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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나와 조금도 겹치지 않는 소설 속 인물에게도 몰입과 공감이 가능한 것은, 그 안에서 내 것과 닮은 구석을 어떻게든 발견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각각 살아온 독자마다 ‘이건 마치 내 얘기‘라고 자신 있게 말들 한다. 그런 이유로 <모스크바의 신사> 또한 나님이 줄곧 느껴오던 감정들과 겹친 부분 위주로 공감하며 읽었음을 밝혀둔다.
이 블로그는 내가 중학생이던 2004년 7월 17일에 개설했으며, 2015년부터 독서 기록과 일기 쓰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활동해오고 있다. 블로그에 썼던 최초의 일기가 뭐였냐면, 사라져 가는 것들에게 애도를 표한다는 내용이었다. 언젠가 어느 리뷰에도 적었듯이, 우리 또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거쳐 스마트 시대까지 경험한 복받은 세대지만 또 그만큼 격변하는 세상에 혼란을 겪은 세대이기도 하다. 아무튼 신문물에 대한 설렘과 즐거움도 실컷 누렸던 반면,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구닥다리로 전락해버린 문화와 시절들을 붙잡지도 못하는 현실에 참 많이도 씁쓸했었다. 사람, 물건, 시대. 그 무엇이든지 있을 때는 고마운 줄 모르다가 꼭 추억 너머로 떠나간 후에야 알아차리게 된다. 불평 가득했던 그때가 좋았었다는 사실들을.
지금의 현대인들은 유행과 트렌드에 발맞추지 못하는 스스로를 도태되었다고 느낀다. 너도나도 그러고 있으니 듣다 보면 정말 그런가, 하게 된다. 사실 뒤처졌다 한들 살아가는 데에 아무 지장도 없지만, 행여 스스로가 화석처럼 느껴지면 그만 물러나야 할 때를 찬찬히 굽어보게 된다. 집안과 민족 대대로 이어지던 고유의 문화와 정신들은 어느덧 한 세대도 버티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 신세대와 첨단 문화의 출몰 속에서 홀로 남겨질 때마다 나는 내가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창 국가의 경제활동을 담당하는 30대 남성인 나는 정녕 옛사람인 걸까. 그저 구시대의 낡아빠진 잔재인 걸까. 미처 신세계에 적응하기도 전에 또 다른 세상이 열리길 반복하니, 점점 배움을 포기하며 있는 것들이나 잘 간수하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절대 변하지 않을 가치들에만 집중하자는 생각과 함께. 그러나 야속한 세월은 가치의 영원함 따윈 없다는 사실을 자꾸만 일깨워 준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고립되지 않으려면, 삶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꼭 그래야만 한다. 그러니까 기왕 화석 소리 들을 거면 가치 있는 화석이 되자는 말이다. 지금껏 주절거린 말들이 <모스크바의 신사>의 주인공을 보며 느낀 나님의 감정들이다. 러시아 귀족 가문의 백작인 로스토프는 어떤 사건으로 M호텔에 가택 연금 처벌을 받는다. 외부로만 나가지 않는다면 호텔 안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지내도 된다는 조건이다. 700쪽이 넘는 분량을 호텔 에피소드로만 채웠다 생각하니 뭔가 숨이 막혀왔지만 예상과 다르게 재미도 있고 진도마저 빠른 편이었다. 작중 배경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러시아 혁명과 함께 한다. 주인공의 거처인 최고급 M호텔에는 다양한 VIP와 유명 인사와 내빈들이 들락날락하였고, 그들 덕분에 갇혀살면서도 백작은 세간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분량만큼이나 화두가 많았는데 이번 평에는 ‘세대교체‘에 관해서만 적어보려 한다.
로스토프 백작은 귀족답게 교양, 문화, 사교, 여행 등 여러 가지를 누리고 경험하였다. 허나 호텔에 갇힌 후로는 경험 습득 및 지식 탐구가 제한되다 보니, 여태까지 배웠던 것들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된다. 곧이어 바깥세상의 변화는 호텔 내부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백작과 호텔 직원들은 억압과 제재 앞에 굴종해야 했다. 볼셰비키부터 레닌과 스탈린까지, 혼돈의 시간을 거쳐 온 러시아는 더 이상 백작이 기억하는 아름답고 우아한 조국이 아니었다. 남들이야 변화의 바람에 미리 대비하고 적응할 테지만, 우물 안 개구리는 조짐을 감지하는 것조차 느렸더랬다. 한때는 각종 유행의 선두주자였던 그가, 이제는 비주류의 맨 끝자락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물론 백작은 상황과 여건에 굴하지 않고 프로귀족꾼의 노련미를 보여주었다. 뼛속까지 신사였던 그에게서 한치의 흐트러짐도 볼 수 없었지만, 내 눈에는 백작의 웃고 떠드는 장면들마저도 슬퍼 보였다. 바깥세상은 날로 새로와지건만 자신은 이대로 성장을 멈춘 채 살아가려니, 이 얼마나 비참한가. 똑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데도 홀로 남겨진듯한 그 묘한 기분. 바로 내 얘기였다.
백작은 꼬마 숙녀 니나를 통해서 차세대의 발전 가능성을 관찰한다. 이 신인류는 뭐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고, 직접 보고 겪고 검증해야만 속이 풀리는 별종이었다. 총명했던 꼬마는 점점 시니컬한 어른이 되었고, 혁명의 뜻을 받들어 호텔 밖으로 떠나간다. 그리고 수년 뒤, 백작을 찾아와 자기 딸을 좀 맡아달라 하고 사라진다. 졸지에 애 아빠가 된 백작의 인생 2막은 의외로 행복 그 자체였다. 소피야는 엄마를 닮아 똑소리 나는 아이였고, 엄마보다 온화하여 잔뜩 사랑받고 자라난다. 그렇게 백작은 자신과 전혀 다른 니나, 그리고 니나와 딴판인 소피야를 보면서 신선함과 동시에 불편함을 느낀다. 하나부터 열까지 남달랐던 차세대들의 사고방식을 마냥 환영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다 문득 닫힌 마음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너는 네 방식의 삶에 굳어져 버린 건 아니냐고(381p). 각종 지식과 경험이 풍부했던 백작은 감금생활 중에도 나름대로 삶의 질문을 잘 해결해왔다. 하지만 그 모두가 저만 신뢰하는 옛 방식들을 고집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과거 백작은 언제나 마음을 열고 무엇이든지 배우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배움은커녕 내 가진 것이 최고인 양 자부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이 같은 백작의 현타를 볼 때마다 발전을 포기해버린 내 지난날들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 당장은 편하겠지만, 멀리 놓고 본다면 그 반대이다. 시곗바늘이 잘 돌아가려면 귀찮더라도 태엽을 자꾸 감아주어야 했거늘.
러시아의 전통과 문화양식들이 하나둘씩 훼손될 때마다 백작은 제 살점이 뜯겨나간 것처럼 한탄하였다. 뿐만 아니라 삶에 빠져서는 아니 될 가치와 정신의 변질에도 그러했다. 나와 백작처럼 옛것을 버리지 못하고 새것을 반기지 못하는 유형의 공통점은, 본질의 무너짐을 견디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사람마다 다를 텐데 내가 생각하는 본질이란, 편법이나 꼼수를 부리지 않는 무엇이어야 한다. 또 그렇다 해서 정직과 충의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뭐,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듣는 사람이 있겠지. 다시 나의 첫 일기 내용으로 돌아오자면, 떠나간 것들을 추모한답시고 새로움을 거부하는 태도는 틀려먹었단 사실을 배웠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차마 놓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놓아 주게 되었달까. 막상 이렇게 리뷰를 쓰고 보니 만인의 즐거운 세상을 또 나만 쓸쓸히 보고 있었구나 싶어진다. 이런 나 자신이 제정신은 아니라고 생각한 지도 참 오래됐다. 그러나 이제는 배움을 추구하고, 세상의 변화를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는 중이다. 백작이 니나와 소피야의 가능성을 끝내 인정해 주었듯이.
이 밖에도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작품인데, 일일이 다뤘다가는 끝이 없을 듯하다. 헌데 미국인 작가가 어째서 러시아 배경의 이야기를 다룬 걸까나. 나의 짧은 지식으로 온전히 음미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즐거웠던 작품으로써 당신도 꼭 읽어보길 바란다. 그나저나 백작이 몽테뉴를 자주 언급해서 아무래도 <수상록>을 읽어보긴 해야겠더라. 거참, 산 넘어 산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