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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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리즈는 분량도 길지 않은 데다 가독성도 좋아서 읽기가 좋다. 다만 머리 식힐 겸 읽을 용도라면 비추한다. 한 권 한 권이 하나같이 묵직한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요즘 같은 휴가철에 읽기엔 맞지 않을 듯하다. 물론 독서가 생활인 분들은 제외하고. 이번 책도 인간이란 무엇이며, 산다는 건 무엇인지 자꾸 되돌아보게 해주었다. 제목만 봐도 가족에 관한 내용인데, 가족을 소재로 한 작품치고 멀쩡한 집안의 이야기가 없듯이 이번에도 그러하다. 가족 소설은 보통 남자들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폭력적인 가장, 사고 치는 아들 같은 집안의 문제적 남자들이 주된 내용인데 이 책에서는 남자들이 전부 부재중이다. 구성원이 여자들만 있는 상황과 배경 가운데, 어떤 고난이 와도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러면 작가가 말하는 딸과 엄마에 대해 들어보자.


요양원에서 봉사하는 엄마는 어려운 집안을 혼자 책임지느라 언제나 근심 걱정뿐이다. 다 쓰러져가는 2층 건물의 주인이지만 경제사정으로 방을 전세 놔야 할 판이다. 어느 날 시간 강사로 일하는 삼십 대 딸이 돈 문제로 엄마 집에 얹혀살게 된다. 문제는 딸이 7년이나 같이 살아온 여자를 데려온 것이다. 동성애자에다 제대로 된 벌이도 못하고 여자 애인까지 데려와서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딸이 점점 미워지는 엄마. 안 그래도 담당 환자의 치매 증상으로 머리 아픈데, 동성애 문제로 해고된 딸이 시위를 하다가 크게 다친다. 부당한 일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엄마와 끝까지 저항하는 딸. 물러날 생각이 없는 두 모녀는 끝까지 마음 문을 닫은 채로 지낼 것인가.


어후. 뭐부터 풀어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하다. 보면 볼수록 이 시리즈는 과제를 산더미같이 내주는 악덕 교수님 같다. 일단 리뷰를 자주 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중립을 지키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솔직히 딸보단 엄마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하나부터 열까지 딸이 다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마의 간섭이 과잉보호라는 생각은 안 든다. 혹여나 아들들은 절대 이해 못 할 거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말 그대로 나는 남자라서 딸들의 속 사정은 모릅니다만, 내 자식이 이 책의 딸처럼 동성애자에다 사서 고생하며 산다면 나 또한 억장이 무너질 것 같다. 엄마 눈에는 딸의 모든 것이 불만이었고 이해 안 되는 것 투성이었다. 남자를 만나도 부족할 시기에 여자랑 가족을 만들질 않나, 실컷 공부시켜줬건만 제대로 된 직장도 없이 불안정한 일을 하고, 사소한 문제도 크게 키워야만 속이 시원한 건지, 왜 그렇게 귀중한 시간들을 쓸데없는 일들로 낭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그 찬란한 시간들을 아까워하지 않는 딸이 너무나 야속했다.


딸은 성인이 된 후로 유학도 독립도 부모 동의 없이 홀라당 진행해버렸다. 그렇게 강단 있고 독립심 강한 애가 어째서 멀쩡하게 살려고 하지 않을까, 머리도 좋은 애가 왜 저렇게 이상한 길만을 고집할까. 책임도 본인에게 있고 바로잡을 사람도 본인뿐이라 생각하는 엄마와, 자신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엄마를 상종도 하기 싫은 딸. 그런 딸의 엄마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자신도 싫고, 자식을 부정하게 만드는 딸도 미웠지만 딸과 함께 온 여자애가 더 미웠다. 나 대신 딸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그 애가, 나보다 딸을 더 잘 알고 이해한다는 그 애가 더 싫었다. 그래서 엄마는 딸에 대한 화를 그 애에게 표출했다. 그런 엄마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덤덤히 제 할 일을 하며 오히려 엄마를 챙겨주었던 딸의 애인. 설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자신을 친딸보다 더 챙겨주는 그 애를 보며 엄마는 수용과 체념 사이에서 긴긴 방황을 한다. 딸은 엄마를 밀어내기만 했으나, 그 애는 딸 편이면서도 속상해하는 엄마를 이해해주었다. 고충을 털어놓을 곳도, 들어주는 이도 없는 엄마에게 있어 그 애는 어쩌면 유일한 구원이었을 것이다.


집에서는 딸 때문에 괴롭고 요양원에서는 담당 환자 때문에 괴롭다. 그럼에도 환자를 가족처럼 돌보는 엄마한테 예산이 부족하니 적당히 간호하라며 나무라는 병원. 일을 더 크게 키우느니, 침묵을 지키는 게 나은 걸까. 틀린 답도 다수가 맞다고 하면 정답이 되는 걸까. 병원 입장은 알겠지만 엄마는 감정 없는 기계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어르신을 상의도 없이 내쫓은 인간미 없는 병원에게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면서, 부당한 일에 참지 않았던 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딸은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외치는 반항 기질 때문에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자신이 믿고 정한 선택과 길이 부정당할 때 이기든 지든 맞서 싸울 뿐이었던 것이다. 매번 져주기만 하던 엄마가 부당함에 소리쳤을 때 그제야 비로소 딸을 알아가기 시작하고 기나긴 방황에서 탈출한다. 그리고 딸을 향하던 손가락질이 나에게 하던 것이었음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정녕 엄마와 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을 의외로 쉽게 찾았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성향을 타고난 거였다. 그걸 눈치채고도 애써 외면하는 엄마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아무래도 내가 낳은 자식이 나와 전혀 다른 성정을 가졌다는 게 불만이었을 것이다. 어째 엄마만 편 드는 거 같기도 한데, 내 아이가 부모를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면 당연히 속상하지 않을까. 아 물론 콩가루 집안에서 자라나 ‘난 절대 엄마 아빠처럼 안 살 거야‘하는 친구들은 예외다. 아무튼 이건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거나 그 사람을 바꿔줄 수 있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마치 사자가 풀 좀 씹는다고 초식동물이 될 수 없고, 곰이 수영 좀 한다고 수중동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너는 너 나는 나 하고 싶어도 엄마니까 딸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던 거다. 딸이 7년이나 같이 산 애인을 진짜 가족이라 하니 엄마는 당연히 기가 차지. 그러나 자신이 매일매일 돌보는 환자가 병원을 떠났을 때 엄마는 간호인으로써가 아닌 가족으로써의 책임감을 느꼈고, 어르신을 집으로 모시면서 그 애의 말처럼 피를 나누지 않고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사람 간에 이해관계를 이렇게 풀어내다니, 이 책, 진짜 젊은 작가가 쓴 거 맞음? 인생의 산전수전을 겪지 않고서야 이런 내공은 도저히 불가능한데. 


자녀가 성인이 되고 독립까지 하면 부모의 도움은 점점 필요 없어진다. 요즘 세대는 그 시기가 더 빨리 찾아오고 마음만 먹으면 부모보다 더 잘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적어도 한두 가지쯤은 부모님보다 못한 상태로 나를 내버려 둔다. 예를 들면 아버지는 언제나 나보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으로, 어머니는 언제나 요리를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드린다. 부모로서 더 이상 자식에게 해줄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만큼 서운한 게 없을 것만 같아서. 인생의 반도 못 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무리 아껴 써도 낭비되는 게 시간이다. 20대의 시간은 20km로, 30대의 시간은 30km 속도로 간다더니 과연 그 말이 진짜더라. 아 갑자기 우울해지네. 이 책은 리뷰 쓰는 게 뭐 이리 힘드냐. 처음으로 글 쓰다 탈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독서로 생긴 갈증은 무엇으로 해소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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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9-07-30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범한 가족, 평범한 일상‘이란 말들을 많이 하잖아요. 그 평.범.이란 게 얼마나 안간힘을 써야 얻어질 수 있는 건지 종종 생각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평.범.이 정말 어려운 것 같거든요.

딸이 동성애자라면 막상 엄마의 입장에서 어떨지 지금으로서는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평소 동성애를 바라보는 제 시각은 거부감이 없거든요. 여자로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여자‘인 거니까요. 사랑이 느껴지는 건 성별을 뛰어넘는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당한 일 앞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던 엄마가 지고 있었을 삶의 무게를 상상해보았습니다. 딸의 인생도 스스로 선택한 삶이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는 딸도, 그 딸의 모습을 속상해하는 엄마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딸의 애인은 그런 면에서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군요. 딸의 입장을 혹은 엄마의 입장에 더 공감이 갈 독자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독자의 시각을 대변하고 있으니까요.

얼마전 본 드라마 <검블유>에서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사람들이 그런 입장에 서면 포털이 정치적이 된다고 주인공을 말리니, 주인공이 말을 해요. ˝정의를 지키는 일에 정치적 입장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 말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거든요. 딸의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한 엄마의 상황을 보니 이 장면이 생각나네요.

˝사자가 풀 좀 씹는다고˝에서 빵터졌습니다.ㅎㅎ 대체 이런 표현은 어디서 나오시는 건지 감탄하면서요.

부모님에 대한 물감님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부모로서 더 이상 자식에게 해줄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서운해하실 것이라는 부분이요. 그래서 저는 무척 기뻐하면서 일단 마구 마구 받습니다. 나중에 용돈을 더욱 듬뿍 드리면 되니까요. 결국 제가 드린 돈이 부모님을 거져 제게 다시 오는 것이지만, 그게 엄청난 차이이거든요.ㅎㅎ

50대의 시간은...음...아자!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독서로 생긴 갈증은 공감하는 댓글로 해소!ㅎㅎㅎ

물감 2019-07-30 14:42   좋아요 2 | URL
맞아요. 저도 어떤 리뷰에 썼는데요, 평범하다는게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축복인지 다들 잘 모릅니다. 이런 책을 읽으면 나는 정상 범위안에 속해있는지 되돌아보게 되더군요. 저는 동성애에 대한 생각은 깊게 해보질 않아서 잘 모르지만, 이 책의 엄마 입장에서 과몰입되다보니 썩 찬성하기가 어렵네요. 남이야 그러던지 말던지 하겠지만 내 가족이라고 생각해보면... 음...

말씀하신 드라마 대사도 꽤 파격적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입장은 현실엔 없다는 생각에 암담하네요. 비록 실천은 못하더라도 자각은 할 수 있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하하하...

생각보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서먹한 분들이 많더라고요. 살다보면 점점 더 그렇게 되가구요. 아쉬운 맘에 쓴 글을 공감해주셔서 감사해요 ㅎㅎ 열정만 간직하시면 어떤 나이에도 청춘입니다! 덕분에 갈증해소 많이되었어요! 나비종님 짱 ㅎㅎㅎ
 
고스트라이터즈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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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연 작가의 책 도장 깨기도 벌써 세 권째다. 알면 알수록 이 사람은 진짜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소설은 역시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글쟁이들은 이 스토리텔링에 따라서 글만 잘 쓰는 작가가 되기도 하고, 글도 잘 쓰는 작가가 되기도 한다. 김호연은 명백한 후자에 속한다. (전자는 개인적으로 하루키 센세...) 이 책은 스토리도 좋았지만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이모저모가 소설의 형식을 빌려 디테일하게 소개되니 글쓰기로 돈 버실 분들은 참고해도 좋을 듯. 한때 잠깐이나마 소설을 내고 대박이 터져 영화계까지 진출하는 김칫국을 마셨던 적이 있었는데 후후후 내가 단단히 미쳤던 게지, 후후후 작가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난 그냥 이대로 파워 병맛 리뷰어로 사는 것에 만족하게쓰. 


주인공 김시영은 문학상까지 받고 등단한 작가지만 잘 풀리지 않아 유명 작가의 글을 대필해주며 생계를 유지하는 고스트 라이터다. 어느 날 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땐 한참 자숙 중인 여배우가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한 시나리오 대본을 써달라 했고 가난한 주인공은 자본주의 앞에 당당히 굴복한다. 본인의 고스트 라이팅으로 여배우의 삶이 바뀌는 것을 보고서 이 특수한 능력에 눈이 횟가닥 뒤집히려 할 때쯤 웬 조폭들에게 납치되는 비운의 주인공. 조직의 대빵은 그를 글 감옥에 가두고 자신을 위한 글을 쓰도록 협박한다. 이제야 대필 인생에서 좀 벗어나는가 했더니 어째서 운명의 신은 그를 내버려 두질 않는가. 과연 주인공은 배드엔딩을 피할 수 있을는지?


자신이 쓴 글대로 이루어진다? 어딘가 만화 ‘데스노트‘와 비슷한데, 이건 고스트가 쓴 대로 타인의 미래를 바꾸는 거라 스케일 차원에서 완전히 다르다. ‘파우스터‘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작가가 신의 영역을 넘보는 소재를 참 좋아하는 듯. 근데 또 잘 소화해내는 걸 보면 역시 시나리오 작가 출신 답다고나 할까. 작중에 말하길 유령작가는 푼돈에 창작력과 주체성을 파는 직업이라 정의했다. 그들은 글 쓰는 재능밖에 없어서 대필을 접고 다른 일을 구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한번 대리인간이 되면 이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 본인 작품을 쓰고 대박이 터져야 고스트를 그만둘 텐데, 내 작품을 쓸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도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 당장 입에 풀칠하게 생겼는데 돈만 준다면 전업작가든 유령작가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누구나 궁핍해지면 돈 앞에 장사 없는 거다. 이렇게 작품이 허구성을 벗어나 현실적인 그림이 될 때 독자는 주인공의 직업을, 배경을,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망원동 브라더스‘에서도 그렇고 이번 작품에서도 주인공 직업이 작가이다. 아직 못 읽은 ‘연적‘도 주인공이 작가란다. 이렇게 주인공을 계속 작가로 내세우는 이유가 뭘까. 작가들이 이만큼 고달프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걸까. 예체능이 원래 1등밖에 모른다지만 그래도 운동선수는 경기장에서, 음악가는 무대에서 볼 수라도 있지,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은 작가를 평생 모를 테니 존재감 부분에서 너무 약하긴 하다. 여하튼 유명해지기 전까지 쭉 가난하고, 책을 쓰는 내내 쭉 가난한 직업이 작가이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유령작가로 전향하는 그들이 이해가 된다. 근데 힘들고 가난한 게 어디 작가뿐인가? sky 나와도 힘들고, 알바생도 힘들고, 백수도 힘들고, 우리 집 바둑이도 힘들어한다. 내가 나온 군부대가 제일 힘든 곳이 아니라 모든 군부대가 빡세니까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뭐.


무조건 쓰는 대로 삶을 바꾸는 능력이라. 소재만 다를 뿐 흔한 설정이라서 솔직히 식상하다고 느꼈다. 거기에다 전형적인 소년만화 스타일의 전개 방식이었다. 주인공이 특수한 능력에 기고만장하다가 적에게 된통 당하고 복수에 성공하는 스토리. 재미는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구멍 난 퍼즐 조각이 계속 맞춰지지 않아 아쉬웠다. 아마도 김호연 작가에게 기대치가 높아서 그랬던 것 같다. 소년만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거기서 거기인 소년만화가 대부분 재미있는 이유는 뭐 때문일까. 차별화된 세계관? 화려한 전투 씬? 캐릭터들의 간지? 이런 요소들은 사실 안구 정화해주는 쪽에 가깝고, 필수 요소는 동료나 세상을 구해내는 희생에서 오는 감동이 아닐까. 이 책의 주인공도 납치된 구여친을 구하기 위해 각성하였고 나름 훈훈한 엔딩을 맞는다. 또한 주인공이 지난 잘못 들을 반성하고 회개함으로 오랫동안 틀어졌던 관계를 회복하고, 오만했던 스스로를 뜯어고쳐서 바르게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끝이라면 굉장히 실망했을 텐데 다행히도 연장전이 있었고, 적당한 반전과 교훈과 감동으로 부실했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아무래도 남자 캐릭터들이 주로 스토리를 이끌어가다 보니 여자 캐릭터들은 비중이 약해 보이긴 하다. 초반부터 등장한 여배우도 그렇고, 같이 대필 작업했던 여자 동료도 그렇고, 거의 안 나오지만 계속 언급되던 구여친도 그렇고. 그런데 이 책의 진짜 액기스는 오히려 비중 없는 그녀들이었다. 남자들이 큰 사건들을 풀어나가는 역할이라면, 여자들은 주인공의 내면을 바꿔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여배우는 슬럼프에 빠져있던 주인공에게 의욕을 심어주었고, 여자 동료는 자신의 고스트가 돼주어 주인공이 본격적인 작품을 쓰게 만들었고, 구여친은 정신 못 차리던 주인공에게 확실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이러므로 사건은 사건대로 잘 해결되었고, 철없던 주인공이 성숙해져가는 과정도 흐름에 맞게 잘 표현되었다. 이런 자잘한 디테일들이 식상한 이야기를 식상하지 않게 해준다. 분명 글 잘 쓰는 작가는 많지만, ‘글이란 이렇게 쓰는 것이다‘를 보여주는 작가는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김호연은 국내에 몇 안되는 사기 캐릭터가 분명하다. 만약 내가 이 책의 고스트 라이터가 된다면, 이 작가가 1년에 한 권씩 책을 써내는 글을 쓸 것이다. 여하튼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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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9-07-15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소설이든 수필이든 시이든 ‘이야기‘가 핵심이라는 것을요.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해요. 사람들은 가만히 보면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거든요.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데 동시에 타인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이유는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은 게 아닐까 라고요.
소설쓰기... 접으신 건가요?^^

물감 2019-07-15 11:00   좋아요 1 | URL
역시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남다르신 나비종님이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저절로 배우는 것 같아요. 그래서 듣기보다 말하는걸 더 좋아하나봅니다ㅎㅎ
아 그리고 소설쓰는건요, 유명한 작품과 컨셉이 겹쳐서 결국 접었어요ㅠㅠ 나중에 좋은 소재가 생기면 다시 도전해봐야겠어요ㅎㅎㅎ

나비종 2019-07-16 00:01   좋아요 1 | URL
하아~ 인생은 타이밍이라더니! 조금만 빨랐어도 유명해지실뻔 하신 건가요? ‘컨셉이 겹쳐서‘에서 빵터졌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아름다운 뮤즈를 만나시길 바랄게요. 물감님, 화이팅!! 도전은 투비컨티뉴드..이신거죠?ㅎㅎ

물감 2019-07-16 08:44   좋아요 2 | URL
ㅎㅎㅎ전체가 겹친게 아니어서 유명해졌을거란 보장이 없네요^^ 그래도 진짜 나의 글을 쓴다는 기분을 느낄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좋은 뮤즈를 만나면 알려드릴게요ㅎㅎ그전까진 리뷰나 열심히 쓰렵니다😀
 
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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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게도 출판사에서 먼저 연락 주시어 갑작스럽게 리뷰를 쓴다. 이런 연락이나 제안은 언제라도 대환영이다. 모든 출판사의 마케터, 디렉터, 직원분들은 꼭 이 글을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잡설은 이쯤 해두고, 많은 독자들이 장강명 작가를 좋아하는데 나 역시 그렇다.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주로 사회의 이슈를 문학에 접목하여 고발하고 비판하는 작품이 많은데, 글과 문장들이 워낙 현실적이라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만큼 작가가 세상을 꿰뚫어보는 시각이 매우 날카롭다. 개인적으로 단편집을 싫어하는데도 장강명 작가라서 서평 도서를 신청했다. 사실 단편소설은 호흡이 짧아서 리뷰쓰기도 어렵고, 모든 주제가 다 좋은 게 아니라서 점수 매기기도 어렵다. 다행히 이 책은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갑을병정의 공방전을 보여주는 내용들이라 쓸 말이 저절로 생각나더라. 이 시대에 을로 살아가는 자들이 겪는 고초를 다양하게 기록하셨던데, 나는 어디까지나 을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을의 입장으로 리뷰를 쓰고자 한다. ‘산 자들‘은 인생이라는 재앙과 전쟁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들을 뜻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승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진흙탕에서 싸우면 이기든 지든 똑같이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는 얼마든지 갑도 패자가 되고 을도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먼저 1부는 ‘자르기‘로써 회사 대 직원의 내용이다. 1부는 진짜 남녀노소 다 겪어봤을 사례들이라서 읽다가 욱할지도 모른다. 나 또한 일터의 성격과 안 맞는다는 이유로 한 달도 안되어 알바를 잘려본 어이없는 경험을 했다. 갑이 어떤 방침을 내리든 을은 무조건 부당하고 억울하게 느껴질 테다. 반면 을이 취하는 태도는 아무리 정당해도 갑에게는 그저 괘씸하게만 보인다. 을이 아무리 살려달라 발악해봐도 갑은 개인보다 조직이 우선이니깐. 개인적으로 대기발령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일이 없는데 업무 외에 아무것도 못하게 하면서 근무 일지를 쓰게 하는 스트레스는 충분히 받아봤다. 일 없고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곳이 최고라는 철부지들도 많은데 이건 뭐 대답해주기도 지친다. 직접 겪어봐야 그런 말이 안 나오지. 구조조정 이야기도 역시 할 말이 많다. 직장에서 감원 소식이 돌면 언제나 불안했다. 엄친아가 아닌 나님은 직장 구하기가 호랑이 미간의 여드름 짜는 것만큼이나 떨린단 말이다. 경력자나 베테랑들도 잘리는 마당에 짬 없고 능력 없는 일개 말단은 무슨 수로 살아남나.


2부는 ‘싸우기‘로써 조직 대 조직의 고충이 나온다.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먼저는 경쟁 업체부터 뭉개놔야 한다. 그러면서 고객들과는 웃으며 싸워야 한다. 프랜차이즈일 경우는 타 지점과도 싸워야 한다. 이 고래밥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깡 직원들의 타들어가는 속마음을 누가 알아주랴. 이런 걸 두고 ‘번 아웃 증후군‘이라 하여 많은 청년들이 무기력하게 산다는 기사도 자주 봤다. 이겨도 남는 게 없는 싸움을 안 할 수도 없는 잔혹한 현실. 이어서 부동산 문제로 틀어진 가옥주와 세입자의 갈등도 꽤나 심각하다. 멀쩡히 살고 있는데 집주인이 갑자기 내쫓거나, 건물주가 내 가게를 철거한다면 당연히 멘붕오지 않을까? 세입자나 상인들이 직장도 그만두고 연합회를 만들어 시위했건만 돌아오는 건 없었고 매달 나가는 회비와 중단된 월급으로 피폐해져만 갔다. 아무도 이 절박한 심정을 알아주지 않는다. 결국 조합에서 주는 이사비용을 받고 떠나는 자들을 보며 남은 회원들은 그동안 들인 시간과 고생에 헛웃음이 나온다. 그간의 시위는 누굴 위한 것이었나. 싸워야 할 대상도 많지만 싸워야 할 이유는 더 많다. 누군가는 이겨서 위로 올라가는 게 목표일 테고, 누군가는 내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싸울 테고, 누군가는 진실을 덮기 위해 악바리가 된다. 냉정하게 보면 모두가 피해자이며 모든 이유가 타당하다.


3부는 ‘버티기‘로써 악조건의 상황에서 끝까지 버티는 자들의 내용이다. 작가는 ‘나와의 멘탈싸움‘에 대한 생각이 많은듯하다. 요즘 일자리 구하기 어렵다는 건 너무 자주 듣는 뉴스라서 시큰둥할 수 있는데 작가가 아나운서 지원자들에 대한 내용으로 제법 흥미 있게 써냈다. 지역 방송국에서 1명 뽑는데 수백 명의 경력자들이 지원한다. 그러나 남과의 경쟁보다 나와의 경쟁이 더 치열하다. 아무리 준비가 철저해도 잠깐의 방심으로 멘탈은 휘청대고 세상은 그 작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대외활동에 목숨 거는 지방대학생의 사정도 참 남 일 같지 않았다.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넣고자 온갖 대외활동을 해보지만 번번이 면접마다 낙방한다. 기업은 경력자를 원하지, 경험 많은 자는 원하지 않았다. 가뭄에 콩 나듯이 보기 힘든 열정맨들도 이렇게 기를 죽이는 한국 사회는, 입구도 안 보이고 출구는 더더욱 안 보인다. 음악이 좋아서 밴드를 시작한 기타리스트 이야기도 참 짠했다. 이제는 돈 주고 음악 듣는 시대는 지나갔기에 음악이 점점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립싱크 연주를 하거나 한 곡에 몇 원도 안되는 스트리밍 수입으로 싸구려 음악 인생을 살아가는 뮤지션들. 이 시대의 산 자들은 버틴다는 말보단 못 움직인다는 표현에 가까운듯하다.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쓴 책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독자들이 제 삼자의 눈으로 사태를 바라보도록 만든 책 같다. 그래서인지 장강명의 글은 아무 색도 없는 무채색 같은 느낌을 받는다. 또한 물에 젖지 않는 기름종이 같기도 하고, 아무 무늬도 없는 벽지 같기도 하고 그렇다. 그는 어떠한 정답도 내리지 않고 선택을 강요하거나 방향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기에 장강명 소설은 유독 여운이 오래가는 게 아닐까 한다. 자 그러면 오늘도 이 악물고 하루를 버텨봅시다. 5천만의 대한민국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 보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길 더 바라면서.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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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키모카 2019-07-10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찍는 사람으로서 표지 보고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에요. 스포 방지를 위해 첫문단과 마지막 문단만 읽었는데 역시 읽고 싶은 책입니다. 서평 고맙습니다^^

물감 2019-07-11 06:55   좋아요 1 | URL
읽어주셔서 제가 더 고맙습니다^^ 스포는 적지 않았지만 반전이 거의 없는 내용들이더군요. 그냥 이야기 자체만으로 화제가 될만한 것들이라ㅎㅎ 여튼 재밌습니다!

페크pek0501 2019-07-11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정답도 내리지 않는 소설은 그것대로 매력 있지요. 이렇게 저렇게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여지를 주니까요. 작가가 생각하지 못한 걸 독자가 알아채는 경우도 있지요.

물감 2019-07-11 14:27   좋아요 1 | URL
네 정말 매력있는 것 같습니다. 대개 작가의 생각이 많이 들어간 책들은 내 생각이 낄 틈이 없는데, 장강명 소설은 독자가 자신의 생각을 존중하게 만들어주는거 같아요. 그래서 더 할말도 많아지나봅니다~~

붕붕툐툐 2019-07-11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강명 작가 새 책이 나왔다고 해서 궁금했는데, 벌써 읽고 리뷰를 쓰시다닛!!^^
출판서에서 먼저 연락오는 경지라니,존경스럽습니다~ㅎㅎ

물감 2019-07-11 18:20   좋아요 1 | URL
쑥스럽네요ㅎㅎ 제가 파워리뷰어도 아닌데 이런 날도 다 있군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빨간 표지의 작품에 무슨 트라우마 같은 게 생겼나 보다. 이제껏 만났던 빨간 책들은 다 나랑 맞지 않거나 소화가 힘들었거든. 아, 살인자의 기억법은 나쁘지 않았네. 암튼, 힘겹게 읽은 이 책도 얼마 남지 않은 내 영혼을 끌어모아 사명 다해 리뷰를 남기노라. 컨디션 난조로 인트로는 짧게 짧게.


랜들가의 대농장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흑인 소녀 코라. 1800년 대의 미국은 아프리카인들을 강제로 들여와 노예로 부려먹었고, 흑인들을 물건처럼 값을 매겨 팔곤 했다. 그 당시 백인들의 농장마다 많은 노예가 있었는데 주인 마음에 안 들면 채찍질 당하거나, 옆 마을 노예와 맞교환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공포의 나날을 보내던 주인공에게 한 소년이 탈출 계획을 말해주고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달아난다. 이들은 지하터널의 열차를 알게 되고, 조지아를 떠나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넘어가서 새 이름을 얻고 새 삶을 살아간다. 다인종이 섞여사는 그곳에서 백인처럼 일상생활을 하고 글도 배우고 교육도 받는 코라. 그러나 코라는 현상금이 걸렸고, 노예사냥꾼들이 따라붙기 시작한다. 그들은 코라와 관계된 자들을 차례차례 죽였고, 그녀는 또다시 지하 열차를 타고 노스캐롤라이나로 도망친다. 그러나 어딜 가더라도 미국은 흑인에게 자유롭지 못한 흑암의 땅이었다. 정녕 코라는 이 뫼비우스의 띠에서 빠져나올 수 있긴 한 걸까.


미국의 흑인 노예제를 다룬, 유명하다면 유명한 작품이다. 내러티브는 참 좋은데 말야 글맛은 영 느낄 수 없어서 점수는 높게 못 주겠더라. 주제가 무거울수록 글 또한 무거운 건 이해하나 구멍이 너무 많아서 문맥이나 문단의 연결이 심하게 부자연스럽다. 특히 주인공의 노예생활과 탈출까지의 내용을 다루는 초중반 장면들! 작품의 틀을 잡는 이 중요한 구간들이 너무하다 싶을 만큼 이빨이 잔뜩 빠져있다. 번역 수준도 심각하고, 가독성도 꽝이고, 불친절한 문체에 장면 스킵과 설명 부족까지. 진짜 억지로 간신히 읽었네. 그 뭐랄까, 몸에 타이어 주렁주렁 매달고 늪지대를 100미터 달리기하는 기분?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는 말일세. 좋은 재료를 쓴다고 다 훌륭한 요리가 되는 건 아니쥬?


​여하튼 주제가 주제인 만큼 생각할 문제도 많고 할 말도 많은데, 먼저 미국이란 나라를 다시 생각해본다. 본문에서도 나오듯이 미국의 독립선언문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라고 쓰여있다. 그러나 이 말은 백인에게만 해당되고 흑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백인들은 인디언의 땅을 빼앗고 흑인들의 미래를 모조리 짓밟았다. 노예들은 가축 취급을 받았고,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거나 한탄하기 보다, 의식주 제공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했다. 그들에겐 자신이 왜 사람대접을 못 받는가를 생각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발목이 묶인 새끼 코끼리가 커서도 도망칠 생각을 못하는 것처럼, 흑인들은 평생을 공포에 묶여 살아가는데 어떻게 미국은 스스로를 자유와 평등의 국가라고 외치는가. 그래서 오류와 모순투성이인 아프리카의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에서 일했던 코라의 눈에는 세상천지가 모두 오류였을 것이다.


조지아가 육체적인 고통받는 지옥이었다면,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지옥이었다. 이곳은 흑인도 인간 대접해주기는 했으나, 일상과 문화와 사람들의 인식 곳곳에서 흑인에 대한 멸시와 경멸이 배어 나온다. 심지어 병원들은 흑인 여성들의 피임 수술까지 해주면서 흑인의 싹을 잘라내고 있었다. 어느덧 흑인의 인구수가 백인을 앞질러버린 탓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교묘하게 흑인을 사육하고 거세하였고, 고통받던 시절에서 벗어난 노예들은 이 참극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과거에는 강제로 끌려와 노예가 되었었다면, 이제는 흑인들 스스로 현대판 노예제도에 참가한 꼴이었다. 더욱 아이러니한 건 흑인뿐만 아니라 노예를 숨겨준 백인들도 공포에 떨게 만든 국가의 제도이다. 노예 순찰대에게 발각되면 인종 불문하고 죽음을 면치 못했다. 판사들은 뇌물을 받고 노예사냥꾼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숨겨준 흑인에게 부모의 관심을 뺏겼다고 느낀 백인 자녀들은 부모를 고발하기까지 했다. 백인들끼리도 서로 감시하고 의심하는 사회라니. 모든 인종이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라니. 정녕 미국은 자유국가가 맞는가. 이 주제는 오늘날에 와서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주인공의 다양한 심경 변화가 눈길을 끈다. 코라의 엄마는 딸을 두고 농장을 탈출한 전설의 노예였다. 그녀도 탈출할 입장이 되고 보니 엄마 심정도 이러했을지 돌아본다. 이때는 자신을 버린 엄마를 원망하기보다 이해하려는 코라의 태도가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러나 탈출한 후로는 엄마가 미워져서 일부러 지워버린 코라. 같이 도망칠 수 있었는데 혼자 떠났고, 자유의 몸이 되어서도 딸을 구하러 올 생각이 없는 엄마에게 증오만 쌓여간다. 점점 코라는 자신을 괴롭힌 추노꾼들이나 농장 주인보다도 엄마를 더 경멸했다. 추노꾼들이 내 주변인을 죽일 때마다 엄마만 날 버린 게 아니라 세상 모두가 날 버렸으며, 악마의 손가락은 늘 자신을 향해 뻗어있다고 믿는다. 노예 출신이 풍요를 누리려 했다는 게 한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끝까지 백인과 미국을 향해 욕 한번 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화풀이할 만큼 노예제에 길들여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온몸에 채찍질 당하는 장면보다도 이게 더 마음이 아프더라. 간혹 이렇게 엉뚱한 것을 원망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걸 번지수 틀렸다고 말해주기가 참 어렵다. 여하튼 우리도 흑인들이 주장하는 자유와 평등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라고 인종차별 안 받나? 서양인들이 동양인 비하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이 되기보다 코라를 도왔던 백인들처럼 차별하지 않는 시민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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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내전 - 생활형 검사의 사람 공부, 세상 공부
김웅 지음 / 부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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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낳은 판타지 직업 중 하나가 검사이다. 요즘 배우들이 워낙 다양한 직업을 소화하다 보니 국민들에게 말도 안 되는 환상을 심어주곤 하는데 검사라는 직업은 드라마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거의 정반대라고 한다. 아마 대다수 직업들이 TV의 모습과 많이 다를걸. 게다가 모든 집단과 조직에는 부패한 인간과 문화와 시스템이 꼭 있다. 검찰 계도 매한가지인데 그렇게 더러움이 가득한 곳에서 나름 물들지 않고 살아온 검사가 책 한 권을 냈다. 저자는 독기 가득한 눈빛의 검사가 아니라 미생의 장그래 같은 순하고 투명한 캐릭터에 가깝다. 차근차근하지만 할 말은 다 하면서 제법 찰진 드립까지 날려주는 게 이제 막 예능 방송에 적응해가는 사극 배우의 느낌 같달까. 역시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은 글빨도 좋을 수밖에 없나 봐.


많은 사건과 사람을 담당하면서 느끼는 1순위는, 법이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니 최대한 피해를 입지 말라는 것이란다. 검사 입에서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다니, 네가 그러고도 검사냐! 할 수 있겠으나 현실이 그렇단다. 사건을 종결하고 나면 뿌듯함보다는 안팎으로 쓸쓸함만 남는 직업이 검사이다. 인간의 추함이 쏟아낸 토사물을 매일 봐야 하니 말이다. 자신은 그렇게 슬퍼하지만 독자에게는 각종 사례들을 설명할 때 팩트와 유머를 적절히 섞어서 들려준다. 앞에서 말했듯이 글재주가 좋아 웬만한 단편 소설집보다 재미있다. 재미로 읽을 책은 아닌데 진심 재미있다. 교통사고로 전치 3주가 나왔어도 3일 만에 회복하는 울버린, 반나절 만에 전국 팔도를 순회하는 플래시, 1시간 안에 드립 커피 3백 잔을 만든다는 오병이어 기적의 예수님 등등.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는 대한민국은 초능력자들이 모여사는 기적의 땅이다. 그런 사람들은 양반이다.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경우는 일단 져준 다음 수사를 시작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때문에 검찰은 오늘도 휴일근무에 폭풍 야근 중이다.


수백만 명의 사기꾼을 담당하는 검사 한 명이 시달리는 내용과 만렙 사기꾼들의 내공이 아주 자세히도 나온다. 검사들이 2년마다 인사이동하는 것과, 오래된 사건부터 처리하는 시스템을 파고들어 사기꾼들은 거미줄에서 당당히 빠져나가기도 한다. 특히 고위급 거물들을 구속할 때면 검찰을 방해하는 자들이 꼭 등장한다. 온갖 권력을 행사하는 음모자들 때문에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일도 허다했다. 개인이나 소수의 인원도 범죄를 밝혀내기 어려운데, 집단이나 조직 대 조직으로 이루어진 범죄는 더 힘들다. 무능력한 검사로 낙인찍히는 건 한순간이라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평생을 무시당하게 된다. 안에서든 밖에서든. 범죄 종류도 워낙 다양해서 각종 분야를 공부하고 연구해야 하는 게 검사다. 세상에 쉬운 일 없다지만 검사도 참 극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험 사기, 도박, 소년법, 부동산 불법 매매, 갑질 프랜차이즈 가맹점, 불법 기획사, 뇌물, 마약 등등. 큼직한 사례들이 분야별로 하나씩 소개되는데 그중 도박 현장에서 붙잡힌 박여사의 발언들이 제법 흥미로웠다. 내 돈으로 내가 도박하는 게 뭐가 문제냐, 데모하는 학생들이 경찰을 피하는 게 찔려서 그런 거냐, 도박이 불로소득 때문에 불법이라면 돈을 못 딴 경우 무죄 아니냐,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면 모두 죄가 되냐, 국회의원이 법으로 만들면 국민이 무조건 지켜야 하느냐 등등. 법조계나 학계에서도 어려워하는 논쟁거리 주제들을 마구마구 던지는 박여사와, 이에 대한 코멘트를 다는 저자. 법이란 무엇인가. 윤리는 무엇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기회를 통해서 한 번쯤 돌아보게 된다.


실전에서 오는 고충도 많지만 검찰계의 로직이나 조직문화에서 오는 내부의 고충도 한몫한다. 숨 쉬듯 검찰을 고소해대는 사람들이나, 정신을 종잡을 수 없는 내부 사람들이나 장단 맞추는 건 똑같이 힘들다. 나는 관공직, 전문직, 공무원 같은 사람들이 이런 책을 낼 때면 업계에 시달릴 것을 먼저 걱정한다. 전에 읽은 ‘임플란트 전쟁‘의 저자도 업계의 비리를 책으로 썼다가 치과계의 왕따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말을 했다. 역사 책을 보면 늘 바른 말을 하는 자가 죽었다고. 안 그래도 필터 없는 또라이 검사로 낙인찍혔는데, 초임검사 때 검사장을 디스 했던 일화를 그대로 책에 쓴 걸 보면 저자도 진심 보통내기가 아니다. 이제는 짬이 높아져서 이런 내용도 쓸 수 있는 거겠지? 세상을 바꾸는 모든 또라이들이여, 멈추지 말고 가던 길 계속 가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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