의존해야 했다. 확실히 이럴 땐 해설이 있는 게 도움이 된다.


인간이 지닌 본성의 이중성을 다룬 작품으로 유명하댄다.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 자들을 모아놓은 것은 그들의 결함, 결핍, 타락, 부작용도 삶의 일부분이란 것을 강조하려는 뜻일 거다. 그러나 이 책을 작가주의로 분류하기엔 여러 가지로 장벽이 높다. 인간은 살면서 수많은 선택지를 마주하고, 언제나 내 자신과 맞는다고 생각되는 길로 결정한다. 결과가 어떻든 그 방향은 곧 나 자신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 사회에서 완벽하게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사회가 묵인하는 범위 안에서만 나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유지할 수가 있다. 반대로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될 수 없는 영역, 즉 공동체의 모습에서 벗어난 행동을 보인다면 살기 힘들다는 말이다. 그럼 마약, 살인, 동성애 같은 경우는 어떨까. 이것들이 내가 나일 수 있게 해준다 한들 사회는 절대 용납지 못한다. 그런데 교도소에서는 그것조차도 존중을 받는다. 뜻이 맞는 자들끼리 모였으므로 감옥만큼은 온전히 나다운 모습일 수가 있다. 그래서 죄수들은 자유롭던 바깥 생활에서 자신을 감출 때보다, 억압된 감옥에서의 자신을 더 좋아하고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의도는 알겠으나 동성애 장면이 투머치할 필요는 없었는데.


주인공은 본인의 할당량인 약물을 받지 못하자 난폭하게 변한다. 한때는 교수였으나 지금은 한낱 광인에 불과한 그의 상반된 모습으로 저자는 숨어있던 또 다른 자신을 끄집어냈다. 사람들은 빛 가운데서도 방황할 때가 있고, 어두움에 속해서 분간하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팔코너의 죄수들도 그러했다. 크리스마스트리 옆에서 사진을 찍은 죄수들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애틋해진다. 이렇게 인간의 양면이 드러나는 장면이 계속해서 나오는데, 이만하면 인간 자격이 있는 게 아니냐고 묻는 작가의 음성이 내내 맴돌았다. 여기에 동의하는 건 죄수들을 옹호하는 기분이 들어 찝찝하단 말이지.


애인이었던 조디가 탈옥을 하면서 스토리의 방향이 팍 꺾인다. 인생이 끝났다고 보는 다른 죄수들과 달리 조디는 이 막다른 길에서 절망하지 않았고 목표를 가졌다. 그리고 계획을 보란 듯이 성공해내자 주인공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였다. 저 또한 새 삶을 살아도 된다는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에. 다시 세상에 나간다는 것은 진짜 나로서 살아갈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결국 그도 팔코너를 탈출하고 세상에 발을 내디디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열린 결말이면서도 납득할만한 엔딩을 보여주고 있어 묘하게 여운이 남는다. 그건 아마도 탈출 직전에 형을 죽인 이유가 밝혀져서 그에게 연민을 품게 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평과 작품의 주제가 많이 동떨어졌을 수도 있는데 그냥 작품에서 부각된 것들만 적어봤다. 존 치버도 꽤나 위대한 작가로 알려져 있던데 이 작품만으로는 잘 모르겠네. 좀 더 지켜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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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20 20: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첨들어보는 작가라니 ㅜㅜ 물감님 별3개이면 이건 정말 3개인듯 하네요😌 전 책 다읽고 해설읽으면 ‘아 이게 이런거였어?‘ 하는 순간이 많더라구요 ㅎㅎ 해설없는 책은 뭔가 좀 아쉽더라구요~~

물감 2021-06-20 20:20   좋아요 3 | URL
너무 제 평을 믿진 마세요ㅋㅋㅋ
취향은 다 다르니깐요😎
저는 고전을 해설때문에 문학동네 꺼만 읽는데, 다른 출판사 고전들도 해설이 있나요?

미미 2021-06-20 20:28   좋아요 5 | URL
민음사도 해설이 제법 잘 쓰여져 있습니당ㅋㅋㅋ😎

새파랑 2021-06-20 20:39   좋아요 3 | URL
전 요즘 ‘열린책들‘ 이 좋더라구요. 해설도 있는데. 양장이어서 좋아요 ^^

미미 2021-06-20 20:43   좋아요 3 | URL
열린책들이 사이즈도 아담하고(그립감 굿) 표지도 더 이뿌죠ㅋㅋ

물감 2021-06-20 20:47   좋아요 3 | URL
역시 고전은 해설이 필수군요. 양장본이 좋긴한데 책장에 자리를 너무 차지해요...ㅋㅋㅋ

coolcat329 2021-06-20 21:4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은 책인데 내용이 좀 하드코어일거같아 나중에 사야지하고 미뤄뒀네요.

횡설수설 삼천포>점점 읽을만>글 멀쩡 ㅋㅋ 이건 내용을 떠나 가독성이 좋다는 거죠?
열린 결말이면서도 결말이 납득도 된다니 다행입니다 🤭
리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물감 2021-06-20 21:55   좋아요 5 | URL
뭐 그렇게 매운맛은 아닙니다만, 동성애가 싫은 분들에겐 비추합니다...ㅋㅋㅋ

가독성의 변화는 놀라워요. 중반까지는 한 내용이 계속 이어지고 늘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요, 그러다가 갑자기 챕터가 나뉘더니 문장이 또렷해져요. 그 변화를 잘 못느끼고 있다가 주인공의 약물치료가 끝났다는 내용이 나와서 소름돋았어요. 그 직전부터 읽기가 수월해지고 있었거든요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비종 2021-06-21 00: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무척 당황했던 자로서 격하게 공감합니다~‘아무것도 건진 게 없어서‘에ㅋㅋㅋ

성욕에 대해서는 아직도 답을 모르겠어요. 인간의 기본적인 3대 욕구가 식욕, 수면욕, 성욕이라는 말에 대해서 꽤 오래전부터 의구심을 품고 있거든요. 전문적인 서적을 뒤적거린 게 아니라 별 신빙성은 없지만 인터넷 검색으로 여기저기 찾아보니 ‘성욕‘이 기본 욕구에 포함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도 하고. ‘배설욕‘이 대신 들어간다고도 하고. 이 책에서 이성애자로 보였던 주인공이 교도소 안에서 동성애에 빠지는 것을 보면 역시 기본적인 욕구에 속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성직자분들을 떠올리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성적인 정체성을 뒤늦게 깨닫는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타고난 본성인가 싶기도 하고. 그냥 커다란 테두리로 인간이라는 존재에 끌리는 걸까 싶기도 하고. 매력을 느껴보니 남자였다, 여자더라 뭐 이런?ㅎㅎ
중독자의 관점에서 쓴 글이라... 오~~ 신선한 관점이십니다!! 다시 한 번 그라데이션을 짚어보고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가 역시 재미는 없는 작품이라 냉큼 포기했습니다~ㅋㅋ

‘언제나 내 자신과 맞는다고 생각되는 길로 결정한다. 결과가 어떻든 그 방향은 곧 나 자신이라는 의미이다.‘ 이 부분 좋습니다. 많이 생각하게 되네요.^^
똑같은 행위라도 속해있는 공동체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용인되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과연 절대적인 선이나 악이 존재할까 생각이 들기도 해요.
동성애 장면을 읽으면서 본능을 따라가는 인간의 정체성을 말하고 싶은 걸까, 작가는 이걸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많이 생각했어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만ㅎㅎ^^;

‘사람들은 빛 가운데서도 방황할 때가 있고, 어두움에 속해서 분간하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저는 물감님의 이 문장이 왜 이리 찡한 걸까요. 많이 공감이 되는 문장입니다.
누구도 악인이지 않지만 악인이 될 수 있으며 악인이 되는 건 건조기 속 빨래 같이 랜덤으로 발생하는 실수일 뿐이다?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탈출하는 방식도 뭔가 의미심장하기는 해요.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새로운 삶을 얻는 컨셉이니까요.
이번 작품을 통해 고전과 나비종의 장르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널리 읽힌다고 반드시 나와 맞으리라는 법은 없구나, 인간 본성이고 나발이고 나란 인간은 이런 거 싫어하는 인간이로구나 하구요.ㅎㅎ

물감 2021-06-21 10:09   좋아요 3 | URL
해설이 있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요ㅋㅋㅋㅋ

식욕, 수면욕과 달리 성욕은 절제가 가능한 걸로 봐서 저도 갑자기 의구심이 드는데요? 성 정체성은 원래 있는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아내를 사랑하고 잘지내왔던 사람이 어느날 한순간에 동성을 사랑하게 된다는 게 그럴수가 있나 싶어져요. 근데 미국은 뭐든 다 가능할 것 같단 말이죠 ... 하하하

폭력은 나쁜 것이지만, 악인에게 휘두른 폭력을 보며 통쾌한 마음이 들때마다 생각해요. 선악의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이라고요. 동성애도 그렇고 형을 살해한 죄 역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신념 까지는 아니라도 쉽지 않은 선택을 한 건 그것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니까... 누가 어느 길을 가던지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

사람은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고 크게는 죄를 범하기도 하면서 성장하곤 하잖아요? 또는 패러것처럼 자신을 알게 되기도 하고요. 그렇게 어두움에 있어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동료의 죽음이 새삶을 생각하게 된 계기인 것도 같은 맥락인듯해요. 역시 말년에 쓴 작품이라 그런지 심오하네요 ㅋㅋㅋ

역시 다양한 작품을 만나봐야 독서력이 느는 기분이 들어요~ 항상 운좋게 좋은 책만 읽을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ㅋㅋㅋ 여튼 잘 안맞는 책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독서모임으로 또 뵈어요 !

Falstaff 2021-06-21 09:2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군요.
전 이 책을 꽤 근사하게 읽었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 감상이 갈리는 것, 이게 바람직한 일 아니겠습니까. ^^

물감 2021-06-21 09:42   좋아요 5 | URL
아마도 저의 내공이 낮아서 음미하지 못한게 아닐까 합니다^^;
저도 사실 제가 제대로 읽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ㅋㅋ
다른 장르들도 그렇지만 고전은 참 여러 갈래로 나뉘는 감상이 묘미인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분들의 평들도 신선해서 좋습니다. 근데 고전은 확실히 어려워요... ㅋㅋㅋ

잠자냥 2021-06-21 10:02   좋아요 5 | URL
저도 이 책을 꽤 근사하게 읽은 1인 중 하나입니다.
아마 제가 존 치버를 좋아해서 더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만, 전 그 동성애자의 고통을 굉장히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작가의 동성애+알코올 중독 경험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더 절절하게 다가온 것 같고요. 암튼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다른 의견이 있어야 바람직하지요. ㅎㅎ

물감 2021-06-21 10:26   좋아요 6 | URL
고수님들이 몰려오니 저 점점 작아지는데요.. ㅎㅎㅎ
높다고 느꼈던 동성애의 장벽이 갑자기 높게 느껴지지 않네요.
어쩐지 재독하게 되면 잠자냥님처럼 좀더 동성애자에게 몰입할 수 있을것도 같아요. 일단 세월 좀 지나서 다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coolcat329 2021-06-21 12: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위에 고수님 두 분 같이 다니셔서 넘 웃겨요 ㅋㅋㅋ

물감 2021-06-21 12:27   좋아요 1 | URL
고수들이 워낙 많아서 일반인 되기도 쉽지 않은 알라딘 마을이에요...하핳

coolcat329 2021-06-21 12: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점심 시간이라 기뻐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물감님 고전 리뷰 저는 늘 재미있게 읽습니다. 물감님의 개성있는 감상문이 저에게 자극이 되네요.

물감 2021-06-21 12:17   좋아요 1 | URL
알라디너 분들은 다 상냥하시네요ㅎㅎ덕분에 힘이 납니다! 이맛에 글쓰는가봐요😎😎😎

잠자냥 2021-06-21 13:05   좋아요 3 | URL
저도 물감 님의 그 특유의 날선 비판 리뷰 잘 보고 있습니다. 모두가 좋다고 할 때 아니라고 하는 그 리뷰! 좋아요! ㅎㅎ

물감 2021-06-21 13:16   좋아요 3 | URL
오늘 무슨 날인가요?
이렇게 많은 댓글과 응원을 받다뇨...얼떨떨합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잠자냥님^^ 더욱 분발하겠습니다ㅎㅎㅎ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 - 시나리오에서 소설까지 생계형 작가의 글쓰기
김호연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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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글쓰기에 대한 강의나 작법에 대해 알려주는 책 같지만, 한국에서 작가라는 직업으로 살아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내용이었다. 부제가 <생계형 작가의 글쓰기>인데, 말 그대로 작가 개인의 생존기만을 기록했다면 굳이 책으로 출간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자세히는 몰라도 전업작가가 힘든 건 웬만큼 다 아는 사실이니까. (근데 본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저자가 영화사와 출판사 및 각종 프로덕션을 다니면서 체험한 업계의 사정이나 로직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그쪽으로 진로를 생각 중인 분들에게 제법 유용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나처럼 글 쓰는 행위가 즐거운 일반인에겐 보다 더 글에 대한 갈증과 방향성과 보완할 점들을 깨우쳐주는 책이다. 시나리오 공부, 작법 연구, 문장 연습 다 좋지만 부지런히 글만 쓰는 게 정답은 아니므로 이 같은 책도 읽어줄 필요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히트친 작품들이 SF, 스릴러, 판타지 같은 장르소설인데 아직도 한국은 7080의 문학성을 최고로 여긴다. 작가도 그렇고 독자도 그렇고 한국인들은 상업을 목적으로 쓴 소설을 등한시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서점 사이트의 구매 순위나 독서 커뮤니티의 인기 리뷰들이 죄다 문단 소설인 것도 그 증거다. 최근에 우리나라 배우들이 가수들을 무시한다는 온라인 기사를 봤는데 딱 그런 느낌이랄까. 나도 또한 다년간의 리뷰활동으로 실감한 게 있는데, 장르소설의 리뷰는 유독 반응이 약하다는 것이다. 잘 보면 내 글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블로거들의 리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독자들보다 작가들이 더하고 평론가나 심사위원들은 더 더하다. 반응이 없다는 건 글쓴이의 입장에서 매우 기운 빠지는 일이다. 내가 자신 있는 쪽으로 도전했는데 전혀 먹히질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고 좌절한 다음 많이들 하는 실수가 남이 좋아하는 글만 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일시적인 반응과 효과를 볼지는 몰라도 나의 길이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있다. 김호연 작가 역시 좌절과 회생을 수없이 반복하고 이런저런 작업을 거치면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닫게 된다.


결국 글쟁이는 자신의 오리지널을 갖추어야 하고 개인 브랜딩을 해야만 한다. 좋은 글을 많이 읽고 롤모델을 연구하되 나만의 것을 완성해야 한다. 언제나 그래왔듯 내 글이 살아남으려면 ‘나의 것‘으로 부딪혀야 먹혀든다. 반대로 독자들이 흔한 글을 싫어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는데, 타인의 공감을 얻어내려 작정하고 쓴 글이라면 그만한 성의를 보이라는 말이다. 나는 분명 영혼까지 갈아 넣었는데 반응이 영 별로다 싶으면 고치고 또 고치면 된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고들 하니까 쓰레기가 아닐 때까지 수정하다 보면 소위 ‘팔리는 글‘이 된다. 이 책의 저자가 그것을 증명했으니까 참고해보시길.


본인의 내공 쌓기나 필력 향상, 감각 기르기도 중요하지만 훌륭한 파트너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이 책의 7~8할은 도움 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데 그들이 먹고 살 길을 마련해줘서가 아니라, 작가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길라잡이가 되어줘서 그렇다. 유튜브만 해도 편집자가 있고없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듯 글쟁이 또한 파트너의 도움을 받아야만 글과 그릇이 성장할 수 있다. 나는 본격적으로 리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주변인에게 꼭 피드백을 받고 있다. 단언컨대 필력을 키우기에는 이만한 지름길도 없다. 글이란 게 죽어도 안 써지는 날이 있고, 문득 영감이 떠올라 미친 듯이 잘 써지는 날도 있다. 글 쓰는 행위야 말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런 리뷰글 말고도 편지, 공문, 협조전, 브로슈어, 이메일, 광고 디엠 등 살면서 중요한 글을 써야 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정성이 들어간 활자들은 주목을 받든 외면을 당하든 자체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글쟁이들은 반응의 유무와 상관없이 써야만 한다.


무산된 프로젝트, 공모전 탈락, 반려된 원고, 날아간 시나리오, 못 받은 계약금 등등. 온갖 고배를 다 마시고도 이 바닥을 뜨지 않은 저자는 고인물 중에 고인물이다. 자신의 길을 수도 없이 의심했지만 글쓰기에 대한 갈증이 마침내 그를 소설가로 등극시켜주었다. 제 삼자가 본다면 독종이 따로 없다고 할 텐데, 이 책을 보면 그저 순수한 열정만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수많은 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들이 비슷한 절차를 밟았을 테지. 그러고 보니 내가 세차게 혹평했던 작품을 쓴 작가들에게 미안해진다. (그런데 저만큼 피드백 주는 독자도 없을 거예요.) 여튼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소설가로 자리매김한 저자에게 버텨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이 책 덕분에 나도 글 쓰는 게 한층 더 즐거워졌다. 앞으로도 쓰기 위해 독서하는 삶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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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6-13 23: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별 다섯! 물감님 글쓰기를 한층 더 즐겁게 만든 이 책 장바구니로 ~@~@

물감 2021-07-07 16:13   좋아요 4 | URL
ㅎㅎㅎ이제 스캇님 댓글이 안달리면 어쩐지 허전합니다. 알라딘 지박령 스캇님😀😀😀

그레이스 2021-07-07 16:11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

물감 2021-07-07 16:24   좋아요 1 | URL
ㅋㅋㅋ올해들어서 가장 열일하는 분이시죠

scott 2021-07-07 16: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이달의 당선 축!!

이책 내가 찜 👆

물감 2021-07-07 16:23   좋아요 2 | URL
오오 당선 되었군요, 소식 감사해요ㅋㅋ

새파랑 2021-07-07 16:45   좋아요 2 | URL
축하드립니다 물감님.언제나 멋진글 잘 읽고 있어요 👍

물감 2021-07-07 16:52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저도 매번 새파랑님의 엄청난 독서 열기에 자극받고 있습니다.
알라딘 마을을 계속 달궈주세요 ㅎㅎㅎ

그레이스 2021-07-07 16: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축하드려요^^

물감 2021-07-07 16:24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ㅎㅎ

서니데이 2021-07-07 16: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물감 2021-07-07 16:53   좋아요 4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님^^
어쩜 이렇게 다들 소식이 빠르신지 ㅎㅎㅎ

초딩 2021-07-07 23: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물감 2021-07-08 00:1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고수님들에 비하면 저는 낄자리가 못되는데 먼가 쑥스럽습니다^^;

황후화 2021-07-08 0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물감 2021-07-08 00:1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황후화님🙂🙂🙂

이하라 2021-07-08 0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물감 2021-07-08 08: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근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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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만큼이나 실망의 빈도수가 높은 것이 바로 문학 수상작이다. 여러 번 낚이고 보니 이제는 수상작 타이틀이 평범하게만 느껴진다. 그럼에도 매번 기대하며 다시 찾게 되는 걸 보면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듯. 이번 책도 반신반의 심정으로 골랐는데 다행히도 중박 이상이었다. 요즘 날도 덥고 해서 짧고 굵게 읽을만한 책을 찾고 있었는데 때마침 딱 좋은 작품을 만났다. 어그로성 짙은 제목에 비해 내용은 의외로 순한 맛이다. 더우니까 리뷰도 짧고 굵게 쓰겠다.


노인은 백수 남녀 두 명을 데려다 개천에 있는 오리 사진을 찍어오게 한다. 저들 중 한 마리가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를 잡아먹었댄다. 황당한 지시와 달리 진지한 노인은 꼬박꼬박 일당을 챙겨주었다. 뜨거운 땡볕 아래 날마다 오리 사진을 찍는 두 남녀는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인데 돈은 필요하고, 성과도 없이 돈만 받아 가는 것 같아 양심이 찔린다. 그냥 노인을 속여서라도 이 미친 짓을 그만두고 싶은데 눈치 빠른 노인은 절대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과연 고용주와 고용인 중 누가 더 미친 사람일까. 그리고 빌어먹을 오리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모든 직업이 그렇듯 작가에도 끼가 타고난 재능형과, 훈련으로 다져진 노력형이 있다. 자유분방한 전자의 글은 기발하고 통통 튀는 맛이 있고, 철저히 계산된 후자의 글은 스타일리시한 맛이 있다. 둘 다 좋지만 나는 후자 쪽을 더 선호한다. 솔직히 말하면 재능형들의 글은 참 쉽게 쉽게 쓴다는 인상을 줄 때가 많았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치열하게 쓰는 노력형들에 비하면 비교가 되는 게 사실이다. 그런 경험과 데이터로 볼 때 김근우 작가는 전자 같은 후자였다. 먼저 작품의 특징을 보면 등장인물도 적고, 배경과 무대도 좁고, 주목할만한 사건이 발생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제한된 조건에서 재미를 끌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데 작가는 그것을 해냈다. 이런 하이브리드형 작가가 많으면 참 좋을 텐데.


이 간단명료한 서사의 작품은 보기보다 건드릴 게 거의 없다. 일단 두 남녀가 그냥 백수가 아니라 인생의 쓴맛을 본 루저라는 설정이 아주 좋았다. 이들이 만약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에 사로잡혀있었다면 흔한 전재가 되었을 것이다. 돈이 궁한 두 사람은 오리 사진을 찍는 일이 비정상인 줄 알면서도 다단계에 빠진 사람처럼 멈출 수가 없다. 뭔가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이 짓을 계속했으면 하는 두 마음의 대립이 작품의 포인트라 하겠다. 노인은 눈앞에서 자신의 고양이를 잡아먹었다는 오리에 대한 증오가 대단했다. 노망난 할배의 헛소리라 하기엔 너무도 강경한 노인의 태도는 복잡한 가정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내가 위독하자 노인은 사업을 아들에게 위임하였으나 아들은 제 욕심으로 사업을 말아먹었다. 노인은 아내와의 사별 뒤 아들 가족과 절연하였지만 아들은 노인의 재산을 노리며 이런저런 핑계로 계속 찾아온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있을만한 사연인데 뜬금없이 고양이를 먹은 오리는 뭔가 싶은 두 남녀. 어쩌면 노인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한 게 아니었나 하는 결론에 다다르자 더욱 난관에 부딪힌다.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타겟으로 삼은 것은 쉽게 말해 사건을 종결할 마음이 없다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방치 중인 노인의 집은 조만간 폐가로 될 것이었다. 일당만 받아 가면 그만이었던 고용인들은 슬슬 빡치기 시작하더니 시키지도 않은 집안일을 하기 시작한다. 가만두라는 고용주에게 대들면서까지 봉사활동에 전념하는 고용인들과, 그들에게 가족의 정을 느끼고 마음 문을 열게 된 노인. 사람에게 입은 상처는 사람만이 치유해준다는 흔한 교훈이지만 좋으면 그만이지 뭐.


허상을 쫓는 것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다,라는 것을 심어준 참 괜찮았던 소설이다. 처음 보는 작가라서 이력을 찾아보니 주로 다크 판타지물을 쓰신 분이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말랑말랑한 글을 썼다는 것도 놀라운데 수상까지 했다니 정말 능력자이다. 진짜 하이브리드형 작가가 맞다니깐.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 그나저나 여러분, 저 엊그제 백신 맞고 지금 골골대면서 글 쓴 거라 평소보다 허술해도 이해해주십셔. 여파가 어마어마합니다요. 털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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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6-13 00: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쿵~ 백신 후유증 중이시군요! 얼른 가뜬해지시길!! 저도 수상작품은 실망할 때가 많은데도 수상작?하며 눈길 한번 더 가게돼요~ 그래서 작가라면 다들 수상하고 싶은 거겠죠?ㅎㅎ그러구보니, 저도 상 받고 싶네요~ㅎㅎㅎㅎ

물감 2021-06-13 00:56   좋아요 3 | URL
다행히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ㅎㅎ
사실 수상했든 못했든 고생한 작가들은 잘못이 없죠. 출판사와 심사자들의 과도한 찬사가 문제니까요😅 붕붕툐툐님은 알라딘에서 리뷰상 많이많이 받으실거에요ㅎㅎ
 
우리 아버지들의 마지막 나날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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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독서생활을 하다 보면 본인의 취향이 어떤지 잘 알게 된다. 그것은 분야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책이 좋을 수가 없고 세상만사가 관심사일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편협한 독서를 하도록 되어있다. 이것을 알기 전의 나는 편협한 독서에 대한 선입견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으로 보여져 말 그대로 취향 존중을 하게 되었다. 설령 야설 광이라도 다 이해한다. 한때는 나도 스릴러소설만을 고집했었으나 이제는 좀 더 다양한 장르에도 도전해보고 시각이 넓어져 다행이라 느낀다. 그리고 나 역시 확고해진 취향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역사소설하고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있었던 사건을 아무리 각색한들 알려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신선함도 없고 흥미도 생기질 않는다. 그런데 좋아하는 작가가 쓴 작품이라면 내 취향과 상관없이 읽어주는 게 의리 아닌가. 더군다나 이번 신간은 조엘 디케르의 데뷔작이라고 하니 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주인공 폴에밀은 아버지를 홀로 두고 군에 자원입대를 한다. 여차여차해서 영국 첩보요원이 된 그는 전쟁터로 간다. 작전이 실패할 때마다 동기들이 죽었으며, 남은 사람도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전쟁이 길어지자 아버지가 걱정되어 찾아간 주인공은 독일군에 붙잡히고,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요원들을 육성하는 과정은 영화 <킹스맨>을 생각나게 한다. 고된 훈련을 받으며 동기들 간에 트러블도 겪고 낙오자도 생기는 장면들을 상세히 다루어서 저절로 몰입하게 된다. 초반에는 서로 삐걱거리다가 나중에는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이가 된 동기들. 비록 뿔뿔이 흩어졌지만 지겹고 괴로운 전쟁을 버틸 수 있던 것은 함께 했던 동기들 덕분이었다. 어쩌다가 서로 만나거나 혹은 소식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곤 했다. 그러나 긴긴 전시상황으로 육체는 지쳐가고 정신은 병들어버린다. 정상의 삶을 잃어버린 동기들은 서서히 두 그룹으로 나뉜다. 존재의 의미를 전쟁 속에서 찾으려는 무리와, 인류애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무리로. 전자는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단 생각에 갇혀있었고, 후자는 전쟁이 끝난 후의 삶을 그리고 있었다. 여기서 주인공은 전자의 입장에서 후자의 입장으로 넘어간 케이스였다.


주인공 폴에밀은 요원으로나 인간으로나 백 점이었다. 특히 온화한 성품으로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그러나 군의 방침을 어기고 적에게 발각된 것도 그 온화함 때문이었다. 입대 후 한 번도 뵙지 못한 아버지가 너무 그리웠고, 홀로 힘겹게 지낼 아버지가 너무 걱정되었다. 그는 자신의 계급과 신망을 이용해서 아버지에게 안부편지를 보낸다. 해서는 안될 일임을 알았지만 터져버린 감정은 멈출 줄을 몰랐다. 결국 꼬리가 길어져 잡히게 된 그는 동료를 밀고하고 아버지를 살리는 길을 택한다. 국가의 안전보다 아버지의 안전이 중요했던 폴에밀의 선택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일까.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이 최선책이라곤 하나 그게 반드시 정답일 수는 없다. 여튼 이런 내막을 모르는 남은 동기들이 주인공의 죽음을 알리려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남은 날들을 슬픔으로 지새우게 할 수는 없으니까.


제목만 보면 아버지에 관한 작품 같은데 알맹이는 전쟁으로만 가득해서 많이 아쉬웠다. 아버지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데다 주인공을 기다리며 발 동동 하는 장면이 전부였다. 아무리 봐도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작품으로 보여지지 않는데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을까.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주인공의 너무 이른 퇴장이었다. 한번 끊어진 맥은 복구가 불가했고, 동기들만으로는 남은 분량을 채우기에 역부족이었다. 왜 공들여 쌓은 탑을 갑자기 무너뜨리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첫 작인데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나저나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라 그런지 리뷰도 참 재미없게 써지는군. 퍽이나 아름다운 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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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07 00: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과 표지의 괴리인가요? ㅎㅎ 물감님 리뷰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완전 날카로운~!! 물감님은 역사소설하고 안맞는다고 하시는데 저는 중국소설하고 SF가 잘 안맞더라구요. 손이 잘 안감 ㅜㅜ

물감 2021-06-07 08:04   좋아요 3 | URL
ㅋㅋㅋ의미심장한 제목이 내용과는 크게 연관이 없어보였어요.
그러고보니 저는 중국소설을 아예 안읽었네요. SF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요. 저랑 새파랑님은 문과쪽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