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두 남자가 수상하다
손선영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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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빨래가 하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봄이 오긴 하나보다. 봄은 사계절 중에 가장 여유로움을 가졌다. 정신없이 바쁜 이에게 봄바람을 불어서 한숨 돌리게 하고, 근심 가득한 이에게 꽃잎을 휘날려서 마음을 달래준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계절이 내게는 마치 공부 빼고 다 재미있는 시험기간과도 같아서 독서만 빼고 모든 게 즐거워진다. 이럴 땐 햇살 내리는 창가에 앉아 허니브레드 한입, 커피 한 모금씩 하면서 가벼운 책을 읽어주면 독서가 더 잘 안된다. 그냥 하던 대로 화장실 변기에서 읽어야겠다. 사람은 갑자기 바뀌면 안 된다더니 과연 맞는 말이다.


버려진 통조림을 먹고 죽은 고양이 사체들이 발견된다. 통조림에는 석시콜린 약물이 투입돼있었고, 이 사건들은 인간을 사냥하기 위한 예행연습 일지도 몰랐다. 동물의 안락사를 위해 쓰이는 약물을 인간에게 쓴다는 건 장기밀매 밖에 없었다. 위험을 직감한 여주 일행이 찾아간 경찰을 통해 듣게 된 사실. 장기기증 신청자들의 정보가 유출되었으며 석시콜린을 머금은 시신이 발견되었단다. 장기밀매 조직의 소탕을 위한 지역 경찰들과, 약물 살인범을 추론해내는 여주 일행의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코지 미스터리답게 시작은 평범한 일상 코믹물로 시작했다가 점점 추리소설의 형태를 갖춰나간다. 분위기가 진지해지려고만 하면 시답잖은 유머와 개그를 남발하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나중에는 유머가 안 나오니까 참고 볼만하다. 처음 만난 손선영 작가는 이 작품만으로도 내공이 탄탄한 게 느껴진다. 플롯이나 구성도 그렇고 캐릭터 설정과 연출, 장치 등등 장르소설의 표본 같은 작품을 써낼 줄 아는 사람이다. 코지 미스터리는 일반인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고 하며 이 작품 또한 그러한데, 여주를 대놓고 단무지로 만들어놔서 툭하면 성질내고 철딱서니 없는 모습을 시종일관 보여준다. 비호감의 조건을 다 갖춘 여주는 중반부터 비중이 줄고 경찰들이 바통을 넘겨받는다. 왜 이렇게 주요인물이 자주 바뀌나 했더니 작가가 에드 맥베인의 <87분서>처럼 만들고 싶어 했다더라. <87분서>는 매 편 주인공이 바뀌는 시리즈물인데 그걸 스탠드얼론에 적용하면 어떡합니까. 나는 작가가 여주 일행을 까먹은 줄만 알았으요.


두 내용이 교차하다 마침내 하나 되는 흔한 플롯이다. 한쪽은 불을 붙이는 자들의 내용이고, 또 한쪽은 불을 끄려는 자들의 내용인데 한 사람이 쓴 게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양방의 명암이 다르다. 먼저 고양이 사체가 장기밀매 조직으로 연결된다는 점이 일상 추리물 다워서 좋았다. 구제역이 돌때 사용했던 약물이 소재로 쓰인 것도 대단했다. 다만 일행 중에 똑똑한 추리소설가가 있어서 전개가 너무 빨랐고, 좀비물처럼 다소 뻔하게 흘러가는 것도 흠이었다. 반대로 불 붙이는 쪽은 볼거리가 꽤 많았다. 장기 이식이 필요한 환자와 보호자들. 기증자도 없고 돈도 없어서 안절부절하는 병실 안 사람들. 무너진 가족의 신뢰, 타인에 대한 질투, 생명에 대한 윤리 의식 등등. 보이지 않는 싸움들이 그 좁은 병실에서 매일같이 발생한다. 그리고 벼랑 끝에 몰린 보호자들은 영혼을 팔고 장기밀매와 약물을 택한다. 불법이고 범죄인 줄 알면서도 가족을 살리기 위해 발악하는 이들을 마냥 욕할 수가 없다. 뭐 이렇게 무거운 주제의식을 다룬다냐. 난 그저 가벼운 독서가 하고 싶었단 말입니다요... 


기대와는 전혀 다른 작품이라 정리도 못하고 그냥 손가락 가는 대로 적었다. 산만한 분위기에다 정체성도 모호한 작품이었지만 이만하면 낫 배드이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걸 다 때려 넣은 작가의 기념비 같은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 기회가 되면 다른 작품도 읽어보기로 하자. 그보다 산만한 작품을 읽어서 그런가, 리뷰도 산만해지는 거 같네. 에혀. 당분간은 얇은 책 위주로 읽어야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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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지켜보고 있어 스토리콜렉터 65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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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는 좀 그래요.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은 연속으로 볼 수 있어도 시리즈 소설은 연속으로 읽는 게 힘들더라고요.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도 그건 잘 안되더군요. 저는 치느님을 사랑하지만 치킨만 먹고살지는 않습니다. 백숙도 먹고 오븐 닭도 먹고 찜닭도 먹고 닭갈비도 먹고 닭볶음탕도 먹고 닭강정도 먹죠. 음식 얘기하니까 급 배고파지네요. 여튼 맛있는 음식이라도 자주 먹으면 질립니다. 간만에 잡숴줘야 더 맛있거든요. 소설도 비슷합니다. 이 시리즈를 마지막으로 읽은 게 재작년인데, 그땐 늘 비슷한 작품을 쓰는 작가에게 도약이 필요해 보였어요. 근데 어이없게도 오랜만에 읽으니까 여전한 패턴에도 볼 만은 합니다. 그럼 됐죠 뭐. 저는 독서 슬럼프에 걸릴 때마다 로보텀 작품을 찾는데요, 이번에는 반대로 슬럼프에 걸릴뻔했습니다. 이유는 뒤에 가서 설명하겠습니다.


마이클 로보텀은 이제 국내에서 꽤 알려진 하드보일드 소설가죠. 이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대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미국이 아닌 나라에서 쓴 하드보일드 소설은 잘 써봐야 중박이라고요. 김장도 외국인보다 한국인이 만든 게 더 맛있거든요. 사실 하드보일드 기법은 호불호도 심하고 잘 쓰기도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범죄소설을 쓴다고 굳이 하드보일드를 따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런 작품의 주인공들이 워낙 멋있다 보니 다들 그런 스타일을 추구하는 거겠죠. 근데 이 호주 작가의 하드보일드는 좀 각별합니다. 범죄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심리학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인데요. 수사권이 없는 직업이라 그 자체만으로 핸디캡입니다. 그런데 로보텀은 이 단점을 장점으로 역이용합니다. 일단 심리학자만의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니까 뻔한 전개가 될 수 없습니다. 고로 타 작품들과 플롯이 겹치는 걸 막을 수가 있죠. 주인공의 상냥한 성격도 폭력적인 범죄소설에서는 단점이 됩니다. 점잖은 심리학자에게서 액션을 기대할 수가 없으니 결국 사건은 경찰들이 해결해주죠. 하지만 로보텀은 심리를 기반하여 기존의 하드보일드를 새로운 장르로 재창조해냅니다. 상황 설명 보다 인물의 독백을 더 많이 넣어서 부드럽고 유연한 분위기를 연출하거든요. 액션이 없는 하드보일드 작품의 허전함을 다른 방면으로 커버하는 것이죠. 말랑말랑한 하드보일드라니 뭔가 말이 안 맞네요. 여튼 오리지널을 넘지 않고 스스로 오리지널이 돼버린 특이 케이스입니다. 이런 게 바로 패왕색 패기 아니겠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정유정 작가를 예로 들어보죠. 정유정 작가도 초기에는 지금 같은 독기가 없었어요. 그러나 작품을 위해 피나는 취재와 연구로 대작들을 뽑아냈습니다. 이렇듯 작가는 감각도 중요하지만 자질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발로 뛰는 작가들은 그만한 보상을 받더라고요. 로보텀도 그렇습니다. 기자로 활동하며 축적해둔 데이터와 실제 범죄심리학자와의 인터뷰를 결합하여 지금의 고퀄리티 작품들이 탄생했죠. 이렇게 공들인 작품들은 대개 기본 이상은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작가들이 훗날 거장이 되고요. 여러 번 말한 거지만 소설가는 필력보다 스토리텔링이 우선입니다. 글만 잘 쓰는 작가와 글도 잘 쓰는 작가는 다르거든요. 로보텀의 경우는 후자입니다. 심리 스릴러다 보니까 아무래도 딱딱하게만 쓰는 건 무리일 겁니다. 간결하게만 써도 좋게 봐주는 장르문학에 인간미 있는 문체를 사용한 케이스가 몇이나 될까요. 로보텀이 독보적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작품 이야기를 해볼까요. <조 올로클린 시리즈>는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 시리즈>처럼 악역 또는 피해자 시점의 내용이 많은 편입니다. 앞에서 말했듯 주인공이 액션을 보여주질 못하니까요. 근데 그거대로 가지는 매력이 있죠. 악역이나 피해자의 분량이 많을수록 스토리는 생명력을 가지고 작품은 활력이 붙습니다. 간혹 악의 입장을 잘 다루지 않는, 그니까 악역을 너무 드러내지 않는 작품들이 있어요. 추리소설이라면 괜찮지만 일반 범죄소설에서는 마이너스입니다. 악당과 싸워 이기는 게 전부인 후레쉬맨 스토리랑 다를 바 없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후레쉬맨이 더 재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습니다.


한 여자를 염탐하고 관찰하는 X맨이 등장합니다. 저는 이런 관찰자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을 싫어해요. 대부분 동기도 약하고 찌질하거든요. 이런 설정에서 벗어나는 게 어려운가 봅니다. 암튼 시작부터 김빠졌지만 X맨이 지켜보는 여자의 처절한 인생살이가 가히 인간극장 수준이라 몰입이 잘 되더군요. 여자는 주인공의 심리상담 환자입니다. 매 편마다 주인공이 여자와 엮이는 게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시리즈>하고 똑같죠. 알아서 여자가 꼬이고 썸꽃이 피어납니다. 사실 없어도 그만인 내용인데 분량 채우려고 그러는 거겠죠.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남편이 잔뜩 도박빚을 지고 장기간 실종 상태가 됩니다. 진짜 실종인 건지 잠수탄 건지는 몰라도 양쪽 다 좋은 게 아니죠. 그녀는 혼자 두 자녀를 돌보고 살림하느라 죽어납니다. 채권자의 협박으로 더러운 일까지 하게 되고요. 그런데 그녀를 괴롭힌 자들이 차례대로 죽습니다. 딱 봐도 X맨의 짓이지만 그녀는 모르는 일이고 억울하게 용의자가 됩니다. 흔한 설정에다 전개마저 뻔하다니 좀 너무하더군요. 처음 읽는데도 봤던 내용 같으니까요.


그런데 실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여자가 해리성 장애, 즉 다중인격이에요. 하아. 길 좀 막혔다고 이런 걸 히든카드로 쓰다니 참 너무하다 싶었습니다. 굴러다니는 이야기들을 모아다 그럴싸하게 묶어놓았을 뿐, 참신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나마 작품을 지탱해주던 여자의 인간극장도 끝났습니다. 역시나 X맨도 별게 없어요. 여자와 아이들을 납치해가 잘 지내보자고 합니다. 그럼 이지경이 될 동안 조는 뭘 했느냐? 그녀의 다중인격과 X맨이 있다는 걸 알아냈는데요, 이게 다예요. 주인공이 뭘 하는게 없어서 내가 다 민망하네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뒷짐지고 불구경하는 수준입니다. 앞서 얘기한 단점을 장점으로 뒤집는 장면이 단 하나도 안 나와요. 대박 친 시리즈 소설들은 중간에 쪽박 작품이 꼭 있는데, 올로클린 시리즈는 이 작품이 쪽박이었습니다. 거장도 사람인데 슬럼프가 올 수도 있겠죠 뭐. 그래도 못하다가 한번 잘하는 것보다야 잘 하다 한번 못하는 게 더 낫습니다. 나름 인간미도 있고요. 근데 책값은 아깝습니다. 이만 로보텀 행님과 저의 슬럼프 극복을 응원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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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비앤비의 청소부
박생강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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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전에 쓴 <데미안>의 리뷰에서 언급한 나의 바뀐 취향에 대해 이어서 적어본다. 학생 때부터 내가 즐겨듣는 음악 장르는 락이었다. 흔히 말하는 고음병이 도졌었고 그래서 다른 노래들은 전부 시시하게만 들렸다. 그러다 언젠가 <힐링캠프>에서 가수 이선희가 부르는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을 숨죽여 듣다 눈물이 왈칵 흘렀다. 그렇게 죽어있던 감성세포가 깨어나기 시작했고 더 이상 락을 듣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로는 내가 시시하다고 했던 노래들을 즐겨 듣고 있다. 이것과 똑같은 패턴으로 독서의 취향도 변했다. 좋아하는 스릴러 소설만 편식하다 보니 즐거운 독서에도 감성이 죽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장르 불문하고 읽다 보니 반전도 자극도 없는 작품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는 것이었다. 늘 탄산음료만 먹다가 어느 날 전통차의 맛을 알아버린 거지. 그래서 쏘쏘한 이번 작품도 나름의 담백함을 즐기면서 읽었다.


이태원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애인에게 차이는 남자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그는 화풀이로 숙소의 악성 후기를 쓰려고 혼자 방을 잡는다. 뭔가 구차함으로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려는 게 느껴지는데 좀만 더 기다려보자. 남자의 방에 청소부 남청년이 들어와 급 말동무가 된다. 청소부는 깜빵을 다녀와서 이곳의 알바생으로 지내고 있단다. 응 그렇구나. 그러고 헤어지나 했더니 야근할 때마다 에어비앤비로 방을 잡는 남자는 청소부랑 점점 친해진다. 각자의 사연을 주고받으며 삶의 무게를 가늠해보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조금씩 독자의 심금을 휘젓는다. 


멀쩡한 집 놔두고 더러운 숙소로 굳이 가는 건 가족이 불편해서였다. 아버지가 은퇴한 후로 집안 분위기는 더 나빠졌고 각자가 방콕 생활만 한다. 여동생에게 소시오패스라고 불릴 만큼 감정 결핍된 남자는 삶이 무료하다. 현대인의 공감 포인트가 많아서 좋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데 암튼, 아버지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외국 여성이 동업하자는 연락을 받으며 작품 분위기가 변한다. 익명의 상대에게 푹 빠진 아버지를 말리는 가족들. 그게 온라인 사기란 걸 부정하고 돈까지 보내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청소부에게 털어놓는 남자. 그는 말 못 할 얘기들을 누군가에게 꺼낼 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 이어서 청소부도 자신의 사정을 꺼내는데 글쎄, 자신이 쫓기는 신세의 해커란다.


중졸인 청소부는 부모를 잃고 고모네 PC방 알바를 하며 살았다. 거기서 해커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해커 사이트에서 알게 된 블랙 해커의 권유로 중국을 갔다. 나름의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와서 활동하던 중 사업가로 위장한 경찰에게 걸려 빵에 들어갔다. 출소 후에는 그 블랙 해커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얘기였다. 전반의 드라이한 감성이 참 좋았는데 갑자기 시리어스한 전개라니 좀 그렇다. 후반은 청소부의 고해성사라 크게 볼 건 없고, 그 친구 덕분에 주인공이 애인과 다시 잘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대충 요약했지만 딱히 특별한 게 없는 보통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독자의 궁핍한 마음을 미세하게 건드리는 힘이 있다. 갑분싸는 좀 아니었지만.


현대판 상실의 시대라고나 할까. 인물마다 감정 결핍을 앓고 있다. 연애 감정이 없는 주인공은 로맨스를 추구하고, 부모를 잃은 청소부는 타인의 애정을 원하고, 지위를 잃은 부친은 가장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간절히 바랄수록 매몰찬 현실이었다. 주인공만 보더라도 제 뜻대로 악성 후기하나 못 쓰고 있지 않은가. 청소부는 말하길, 계속 살아가려면 자신의 불리함을 감춰야 한다고 했다. 말 그대로 우리 모두는 불리한 삶 속에서 무수한 약점들을 감추고 사느라 바쁘다. 여유가 없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결핍된 채로 그렇게 살아간다. 요즘 같은 때는 더 그렇다. 주인공처럼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털어놓거나, 아버지처럼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는 게 그토록 기쁜 일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공동체 사회에서 개인주의로 사회가 바뀌는 것을 기뻐하는 분도 있겠지만, 각자도생하는 주인공의 가족처럼 되어가는 건 역시 슬프다. 여튼 박생강 작가의 책은 처음인데 은은한 감성이 제법 매력 있었다. 당신도 전통차의 담백함을 느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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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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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내가 맨 처음 읽었던 고전문학이다. 그때는 좋았던 기억은 하나 없고 역시 고전은 어렵다는 좌절만 안겨줬다. 복잡한 내용이 아님에도 뭘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친절하게도 서두에 답이 다 나와있었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각기 다른 모두가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 등등. 온전히 흡수 못한 문장도 많지만 ‘나에게로 가는 길‘을 말하려는 건 충분히 이해했다. 이제야 어디 가서 데미안을 읽어봤다고 얘기할 수 있을 듯. 첫 독서 때는 경치 따윈 보이지도 않던 초행길의 운전 같았는데, 지금은 좋은 울림을 가진 문장들이 눈에 잘 들어온다. 어쩌면 별로라 여겼던 고전들도 훗날엔 대단하다 느낄지 모르겠다. 근데 이 책이 진짜 청소년문학인가? 성장소설치고 지나치게 하이레벨인데. 독일은 어린 친구들도 이만큼 수준이 높은가. 그렇다면 나 너무 자괴감 드는디.


주인공 싱클레어의 유년시절부터 대학생까지를 기록하였다. 소년은 데미안을 만나기도 전에 빛과 어둠의 세계가 공존하고 나란히 붙어있음을 보았다. 늘 그랬듯이 올바른 세계를 추구했지만 금지된 세계 또한 매력적이어서 거짓말을 시작으로 어둠에 발을 담근다. 그리고 기나긴 방황과 출구 없는 절규에 휩싸인다. 죄악의 늪을 인지한 순간 자신의 공존하던 두 세계가 분리됨도 느낀다. 화평과 안정을 주던 삶의 모두는 먼지가 되었고, 자신은 어느 축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과 나그네가 된 것이다. 어둠에 속한 것들이 왜 그렇게 매혹적인지 또 왜 금하는지를 직접 느껴보기 전까지는 감정 없는 글자에 불과하다. 헤세가 말하는 인간이란 그런 생물이다. 헤세는 한 사람을, 그것도 어린아이의 세계를 지독히도 파괴해버린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응당하다는 당연한 말보다 그것을 더 당연하게 말하고 있다. 고작 거짓말 하나 했을 뿐이나 소년에게는 감당 못할 형량이었다. 어둠에 잠식된 아이는 손닿는 곳에 구원의 손길이 있는데도 쉽사리 손을 뻗지도 못한다. 이것은 남녀노소 마찬가지인 인간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소년은 데미안의 도움으로 늪에서 탈출한다. 가족에게 죄를 고백하고 서둘러 아벨의 부류로 돌아간다. 데미안은 그의 구원이었지만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성경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제멋대로 해석하는 괴짜였다. 아벨보다 가인을 변호했고 금지된 세계와 그 부류도 올바르다고 주장했다. 그의 해석은 인류가 신성모독이라고 못 박아둔 전부를 완벽하게 뒤집었다. 소년은 아벨이고 데미안은 가인이었다. 자신을 죽인 자와 어울릴 수 없다는 두려움과 그의 해석이 주는 기쁨의 공존을 느낀 싱클레어. 이후 몇 년간 데미안을 멀리한 그는 아벨의 부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방탕한 삶을 산다. 그러면서도 데미안과의 끈을 놓지 못한 것은 자신이 그에게 구원받았던 일 때문이었다. 결국 그에게로 돌아온 싱클레어는 자신도 가인의 표를 지닌 자임을 인정하게 된다. 더 이상 데미안은 괴짜가 아니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독자들은 데미안의 해석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성경에는 악을 선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구절이 있는데 딱 데미안에게 해당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전에는 나도 그의 이교도적인 주장이 불편해서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때는 사실 뭘 말하려는 건지 파악도 못했다. 두 세계가 모두 거룩하고 존중해야 한다? 각자에게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이 다르다? 금지된 것이 누군가에겐 허용되기도 한다? 이 난해하고 아리송한 말들을 서두에 적힌 답에 기준하여 본다면 쉽게 이해된다. 선에 속한 자나 악에 속한 자나 다 같은 심연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찬송가를 부르는 이에게는 쉬즈곤이 금지된 것이지만 둘의 뿌리는 같다. 누군가에겐 허용된 것으로, 누군가에겐 금지된 것으로 완전한 자신을 찾고 만난다는 말이다. 좀 더 쉽게 풀자면 이렇다. 가인에 대한 해석은 분명한 신성모독이다. 그 해석을 불쾌해하는 부류도 있고 색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여 흥미롭게 보는 부류도 있다. 후자인 싱클레어는 금지된 것이 허용된 것이고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은 셈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고는 자칫 강도나 살인 같은 범죄도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고 오해할 수 있다. 나를 찾는 길을 방해한다면 그건 허용된 것이 아니라 금지된 것이니 모쪼록 잘 분별해야 하겠다.


싱클레어가 탕자 된 것은 데미안의 영향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내 눈에는 소심한 범생이가 늦바람이 든 정도로 보였다. 남들과 어울린다 한들 그들은 자신보다 낮게 여겼고 본인도 자기 경멸에 빠져 살 만큼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또는 두 세계에 걸쳐있는 주인공이었다. 그러다 이상형을 발견하고 성욕에 눈을 뜬 뒤로 다시 정결한 아벨이 된다. 자신을 거룩하고 경건하고 순결하게 만드는 것이 추악하고 음탕하고 쾌락적인 것이라니. 가인의 표식을 가진 그는 데미안의 말을 이해하여 방탕을 끊고 자기 성찰에 들어간다. 이 책으로 헤세는 인간이 가진 무한의 가능성을 언급하려던 게 아닐까 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닫혀진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관점을 배운다. 그리고 교회 오르간 연주자를 통해 닫혀진 세상에서 도약하는 힌트를 얻는다. 헤세는 데미안과 연주자를 통해서 참 인간이 되는 과정을 새와 알의 상관관계로 반복 설명한다. 진정한 나 자신이 되려면 내 안의 기둥이 무너져야 진짜 세계가 펼쳐진다고.


데미안은 알을 깨고서 나오라고, 세계를 깨뜨려서 거듭나라고 했다. 오르간 연주자는 두려움을 이기고 계속해서 날아오르라고 했다. 온몸으로 부딪혀야만 알은 깨어지고, 죽어라 날갯짓을 해야만 비상할 수가 있다. 헤세가 말하는 인간이 지닌 무한의 가능성은 모든 힘의 근원과 연결돼있고 그 독자적인 힘으로 얼마든지 도약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두려움과 위험성을 고려해서 현재를, 알 속의 세계를 만족해하는 자들도 많다. 헤세는 스스로를 개척하고 세계를 바꿀 마음이 없는 자들을 안타까워했던 걸까.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건 분명 두려운 일이다. 이제까지 내가 살아왔던 게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 테니까. 하지만 오늘의 내가 어제와 다르다 한들 부정당할 이유도 실망할 이유도 없다. 여러 경험과 실패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시행착오를 겪어서 나의 참 모습을 찾아가는 연습을 했을 뿐이다. 나만 해도 취향, 입맛, 패션, 취미, 문화, 가치관 등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한때 이것이 나라고 정의했던 것과 전혀 다른 지금의 내 모습이 오히려 더 좋다. 나도 싱클레어처럼 내 몸에 맞는 옷을 찾았기 때문에. 진짜 자신을 찾게 된다면 좋아하는 것에 자극을 받아 엔돌핀이 돌고 도는 게 아니라 공허했던 영혼이 풍요로워지고 안정감을 갖게 된다. 경험해보지 못한 분들에게 어서 알과의 투쟁을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번데기는 나비가 될 준비를 해야지, 송충이 시절을 그리워해선 안된다. 먹고살기 바빠죽겄는데 뭔 나비 타령이냐 하지 마시고 공허한 내 영혼을 진지하게 돌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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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모자 2021-02-22 03: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헤세가 융의 심리 상담을 받고 쓴 책 중 하나가 <데미안>입니다. 융 심리학 해설서인 이부영의 <그림자>를 읽어보면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나눈 대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에요. 꼭 읽어보세요~

물감 2021-02-22 11:10   좋아요 0 | URL
정보감사합니다. 기회되면 찾아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비종 2021-02-27 0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2018년 12월에 썼던 저의 리뷰를 읽고 왔습니다. 공통적인 생각도 군데군데 있지만 오늘 올린 리뷰와 접근 방식부터 다르더군요. 그때의 리뷰가 퀼트의 천 조각 몇 개였다면 이번에는 어설프게나마 장바구니 하나를 만들어낸 느낌이랄까요. 2년을 지나오면서 많이 성장한 제가 기특했습니다.ㅋㅋ^^;
저 역시 청소년 문학의 고퀄에 놀랐다는 ㅎㅎ <어린 왕자>와 비슷한 맥락일까요. 갈수록 보이는 요소들이 창대해지는 책입니다.

거짓말 하나에서 시작해서 늪처럼 빠져들어가는 과정의 심리묘사가 적나라하더군요. 그 상황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하며 측은하면서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고작 한 발짝처럼 보이는 간극을 넘는다는 게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달콤과 씁쓸에서 갈등하다 다크초코 맛의 매력을 알아버린 싱클레어~

저는 데미안을 카인과 아벨의 복합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벨과 카인을 둘 다 인정하는 존재라구요. 신과 악마가 결합된 아프락사스를 상징하는 인물이랄까요.
근데 카인을 가인이라고도 부르는가 봅니다. 종교 쪽은 잘 몰라서^^;;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분별해야 한다는 부분. 저도 인상적으로 읽었어요. 편하게 아무 생각없이 다른 이들을 따라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요. 결국 이 말들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라는 메시지에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더라구요.

소심한 범생이 늦바람ㅋㅋㅋ 공감 척!입니다~
해설을 보면 오르간 연주자가 헤세와 상담하며 정신분석 치료를 담당했던 박사의 아바타 정도의 인물로 언급되더라구요. 연주자의 비중도 만만치 않게 크잖아요. 데미안이 달변이라면 피스토리우스는 다변?ㅋㅋ

어디서 본 지 기억은 안나지만 알의 과학적 구조에 대한 설명이 생각나네요. 밖에서는 잘 안깨지고 안에서 힘을 주어야 잘 깨지게 되어있다고. 은근 철학적인 구조죠? 알까기가.ㅎㅎ

변할 것 같지 않던 내가 돌아보면 변해있더라구요. 몇 십 년 전에는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거든요. 과거의 저는 왜 그리 오만했을까요. 세상 다 아는 것처럼 초월한 인간이라도 된 듯 겉멋만 들어있었어요. 외형적인 면도 그렇지만 특히 내면의 변화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선명해집니다. 절대적인 고정불변의 것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나 싶어요.
알과의 투쟁. 이 말이 참 좋네요. 살아오면서 깨뜨렸던 몇 개의 알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뭐가 그리 어려웠던 건지. 깨고 나면 별것도 아닌데 말이죠.^^

다시 읽으니까 더욱 좋았습니다. 이런 기회를 가져다주신 물감님께 감사드려요~^^

물감 2021-02-27 22:07   좋아요 4 | URL
전에 쓰셨던 리뷰도 읽어봤는데 이번에 쓰신 글과 분위기가 확 다르던데요? 역시 고전은 재독을 해도 새로운 의미를 가지나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제 경우를 생각하면 오히려 성인일때 읽는게 더 이해가 잘되니까 꼭 어릴때 읽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봐요ㅎㅎㅎ

저는 초반 내용이 가장 좋았어요. 싱클레어가 금지된 세계를 알게 되고 자기 파괴에 빠지는 과정이요. 정말 별거 없는 내용인데 웬만한 심리스릴러 소설보다 흡인력이 엄청났어요. 어린 아이의 고뇌가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해지잖아요. 게다가 등장한 데미안이 금지된 세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독자를 확 뒤집어 놓는 것도 너무 좋았고요. 이 책이 왜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지 실감했습니다^^

확실히 종교의 색이 짙은 작품이죠. 성경을 잘 모르는 독자에겐 이해가 안되는 내용도 많고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만이라도 따로 찾아보신 뒤에 다시 읽어보시면 또 새로울 거에요 ㅎㅎ 한글 성경에서는 ‘가인‘이라고 표기되어있습니다. 카인과 같은 말인데 성경 읽는 사람에게는 가인이 더 익숙하죠 ㅋㅋ

작품이 주는 여러 메시지가 있지만 저는 철저하게 ‘나를 찾는 여정‘에 포커스를 두고 읽었어요~ 내가 누군지 모를때는 롤모델을 참 많이도 삼았었어요 ㅋㅋㅋ 생각해보면 늘 나와 정반대인 타입들을 동경했었는데 알과의 투쟁을 할때마다 남을 닮아가려는걸 그만두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다 그만두고보니 지금의 제 모습을 찾았네요.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깊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참 고마운 작품이네요 ^^ 저도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함께해주신 나비종님께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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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를 소재로 한 작품도 꽤 자주 출간되는 듯하다. 역사를 함부로 각색해선 안된다는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나오는 걸 보면 계속 눈길이 가는 선악과 같은 소재가 분명하다. 이 책도 그렇고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도 그렇고, 작가들은 은폐 사건들을 수면 위에 드러내려는 사명으로 펜을 든다지만 솔직히 그 사명만으로 책을 썼다곤 생각되지 않는다. 특히 민감한 역사를 다룰수록 더 그러한데, 어쩌면 세상 때가 많이 묻어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현대인들은 역사 자료와 정보로 나치 정권의 폐해를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책을 쓰려거든 알려진 내용은 간소화하고 주제를 부각시키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한다. 그것이 모호하면 주제 파악은커녕 나치의 독재나 전쟁의 아픔 같은 부수적인 것에만 주목하게 된다. 아쉽지만 이 책도 엄중히 말해서 후자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제작진이 일 잘하기로 소문난 것은 주도면밀하게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서가 아니라 문제를 다각도에서 살펴보고 이해하려는 접근 방식에 답이 있다. 팩트만 전달하는 뉴스는 시청자의 생각을 가둬두기 때문에 개인의 의견을 확장시키지 못한다. 반면에 <그알>제작진은 육하원칙 중 ‘왜why‘에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시청자가 자기만의 생각으로 사건에 개입할 기회를 준다. 그러면 사태를 인지한 시청자는 자연스레 문제에 참여하게 되고 각자의 생각이 모이다 보면 썩 괜찮은 해결안도 나오곤 한다. 문학도 이래야 한다. 독자가 직접 개입하도록 유도하는 저자의 노력이 필요하다. 안 그러면 독자는 저자가 떠먹여주는 것만 먹게 되고 그래서는 뉴스하고 다를 게 없다. 르포 형식이라면 모를까.


작가가 실제 했던 히틀러의 시식가 이야기를 각색했다. 히틀러의 음식 시식가로 강제 발탁된 열 명의 여자는 총통이 먹을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아닌지를 몸소 증명해야 한다. 죽을지도 모르는 음식 앞에서 육체의 배고픔은 너무나도 솔직하다. 이렇게 나치는 식욕이라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해서 그녀들을 사형수로 만든 것이다. 나치의 추종자들은 총통의 은총이라 하겠지만 로자 일행은 생존이 더 중요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제는 욕망과 싸우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기억해두지 않으면 옆길로 샐 수 있으므로 주의할 것.


나치는 가족을 빼앗고 삶을 짓밟고 희망을 지웠다. 그 모든 일의 원흉인 총통의 목숨을 구해야 하는 로자. 어떻게 하면 목숨도 지키고 적들을 이길 수 있을까. 투쟁의 대상은 나치 일원이나 배고픔이 아니라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시스템이다. 절대 바뀌지 않을 그 상황 가운데 갑작스러운 로자의 반격이 시작된다. 남편의 실종 소식에 이성이 끊어져 버린 그녀는 죽음을 향해 거침없이 뛰어든다. 친위 대원도 무섭지 않았고 총통의 음식도 거리낌 없이 삼켰다. 아이러니한 게 살고 싶다는 소망보다 죽고 싶다는 바램이 욕망과 맞서는 반작용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공포에서 해방된 로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치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중반부터는 식욕의 이야기에서 성욕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간다. 전선에 투입된 남자들의 부재로 여자들은 남자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로자 역시 친위대 장교와 몸을 섞으며 정죄를 고독과 맞바꾼다. 죽음에도 저항했던 사람이 성욕 앞에 무릎 꿇은 것이다. 그녀는 그토록 자신이 증오하는 나치의 일원과 밀회하면서 오염된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식욕은 죽음과 맞닿아있다지만 성욕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쾌락과 후회를 반복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그녀는 끝내 지옥을 택한다. 될 대로 돼라,가 아니라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한 것인데 앞전의 모습과 너무 상반되어서 이질감이 든다. 작가가 정녕 실존 인물을 생각하며 이런 설정을 했단 말인가. 이 책은 당사자의 일화를 빌려서 인간의 존엄성을 재조명하는 게 목적이다. 그런데 작가는 목적과 주제를 방해할 만큼 선을 넘고 있다. 아무리 각색이라지만 돌아가신 분에게 큰 실례이다.


초중반의 식욕 파트에서 보여준 페이소스는 정말 대단했다. 아쉽게도 성욕 파트부터는 그 맛을 볼 수가 없었다.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도 이와 똑같았다. 메인 소재에서 서브 소재로 넘어가면서 방향이 틀어지고 탄력도 약해지고 재미도 급감한다. 이런 건 용두사미도 아니고 빛 좋은 개살구에 가깝다. 그럭저럭 끝이 났지만 김빠지도록 못 살린 스토리였다. 이러니 주제를 파악 못하는 독자 탓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튼 이 작품은 다시 한 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한다. 우리는 여태껏 삶의 가치를 높여주는 ‘무언가‘에만 주목해왔다. 허나 삶은 그 무언가가 충족되어야만 제 역할을 하고 존엄성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몰아내려는 필사적인 본능이, 살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있는 한 그것만으로도 삶의 가치는 주어진다. 즉 가치 없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다.


이 책도 결국 사랑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인류를 일으키고 구원하는 건 오직 사랑뿐이라는 흔한 결말. 이런 서사물들은 어쩜 그렇게 똑같은 수순을 밟는걸까. 이젠 그만 바뀔 때도 된 거 같은데 말이다. 작가들이 유연한 사고를 갖지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여튼 이래저래 쓴소리를 했지만 스토리텔링도 나쁘지 않았고 페이소스도 훌륭했다. 저자의 차기작이 나오길 기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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