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아파트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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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극작가인 남주는 출판사에서 마련해준 파리의 임대 아파트로 온다. 그리고 경찰을 그만둔 여주도 똑같은 임대 아파트로 온다. 부동산 측의 전산 오류로 두 남녀는 같은 집에 계약된 것인데 서로 이 집을 전혀 양보할 맘이 없었던 것은 그 집이 유명 화가가 살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화가는 몇 년 전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현 집주인이자 절친이었던 친구가 아파트와 화랑을 관리하고 있었다. 집주인은 화가에게 관심 있어 하는 두 남녀에게 미스터리한 퀘스트를 던져준다. 화가가 세상을 떠나기 전 어딘가에 감춰둔 세 점의 미공개 그림을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다. 형사 본능이 발동한 여주는 귀찮아하는 남주를 자극하여 그림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미공개 그림들은 화가의 가족이 겪은 끔찍한 사건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족애가 발동한 남주는 이 일에 손 떼고 싶어 하는 여주를 자극하여 화가 집안의 미제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 


이것은 미스터리 추리물인가, 아님 스릴러물인가. 그림을 찾는다고 하니 당연히 추리물이라고 믿었다. 보상 하나 없는 퀘스트였지만 그래도 고대 유물을 찾는 듯한 인디아나 존스의 도시 버전 느낌도 나고 나름 좋았더랬다. 비록 그 과정은 독자가 전혀 추리할 틈도 주지 않았지만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계속 깔아주고 있었으니 오호라, 이번 작품은 분위기로 압도하는 작품인가 보다 하며 기대반 걱정반으로 읽어나갔다. 걱정 반은 무슨 연고였냐면 그림을 찾아낸 것이 총 분량의 딱 중간지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미제 사건인 화가의 죽은 아들 찾기 내용으로 2부가 시작되는데 갑자기 스릴러물로 바꾸려는 건지 이상한 구간에서 자꾸 텐션을 올리고 스피디한 전개를 진행하는 게 보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절대 속도감을 내어선 안되었다. 오히려 1부처럼 천천히 분위기로 압도했어야 했다. 그 이유는 화가도 이미 죽었고, 사망처리된 아들 사건도 이미 경찰과 대중의 관심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흐름상 급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안 뺏어 먹는데 괜히 작가 혼자서 엄청난 속도로 밥 먹는 느낌이었달까.


아무튼 1부 그림 찾기에서 2부 아들 찾기로 이어지는 것이 매끄럽지 않고 뜬금없었다. 그림 찾는 건 희열과 설렘이라도 있지 아들 찾는 건 글쎄, 그 정도로 흥분하고 집착할만한 일인지 도통 이해되지가 않았다. 두 사람 다 아들을 찾아낼 임무나 사명은 전혀 없었고, 본인들 외에 이 사건의 해결을 바라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주인공들이 불타는 정의감으로 행동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어릴 적 가정불화를 겪은 남주가 갑자기 없었던 부성애가 생기면서 화가의 아들을 자기 자식처럼 여기는 것도 영 개연성이 떨어졌다. 이미 초반부터 남주는 세상과 인간을 혐오하는 캐릭터였는데 어쩜 그리 단기간에 딴 사람으로 될 수가 있답니까? 나의 솔직한 심정은 ‘찾아서 어쩌게?‘ 정도였다. 그저 솟구치는 아드레날린 때문에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인 것처럼 보일뿐, 수사에 별다른 의미나 동기는 없었다고 봐야 한다. 또한 두 남녀가 전혀 한가로운 것도 아니었다. 남주는 글 쓰려고 파리까지 날아왔고, 임신한 여주도 이것저것 할 게 많았다. 근데 본인들 사정은 전부 뒤로하고 왜 그렇게까지 수사에 열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의문점들을 보면 이 책의 장르는 미스터리가 맞긴 맞다.


엄청 복잡하게 꼬아논 것처럼 보이지만 유심히 보면 스트레이트한 플롯이라 딱히 차별성을 갖진 않는다. 그래서 스토리보다는 캐릭터들에게 더 힘이 실린 편이다. 각자 아픈 과거도 있고 화끈한 성격도 있어서 이 대조된 캐릭터라면 보여줄 케미가 무궁무진하겠다 싶었다. 만나자마자 싸우는 두 남녀의 해프닝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얼마 안 가서 둘은 힘을 합치기 시작했고, 그러자마자 통통 튀던 작품은 급 평범해져 버렸다. 그러면 각자의 방식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려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인물 설정은 꽤 그럴싸했으나 크게 써먹질 못하고 있었다. 마치 피카츄가 전기 공격은 안 하고 죽어라 박치기만 하는 꼴이랄까. 그래 이건 그냥저냥 넘어가 주었다. 사건을 맡게 하려고 두 사람이 만난 과정 또한 억지스럽고 개연성 부족이라는 말에도 난 좋게 봐줄 수 있었다. 그런데 좋든 나쁘든 작가가 만든 많은 설정들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고 오로지 화가의 부성애만 조명하려고 한 것도 문제였다. 죽은 사람의 부성애를 아무리 강조해봤자 이미 힘을 잃었기에 이야기에 탄력이 붙질 못한다. 그런데 여기에 자꾸 스릴러를 접목시키려 들어서 크리티컬 낭패였지. 더 안타까운 건 화가가 아들을 죽을 만큼 사랑했다는 사실을 수차례 증명하시는데, 미안하게도 작가가 바랬던 만큼 부성애는 느껴지지 않았고 그런가 보다 하며 넘겼다. 그럼 이제 마무리를 어떻게 짓나 했더니 자기들끼리 가설을 세우다가 이거다! 결론 내고서 끝이 났다. 이 책도 전형적인 타이타닉 플롯이었음. 차라리 부성애가 아닌 두 남녀의 휴머니즘에다 포커스를 두었다면 훨씬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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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映 2019-09-16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욤의 책들 이제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아요 ㅜㅜ

물감 2019-09-17 06:54   좋아요 0 | URL
기욤의 책이 용두사미가 많은가요? 딱 두 권 읽었는데 느낌이 쎄하네요ㅎㅎ

coolcat329 2019-09-17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처음 기욤책 <구해줘>에 반해서 그 후로 5권을 더 읽었으나...저 또한 읽고나면 허탈한게 더이상 손이 가질 않더군요.

물감 2019-09-17 16:08   좋아요 0 | URL
음 그럼 저도 구해줘만 읽고 손절해야겠군요.... 근데 이 작가는 왜 그렇게 유명한걸까요?

레삭매냐 2019-09-17 13: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기욤 안녕...

물감 2019-09-17 16:09   좋아요 0 | URL
아 레삭매냐님도 끊으셨군여...

coolcat329 2019-09-17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해줘>실망하실 거에요. 너무 오래 전에 읽어 기억이 잘 안나지만 로맨스 스릴러 sf요소가 섞여 산만하면서도 역시나 뜬금없고 가독성이 엄청났기에 처음엔 좀 신선했다고 할까요? 당시 기욤이 좀 화제이기도 했고 쉽게 읽히니까 그냥 읽은건데,후회만 남더라구요 ㅎㅎ

물감 2019-09-17 17:06   좋아요 1 | URL
정보 감사합니다. 그럼 저도 기욤은 안녕입니다ㅎㅎ
 
12번째 카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6 링컨 라임 시리즈 6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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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지가 바뀌어서 이제 책 읽을 시간이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꽃이 지고서야 봄인 줄 알았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이해될 것도 같고. 아무튼 굉장히 오랜만에 쓰는 글인데 어쩐지 손가락도 잘 안 움직이고 전두엽도 잘 안 돌아가는 기분이다. 그래서 감을 좀 찾고자 그동안 썼던 내 글들을 역주행하면서 읽어봤는데 원래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달리 너무 무겁고 딱딱하고 어두운 글의 방향으로 치우쳐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다시 초심을 찾아 원래의 나로 되돌아갈 필요성을 느꼈다. 글쓰기 실력을 늘리려면 남의 글을 많이 읽고 공부하기에 앞서 자신의 글들을 읽으며 단점을 보완하는 게 더 급선무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독서는 힘들지언정 글쓰기는 즐거운 마음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여 겸사겸사 애정 하는 제프리 디버의 책을 골랐는데 세상에나, 이제껏 읽은 이 분의 작품 중에 가장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원래대로 돌아가자는 결심을 하자마자 이런 책이라니. 아무리 애정 작가라도 내 안에 날뛰는 흑염룡을 말릴 순 없을거라규. 대체 그 엄청난 속도감의 스릴은 어디로 가고, 예리하던 법과학 추리도 왜 갑자기 영구와 공룡 쭈쭈처럼 돼버린거여? 엔간히 답답해서 산소호흡기로도 모자라 셀프 심폐소생술까지 해가면서 읽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읽냐고요? 난 의리의리한 남자니깐요.


한 흑인 소녀가 괴한의 공격을 피해 도망친 뒤 경찰의 보호를 받는다. 이 사건을 담당 맡은 링컨 일행은 소녀가 조사 중이던 자신의 조상 이야기를 듣게 된다. 140년 전 해방 노예였던 소녀의 조상은 거액의 돈을 훔친 죄목으로 쫓기는 신세였었고, 당시 가족에게 여러 차례 썼던 편지에서 조상이 차마 말 못했던 일급비밀에 관심을 가진다. 어쩌면 그것이 소녀가 노려진 이유라고 생각하여 범인과 함께 140년 전의 비밀을 파헤치기로 한다. 또한 이번 범인은 지극히 평범함을 자랑하여 뚜렷한 특징이 없어서 애를 먹었고, 수사진의 방향을 틀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도 가차 없이 죽이는 등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그는 할렘가에 사는 소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할렘에 능통한 자들을 섭외한다. 반면 할렘에 대해 무지했던 링컨은 예측불허한 범인의 지뢰를 수차례 밟는다. 고생 끝에 범인은 붙잡히고 소녀가 죽어야 했던 이유 또한 공개된다. 과연 편지 속 140년 전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편은 어딘가 제프리 디버 답지 않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라 봐야 하나, 것도 아니면 그 두 사이 어디쯤에 있는 건가 싶은 아리까리한 전개 방식을 보여준다. 일단 사건이 터지면 늘 그렇듯 현장에서 증거물을 찾고 법과학으로 범인을 물색한다. 여기까지는 기본적으로 똑같은데 별 내용도 긴장감도 없는 장면들로 3부까지 싹 날려버려서 어리둥절하다 못해 살짝 걱정되기까지 한다. 실컷 증거물 분석하다가 갑자기 번뜩하더니 모든 건 범인의 연출이었다며 김전일 코스프레를 시전하는 링컨의 연기력은 송강호도 울고 가겠던데? 그래 뭐 링컨도 사람인데 헛다리 짚을 수도 있지.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이 헛다리를 왜 자꾸 짚으시는 거야. 똑같은 패턴을 너무 울궈먹어서 뼈가 다 삭을 지경이던데? 정말이지 이건 디버답지 못한 행동이었슴돠.


작가가 새로운 시도를 한 것 같다고 느낀 데에는 불필요한 대화 장면이 늘어난 것도 한몫한다. 원래 이 시리즈가 인물보단 사건에 더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대화 씬은 굉장히 보기 힘들었다. 근데 이번 편은 그런 장면이 유독 많아, 분량을 늘리기 위함인지 아님 새로운 변화를 주려함인지 작가를 직접 인터뷰해보고 싶어지더군. 여튼 조금도 분량을 허투루 날리는 법이 없는 양반께서 왜 갑자기 루즈해졌는지 알 턱이 없으나 그래도 명색이 스릴러 거장인 만큼 그레이트한 포텐은 빵빵 터뜨려주신다. 다만 그것이 후반전도 아니고 연장전에 나와서 지루해 죽을뻔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당이 떨어질 대로 떨어질 즈음 초콜릿 비를 내려주시는 밀당 작가의 불친절함을 그래도 용서해주고자 한다. 중박 좀 치면 어떠랴, 슬럼프만 아니면 됐지.


이번 범인은 경찰의 시선을 계속 돌려대는 연출의 달인이었다. 어쩐지 전편의 ‘사라진 마술사‘에서 범인이 자주 쓰던 미스디렉션과 비슷한가 싶지만 약간 다르다. 마술사 범인은 눈앞에 A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B를 진행하는 패턴이고, 이번 범인은 현장을 조작하여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추리하게끔 만드는 패턴이다. 오로지 증거물만으로 프로파일링을 하는 링컨에게 있어 이렇게 혼선을 주는 범인은 그야말로 링컨과 상극인 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링컨이 자꾸 영구 같은 모습을 보여줘서 그동안의 위엄이 폭삭 가라앉아 부렀지. 그래도 여러 번의 뻘짓 끝에 꼬리가 잡히고 아 드디어 수사 속도가 좀 붙으려나 기대하던 차에 그마저도 범인의 계획이었다며 통수를 친다. 진심 이 정도라면 범인이 엄청난 캐릭터라야 하는데, 이제껏 등장한 악역 중에 가장 평범하고 밋밋한 설정이라서 그것이 많은 반전 중 베스트 반전이 아닐까 싶다. 혹시 이것마저 작가의 새로운 시도였을까나.


디버는 책을 낼 때마다 배경이든 직업이든 한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깊게 다룬다. 이번 편은 흑인 문화의 고장, 할렘이다. 나는 이 할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1차 대전 이후 흑인들이 맨해튼 북부에 자릴 잡았으며 노후화된 주택과 가족관계가 엉망인 사람들이 가득한 빈민가의 상징이자, 반사회적인 사람들의 은신처라고 나온다. 이 책에서도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흑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에 불만을 표출했는데 DJ, 랩, 브레이킹 댄스, 그래피티 같은 흑인 문화운동이 바로 그것이었고, 그나마 할렘에서는 그들만의 자유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데 흑인 문화들은 차츰차츰 변질되어 할렘 거리는 힘을 잃었다. 소녀 조상이 살던 노예 시절이나 지금이나 흑인들이 받는 대우는 여전했다. 과거엔 육체를 뺏겼다면 현재는 그들의 정신을 뺏기고 있다. 겨우 이 책 한 권으로 할렘의 역사를 다 알 순 없으나 이렇게라도 관심을 갖도록 해준 작가에게 감사드린다.


솔직히 이번 편은 링컨의 추리도 엉망이고, 색스의 액션도 거의 없고, 악역도 평범하고, 동료 간에 멤버십도 거의 없어서 등장인물에게 볼거리가 전혀 없었다. 하나같이 노잼이었지만 특히 사건의 중심이었던 흑인 소녀의 땡깡 때문에 몰입이 계속 틀어져서 힘들었다. 범인이 학교까지 찾아왔는데 그래도 남아서 시험 쳐야 한다며 우기는 게 너무 어이없어서 이 정도면 제대로 설정 미스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소녀의 고집이 그렇게나 완고했던 건 하루빨리 졸업해서 할렘을 뜨고자 했던 것이며, 이번 사건으로 자신의 큰 그림이 틀어짐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그 간절함은 어쩌면 할렘가 빈민들의 희망이 응축된 게 아닐까. 뭐가 됐건 이번 작품은 메시지 면에서는 좋았지만 재미 면에서는 진짜 영 아니었다. 성대결절이 온 김경호 언니의 무대를 보는 듯했거든. 쉬지 않고 콘서트하면 목 나가듯이, 너무 다작해서 뇌에 과부하가 온 걸 거야. 그니까 힘들 땐 시험시험 하세요.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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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9-09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디버는 책을 낼 때마다 배경이든 직업이든 한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깊게 다룬다.˝
- 저는 직업이 나오는 소설이 흥미롭더라고요. 특히 어떤 분야의 전문가는 더욱.
알랭 드 보통이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독자들은 의외로 직업 세계가 나오는 소설을 좋아한다고요. 화가가 나오는 소설 <달과 6펜스>가 생각나는군요. ㅋ

물감 2019-09-09 16:33   좋아요 1 | URL
문학의 장점중 하나가 그거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직업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거요. 어쩌면 평생동안 관심조차 못가질 직업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알게 해주니까요. 물론 그것이 얕고 넓은 지식에 그칠지라도 새로운것을 알아간다는건 기쁜일이죠ㅎㅎ
달과 6펜스는 아직 못읽었는데 한번 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4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황소연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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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리뷰는 24시 까페수다체로 써볼까 해. 오후 8시를 넘긴 평소 내 말투가 한 80% 반영될 거야. 그냥 편하게 들어줘. 일단 나는 이 책에 거부감이 좀 있었어. 순전히 제목 때문에. 아무리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도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듯이 나도 그런 게 여럿 있거든? 그런 기억들은 너무 강렬하고 선명해서 강산이 바뀌어도 늘 제자리에 있어. 잠깐의 떠올림으로 하루를 망치기도 하고 그래. 그래서 이 책을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참 오래도 망설였어. 근데 궁금해졌어. 이 책의 주인공은 대체 어떤 식으로 트라우마에 맞서고 저주받은 기억에 대항하는지가. 나는 고통을 피해만 다녔지, 극복할 생각까지는 못했거든? 상처받으면 혼자 앓는 타입이라서 몸 사리기 바빴어. 여튼 기억력 좋으면 쓸 데 많겠지만 모든 기억이 평생 가는 건 무서운 저주야. 이 책의 주인공처럼.


형사 데커 가족이 어떤 살인마에게 죽음을 당했어. 데커는 그 뒤로 정신이 망가져서 경찰도 그만두고 쭉 거렁뱅이 생활 중이야. 그러다 옛 파트너가 말해주길, 살인범이 자수했대. 살인 당시의 상황도 자세히 알고 있고, 가족 모두 죽인 것을 시인했대. 근데 데커 눈에는 영 엉뚱한 놈이거든. 근데 이놈은 뭔 생각인지 지가 한게 맞으니까 죽여달라네?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갑자기 옆 고등학교에서 총기사건이 터졌어. 경찰이 출동할 때는 이미 상황이 다 끝났지. 환장하게도 그 넓은 데서 범인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라. 할 수 없이 경찰은 데커한테 도와달라 해. 데커는 인간 블랙박스거든. 과잉기억 증후군을 앓고 있어서 모든 것을 다 기억해. 지금은 그 이유로 악몽 속에 살지만. 아무튼 조사 도중에 기막힌 게 나왔어. 이번 사건과 데커 사건에서 발견된 탄환이 똑같대. 이제 답 나왔네. 그 놈만 잡으면 돼.


​알다시피 범죄소설 주인공들은 신체에 핸디캡 한두 개씩 꼭 있어. 관절을 다쳤든 병으로 고생하든 주인공들이 죄다 골골대. 근데 페이소스를 보여주려면 어쩔 수 없는 설정일 거야. 멀쩡한 캐릭터는 고뇌와 연민 같은 감정이랑 거리가 멀거든. 난 뭐 오만한 성격파탄자만 아니면 다 괜찮아. 웬일로 이번 주인공은 다 정상인데 뇌만 다른 신종 핸디캡을 갖고 있어. 그것이 자신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양날의 검이 되어 이 시리즈를 끌고 가는 기본 베이스인가 본데, 솔직히 타 시리즈만큼 흥미롭지는 않아. 이건 아직 1편이니까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어. 현재 두세 편 더 나와있던데 좀 더 지켜볼게. 그리고 주인공이 자꾸 ‘잭 리처‘를 생각나게 해. 빵빵한 하드웨어나 비상한 두뇌도 그렇고 인간미 상실한 것까지 완벽한 데칼코마니던데? 그래서 내가 시큰둥 했던 건지도 몰라. 내가 잭 리처 안좋아하거덩. 아무튼 유명한 해리 보슈나 링컨 라임 시리즈도 처음엔 엄청 딱딱했다가 점점 말랑해지면서 매력이 드러났거든? 상남자 캐릭터가 절대 좋은 게 아니야. 보여줄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으니까. 그래서 데커도 분명히 소프트해질 것이라 확신해.


코모란 스트라이크 시리즈라고, 해리포터 작가가 쓴 탐정소설이 있거든? 진짜 주인공 혼자 다 해 먹던 게 아직도 기억나. 지 혼자 추리하고 결단 내리고 범인 지목해서 끝내버리는데 어찌나 허탈하던지. 근데 데커도 거의 비슷해. 지독한 싱글 플레이어라서 타인에게 기대려 하질 않아. 그래서 독자들이 함께 추리할만한 여지가 전혀 없어. 그렇게 주인공 혼자 다 해 먹으면 미스터리 분야로써는 탈락이지 뭐. 원래 작가가 주는 대로 받아먹어야만 하는 작품에서는 별다른 재미를 볼 수가 없는 거야. 보통 범죄소설은 초반부터 범인과 주인공의 대결 구도로 가던지, 추리 끝에 주변인 중에서 범인을 검거하던지 하거든? 그런데 감도 안 잡히는 할로우맨을 찾을라니 이게 참말로 김빠질 일이야. 나는 범죄소설에서 악역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근데 이렇게 범인 구경하기 힘든 작품은 기억력의 달인이라도 금방 잊어버려. 왜냐, 범인의 존재감이 뚜렷해야 주인공의 활약도 두드러지는 법이거든. 반면 실체 없는 범인과의 싸움은 혼자 노는 숨바꼭질처럼 재미도 없고 주인공의 매력도 발산되지 못해. 차라리 인질극이나 폭탄 설치 같은 데드라인 있는 걸로 일행들을 들었다 놨다 해줬으면 싶었어. 범인이 대놓고 위협하기보다 장난만 치는 것 같아서 긴장감은 하나도 없고 내내 같은 패턴이다 보니 은근 피로도가 높더라고. 온리 추측으로만 진행되어서 그럴싸한 용의자가 나와도 과연 이노마가 맞는가, 이 수사 방향이 맞는 건가 같은 의심도 자꾸 드는 거지. 아무튼 악역에게서 재미 볼 건 없었어. 복수라는 명분으로 저지른 범인의 만행들이 양보하고 또 양보해서 그럴 수 있겠다 쳐도, 데커를 타겟삼은 동기는 아무리 봐도 억지스러워. 근데 또 연쇄 살인마나 사이코패스가 논리적인 거 봤냐고 하신다면 조용히 찌그러져 있도록 할게.


솔직히 인간미가 없어도 너무 없는 작품이더라. 목마르면 물 주고 배고프면 밥을 대령하는 전개라니. 이렇게 퍼즐이 척척 맞춰지는 건 너무 작위적이잖어. 이쯤에선 이걸 뿌려주고 저쯤에선 이걸 넣어주려는 계산법이 눈에 훤히 보여. 그게 나쁘단 게 아니라 그걸 풀어내는 방식이 너무 정직해서 탈이었지. 맨날 뒤통수치는 플롯만 보다가 이렇게 스트레이트한 플롯을 보니까 이거는 이거대로 또 신선하네. 더 참신했던 건 이제 겨우 1편인데 네트워크가 벌써부터 다 갖춰진 부분이야. 이번 사건으로 경찰, FBI, 기자와 한 팀이 된 데커는 이제 모든 사건마다 빵빵한 지원을 받게 되었어. 시작부터 어벤져스라니, 작가님 야망이 대단하시구려. 이렇게 모든 카드를 공개해버리면 나중엔 뭘 보여줄 건지 기대가 되기보단 걱정이 앞서네. 최신폰의 스펙이 현재 쓰는 거랑 비슷하면 굳이 바꿀 필요가 없는 법이거든. 시리즈 소설도 그것과 비슷해서 후속작은 전작보다 새롭고 신선한 맛을 느끼게 해줘야 해. 이전보다 약하다, 아쉽다, 별로다 같은 평이 유독 시리즈물에서 자주 들리는 건 그 장르만의 특징이라 어쩔 수 없거든. 아무튼 이 작가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겠다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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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야의 여름
트리베니언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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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놓은 소설마다 히트 쳤다는 그레이트한 작가라는데 나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스릴러 작가로 유명하시드만 어째 이 책은 순문학과 고전소설의 분위기를 더 띄고 있다. 그래서 다들 읽어보면 현대판 고전을 보는 기분이 들어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후반부로 가면 쏟아내는 반전에 반전으로 독자들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볼 것이다. 이 분도 애거사 크리스티처럼 전반전과 후반전의 온도차가 심한 작가 같다. 이런 걸 볼 때면 확실히 옛날 작가들이 내공도 스케일도 발상도 훨씬 더 끝내줬던 것 같음. 현대작가들은 뭐랄까, 맛은 얼추 맞추지만 깊은 맛이 부족해서 아쉬울 때가 많다. 짠 거 먹으면 단거 땡기듯이 가끔은 이렇게 노장들의 묵직함이 확 땡기곤 한다. 그래서 지금 나 기분 좋아져쓰.


작은 마을의 의사로 일하는 주인공에게 카티야가 찾아온다. 그녀를 따라가 다친 쌍둥이 남동생을 치료해주면서 그녀의 가족과 인연을 맺는 주인공. 당시 품위 있고 고상한 프랑스 숙녀들과 달리 당돌하면서도 어딘가 몽환적인 그녀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다. 그는 일과가 끝나면 매일 그녀의 집으로 출첵하며 카티야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무례한 동생 놈이 절대 누나와 썸 타지 말라고 핏대 세우며 경고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오직 사랑, 오직 카티야였던 의사는 구애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집안 사정으로 발목 잡힌 그녀를 구제해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죽어도 사정을 밝힐 수 없다는 이 집안은 일주일 뒤에 이 동네를 뜨기로 한다. 의사는 완강한 동생을 말려보지만 떠날 수밖에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대체 그들은 어떤 사정이 있기에 쫓기듯 떠나야 하는가. 정말 이대로 첫사랑 카티야를 보내야만 하는 걸까.


타고난 이야기꾼을 만난 기념으로 삼삼칠 기립박수를 쳐주었다. 이 정도로 짧고 굵게 임팩트 때리는 작품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한 남자의 순애보를 잔잔하게 그려나가다 갑자기 장르를 전환하여 미친 듯이 단타를 날리는 플롯이라니. 이런 게 왜 치명적이냐면 방금 전까지도 소풍 날씨였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 우박 태풍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듯한 당황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가지의 떡밥은 대놓고 보여주었지만 딱히 그것들이 별 의미도 없어 보였기에 독자들은 스릴러라는 장르를 망각하고 느긋하게 읽으며 방심하게 되는 것이다. 읽어보면 아실 텐데 이 작품은 시간도 짧고 장소도 한정되고 인물도 아주 적다. 그런 최소한의 조건만으로도 이 정도의 퀄리티를 뽑아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진짜 그레이트한 작가였음.


일단 몇 없는 등장인물의 뚜렷한 캐릭터성이 매우 훌륭했다. 카티야부터 말하자면 교양 있는 척하지 않았고 자연에 동화되어 즐거워했다가 갑자기 몽상에 빠져 저만의 세상에 노닐던 살짝 사차원 끼를 보여주는 여자였다. 동생을 의지하면서도 멋대로 행동하는 철부지 같은 면모도 보여주는 그녀. 요즘 남자들이 환장할만한 미를 골고루 갖춘 그녀를 흠모하는 주인공 몽장. 그는 신사다움, 허세, 윤리, 정의로움, 낭만이 약간씩 들어있는 어중간한 순진남이다. 이런 캐릭터가 요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자주 보이는 이유는 여러 상황에 써먹을 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사랑에 울부짖고 답답함에 울분을 표했다가 간혹 허당 미도 보여주는 다채로운 매력을 발산한다. 그런 의사를 견제하는 카티야의 남동생 폴은 까칠함과 무례함의 아이콘으로 프랑스 버전의 나쁜 남자라 할 수 있다. 툴툴대면서도 가족을 끔찍이 챙기는 동생은 이 책에서 가장 비중 높고 존재감 있는 캐릭터이다. 누나에게 흑심을 품는 주인공을 경고할 때 자신이 킥복싱 선수였다고 으름장 놓는 게 어찌나 웃기던지. 유치하게 굴면서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려는 폴이 밉상이라기보단 그저 귀여웠다. 동생보다 더 매력 있는 아버지와 의사 어르신이 더 있지만 이건 패스한다. 아무튼 인물 설정은 정말 칭찬해줘야 함.


카티야 집안사람들은 말도 생각도 전부 일방통행이다. 집안의 가장 역할을 맡은 동생은 권위적인 말을 자주 뱉고, 부친은 아무도 관심 없는 역사에 대해서 늘어놓고, 카티야는 백일몽에 계속 빠져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이런 독특한 가족에게 계속 정붙이는 주인공을 봐서라도 집안의 비밀을 말해주거나 귀띔이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끝까지 안 알려주려고 하데? 그래서 분명 범죄에 연루되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내막은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어쩌다 그 집의 비극을 알게 된 몽장은 왜 그들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며, 동생은 왜 그따위로 삐딱해졌으며, 왜 카티야를 사랑하면 안 되었는지 모두 알게 된다. 처음엔 동생의 과도한 경고가 일종의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앞전에 그녀를 사랑한 남자에게 성폭행당한 카티야를 보호하기 위함이었고, 그러면 동생이 과잉보호할만하다며 납득 중이었는데 그보다 더한 비밀과 반전이 준비되어있었다. 마치 바나나 껍질을 벗겨보니 후랑크소세지가 들어있는 정도의 당황스러움과 충격이랄까.


사랑을 시작할 때는 상대방에 대한 내 감정만 생각하다가 사랑이 한참 진행되면 그 사람의 배경을 안 볼 수가 없게 된다. 제아무리 낭만파에 로맨티스트 사랑꾼이라도 현실을 부딪힐 때가 오고 부담을 안고 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상대방을 아무리 사랑해도 나 자신이 다치는 걸 방치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주인공도 첫사랑의 복잡한 사정을 듣고 나자 뜨거운 여름 같았던 마음이 점점 찬바람 부는 겨울로 바뀌어간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든 불행 속에 갇힌 그녀를 꺼내주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새드엔딩이지만. 이 책이 스릴러 소설이긴 해도 나는 하나의 고전문학처럼 읽었다. 특히 주인공의 순애보가 고전 속의 여러 사랑꾼들과 닮아있었고, 금지된 사랑 속에 담긴 페이소스도 현대문학 스타일과는 다르게 보여서 신선했다. 이 작가도 관심 작가 명단에 추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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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8-25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심 작가 발견을 축하합니다. 제가 요즘 두 번 읽을 수 있는 책을 고르려고 하거든요. 관심 작품을 찾는 거죠.
다작보다 두 번 이상 읽는 정독을 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나 책을 만나는 건 행운인 것 같습니다.

물감 2019-08-26 08:29   좋아요 1 | URL
자신과 맞는 작가를 만나면 정말 기분좋죠. 이제 저는 ‘나중에 다시 읽을‘ 책만 구매합니다. 한번 읽고 끝날 책은 소장할 필요를 못느껴서요. 저도 이웃분들처럼 벽 한면을 책으로 꽉 채워보고 싶은데 그만큼 소장하고 싶은 책이 별로 없어서 아쉬워요ㅎㅎ
 
아이스 콜드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8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사람은 혼자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다‘ - 이 의견은 1인 가구/N포세대가 늘고 있는 요즘, 온라인에서 엄청나게 찬반이 나뉘고 있다. 남들과 관계를 맺는 게 부담이 되고, 있는 관계도 끊고 사는 시대인데 혼자 사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렇게 호들갑이냐는 사람들도 많다. 이제 시장도 상품을 1인 가구에 맞춰서 내놓는 추세이므로 돈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사회에 가득하다. 그 말에 나는 뭐 반반 입장이다. 그러나 절대 사람은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 수가 없다. 마이웨이 독고다이의 싱글 플레이어 캐릭터들(007요원이나 람보나 셜록 홈스 같은)도 사실은 누군가에게 계속 도움을 받는다. 그러면 호신술도 할 줄 모르고 사고 대처도 못하는 우리가 납치되거나 인적 없는 곳에서 사고 나거나 조난당했을 때도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까? 내가 위급상황일 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면, 내가 죽거나 없어져도 아쉬워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너무나 괴로울 것 같다. 이런 상상만 해봐도 사람은 완벽하게 혼자일 수는 없다. 그 생각은 이 책을 보면서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번 편은 인적 없는 설산에 갇힌 병리학자 마우라 아일스의 이야기이다.


성직자와 밀애 중인 마우라는 절대 평범치 않은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게 맞는 건지 고민 중이다. 생각도 정리할 겸 병리학 컨퍼런스를 참석하러 날아간 캘리포니아에서 대학 동기를 만난다. 기분전환을 위해 그의 친구들과 놀러 갔다가 산 길에서 차 사고가 나서 다친 동료를 주변 마을로 데려가게 된다. 그런데 이 마을은 모두 빈 집이었고 집문이 전부 열려있다. 바깥은 폭설 중이고 전화는 안 터지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상처하나 없이 죽어있는 반려동물들과 의문의 피 웅덩이... 한편 그녀의 실종을 눈치챈 형사 리졸리 일행은 마우라의 사고 차량을 발견하고 근처에 죽은 시신들이 마우라 일행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살아있는 진짜 마우라는 이제 아무도 찾으려 하질 않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하나의 그림자. 마우라는 자신을 반기는 위험과 공포 가운데에서 무사히 구조될 수 있을까.


고립된 장소에서 일어나는 조난 사건과 사고들. 흔한 소재라 딱히 기대감 같은 건 가지지 않았다. 다만 같은 소재라도 추리소설과 스릴러소설의 패턴이 다른 것에 흥미가 생겼다. 보통 추리소설이 밀폐 장소에서 범인을 밝히는 게 기본 플롯이라면, 스릴러소설은 건물 안과 밖에서 두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어 범인도 찾으면서 위기에 빠진 자들을 구하는 과정까지가 기본 플롯이다. 이 책은 밀폐된 공간을 집안 같은 좁은 장소에서 마을과 지역 전체로 확산시켰다. 무대가 커지면 써먹을 장치도 더 많이 늘어난다. 작가는 텅 빈 곳에서 인기척을 느끼게 함으로 공포감을 형성하였고, 일행들이 의견 불일치로 싸워서 흩어지게 한다. 여기까지는 어느 조난 장르물이나 비슷한 흐름이다. 그러나 후반전이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그녀가 잠깐 밖에 나간 사이에 누군가가 집들을 불질러서 일행들이 전부 죽었고, 그 지역의 보안관들이 그녀를 죽이려는 황당무계한 전개가 진행된다. 이렇게 뻔하면서도 예측불허한 특징이 장르소설만의 매력이다.


이번 작품은 유독 마우라의 심리상태가 뒤집히는 상황이 자주 있다. 항상 시크하고 완벽주의에다 일 외에는 모든 게 서툴고 유연치 못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이번 일을 통해서 사람들을 그리워할 줄 알게 되고, 사랑하는 이와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고,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늘 죽은 사람만 상대해온 마우라는 처음으로 산 사람을 수술해야 하는 상황을 겪는다. 죽은 사람은 해부할 때 피도 안 흐르고 비명 지르는 일도 없고 옆에서 통곡하는 가족도 없었다. 그러나 산 사람은 모든 게 정 반대였다. 환자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괴로움은 그녀의 전공이 아니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죽어가는 환자는 그녀의 돌 같은 심장을 깨뜨렸고, 산 사람이 가진 생명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여러 가지로 마우라의 성장을 보여주었던 작품이다. 그런데 꽤 비중 있었던 일행들이 화재 이후로 갑자기 다 퇴장해버려서 급 당황스러웠다. 뭔가 있어 보였던 등장인물이 알고 보니 병풍 역할이라면 이 얼마나 허무한가. 스릴러 장르는 이렇게 김빠진 콜라 하나가 작품의 완성도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사소한 것에도 주의해야 한다.


스릴러 소설은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 가장 외면받는 장르이다. 이유야 많겠지만 잔인하고 폭력적인 게 싫은 것과, 문체가 딱딱해서 싫다는 이유가 가장 많다. 전자는 어쩔 수 없지만 후자의 이유라면 이 작가의 책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테스 게리첸은 감성 스릴러 작가로 유명한데, 이 시리즈의 주인공들을 여성으로 설정하였고, 사건 사고마다 여성만의 아픔과 연민의 감정으로 연결시키는게 특징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사건보다 캐릭터들의 인간적인 면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아무튼 글도 하드보일드 하지 않고, 작품의 거친 면만 보여주고 땡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작가의 책은 스릴러 장르에 입문용으로 적격이다. 플롯도 그리 복잡하지 않으면서 재미는 재미대로, 교훈은 교훈대로 다 갖춘 편이라 부담이 덜할 것이다. 그런데 국내에 출간된 테스 게리첸의 작품은 2013년도에 출간된 이 책이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후속작이 없는 건 국내에서 인기가 없기 때문에 안 나오는 걸까. 수요가 없으니 공급도 끊어진 걸까. 그래 뭐 나중에라도 작가의 신간을 볼 수 있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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