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여자, 작희 - 교유서가 소설
고은규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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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관심사가 전부 떨어져 나가고 이제 남은 취미라곤 독서와 글쓰기뿐이다. 글쓰기는커녕 독서조차 하지 않던 내가 어쩌다 10년이 넘도록 글쟁이로 살아가고 있을까. 나의 첫 시작은,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답답한 속내를 블로그에 쓰면서부터였다. 그렇게라도 해서 속이 후련해지고 다시 스트레스받고 일기에 하소연하기를 반복하면서, 나도 모르게 글쓰기에 지친 몸과 정신을 기대고 있었다. 피할 곳이 생기자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 같은 입장인 타인의 글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심신안정을 위한 에세이와 산문집을 찾아 읽으며 자연스레 독서까지 하게 됐다. 또 내가 읽은 책을 남들은 어떻게 평했는지도 궁금해서 리뷰를 찾아다녔고, 어느새 그들처럼 내 감정과 생각들을 자유롭게 끄집어내고 싶었고, 나의 글로 누군가에게 공감과 위로와 재미와 정보를 주고 싶어졌다. 치유의 글쓰기로 출발하여 건강한 사유에 도달한 지금은 숨 쉬듯 당연하게 읽고 쓰고 있으며, 가만두어도 증식하는 생각들을 독서로 정돈하여 배출해낼 뿐이다. 어느 이웃에게도 했던 얘기인데, 생각이 고여있지 않고 어디론가 흘러가야 운동에너지를 갖는 법이므로, 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쳇바퀴를 굴려야만 하는 것이다.


블로그나 sns가 활성화되고부터 글쓰기의 대중화가 된 것은 환영하지만, 반대로 진지한 태도의 글쟁이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물론 글쓰기가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시간에 자기 계발 하나라도 더 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 할 말은 없다만, 현재 대한민국은 정서적으로 너무 병들어있다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가. 이 얘기는 10년 전에도 지적했었고, 그전에도 누군가가 계속해왔던 말이다. 나는 그것을 교양 문제로 보았는데, 갖가지 활동도 좋지만 기초적인 베이스는 역시 독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글도 쓰고 토론까지 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혹자는 그런 게 밥 먹여주냐고 할 텐데, 아무런 영양가도 없다면 그런 문화를 지양하는 이들은 뭐 바보라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겠는가. 현대인들은 달과 6펜스 중에서 어느 한쪽만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둘 다 가져가도 된다. 다만 우선순위가 다를 뿐인데, 흔히 돈을 좇지 말고 돈이 쫓아오게 만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는 이 말에도 뭐가 우선인지를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에 관한 담론은 언제나 즐겁고 흥미롭다. 이번에 읽은 소설이 글 쓰는 여자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보니 앞서 잡설이 길었다. 창작자를 방해하는 귀신이 들러붙는다는 업계의 소문이 돌았다. 늦깎이 작가 은섬은 하도 글이 안 써져 ‘작가 전문 퇴마사‘를 찾아간다. 퇴마사는 그녀에게 붙어있는 잡귀 둘을 설명했고, 99일간 퇴마 방침에 따를 것을 권한다. 잡귀의 이름은 작희와 그녀의 어머니 중숙이었는데, 마침 은섬은 큰아버지가 건네준 일제강점기 시절에 쓴 이작희의 일기와, 오 작가의 미발표 초고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오호라, 일기의 주인께서 귀신 되어 직접 행차하신 거로군. 그렇담 무엇이 원통하여 자신의 창작을 방해하는지를 알아볼 차례다. 이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데, 미리 말하자면 현재 시점에서는 딱히 건질만한 게 없었다. 그런고로 과거의 내용만 다루겠다.


아들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중숙. 억지 결혼으로 학업이 중단되었지만 밤마다 글 쓰는 기쁨으로 아픔을 달래곤 했다. 이후 태어난 딸도 어미를 따라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고, 책방을 운영하면서 모녀는 소박한 행복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자기가 좋아서 글을 쓰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현실 도피 수단에 가까웠을 것이다. 글쓰기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나만이 아는 세계가 있다고 대답한 것을 보면 말이다. 모녀는 서로의 글을 보여주고 비평하며 창작의 세계를 낙으로 삼았다. 싸돌아다니는 남편과 적대적인 시댁들 가운데 오 작가가 등장하여 모녀의 삶에 가느다란 활력소가 되어준다. 그러다 중숙이 세상을 떠나고 홀로된 작희가 책방을 지키다 오 작가와 눈이 맞는다. 한편 곳곳에서 연재 마감의 압박을 받던 오 작가는 작희의 투고 작을 도둑질하여 제 것인 양 세상에 내놓는다. 억울함을 호소해 본들 아무도 그녀를 알아주지 않았고, 사고로 오른손을 다쳐서 작가의 꿈마저 물거품이 된 상황. 마치 글 쓰는 여성의 앞길을 온 세상이 작정하고 막아서려는 듯했다.


다시 현대로 돌아와, 은섬은 이제라도 오 작가의 행패를 밝히기로 한다. 말없이 사라져간 옛 여성 작가들의 원한을 풀려면 현재의 오류들을 바로잡아야 했다. 마침내 귀신들은 물러가고 퇴마는 무사히 끝이 난다. 솔직히 테마가 너무 뻔해서 쏘쏘했었는데, 이 사회가 짜고 치는 도박 판이었음을 고발한 데에서 마음이 움직였다. 따라서 여성의 서사이지만 넓게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자유의 개념조차 없었던 1세대의 중숙, 자유를 억압당한 2세대의 작희, 해방의 갈림길에 들어선 3세대의 은섬. 시대와 입장이 다른 여성 작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나 평등한 자유보다도 ‘존재의 증명‘이 아니었을까. 가족과 남자와 사회에게 가려져있던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더 나아가 인정받게 되는 것, 그러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욕구와 자아실현을 항해 여성들도 힘껏 외치는 시대가 되었다. 매우 바람직하지만 간혹 상황 파악 못하고 제 생각만을 내뱉는 무리들이 그동안의 수고와 노력을 헛되게 만들어버린다. 하여 극단적 우월주의가 아닌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야 할 텐데, 더이상 대한민국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게 지금 내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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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코퍼필드 동서문화사 월드북 138
찰스 디킨스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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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 벼르고 있었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겨우 독파했다. 벽돌 책이지만 가독성도 좋고 몰입감 또한 대단해서 겁먹을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디킨스의 자전소설로써, 그가 가장 사랑했다던 이 작품은 정말 어느 한 장면도 지루한 구석이 없는 명작 중에 명작이다. 그 시대의 수많은 소설가들이 억지로 글자 수를 늘려서 작품을 루즈하게 만들었던 점을 생각해 본다면 디킨스는 타고난 재주꾼이 틀림없다. 그보다도 읽으면서 동화같이 투명하고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소설인 것도 그렇지만 독자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려는 디킨스의 성향 때문이었을 듯.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당대 평론가들의 의견대로 이렇다 할 화두가 없어서 통속 소설로 취급했다가 나중에 가서 그 진가를 인정받았단다. 결국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인가.


책 뒤쪽에는 디킨스의 생애에 관해 100장 넘게 적혀있는데, 쭉 살펴보면 이 작품이 정말 자전소설이 맞나 싶기도 하다. 아무리 봐도 코퍼필드가 디킨스를 닮았다는 생각이 안 들던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깐. 중산층 가정의 도련님 코퍼필드는 모친의 재혼으로 불행 열차에 탑승한다. 의붓아버지와 그의 누이는 주인공 모자를 맘대로 요리하였고, 코퍼필드를 질 나쁜 기숙학교로 멀리 보내버렸다. 그러다 모친의 장례를 치른 코퍼필드는 이제 학생이 아닌 노동자로 살아간다. 실제 디킨스는 어려서 부모와 사별하진 않았으나 집안이 파산하면서 일찍이 공장을 다녔다고 하니, 이만하면 하드코어 인생이라 볼 수 있겠다. 그처럼 코퍼필드에게도 험난한 가시밭길이 주어지는데, 정작 디킨스는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덤덤하게 써 내려간다. 진정 프로답다.


일터에서 도망친 꼬마는 유일한 혈육인 대고모를 찾아간다. 작품 전체를 통틀어 이 구간이 베스트였는데, 어린 친구가 절망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어찌나 짠하던지. 한 성깔 하시는 대고모였지만 조카의 성품을 보고 양자로 삼아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한다. 그렇게 학업과 생활이 안정되자 코퍼필드의 진가가 날로 드러난다. 일찍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은 터라 또래들보다 훨씬 의젓하고 성숙하고 거기다 총명하기까지 했으니 주변에서 이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그야말로 엄친아 도련님의 재탄생이었다. 인생을 실전으로 배운 소년의 세계관은 점점 확장되어 다양한 이웃들과 친분을 쌓는다. 그리고 대고모의 뜻을 받아 법률인이 되기로 한다. 모든 게 잘 풀리다 보니 작품 초반의 우여곡절에 비하면 텐션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앞으로도 많은 허들이 설치돼있으나 내게는 코퍼필드의 유년 시절이 가장 인상 깊었다.


소년은 제 또래의 소녀가 있는 변호사의 집에서 하숙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만난 여사친이 평생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다. 그녀는 연애 상담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는데, 먼 훗날 코퍼필드가 그녀에게 빠진다는 뻔한 클리셰가 있지만 좋게 넘어가자. 어느덧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하여 자취남이 된 주인공. 그 기념으로 나선 여행 중에 반가운 옛 친구 S와 조우한다. 질 나쁜 학교에서 인기 원탑이었던 S는 코퍼필드를 챙겨준 은인이었다. 하여 가는 곳마다 제 친구를 자랑하고 다녔던 주인공은 어마 무시하게 뒤통수를 맞게 된다. 그가 한때 사랑했던, 지금은 누군가와 결혼을 앞둔 짝녀를 S가 데리고 튀었단다. 이 사건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샀고, 코퍼필드의 순수에 비로소 때가 묻기 시작한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잘 먹히는 건 사랑과 전쟁이로군.


그 사건을 뒤로한 채 사회생활에 집중하는 주인공. 이윽고 여사친을 통해 또 다른 배드뉴스를 듣는다. 변호사 아빠의 밑에 있던 서기가 약점을 쥐고서 동업을 요구했단다. 모녀를 쥐락펴락해대는 서기가 실상 대표자나 다름없었고, 주종 관계가 바뀐 상태로 모녀는 그렇게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코퍼필드가 손쓸 방법도 없는 데다 여사친도 그냥 모른 척해달라고 하니 별 수 있나. 한편 주인공은 직장 상사의 딸에게 반하여 매달리다가 결혼에 골인한다. 헌데 살림은 관심 없고 놀며 즐기는 게 전부인 철부지 아내였다. 몇 번의 시도로 기대를 접고 가정의 평화를 택했으나, 힘들 때에 의지할 곳이 없던 그의 우울함은 남몰래 익어가고 있었다. 잡념을 지울 생각인지 낮에도 일하고 집에 와서도 글을 쓰기 시작한 코퍼필드. 물론 가계를 위함도 있지만, 현실 도피의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하다 보니 자신의 재능도 발견하게 되고. 실제로 디킨스가 변호사 사무실에 다녔고 신문기자로 활동하는 등 일에만 몰두하다가 현타가 와서 저술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단다. 아무튼 먹고사는 게 해결되고 나니 이때다 하고 날아드는 시련들에, 역시 인생은 실전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어찌어찌해서 여사친의 문제도 해결되고, S의 도주 사건도 정리되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나 싶더니, 철부지 아내가 병마 끝에 세상을 떠난다. 어쩜 이렇게 산 넘어 산인 걸까. 주변을 다 정리하고 외국으로 떠난 코퍼필드는 요양 중에 쓴 소설로 명성을 얻게 된다. 작가로서 인정받은 그의 상처는 아물었고, 다시 귀국하여 여사친과 재혼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보다시피 이 작품은 많은 굴곡을 정직과 인내로써 이겨내는 착하디착한 소설이다. 단 한 번의 변화구도 없이 직구로만 승부하기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 평이 갈리는 편이지만, 등장인물마다 제 역할에 100% 충실했다는 점에서 나는 후한 점수를 주었다. 문학이 인간을 들여다보게 하는 수단임을 생각해 볼 때에,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그 기능을 훌륭하게 해냈다고 본다. 사실 자전소설이 지니는 화두나 교훈들은 다 거기서 거기이므로 괜히 뭔가를 끄집어내고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두꺼운 책들은 꼭 없어도 그만인 구간들이 많다고 입버릇처럼 투덜거렸는데, 이 작품에는 그런 구간이 일절 없었는데다 감정 개입하지 않고 끝까지 차분함을 보여준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돈키호테> 이후로 만족스러웠던 벽돌 책 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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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1-19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돈키호테 이후로!저도 읽어봐야겠어요.
근데 동서문화사판으로 읽었군요. 가성비가 좋긴하죠?
이게 보통 두 세 권인데 그걸 감안하면 비싼 건 아닌데 말이죠.
근데 천 페이지 넘는 걸 어찌 다 읽으셨습니까? ㅠ

물감 2024-11-20 08:48   좋아요 2 | URL
엄청난 페이지터너 였습니다. 디킨스가 글을 잘 쓰긴 하네요 ㅎㅎ
저도 분권을 싫어해서 이거 고른건데 번역도 훌륭하고 오탈자도 거의 없었어요. 동서문화사 짱짱맨! 아 요즘 진득하게 글 쓸 시간이 잘 안나서 일부러 벽돌책 골랐습니다. 1년에 한두 권정도는 벽돌책 뽀개기 하려고요 ㅎㅎㅎ

자목련 2024-11-20 1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1120쪽! 어마어마하네요.
저는 요즘 500쪽만 넘어가도 힘들어요 ㅠ.ㅠ

물감 2024-11-20 20:50   좋아요 0 | URL
자목련 님은 다독하시니까 그게 그거라고 생각됩니다만, 힘들다고 느끼시는건 리뷰의 부담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ㅋㅋㅋ
 
버마 시절 열린책들 세계문학 103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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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첫 장편소설인 <버마 시절>을 읽었다. 재미와 몰입감이 정말 대단하시더군. 출간 당시 막 서른을 넘긴 나이로써 생각보다 좀 늦은 감이 있는데 그래서인가, 작정하고 정치 소설을 쓰겠다는 인상을 여러 번 받았더랬다. 양측 간에 갈라치기 해대는 오늘날의 정치 기사들만 보다가 오웰의 글을 읽었더니 바보들의 행진에서 빠져나온듯한 기분이 든다. 오웰의 정치적 비판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세계를 향하고 있다. 무조건 내가 옳고 당신네들은 틀렸다는 식의 현대인들과는 사뭇 다른 입장이다. 오웰은 중립보다도 철저하게 세력 싸움을 일으켜 끝장을 보는 스타일인데, 다소 야만적인 이 방식에서 그의 영리함이 드러난다. 잘 살펴보면 오웰은 정반합 및 변증법 사고를 써서 현 정책과 방침을 양날의 검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승자와 패자가 없는 결말, 즉 너 죽고 나 죽자는 진흙탕 싸움이 되고 말 것을 경고하는 식이다.


<버마 시절>은 오웰이 20대 때 버마 지역에서 경찰로 근무하던 경험을 토대로 썼단다. 이것은 식민지인 버마 원주민을 지배하는 영국 관리들의 이야기이다. 열명 남짓의 영국인들은 관할별로 원주민들을 통치하며 지루하게 살아간다. 뼛속까지 제국주의인 이들 가운데 원주민과 공생관계를 이어가는 플로리의 애매한 수난이 펼쳐진다. 영국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며 동료들에게 비난을 사고, 원주민들도 다른 영국인들보다 플로리를 만만하게 여기곤 하였다. 원주민을 가축으로 대하는 제국주의를 반대하지만 본인의 입장도 있고 해서 늘 어중간한 태도로 일관하는 주인공. 그러나 이 생활도 더는 못 해먹겠다 싶을 때쯤 뿅 하고 나타난 젊은 영국 여인 앞에 도파민이 과다 분비하는 그의 인생 2막이 시작된다.


주인공에게 호감을 느낀 그녀는 그를 따라 곳곳을 동행한다. 헌데 이 남자는 저 미개한 원주민들과 동양의 문화를 왜 자꾸만 치켜세우는 것일까. 플로리는 혹시라도 자신과 결혼하게 될 그녀가 이곳에 애정을 갖게 하자는 속셈이었다. 저가 돌연변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주인공은 결국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고, 적당한 남편감을 찾지 못한 그녀는 훤칠한 헌병 하나가 등장하자 잽싸게 노선을 변경한다. 검둥이들의 반란이 날 거라는 풍문으로 파견된 헌병은 그녀와의 만남으로 시간을 때웠고, 이에 위축된 주인공은 전보다 더 삶의 의미를 잃어갔다. 한편 출세에 눈먼 현지인 하급 판사가 일으킨 원주민 폭동으로 영국인 관리들은 위기에 처한다. 여기서 판사가 폭동을 막아 공을 세울 계획이었는데, 하필 플로리가 나서서 사태를 해결해버린다. 제대로 물먹은 판사는 타깃을 바꿔서 주인공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린다. 하, 진짜 미친듯한 빌드업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역시 영국인들이 옳았다고 할지 모른다. 저 통제불능의 짐승들한테는 매가 약이라면서. 그런데 식민주의의 억압 속에 자라난 적개심의 원인 제공을 누가 해왔던가. 그들 위에 군림하며 신사 놀음을 즐기는 게 다인 그 정책의 어디를 대체 옹호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오웰이 버마에 근무하던 시기에도 분위기가 험악했다고 한다. 이에 회의감을 느꼈을 그는 자신들의 정치 이념이 어떻게 파멸로 이어질지를 훗날 이 작품으로 그려냈다. 인간이 태어나고 나라가 형성된 이래로 전쟁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왔다. 나와 뜻이 다르다 해서 힘으로 제압해버리는 방식은 오웰이 말하는 진흙탕 싸움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이 좁은 땅덩어리만 해도 얼마나 다양한 세력 싸움이 일어나는가. 다들 내 말이 맞다고만 하지, 상대의 주장은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시대는 갈수록 발전하고 후세대는 날로 똑똑해져 가는데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은 왜 아직도 그대로인가. 그것은 각자의 이념에 어떤 맹점이 있는지 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구멍 난 배를 고칠 것인가, 아니면 배에서 탈출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함께 침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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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의 여행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빛소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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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츠바이크인데 이 분도 작품마다 편차가 좀 있네그려. 내가 생각하는 츠바이크란 사람은 허공에 떠다니는 형용 못할 감정들을 캐치할 줄 아는 재주꾼이다. 물론 그쪽 계열의 작가들이 많긴 하지만 유독 츠바이크를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가 절제의 미학을 지녔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리도 필력이 주 무기인 작가들을 싫어하냐면, 문장 하나에 많은 걸 집어넣느라 글과 글 사이가 온통 여백으로 가득해져서 그렇다. 널따란 공원에 나무가 두세 그루 심어져 있는 모양새랄까. 나무를 관찰하는 재미는 있어도 공원을 둘러보는 맛은 없단 얘기다. 반면에 츠바이크는 유리알 같은 감정선을 그려내면서도 너무 거기에 치중하지 않게끔 적당 선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저번에 서머싯 몸을 가리켜 생태계 교란종이라고 했었는데 츠바이크 또한 마찬가지라 하겠다. 대단혀.


요 책은 중편 두 가지를 묶어놓은 건데, 표제작인 <과거로의 여행>만 리뷰해 보겠다. 아, 다른 하나는 재미없어서 중도 하차했다. 열차 타고 도피하는 두 남녀의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여자는 남편과 사별한 상태이고, 남자는 처자식을 나 몰라라 한 상태이다. 따라서 전형적인 내로남불 이야기되시겠다. 그렇지만 이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나도 모르게 허물을 감싸주고 싶어진달까. 제조업 사장님의 비서가 된 루트비히는 거동이 불편한 사장님의 권고로 그 집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젊은 사모님의 배려와 지원으로 고단한 삶에 큰 위안을 얻는다. 어느 날 사장님의 지시로 장기 해외출장이 확정된 주인공은 그제야 사모님을 향한 자신의 찐 사랑을 깨달아 오열한다. 아픔을 뒤로 한 채 두 사람은 훗날을 기약하며 그렇게 헤어진다. 그래 뭐 해외를 가면 떼부자 된다고 하니까, 또 사장님도 곧 돌아가실 거니까, 복귀만 하면 만사형통 꽃길을 걷게 될 테니 딱 2년만 고생하자는 마음으로 떠난 루트비히. 이윽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세계대전 늬우스. 에헤이.


밀항하려던 그의 계획은 틀어져 버렸다. 현지의 사업을 독립적으로 경영하라는 본사의 연락이 왔고, 완전히 발목이 잡혀버린 주인공은 잡생각을 지우기 위해 밤낮으로 일에만 매달리기 시작한다. 사모님과의 약속을 못 지키자 죽을 맛이었던 그는 일부러 몸과 정신을 혹사시켜야만 했다. 아마도 이쯤에서 많은 군필자들이 공감했지 싶은데, 군대 가서도 자꾸 생각나는 애인 및 전여친 때문에 애써 바쁜 일과를 보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일말상초 정도 되면 군 생활에 적응하면서 애인 생각도 많이 줄어들게 된다. 그처럼 주인공 루트비히도 서서히 사모님을 잊고 딴 여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어쩐지 첫사랑은 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츠바이크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도 같고.


차라리 그대로 묻어두면 좋았을 것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보다 멀고 우정보다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나간다. 그러다 사업차 본국에 갈 일이 생기자 내친김에 사장님 집을 찾아간다. 미망인이 된 사모님이 반겨오자 총각 때의 감수성이 돋아난 그는 다시 예전의 관계를 이어나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본인의 나이 듦과 갖가지 현실적인 문제들로 고민하는 그녀였다. 확실히 츠바이크가 이런 윤리와 욕망의 줄다리기를 잘 한다. 이처럼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서로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 해도 한번 생긴 인연의 끈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살아갈 뿐이지. 깔끔히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씨앗은 마음 밭 어딘가에 심어져 있다가, 희망고문에 불과한 비라도 내리게 되면 저절로 싹을 틔우는 법이다. 혹자는 이것을 순애라고 부르던데, 나는 사랑의 성질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들의 금지된 사랑을 응원할 순 없지만 나쁘다 말할 수도 없었다.


츠바이크의 작품은 막상 읽을 때엔 별 감흥이 없는데, 꼭 리뷰를 쓰면서 수면 아래 있던 감수성이 터져 나온다. 거참 이상하기도 하지. 이이도 교란종이 확실하다니깐. 나름 전쟁 같은 사랑을 치러본 사람으로서 두 번 다신 반복하고 싶지 않은데, 꼭 한 번씩 불꽃같은 사랑 얘기를 읽고 나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그런다. 아마도 옆구리 시린 계절이 다가와서 그런 거겠지. 이래서 집 밖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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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10-31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태계 교란종 ㅋㅋㅋㅋㅋ

물감 2024-10-31 10:14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런 부류가 몇 있지요~

잠자냥 2024-10-31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구리에 이불을 꼭 끼고 읽으십시오~

물감 2024-11-03 17:14   좋아요 0 | URL
그게 좋겠군여.

stella.K 2024-10-3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츠바이크가 위대하긴하군요.
물감님의 과거 한 줄을 흘려놓게도 만드니..ㅋㅋ
맞아요. 이이도 편차가 있는 것 같드라구요.
지금은 거의 읽지 않고 있는데 지난 번에 <연민>을 평점이 좋아서 사 두긴했습니다만
언제 읽을지 모르겠어요.
전 츠바이크 읽은 책 중엔 체스가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발자크 평전까지도
좋은 것 같긴한데 그 다음부턴 왠지 심드렁~

물감 2024-11-03 17:19   좋아요 1 | URL
원래 다작하는 사람들이 좀 들쑥날쑥 하니깐요 ㅋㅋ
<연민>은 품절에다 도서관에도 없는 작품이네요. 읽어볼랬더니.
평전은 됐구 체스이야기나 읽어봐야겠습니다^^

stella.K 2024-11-03 20:17   좋아요 0 | URL
얼마 전까지 알라딘 중고에 딱 한 권 있는 거
제가 싹스리 했죠. 물감님을 위해 냅둘 걸 그랬나요? ㅋㅋ
 
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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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테스 다음으로 유명하다는 스페인 소설가 사폰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4년이 지났다. 나는 그 소식으로 사폰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국내에서도 제법 팬층이 있는지라 계속 관심을 두고는 있었다. 그러다 이제야 대표작인 <바람의 그림자>를 읽고서 왜 대중들이 좋아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다만 늘 그렇듯이 너도나도 빨아재끼는 작품치고 확 만족스러운 경우가 없었던 것처럼 이 작품도 그러했다. 요즘 자주 쓰이는 ‘평균 올려치기‘라는 용어가 딱 생각나더라는.


먼저 팩트 한 가지 짚자면, 이 작품은 스토리가 아닌 분위기로 승부하는 쪽이다. 뭐라도 좋으면 된 거 아니냐 싶지만 막상 읽어보면 이렇다 할 내용은 별로 없고, 또 대부분 과거형 시점이어서 현재의 전개가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느껴진다. 뭔가 바람잡이 MC처럼 애써 분량 채운다는 인상도 받았고. 뭐 그럼에도 고딕+컬트+미스터리한 아우라는 인정해야겠다. 점점 뒷심이 딸리는 게 보여서 별 하나 뺐지만.


소년 다니엘은 부친을 따라 ‘잊힌 책들의 묘지‘를 방문한다. 거기서 발견한 ‘바람의 그림자‘를 챙겨오는데, 운 좋게도 세상에 단 한 권 남은 책이라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 다른 인쇄본들은 전부 회수하거나 파기되었단다. 아무튼 소설에 사로잡힌 소년은 저자인 H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책을 넘기라는 악마의 등장으로 도망친 다니엘은 뭔가 일이 꼬였음을 느끼면서도 제 호기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위험을 감지하고도 강행하는 모습이 주인공답긴 하나 한 번씩 얘도 좀 맞아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친구였다.


다니엘은 웬 거지 아재와 친구가 된다. 의외로 똘똘했던 거지는 소년의 손과 발이 되어 H의 조사를 돕기로 한다. 잘 됐다 싶더니 그 거지를 쫓아다니는 깡패 같은 경감이 나타나 소년까지 위협해댄다. 아니 어째서 이런 거지 같은 일들이 연달아 발생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게 H와 연관된 이유임을 짐작한 다니엘은 마침내 H의 지인들을 만나 인터뷰에 들어간다. 그리고 H의 옛이야기가 차례차례 소개되는데 귀찮으니까 생략하겠다. 쓸려니까 진짜 귀찮네.


H의 지인들은 다니엘이 그와 닮았다는 말을 종종 흘려댔다. 두 사람이 평행이론까진 아니어도 비슷한 구석들이 좀 있긴 했다. 과거 H는 사랑이란 이름의 똥을 밟아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다니엘도 뭐 그 같은 전철을 밟는 중이었다. 아무튼 H의 지독한 러브스토리 가운데 그 깡패 같은 경감이 등장하는데, 듣자 하니 경감의 짝녀를 H가 선수쳤다는 뭐 그런 얘기였다. 그 2~30년 전의 일로 아직도 욱하고 있다는 게 추해 보이기도 한데, H도 다니엘처럼 노답일 때가 꽤 있어서 그런지 이해가 될 것도 같고 참. 아무튼 긴 세월을 거듭한 추격과 복수전으로 끝이 나지만, 그 서늘하고 음산했던 초중반의 분위기는 쏙 들어가고, H의 과거에 밀린 주인공의 날려먹은 분량도 아쉬움이 컸다. 작품성은 좋았지만 방향성이 좀 문제였달까.


사폰이 정말 세르반테스의 뒤를 잇는 스페인 작가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제 겨우 한 작품 읽고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실례겠지만. 일단은 4부작을 다 읽어볼 생각인데 가독성도 좋았지만, 문장보다 서사를 중요시하는 게 내 스타일이라서 그렇다. 돈키호테의 후예인 나님은 어쩌면 스페인에 태어났어야 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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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0-29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선 아쉬운대로 스페인 이름 하나 지어두시죠. ㅎㅎ 저도 이책 읽고 괜찮네 해서 1권 읽을 때 내친김에 천사의 게임을 샀는데 1권 마칠 때쯤 가독성이 떨어져서 이것저것 다 모셔만 두고 있습니다. 다시 붙잡아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많으니 참 병인 것 같습니다. ㅠ

물감 2024-10-30 10:52   좋아요 1 | URL
스페인 식의 이름은 어떻게 지으면 되는지 모르겠네요. 잘만 지으면 닉네임도 바꿀텐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대충 지었어요 ㅋㅋㅋㅋ
1권 초중반의 분위기가 압권이긴 했는데 2권부터는 영 맥을 못추더라고요. 많이 아쉬웠습니다. 솔직하게 별 세개 반이에요. 그래도 대표작인 만큼 읽어볼만 합니다. 다시 한 번 도전해보심이!

stella.K 2024-10-30 11:12   좋아요 1 | URL
헉, 생각은 해 보셨나 봅니다. 이렇게 혼자 웃는 걸 보면. 뭐지? ㅋㅋ 물감이란 닉넴 좋습니다. 그 보다 좋은 것이 아니라면 계속 쓰십시오. ^^

coolcat329 2024-10-29 2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처음 번역되어 나왔을 때, 20년 전인가... 읽었어요. 한 소년과 아버지가 나왔다는 거 빼고 내용은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좀 실망했던 거 같아요. 뭔가를 크게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거죠. ㅎㅎ 분위기로 승부하는 소설 맞는 거 같아요. 뭔가 엄청 있어 보여 굉장히 기대하고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감 2024-10-30 10:56   좋아요 1 | URL
쿨캣님의 실망 포인트를 알 것 같습니다. 독자가 예상하는 (또는 그러길 바라는) 시나리오가 있는데, 영 다른 길로 빠진 것도 그렇고, 그걸 풀어가는 방식도 좀 허탈해요. 이렇게나 빙빙 돌렸으면 그만한 결과물을 내놓았음 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이 작품은 다 읽고도 기억에 남는 게 없달까요. 말 그대로 있어보이기만 했던 작품...

자목련 2024-10-30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읽었는데 분위기는 기억나는데 내용은 기억이....

물감 2024-10-30 10:56   좋아요 0 | URL
그럴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