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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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연예인이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뉴스 기사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어떤 피해자들은 이제라도 진심 어린 사과를 받으면 가해자를 용서해줄 모양이던데, 나는 죽어서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트라우마가 피해자의 인생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가해자들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트라우마 극복을 하기 위해 가해자를 용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근데 사실 학교폭력보다 심각한 것이 가정폭력이다. 학대받으며 자라난 아이들은 단지 보호자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충성해야만 한다. 그 아이들은 훗날 성인이 되고도 공포에 발목 잡혀서 평생을 살아간다. 이 책은 그런 어른아이들의 이야기이다. 똥꼬발랄한 겉표지에 속지들 마시라. 단맛 1%와 쓴맛 99%의 카카오 초콜릿 같은 작품이시다.


멀쩡한 집 놔두고 자동차 트렁크에서 주무시는 인간들을 트렁커라고 부른다. 낮에는 멀쩡하게 있다가 잘 때만 트렁크에 들어간다. 트렁커가 된 배경과 사연들은 다 고만고만하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두려움에서 도망치다 찾아낸 장소가 트렁크였던 것이다. 그 공간은 피난처이자 안식처였고, 세상과 단절되어 철저히 혼자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세상에 상처 입은 트렁커 두 남녀가 만났다. 둘은 보드게임을 하며 친해지고, 벌칙으로 과거를 얘기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담담히 고백하는 남자와 달리 솔직하지 못했던 여자는 제 과거를 지어내거나 바꿔서 말해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자의 기억들은 흩어지고 자아가 갈라졌기 때문이다. 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보드게임을 통해서 현재와 과거의 시점이 자연스럽게 교차되나 공백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눈은 과거를 보고 있어도 머리는 지금의 모습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사연들이 두 사람을 트렁커로 만들었겠구나 하는 짐작과 동시에 트라우마에서 해방되는 힌트가 과거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확신을 준다. 과거 시점으로 점프하는 플롯을 썩 좋아하지 않는데 이 작품은 끊김 없이 푹 빠져서 읽었다. 이 작가님도 내 스타일이심.


남자답지 못하단 이유로 부친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아온 남자는, 자신이 겪었던 그대로 부친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줄 계획이다. 반면 그의 옛이야기를 듣던 여자는 뒤죽박죽된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한 노파에게 길리운 고아들 중 하나였던 여자는 그 사육장에서 더럽고 추잡한 일들을 보고 겪으며 살았다. 이 과정에서 자아가 분열되었고 그래서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온통 나쁜 기억들 뿐이니 이대로 다 잊고 살면 좋으련만,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이 속을 뒤집어대니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었고, 그들만의 안식처도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남자는 기울어진 건물의 균형을 맞추는 일을 하고, 여자는 유모차를 판매하는 베테랑 직원이다. 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볼 때 상당히 아이러니한 그림이다. 남자의 가족들은 부친의 폭력을 보고도 모른척했다. 그야말로 균형이 깨진 집안에서 자란 남자는 세상 어디에도 균형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여자 또한 부모에게 버림받고 동네 똥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생명에 대한 가치를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얼마든지 삐뚤어질만한 삶을 걸어왔지만 이들은 타인의 안전을 책임지는 직업을 삼았다. 어쩌다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는 설명이 없었지만, 내 눈엔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트라우마에 대항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트렁크는 여전히 그들의 성소였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세상과 소통할 날을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두 사람 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다. 폭력은 욕하고 때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아픈 기억을 들춰내는 것 또한 폭력이다. 그렇기에 언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를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는 건 평생을 폭력에 시달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트렁커들끼리도 마냥 솔직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 보는 내내 가슴 아프게 했다. 그래도 자신을 알아주는 누군가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을 조금씩이나마 통제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피해자들이 언제까지고 그런 아픔 속에 지내서는 아니 될 일이다. 다들 좋은 사람 만나 아픔에서 해방되어 건강한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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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산이 울렸다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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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할레드 호세이니의 작품이다. 아프간인의 비탄과 절규를 노래하는 작가만의 먹먹한 감성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다. 호세이니의 글은 가슴 깊숙이 후벼파서 늘 읽기가 힘들다. 그래서 재독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읽고 있으면 인물들의 아픔이 내 것처럼 느껴져 숨이 막혀온다. 이 책은 연작소설이라서 전작들보다 더 많은 아픔을 다루고 있다. 가족과의 이별, 빼앗긴 고향 땅, 전쟁과 죽음, 버려진 생명 등. 온갖 ‘부재‘로 인해 생긴 아픔들을 총망라해서 보여주는, 반드시 독자를 울려보겠다고 작정한 듯한 작품이었다.


여러 중단편들을 엮어놓은 거라 요약은 생략한다. 어린 남매의 생이별로 시작하여 먼 훗날의 재회로 끝이 나지만 그들과 연관된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있다. 그 많은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핵심 내용은 누군가의 부재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이들의 상실감. 또는 멀리 떠나와 뿌리를 잃어버린 이들의 공허함. 이것들을 무엇으로 달랠 수가 있을까.


아무래도 부모와 자식에 대한 내용이 많다. 자식에게 따듯한 부모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부모도 있다. 반대로 자식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의 부재는 곧 불화를 낳는다. 오해는 서로를 멀어지게 만들었고, 시기는 상대방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자신의 삶을 인정받기 위해 가족에게서 해방되었지만 마음 한 켠은 여전히 괴롭고 불편했던 사람들. 왜 있을 때 더 사랑해주지 못했을까. 왜 항상 지나고서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걸까.


그립고 보고픈 이를 마음으로 외치면 그것이 산을 울리고 메아리로 돌아온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존재가 산이라니.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사는 기분이 이런 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현재 코로나로 전 세계인이 고립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경우에 따라선 혼자의 시간이 편한 것도 있겠으나, 자주 보던 사람들의 부재가 갈수록 우울하고 지치게 만든다. 이 책을 읽고 난 후로 그런 감정이 더 크게 자라난다. 어째 서평이라기보다 감상문이 돼버렸지만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하자. 아고고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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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라이트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9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9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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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마다 원픽 장르가 있을 텐데 내 경우는 스릴러소설이었다. 지금은 과거형이지만 그것만 미친 듯이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질리도록 보고 나니까 장르문학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에 공감해버렸다. 주인공의 직업도 한정돼있고, 기승전결도 비슷비슷하고, 범행 동기도 별게 없어서 어떤 감동, 감화를 기대할만한 장르는 못된다. 정크푸드만 먹으면 건강을 버리듯, 장르문학만 읽으면 정신건강에 해로우니 어쩌다 읽어주는 게 좋다. 이건 순수 내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밝혀둔다. 내 독서 패턴은 강약 중강약이라서 묵직한 작품 뒤에는 스릴러소설로 머리를 식혀주는데, 이런 식으로 슬럼프 없는 독서 생활을 꽤 오래 유지하고 있다. 여튼 기분전환을 위한 책도 나름 신중하게 골라야 하는데 그것마저 귀찮을 때는 이렇게 코넬리옹의 작품을 집어 든다. 


1편에서 해리 보슈의 나이가 무려 마흔이었다. 시리즈물의 주인공이 마흔으로 시작하다니 좀 그렇다 싶던 기억이 난다. 어느덧 그의 나이는 오십 줄에 들어섰다. 28년의 형사 생활을 끝으로 은퇴한 보슈. 이제는 조용히 지내도 되겠고만 지독한 직업병이 그를 가만두질 않는다. 남는 게 시간뿐인 그는 수년 전의 미제 사건을 해결하고자 한다. 아직까지도 발목이 붙잡혀있는 기분이라며 고뇌에 빠졌지만 이번 건 솔직히 그냥 몸이 근질근질한 걸로 밖에 안보인다. 


당시 사건은 이러했다. 한 영화제작사가 은행에서 거액의 현찰을 빌렸고, 촬영 현장에서 강도들이 나타나 총격전을 벌이며 현찰 가방을 들고 튀었다. 원래는 보슈의 담당 사건이었지만 다른 곳으로 넘겨졌고, 끝내 풀지 못한 채 여태껏 방치되어왔다. 그 사건이 있기 전, 성폭행을 당한 것처럼 연출된 영화사 직원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보슈는 두 사건이 연결돼있다고 직감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수사를 해야 하는 보슈. 돈의 행방을 쫓던 중 미제 사건을 담당했던 FBI 요원의 실종 소식을 듣게 되고, 그 사건이 테러리스트와 연관돼있다는 사실도 알아낸다. 이것은 똥밭에서 지뢰 밟은 남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


형사 소설의 주인공을 은퇴시키고도 멀쩡히 시리즈를 이어나가는 작가의 능력이 사기급이다. 이번 작품은 제 맘대로 사건을 수사하려는 은퇴 형사와, 사건에서 손 떼라고 협박하는 경찰국과 FBI의 기싸움이라고 보면 된다. 경찰국의 경고를 무시한 보슈는 FBI에게 붙잡혀서 혼쭐이 난다. 그러나 FBI의 약점을 가지고 그들을 휘어잡는 보슈. 경찰 배지는 반납했어도 여전히 그는 만렙이다. 캐릭터가 코요테에서 능구렁이로 바뀌긴 했지만.


이 시리즈의 액기스는 역시 주인공의 고독과 심연에 있다. 경찰에서 빠져나온 보슈가 드디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현역 시절의 자만심을 인정했고, 공권력이 없는 현재의 초라함을 뼈져리게 느꼈다. 또 누군가의 말대로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 행동했던 보슈는, 이제서야 피해자의 관점으로 사건을 볼 수 있게 변했다. 나이를 먹더니 드디어 철이 든 걸까, 아니면 경찰을 관둔 뒤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걸까. 여튼 지날수록 인간미는 숙성되고, 방황은 점점 줄어드는 게 느껴진다. 물론 작가는 또 다른 고뇌를 보슈에게 선물할 예정이다. 히에로니머스 보슈란 이름은 곧 저주의 운명이니까. 마지막 장면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행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슈의 생애에서 가장 기쁘고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니었을지. 삶의 지표를 만났으니 은퇴하고도 열심히 사셔야겠군. 난 은퇴하면 흔들의자에서 느긋하게 독서와 커피를 즐길 겁니다. 내가 그때까지 과로사 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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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26 1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과로사하지마세요..

물감 2021-09-26 13:09   좋아요 1 | URL
제 글이 한 달이상 안올라오면 의심해주세요ㅋㅋㅋㅋ

다락방 2021-09-26 13:17   좋아요 2 | URL
그러지마요 ㅜㅜ

scott 2021-09-26 12: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과로사 하시면 안됨!

냥이들 집사!
건강 잘 챙기셔야함요 ฅ^•ﻌ•^ฅ

물감 2021-09-26 13:16   좋아요 2 | URL
ㅋㅋㅋ그래야죠, 스캇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ㅜㅜ

붕붕툐툐 2021-09-26 2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언제 한번 스릴러 소설 대추천 해주세요!!(과로사 걱정하는 분에게 넘 무리한 부탁이었나용?ㅎㅎ)

물감 2021-09-26 22:04   좋아요 0 | URL
ㅋㅋㅋ그래볼까요? 워낙 고수들이 많아서 자신없지만 준비해보겠습니다^^;

공쟝쟝 2021-10-25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릴러 소설 다락방님 때문에 처음 읽어봤는데요… 인생 재미를 위해 좀 취미 붙여볼까 싶습니다ㅋㅋㅋ 해리보슈가 시리즈가 9까지 나온 것이라면 9까지 누군가는 다 읽어왔다는 뜻일테니 눈에 담아둬야것어요 ㅎㅎㅎ 물감님 페이퍼는 정말 제가 안읽어온(?) 장르의 책들로 가득해서 새로운 독서세계를 열어주십니다 ㅋㅋㅋ 쭉 잘읽었습니다!!

물감 2021-10-25 18:19   좋아요 1 | URL
의도치 않게 영업에 성공했군요ㅋㅋㅋ알라딘 분들은 장르소설을 잘 안읽으시더라고요...잘 만든 스릴러소설은 웬만한 스테디셀러보다 재밌답니다😀 기분전환은 스릴러소설이 쵝오에오!
 
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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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니것은 내가 가장 취약한 SF를 즐겨 쓰는 작가이다. 그런고로 이번 책은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한다.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저자가 쓴 전쟁 소설인데 솔직히 전쟁 테마의 작품들은 커다란 틀 안에서 스토리만 살짝씩 다를 뿐이라 대단한 감동을 입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제는 다 알려진 역사를 이 사람은 어떻게 각색했을지가 궁금할 따름. <제5도살장>은 전쟁소설이면서 참혹함이 느껴지지 않는 특이 케이스다. 불규칙하게 과거와 미래를 이동하는데다, 시공간을 벗어난 사차원의 배경까지 다루며, 나사가 몇 군데 빠진듯한 문체를 써서 결코 읽기가 쉽지 않다. 전쟁 영화나 책들이 끝없는 전쟁을 부추긴다는 말에,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글을 쓰다 보니 이런 정신 사나운 작품이 탄생한 게 아닌가 한다. 여튼 읽노라면 전쟁은커녕 전의를 상실케 하므로 반전 소설답다고 하겠다. 


워낙 시점이 뒤죽박죽이고 별별 내용이 다 나오지만 생각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대학을 다니다 군인으로 차출된 주인공은 전쟁터에서 독일군에 잡혀간다. 이후 독일 드레스덴의 수용소에서 머물던 중 폭격이 쏟아진다. 운 좋게 생존해서 어찌어찌 잘 살다가 훗날에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이야기에 두서가 없는 것은 아마도 트라우마 설정 때문일 듯. 그는 작중에서 외계인들에게 잡혀간 뒤로부터 인생의 어느 시점들을 랜덤으로 시간여행한다. 결혼 직후로 갔다가 대학시절로 오고, 수용소에 있다가 전쟁터로 오는 등. 그렇게 한 개인의 길고 긴 삶을 순환하며 소개해준다. 나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구성을 좋아하지 않아서 대체 언제 끝나나 하면서 읽었다. 후딱 끝내고 얼른 작품 해설이나 읽고 싶었다. 근데 해설도 딱히 볼 건 없었다. 뭐 그런 거지.


평소 보니것의 글은 풍자와 유머로 유명하단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도 유머 코드가 곳곳에 튀어나온다. 저자는 무수히 많은 죽음 앞에서 연민으로 화답하지 않았다. 배고프면 냉장고 문을 여는 것처럼 죽음이 다 그런 거라며 자연스럽게 넘긴다. 살육과 사망이 난무하는 전쟁소설에서 유머라니, 쪼까 대단하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고. 지금은 몰라도 출간 당시에는 욕 꽤나 먹었을 거 같은디.


살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된 주인공. 시간순의 작품이 아니므로 자세히는 모르지만 ​전쟁이 터지고 나서가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듯하다. 시공간을 수차례 이동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바꿔볼 법도 한데 어떤 시도조차 안 했다는 것은 그런 거다. 정해진 결말대로 흘러간다는 인생의 진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가 외계인에게 잡혀갔을 때 왜 하필 자신이냐고 묻자, 외계인은 호박 안에 갇힌 벌처럼 아무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 모든 건 그저 일어난 상황이고 그 순간 그 자리에 내가 있었을 뿐. 따라서 죽으면 죽은 거고 살았으면 그저 생존한 것이니, 생존의 의지가 있고 없고는 중요치 않다는 뜻일 터. 역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분들의 세계관은 범접할 수가 없다. 난 그냥 모르고 살란다.


이 작품의 핵심과 의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타 전쟁소설과 다를 바 없는 대답만 나올 것 같다. 심지어 읽기도 어려운 방식을 택했으니 전쟁의 교훈을 말하려는 건 아닐 테다. 단순히 반 전쟁과 반 영웅주의를 주장함에도 어딘가 알 수 없는 시시함이 있다. 가해자의 국가란 이유로 죄 없는 독일 시민을 몰살한 비인간적인 행위도 그 당시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암튼 이 작품의 참 목적을 알고 싶어 많은 리뷰를 읽다가 딱 꽂힌 평을 발견했다. 서두에서는 이 내용들이 실제 일어났다지만 외계인이나 시간여행에 대한 내용은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진짜 말도 안 되는 건 왜 치러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인생도 하나의 전쟁이고, 그것 또한 말도 안 되는 일들의 연속이다. 내가 개미로 살든 베짱이로 살든 정해진 결말대로 가고 있는 중이라면 좀 허무할 것 같다. 하긴 인생의 허무함은 우리 집 고영희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 뭐. 아무튼 전쟁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SF는 더더욱 아니올시다. 커트 보니것을 다시 볼 날이 올지는 잘 모르겄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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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21-09-23 0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심코 툭툭 내뱉는 듯한 촌철살인의 문장들에 매번 유쾌합니다.ㅎㅎ ‘이런 정신 사나운 작품, 전쟁은커녕 전의를 상실케 하므로 반전소설답다.‘ 같은 문장들이요. 이 책을 읽고 나니까 공감이 확 되거든요.ㅎㅎ
객관적인 내용만 보면 무척 끔찍한 사건인데 물감님 말씀대로 ‘전쟁소설이면서 참혹함이 느껴지지 않는 특이 케이스‘였어요. 비현실적인 외계인의 등장과 시간을 넘나드는 구성 때문인 것 같기도 하구요.

‘근데 해설도 딱히 볼 건 없었다. 뭐 그런 거지.‘ 이런 문장 센스는 대체 어느 순간에 튀어나오는 건가요. ㅋㅋㅋ ‘뭐 그런 거지‘가 이 문장 뒤에 붙을 줄 몰랐습니다~ㅎㅎ

풍자는 감이 오는데 유머는 공감하기가 어렵더군요. 물감님은 어떠셨는지요?^^

전쟁처럼 생사가 갈리는 사건을 문장만으로 접한 사람으로서는 직접 겪은 사람의 감성을 따라가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공감 능력이 발달한 사람이라도 전쟁의 테두리 안에 갇혀있던 사람의 심리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겠구나 싶었어요.

전쟁만큼 가치관의 차이나 인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건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수많은 생명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죠.
저도 전쟁은 제 취향이 아니구요, SF는 스펙터클한 로맨틱이 가미된다면 가끔은 제 취향이 되기도 합니다. 파워 오브 러브~ㅎㅎ 커트 보니것은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여기서 그만 커트시킵시다!!ㅎ

물감 2021-09-23 19:19   좋아요 1 | URL
진지해질만 하면 ‘뭐 그런거지‘가 나오던데요 ㅋㅋㅋ 저한테는 그게 유머였어요. 좀 남발해서 나중에는 시큰둥해졌지만요 ㅋㅋ 그나마 재미없는 작품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다쳐본 사람만이 다친 사람을 이해하듯, 죽음이란 것도 마찬가지겠죠?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알고싶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싶지 않네요^^;

고전을 계속 읽다보니 전쟁, 종교, 철학 같은 다소 민감한 분야가 꽤 자주 나오는 것 같아요. 여튼 이 책으로 인해 전쟁 장면이 나올 때마다 지지배배뱃이 생각나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그래도 같이 읽고 리뷰를 나눈 덕분에 보니것이 막 싫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9월 마무리 잘하시고 10월에 다시 만나요!

나비종 2021-09-23 20:18   좋아요 1 | URL
지지배배뱃ㅋㅋㅋ
참! 4번째 단락에 누락된 ‘레‘ 알려드립니다~
벌, 노노! 벌.레~^^
 
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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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ㅓㅓㅓㅓㅓㅓㅓ무 힘든 요즘이었다. 연휴 직전까지 미친 듯이 일하느라 매일매일 에너지를 150% 이상 쓴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다. 하필 이럴 때 읽은 책마저 오 마이 갓뎀이었으니, 얼마 전 국내에서 재조명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망작을 읽고야 말았다. 넘나 걸작이었던 <클라라와 태양>에 비하면 이번 작품의 수준은 정말 심각했다. 이 책만 본다면 작가의 맨 부커상, 노벨문학상 수상이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평소 같았으면 읽다 덮었을 테지만 다행히도 요즘 내가 맛이 가있어서 이런 뭐 같은 책도 아무 생각 없이 쭉쭉 읽어나갔더랬다. 고생한 나님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며, 이번 리뷰는 손가락 가는 대로 대충 써보련다.


부모가 실종된 후 상하이에서 영국으로 떠나온 소년의 이야기. 영국에서 나름 유명한 탐정이 된 그는 사교계 모임을 통해 인맥을 쌓고, 부모의 실종사건을 수사하고자 다시 상하이로 간다. 이렇게만 소개하면 무슨 추리소설, 스릴러소설인가 싶겠지만 전혀 그런 장르가 아니다. 그리고 수사에 대한 장면은 내 기준으로 제로에 가깝다. 절반은 주인공의 유년시절 회고록이고, 절반은 현시점이지만 사건 및 수사와는 무관한 내용들로 가득 차있다. 뭔가를 장황하게 말하고는 있는데 그것들이 대부분 의미 없거나 불필요한 내용이어서 내용 파악이 잘 안된다. 스토리에 뼈대가 없는 데다 진도는 더럽게 느리고 장면들은 좀처럼 시각화가 되지 않는다. 작품도 문제롭지만 이상한 번역도 한몫한다. 차라리 찬호박의 LA 시절 이야기가 더 재밌겠다 느꼈으니 말 다했다.


개인적으로 일본인 특유의 루즈하고 건조한 분위기를 안 좋아해서 ‘나쓰메 소세키‘나 ‘마쓰모토 세이초‘ 같은 일본 거장들의 책을 잘 안 읽는데, 이 책에 비하면 다들 양반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영국에서 자랐음에도 어째서 이런 분위기의 글을 썼을까. <클라라와 태양>에서 보여준 동서양의 결합된 감성이 작가의 전매특허라고 생각했거늘, 그런 매력은 온데간데없고 이렇게 대실망을 안겨줄 수가 있나. 내가 지금 괜히 트집 잡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내용이랄 게 있어야 비평을 하든가 말든가 하지, 뼈대도 없는데 살도 이상한 살만 잔뜩 붙여놔서 정체성을 모르겠다. 해석하기 난해한 현대음악 같은 장르랄까. 


그렇게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를듯한 내용만 나오다가 후반부에는 정신 좀 차렸는지 사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필요한 살들로 분량만 늘려놔서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부모 찾으러 상하이까지 와놓고 유부녀와 눈 맞아서 귀국하겠다는 생각은 도대체 말이야 방구야? 부모 찾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자신과 남들에게 여러 번 강조해놓고 여자 때문에 그냥 갑자기 수사를 포기한다? 원아웃. 상하이를 뜨기 직전에 부모가 있을만한 장소를 알게 되어 여자를 버려두고 목적지로 향하는 주인공. 태세 전환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참 줏대 없는 팔랑귀 같아서 투아웃. 그 장소가 전쟁 위험지역이라 지휘관이 접근 못하게 막았는데, 동행인들까지 동원시켜서 안내해달라는 이 남자. 죽을지도 모르는 동행인들의 목숨보다 제 사건이 최우선 인양 급발진해서 침 튀겨가며 지휘관에게 떼쓰는 모습에 쓰리아웃. 어쩜 이렇게 호감이 1도 안 생길 수가 있을까.


막바지에 가서 부랴부랴 정리하느라 바쁘다. 부모의 실종과 집안 내막을 알게 되고, 어렸을 때의 일본인 소꿉친구를 조우하고, 자식을 못 알아보는 모친을 만나고 등등. 급 전개로 많은 것이 생략되었고 그래서 뜬금없는 기승전결이 되어버렸다. 상하이에서 살던 주인공이 영국으로 가서 유명한 탐정이 되어 옛 고국으로 돌아온 이 내용은, 일본에서 태어나 영국에 가서 유명 소설가가 된 저자를 말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자전소설이라고도 하겠는데, 서양인의 주인공보다는 동양인의 소꿉친구 아키라가 저자와 더 닮아있지 않나 생각된다. 똑같이 외국 땅에 있으면서도 아키라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외국인의 신분과 일본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근심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아키라의 분량은 매우 적지만 그 친구가 없었다면 이 작품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었을 거라고 본다.


주인공도 일찍이 고아가 되고, 그가 커서 고아인 소녀를 입양하고, 좋아했던 여인도 고아였다는 점에서 ‘고아‘에 어떤 중점을 둔 것처럼 생각되나, 막상 읽어보면 제목이 내용에 별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 가족을 되찾고 싶어 하는 주인공과 정반대인 입양 소녀가 한 가족이 된 점도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만약 이 책이 이시구로 같은 이민자들의 정체성을 위해 기록한 거라면 대 실패라고 말해주고 싶다. 와닿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비록 실망은 했지만 이 책이 유독 이시구로만의 감성이 약한 편이라고 하니까 넘어가 주겠다. 그럼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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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19 12: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넘 힘드실때는 책보다
휴식!

추석 연휴 동안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해피 추석~


∧,,,∧
( ̳• · • ̳)
/ づ🌖

물감 2021-09-19 13:57   좋아요 2 | URL
ㅎㅎㅎ스캇님도 메리 추석!

새파랑 2021-09-19 15: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시구로 책 한창 볼때도 이 책은 안읽었는데 별이 2개 군요 ㅜㅜ 그래도 별 2개 작품도 정성스럽게 리뷰 써주신 물감님의 열정에 👍

물감 2021-09-19 15:28   좋아요 2 | URL
근데 또 저만 평점이 낮은것 같던데요ㅋㅋㅋ 여튼 짜증나서 최근에 나온 리커버 에디션 다 질렀습니다ㅋㅋㅋㅋ

레삭매냐 2021-09-19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시구로 샘의 책 중에서
이 책이 가장 별로가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대가의 책이라고 해서 모두 좋
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감 2021-09-19 19:36   좋아요 0 | URL
나름 인간미 있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좋고 나쁨의 갭이 너무 커서 좀 거시기합니다. 여튼 저도 공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