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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여자, 작희 - 교유서가 소설
고은규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5월
평점 :
이런저런 관심사가 전부 떨어져 나가고 이제 남은 취미라곤 독서와 글쓰기뿐이다. 글쓰기는커녕 독서조차 하지 않던 내가 어쩌다 10년이 넘도록 글쟁이로 살아가고 있을까. 나의 첫 시작은,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답답한 속내를 블로그에 쓰면서부터였다. 그렇게라도 해서 속이 후련해지고 다시 스트레스받고 일기에 하소연하기를 반복하면서, 나도 모르게 글쓰기에 지친 몸과 정신을 기대고 있었다. 피할 곳이 생기자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 같은 입장인 타인의 글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심신안정을 위한 에세이와 산문집을 찾아 읽으며 자연스레 독서까지 하게 됐다. 또 내가 읽은 책을 남들은 어떻게 평했는지도 궁금해서 리뷰를 찾아다녔고, 어느새 그들처럼 내 감정과 생각들을 자유롭게 끄집어내고 싶었고, 나의 글로 누군가에게 공감과 위로와 재미와 정보를 주고 싶어졌다. 치유의 글쓰기로 출발하여 건강한 사유에 도달한 지금은 숨 쉬듯 당연하게 읽고 쓰고 있으며, 가만두어도 증식하는 생각들을 독서로 정돈하여 배출해낼 뿐이다. 어느 이웃에게도 했던 얘기인데, 생각이 고여있지 않고 어디론가 흘러가야 운동에너지를 갖는 법이므로, 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쳇바퀴를 굴려야만 하는 것이다.
블로그나 sns가 활성화되고부터 글쓰기의 대중화가 된 것은 환영하지만, 반대로 진지한 태도의 글쟁이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물론 글쓰기가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시간에 자기 계발 하나라도 더 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 할 말은 없다만, 현재 대한민국은 정서적으로 너무 병들어있다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가. 이 얘기는 10년 전에도 지적했었고, 그전에도 누군가가 계속해왔던 말이다. 나는 그것을 교양 문제로 보았는데, 갖가지 활동도 좋지만 기초적인 베이스는 역시 독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글도 쓰고 토론까지 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혹자는 그런 게 밥 먹여주냐고 할 텐데, 아무런 영양가도 없다면 그런 문화를 지양하는 이들은 뭐 바보라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겠는가. 현대인들은 달과 6펜스 중에서 어느 한쪽만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둘 다 가져가도 된다. 다만 우선순위가 다를 뿐인데, 흔히 돈을 좇지 말고 돈이 쫓아오게 만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는 이 말에도 뭐가 우선인지를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에 관한 담론은 언제나 즐겁고 흥미롭다. 이번에 읽은 소설이 글 쓰는 여자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보니 앞서 잡설이 길었다. 창작자를 방해하는 귀신이 들러붙는다는 업계의 소문이 돌았다. 늦깎이 작가 은섬은 하도 글이 안 써져 ‘작가 전문 퇴마사‘를 찾아간다. 퇴마사는 그녀에게 붙어있는 잡귀 둘을 설명했고, 99일간 퇴마 방침에 따를 것을 권한다. 잡귀의 이름은 작희와 그녀의 어머니 중숙이었는데, 마침 은섬은 큰아버지가 건네준 일제강점기 시절에 쓴 이작희의 일기와, 오 작가의 미발표 초고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오호라, 일기의 주인께서 귀신 되어 직접 행차하신 거로군. 그렇담 무엇이 원통하여 자신의 창작을 방해하는지를 알아볼 차례다. 이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데, 미리 말하자면 현재 시점에서는 딱히 건질만한 게 없었다. 그런고로 과거의 내용만 다루겠다.
아들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중숙. 억지 결혼으로 학업이 중단되었지만 밤마다 글 쓰는 기쁨으로 아픔을 달래곤 했다. 이후 태어난 딸도 어미를 따라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고, 책방을 운영하면서 모녀는 소박한 행복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자기가 좋아서 글을 쓰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현실 도피 수단에 가까웠을 것이다. 글쓰기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나만이 아는 세계가 있다고 대답한 것을 보면 말이다. 모녀는 서로의 글을 보여주고 비평하며 창작의 세계를 낙으로 삼았다. 싸돌아다니는 남편과 적대적인 시댁들 가운데 오 작가가 등장하여 모녀의 삶에 가느다란 활력소가 되어준다. 그러다 중숙이 세상을 떠나고 홀로된 작희가 책방을 지키다 오 작가와 눈이 맞는다. 한편 곳곳에서 연재 마감의 압박을 받던 오 작가는 작희의 투고 작을 도둑질하여 제 것인 양 세상에 내놓는다. 억울함을 호소해 본들 아무도 그녀를 알아주지 않았고, 사고로 오른손을 다쳐서 작가의 꿈마저 물거품이 된 상황. 마치 글 쓰는 여성의 앞길을 온 세상이 작정하고 막아서려는 듯했다.
다시 현대로 돌아와, 은섬은 이제라도 오 작가의 행패를 밝히기로 한다. 말없이 사라져간 옛 여성 작가들의 원한을 풀려면 현재의 오류들을 바로잡아야 했다. 마침내 귀신들은 물러가고 퇴마는 무사히 끝이 난다. 솔직히 테마가 너무 뻔해서 쏘쏘했었는데, 이 사회가 짜고 치는 도박 판이었음을 고발한 데에서 마음이 움직였다. 따라서 여성의 서사이지만 넓게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자유의 개념조차 없었던 1세대의 중숙, 자유를 억압당한 2세대의 작희, 해방의 갈림길에 들어선 3세대의 은섬. 시대와 입장이 다른 여성 작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나 평등한 자유보다도 ‘존재의 증명‘이 아니었을까. 가족과 남자와 사회에게 가려져있던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더 나아가 인정받게 되는 것, 그러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욕구와 자아실현을 항해 여성들도 힘껏 외치는 시대가 되었다. 매우 바람직하지만 간혹 상황 파악 못하고 제 생각만을 내뱉는 무리들이 그동안의 수고와 노력을 헛되게 만들어버린다. 하여 극단적 우월주의가 아닌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야 할 텐데, 더이상 대한민국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게 지금 내 솔직한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