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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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는 히틀러만큼이나 유명한 사람이다. 가수들의 가수가 조용필이라면, 작가들의 작가로 손꼽히는 그런 분이다. 보통 유명 작가들은 저마다 고유의 특징이 있다. 조지 오웰의 날카로운 통찰력, 정유정의 혼수상태 분위기 조성, 장강명의 강속구 팩트, 하루키의 우주를 갈아 넣은 감성, 스티븐 킹의 기괴한 상상력, 요나스 요나손의 B급 유머 코드 등등. 수많은 작가들의 다양한 장점들 중에 헤밍웨이는 문장의 간결함으로 유명하던데 과연 읽어보니 잘 알겠더라. 문장들이 주인공인 노인의 이미지를 닮아있다. 근육이 다 빠져서 불필요한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느낌이랄까? 간결함의 영역을 초월하신듯. 이렇게 살을 붙이지 않으면 글의 방향이 뚜렷하고 읽기가 수월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 같다. 단점은 글맛이 없어서 독자의 문학적 감성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글이 그렇다는 것이지, 작품 자체가 감성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노인이 바다에서 청새치 잡는 내용이 전부다. 이 단순한 이야기가 대체 어떤 교훈을 주길래 전 세계가 열광했을까. 짧은 내용을 더 짧게 요약해보자. 오랜만에 소개팅 나간 늙은 어부는 끈질긴 구애로 까칠한 그녀의 마음을 쟁취한다. 그녀와 드라이브 좀 하다가 집 구경도 시켜줄 계획이었는데 왠 양아치들이 쫓아와 두 사람을 방해한다. 격렬한 공방전 끝에 그녀는 목숨을 잃었고, 순정파 어부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 지난 시간들을 떠올린다. 비록 그녀를 지키진 못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보여준 용맹함에 존경을 표한다. 디 엔드.


어쩌다 보니 슬픈 이야기가 돼버렸는데 절대 슬픈 이야기가 아닌 거 다들 아시제? 암튼 내용 자체는 별거 없었다. 얼핏 보면 노인의 생존기 같지만 사실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내용에 더 가까웠다. 먼저 노인은 84일간이나 고기를 잡지 못했다. 이건 마치 음식점에 파리만 날리는 꼴과도 같다. 엄청 괴로웠을 텐데도 노인은 자신을 따르는 소년 앞에서 허세 부리지 않았고 오로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또한 바다에서 홀로 긴 시간 동안 외로움에 버려졌지만 자신의 양손과 대화를 해가며 고독을 이겨내곤 했다. 특히 청새치와의 사투가 길어져 멘탈이 휘청일 때에도 노인은 끝까지 싸워서 스스로를 증명해 보였다. 이렇게 연속적인 시련에도 불평 없이 답을 찾아나가는 인생 선배님의 다이나믹한 이야기는 길이길이 전설로 내려오고 있었다.


물고기 잡으면 끝인 줄 알았더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상어의 등장도 쇼크였고, 청새치의 운명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오나 싶더니 그것도 아니고 말야. 상어들에게 다 뜯긴 청새치를 보고 허탈함에 빠진 노인이 혹여 바다에 목숨 버리진 않을까 걱정되더라. 어쩌면 이 여정은 한여름 밤의 꿈만도 못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괜히 항해를 했다는 생각까지 했다. 상어에게 죽을뻔 한 일이나 잡아온 고기를 다 뺏긴 것보다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지 못한 게 더 속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년에게 증명해 보이지 못한 점에서 가장 괴롭지 않았을까. 곁에 아무도 없는 노인의 삶에 빛이 되어준 소년에게 늘 실망만 안겨주었던 지난날들. 겨우겨우 베테랑 어부의 위엄을 보여줄 기회였는데, 뼈만 남은 청새치를 가져가려니 그 비참함을 어떤 말로 표현하리. 그렇게 모든 면에서 대실패한 항해인 줄 알았으나 꼭 그렇지도 않았다. 비록 수확은 없었지만 소년과 어부들에게는 노장의 투혼을, 독자들에게는 고난을 헤쳐나가는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 짧은 노인의 이야기는 작가의 모습을 많이 투영하고 있다. 헤밍웨이도 바다낚시를 즐겨 했고 고독과 자주 마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노인의 혼잣말이나 생각들이 그렇게 생동감 있었나 보다. 노인이 배 위에서 겪은 수난들처럼 작가도 많은 수난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헤밍웨이는 그 어려움들을 다 받아들이고 살다 간 게 아닌가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면서. 영웅이란 타이틀은 꼭 지구를 구하고 시민을 지켜야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책 속의 노인처럼 어떤 일에도 절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모습을 가진다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나는 그런 영웅들을 매일매일 만난다. 집 앞에 쓰레기를 수거해가는 청소부들, 낙엽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들, 새벽부터 김밥 팔고 토스트 만드는 어머님들... 노인처럼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모든 분들이 진정 이 시대의 영웅이다. 그러니 고난을 마주하여도 절대 기죽지 말자. 어차피 이번 거 지나가도 고난은 또 오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속 편하고 좋아. 어디든 오랫동안 제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렇더라고. 여하튼 배울 점이 많았던 할배의 나이스한 이야기였습니다. 한 5년 주기로 읽어주면 좋을 듯 합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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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19-11-26 0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침 읽은 지 5년이 넘었네요. 다시 읽어야되겠습니다. 이웃 영웅들이 주는 힘을 생각하면서요. 글 잘 읽었습니다

물감 2019-11-26 07:08   좋아요 1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위로를 받아 기분이 묘합니다. 우리 함께 알라딘의 영웅이 되길 소망해봅니다^^

coolcat329 2019-11-26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품 올해 두 번 읽었습니다.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온몸을 던져서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숭고함에 존경의 마음이 솟아납니다.글 잘 읽었습니다.

물감 2019-11-26 16:05   좋아요 1 | URL
댓글 감사합니다. 그런 분들이 없다면 우리는 날마다 위기를 맞을테죠. 세상에서 당연한건 정말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나비종 2019-11-26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헤밍웨이 문장의 간결함에서 까진 귤의 이미지를 보았습니다. 가끔 심심하면 껍질 까고 그물처럼 둘러싼 하얀 거를 한 가닥 한 가닥 떼어내어 훌러덩 벗길 때가 있잖아요. 그 말끔해진 이미지요. 지금 귤 먹고 있는 거, 맞습니다.ㅎㅎ
예전에는 기막힌 묘사로 데코된 표현들에 눈길이 가더니 요즘은 헤밍웨이풍의 직설 화법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더군요. 그래서 읽는 내내 후련했습니다.

양아치ㅋㅋㅋ 개고생하며 잡은 청새치를 인터셉트하여 가로챈 상어의 야비함을 어찌 그리 적절하게 비유하셨을까. 매번 느끼는 거지만 물감님의 표현력에 오늘도 감탄하며 빵터집니다.ㅎㅎ

이 책이 작가의 모습이 많이 투영된 작품이라 여겼는데 책 마지막 부분의 연보를 보고 생각이 복잡해지더라구요. 62세에 우울증 등에 시달리다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더군요. <노인과 바다>와 괴리감이 느껴졌습니다.
연보를 보며 두 가지 생각을 했어요.
첫째, 부모의 삶이 자식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요. 작가의 아버지 역시 우울증으로 권총 자살을 했다는 점이 작가의 무의식에 깊이 자리잡았을까요?
둘째, 건강하게 살아야 오래오래 글을 쓰겠다 싶었어요. 사냥 중 팔 부러지고, 권총 오발 사고로 다리에 총상 입고, 자동차 전복 사고로 늑골 부러지고 얼굴 찢기고, 두 차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중상을 당한 작가가 말년에 정신쇠약, 우울증, 고혈압, 간염, 알코올중독, 편집증에 시달린 건 그의 삶에 켜켜이 쌓인 흔적의 결과물인 것 같거든요. <노인과 바다>를 발표한 이후 10여 년 간 창작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삶을 마감한 작가를 보며 몸의 건강이 새삼스럽게 확 다가오더라구요.

매일매일 만나신다는 영웅들을 떠올려보면서 저와 비슷한 울림점을 가지고 계시는구나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폐지 주워모으시는 어르신들도 자주 눈에 밟히더라구요.

‘어차피 이번 거 지나가도 고난은 또 오니까‘ㅋㅋ 물감님의 리뷰를 오래 기다린 보람을 찾도록 마지막까지 유쾌한 멘트를 날리시는군요~^^

물감 2019-11-26 23:06   좋아요 2 | URL
말끔하게 벗겨진 귤같은 문장이라... 멋진 비유네요! 제가 언급했던 살이 하나도 없는 문장이 그렇게도 표현될수도 있군요 ㅎㅎㅎ

줄거리 요약을 색다르게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다 아는 내용인데 어떻게 말하면 신선하고 재밌을지 계속 생각했어요. 이번 리뷰에서 가장 고민많이하고 시간투자도 많이된 단락이 저 두세줄의 요약글입니다 ㅋㅋㅋㅋ 꽤 만족하고 있습니다.

작품에만 집중하느라 작가에게 큰 관심을 못가졌었는데, 헤밍웨이의 배경이나 가족사는 심상치 않았군요. 제게도 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저역시 온전치 못했을거 같아요. 저는 20대 중반에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졌던 적이 있는데요, 그후로 몇년을 좌절과 우울함으로 고생했거든요. 육체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회복이 된다지만 그때 겪었던 괴로움은 어지간히도 회복이 안되더라구요. 하물며 저보다 더한 헤밍웨이는 더 괴로웠을거 같아요. 그 아픔들이 작품으로 탄생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노인같은 평범한 영웅들 덕분에 오늘도 세상은 무사히 굴러갑니다. 말씀하신 폐지줍는 어르신들도 당연히 해당되구요ㅎㅎ 여하튼 이번 모임도 이렇게 잘 끝나서 뿌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리뷰는 쓸 말이 없어서 걱정했거든요 ㅋㅋㅋ
다음 독서모임은 1월이 되겠네요! 연말 연초는 바빠질 것 같아요...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죠 뭐 ㅋㅋㅋ 화이팅입니다.
 
미안하다고 말해 스토리콜렉터 52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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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텀 소설도 꽤 오랜만에 읽는다. 나는 독서 슬럼프에 빠졌거나, 앞서 읽은 책들이 연달아 꽝일때 기분전환을 위해 찾는 작가가 몇몇 있다. 이 작가도 그중 하나인데, 내놓는 작품마다 평타 이상의 수준으로 빅재미를 보장하는 프로페셔널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처방전 용도로만 찾기 때문에 맘대로 읽지 못하고 아껴두게 된다는 리스크도 있다. 여하튼 이젠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져 소개가 필요 없는 이 시리즈의 주인공을 간략히 말하자면 파킨슨병 1기가 진행 중인 심리학자로써, 매사건마다 경찰과 얽혀 가정을 챙기지 못하는 데다 여러 가지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아내와 별거 중이다. 지금은 제 일만 하면서 인생 제3막 독거생활을 보내는 중인데, 이번에도 사건은 제발로 찾아와 그를 괴롭혀댄다. 그의 은퇴 희망은 정녕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려나.


런던 어느 마을의 축제날, 두 여학생이 실종되어 마을은 발칵 뒤집어지고 나라 곳곳에 무성한 소문이 돌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겨울날, 호수 안에서 실종자 한 명이 익사체로 발견된다. 부검 결과 최근까지 생존했었다는 진단하에 남은 한 명도 살아있을 가능성을 두고 경찰은 주인공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경찰이 확신해하는 용의자는 주인공 눈에 영 시원치 않았고, 납치범 프로파일과 묘하게 어긋나있었다. 그러던 중 익명의 제보자가 건넨 실종자들의 사진을 입수하면서부터 용의자들이 대거 쏟아지기 시작한다. 갈수록 판이 커져가는 이 사건을 어떻게 축소할 수 있을까.


보통 머리 좋은 주인공들은 대개 똥고집에 외골수에 한 성깔 하시는데,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캐릭터가 조 올로클린이다. 그의 처지와 주변 상황은 언제 멘탈이 무너지더라도 이상할 게 없건만, 그 많은 폭풍 속에서 떠내려가지 않게 중심을 잘 잡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없는 유머도 가끔씩 날려주시는데 그 소재가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웃음 포인트이다. TV에서 아무리 깐족거려도 선은 절대 넘지 않는 프로 예능인들 본적 있지? 이 책의 주인공도 딱 그런 캐릭터이다. 먼저 심리학으로 상대를 파악한 다음 그에 맞춰주는 대화를 한다. 까칠한 타입은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 잘난척하는 타입은 계속 우월감을 느낄 수 있도록, 상대가 불쾌해하지 않을 수준으로 말을 주고받는다. 늘 환자들을 상담하다 보니 당연한 일이겠다.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작품 속 주인공들은 이렇게 매력 발산하느라 오늘도 열일중이다.


이번 사건은 정말 여러 번 주인공의 심정을 무너지게 하였다. 몇 년 전 자신의 딸이 납치되었던 그때의 공포가 계속 떠오른 그는 어쩐지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제발 찾아달라고 울부짖는 실종자 가족과, 계속 헛다리만 짚어 비난받는 경찰과, 예산 부족으로 점점 줄어드는 수사인력. 이 모든 것들이 수사의 사기를 꺾고 있다. 경찰의 막다른 수사를 이어나갈 방법은 실종자들을 프로파일링 하는 것뿐이었다. 조는 소녀들의 성향과 행동 패턴을 분석하고, 주변인 중에서 납치범을 물색하는 역수사 방식으로 진행한다. 문제는 소녀들의 어두운 가정사를 통해 알게 된 용의자가 넘쳐난다는 것이었다. 지난 작품들이 큰 산을 두세 번 넘어야 했다면, 이번 작품은 작은 산들을 열 번 넘는 듯한 기분이랄까. 사건만으로도 바쁜 그는 가정에도 신경 써야 했다. 아내가 곧 있을 크리스마스에 그를 초대했으나 이번 약속도 펑크가 난다. 아내는 조가 싫은 게 아니라 조가 경찰과 자꾸 엮이는 게 싫은 것이고, 그 사실을 조도 잘 안다. 이미 레드카드를 받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그는 더 이상 실망 주고 싶지 않지만 세상이 자신을 가만히 놔두질 않는 게 문제였다. 여전히 일과 가족 사이에서 외줄 타기 하는 그가 참 안쓰럽다.


음. 솔직하게 이번 편은 스토리 면에서 볼거리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캐릭터에게 재미를 찾아야 한다. 인물들의 다양한 심리상태를 볼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 주인공의 심경 변화가 가장 볼만하다. 위에서 말한 딸의 납치 사건과 오버랩되어 과몰입하기도 하고, 어쩌다가 수사반장 아내와 밀회를 가져서 괜히 멜랑꼴리해졌다가, 자신의 판단 부족으로 동료가 희생당해 자책하는 등 내면의 롤러코스터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두 번째로는 심리학자에 대한 이모저모를 구경할 수가 있는데, 주인공의 심리학 강연이나 용의자와의 대화씬을 통해서 심리학자라는 직업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사건 수사시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경찰과 전혀 다른데, 경찰이 증거와 결과만을 주목한다면 심리학자는 원인과 동기를 더 주목한다. 인간을 이해하려 하다 보면 환자도, 범죄자도, 정신이상자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대강 알게 되고, 그러면 남들이 놓쳤던 것들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나 유용한 지식들이 오히려 자신을 갉아먹는 독이 되고 가정을 파괴하는 저주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끝없이 재능기부를 해야 하는 그만의 고뇌는 작품의 색깔을 뚜렷하게 나타내줄 베이스가 되므로 그의 앞날에 따스한 햇살 따윈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다.


세 권쯤 읽어보니 이 시리즈만이 가지는 장점과 차별점을 알겠더군. 상대의 내면을 통해 인과관계를 설명하고 범인에게 접근하는 독특한 전개 방식. 단점은 액션이 필요 없는 직업이라 그런지 진도가 매우 더디다는 것. 여기서 작가는 상황 설명과 인물의 독백씬을 번갈아 씀으로써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분위기를 멋지게 상쇄시킨다. 전개도 전개지만 주인공이 무슨 생각을 할 건지 궁금하게 만드는 기교가 엄청난 작가이다. 근데 지금까지는 무난하게 시리즈가 이어져왔다만, 이대로 계속 간다면 작품이 한계에 부딪힐 것만 같은 불길함이 든다. 어쩐지 스토리의 힘보다는 심리 묘사 쪽으로만 승부를 보려는 느낌을 받았거덩. 아직은 그게 먹어준다지만 앞으로도 쭉 먹혀들지는 미지수이다. 로보텀 슨생님도 이제 슬슬 새로운 도약이 필요해 보입니다. 똑같은 반찬만 먹으면 금방 질리니깐요. 독자들의 심리도 파악해주십사 이렇게 한 말씀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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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3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5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지마 저택 살인사건
아마노 세츠코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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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사건, 실종사건, 납치 사건 등등. 제목에 ‘사건‘이 들어간 작품만큼 올드한 것도 없을걸. 본격 추리물이 사랑받던 영광의 시대는 지나간지 오래이다. 그래서 이제는 장르소설계의 고전작을 읽는다는 마음으로 보게 된다. 뜬금없는 고백인데 나는 셜록 홈스, 괴도 뤼팽 시리즈도 읽지 않았고, 애거사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 같은 스탠다드 추리작가들의 작품도 읽어본 적이 없다. 솔직히 정통 추리물은 썩 재미있지도 않고, 딱히 두뇌 훈련도 되지 않는다. 트릭의 방식만 다를 뿐, 작품의 기승전결은 항상 비슷하여 이만큼 클리셰가 많은 장르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투덜댈 거면서 왜 읽었냐 하신다면, 이 작가의 데뷔작 ‘얼음꽃‘에서 받은 감동이 가히 허리케인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느꼈던 내공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고 절대 올드함이 전부일리 없는 작가라고 강하게 믿었으나 슬픈 예감은 역시 틀리는 법이 없다. 도대체 왜 어쩌다 이 정도로 수준이 낮아졌나 싶을 정도로 망작이었다. 실망이 너무 커서 줄거리 요약은 생략하련다. 절대 귀찮아서가 아님.


이 작품에서 나는 크게 두 번 실망했는데 먼저는 이 최첨단 시대에 낡고 식상한 소재를 썼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뻔하지 않게 다루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내었다는 점이다. 과거 수많은 작가들이 너도나도 탐을 냈던 만큼 밀실 살인은 꽤나 매력적인 소재였던 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 수십 번 우려먹은 이 한물간 장르를 두근대는 심정으로 읽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 현대 작가들이 그런 독자의 취향이나 반응을 모를까? 유행이나 트렌드에 민감한 작가들이 절대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이제는 옛날처럼 정통 추리보다는 사회소설에 추리물을 접목시키는 방향으로 가고들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사회파에 발 담그지 않았다. 그렇다고 본격 추리로 가지도 않았다.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함 속에서 방황하다가 낭패본 케이스였다. 보통 사건이 발생하면 용의자들을 붙잡아두고 수사를 해나간다. 근데 이 책은 첫 번째 피해자가 자살로 판명이 나면서 용의자들은 다 풀려나고 수사는 싱겁게 종결된다. 그대로 며칠이나 지나버려 시간,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특수한 전개로 흘러간다. 기존 작들과 차별화된 플롯을 보여주려는 건 알겠다만 그냥 정형화된 플롯대로 쓰시고 욕이나 먹지 말지. 이런 게 바로 문학의 새로운 시도이며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믿는 독자는 제발 없길 바랄 뿐.


무엇보다 추리소설인데 추리하는 맛이 없어서 낭패다. 먼저 용의자 간에 원한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작품 내내 모두가 진득한 가족애를 보여주어 경찰뿐 아니라 독자까지 애를 먹는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피해자가 등장하나 범행을 자백하고 자살한 용의자가 밝혀지면서 또 한 번 김이 팍 샌다. 당연히 범인은 따로 있겠지만 아무도 범행 동기가 없는데 굳이 진범을 찾아낼 필요 있나 싶더라. 게다가 등장인물이 전부 선한 사람들뿐이라 분위기는 지겨울 정도로 루즈하다. 악인이 없어서 몰입감은 떨어지고 뒤 내용도 그닥 궁금하지 않은 이 책은 장르문학으로서 대 실패작이라 하겠다. 여하튼 망해버린 분위기 속에서 범인을 어떻게 수면 위로 꺼내고 마무리할까 궁금하긴 했는데 아 맙소사, 여기에도 김전일께서 등장하시어 혼자 북 치고 장구치는 추리 원맨쇼로 사건을 끝내버렸다. 아니 이럴 거면 열심히 수사해오던 경찰 삼인방은 뭣하러 등장시켰대? 이거는 독자에 대한 배려 없음 뿐만 아니라, 자기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도 없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이렇게 트릭이나 수사가 볼품이 없다면 범행 동기라도 그럴싸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쏘쏘해서 읽은 시간이 다 아까울 지경이다. 마무리 짓기도 힘든 걸 보면 이번 리뷰는 그냥 망친듯싶다. 아 몰라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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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 온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2
알베르토 푸겟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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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트위터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바쁜 게 얼마나 나쁘냐면 소중한 게 성가셔져.‘ 지금 나에게 너무 해당되는 말이다. 정신없이 바빠져버리니 차 한 잔의 시간, 여유로운 독서, 초저녁의 산책 같은 일상의 소중한 것들이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나는 인생에 야망도 없고 부귀영화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먹고사는 것만 해결되면 그만인데, 왜 세상은 열심히 살아야만 톱니바퀴가 굴러가도록 되어있을까. 대체 무슨 직업을 가져야 ‘적당히‘ 하면서 살 수 있는 걸까. 정말 인생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공부 중인 요즘이다. 이런 나의 심정과 비슷해 보이는 책을 집어 들었다. 제목은 ‘답답하다, 짜증난다‘는 뜻의 스페인어이다. 이 한 권을 완독하는데 20일이나 걸렸다니, 진짜 짜증난다잉.


1980년대 칠레는 연령 불문하고 술과 마약에 빠져있고 클럽에 들락날락하는 데다 성적으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이다. 도덕과 윤리가 무너진 이 나라는 거리마다 황폐한 기운이 가득했다. 또한 피노체트 정권의 선거기간이라 바깥은 시끌시끌했다. 이제 막 브라질 수학여행을 다녀온 칠레 소년은 모든 것이 싫었다. 자유로운 브라질에 비하면 이 꽉 막힌 칠레 사회는 숨 막혀 질식사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자기 빼고 모두는 현 정권의 방침에 잘만 적응해서 지낸다.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염증을 느낀 주인공은 모든 것이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남들과 여러 번 부딪히다가 결국 가출하고 답답함에서 해방되려 한다. 그러나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은 주인공은, 이 거친 세상에 부딪혀 보기로 한다.


온통 불평불만투성이의 내용뿐이라 꽤나 당황했다. 이런 게 호불호가 확 나뉠 작품이지 싶다. 별 내용도 없는 책을 내가 왜 읽고 있는 거며, 이 책은 어째서 고전문학으로 분류돼있는 거며, 이 책이 주는 진리와 깨달음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었다. 아무튼 만사에 짜증 나는 주인공이 그래도 이해는 되는 게 나 또한 최근에 엉망진창이어서 자존감이 바닥을 마구마구 쳐댔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짜증의 원인이 딱히 안 보여서 뭔가를 빠뜨리고 지나가는 느낌을 내내 받았는데, 알고 보니 불의한 지배 사회에 반기를 드는 주인공의 성장기였던 것이다. 그것을 알고 나니 안 보이던 작품의 메시지와 교훈들이 차례차례 보인다. 단순히 스토리로만 접근하면 참 볼품없지만, 칠레 사회의 배경에 초점을 맞춘다면 읽을 맛이 날 듯하니 안 읽은 독자분들은 참고하시도록. 그렇다 해도 글맛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칠레에 문외한인 나님은 이해 안 되는 내용투성이라 역자 해설은 필수였다헤.


친구들은 돌아가면서 변해버린 주인공에게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권에 휘둘려 폐쇄적인 소통 방식을 갖고, 외래문화에 길들여져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등 칠레인의 삶은 다양하게 훼손되고 있었다. 기존의 질서가 뒤집어지는 것이 두려웠던 사람들은 열렬히 피노체트 권력을 지지하였다. 그렇게 국민들은 권력에 길들여지길 원하였고, 불의와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를 스스로 유지해나가고자 했다. 반대로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고 제 삶을 지키려는 주인공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모두와 점점 멀어졌고 거리를 둔 것이다. 해설에 따르면 칠레는 자유의 욕망을 포기하고 권력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죽음의 땅이었다. 자유의 땅 브라질을 보고 왔으니 칠레의 폭력적인 악취는 더욱 진동했던 거였다. 역시 해설을 읽으니 주인공의 짜증이 이해가 확 되는군.


이 책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오마주한 책이다. 본문에서도 호밀밭의 파수꾼을 여러 번 언급하는데다 닮은 구석도 많은 듯한데, 아쉽게도 그 책을 읽지 않아서 어림짐작으로 이해하고 넘기곤 했다. 보시다시피 주인공은 자기 세계가 뚜렷하고 그것을 꺾을 생각이 전혀 없다. 이 거지 같은 세상 속에서 좌로 가든 우로 가든 다 거기서 거기인데, 왜 남들은 내가 가는 곳마다 틀렸다는 듯이 떠드는 걸까.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계속 자신만의 질서를 세상에 끼워 넣으려고 행동했다. 너 혼자 반대해서 뭐 어쩔 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의 뚝심에 적잖은 감명을 받았다. 생각의 틀에 갇혀 논리적 판단을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올곧게 자신의 방식을 고집했던 마티아스. 그를 통해서 황폐한 세상과 소통을 시도한 작가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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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9-10-26 0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책하며 숨쉬기하는 속도로 천천히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게으름과는 전혀 다른, 알.맞.은 속도로요. 바쁜 거 정말 나빠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맞는 말이다 싶습니다.
부귀영화 따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 저와 같네요. 음, 야망은 있어요. ‘바쁘지 않게 지내면서 살아남으리라, 불끈! 이런 야망이요.ㅋㅋ

책을 읽으면서 밀려온 쓰나미같은 짜증은 리뷰에 다 털어넣었습니다. 물감님 아니었으면 11월까지 넘어갈 뻔했어요. 리뷰 올리신 사실을 인지하면서 막판에 눈을 부라리며 몸부림을 쳤거든요.^^;;

자주 느끼는 거지만 물감님은 개성적인 문체로 내용 요약을 잘하세요. 책을 읽지 않은 분들이 어떤 느낌인지 확 깨달을 수 있도록^^
호불호! 극과 극의 반응이 나올만한 작품인 것 같아요. 저는 ‘불호‘파입니다만.ㅎㅎ

공감이 되는 내용이 많아서 반가운 리뷰입니다.
<공감한 부분> 부귀영화 따위, 20일이나, 진짜 짜증, 꽤나 당황, 호불호, 별 내용도 없는 책을 내가 왜, 어째서 고전, 차례차례, 글맛은 전혀, 문외한, 역자 해설 필수, 해설을 읽으니 이해, 아쉽게도 그 책을, 작가에게 박수

혼자라면 읽다 팔아버렸거나 아예 사지도 않았을 책을 끝까지 완독했습니다. 물감님 덕분에 이 어려운 일을 끝내 해버렸군요, 제가.^^* 인내심을 기르기에 특화된 도서로 강추하고 싶다는 생각이~~ㅋ

물감 2019-10-26 21:03   좋아요 1 | URL
솔직히 이번 도서는 읽기도 힘들었지만 리뷰는 더 쓰기 힘들었어요. 아무리 읽어도 머리에 입력되는게 없어서 남는건 더 없어가지구요ㅋㅋㅋ

제 요약글에 대해 하신 말씀처럼 저는 읽지 않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려는 편입니다. 많은 분들이 읽은 사람만 이해될 리뷰를 쓰고 있어요. 모르는 책에 대해 정보를 얻고 싶을때 무슨말인지 파악도 안되고 어렵기만한 리뷰들을 볼 때마다 아쉽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한 글 위주로 쓰고 있어요ㅎㅎ 이것도 알아주는 분은 나비종님 뿐이군요^^ 예리하심!

제가 왜 나비종님과 이 모임을 결성했는지 아시나요?? 나비종님이 제 스타일을 좋아해주신것도 있지만, 저도 나비종님 글 스타일이 좋았거든요. 저에겐 없는 기품있는 글을 쓰시면서 소위 허세부림이 없는 것이 너무 좋아요. 그것과 정반대인 글들이 난무하다보니 책 얘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은 있어서 너무 감사하네요ㅎㅎㅎ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11월도 파이팅 입니다!!

나비종 2019-10-26 19:08   좋아요 1 | URL
격하게 끄덕끄덕~ 머릿속에 ˝젠장˝ 밖에 안 떠오르더군요ㅎㅎ

아하! 그런 생각으로 쓰신 리뷰라 그토록 친절하였던 거로군요. 전 단지 ˝홍시 맛이 나서 그렇다 했을 뿐이온데˝ㅎㅎ 제 리뷰의 목적은 독.후.감.입니다. 철저히 나비종 중심의 감상문이죠. 소수의 느낌을 적은, 이런 느낌을 받은 인간도 있답니다, 뭐 이런.^^; 책이 건네어주는 색채나 향기를 묘사한달까요.
널리 독자를 이롭게 하시는 홍익물감님의 목적을 생각하면, 극히 개인적인 글입니다.
결론은 나물 모임의 구성원이 환상의 조합이라는 거죠. 이성과 감성의 하모니랄까요~ㅋㅋㅋ

기품. . 에서 살짝 민망합니다.^^;;
허세. .에서는 다소 찔리구요. 예전에 교무실 옆 자리 짝꿍샘이 그랬거든요. 신께서는 샘께 많은 재능을 주셨는데 겸손을 앗아가셨다고ㅎㅎ 제가 틈만 나면 자랑질이라ㅋㅋ
^^ 저도 난해하고 끊길줄 모르는 가래떡 문체를 질색하는데, 물감님 글은 딱 제 스타일~^^
11월은 바다에서 만나요!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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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런다. 이 작가의 책은 리뷰를 쓸 때마다 머릿속이 매번 백지가 되곤 한다. 그녀의 작품은 기승전결도 확실하고 이야기에 힘도 있고 재미마저 보장한다. 그렇다면 할 말이 글로 술술 써져야 정상인데 도대체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를 모르겠단 말이다. 나는 웬만하면 리뷰를 쉽게 쓰자는 편인데 이 분의 책은 그게 잘 안된다. 여하튼 유정 누님의 스릴러 3종 세트 중 하나인 이 작품은 ‘악‘이 태어나는 배경을 다룬 작품으로 소개되어있다. ‘7년의 밤‘이나 ‘28‘의 하드한 맛에 비하면 나름 소프트한 맛이므로 이전작들보단 부담이 덜 할 것이다. 반면 정유정표 고유의 서늘함을 기대했던 나에겐 매우 순한 맛으로 느껴져 살짝 심심하기까지 했다. 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필력보다는 분위기로 승부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이번처럼 잔잔한 긴장감 정도로는 독자의 시선을 잡아두기가 어려울 듯싶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모든 작품 중에서 이 책의 평점이 가장 낮더군. 정유정 치고 구멍이 많긴 했지만 작품성은 인정할만하다.


스토리 요약은 생략하겠다. 아무래도 일인칭 작품이라 텐션도 높지 않고 템포도 느긋한 편이다. 인간의 악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마침내 사이코패스가 주인공인 이 책을 써냄으로써 집착에 가까운 연구에 종지부를 찍은 듯하다. 그리하여 더 이상 스릴러를 쓰지 않을까 봐 걱정도 된다. 안 그래도 한국의 스티븐 킹이니, 스릴러 여제니 하는 수식어에 잔뜩 부담스러워 하시더만. 아무튼 작가가 보여주려는 ‘순수한 악‘은 기대보단 우려에 더 가까웠다. 이유에 대하여는 나중에 말하겠다. 일단 초반에 등장한 엄마의 죽음은 우발적인 사고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엄마의 감시 속에 살아온 주인공은 두려움과 해방감에 몸을 떨었고, 사태 수습과 함께 플랜 B를 짠다. 이제는 고삐 풀린 괴물이 되었으면서도 같이 사는 친구에게는 거짓이 아닌 진심으로 대하려 하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엄마와 몸싸움이 있기 좀 전에도 밖에서 살인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캐릭터의 갈피를 못 잡고 비틀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다양한 양념을 버무려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길잡이 역할을 하는 머릿속의 청군과 백군, 어린 시절 수영선수 생활, 죽은 형과 하던 서바이벌 게임 등등. 지금의 인격이 형성되기까지 있었던 과거들이 그나마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주어 몰입하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초반부터 죽은 엄마였지만 그녀의 존재감은 끝나지 않았다. 어찌나 시달렸던 건지 어딜 가도 엄마가 나타나 말을 걸어왔다. 그것이 주인공을 제어하든가 불을 지피든가 했어야 하는데 유진의 성격변화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이것이 두 번째 문제였다. 악에 눈을 떠서 생각은 엄청 많이 하는데도 사고 회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그렇게 흐름에서 멈춰버린 유진을 움직여준 것이 절친인 해진과 또 다른 감시자 이모였다. 엄마의 행방과 실종을 의심하는 두 사람 덕에 바퀴 빠진 스토리가 어떻게든 굴러간다. 유진의 진실과 마주하여 머리가 하얘지는 이모와, 슬픔과 분노가 들끓는 해진. 결국 두 사람도 유진에게 죽는다. 다만 해진을 죽게 한건 악감정으로 비롯된 게 아니어서 더 난감했다. 이렇게 감정이 많은 주인공이 상위 1% 사이코패스라니, 내 감정은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하는 거요?


엄마가 써오던 일기장을 발견하면서 수많은 의문이 차례차례 풀려나간다. 엄마의 삼엄한 감시와, 수영을 그만두게 한 이유와, 자신이 먹던 약의 정체, 엄마와 이모의 관계 등등. 그리고 아빠와 형의 죽음에 대한 기록으로 이야기는 절정을 찍는다. 형이 절벽에서 바다로 떨어지고, 형을 구하려던 아빠까지 죽었던 그날. 유진이 형을 밀어서 죽인 것으로 오해 한 엄마는 그에게 분노를 품고서 차갑게 대해왔던 것이다. 엄마의 태도가 겨우 납득이 된 주인공은 생각한다. 나를 보통 자식처럼 키워줬다면 지금의 악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근데 이 대목에서 독자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일기장에는 유진의 잠재된 악이 싹트고 있다는 게 여러 번 증명돼있었다. 따라서 멀쩡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악마가 된 건 아닌데, 작가가 계속 그쪽 길로 가려고 해서 뜯어말리고 싶더라. 중전마마, 뜻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런 일인칭시점의 소설들은 흐름도 시각도 제한되어있어 지루하거나 갑갑한 인상을 준다. 주인공들도 대부분 정상인이 아닌 데다 회상씬도 많아서 때로는 인내심 테스트하는 기분도 든다. 그렇지만 이런 플롯의 작품성은 작가가 직접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글을 썼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혹자는 문체의 부자연스러움을 지적하는데 글쎄, 오히려 난 그것이 더 현장감 있고 좋았다. 확실히 이 책의 문체는 부자연스럽지만 그래서 더 불안정한 유진의 정신 상태를 볼 수 있지 않았나 한다. 악에 근접하기 위해 사이코패스에 빙의되어 쓴 글이라고 생각해본다면 문체나 문법의 부자연스러움도 하나의 기교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정유정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암튼 정유정의 글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편인데 그래도 나랑은 잘 맞는 편이다. 여러 리뷰들을 종합해본 결과 이 책이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는 부실한 악의 통찰이다. 어쩌면 독자들이 원한 건 단순한 사이코패스의 심리가 아니라 악이 탄생하게 된 기원이나 유래를 보고 싶어 했던 게 아닌가 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제목부터가 기원이니까. 선이 악으로 바뀌는 과정이 궁금했는데 날 때부터 포식자 DNA가 있었다는 설정에 김이 새 버렸다. 우유만 빨던 사자 새끼가 커서 사냥 본능에 눈뜨는 건 당연한 건데 여기에 별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것처럼 원래부터 포식자였던 주인공의 살인은 당연해 보였고, 이 과정에서 악의 기원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 대목에서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별점 테러를 한 게 아닌가 싶은데, 차라리 억눌려왔던 분노를 포효하는 괴물로 변했다면 어땠을까나? 이것저것 코멘트를 달긴 했지만 재밌게 잘 읽었답니다. 갑자기 급 포장하는 느낌이 든다면 기분 탓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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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9-10-05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이 태어나는 배경을 다룬 작품이라는 설명에 <프랑켄슈타인>이 생각났습니다.
정유정의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입장은 되지 못하지만 물감님의 리뷰로 대략 유추해봅니다. 나를 보통 자식처럼 키워줬다면 지금의 악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유진의 생각과, 날 때부터 포식자 DNA가 있었다는 설정은 정반대의 접근 방식이라 여기에서 독자들의 혼란이 오는 것 같습니다. 전자는 성선설의 관점이고, 후자는 성악설의 관점인 것 같아서요.
<프랑켄슈타인>과 비교해본다면 주제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메리 셸리의 관점은 성선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괴물의 상황이 이해되고 연민이 느껴졌거든요.

다양한 학생들을 접하면서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하여 가끔 생각해보거든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야비한 기질은 타고 난다‘는 성악설에 가깝지만 아직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습니다.^^

물감 2019-10-05 09:48   좋아요 0 | URL
정확하게 설명은 못해도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느낀 독자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캐릭터 설정붕괴에서 찾았구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같은 경우, 각성하게된 발단이 완벽했죠. 누가 봐도 이해되니까요. 이 책의 주인공이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였다면 큰 논란도 없었을거에요. 사패를 완벽히 이해한다는건 불가능한 영역일테니까요. 여튼 설정만 잘잡았으면 퍼펙트한 소설이었습니다ㅋㅋ

별의별 학생들을 어떻게 이끌어가시는건지 참 대단하세요. 말씀하신 그런 기질들도 타고나는게 맞는건지도 모르겠어요^^;

나비종 2019-10-05 10:1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캐릭터 설정^^ 소설이 다큐는 아니니까 극한으로 몰고 가도 되었을 뻔했습니다. 세상에는 소설 속 캐릭터로 생각될만큼 비현실적 인물들도 차고 넘치는 것 같거든요. 진정 인간의 종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괴한 영혼들이 많잖아요.ㅎㅎ 문학작품의 장점을 마음껏 활용하지 못하셨나 봅니다. 어차피 주제가 뚜렷하다면 독자들은 작품을 통해서 나름의 해석으로 접근했을텐데 말이죠.

과연 별의별 학생들을 이.끌.어.가.는 걸까요. 요즘 헷갈리고 있다는 ㅋㅋ

물감 2019-10-05 11:24   좋아요 1 | URL
ㅎㅎㅎ고생하십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자주 접하시니 관찰력도 자연히 생기겠네요. 모쪼록 끌려가지만 마세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