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송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나는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 관심이 많았었다. 주기적으로 나를 질문하고 검토하며 알아가기를 즐겨 했다. 나와의 시간을 가질수록 성향과 취향은 확고해지고, 그 방식들은 여러모로 퍽퍽한 삶에 윤활제가 되어주었다. 아무튼 이만하면 나는 자신을 잘 아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확고했던 모든 게 조금씩 변하면서 적잖은 당황에 빠졌다. 심경에 어떤 변화가 온 것도 아닌데 어느새 싫어했던 것들을 좋아하게 되고, 좋아했던 것들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그럼 이전까지의 내 모습은 허울뿐이었던 걸까. 나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지만 늘 하던 대로 다시 나를 알아갔고, 다행히 지금은 잘 살곤 있다. 아무튼 난 이런 사람이야, 하고 정의했던 내가 틀렸음을 마주할 때에 겪는 혼돈은 정체성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나의 믿음과 신념이 흔들릴 때, 나의 정의가 금이 갈 때, 나의 존재가 거부당할 때 어떻게 해야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뭐 그리 피곤하게 사냐고 하시겠다면... 그래, 니 똥 굵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죄인이 되어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소송을 걸었고 그래서 법원의 감시를 받아야 한단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법정에 불려가고, 변호사를 선임하고, 청원서를 작성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법원 사람들은 도통 알 수 없는 말이나 해대고, 법은 갈수록 그의 죄를 선명하게 비추었다. 그냥 죄를 인정하고 목숨을 부지하는 편이 최선일까. 아니면 죽더라도 끝까지 떳떳하고 당당한 게 맞는 걸까.
법학 전공자답게 카프카는 법에 대한 글과 작품을 많이 썼다. 하지만 전공보다도 종교가 그의 삶에 더 큰 영향을 주었음을 텍스트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비롯하여 카프카의 작품들은 독자마다 다른 해석을 품게 만드는데, 그것은 카프카가 해석을 거부하는 글을 쓰기 때문이란다. <소송>의 경우 사건의 인과관계가 명확히 설명되어있지 않고 곳곳에 구멍을 의도적으로 파두었다. 누군가에게 고소를 당하고 소송에 휘말리지만 고소인이 누군지, 소송의 사유는 무엇인지 나와있지 않다. 마치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라는듯이. 그리고 비워둔 구멍에 기독교 관점을 개입하여 더욱 해석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카프카의 작품은 도덕, 종교, 철학 어떤 시각으로 보든 간에 그럴싸한 이해를 가져다주는데 정작 저자는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세상을 떠났으니 뭐가 맞는지는 아무도 알 길이 없다. 게다가 미완작으로 출간되었으니 참된 해석을 가지지 못한 쪽이 더 신비스럽고 좋지 않나 싶다.
카프카의 작품들은 그가 죽은 후에 출간되었다 보니 미흡한 부분이 많다. 우리가 읽는 것들은 저자의 미완성 원고라서 교정이 안된 부분이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한 구간이 수두룩하다. 그 구멍들을 독자의 상상과 짐작으로 채워 넣기 나름인데,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작품 색이 크게 달라지곤 한다는 점이 매력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카프카의 책이 과연 고전문학으로 불릴만 한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많은 고전들이 다 다른 해석과 관점을 낳더라도 결국에는 비슷한 깨달음에 도달하는데, 카프카의 작품은 그렇지가 않다. 여러 갈래로 해석이 나뉘는 데다 해석을 거부하는 글이라니, 내가 무엇을 느끼고 판단하든 아니라고 한다면 고전을 읽는 의미가 있긴 할까. 어떤 감상이든 간에 독자만의 것으로 남아야 하는데 그것조차 거부당하는 기분이 든다. 많은 비평가들이 카프카를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일의적 시점이니, 체험 화법이니 하는 다양한 수식어를 갖다 붙이는데, 안 그래도 난해한 작품을 그런 복잡한 말들로 설명해줘야만 겨우 알아먹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추앙받을만한가 싶은 거지. 혹자는 내 독해력의 문제 아니냐 할지 모르겠는데, 꼭 머리가 좋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고전보다 전공서로 분류되어야 하지 않을까. 몇 권 더 읽다 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고.
성당에서 신부가 말한다. 동일한 사안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과 잘못 이해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지 않다고. 그러니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정답도 되고 오답도 될 수 있단 말인데, 그걸 명확히 하려고 법이 존재하는 게 아니던가? 이 책은 법원과 연관된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는데 어째 하나같이 중의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주인공은 만나는 이마다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결국 법을 이길 수 없을 거란 내용이었다. 이게 참 주인공 입장에서 보자면 법원은 온통 부조리뿐이고 그저 권력으로 행사하는 부패 집단이나 마찬가지이다. 여기에는 저자의 노골적인 의도가 느껴지는데, 오랜 시간 속에서 법이 지닌 허점을 카프카는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이 책에서 법은 선이 되었다가 악이 되기도 하고 중립도 되었다가 이도 저도 아닌 존재로 비춰진다. 이것은 물론 인간에게도 해당되나, 불완전한 인간과 달리 완전무결해야 할 법이 완전치 못할 수도 있다는 의심을 들게 해 독자의 고정관념을 뒤집고 있다. 인간을 보호해주는 신성한 법이 가면을 쓰고서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는 아이러니함이란.
본문에는 죄목이 나오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그만큼 주인공이 중죄를 범한 게 아니냐는 말도 더러 있다. 그러면 어떻게 잡혀가지도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생활하도록 놔두는가 하는 모순이 붙는다. 그러니 법 대 인간이라는 일차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어떤 이의 서평대로 세상은 원래 부조리하고 인생은 원래 억울하게끔 설계되어있다는 쪽으로 확장해서 보는 게 맞겠다. 법원은 주인공의 자유를 끝없이 억압하려 하고 주인공은 그 강제성에 계속해서 저항한다. 끝내 처참히 패배하고 말았지만. 이 같은 인물과 시스템(조직)의 대결 구도는 우리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 부조리함에 굴복하는 자와 맞서는 자 중 누가 맞고 틀렸는지를 콕 집어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인간의 정체성이 저항과 극복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카프카는 강조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에 이 정도 매달렸으면 됐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