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갈증 페이지터너스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빛소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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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시중에 판매되는 과일음료들의 과즙 함량에 대한 논란이 생각난다. 예를 들어 1000ml 정도 되는 오렌지주스에 들어간 과즙 함량이 겨우 n%인데 이것도 오렌지주스라고 보는 게 맞느냐는 식이었다. 그 논란이 일고부터 과일음료마다 함량이 nn%로 증가해서 더욱 말이 많았더랬다. 명색이 ‘오렌지‘주스인데 오렌지는 거의 없고 기타 혼합 성분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걸 납득하지 못한 소비자들의 분노였다. 물론 음료의 제조 성분과 비율은 식약청의 검수 및 승인 하에 유통되므로 문제랄 것도 없으나, 사람 마음이란 게 논리적이질 못해서 만족할 만한 답을 듣기 전에는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이라는 감정 또한 수많은 복합 성분으로 구성돼있어, 각자가 생각하는 주 성분의 함량이 적다고 느껴질 때 불만이 찾아드는 법이다. 1%의 애정과 99%의 미움+질투+짜증+우울+권태가 무슨 사랑이냐고 할 사람이 있는 반면 또 누군가는 그런 사랑도 존재한다 믿고 잘만 받아들인다. 이제는 인간의 감정 대부분이 해석되었고 생각보다 단순 명료하다고 판명되었으나 사랑의 감정만큼은 여전히 복잡 미묘하여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리고 나님은 이 문제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있어주길 바란다.


일본 고전문학의 마스터피스라 부를만한 <사랑의 갈증>을 읽었다. 옛 일본 작가들이 다 그렇지만, 미시마 유키오도 참 빠지지 않는 감성 변태랄까나. 이성과 본능을 널뛰는 감정의 줄타기가 가히 예술이었다. 특히 인간이라는 존재의 최저점과 최고점을 단번에 훑는 통찰과 기교에 손발 다 들었다. 또, 단편이 가진 미완의 느낌을 싫어하는 내가 푹 빠져읽었다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페이지터너스‘ 시리즈를 쭉 읽어본 바, 기획자의 안목이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된다. 잡담은 이쯤 해 두고, <사랑의 갈증>은 하인을 사모하는 마나님의 불치병을 다루고 있다. 남편 따라 전원생활을 하게 된 차도녀 에쓰코. 외도를 일삼던 남편이 병사하여 시아버지의 비공식 아내가 되기로 한다. 거주 중인 별장에는 남성미 뿜뿜하는 어린 하인이 있는데, 이 친구의 강력한 호르몬이 에쓰코의 여심을 밤낮으로 자극해댔다. 안주인의 체면상 차분한 태도로 일관했지만 다른 가족들에겐 둘도 없는 꿀잼 구경거리였던 것. 허나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하인한테 플러팅 해봤자 소귀에 경 읽기였고, 이에 침착함을 잃은 마나님의 질투력이 갈수록 치솟기 시작한다. 사랑의 총알을 맞고도 어쩜 그렇게 멀쩡할 수가 있느냐면서.


단편소설답게 줄거리는 별거 없지만 장면 장면마다 심리 묘사의 디테일이 엄청나다. 일단 주인공 에쓰코는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감정의 기관들이 멈춘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도시 사람이 시골에 와서인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해서인지 잘은 몰라도 느낌상 원래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로 보인다. 왜 주변에 그런 사람들 한두 명씩 꼭 있잖아. 아무튼, 갑작스러운 병에 걸려 몸져누운 남편을 간병하며 야릇한 쾌감을 맛본 그녀.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을 찾는 남편에게서 우월감을 느끼자, 그 기분에 취하고 싶어서 남편이 죽지 않을 만큼만 간병에 힘쓰는 광기를 보여준다. 끝내 죽은 남편을 화장하던 날, 에쓰코는 내리쬐는 햇빛에 온 마음을 뺏겨버린다.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지금, 햇빛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듯이. 이어서 미망인이 된 자신을 우리 안에 갇혀있다 나온 한 마리의 사자처럼 여겼다. 똑같은 세계라도 야생 사자보다 해방된 사자에게 더 크고 넓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그렇듯 쏟아지는 햇빛들은 남편을 잃은 그녀가 비로소 인간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뒤늦게라도 해방된 삶을 찾아가나 했더니, 먹통이었던 감정기관이 오작동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에쓰코는 슬픔, 가난, 원망 같은 부정의 감정 스위치는 꺼놓고, 행복에 대한 긍정 회로만 돌아가도록 놔두었다. 또, 자기 세뇌에 불과한 그 긍정 에너지가 외부로부터 간섭받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다. 이것을 남편한테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랬겠냐고 1차원적으로 판단해선 안된다. 어째서 저자가 주인공을 우리 밖에 나온 ‘사자‘로 표현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이 다 마비되고 오직 한 가지만 작동한다는 건 기이하다 못해 섬뜩한 일이다. 그녀의 강박적인 긍정의 또 다른 이름은 행복의 결핍인데, 남편의 고통이 길어지는 시간만큼 행복하단 걸로 보아 심연에 삼켜진 괴물이 되리라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알다시피 괴물이 된다는 건 일반적인 이해의 영역을 벗어났음을 뜻한다. 하여 남편과 그의 애인들을 질투하는 듯 보이지만 내 눈에는 질투하는 에쓰코 자신의 모습, 그 역할놀이에 심취해있는 걸로 보였다. (심적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널뛰는 것 또한 남편한테 하도 데여서 맛이 간 게 아니라 갖고 있던 또 다른 페르소나를 꺼냈을 뿐이다. 어느덧 남들처럼 보통날을 보내지만 여전히 잡생각과 자의식에 사로잡혀있는 에쓰코는 남편의 죽음이 선사했던 자극이 그리워졌다. 자신의 심장을 뛰게 했던 그 죽음이 곧 행복이었다는 결론까지 내린다. 이렇게 죽음을 숭배하게 되면 그밖에 모든 삶의 순간들이 시시해져 버린다. 에쓰코가 엄격하게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기대하던 것에 배신당하는 것보다, 오히려 애써 무시했던 것에 배신당할 때 더 깊은 상처를 입는다(108p).』 그래서 에쓰코는 어떠한 것이라도 기다려선 안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남편이 정신 차리고 자신과 가정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지난날의 잘못과 실패를 생각하며, 다음 사랑에게는 제대로 어필하기로 다짐한 그녀. 그래서 하인에게 새 양말을 선물했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게 아닌가. 침착히 대응했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사모하는 대상을 꾸짖을만한 명분이 생긴 것과, 그를 나무라는 과정에서 자신의 우월감으로 기뻐하였다. 그것은 오래전 남편을 간병할 때에 맛보았던 ‘필요악‘이었고, 이제서야 그 필요악이 제 삶의 원동력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된 셈이다. 그녀가 감히 가질 수 없었던 정복욕을 하인에게 느끼자 다시금 자기 세뇌에 가까운 행복 회로를 돌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탈출한 사자는 사냥하는 재미를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서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찾아낸 삶의 의미를 소급함으로써 이 삶의 이중성을 통일하려는 욕망이 우리 삶의 실체라고 한다면, 삶의 보람이란 끊임없이 발현되는 이 통일의 환각, 아직은 소급할 수 없는 생의 의미를 가설적으로 소급해 보는 데서 생기는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의 ‘삶의 보람‘이라는 것은 에쓰코에게는 아무런 인연도 관계도 없는 대상이었다. (117p)

일반 사람들이 삶의 ‘의미‘와 ‘보람‘을 연결 지으려고 애쓰는 반면, 에쓰코는 그 둘을 분리하려고 애를 쓴다. 이런 태도는 의미나 보람 따위는 필요 없다는 패배주의적인 말보다 더 심각하고 위험하다. 문제가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정의를 내려서 편해지고 싶은 게 인간이다. 하다못해 회피형 들도 ‘회피‘라는 정의를 내리는데 말이다. 그런 반면에 우리 마나님은 어떠신가. 페르소나를 번갈아 썼다가 결국 하나 남은 긍정 회로마저 고장 나버리고 말았다. 그 증상은 자신에게 마음 주지 않은 대상을 벌하려는 마음과, 자신도 그 벌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동시에 나타내었다. 그렇게나 죽을 것 같다면 주변에다 도움을 요청해도 될 것을, 왜 혼자 끙끙대고 있는지 이해 못 할 독자들에게 하는 말. 삶의 어려움을 찾아내는 능력, 참 피곤하게 산다고 할만한 이 능력이 반대로 나를 지켜주는 갑옷이었다고(119p).


예의범절이나 사회적 가면 등을 중요시하는 사람일수록 무례하고 오만한 사람들이 눈에 더 잘 들어오는 법이다. 그런 세상 틈바구니에서 나를 보호하려는 결심 속 어딘가에는 나도 저들처럼 천박해지고 싶다는 욕망 또한 존재한다. 품위 있는 신사 숙녀들도 친구들끼리 만나면 욕도 좀 하고 시답잖은 아재개그도 하고 놀지 않나. 에쓰코가 지닌 선악의 공존과 대비도 그런 욕망의 연장선이다. 남들이 생각하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면 차라리 고통으로 결핍을 채우는 편이 더 간단했을 테니. 그녀가 말하는 ‘긍정‘이란 부정 에너지에서 오므로, 행복하려면 자신을 불행 속에 던져 넣어야만 했는데 다 그렇듯 이 모순은 결코 오래 가질 못했다. 마음이 아프다 보면 몸까지 아파지듯, 몸밖으로 새어 나온 통증이 그녀를 무너뜨리고 있었으니까. 그냥 하인한테 가서 속 시원하게 고백하고 차이던가, 아니면 본인이 별장을 떠나버리던가 하지, 왜 그렇게까지 고통에 빠져살려고 할까. 이같이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하는 이들은 미운 오리 새끼처럼 언제까지고 계속 겉돌게끔 돼있다. 한때 그랬었던 나님의 의견을 보태자면, 몸이 멀어져서 마음도 멀어지게 하는 수밖에 없더라.


하인을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을 가족 모두가 알고 있거늘,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애쓰코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렇게나 자의식 과잉이면서 가족들의 시선은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에쓰코를 보노라면 딱한 마음이 들면서도 이 원맨쇼를 언제까지 할 건지 두고 보자는 못돼먹은 생각도 든다. 그녀가 고통에 앓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시아버지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이었지 싶다. 저자는 이 같은 불행을 ‘공범 같은 친밀감‘이라고 표현했다(189p).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쉬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중심리를 이토록 집요하게 건드리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여하튼 자신만의 죽음과 사투 중인 그녀를 좋든 싫든 응원해 주고 싶어졌다. 죽어가는 남편이 살고자 몸부림치던 심정을 또 다른 방식으로 알아가는 중이었으니.


역시 예상한 대로 가질 수 없어 파괴한다는 결말이었다. 괴물이 될 거라던 예상도 적중했다. 뭐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고, 주인공의 결핍이 소유의 감정에서 정복의 감정으로 변이 되었다는 점을 주목해 보자. 술을 먹다 보면 술이 나를 먹는다는 흔한 말이 있다. 그처럼 <사랑의 갈증>에서는 창조한 사랑에 역으로 삼켜진, 위험한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마약 같은 욕망에 정복당한 인생의 불행을 묘사했다. 이 소유의 사랑과 정복의 사랑은, 에쓰코가 끌렸던 ‘빛‘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남편과 지내던 시절에는 햇살 즉 태양빛에 구원을 받았지만, 하인을 덕질하는 지금의 그녀는 불(fire) 빛에 정신을 뺏긴다. 따사로운 태양빛은 맑은 정신을 갖게 하지만, 정신을 홀리는 불빛에 다가갈수록 화상을 입게 된다. 비록 고통스럽긴 해도 그 불행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주므로 끌리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원래 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일수록 악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법이니. 과연 에쓰코의 결핍은 다양한 사랑의 형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까. 고작 n%의 과즙이 들어간 것도 과일주스로 쳐준다면, 나는 광기로 가득한 그녀의 결핍도 사랑이었다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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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스 페이지터너스
그레이엄 그린 지음, 이영아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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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대 혐오의 시대이다. 2010년대 중반에 생겨난 이 현상은 2024년 현재 정점을 찍었다. 익명의 선동가들이 저질러놓은 결과임을 이제는 다들 알지만, 한번 진흙탕 싸움에 중독된 국민들은 살짝만 긁혀도 참지 못하고 분노를 표출해댄다. 대의와 논리를 따지는 자신을 이성적이라 믿겠지만 누구보다도 감정적인 사고와 태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이 ‘혐오‘에 대한 감정이 곧 자신의 열등감 및 욕망과 연관돼있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괜히 꼴 보기 싫고 재수 없다 생각되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무의식의 바램이 역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부를 자랑하는 사람이 싫다면 그는 누구보다 돈을 원하는 사람이며, 인싸를 극혐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인기를 갈망한다는 뜻. 따라서 혐오성 짙은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또 거기에 현혹되는 이들은 자신이 욕하는 대상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기저에 깔려있다는 점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 그랬을 때 서로의 감정은 줄어들고 이성적인 자세와 태도를 유지할 수가 있다.


그러한 분석심리학의 관점으로 흥미롭게 읽은 그레이엄 그린의 <코미디언스>를 소개해 본다. 물론 이 작품이 그런 학문에 기반한 건 아니지만, 주인공의 이유 모를 공허와 짜증에 명쾌한 답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작품 배경은 아이티의 수도인 포르토프랭스이고, 파파 독(프랑수아 뒤발리에)의 독재 정권 시절이다. 내가 아이티의 역사를 몰라서 참고한 자료들에 따르면, 1960년대에 대통령이 된 파파 독이 공산주의자들을 처벌하고, 민병대(통통 마쿠트)를 세워 사회를 감시하고, 미국을 비롯한 타국의 원조를 끊어버리는 등 온갖 폭력과 야만이 지배하는 국가였다고 한다. 이토록 위험한 지역을 수차례 여행하면서까지 작품을 써낸 작가의 패기도 보통은 아닌듯하다. <코미디언스>에서는 아이티의 공포와 병폐를 고발하겠다는 각오로 가득한데, 정작 자신은 저널리스트(특파원)이기를 싫어했다고 하니 고발을 목적으로 쓴 작품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는 말이렸다.


장기 출장을 마친 아이티의 관광호텔 주인 브라운은 귀국하는 화물선에 오른다. 그리고 탑승객인 존스 소령과 정치인 스미스 부부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작중에서 존스는 주인공의 감정 문제를 맡고, 스미스는 아이티 사회의 문제점을 맡은 역할이라 보면 되겠다. 미국의 대선 후보였다던 스미스는 채식주의 센터 설립 목적으로 아이티 장관을 방문하러 가는 길이다. 주인공은 파리 날리는 제 호텔에 부부를 모시고 가이드맨을 자청한다. 그날 밤, 호텔 수영장 바닥에 자살한 시신이 발견되는데, 바로 스미스 부부가 만나려 했던 사회복지부 장관이었다. 괜히 민병대와 엮일까 봐 시신을 먼 곳에 가서 버리고 온 브라운. 이후 장관의 장례식에 참석한 주인공과 스미스 부부는, 민병대원들이 와서 폭력을 행사하며 장관의 시신을 관 채로 뺏어가는 광경을 목격한다. 여기까지가 출판사의 작품 소개인데 몰입감도 그렇지만 분위기가 고딕 스릴러 뺨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축 처질 텐션을 대비해서 카페인이라도 섭취하시는 편이 좋겠다.


사랑으로 인종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었던 스미스 부부의 신념은, 독재 정권의 공포 앞에 휘청이기 시작한다. 부부는 백인 사회에서 지내는 흑인들만 알았지, 흑인 국가, 특히 아이티 같은 독재국가에 대해서는 영 무지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고인의 장례를 방해하고 시신을 훔쳐 가는 야만성이라니? 스미스는 인종을 초월한 자신들의 인류애에 뼈 맞고 배신감을 느낀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스미스를 보면서 브라운은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까. 결국 스미스도 자신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알겠단다. 그럼에도 채식주의 전파와 센터 설립의 목적을 잊지 않았으니, 비관주의의 브라운에게는 이 성자 같은 부부가 얼마나 연구 대상이었을지. 아무튼 평생을 등골 브레이커로 살아온 브라운은 저도 모르게 이들을 지지하고 있었다. 사실 이것부터가 코미디인 게, 허풍쟁이에 사기꾼인 그가 지금 누굴 위하고 무엇을 걱정하냔 말이다.


한편 정치 망명자로 알려진 존스 소령은 민병대에게 도망 다녔고, 스미스 부부와 주인공도 똑같은 백인이라며 욕을 먹는다. 악동 같은 존스를 싫어하는 브라운과 달리 누구나 존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MSG 가득한 그의 자랑들도 형편없었지만, 주위에 피해준다는 자각도 없는 그의 어디가 좋냐는 말이다. 괜히 아니꼬워서 불륜 파트너한테 이상한 프레임과 헛소리들로 꼬투리 잡고 칭얼대는 주인공. 이에 파트너 왈, 현실은 상상처럼 대하고 사실은 죄다 왜곡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를 갖느냐면서. 브라운 스스로도 제 감정이 뭔지를 몰라 하는데 이 관계에 무얼 더 바랄 수 있을까. 버려졌던 자신을 거둬준 수도회를 빠져나와 나쁜 길을 간 과거를 생각하면, 파트너에 대한 브라운의 망상과 투정들도 그러려니 한다. 다만 파트너가 존스를 인간적으로 아주 좋아해서 문제였는데, 이유를 듣자 하니 존스가 자기를 웃게 해준다는 거였다. 존스를 좋아하는 모두의 대답들이 다 그 이유였다. 더 이상 웃을 일이 없는 이 나라에서 유쾌함을 가져다준 단 한 명이 바로 존스였음을 주인공만 깨닫지 못했다.


존스와 브라운은 동족이었다. 사생아에다 뿌리 없이 떠도는 방랑자. 그리고 지금은 흑인 국가에 거주 중인 몇 없는 백인. 그런데 어째서 존스는 망명자임에도 항상 호탕하고 남들과 쉽게 어울리는 것일까. 브라운만이 존스를 끝까지 미워한 것은 동족인 자신과 전혀 다른 태도도 그렇지만, 자신에겐 없는 유머감각 즉 남들을 즐겁게 만드는 재주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현실을 연기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실패한 코미디언이라는 말이 오갔다. 그것은 파트너의 말대로 자기 연민에 빠진 싸구려 인간처럼 보인다는 뜻일까? 분명한 점은 연기하는 게 유리할 때에도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면 코미디언이 아니며, 그런 사람은 존스 소령 하나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존스처럼 솔직하지도 못하고 파트너를 웃게 해주지도 못해 자기혐오에 빠진 주인공. 웃길 수 없는 코미디언이라니, 이 무슨 뜨거운 냉커피 같은 소리더냐. 자, 이쯤이면 매번 연기해서 회피하는 정신승리와, 불편 속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인간승리의 차이를 느꼈을 테다. 브라운이 존스를 혐오하는 감정에서 벗어나려면 그가 가진 유머러스함을 배워야만 한다. 돌아가신 모친의 인생관 또한 코미디를 추구했다는 점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허나 느긋하게 복잡한 감정을 들여다볼 때가 아니었다. 자살한 장관의 조카가 반란군을 모아 쿠데타를 계획하였고, 브라운의 입김으로 존스 또한 참여하게 된다. 집결 장소로 가는 길에서 그는 자신의 허풍들을 낱낱이 브라운에게 고백한다. 그건 그렇고 존스가 어째서 이 쿠데타를 거절하지 않았는지가 의문이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정치 망명자인 자신을 돌봐주고 헛소리에도 웃어준 이들에 대한 의리가 아니었을까. 고기 한 점도 먹기 어려운 나라에 채식주의를 전파하려던 스미스 부부도 존스만큼이나 무모하고 용감했다. 물론 셋 다 실패한 코미디언이 되고 말았지만 희극을 즐기려는 자세가 중요한 게 아니겠나. 브라운처럼 가슴이 텅 빈 채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참 많은데, 각자의 혐오에서 벗어나와 건강한 희로애락을 만끽했으면 한다. 이번 생은 망했다느니 이딴 소리 좀 하지 말고. 글이 길어져 이만 쓰겠는데 무슨 얘긴지 대강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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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들 페이지터너스
에마뉘엘 보브 지음, 최정은 옮김 / 빛소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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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보는 어느 유튜버가 말하길, 싱글로 마흔 즈음 살아보니 삶의 재미와 기쁨은 다 식고 허무만이 남았단다. 결국 삶이라는 건 허무와의 싸움이라고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볼 거 다 해보고 누릴 거 다 누려봤더니 남는 것도 없고, 이젠 뭘 해봐도 자극이 오질 않고,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공허하다는 말이렸다. 나 또한 10대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무슨 얘긴지 아주 잘 안다. 내가 한때는 솔로몬 왕이 쓴 ‘전도서‘를 미친 듯이 읽었거든. 부귀영화와 각종 유희를 누려본 솔로몬 왕은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다 했는데, 그것을 나는 교복 입었을 때부터 고민하며 살아왔다. 하여 허무와 투쟁 중인 이번 작품의 주인공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허무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많이 깨지고 부서지는 것뿐이라고.


에마뉘엘 보브, 처음 듣는 작가인데 2차대전 오기 전까지는 왕성히 활동한 프랑스 작가라는군. 특징이라면 소외된 사람들을 주로 사용했다는 건데, 1800년대의 가난을 묘사했던 에밀 졸라의 뒤를 따라 1900년대의 가난을 담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소외‘가 주 무기인 가즈오 이시구로에 비하면 좀 더 날것에 가깝고, ‘가난‘의 아이콘인 도스토옙스키에 비하면 꽤 순한 맛이었다. 겨우 한 권 읽고서 이렇다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나의 친구들>은 일상으로 복귀한 참전 군인의 짧은 애가이다. 주인공 빅토르는 3개월에 한 번씩 나오는 국가연금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 부상 때문에 직장도 못 구하는데 주변 이웃들은 게을러빠진 무직자라며 비아냥거린다. 차라리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할 만큼 말상대가 필요했던, 순수 우정을 나눌만한 친구 한 명이 절실했던 주인공. 하여 여기저기 말 걸어가며 친구되길 바랐으나 매번 허탕치고 만다.


가볍게 수다를 떨고, 배고플 때 먹고 마시며, 필요하면 서로 돕고 사는 것들. 누군가에겐 평범하다 못해 기본적인 일상의 순간들이 빅토르한테는 낭만이자 꿈과 같은 일들이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벅찬 삶이라면 모를까, 날마다 한가롭다 보니 생각만 많아지고 입은 근질거려 아무라도 붙잡고 싶어지는 거다. 그러나 각박한 사회에서 어떤 접점도 없이 친구를 맺기란 불가하므로, 뭐라도 같이 하면서 감정을 공유했어야 하는데 빅토르에게는 그런 시도가 없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가난 속에 살다가 사춘기 올 즈음에 군복을 입었으니 원만한 대인관계는 당연히 어렵겠지. 거칠고 파괴적인 성격이 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걸. 그러나 저자는 빅토르의 성장 배경보다도 당장의 외로움을 조명한다. 작중에서 다양한 만남이 등장하는데, 빅토르에게 별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로 빅토르 쪽에서 지레짐작으로 선을 그은 때도 많았다. 나 역시 빅토르의 외로움을 가져본 사람인데 이제야 빅토르와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겠다. 자신의 외로움이 누군가에게 떠넘겨져서 해결된다고 믿은 거였다. 설령 그런 의도가 없었다 해도 상대방은 나의 외로움을 책임지고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오해를 사지 않으려면 절실함을 숨겨야만 하는데 그게 어디 쉽냐는 말이지.


내가 이 작품에서 주목한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빅토르가 의외로 여자보다 남자들한테 면역이 없다는 것. 내성적이지만 여자들과 제법 말도 잘 하고 붙임성도 그렇게 나쁘진 않아 보였다. 헌데 남자들과는 이유 불문하고 쩔쩔매는데, 아아, 생각해 보니 이유가 있긴 하다. 그는 애인이 아닌 친구, 그것도 남자인 친구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렇기에 어떤 낯선 남자든 빅토르에게는 절친 후보감이었고, 마음속에선 이미 10년 지기가 되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런 생각들에 사로잡혀있으니 아무리 조심해 봐도 부자연스러운 말과 행동이 나와 끝내는 퇴짜를 맞게 되는 법이다. 오히려 여자들을 대할 때처럼 몸에 힘을 뺐으면 좋았을 텐데, 신기하게도 이 친구는 프로그램이 반대로 설정돼 있더라고?


또 하나는, 부상자인 참전 군인에 대한 주변인들의 인식과 태도이다. 빅토르와 한 건물에 사는 이웃들은, 그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살고 있으며 일을 왜 안 하는지 다 알고 있다. 빅토르가 직접 사정을 말하고 다니므로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의 명예를 알아주진 못할망정 젊은 게 일도 안 구한다며 혐오하고 비하하는 이웃들. 이런 광경이 지금의 한국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놀라웠다. 하이퍼리얼리즘이 뭐 별건가? 이런 게 바로 하이퍼리얼리즘이지.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도 그런 취급을 받는데 소외감이 안 생길 리가 있나. 그러니 이 친구가 매번 뚝딱거리고 과대망상에 빠지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반대로 그를 이렇게 만들고도 나 몰라라 하는 세상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런 걸 보면 총기난사나 칼부림 같은 폭력 범죄가 생기는 것도 이해는 된다.


고독과 외로움이 다르듯이, 허무와 소외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삶이 안정적일수록 치열함은 멀어지고 목표가 사라지면서 의미를 잃게 된다. 앞서 나도 허무와 부딪혀왔다고 말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결핍이라 부르고 싶다. 또한 그 결핍을 채우는 방편으로 호기심을 계속 가져야 한다고 말해본다(그런 뜻에서 결핍을 채운다기 보다 약간 모자란 상태로 두는 게 낫다). 그동안 쾌락과 유희만을 좇았다면 앞으로는 관심사를 학술에 두고서 어느 한 분야에 깊게 파고들 것을 권해본다. 늦게 시작한 공부가 예상외로 자극과 활력을 가져다줄 것이다. 사람은 본업 할 때가 가장 매력 있다는 말도 있던데, 내 관심분야에 열심 내다보면 재미와 멋을 다 가질 수 있고, 결핍도 곧 해결될 것이다. 또 그러다 보면 허무 속에서 삶의 의미도 되찾아진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구원해야만 한다. 빅토르와 과거의 나처럼 외로움을 타인에게 맡기지 말고. 우리의 남은 나날을 권태와 허무 속에 버려두지 말자.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을 ‘사람이 전부다‘라고 해석하는 일은 결코 없길 바라면서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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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12-20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글에 깊이 동감해요.
나이들수록 더 많이 읽고 공부해야겠더라구요. 책이라는 친구가 참 고마운 아침입니다.
저는 이 작가 작품 또 읽고 싶은데 없어서 아쉬워요. ㅠ

물감 2024-12-20 10:49   좋아요 1 | URL
저도 어릴 때는 공부에 영 관심없었다가 다 커서야 공부의 재미를 알아가네요😅 집돌이인 저도 책 덕분에 외로움이 덜합니다ㅎㅎ
꽤 다작하는 분 같던데, 천전히 번역되지 않을까요? 저도 많이 궁금한 작가에요!

stella.K 2024-12-21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햐~ 꽤 공감하면서 읽었을 것 같은데 별은 3개네요.
가즈오 이시구로에 비하면 좀 더 날것에 가깝고, ‘가난‘의 아이콘인
도스토옙스키에 비하면 꽤 순한 맛이라서요? ㅎ
책은 잘 모르겠고 이 리뷰 참 공감하게 만드네요.
저도 그랬어요. 여자 보단 남자를 편하게 느꼈는데 나이 드니까 같은 여자가
낫지 않나 싶기도 하더라구요. 나이들면 이성이 더 이상 매력적이거나
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더라구요. 상대적으로 만날 기회도 많지 않고.ㅋㅋ
물감님 말씀에 백번 공감하기는 하는데 나이들면 이번엔 몸이 안 따라줘요. 생각은 많은데. 그래서 일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하면 좋은데 그땐 물감님처럼 전도서나 읽으면서 똥폼 잡는단 말이죠. ㅎㅎㅎ

물감 2024-12-21 23:04   좋아요 1 | URL
재미는 있는데 좀 평범해요. 막 기승전결이 있는 스토리도 아니라서요. 다른 작품들도 국내에 번역된다면 좋겠네요ㅎㅎㅎ
아무래도 동성끼리는 크게 잘 보여야할 이유가 없어서 편한듯 해요. 근데 또 그런 이유로 무심해진다는 게 문제죠. 주인공이 실망한 포인트가 다 그거에요. 그래서 혼자 몰입할만한게 필요하다! 그러니 학문을 닦자는 말이었습니다 😀😀😀
 
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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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이 오늘날에 가장 미국인답다고 생각되는 작가인 필립 로스의 <미국을 노린 음모>를 일부러 이 시국에 읽어주었다. 이 작품은 잘못 뽑은 대통령 때문에 일어나는 파국을 다루는데, 마침 국내에 출간된 시기가 현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을 앞두고 있던 때라서 더 주목을 받았었다. 사실 2004년 작품이라 현시점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대중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에는 이만한 것도 없지 않았을까. 아무튼 나는 천조국 빌런의 입후보 때보다 당선 이후에 이 작품을 읽는 게 더 맞아 보였고, 현재 한국의 대통령 또한 입에 담지 못할 만행들로 국가를 무너뜨리고 있어 딱 시기적절하다 느꼈다. 개인적으로 정치에 대해 논하기를 꺼려 하고, 내 글들에 정치색이 묻는 것도 매우 싫어한다. 나도 입장이야 있지만 꺼내고 싶지 않을뿐더러 솔직히 도긴개긴인데 서로 자기들이 맞다고 우기는 걸 보노라면 숨이 턱 막힌다. 그래서 뉴스나 기사도 거의 안 보는 편이다. 어차피 주위에서 다 말해줄 테니까. 아무튼 그런 정치나 사회문제를 너무 접하다 보면 내 정신이 너무 피폐해져서 거리를 두는 편인데, 시국도 그렇고 읽은 작품도 그런 내용이고 하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치색이 들어간 리뷰를 써보도록 하겠다.


이 작품 역시 저자의 자전소설이다. 필립 로스 자신과 가족들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고, 그밖에 인물들도 전부 실존했던 이름들이다. 벌어지는 상황이나 사건들도 막 허구가 아니어서 정녕 이게 소설이 맞나 싶긴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된 1940년, 겨우 10살의 어린 로스가 보았던 미국의 격동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먼저 반유대주의자인 린드버그 대령이 차기 대통령으로 뽑혀 온 유대인들이 탄식하기 시작한다. 파일럿 출신의 린드버그는 비행기로 독일을 직접 방문하고 히틀러와의 평화정책을 협상했다. 1차 대전의 피해를 생각하며 미국의 참전을 반대하는 의사를 밝혔고, 이에 히틀러는 이런저런 조건을 내걸게 된다. 그리하여 신 정부의 개입으로 유대인 가정들은 서서히 무너지고 흩어져 버린다. 물론 로스의 가족들도 예외는 없었다.


미국인들에게 유대인이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저 굴러들어 온 민족 때문에 전 세계가 시끌벅적하고, 자국민들도 괜히 눈치 보며 살아야 했을 테니. 이것을 한국에 눌러앉은 이민자들에 대한 이슈로 본다면 금방 이해가 된다. 그 이민자들이 자꾸 한국 사회에 진출해서 우리의 밥그릇을 다 뺏어간다면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 아무리 유대인들이 미국을 사랑하고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 해도 미국 정부와 국민들을 위협할 만큼의 영향력을 갖게 되는 건 별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유대인 작가가 썼다고 해서 무조건 그 편을 들어줄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물론 유대인들이 반유대주의를 비난하는 게 당연하고, 실제 미국에서 색안경 끼고 차별한 일들에 변호할 마음이 없다. 단지 서로의 입장 때문에 누가 더 잘못했다고 따질 수 없다는 얘기다.


로스의 가정사를 말해보자. 일단 로스 집에 얹혀사는 사촌 형이 있는데, 그는 독일과 싸우기 위해 캐나다군에 자진 입대했다가 다리 한쪽을 잃고 돌아온다. 원래도 삐딱했던 사촌 형의 수발을 들면서 로스 집안의 분위기는 날마다 축 처진다. 헌데 그보다도 장남인 샌디의 정치 성향이 가족들과 달라서, 유대인들을 위한 국가정책에 아주 호의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 한 사람으로 인해 온 집안의 평화가 산산조각 나버린다. 장남은 정부가 세운 유대인들을 위한 사회 프로그램의 봉사자로 활동하면서, 더더욱 린드버그 정부에 불평하는 동족의 낡아빠진 관념을 혐오하게 된다. 장남의 눈에는 서로 윈윈하는 제도와 정책인데, 가족들 눈에는 가정과 집단을 해체시키고 무력화하려는 게 보인단 말이지. 이처럼 제도에 정치가 개입되면 공정과 평등은 물 건너간 건데, 딱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장남 같은 사람들이 판을 흐려놓는다. 이런 상황은 보수와 진보에 관계없이 모두 해당되므로 이 글에 괜히 욱하는 분은 없길 바란다. 아무튼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가족 형태가 바로 정치 성향이 다른 건데 그 예시를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막상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되고부터는 거의 등장하지를 않는다. 그리고 한동안은 별다른 분위기 없이 조용하게만 흘러간다. 거기다 유대인들을 위한 각종 제도나 혜택들이 생기자, 린드버그 정부에 순응하는 듯한 분위기도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린드버그는 히틀러와 나치를 옹호하고, 파시즘으로 유대인들을 와해하고, 독일에 저항하려는 루스벨트를 전쟁광으로 프레임 씌우는, 전형적인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 계속해서 히틀러와 꽁냥대는 현 대통령을 보다 못한 루스벨트가 질책의 연설을 했고, 정부는 루스벨트가 또다시 미국을 전쟁통에 집어넣으려 한다며 힐난했다. (이쯤에서 잠깐 언급된 싱클레어 루이스의 <있을 수 없는 일이야>도 읽어보길 바란다. 같은 테마인데 좀 더 매운맛이다.) 근데 솔직히 전쟁이 애들 장난도 아니거늘 참전 반대쪽을 더 선호하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1차 대전 같은 피해를 막기 위해 얼마든지 꼬리 내리고 저자세로 나갈 수도 있는 건데 그것을 비굴하거나 창피함의 문제로 보아선 아니 된다. 유대인들에게나 처참한 것이지, 일반 미국인들에게는 열일하는 정부였을 테니까.


양측의 입장을 고려한다 해도 저자의 입장과 시선에서 읽고 헤아리는 게 맞겠다. 아버지 세대들도 그렇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란 주인공 세대들은 자신을 미국인으로 생각하지, 유대인의 뿌리를 새겨가면서 살지는 않는다. 그런 자신들이 충성을 다했던 미국이 철천지원수에게 영혼을 팔아넘기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을까. 하여 보다 못한 유명 언론 기자 유대인이 차기 대선을 나섰다가 총살 당한다. 그 일을 도화선으로 시작된 포그롬에 유대인들은 신변 위협을 받는다. 린드버그의 평화조약이 과연 미국을 지켜냈다고 볼 수가 있을까. 국민들의 적개심이 미국을 쥐락펴락하는 독일이 아닌 국민에게 향하도록 하는 것, 그렇게 해서 자멸하게 만드는 것이 히틀러의 목적이었다. 다시 총통을 만나러 간 린드버그가 돌아오질 않자, 그의 세력과 측근들을 체포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히틀러에게 약점 잡혔던 린드버그의 비하인드가 드러나면서.


린드버그의 말로만 살짝 다를 뿐, 실화가 바탕인 미국의 현대사라서 소설 같지가 않다. 그 격동의 시기를 보낸 유년 시절의 저자도 참 힘들었겠다 싶고. 미국이란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한 가지에 꽂히면 다른 것들을 잘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헌데 그 좁다란 시야를 한국 정부가 따라 해서 참 큰일이다. 현 정권이 너무나 개차반이라서 그렇지, 이전의 정권들도 먼지가 한 트럭이었다.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자신들이 옳다는 식의 태도가 그래서 웃긴 것이다. 언제나 대선은 최악 중에서 차악을 뽑는 일 아니던가. 밥그릇 싸움뿐인 정치판에 선이 있긴 어디 있어. 그래서 난 항상 자기 주장만 앞세우는 사람은 상대하기도 싫다. 한쪽으로 치우진 이들은 상대가 정답을 말하고 옳은 일을 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본인들의 문제점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기분 나빴다는 이유로 공격하기에만 바쁘다. 쭉 지켜본 바 내로남불이 심한 사람들이 정치에 잘 몰입하더라. 나님은 중립인데다 누군가와 맞서 싸울 자신도 없어 그냥 몇 발짝 물러나 살아갈 뿐이다. 누구나 필드를 뛰면 감독이고 코치고 간에 그냥 자기가 최고거든. 아무튼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반박 시 님 말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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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마틴 에덴 1~2 - 전2권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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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심리학자 칼 융의 성별 이론을 참고로 읽는다면 재미가 더할 것이다. 먼저 남성 안에 억눌려있는 여성성을 ‘아니마‘라 하고, 여성 안에 억눌려있는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한다. 각자가 감추고 있는 제2의 자아를 지닌 이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내면의 자아를 상대에게 투사해서 그렇단다. 또한 남성성, 여성성은 독립된 개체가 아닌 하나의 스펙트럼이며, 평소의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이성에게 끌리도록 설계된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 마치 극외향 ENFP와 극내향 INTJ의 높은 궁합을 자랑하듯이. 또한 심리학에서 말하길, 가장 건전한 관계는 서로가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존재끼리만 형성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 말에 따라 주인공 두 남녀는 서로에게 없는 정보와 경험들을 제공하며 팽팽히 끌어당기는 관계로 발전할 수가 있었다.


노동 계급의 마틴은 어찌어찌해서 상류층의 모스 가문과 인연을 맺고, 그 집안 딸인 루스에게 반해버린다. 물론 각자의 처지를 알기에 결코 선 넘는 법은 없었으나 설명할 수 없는 대 우주의 법칙으로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신분은 다르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우물 속에선 꽤나 각광받는 알파 남녀였다. 하여 각자 우물 밖의 세계가 흥미로운 건 물론이었고, 이제껏 살아온 삶이 주지 못한 자극의 세계로 안내한 서로에게 매력을 느꼈음은 당연했다. 루스에게 기초적인 교양 및 언어 교육을 받게 된 마틴은 점점 지식과 예술 세계에 온 마음을 뺏겨버린다. 시작은 루스와 조금이라도 나란히 걷고 싶다는 욕망에서였지만, 나중에는 자아실현과 기대 가치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뇌섹남으로 바뀌었다. 그것을 마치 루스 자신이 마틴을 멋지게 조각했노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낭패였지만 말이다.


마침내 그의 사랑고백이 효과를 발휘했다. 루스는 이 거친 야생마에게 끌렸음을 인정하고 부모의 반대를 꺾고 연애질을 시작한다. 어쨌든 잘 풀려 다행이지만 솔직히 루스를 향한 마틴의 사랑은 동경과 경외심 그 사이쯤 어딘가의 감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성 간에 반대가 끌린다는 말을 썩 좋게 보지 않는다. 나를 끌어당긴 그 ‘다름‘의 매력이 동나면 다시 나를 밀어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서로 조율하고 타협해서 잘 지내는 커플이란 건 있을 수 없다. 어느 한쪽이 계속 희생하고 맞춰주는 건데 다른 한쪽이 그걸 알아채지 못할 뿐이지. 그 ‘다름‘이란 마틴처럼 신분과 환경일 수도 있고, 성향과 가치관 같은 보이지 않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중 하나라도 데칼코마니 급으로 결이 맞는다면 모를까, 그런 게 없다면 언젠가는 권태가 오게 돼있다. 그런 연애들만 해왔던 장본인으로서 아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다들 호기심에 좋아서 만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저 사람을 우리(나)에게 맞게끔 바꿔놓자는 무의식에 지배된다. 고로 반대가 끌린다는 건 허울좋은 이유일 따름이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동경과 사랑이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글을 적어보자면,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와 ‘그 사람 곁에 머물고 싶다‘의 차이라고 했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의 리뷰에도 적었던 건데,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기만 하면 사랑이 아니라 동경이 돼버린다. 동등한 입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사랑으로 발전할 수가 없음을 의미했다. 마틴은 루스가 사는 세계로 입성하고자 문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밤낮으로 글을 쓰고 투고하기를 반복하는데, 그 노력이 루스에게는 허상을 쫓는 일로 보여 내적 갈등을 겪는다. 이 구간이 꽤나 긴데, 오히려 마틴이 사랑했던 건 루스보다도 글을 쓰는 행위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문인의 꿈이 아득히 멀게 느껴져도 그저 쓸 수 있음에 설레했고, 문학이 주는 아름다움에 황홀해했으니. 그건 마치 등가교환의 법칙과도 같아서, 투고한 곳마다 빠꾸먹어도 절대 시드는 법이 없었더랬다. 그러다 마침내 수락된 단편소설의 터무니없이 낮은 계약금을 듣고서 이 바닥에 오만정이 떨어진 마틴은 노동 계급의 패배를 인정하고야 만다.


그녀에게 걸맞는 지성과 교양을 갖추고자 했던 그의 독학들이 잠들어있던 총명함을 일깨워 주었다. 어느새 마틴의 지적 수준은 우러러보던 상류층의 고위 인사들을 훌쩍 뛰어넘었고, 그들의 오만한 도덕성과 확증편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에 이른다. 또한 그들에게 실망과 염증을 느끼며, 겨우 그 정도 수준으로 상하 계급을 나눴다는 것 또한 납득할 수 없었다. 어떻게 평생을 이론만 공부해온 사람이, 인생을 실전으로 배운 사람보다 우월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처럼 세상을 알면 알수록 모순과 허점 투성이라, 방향을 잃은 마틴이 독서와 글쓰기의 세계로 빠져드는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날로 머리가 커가는 마틴은 상류층과의 지적 대화에 굶주려 했다. 그는 루스 가문을 통해서 만난 인사들과의 대화마다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 이것은 그가 잃을 것도 없는 처지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일개 노동자에 불과한 이 청년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발언 앞에 상류층이 꼼짝하지 못한 건, 그의 총명함보다도 여태 못 본체했던 자신들의 약점을 간파당한 탓이었다. 바로 이런 장면들에서 저자의 센스가 돋보이는 법인데, <돈키호테>에서도 노망난 영감님의 팩트폭행에 긁힌 사람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하여간 블랙 유머를 잘 다루는 이들의 섹시함은 알아줘야 한다.


루스는 야만인에서 뇌섹남이 되어가는 애인의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막 환영하지는 못했다. 마틴이 사회의 기존 체계나 부조리들을 비판함은 그렇다 쳐도 어느 정도는 현실과 타협할 줄도 알아야 같이 살던가 할 텐데, 시대를 앞서간 그의 이상주의가 오히려 그를 사회 부적응자로 바꿔놓고 있었다. 작가로 성공하리라는 그의 꿈과 포부를 대체 언제까지 믿고 응원해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예전처럼 선원 생활하던 야만인이었을 때가 더 현실적이고 건강한 삶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이런 딜레마는 재능과 신뢰를 떠나서 으레 생기는 법인데, 그것을 사랑에 금이 간 신호탄으로 본다는 게 문제이다. 또 그런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 잘못은 전부 상대 탓으로 돌리고 자신은 피해자로 생각하기가 쉽거든. 아니면 자격지심으로 자기 연민에 빠진다거나. 여하튼 두 사람의 사랑이 삐걱댈 거라는 건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고, 어느덧 ‘다름‘의 매력도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연애의 고수들은 이 불씨를 잘 살려서 다시 지지고 볶고 할 테지만 마틴과 루스는 생초짜 풋내기라서 말이제.


더 나아가 마틴은 노예제도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연설에까지 나서게 된다. 그는 책 속에만 갇혀있었던 지식과 사상을 현실에 부딪혀봄으로써 제 확신을 굳히려 했다. 그러나 그의 광적인 열정과 탐닉은 끝내 사회주의를 부추긴다는 누명을 쓰고서 세상과의 외로운 투쟁을 하게 된다. 그 얄팍한 소동에 루스의 마음이 돌아섰음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점점 마틴의 작품 가치를 알아본 출판사들의 러브콜이 쇄도하고, 쌓여있던 글들을 전부 처분할 만큼 주목받는 벼락 스타가 된 주인공. 허나 사랑이 떠나간 지금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랴. 어째서 사랑이란 놈은 소설 속이나 소설 밖이나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원. 숱하게 거절당했던 그의 작품들이 대인기를 끌었지만, 환희의 샘이 말라버린 마틴은 절필을 다짐하고야 만다. 루스에게서 어떠한 반응도 얻지 못했던 그의 글들이 오늘날 대중들에게 제대로 먹혀들고 있는데, 과연 그녀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이며 주변에 휘둘렸던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다시 심리학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나 자신과 맺는 관계의 수준으로 타인과도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 마틴에 대한 루스의 사랑은 거짓이 아니었겠지만, 사회적 평판과 인정으로 본인의 가치를 매겼던 그녀였기에 감정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앞서 얘기한 딜레마라서 이상할 것도 없으나, 우물 밖의 광활함을 보고도 느낀 바가 없다면 어떤 완벽한 신사를 만난다해도 갈증에 시달렸을 테다. 하여 다시 마틴을 찾아와 용서를 구해보지만 그녀의 본심에는 여전히 부르주아식 사고가 다분했고, 그제야 마틴은 제 사랑이 동경의 감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녀의 절절한 외침들이 진실이든 아니든, 전혀 인정 못 받았던 시절이나 스타 작가가 된 지금이나 똑같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뜨기도 전에 썼던 자신의 글들이 한때 씹고 뜯기고 난도질당했던 것처럼, 열렬했던 그의 사랑도 마구 할퀴고 짓밟혔음을 떠올리자니 눈앞의 고백들도 기가 차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싹 다 진실의 방으로 집어넣고 싶은데 말야.


영혼이 죽어버린 마틴을 보고 있으면 꼭 허망과 염세주의에 빠져살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사랑과 우정 모두에게 배신당하고, 가난으로 삶의 여러 기회들을 놓치고서 마지못해 살아가던 나의 청춘들이. 나는 그나마 뒤늦게 독서와 글쓰기로 구원을 받았는데, 마틴 같은 사람은 이제 무엇으로 삶과 아름다움의 빈자리를 채워야 할까. 내가 살아보니 시간이 약이란 말이 맞긴 한데, 이른 나이에 성공해버린 경우는 또 달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튼 감명 깊게 읽었다 보니 글이 무지막지하게 길어졌는데 그만큼 강추 강추 강강추이다. 올해의 책으로 선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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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2-11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강추! ㅎㅎ 하긴 저도 이 책은 알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네요.
남의 사랑 이야기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데 마틴의 작가가되기 위한
노력과 그의 인생행보가 궁금하긴 하네요.
저는 오래 전에 <강철군화> 재밌게 읽었는데 미국문학은 저에겐
모 아니면 도죠. 다행히도 잭 런던은 모인데 책값이 싸지는 않네요.
6백 페이지 안쪽이면 그냥 벽돌책으로 해도 좋을텐데.
중고샵은 있지도 않고. 강철군화도 어느 새 절판이네요. ㅠ
이번 리뷰는 좀 기네요. 쓰느라 애쓰셨네요. ^^

물감 2024-12-12 11:27   좋아요 0 | URL
저는 잭 런던이 이렇게 잘쓰는 분인 줄 처음 알았네요. 뭔가 보물을 발견한 느낌인지라 무조건 소장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저도 중고로 샀고요. 가격이 너무 사악함ㅋㅋㅋ 러브스토리는 저도 별 생각없긴 한데 클래식은 질리지가 않아서 좋아요^^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4-12-12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진짜진짜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는 처음 노동자인 마틴 에덴의 묘사를 읽는 것도 너무 즐거웠고요 책과 공부에 빠져드는 마틴 에덴을 보는 것도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다 유명한 작가가 되었을 때 사람들의 달라지는 태도를 보고 고뇌하는 마틴 에덴을 보는 것도 진짜 좋았어요. 하여간 전반적으로 너무나 좋은 책이었어요. 저도 여기저기 추천하고 다니는 책입니다.

물감 2024-12-12 11:56   좋아요 0 | URL
방금 다락방님의 페이퍼 찾아 읽었습니다. 언제봐도 놀라운 의식의 흐름 ㅋㅋㅋㅋ
말씀하신 포인트들, 저도 전부 다 좋았어요. 특히 묘사들이 타 작가들처럼 투머치 하지 않아서 맘에 들고요. 그나저나 지성미와 육체미를 전부 가진 인물이라니, 역시 소설은 소설이구나 싶은.... 그래도 초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