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의 색 오르부아르 3부작 2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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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코로나로 힘든데 날씨마저 최악이라 요즘은 뭘 해도 의욕이 없다. 톱니바퀴가 군데군데 고장 나버린 일상은 밤낮을 가리질 않고, 내 육체는 좀비처럼 숨 쉬고 움직이는 중이다. 가뜩이나 독서활동도 뜸해지는데 골라든 책마저 재미가 없었으니, 근 한 달 동안을 슬럼프로 보내고 있다. 아무리 노잼이라도 내가 웬만해서는 중도에 포기하거나 스킵 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 작품은 마구마구 점프하면서 읽었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나름 흥행 보증수표 같은 작가인데 어쩌다 이렇게 핵노잼으로 전락한 걸까. 전작인 ‘오르부아르‘에 비하면 냄비받침으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의리상 완독은 했으나 실망이 커서 리뷰는 패스할까 많이 망설였다. 그러나 읽은 책은 전부 기록을 남기는 피곤한 성격의 소유자인 나님은 일단 뭐라도 남겨보기로 한다. 이제껏 모든 글에 영혼을 갈아 넣었지만 이번에는 그냥 손이 가는 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써보련다.


‘오르부아르‘의 후속작이라곤 하나 배경만 같을 뿐이라 딱히 연결된 내용은 없었다. 전편에서는 똑같은 문제와 절망적인 상황을 재치와 유머로 넘긴 반면에, 후편에서는 웃음기 최대한 빼고 엄격/근엄/진지모드로 일관되게 헤쳐나간다. 너무 무거워질 때마다 종종 위트 몇 스푼 넣으시던데 오히려 그게 더 마이너스였다. 작품 분위기가 이렇게나 어둡고 심각한데 억지로 유머를 집어넣는다 해서 그게 재밌어질까? 웃기기는커녕, 눈치 없단 소리 듣기 딱 좋은데 과연 ‘오르부아르‘를 썼던 사람이 맞나 싶다. 그냥 적당한 텐션에 진지함으로 일관되게 썼으면 더 좋았을 텐데. 스토리와 소재도 되게 별로였다. 전반전은 은행가 집안이 경제 위기로 파산하는 내용이고, 후반전은 은행가의 딸이 원수들에게 복수하는 내용이다. 구미가 썩 당길만한 스토리도 아닐뿐더러 등장인물들도 하나같이 밋밋해서 영 임팩트가 없다. 1부 마지막에 아들이 왜 건물 창가에서 뛰어내렸었는지 이유가 밝혀지고, 사업과 재산을 날려먹게 만든 주변인들의 음모가 드러나면서 드디어 주인공의 피 튀기는 화려한 복수가 시작되려나 싶었다. 그러나 주인공의 복수혈전은 내가 원한 것과 딴판인 데다, 아들과 프랑스 여가수의 지루한 장면이 너무 많아서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다. 과연 프랑스인들은 이런 문학에 박수쳐주고 그레이트를 외치시는지 궁금할 따름.


그나저나 지지리도 인복 없는 주인공이었다. 부친은 떠나시고, 아들은 장애인이 되고, 절친이던 하녀는 돈을 빼돌리고, 기업 파트너는 교활한 방법으로 재산을 날려먹게 만들고, 국회의원인 숙부는 돈 꿔달라 협박하고, 아들의 가정교사였던 애인은 아들을 오랫동안 괴롭혀왔다. 자신은 갈수록 쫄딱 망해가는데 원수들은 잘 먹고 잘 살고 모든 게 잘 풀려만 가니 얼마나 괴로우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이 작품도 대충 보면 개그콘서트 같은데 자세히 보면 인간극장이라 하겠다. 여튼 이래저래 해서 시원하게 복수하고 막을 내렸지만 왜인지 통쾌한 맛은 없어서 기쁨은 반이 되고 슬픔은 배가 되는 애매한 기분만 남았더랬다. 아 진짜 하나하나 파고들어서 전부다 태클 걸고 싶지만 지독한 날씨에 까칠력을 다 뺏겼는지 더 이상 힘이 나질 않아 이제 그만 써야겠다. 이 책이 나를 잘못 만난 건지, 내가 이 책을 잘못 만난 건지 모르겠다만 머릿속에 뭐 하나 남는 게 없었던 대단한 작품이었다. 이제 그만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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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8-12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르부아르>까지만 읽어야겠군요 -.-;

물감 2020-08-12 13:43   좋아요 0 | URL
모두 다 극찬하는 책이라 꼭 제 말을 들으실 필요는 없지만, 작가 명성에 비해 너무 별로였어요. 3편이 나올 예정이던데 봐야할 지 말지 고민되네요....

coolcat329 2020-08-12 2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르부아르>를 안 읽고 이 책은 읽었는데, 참 재밌었거든요 😅 근데 기쁜 건 오르부아르는 분명히 재미있겠다는 사실이에요. 읽어야지 하면서 자꾸 다른 책에 밀리는데 가을에 꼭 읽어봐야 겠네요.

물감 2020-08-12 23:04   좋아요 0 | URL
타 독자들의 감상을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 리뷰는 무시하셔도 되세요ㅎㅎㅎ 오르부아르는 정말 최고였는데요, 비교를 떠나서 이 책은 저와 맞지 않았습니다^^; 제 수준은 절대 높지않은데 말이에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합본 특별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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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연락 주신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하루키의 대단한 필력은 인정하지만 작가만의 멜랑꼴리한 정서가 나랑 맞지 않아 더 이상은 그의 작품을 읽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렇지만 다른 리뷰에서도 밝힌 바, 출판사의 서평 요청이라면 언제든지 대환영인 나님은 제공 도서가 하루키라고 해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자본주의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니깐요. 이 책은 내가 읽었던 벽돌 책 중에 베스트 파이브에 들 정도로 두껍지만 워낙 가독성이 좋아 파바박 휘리릭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렇지만 생각하느라 브레이크 걸리는 구간이 많으므로 천천히 장면들을 곱씹으며 읽길 바란다. 암튼 하루키 작품 리뷰는 온통 찬양하는 글들 뿐이라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출판사의 정성도 있고 하니 당근과 채찍질을 돌아가며 정성을 담아보도록 하겠다.


내 앞에 무수한 리뷰들이 즐비하므로 줄거리 요약은 생략한다. 주인공의 의식과 무의식 세계의 내용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보통은 A와 B의 시점이 후반에 합쳐지는데, 이 책은 A의 두 시점인데다가 그것이 몸 밖과 몸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므로 하나인 듯 하나 아닌 하나같은 독특한 플롯이다. 참 아이디어도 좋고 표현력이나 상상력도 풍부한 작가다. 나는 하루키의 장점 중에 관찰력을 가장 손꼽는데, 관찰력 좋은 여러 작가들 중 유독 하루키가 돋보이는 건 섬세한 강약 조절로 투머치한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워낙 디테일을 중요시해서 가끔은 분량 조절에 실패하지만 술술 읽히는 걸 보면 역시 능력자 답다고나 할까. 액션이나 스릴러 장르가 아닌데도 속도감을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 이러한 하루키의 묘사와 표현방식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 하다. 화자의 느낌이나 생각 같은 인물의 감정이 배제된 채 철저하게 눈앞에 보이는 장면만 설명할 때가 많아서, 이게 캐릭터의 시점인지 작가의 시점인지 분간이 잘 안된다. 근데 ‘1Q84‘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사실주의에 초현실주의를 입힌 거라 그 불분명한 시점들이 작가의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어떤 평을 듣든 간에 하루키는 본인만의 철학이 확고하고, 낭만을 즐길 줄 알고,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거침없이 분출한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를 외치는 건 그만한 신념이 있어서겠지만, ‘다 필요 없고 마이웨이 하겠다‘는 식의 절대 신념이 내게는 그리 멋져 보이진 않는다.


현실 속 주인공은 특수작업을 처리하기 위한 조직의 인체실험 대상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는 스스로 의식 속에 들어가 무질서한 기억의 혼돈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강한 성향으로 운 좋게 목숨을 보호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현재 조직은 주인공을 기초 샘플로 삼아 제2세대를 만들 계획이다. 왜 자신에게 유별난 계산능력이 생긴 건지, 조직과 기호사에게 왜 쫓기는 신세가 되었는지, 왜 그가 열쇠인 건지 알게 된 주인공은 한탄을 하면서도 제 팔자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박사의 손녀가 그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잘해준 덕분이다. 한편 그의 자아 세계인 ‘세계의 끝‘에서는 모두가 마음과 감정을 잃고 살아간다. 거기서 주인공도 자신의 그림자와 분리되어 마음을 잃어버린 채 조금씩 현실에 안주하려고 한다. 그런 주인공을 야단치고 함께 탈출 계획을 세우는 그림자 덕분에 의식이 끊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주인공처럼 삶이 엉망이고 심신이 지쳐버리면 상황을 이겨낼 생각보다 전부 내려놓고 자포자기 심정이 되기 쉽다. 그 와중에 눈앞에 유토피아가 준비돼있다면 누가 그걸 마다할까. 고통의 감정들과 가혹한 현실은 그만 잊고 낙원으로 뛰어들고 싶지 않을까. 나 같으면 자아를 잃든 말든 원하는 세상 속에 머물고 싶을 것 같다.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아무리 봐도 디스토피아라서요.


1Q84 작품과 여러모로 분위기나 코드가 비슷하다. 현실과 또 다른 세계의 평행 우주, 예정된 종말과 파국, 뒷세계의 기밀과 음모론, 위기에 놓인 두 남녀 등등. 거기에다 하루키 전매특허인 저 텐션과 양반걸음 템포마저. 나쁘진 않지만 매 작품마다 주인공 성격이 다 고만고만한 게 영 불만스럽다. 섹스 라이프를 즐기는 수수한 초식남? 아마 작가 본인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듯한데 그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매번 이런 식이니 인물 설정에 별로 성의를 두지 않는 건가 싶다. 게다가 이 책의 모든 인물들은 이름도 없다. 박사, 노인, 그녀, 문지기 같은 식으로 불린다. 캐릭터보다는 세계관으로 승부수를 던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이 책은 인물들의 비중이 커서 매력 발산을 다 못한듯하다. 그래도 작가가 창조한 세계관과 고유의 환상적인 분위기 연출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개인적으로 1Q84의 세계관보다 훨씬 균형 있었고, 다른 차원 세계로의 연결과 접근도 그렇고, 풀어나가는 전개 방식도 매끄러웠다고 생각한다. 특히 완급조절에 신경 썼다는 걸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주인공을 노리는 무리들의 정체, 주인공의 존재와 선택받은 이유,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위기 등등 각종 이슈들이 적절한 타이밍에 잘 치고 들어온다. 1Q84는 길이 막혀서 헤매는 구간이 꽤 많았는데, 이 작품은 막힘없이 자연스러운 게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난다.


매듭짓지 않고 흐지부지 끝난 내용이 많았다. 조직과 기호사에게 찍혔다면서 초반의 이 인조 외에는 아무도 위협해오질 않았다. 끝날 때까지 별 탈 없는 걸 보면 두 단체는 그냥 맥거핀이었나 싶다. 노 박사의 두개골 컬렉션과 일각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인 양 다루더니 나중 가선 방콕 신세가 된다. 지하세계의 ‘야미쿠로‘라는 끔찍한 존재들도 언급만 있을 뿐 딱히 등장하지는 않더라. 무엇보다 엔딩이 가장 아쉬웠다. 무의식의 세계에 영영히 갇히게 된 그는 현실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을 찾아냈다. 그리고 박사의 손녀딸에게 곧 돌아올 거라는 암시를 준다. 근데 세계의 끝에서는 그림자와 탈출 직전까지 가서 왜 그 가능성을 버렸을까. 그쯤에는 무의식 세계의 주인공도 탈출하면 현실에서 깨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여하튼 그의 최종 선택이 스토리 면에서는 나쁘진 않았다만, 메시지 측면에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작가는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곳의 평화는 정상이 아니라고 하였다. 처음부터 줄곧 마음을 잃게 되면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며,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하였다. 그런데 제멋대로 만들어낸 무의식의 세계를 책임질 필요가 있다며 그곳에 남겠다는 건 글쎄요. 자아를 찾아낸들 사유세계에서 평생 지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작가의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 그저 당황스럽다. 어찌 되었건 내용물만 좋으면 포장은 상관없단 말입니까. 그래요, 그럴 수도 있지 뭐. 이래저래 잘 읽었고, 읽었던 장편 중에는 가장 괜찮았던 작품이었다. 언제나처럼 하루키 문학은 생각할 것도 많고 분석할 것도 많아서 리뷰가 길어졌다. 어째 이번에는 리뷰 쓰는 것보다 완독하는 게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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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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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돌보지 못하고 추락했다가 다시 일어선 이 책의 주인공을 보며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가난에도 두 종류가 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와 마음이 가난한 자. 전자는 여유가 생기고 상황이 나아지면 곧 해결이 된다. 하지만 후자는 자존감 때문인지 좀처럼 바뀌질 않는다. 이들은 본인의 가치를 깎아내리면서 스스로를 가둬놓는다. 뼛속까지 꽉 차있는 자기 파괴적인 성향으로 세상을 왕따시키며 소통을 거부하거나, 혹은 잘못된 방향으로 소통을 시도하다 왕따를 당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말로가 좋지 않은 그들을 보면 참 답답하고 안타깝고 그렇다. 현대인의 질병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오래전 세대부터 존재해왔었다는 사실에 놀라며 읽었던 이 작품을 리뷰해본다.


이 책은 로즈의 성장기를 연작소설로 구성한 작품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로즈는 부잣집 남자와의 결혼으로 마침내 노동 계층을 벗어난다. 그러나 중산층 생활에 환멸을 느껴 이혼을 한 뒤로 본격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난다. 자유가 된 그녀는 여러 남자도 만나보고, 일자리도 다양하게 구해본다. 그러나 어디서도 답을 얻지 못한 그녀에게 오춘기가 찾아오기 시작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성장 배경이나 환경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또 한번 실감하게 된다. 로즈 주위의 어른들은 강압적이고 권위적이고 책임을 회피하고 조롱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집 밖에서나 전부 어른답지 못한 사람들로만 가득했다. 안 그래도 조신함과는 거리가 먼 로즈인데, 그런 어른들만 보고 자랐으니 반항 기질이 커진 게 아닌가 한다. 십 대들의 사춘기가 다 그런 거 아니냐 할 수도 있는데, 그 시대의 사회와 가정교육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고분고분하게 자란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로즈의 행동은 돌연변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아버지가 바라는 여성상과 한참 다른 딸이었지만 소녀는 그런 자신이 좋았더랜다. 집안일, 지성, 교양 같은 단어들은 소녀와 영 맞지 않았고, 나중에 커서 무대 위의 배우가 되어 자신을 나타내고 싶어 했다. 내숭도 없고 매사에 당당한 그녀 모습에 반한 남자와 캠퍼스 커플을 즐기며 잠깐이나마 행복에 젖은 로즈. 그러나 중산층의 남친은 로즈를 한 여자로서 좋아했다기보다, 그녀의 가난함을 자신의 부요함으로 덮어줄 수 있다는 자기만족감에 빠져있었다. 그는 로즈가 아닌 로즈의 가난함을 사랑스러워했다.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라는 그림 속의 두 사람이 자신들과 닮았다며, 은연중에 계급을 확인시켜준 그였다. 왕과 거지의 신분이 하늘과 땅 차이인 것처럼, 그와 그녀의 신분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며, 제멋대로인 그녀를 본인 아래 두고 싶어 했다. 로즈는 계급장 가지고 지지리 궁상을 떨어대는 애인한테 까칠한 척 해보지만, 결국 남자의 빽을 이용해 출세하는 비겁한 사람이 되기로 한다. 여성의 가난이 사회의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알면 알수록 좋든 싫든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자신과 집안을 경멸하는 오만한 남자일지라도 말이다.


이혼 후에 방송국 교직원이 된 그녀는 남들에게 기득권층이라는 말을 듣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분이 상승되어있었고 그에 맞게 형편도 나아졌지만 변한건 없었다. 어느 한 곳에 좀처럼 마음 두지 못하는 데다가, 남들과 어울릴수록 오히려 고립되었고 그래서 두려웠다. 마음의 가난에서는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자식 교육에도 전념해보고, 꿈이었던 배우로도 살아봤지만 마음은 늘 곤고했다. 그 허전함을 남자들과의 관계로 채우기 시작했다. 제 맘에 들면 바빠서 보기 힘든 남자도, 애 딸린 유부남도 가리지 않았다. 결혼 이후로는 모든 편마다 남자 만나고 데이고 슬퍼하는 내용만 나온다. 외도와 불륜, 거짓말과 이별, 만남과 인연의 반복된 내용이 분량의 절반이어서 실망했다. 새 애인과의 관계가 어긋날 때마다 구차해지는 그녀가 싫어졌다. 야무지고 당돌했던 소녀는 어디 가고, 오로지 남자에 죽고 못 사는 금사빠로 타락해가는 게 안쓰럽다 못해 지긋지긋했다. 여러 번의 경험으로 서서히 달라질 줄 알았는데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는 중이다. 성장소설치고 진도가 무진장 느린 편이니 참고하시길.


로즈는 언제나 두 가지 마음을 지녔다. 사랑하면서도 거부하고, 좋으면서도 싫은 티를 내고, 간절히 원하면서도 바라지 않았고, 기대하면서도 피하고 싶어 했다. 나는 그것이 결코 이중적이거나 모순돼 보이지 않았다. 얻게 된 행복 안에 부담도 들어있다면 차라리 행복하지 않는 게 낫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잘 알기에 제한된 영역 안에서 계속 머물려고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왕이 거지에게 잠깐의 은혜를 베푼다 한들 거지의 신분은 달라지지 않으므로. 결국 로즈는 먼 길을 돌아서 고향을 찾아간다. 그리고 실패와 상처투성이인 자신과 닮은 이웃들을 만나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또 용서를 구한다. 한때는 높은 계급과 사회적 신분이 곧 자신을 나타낸다고 믿고 살았던 그녀였다. 그러나 해답은 나와 닮은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 속에서 평안을 느끼고 부담 없는 행복도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을 마음의 가난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자격지심이 생기지 않고, 두 마음을 갖지 않게 될 때 마주하는 진짜 나의 모습. 우리는 온전한 나를 드러낼 수 없어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가면 덕분에 자신이 보호받는 기분이 들겠지만, 나중에는 가면이 시키는 대로 끌려다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제 그만 가면을 벗고 마음의 가난에서 벗어나는걸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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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7-18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가난한 자, 즉 마음에 병이 든 자가 가장 가엾다고 여깁니다. 마음 따뜻한 사람을 만나서 치유되는 경우가 있어요.

물감 2020-07-18 13:57   좋아요 1 | URL
맞아요. 한번 닫힌 마음은 열기도 힘들지만, 열렸을 때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게 싫어서 더 꽁꽁 싸매기도 하죠. 상처받는것도 치유되는것도 다 사람 때문이라는 게 아이러니해요.

나비종 2020-07-31 0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파지는 것처럼 물질적인 가난은 종종 마음도 가난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물질적으로 나아지는 속도를 마음이 따라가지 못해 가난의 관성으로 한동안은 어지러움을 느낀다고요. 주인공 로즈도 가난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환경의 중요성만큼 기질의 차이도 중요하다는 점도 생각했어요.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전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니니까. 기질의 차이로 마음의 가난이 만들어지는 걸까요.

패트릭의 사랑에 대한 물감님의 관점에 공감합니다. 자기만족감 내지는 로즈의 가난함을 사랑스러워했다는 점이요.

그녀의 결핍은 어디에서 온 걸까요. 어린시절 부모님과의 비뚤어진 관계로 형성된 공허를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로 계속 메우려했던 걸까요. 치유는 원인으로 되돌아가서 출발하는게 맞나봅니다. 로즈가 새어머니를 돌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가난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재미는 없었지만 ‘가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던 시간이었어요.~^^*

물감 2020-07-31 08:52   좋아요 1 | URL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는 여유가 생기면 해결 된다고 썼지만 확실히 완전하게 벗어나긴 어려운거 같아요. 어릴때보단 지금이 더 잘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비싼옷을 못사겠고, 비싼 음식을 잘 못시키겠더라고요^^;; 어중간한 부가 아닌 진짜 부자가 되면 좀 다르려나요 ㅎㅎㅎ

기질의 차이까지는 생각을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누구는 악바리처럼 벌어서 성공가도를 달려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적당한 삶에 안주하기도 하는걸 보면 정말 다르긴 하네요. 어쩌면 환경보다도 누군가와 지냈느냐가 더 영향이 크지 않을까 합니다. 똑같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나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아마도 이 부분에서 말씀하신 결핍이 생겨나지 않았을까요? 평생을 쌍방이 아닌 일방의 관계만으로 살아온 로즈여서 어쩐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해요. 화려한 연예인들도 친한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는 인터뷰를 자주 보고 듣는데, 이렇게 관계맺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는 부류는 겁나서 시도조차 안하거나 로즈처럼 잘못된 관계형성을 맺으려 하는걸 종종 봤습니다. 그나마 로즈는 나름의 답을 찾은듯해서 다행이지만 현실에서는 대부분 아웃이죠 뭐...

여튼 이번달도 아슬아슬하게 클리어하셨군요! 저도 읽으면서 그저그랬던 책이라 나비종님 걱정을 했어요 ㅎㅎㅎ 7월도 수고 많으셨어요~ 요즘 날도 습하고 비도 자주오고 해서 독서활동하기 영 좋지 않은데 말이죠... 다음 도서 선정은 좀더 재미있는 작품들을 선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파이팅 넘치는 8월 되십시오^^

나비종 2020-07-31 10:28   좋아요 1 | URL
요즘 살까 말까 망설이다 안산 물건이 있거든요. 흰 양말이예요. 이게 오래 신다보면 발목이 늘어져서 운동화 신고 걷다보면 양말을 질겅질겅 밟게 되거든요. 그렇게 병신이 된 양말을 한 짝씩 버리다보니 3개가 남은 거예요. 더 살까 말까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되었어요.
출근길을 걷다보면 ‘명품 양말 5개 만 원‘이란 문구를 마주치게 되거든요. 어떻게 생겨먹어야 양말이 명품이 되는 걸까요. ㅋㅋ 결국 못샀어요. 비.싸.서. 언젠가 5개에 5천 원이란 문구를 본 것 같은 거예요. 저와 타협을 했죠. 2개 남을 때까지 지내보자고.
책은 몇 만원어치 휙 지르고 부모님께는 몇 십만 원을 써도 아깝지 않는데 비싼 물건은 잘 못 사겠어요. 물감님 말씀처럼 진짜 부자가 되면..ㅎㅎ 달라질까요?^^

공감해요. 물질적인 환경보다 관계성 환경이 사람의 성장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저는 최상의 환경에서 자라났네요.ㅎㅎ 그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위력을 발휘하나 봅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적인 부는 상한선이 있는 걸까요. 어느 한도 이상이 되면 그때부터는 정신적인 부가 사람의 마음을 채워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질은 밖에서 오지만 정신은 안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거라서 전적으로 각자의 몫이라고 보아요.

이번달도 아슬아슬^^; 온라인/ 오프라인이 병행되는 환경이 보통 때보다 배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나봐요. 오밤중까지 겁나 바빴답니다. 밤 12시, 1시에 학생 문자도 수시로 오고 저녁 때도 온라인 수강 독촉 문자 보내고 눈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일로 채워지더라구요.ㅠㅠ

세상에 의미없는 책은 없다고 봐요. 참 좋았던 책에서는 책안에서 의미를 무더기로 찾으면 되고, 그저 그런 책에서는 그 책을 바라보는 제안에 담겨있던 의미를 찾으면 되는 거니까요. 그러니 도서 선정에 대한 부담은 내려놓으셔도 좋아요. 좋았으면 같이 감탄하고 그지 같았으면 같이 까면 되잖아요.ㅋㅋ 드라마 <도깨비>가 생각나네요.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물감님께 이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책이 좋아서, 책이 좋지 않아서, 책이 적당해서... 선정해주신 모든 책이 좋았습니다~~~ㅎㅎ
 
엣지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13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
제프리 디버 지음, 안재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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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빨간 책의 징크스는 그 대단한 제프리 디버조차도 피해 가지 못했다. 디버의 광팬이지만 이 책을 포함해 스탠드얼론 작은 대부분 그저 그런 수준이다. 이건 시리즈물을 쓰는 작가들의 고질병 같다. 마이클 코넬리, 마이클 로보텀, 요 네스뵈 등등 유독 스탠드얼론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 재료도 좋은 걸 가져다 쓰고, 조리법도 나쁘지 않고, MSG도 적당히 들어가는데 왜 결과물은 실망스러울까. 이런 기분을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출판사들이 과대광고하는 책들보다야 훨씬 낫지만 워낙 기대치가 높았던 탓에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튼 재미가 없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닌 매우 어중간한 기분으로 완독했다. 이제껏 디버 작품은 편애한다고 느낄 만큼 극찬의 평을 남겼었는데, 드디어 비평을 날릴 차례가 온 것 같다. 유후후-


정보 추출가, 일명 캘꾼이 한 경관의 가족을 공격해온다. 경호팀은 가족들을 보호함과 동시에 캘꾼을 잡고자 하나 번번이 실패한다. 법무부는 이번 사건이 테러와 엮여있다 판단했고, 그래서 더더욱 캘꾼이 찾는 정보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거기다 캘꾼을 고용한 청부업자, 몸통도 잡아야 한다. 여러모로 바쁜 주인공에게 임무 중단이 내려지고 옷까지 벗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대로 상층부의 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이 개똥같은 판을 뒤집을 것인가.


솔직히 스릴러치고 흔한 플롯이라 설정 자체로는 매력을 못 느꼈다. 아마 디버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작품의 빈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언제나 악역 캐릭터에 승부를 걸어왔다. 그래서 디버 작품의 액기스는 악역의 비중이 80% 이상을 차지한다. 암튼 이번에도 화려한 악의 등장으로 스토리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셨다. 이번 프로 범죄자는 정보를 캐내기 위해 모서리, 즉 대상의 약점을 이용한다. A의 정보를 캐내려 A의 약점을 직접 건드려도 되지만, B나 C의 약점을 잡아 이용한다. 그러면 B, C들이 캘꾼대신 범죄를 저질러주기도 하고, 미끼가 되어주기도 하고, 경호팀에 혼선을 주기도 한다. 누구나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약점이란 바로 인질들의 가족을 위협하는 것이다. 그래서 캘꾼에게 걸리면 누구라도 복종하도록 되어있었다. 정말 수많은 범죄자를 봐왔지만 이번 범인은 악질 중에 악질이었다. 게다가 공범들까지 있었으니 참 어지간히도 어려운 상대였다. 매번 이렇게 초 신선한 적들을 창조해내는지, 작가의 뇌구조가 알고 싶다.


지금껏 디버는 범인과의 대결구도 플롯을 고집해왔다. 주인공과 범인의 교차 시점으로 미친 속도감, 불타는 심리전, 넘치는 텐션을 잔뜩 보여주던 기존작들과 다르게 이번 작품은 주인공 일인칭 시점에 가까웠다. 카메라 열 대로 촬영하던 방송이 카메라 한 대로 줄어버리면 당연히 퀄리티가 떨어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지상파 중계방송에 가깝던 디버의 스타일은 유튜브 비제이의 일인 방송으로 전락했다. 비제이들은 혼자 방송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매우 분주하다. 그처럼 이 책의 주인공도 혼자 이끌어가느라 쉴 새 없이 바쁘다. 그러다 보니 스토리는 점점 입체감이 떨어지고, 작가의 전매특허인 디테일한 묘사들은 투머치가 돼버렸다. 그 굉장한 악역의 플레이나 매력도 일부만 보여주었고, 흐름을 비틀기 위해 넣었던 조/주연들의 서브 내용들도 흐지부지한 마무리로 끝나곤 했다.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조각들이 하나 되지 못하고 따로 놀고 있어 몰입이 여러 번 끊어졌다.


대신에 주인공의 캐릭터 설정만큼은 작가가 영혼을 갈아 넣었다. 경호팀의 지휘를 담당하는 그의 역할은 캘꾼의 타깃들을 보호하고 안전장소로 대피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캘꾼에게 죽은 스승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캘꾼을 잡고 싶어 했다. 상황에 맞게 융통성을 발휘하려는 현장팀과 달리 법무부는 매뉴얼대로만 움직였고, 주인공이 범인을 쫓는 게 개인적인 욕심이라고 여겼다. 본인도 스승의 복수를 위한 집착이란 걸 어느 정도는 인정했다. 그럼 나머지는 무엇이냐.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그의 성향 때문이었다. 카드, 체스, 퀴즈, 퍼즐 같은 게임 매니아인 주인공은 캘꾼이 자신처럼 이 사태를 하나의 게임으로 생각하고 있고, 자신들을 게임 말처럼 플레이 중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모든 게임에는 룰이 있고, 그 룰에 따라 역전도 가능하고 체크 메이트도 가능하다. 눈앞에 난관이 닥칠 때마다 게임 룰을 적용하여 판을 뒤집으려는 시도가 참 새로웠다. 내가 보드게임 세계를 잘 몰라서 그냥 넘긴 구간이 많았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여튼 냉정한 경호관에게 감정이 생겨 이성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끝까지 읽었던 작품이다. 궁시렁 대면서도 디버의 스탠드얼론 작을 벌써 90% 읽었다. 디버 작품 도장 깨기도 어느덧 끝나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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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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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나 외교 쪽 못지않게 심리전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 가정이다. 그래서 가족을 소재로 한 심리소설은 첩보물만큼이나 넘쳐난다. 현실에서도 비극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독자들이 유독 심리소설에 열광하는 건 아마도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개연성 있는 막장 시나리오를 은근히 바란다는 거다. 그만큼 더 임팩트 있고 자극적인 걸 원한다는 뜻이겠다. 그런 면에서 심리 스릴러는 대중들이 원하는 조건을 모두 다 갖춘 퍼펙트 한 장르이다. 각종 비밀과 음모, 복잡한 과거, 잘못된 만남, 불편한 진실, 배신감과 수치스러움 등등 ‘막장‘하면 떠오르는 모든 게 들어있다. 그러면서 개연성도 있고 작품성도 갖췄다. 특히 작은 성냥불 하나가 점점 커져서 온 집안을 태워버리는 과정의 리얼리티가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장르는 뭐랄까, 읽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죄책감도 든다. 불안해하는 타인의 심리 상태를 보면서 스릴을 즐기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슨 변태 사이코패스같이 느껴져서 말이지. 나 같은 기분을 느껴본 독자가 또 있을지 모르겠다만, 소설인데 재미있으면 그만 아니냐라고 생각하기엔 쪼까 거시기 혀...


남편 얼굴에 총탄을 갈긴 아내는 실어증에 걸리고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심리상담사인 주인공은 모두가 포기해버린 이 환자를 치료하기로 한다. 환자의 과거를 통해 여러 가지 불행을 알게 되었지만 살인을 저지르기엔 불충분해 보인다. 남들이 말한 대로 그녀가 했던 말들이 전부 정신 나간 헛소리에 불과한 걸까. 지금의 그녀는 맛이 간 연극을 하는 것일까. 서로가 불신한다면 어떻게 심리치료를 한단 말인가.


심리 스릴러는 일반 스릴러보다는 스릴감이 약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대신 인물 간에 밀당은 정말 잘해줘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의 인물관계는 전부다 일방통행이다. 매번 오른쪽은 으르렁대고 왼쪽은 깨갱거려서 팽팽한 기싸움은 볼 수 없었다. 물론 주인공의 일인칭 시점으로 다룬 심리소설이 없지는 않으나, 대개 그런 경우는 복합장르를 다루어서 부족함을 채우곤 한다. 이 책도 나름 복합장르를 시도하긴 했다. 남편을 살해하고 벙어리가 된 아내는 미스터리 요소로 딱이지만 이전까지의 부부 이야기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건물 밖에서 아내를 구경하던 괴인의 등장으로 호러 분위기가 되었으나 정신병자 취급당한 그녀였기에 괴인의 존재는 먼지처럼 떠나갔다. 또한 아내의 주변 남자들과 복잡한 N각 관계까지 형성했지만 하나같이 엑스트라처럼 조용히 퇴장한다. 아 진짜 뭐 이러냐. 정말 용두사미라는 표현조차 아깝다잉.


두 번째로 아쉬운 건 주인공의 동기 부족이다. 심리상담사로써 환자의 실어증을 고쳐주고 싶은 건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주인공은 투철한 사명감이나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으로 치료를 자원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본인의 커리어를 위함도 아니고, 유명세를 얻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무슨 목적이 있기는 할 텐데 도무지 언급된 장면이 없다 보니 점점 그러려니 하게 된다. 두 남녀는 어릴 때 가족들에게 상처 입고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동병상련의 마음이 그녀에 대한 집착으로 가는가 했는데 그것마저도 아니었다. 게다가 마리화나로 오락가락하는 주인공이었기에 어디까지가 본심인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뚜렷한 동기가 배제되어 있다 보니 그냥 그런갑다 하고 읽게 된다. 팥이 반만 들어있는 붕어빵을 먹는 기분이랄까.


주인공이 환자를 치료해가는 장면과, 바람난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되며 나온다. 그래서 낮에는 세상 친절한 얼굴로 병원에서 열 일하다가 밤이 되면 아내 문제로 골머리 앓는 중증 환자가 된다. 이렇게 괴로운데 매일매일 멀쩡하게 출근을 하고 환자를 상담하는지 좀 의아했는데 그게 다 독자를 속이기 위한 연출이었다.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셔도 좋겠지만, 추천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여하튼 환자의 주변인들을 조사하면서 그녀의 침묵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친구인 화랑 대표는 그녀의 미술 재능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았고, 사촌 동생은 도박으로 탕진하고서 돈을 꿔갔고, 남편의 형은 그녀를 성추행했고, 부친은 모친 대신 그녀가 죽어야 했다며 폭언을 일삼았다. 이 정도면 정신병 걸릴만하겠다 싶었지만, 어째서 그녀는 적군이 아닌 유일한 아군인 남편을 쏴 죽였나. 얼마나 큰 배신감이 들었길래 그랬는지 아무리 추측해봐도 잘 모르겠더라. 위에서 말했듯이 심리전이 전혀 없는 작품이라서 추측이 불가합니다요. 아 놔.


등장인물마다 사연을 갖게 하여 스토리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점은 칭찬한다. 그런데 그렇게 비중 있는 역할들이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어떤 매듭도 없이 사라진다. 환자의 친구는 병문안 오는 것을 굉장히 꺼려 했는데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고, 남편의 형은 그녀가 죽어가자 갑자기 나타나 울며불며 속마음을 고백하는데 완전 뜬금없었고, 수간호사와 문제적 환자의 불미스러운 거래 관계의 뒤 내용도 없었고, 무엇보다 바람난 주인공의 아내의 뒷이야기가 뚝 잘린 게 가장 당황스러웠다. 아니, 메인 요리가 중요한 건 맞는데, 그렇다고 밑반찬을 막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그건 손님에 대한 성의가 없는 겁니다요. 이제 마이클리디스는 노맛집으로 등극되었습니다. 원래 맛집보다 노맛집이 더 기억에 남는 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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