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7일 모중석 스릴러 클럽 25
짐 브라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일이 년 전만 해도 슬림핏이 유행이더니 지금은 와이드핏이 유행이다. 과거의 각 잡고 꾸민듯한 패션은 이제 동네 마실 나가듯 프리한 감성의 패션으로 바뀌었다. 분위기가 확 바뀐 거리와 사람들을 바라보니 그전의 패션들이 너무 투머치 했었구나 싶다. 사람들은 뭐든 적당한 게 좋다고들 하고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한다. 저마다 적당함의 범위는 다를 테지만, 과하다고 느끼는 포인트는 비슷할 것이다. 여러 방면에서 볼 수 있는 이 투머치함을 소설에서 만나는 신선한 경험을 하고 말았으니 벌써부터 손가락이 근질근질 거린다. 그러나 리뷰까지 투머치하면 안 되므로 적당히 써보겠다.


열 두 명의 남녀가 한 섬에 모여서 일주일간 서바이벌 게임을 진행한다. 방송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 리얼리티 쇼의 승자가 되면 거액의 상급과 별도의 혜택이 주어진다. 그런데 오프닝 도중 사회자가 죽어버리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이윽고 섬 전체에 들려오는 한 목소리. 참가자들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으며 7일 동안 24시간마다 백신을 맞아야 살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의 모습은 섬 전체에 설치된 캠을 통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며, 전 국민의 투표에 따라 매일 한 명씩 죽게 된다. 대체 어떤 정신병자가 이런 엽기적인 쇼를 기획한 걸까. 


규칙을 어기는 행위에는 그만한 응징이 주어졌고, 정체 모를 바이러스 때문에 국방부도 올 수 없었다. 투표수가 많은 사람은 백신을 맞지 못해 죽음을 맞이한다. 딱 추리소설의 밀실 살인사건과 닮아있다. 폐쇄된 공간, 연쇄 살인사건, 그리고 숨어있는 범인. 그런데 전 국민이 다 알고 있으니 폐쇄라 볼 수가 없고, 범인이 직접 죽이지도 않으니 연쇄 살인이라 하기도 애매하다. 진퇴양난의 베이스와 예측불허의 설정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참가자들을 투표해 사형을 내리는 국민들과, 바이러스가 퍼지지 못하게 섬을 지우려는 국방부. 보다시피 미국은 참가자들을 구해낼 마음이 전혀 없다. 이번 쇼의 목적은 잠재돼있는 인간의 악한 면을 끄집어내는 것이었고, 범인의 시나리오대로 국민들은 살인 공범자가 되었으며 미국의 정의나 위상은 완전히 추락해버렸다. 저자가 베테랑 방송인이라는데, 그동안 보고 느낀 미디어의 위험성과 인간의 이중성을 샅샅이 고발하고 싶었던 듯하다. 아쉽지만 실패입니다.


자 이제 비평의 시간. 저자의 투머치한 자신감은 과다한 욕심으로 변형되어 흉측한 괴물을 낳았다. 일단 서바이벌 플롯인 만큼 등장인물이 정말 많다. 그 많은 인원을 일일이 체크할 수 없으니 캐릭터들의 입체감도 그만큼 줄어든다. 비중 없는 인물들이 한 명씩 퇴장한다 해서 남은 이들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작품이 사건 중심이라면 모를까, 참가자마다 사연이 있는데 너무 간소화해서 다루지 않는 것만 못했다. 특히 트라우마와 싸워야 하는 이 중요한 장면들마저 짧게 지나가는데, 분량 조절 문제도 있고 하니 이해한다지만 너무 가벼워서 영 불만스러웠다. 이럴 거면 중요 인물 두세 명만 골라서 집중하는 게 훨씬 나았을거다. 배스킨 라빈스의 서른 세 가지 맛을 다 사 먹으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욕심은 이게 다가 아니다. 인물들도 잘 챙기지 못하는 마당에 섬 밖의 상황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섬에 접근하던 군 헬기는 알 수 없는 오작동에 추락하였고, 통제불능의 두려움과 바이러스의 무서움이 백악관을 지배하였다. 대통령은 기자 한 명을 골라 정보를 흘려주어 언론을 장악하기로 한다. 이 기회를 통해 벼락 스타가 된 기자는 자신의 추리력으로 정보의 조각들을 모아 섬의 진실에 다가간다. 이어서 그 기자를 노리는 또 다른 그림자가 등장하고... 진짜 대책 없이 판을 키운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그 많은 스텝들이 전부 진실에 닿기 위한 것도 아닌 데다, 섬 안의 상황만으로도 모자란 분량을 왜 자꾸 쪼개고 쪼개는 건지 원. 


참가자들은 빠져나갈 구멍도, 역전시킬 카드도 없다. 범인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고, 백신을 맞지 못한 누군가는 무조건 죽어야 한다. 여기에는 변수도 없고 반전도 없으므로 서스펜스 또한 전혀 볼 수가 없다. 이 쇼가 전 국민을 관음증에 걸린 빅 브라더로 바꿔놓았지만 딱 거기까지 일 뿐, 이 현상이 독자에게 아무런 경고장이 되어주지 못했는데 저자는 꽤나 만족했는 갑다. 그리고 죽음이 오늘내일하는 긴박한 와중에 로맨스가 웬 말이며,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데 격정적인 몸의 대화가 웬 말인가. 다시 말하지만 실패입니다. 


장르소설이란 집안을 꾸미는 일이다. 벽지와 장판으로 베이스를 갖추고, 가구 배치로 동선을 체크하고, 조명으로 분위기를 만들고, 액자 같은 소품으로 포인트를 줘야 한다. 신경 쓸 게 많아서 힘들다면 적당히 미니멀리즘으로 가도 된다. 허나 저자는 그럴 생각이 1도 없었고, 있는 대로 가구와 소품을 구겨 넣음으로 집안을 무슨 창고처럼 만들어놨다. 혹시나 해서 다른 작품도 있나 했더니 국내에는 이 책 뿐이더군. 이제 책은 됐으니까 본업에 충실하시길 바라바라바라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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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8-23 23: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저자가 들으면 뼈맞아 아프겠네요~ㅎㅎㅎㅎ

물감 2021-08-23 23:57   좋아요 1 | URL
이렇게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들은 좀 아파볼 필요가 있습니다ㅋㅋㅋ

새파랑 2021-08-23 23: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왠지 빡침이 글에서 물씬 느껴지네요. 내 아까운 시간! 하는 물감님의 절규가 눈에 보인다는 😅

물감 2021-08-23 23:59   좋아요 1 | URL
광고에 낚인 제 잘못도 있죠 뭐...ㅋㅋㅋ이젠 예전처럼 정성을 다해서 까는 게 힘드네요😔

독서괭 2021-08-24 0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저자 욕심이 과했군요… 설정이 좋은데 구성력이 떨어지는 소설 보면 좀 안타깝죠^^;

물감 2021-08-24 07:17   좋아요 0 | URL
아이디어가 아까워요. 이걸 다른 작가가 썼으면 좋았을걸,싶어요ㅋㅋㅋ
 
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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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러더라. 자기 연예인 시켜주면 정말 잘 할 자신 있다고. 글쎄, 과연 퍽이나 잘하겠다. 그런 말하는 사람치고 멀쩡한 사람을 본 적도 없지만 혹여 스타가 된다 해도 금방 떨어져 나갈걸. 연예계는 티비에서 보던 거랑 전혀 딴판이거든. 그러니 내 라이프스타일과 맞지도 않는 타인의 삶을 그만 좀 부러워하라고, 신세타령은 그만하고 영단어나 더 외우라고, 저 철없는 친구에게 누가 나 대신 말 좀 해줬으면 좋겠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걱정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는 쓰리잡을 뛰고, 누구는 범죄도 저지른다. 그렇게 해서 돈 많이 벌고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거지는 거지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살기 힘들다니까 뭐. 자 그럼 본인의 그릇과 맞지 않는 신분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백인의 신체적 특징을 가진 흑인 여성 클레어. 인종을 속이고 백인과 결혼하여 신분 상승에 성공한 클레어. 옛 친구 아이린을 만나고부터 할렘가 죽순이가 된 클레어. 이제서야 본인에게 맞는 옷을 찾아 기뻐하는 클레어. 고삐 풀린 그녀는 개념 밥 말아먹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린의 몫이 되었다. 이제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으려면 클레어를 밀어내야만 한다. 


복잡할 것도 없는 내용이지만 꽤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이 책은 패싱을 해온 클레어가 아니라 아이린이 주인공이며, 패싱에 관한 내용보다 아이린의 고군분투 내용에 더 가깝다. 클레어 먼저 말해보자. 백인 사회에서 정체를 감추고 사느라 지쳤던 클레어는 흑인들과 어울리면서 죽어있던 세포들이 눈을 뜬다. 제 정체성을 찾은 그녀는 가족이고 뭐고 최선을 다해 욜로를 즐긴다. 백인의 사고방식을 가진 클레어의 이기심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그럼에도 세상 혼자 사는 외모와 매력 덕분에 주변이 다 그녀를 좋아한다. 클레어에게 빠진 사람들은 그녀가 어떤 미움 살만한 짓을 해도 다 용서할 분위기이다. 이놈의 외모지상주의...


아이린도 살펴보자. 그녀는 클레어의 갖은 무례함에 얼른 선을 긋고 손절에 나선다. 하지만 클레어의 접근을 막을 수가 없었고, 원치 않게 그녀와 사사건건 엮이게 된다. 그녀에겐 클레어의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패싱에 성공하여 가난의 딱지를 떼어냈고, 패싱을 안 하는 흑인들이 이해 안 된다며 비아냥 거렸다. 그렇게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 갑자기 흑인 행세를 하는데 납득이 안될 만도 하다. 백인으로 온갖 혜택을 누려놓고 이제 와 자신의 뿌리는 흑인이니까 흑인의 문화를 즐길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재수 없었을 테지. 그래서 클레어 남편에게 패싱을 폭로할까도 했지만 들키든 말든 상관없다는 그녀의 태도에 할 말을 잃고 만다. 클레어에게 그토록 망신을 당해도 화 한번 내지 못하고 이미지 관리하는 아이린은 전형적인 위선자이다.


그런 아이린과 성향이 정반대인 그녀의 남편이 등장한다. 남편은 미국을 떠나 브라질에 가서 자식들을 인종차별 없이 키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내는 지금 생활로도 충분하다며 이주를 거부했다. 남편은 아이들도 섹스나 린치 같은 문제들을 알아야 한다지만, 아내는 그런 조기교육은 필요 없다고 했다. 보다시피 아이린의 일 순위는 안정성인데 남편이 거기에 자꾸 반대를 하니 계속 부딪힐 수밖에. 때마침 나타난 오픈 마인드의 클레어가 남편한테는 거의 뭐 구원자였을 거다. 그래서 아내가 보든 말든 클레어와 꽁냥거렸고, 점점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보며 가정의 평화가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한 아이린은 끝까지 자기가 옳다고 믿으며 쿨한 척을 한다. 참 가관이다.


클레어처럼 아이린도 이기적이다. 그녀는 클레어가 걱정된다 하면서도 정체가 들통나길 바랐다. 그런데 클레어가 자유의 몸이 되면 내 남편하고 바람이 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이린은 자기 가족만큼이나 클레어 가족의 평화도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클레어의 말들이 무례하다면 아이린의 말들은 온통 위선이다. 엮여서 좋을 게 없는 두 사람은 서로가 적인 셈이었다. 아이린은 클레어의 정체성을 위협했고, 클레어는 아이린의 가정을 위협했기 때문에.


사자는 고기를 뜯고, 소는 풀을 뜯어야 한다. 고기 맛이 궁금하다 해서 사냥을 하는 소는 없다. 따라서 클레어에게 백인의 삶은 환상일 뿐이었고, 아쉬울 게 없는 데도 흑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남부럽지 않게 살아봅시다. 근데 사실 이 책은 고전이면서도 딱히 메시지 같은 게 안 보여서 리뷰가 꽤 힘들었다. 그러니 아무 말이나 댓글 좀 달아주십쇼.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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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1-08-15 10: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얼핏 부제만 봤을때는 백인의 특징을 가진 흑인 여성 클레어가 주인공인 줄 알았어요ㅎㅎ 클레어나 아이린이나 둘다 인간적으로 보이네요… 요즘 이 책 홍보가 많이 보이던데 리뷰 읽으니 더 흥미롭습니다~

물감 2021-08-15 11:28   좋아요 4 | URL
ㅎㅎㅎ맞습니다. 인물들이 하나같이 밥맛인데 밉지가 않아요. 다 인간미가 있어요. 파이버님의 리뷰도 기대할게요^^

새파랑 2021-08-15 1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첫 문단 팩폭 😢 이 책은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나온건 아닌가 보네요. 메세지가 안보인지만 재미 있을거 같아요 😆

물감 2021-08-15 12:47   좋아요 3 | URL
저도 왜 시리즈로 안나온건지 모르겠어요ㅋㅋ고전치고는 적당히 라이트해서 읽기 수월했네요. 새파랑님도 리뷰 써주세요🙃

구단씨 2021-08-15 14: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아. 이 책 정말 궁금했어요. 물감님 리뷰 보니까 속이 다 시원... ^^
클레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아이린도 만만하지 않네요. 더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민음사와 문동에서 동시에 나왔네요. 문동 세문으로요. 어느 버전으로 구매할까 고민됩니다. ^^

물감 2021-08-15 14:36   좋아요 3 | URL
힘들게 쓴 보람이 있었네요^^
인종 문제가 나오길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더라구요. 그냥 편하게 읽으세요 ㅎㅎㅎ

문동은 안봐서 모르지만 민음사는 번역이 매끄러워서 좋았어요. 시리즈 콜렉션을 생각해서 문동도 사야할까봐요🙂

붕붕툐툐 2021-08-17 22: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연예인 시켜줘도 못할 듯!
백인의 신체적 특성을 가진 흑인이란 뭘 말하는 걸까 궁금하네용~ㅎㅎ

물감 2021-08-15 16:23   좋아요 2 | URL
백인의 피가 섞인 흑인인데, 생김새도 백인같고 피부도 하얗다고 합니다~ 그래서 겉만 봐서는 잘 구별이 안되니까 패싱이 가능한가봐요!

저도 연예인 절대 못합니다ㅋㅋ 프리한 삶이 좋아요😄

붕붕툐툐 2021-08-17 22:29   좋아요 1 | URL
아~ 진짜 피부가 하얗다고요? 오~ 생각지도 못함~ㅎㅎ
물감님은 북플의 연예인이십니다~

물감 2021-08-17 23:05   좋아요 1 | URL
ㅋㅋㅋ말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콜드 문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7 링컨 라임 시리즈 7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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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날도 덥고 그래서 친애하는 디버옹의 책을 집었다. 그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2월이었으니까 약 6개월 만에 읽는다. 디버옹은 링컨 시리즈와 캐트린 시리즈를 번갈아가며 1년에 한 권씩 발표한다. 현재 국내에는 링컨 시리즈가 12편까지, 캐트린 시리즈가 3편까지 나왔는데 과연 작가가 완결을 계획하고 있는지가 의문이다. 50년생인 디버옹은 이제 예전만큼 집필 속도를 못 낼 텐데 작품의 세계관은 갈수록 커지고 있으니 말이다. 제발 완결 없이 타계하시는 일은 없길 기도한다. 차라리 모든 게 꿈이었다는 최악의 엔딩이라도 남겨주시길.


<콜드 문>은 링컨 시리즈 중에서 베스트에 손꼽히는 히트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소문에 너무 큰 기대를 해서였을까, 실망까지는 아니고 좀 심심하다고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을 매력적이게 하는 일등공신은 무시무시한 악역들이다. 주인공 링컨 라임이 사지를 못쓰는 장애인이므로 언제나 액션은 악역 담당이다. 디버는 추리소설처럼 범인 맞추는 플롯이 아니라 시작부터 범인이 등장해 주인공과 싸우는 대결 구도를 펼친다. 매 편마다 어나더 레벨의 범인이 나와서 링컨 일행을 가지고 놀았고, 이번 편에서도 그런 악역이 나왔다. 자칭 ‘시계공‘이라며 범행 현장마다 시계를 남겨두고 떠나는 범인. 시계의 역사나 기능에 대해서 해박한 범인이었지만 뭐랄까, 시계공이라는 캐릭터를 범행에 마음껏 활용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전 범인들과는 달리 연쇄살인도 안 하고 계획도 번번이 틀어지는 등 되게 포스가 없었다. 게다가 이전 범인들이 단독 플레이어였던 것에 비해 시계공은 늘 공범을 달고 다닌다. 그러면서 어떤 대단한 범죄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어서 이건 또 뭔가 싶어진다.


그나마 이번 범인은 준비성과 마무리가 빈틈없이 철저하다. 범인은 어디에서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고, 증거물이 없으니 라임의 추리력은 말짱 꽝이 돼버린다. 그래서 이번 편은 진짜 라임의 활약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파트너인 아멜리아 색스가 있지 않느냐 싶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이번부터 아멜리아가 형사로써 처음 정식 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첫 담당이 무려 불법자들의 뒤를 봐주는 부패 경찰들을 잡아내는 일인데, 하필 그 명단에 순찰 경관이었던 부친이 포함되어 수퍼한 멘붕에 부딪힌다. 그런데다 시계공 사건까지 맡게 되어 몸도 마음도 붕괴된다. 주연들을 이렇게 안드로메다에 보내버리는 작가가 이해는 안 되지만 이쯤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캐트린 댄스 덕분에 어떻게든 이야기가 굴러간다. 캐트린 댄스는 ‘동작학‘으로 상대의 움직임, 눈빛, 음성 변화를 캐치하여 정보를 캐내는 일급 요원이다. ‘법과학‘의 라임과는 정반대 스타일의 수사관이지만 추구하는 목적이 같아서 두 사람은 금방 친해진다. 여튼 이번 편은 캐트린 댄스가 진짜 멱살 잡고 하드 캐리 했다고 봐야 한다. 범인을 만난 피해자들, 목격자들, 공범 용의자들을 대면하여 동작학으로 전부 까발리는 캐트린을 옆에서 구경만 하는 링컨 일행들. 아 정말 주인공들이 너무 밥값을 못한다. 캐트린에게 밥 두 그릇 주자.


예상하다시피 아멜리아가 맡은 두 사건은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 명색이 경찰 소설인데 슬슬 부패 조직이나 고위 인사들을 건드릴 때도 됐지. 문제는 그걸 아멜리아의 개인사와 엮어버리니 그녀의 비틀대는 멘탈이 사건에서 오는 긴장감보다 훨씬 도드라져서 액션/스릴러 장르의 성격이 모호해져 버렸다. 희로애락이 없으면 안 되겠지만 이렇게 한쪽으로 비중이 쏠려서야 어떡하나 싶다. 주인공은 활약이 없고, 파트너는 의욕이 없고, 범인은 매력이 없고, 스토리는 한방이 없다. 이렇게나 심심하기 짝없는 작품을 그나마 살려놓은 게 캐트린 댄스인데, 왜 전 세계 독자들이 캐트린 시리즈를 별도로 만들어달라고 요청을 했는지 알만하다. 여튼 그건 그렇고 시계공은 주인공이 처음으로 놓친 범인이다. 시계공이 괴도 루팡처럼 주인공들을 가지고 놀다가 유유히 떠났다면 멋있기라도 했을 텐데, 라임에게 뒤통수를 맞고 님좀짱이라며 편지까지 써준 걸 보니 간지는커녕 되게 구질구질해 보인달까. 적을 놔준 건 나중에 또 나온다는 말인데, 이렇게 멋없는 캐릭터를 또 쓰시게? ......야레 야레.


사실 이번 편은 재미보다는 앞으로의 방향을 정립하는 징검다리 역할이 더 크다. 뛰어난 수사력을 자랑하던 라임이 적을 놓친 것, 동작학이라는 법과학 외의 수단을 인정한 것, 아멜리아가 경찰의 본분을 확립한 것, 아멜리아를 보조할 후임 경관을 찾은 것 등등. 이제 이들의 수사는 더욱 신중해지고 치밀해질 것을 여러 가지 테마로 선전포고한 셈이다. 시계공한테 잔뜩 체면을 구긴 라임의 캐릭터가 이번 일로 조금은 바뀔 것인지 궁금하지만 별 기대는 안 한다.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역시 기본은 하는 디버옹이시다. 할 수만 있다면 불로초 먹인 다음 평생 책 쓰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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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8-10 0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디버옹에게 불로초 먹이라는데 한표 던집니다. ^^

물감 2021-08-10 07:06   좋아요 0 | URL
ㅎㅎ역시 바람돌이님🙂

다락방 2021-09-01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캐트린에게 밥 두그릇 🤭🤭

물감 2021-09-01 23:46   좋아요 0 | URL
아니 다락방님, 언제 제 글들에 좋아요 테러를 하신거에요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9-02 07:45   좋아요 0 | URL
어제 와인에 치킨 먹으면서 제가 테러 좀 했습니다... 흠흠.
 
클라이머즈 하이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박정임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어려서부터 좋은 직장을 얻기까지 쌔빠지게 공부하고 스펙 쌓는 고생을 한다. 직장인이 되고 나면 쌔빠지게 일하다가 번아웃이나 매너리즘으로 고생을 한다. 어느새 주변을 돌아보면 다들 죽지 못해 사는 얼굴이 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멀쩡하게 사는 듯한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똑같은 환경에서 누구는 맨날 울상 짓고 누구는 활력이 넘치는 이유가 뭘까. 이런 사람들은 삶의 균형을 잡고 유지하는 비결이 자기 관리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업무와 개인 시간을 정확히 구분하고, 건강한 여가생활을 즐기며, 발전하기 위해 자기계발을 멈추지 않는다. 배움에서 즐거움을 얻고, 즐거움에서 열정이 흘러나며, 열정에서 활력 있는 삶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제껏 내가 멋있다고 느꼈던 분들은 다 그런 타입들이었다. 비록 내가 좋은 어른까지는 못되더라도 멋있게 나이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게 된다. 운 좋게도 이번에 만난 소설가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이었다. 57년생 기자 출신의 일본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의 라떼 시절을 소설로 만나봤다.


‘러너스 하이‘라는 마라톤 용어가 있다. 뛰다가 육체의 한계 지점을 넘어섰을 때 엄청난 쾌감이 뇌를 지배하게 된다고 한다. ‘클라이머즈 하이‘라는 암벽등반 용어 또한 등반 중에 흥분이 최고조가 된 상태를 뜻한다. 러너스 하이가 선수를 계속 뛰게 만드는 반면, 클라이머즈 하이는 흥분이 풀린 뒤에 오는 공포감으로 온몸을 마비시킨다. 그렇게 위험한데도 산에 목숨 거는 산악인들의 자부심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주인공 유키. 그는 등산 광인 직장 동료와 함께 죽음의 산을 오르기로 약속하지만 당일에 여객기가 추락하는 대형사고가 나서 약속 장소에 가지 못했다. 기자이자 신문사 직원인 그는 여객기 사건의 총괄을 맡게 되어 정신이 없다. 그리고 들려오는 등산 동료의 식물인간 소식. 어째서 나쁜 일들은 다 한꺼번에 일어나는가. 누가 나 대신 울어주길 바라는 중년 남자의 외로운 투쟁이 시작되었다.


굵직굵직한 서사들을 다루고 있어 리뷰가 영 쉽지 않군. 강렬히 휘몰아치는 상황들에 비해 분위기는 다소 차분하여 폭풍전야 같은 기분이 든다. 클라이머즈 하이가 딱 이런 기분이려나. 매번 느끼는 건데 일본의 사회파 거장들은 이런 연출을 기막히게 뽑아내는 감각이 타고난 듯하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N각 관계의 달인이라면, 요코야마 히데오는 가히 장인 수준이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의 올드한 작품이지만 촌스럽기는커녕 겁나게 스타일리시하다. 작가가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나이를 먹어도 감각이 되게 예리하다. 이런 숙성도 높은 글맛은 언제라도 환영이다. 혹시 내 취향이 올드한 걸까...


실제 했던 여객기 추락사고를 다루고 있어 현장감이 넘친다. 주인공은 사건 총괄을 맡은 후로 직원들과의 마찰이 끊이질 않는다. 자신의 기사가 실리지 않자 유키를 원망하는 부하들, 신문 1,2면에 여객기 내용만 가득하여 윽박지르는 타부서들, 추락사고를 돈벌이의 기회로 삼는 간부들, 이번 사건을 평생의 훈장으로 삼으려는 교활한 직원들. 모두한테 미운털 박힌 유키는 시궁창 속에서도 기자의 본분과 사명을 다하려는 참된 언론인이다. 그래서 유가족들을 위해, 고생하는 후배들을 위해 옷 벗을 각오로 상부와 싸워가며 사건을 지휘한다. 고생하는 후배들과 시기하는 윗선들 사이에서 멘탈 바사삭 중인 그에게는 레드불이 절실해 보였다.


밖에서는 이렇게나 인간적이지만 집에서는 전혀 아니었던 유키. 부친 없이 자란 유키는 어떻게 아버지 노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 권위적으로 가족을 대해왔다. 그리하여 아들과 소원해진 그는 관계를 회복하고 싶지만 용기가 나질 않는다. 아들에 대한 애정은 식물인간이 된 동료의 아들에게로 향한다. 유키는 자신을 친부처럼 따르는 동료의 아들을 볼 때마다 친아들이 생각나 마음이 저리다.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기 힘든 신문사에서 있다 보니 서투른 인간관계는 전혀 나아질 낌새가 없었다. 차라리 은퇴해서 가족들과 쭉 있고 싶지만 형편상 그럴 순 없었고, 그랬다간 지금의 관계들마저 무너질지도 몰랐다. 부하들 지휘하고 신문 제작하고 조직을 상대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어도 아들이 계속 생각나는 건 어째서일까.


그는 동료가 식물인간이 된 이유를 알게 되었고, 등산을 왜 그토록 좋아했는지, 친하지도 않은 자신을 파트너로 원했는지도 깨닫는다. 여객기 사건이 끝나고 수년이 흐른 뒤 동료의 아들과 함께 죽음의 산을 오르는 유키. 내려가기 위해 산을 오른다던 동료의 말을 약간이나마 이해하는 그였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해답을 찾으려 산에 오르고, 낚시를 하고, 바둑을 두는 등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해서 답을 얻은 사람들이 삶의 균형을 유지하며 멋있게 늙어간다. 왜 클라이머즈 하이가 제목일까. 흥분이 지나가고 밀려드는 공포를 조심해야 하는 건 인생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 오르는 것만 생각지 말고 내려갈 것도 잘 준비하여 인생의 말년까지 잘 먹고 잘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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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8-03 23: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러너스 하이 경험해 보고 싶은 1인이에요~ 근데 뛰질 않으니~ 하하하하!! 올라갈 때 내려오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 잘 새겨야겠어요^^

물감 2021-08-03 23:59   좋아요 2 | URL
저보다 나으신데요?ㅎㅎㅎ
저는 침대위를 제일 좋아하거든요🙂

새파랑 2021-08-04 1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이 인상적이네요. 러너스 하이만 알았는데 클라이머즈 하이도 있군요. 오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려가는 건 더 중요한거 같아요~!!

물감 2021-08-04 11:59   좋아요 2 | URL
올라간 적도 없는데 내려올 준비만 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인상적이었어요ㅎㅎ 새파랑님은 쭉쭉 올라가시고 조심히 내려오십시오^^
 
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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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는 한때 <82년생 김지영>으로 전 국민을 들썩거리게 했던 논란의 아이콘이다. 나는 일부러 그 책을 읽지 않았는데도 남들이 다 말해줘서 무슨 내용인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이 왜 그렇게 비난을 했는지도 잘 안다. 나는 원래 좀 꼬인 사람이라 온통 칭찬글로 도배된 작품들은 의심부터 하고 본다. 그 반대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욕먹는 포인트를 알고는 있지만 감정이 일방적인 사람이고 싶지 않아서 그냥 안 읽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이 작가의 신간이 나왔고, 나는 출판사의 서평 제안에 망설이지 않았다. 정말 논란의 작가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전을 정독하듯 한 장 한 장을 차분하고 신중하게 읽었다.


정말이지 모든 이야기가 너무도 좋았다. 나는 저자의 따스함에 물들었고, 그 안에서 작은 인류애까지 느꼈다. <82년생 김지영>처럼 여성의 서사들을 한 권으로 엮었다. 할머니부터 어린 소녀까지 주인공이 되어 들려주는 속 사정은 멀쩡한 사고를 가졌다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내용뿐이었다. 물론 이야기 어딘가에는 논란을 삼을만한 장면도 더러 있다. 남녀를 싸우게 하려는 글이 아님에도 꼬투리를 잡는 사람들은 인물을 그저 생물학적인 남자와 여자로만 인식을 해서 그렇다. 성별을 빼고 하나의 사람으로 바라본다면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을뿐더러, 저자의 의도나 작품의 주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것이다. 모든 편마다 나이대에 겪는 애환과 고민을 담은 소설집인데 페미니즘보다는 휴머니즘에 가까워 나는 그렇게 좋았었나 보다.


등장인물마다 불리한 입장에 놓여있다 보니 누군가는 또 남녀 갈등 조장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봐주길 바란다. 단편집 특성상 모든 내용을 리뷰할 수 없으니 공통된 점들만 짚어보자면, 작가는 잃어버렸던 혹은 잊고 있었던 자아를 되찾는 내용들을 다루었다. 인간은 혼자가 두려워서 관계를 맺고 집단에 소속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나를 알아가고 동시에 나를 잃는다. 그래서 관계를 정리하고 다시 혼자가 되어 나를 찾는다. 속박의 관계가 단절되고서야 내가 이제껏 음지에 있었음을 깨닫고 양지로 나올 수 있게 된다. 자유와 평등은 생각만큼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오로라의 밤>은 남편과 사별한 아내와 시어머니가 과감히 해외여행을 나선다. <오기>는 악플러에게 시달리던 소설가가 자신의 상처를 작품화하여 두려움에 저항한다. <가출>은 집 나간 아빠의 권위에서 벗어난 엄마가 이제야 큰 소리를 뱉는다. <현남 오빠에게>는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사육해오던 남친에게 이별을 선포한다. <여자아이는 자라서>는 성희롱한 반 남학생들의 문제를 통하여 모녀간에 세대 차이를 극복한다. 왜 그렇게 바보같이 참고 살았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들. 눈에 보이는 인물들의 감정선만 따라가지 말고, 관계에서 벗어난 뒤 찾아오는 변화에 더 집중하길 바란다.


산에 들어가 자연인으로 살지 않는 이상 모든 관계를 칼같이 자를 순 없다. 하지만 누군가로 인해 자신이 희미해지고 있다면 그게 건강한 사이가 맞는지 돌아봐야 한다. 만남이 제한되는 이 시국에 방치했었던 나를 돌아보고 홀로서기를 연습해보자.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어려운 일도 직접 해결해보자. 어느샌가 스스로를 꽤 괜찮은 인간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어쩌면 여태 우리가 써온 것에는 내가 없었다는 말을 작가는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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