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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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조금도 겹치지 않는 소설 속 인물에게도 몰입과 공감이 가능한 것은, 그 안에서 내 것과 닮은 구석을 어떻게든 발견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각각 살아온 독자마다 ‘이건 마치 내 얘기‘라고 자신 있게 말들 한다. 그런 이유로 <모스크바의 신사> 또한 나님이 줄곧 느껴오던 감정들과 겹친 부분 위주로 공감하며 읽었음을 밝혀둔다.


이 블로그는 내가 중학생이던 2004년 7월 17일에 개설했으며, 2015년부터 독서 기록과 일기 쓰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활동해오고 있다. 블로그에 썼던 최초의 일기가 뭐였냐면, 사라져 가는 것들에게 애도를 표한다는 내용이었다. 언젠가 어느 리뷰에도 적었듯이, 우리 또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거쳐 스마트 시대까지 경험한 복받은 세대지만 또 그만큼 격변하는 세상에 혼란을 겪은 세대이기도 하다. 아무튼 신문물에 대한 설렘과 즐거움도 실컷 누렸던 반면,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구닥다리로 전락해버린 문화와 시절들을 붙잡지도 못하는 현실에 참 많이도 씁쓸했었다. 사람, 물건, 시대. 그 무엇이든지 있을 때는 고마운 줄 모르다가 꼭 추억 너머로 떠나간 후에야 알아차리게 된다. 불평 가득했던 그때가 좋았었다는 사실들을.


지금의 현대인들은 유행과 트렌드에 발맞추지 못하는 스스로를 도태되었다고 느낀다. 너도나도 그러고 있으니 듣다 보면 정말 그런가, 하게 된다. 사실 뒤처졌다 한들 살아가는 데에 아무 지장도 없지만, 행여 스스로가 화석처럼 느껴지면 그만 물러나야 할 때를 찬찬히 굽어보게 된다. 집안과 민족 대대로 이어지던 고유의 문화와 정신들은 어느덧 한 세대도 버티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 신세대와 첨단 문화의 출몰 속에서 홀로 남겨질 때마다 나는 내가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창 국가의 경제활동을 담당하는 30대 남성인 나는 정녕 옛사람인 걸까. 그저 구시대의 낡아빠진 잔재인 걸까. 미처 신세계에 적응하기도 전에 또 다른 세상이 열리길 반복하니, 점점 배움을 포기하며 있는 것들이나 잘 간수하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절대 변하지 않을 가치들에만 집중하자는 생각과 함께. 그러나 야속한 세월은 가치의 영원함 따윈 없다는 사실을 자꾸만 일깨워 준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고립되지 않으려면, 삶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꼭 그래야만 한다. 그러니까 기왕 화석 소리 들을 거면 가치 있는 화석이 되자는 말이다. 지금껏 주절거린 말들이 <모스크바의 신사>의 주인공을 보며 느낀 나님의 감정들이다. 러시아 귀족 가문의 백작인 로스토프는 어떤 사건으로 M호텔에 가택 연금 처벌을 받는다. 외부로만 나가지 않는다면 호텔 안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지내도 된다는 조건이다. 700쪽이 넘는 분량을 호텔 에피소드로만 채웠다 생각하니 뭔가 숨이 막혀왔지만 예상과 다르게 재미도 있고 진도마저 빠른 편이었다. 작중 배경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러시아 혁명과 함께 한다. 주인공의 거처인 최고급 M호텔에는 다양한 VIP와 유명 인사와 내빈들이 들락날락하였고, 그들 덕분에 갇혀살면서도 백작은 세간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분량만큼이나 화두가 많았는데 이번 평에는 ‘세대교체‘에 관해서만 적어보려 한다.


로스토프 백작은 귀족답게 교양, 문화, 사교, 여행 등 여러 가지를 누리고 경험하였다. 허나 호텔에 갇힌 후로는 경험 습득 및 지식 탐구가 제한되다 보니, 여태까지 배웠던 것들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된다. 곧이어 바깥세상의 변화는 호텔 내부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백작과 호텔 직원들은 억압과 제재 앞에 굴종해야 했다. 볼셰비키부터 레닌과 스탈린까지, 혼돈의 시간을 거쳐 온 러시아는 더 이상 백작이 기억하는 아름답고 우아한 조국이 아니었다. 남들이야 변화의 바람에 미리 대비하고 적응할 테지만, 우물 안 개구리는 조짐을 감지하는 것조차 느렸더랬다. 한때는 각종 유행의 선두주자였던 그가, 이제는 비주류의 맨 끝자락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물론 백작은 상황과 여건에 굴하지 않고 프로귀족꾼의 노련미를 보여주었다. 뼛속까지 신사였던 그에게서 한치의 흐트러짐도 볼 수 없었지만, 내 눈에는 백작의 웃고 떠드는 장면들마저도 슬퍼 보였다. 바깥세상은 날로 새로와지건만 자신은 이대로 성장을 멈춘 채 살아가려니, 이 얼마나 비참한가. 똑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데도 홀로 남겨진듯한 그 묘한 기분. 바로 내 얘기였다.


백작은 꼬마 숙녀 니나를 통해서 차세대의 발전 가능성을 관찰한다. 이 신인류는 뭐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고, 직접 보고 겪고 검증해야만 속이 풀리는 별종이었다. 총명했던 꼬마는 점점 시니컬한 어른이 되었고, 혁명의 뜻을 받들어 호텔 밖으로 떠나간다. 그리고 수년 뒤, 백작을 찾아와 자기 딸을 좀 맡아달라 하고 사라진다. 졸지에 애 아빠가 된 백작의 인생 2막은 의외로 행복 그 자체였다. 소피야는 엄마를 닮아 똑소리 나는 아이였고, 엄마보다 온화하여 잔뜩 사랑받고 자라난다. 그렇게 백작은 자신과 전혀 다른 니나, 그리고 니나와 딴판인 소피야를 보면서 신선함과 동시에 불편함을 느낀다. 하나부터 열까지 남달랐던 차세대들의 사고방식을 마냥 환영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다 문득 닫힌 마음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너는 네 방식의 삶에 굳어져 버린 건 아니냐고(381p). 각종 지식과 경험이 풍부했던 백작은 감금생활 중에도 나름대로 삶의 질문을 잘 해결해왔다. 하지만 그 모두가 저만 신뢰하는 옛 방식들을 고집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과거 백작은 언제나 마음을 열고 무엇이든지 배우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배움은커녕 내 가진 것이 최고인 양 자부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이 같은 백작의 현타를 볼 때마다 발전을 포기해버린 내 지난날들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 당장은 편하겠지만, 멀리 놓고 본다면 그 반대이다. 시곗바늘이 잘 돌아가려면 귀찮더라도 태엽을 자꾸 감아주어야 했거늘.


러시아의 전통과 문화양식들이 하나둘씩 훼손될 때마다 백작은 제 살점이 뜯겨나간 것처럼 한탄하였다. 뿐만 아니라 삶에 빠져서는 아니 될 가치와 정신의 변질에도 그러했다. 나와 백작처럼 옛것을 버리지 못하고 새것을 반기지 못하는 유형의 공통점은, 본질의 무너짐을 견디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사람마다 다를 텐데 내가 생각하는 본질이란, 편법이나 꼼수를 부리지 않는 무엇이어야 한다. 또 그렇다 해서 정직과 충의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뭐,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듣는 사람이 있겠지. 다시 나의 첫 일기 내용으로 돌아오자면, 떠나간 것들을 추모한답시고 새로움을 거부하는 태도는 틀려먹었단 사실을 배웠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차마 놓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놓아 주게 되었달까. 막상 이렇게 리뷰를 쓰고 보니 만인의 즐거운 세상을 또 나만 쓸쓸히 보고 있었구나 싶어진다. 이런 나 자신이 제정신은 아니라고 생각한 지도 참 오래됐다. 그러나 이제는 배움을 추구하고, 세상의 변화를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는 중이다. 백작이 니나와 소피야의 가능성을 끝내 인정해 주었듯이.


이 밖에도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작품인데, 일일이 다뤘다가는 끝이 없을 듯하다. 헌데 미국인 작가가 어째서 러시아 배경의 이야기를 다룬 걸까나. 나의 짧은 지식으로 온전히 음미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즐거웠던 작품으로써 당신도 꼭 읽어보길 바란다. 그나저나 백작이 몽테뉴를 자주 언급해서 아무래도 <수상록>을 읽어보긴 해야겠더라. 거참, 산 넘어 산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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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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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는 <1984>와 함께 디스토피아 문학의 쌍두마차로 유명하다. 하여 독서가들 사이에서는 필독서나 다름없는 이 작품을 나님은 정말이지 읽고 싶지가 않았다. 이유인즉슨 내가 SF 장르, 일명 이과소설을 극도로 싫어해서 그렇다. 아니, 취향이 아니면 아닌 거지, 싫어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나님은 드라마가 빠진 이야기에 흥미를 갖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아무리 작품성이 높다 한들 드라마적인 요소가 없다면 영 매력을 못 느낀단 말이다. 그럼에도 억지로라도 읽은 것은, 요즘 공부하고 있는 책들마다 이 작품을 인용하여 도저히 안 볼 수가 없어서였다. 정신분석학, 사회심리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다루는 이 책의 영향력을 알고자 했지만 워낙 안 내켜서 질질 끌었다 보니 퍽 남는 것도 없다. 아무튼 <멋진 신세계>를 끝으로 SF와는 아주 절연을 해야 쓰겄다.


점수를 짜게 준 것은 순수하게 글이 재미가 없어서였다. 작품성이야 대단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것 외의 장면들을 참 지루하게도 풀어간다는 인상만 받았다. 여하튼 워낙 유명하니까 요약은 생략하겠다.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존재들의 이야기이다. 소설 속 세계관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과학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오늘날에 와서는, 헉슬리가 염려한 과학기술 진보의 폐해를 모두가 느끼며 공감하고 있다. 사실 과학 자체로는 문제랄 게 없으나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악용되어 병폐를 낳고 있으니 말이다. 진보라는 이름 아래 생겨난 제도와 기술들은 의도한 대로 굴러가는 법이 없는데도 인간은 끊임없이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에 잠식당한 노예가 된다. 이 악순환의 최종 버전이 <멋진 신세계>의 세계관이라고 보면 되겠다.


근심과 고통, 불행이 사라지고 오직 쾌락만이 지배하는 세상이라. 아직 겪어보지 못한 우리들한테는 어쩐지 거부감이 든다...라고 했다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연민이나 우울에 취약해서 지구 따위 멸망해버렸으면 하는데 말이다. 이렇듯 평생을 고통에 짓눌려온 나 같은 사람들은 번민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가짜 행복 속에 살아갈 거라고 생각한다. 가끔 주변인들과 그런 얘기들도 나눈다. 온갖 병치레를 하면서 100세까지 사느니, 건강하게 살다가 한 60세쯤에 죽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의료기술이 발달한 만큼 고통의 기간도 연장되었다는 뜻이므로, 나 또한 그렇게 골골대면서 오래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이 얘기가 작품 속에서도 그대로 등장한다. 문명인들은 죽기 전까지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생명의 유한성도 알지 못하고, 온통 자극적인 문화에만 가치를 두고 살아간다. 이제껏 우리가 중요시했던 가치들은 휴지 조각이 되고, 오로지 자기만의 기쁨과 쾌락과 행복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 작품을 한 10년 전에 읽었다면 모를까, 지금에서는 오히려 나도 그런 세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만큼 현실의 괴로움이 압도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결국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이므로, 나는 모든 현대인의 고통이 다 같다고 본다. 또한 그 고통의 뿌리이자 종착점은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문명의 발달로 더 이상 나와 맞지 않는 이들과 잘 지낼 필요가 없어졌고, 의학의 발달로 건강해진 가족과 이웃들을 챙기지 않아도 되었고, 정보의 발달로 과거에 죽어라 했던 노력의 의미는 퇴색돼버렸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정녕 우리 사회를 더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핵개인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실보다 더한 작중의 문명 세계는, 시험관으로만 새 생명이 탄생되고 각종 세뇌 학습을 통해 제법 건강한 자아가 형성되고 있다. 그들은 가족, 친구, 동료, 이성 등 인간관계로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들이 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도파민 탐색뿐이다. 어떤가, 오늘날의 현대인들과 다른 점이 하나 없지 않은가. 이미 현실은 헉슬리가 그려낸 신세계가 되어가고 있다. 아직은 멋지다고 할 단계가 아니지만 이미 예견돼있는 미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예로부터 미래를 걱정한 학자들의 주장을 수차례 듣고도 위기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멍청이가 되었고, 그로 인해 생겨난 환경문제들로 지구는 다 죽어간다. 이 모든 게 예정된 결과이다.


현대인에게는 업그레이드만 있고 다운그레이드는 없다고 한다. 최신형을 써본 사람은 다시 구형 제품을 찾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무기력한 삶을 날려버린 신문물의 맛을 본 인간들은, 그것들로 인해 인간다움을 잃어버렸다 해도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과반수가 그래버리면 손쓸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원주민들을 보고 미개하다 말할 자격이 없다. 오히려 우리보다 행복지수가 월등히 높은 그들의 삶이 훨씬 낫다. 아무튼 나님은 지금 세상에 리셋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언젠가 3차 대전으로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어 멸망하게 되면 그것이 내게는 멋진 신세계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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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루트 헤르만 헤세 선집 5
헤르만 헤세 지음, 황종민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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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여러 가지로 바빠서 도저히 독서할 새가 없었다. 개인적인 일도 있고 해서 답답해진 마음을 달래고자 하여 헤세를 집어 들었다. 항상 느끼지만 헤세의 작품은 영혼이 갈하고 메마를 때 읽어야 한다. 이번 작품도 많은 위로와 울림을 주었는데 아무리 봐도 제목은 다시 지어야 할 것 같다. 제목에 게르트루트는 주인공이 좋아한 여인의 이름인데, 막상 읽어보면 그녀와의 사랑보다도 음악을 통한 주인공의 성장과 번뇌에 더 맞춰져있단 말이다. 아무튼, 옛날 분들이 다 그렇지만 독일 작가들도 제목을 참 못 짓는 것 같다.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던 주인공 쿤은 여자친구와 눈썰매를 타다가 사고 난 뒤로 다리 한쪽을 못쓰게 된다. 수술 후 산속 어느 별장에서 있는 동안 음악적 영감이 마구 샘솟아 작곡에 전념하면서 아픔을 달래는 쿤. 그의 재능을 발견한 가수 무오트와 친해지면서 쿤은 프로 음악인의 세계로 향한다. 인기 많고 발도 넓은 무오트 덕분에 쿤의 곡들은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고, 무대에서 쿤의 곡을 노래하는 무오트 또한 날로 유명해져갔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있어서, 기쁨과 만족이 좀처럼 오래가지를 못했다.


쿤과 무오트에게는 ‘여백‘이 있었고, 그곳을 사랑으로 채워넣고자 했다. 그러나 불구자인 쿤은 이성에게 마음을 전하기가 두려웠고, 반대로 무오트는 마음을 여는 법이 없었다. 누구는 표현 한 번 하기도 어려운데, 누구는 여자들에게 상처나 주고 있으니 쿤의 마음이 얼마나 쓰라릴까. 그런 무오트가 괘씸하면서도 막 멀리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불안정한 영혼이 여러모로 쿤 자신과 닮은 이유에서였다. 아무튼 이번에도 헤세 표 공생관계인가 했더니, 게르트루트와의 불투명한 삼각관계로 이어지며 예정된 파국을 맞게 된다.


주인공은 오페라를 위한 곡 작업에 매진한다. 때마침 나타난 여가수 게르트루트가 쿤의 곡들을 불러주면서 작업에 도움을 주게 된다. 무오트가 쿤의 음악성을 알아봐 주었듯이, 쿤은 게르트루트의 음악성을 발견한다. 그렇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끝내 그녀를 사모하게 돼버린 쿤. 그녀는 친구 사이로 남기를 원했고, 쿤도 기분 좋게 체념하였다.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커다란 나의 단점과 열등감. 차이고서 또 한 번 검증된 나의 현주소. 그래, 슬프긴 해도 여기까진 괜찮았다. 이후 그녀는 곡 작업에 합세한 무오트에게 반해버리고 만다. 슬픈 티도 낼 수 없고 축하해 줄 수도 없는 착잡함과, 내 음악에 협력해 준 고마움들이 뒤엉켜 어쩌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 쳐낼 수도 없는 이 애매모호한 관계를 보면서 옛 생각에 그만 눈물을 흘렸다.


한때는 예술가들의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타고난 재능이 참 부러웠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언가에 기대지 않고선 달랠 길 없는 공허함의 실체를 알고부터는 전혀 부럽지가 않다. 내가 본 천재들은 창조물보다도 창조해나가는 과정에 더 진심이었다. 마침내 결과물이 나오면 뿌듯하고 후련해하기보다 괜히 허무하고 허탈해지는 것이다. 흔히 슈퍼스타가 무대를 마치고 나오면 느낀다는 고독과 외로움처럼. 쿤과 무오트 또한 성공에 상관없이 채워지지 않는 영혼 때문에 고뇌하고 있다. 내내 그러다가 끝나버려 살짝 아쉬운 작품인데, 그래도 볼거리가 풍부해서 대만족이었다.


아무리 힘껏 살아봐도 불구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몇 번이고 좌절했던 쿤의 심정을 이해한다. 나 역시 음악을 했고 다리를 다친 몸이라서, 남들 앞에 작아지기만 하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하지만 살려면 어떻게든 주변에 손을 뻗어야만 했고, 그렇게라도 해서 경직된 내 영혼에 변화를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처럼 자살을 결심했던 주인공도 소원했던 부모와의 관계 회복을 통해서 삶의 의욕을 되찾았다. 이것은 사랑받을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믿어왔던 사람이, 그 부정한 마음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느낀 위대한 순간이라 하겠다. 세상에 이로움을 가져오고 행복을 기여함은 더없이 훌륭한 일이지만, 만인에게 추앙받더라도 내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그것만큼 슬픈 일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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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에르와 장 창비세계문학 9
기 드 모파상 지음, 정혜용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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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인 모파상에게는 러시아 문학의 냄새가 풀풀 난다. 저자를 모른 채로 작품을 읽는다면 영락없이 도스토옙스키의 글이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이 같은 날것의 맛과 거친 감성은 합격이지만, 불필요한 묘사와 장면들로 재미가 반감되었다. 글자 수만큼 돈을 주니까 억지로 분량을 늘렸다지만, 누구는 그 억지마저도 몰입감을 주는 반면 누구는 지루함을 안겨주니 비교하지 않을 수가 있나. 쓸데없는 거 다 빼고 절반으로 줄인다면 별 다섯 개도 줄만한 작품인데, 쯧쯧.


동생인 장은 형인 삐에르보다 뛰어난 신체 스펙을 가졌다. 형은 열등감에 가득 차 있지만 아닌 척하기 바쁘다. 어느 날 운명하신 모 어르신이 동생에게 유산을 전부 물려주면서 장은 벼락부자가 돼버렸다. 배 아파하는 삐에르의 마음도 모르는 가족들은 마냥 기뻐한다. 줄 거면 형제에게 반반해주는 게 상식인데, 한 명에게만 몰아준다? 어딘가 구린내가 난다. 탐정모드가 된 형은, 그 어르신과 모친 사이에서 장이 태어났음을 밝혀냈다. 다만 이 진실을 공개하면 가족 모두가 상처 입을 것이고, 잠자코 있자니 화병에 돌아가실 지경이다. 하.


‘사느냐, 죽느냐‘를 내내 고뇌하는 삐에르의 모습. 이 정도면 프랑스판 ‘햄릿‘으로 불러도 될 듯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평화를 깨뜨리는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분했다. 세상 모두가 동생을 더 우대하는데 편애한다는 기분이 안 들겠는가. 이래서야 열등감이 안 생길 수가 없단 얘기다. 그렇다고 형이 막 비교될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의사라는 번듯한 직업도 있고, 생김새도 멀쩡하고, 성격도 무난한 편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늘 동생한테 밀려났었던 삐에르에게, 재산 상속 일도 그렇고,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부모님의 태도도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가정의 파괴까지 고려하는 그의 질투를 누구인들 욕할 수 있을까.


결국 삐에르는 입을 열고 말았다. 부친한테만 빼고. 모친은 순순히 인정하고, 두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동생도 충격은 받았지만 가족의 해체를 막고 싶어 한다. 그와 반대로 삐에르는 가족들에게 실망하여 멀리 떠나버린다. 이렇듯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각색한 느낌마저 든다. 서사보다는 개인의 심리에 집중한 작품이었고, 그것은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을만한 감정선이었다. 종종 친자 불일치로 확인된 자녀(와 아내)를 끝내 정리했다는 미디어 소식을 듣곤 한다. 그게 만약에 내 얘기라면 어떨까. 배신감에 잠 못 이룰게 뻔한데, 그렇다고 정이 든 아이를 떠나보낼 수 있을까. 마지못해 눈 감고 같이 살아갈 듯하지만 평생 괴로울 각오도 해야 한다. 혹 그렇게 되면 아이와 아내를 투명히 대할 순 없을 텐데 그럼에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가. 정말 어려운 문제다. 이와 같은 윤리적 갈등을 다룬 <삐에르와 장>은 한 번쯤 읽어봐도 좋을 작품이다. 적당히 스킵하면서 읽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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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돈키호테를 찾아서 - 포기하지 않으면 만나는 것들
김호연 지음 / 푸른숲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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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신간을 보내주신 김호연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글을 꾸준히 읽어준 분들은 아실 테지만 <파우스터>의 리뷰를 인연으로, 해마다 작품을 보내주고 계신다. 이제는 슬슬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인데, 아무튼 변치 않는 팬심과 리뷰와 홍보로 내 나름의 보답을 하고 있다. 전에는 블로그에 와주셔서 댓글도 주시고 소통도 해서 좋았는데, <불편한 편의점>이 대박 난 뒤로는 바빠지셨는지 넷상에서 볼 수가 없어졌다. 나는 예전부터 이 분이 크게 성공할 것을 예감했었는데, 막상 그렇게 되고 나자 괜스레 아쉽기도 하고 뭐 그렇다. 아무튼 김호연 작가님과는 꼭 소설이 아니어도 나님의 인간미와 겹치는 구석들이 있어서 더욱 응원하게 된다.


현시점에서 가장 마지막 소설인 <나의 돈키호테>의 집필이, <불편한 편의점>보다 먼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업 소설가로서의 생존과 연명을 위해, 또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한 작품 구상을 위해 작가님은 스페인에서 몇 달간 체류한다. 신작의 소재와 영감을 위해 곳곳을 쏘다니며 스페인의 문화, 감성, 역사 등등을 익혀나가는 이야기들을 에세이로 묶어냈다. 따라서 일반 스페인 여행기처럼 보일 테지만, 여행보다는 소설가로서의 신앙고백에 초점이 더 맞춰져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작가의 모든 생각이 일상과 맞닿아있다는 점, 그래서 일과 삶을 분리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일상 속 작은 활동에도 글감으로 연결 짓기 바쁜 나날들이, 어쩐지 내 얘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이래서 나는 글쓰기에 진심인, 나와 닮아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한국과 다르게 스페인은 습도가 없어 항상 쾌청한 날씨가 유지된다고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이 괜히 에너제틱하고 친절한 게 아님을 보고 어찌나 부럽던지. 근데 좀 의외였던 건, 스페인 사람들은 돈키호테나 세르반테스에 퍽 열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작가님이 현지인들과 돈키호테 얘기를 나누면 다들 하나같이 케케묵은 전래동화를 쫓느냐는 듯한 분위기였다. 한국으로 치면 <홍길동전>에 열광하는 외국인을 보는 기분인 걸까. 그래도 전 세계를 강타한 <돈키호테>와는 급이 다를 텐데, 자국민들한테는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거로군. 돈키호테의 팬으로서 많이 씁쓸하고만.


<나의 돈키호테>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전부 꿈 많은 돈키호테로 자라나서, 지독한 현실에 굴복한 산초가 되고 만다. 아니, 지금은 어릴 때부터 산초로 커가는, 낭만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사회적 압박으로 죽어라 공부만 해왔던 현세대 청년들이 구직은커녕 그냥 쉬고 있다는 뉴스가 매일같이 보도된다. 물론 거기에는 일자리 부족과 부당한 기업문화 등등 여러 요인이 있을 테지만, 각자만의 목표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여 좌절해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작가로서 계속 고배를 들어야 했던 김호연 작가님도 마찬가지였다. 수차례 포기하려다가도 글 쓰는 게 좋아서, 또 이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버텼더니 쨍하고 해 뜰 날이 돌아왔단다. 물론 이런 승리의 신화는 누구나에게 해당되고 적용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러나 비관적으로 살아본들 달라지는 것 또한 없다는 사실도 명심해야겠다.


개인적으로 세상에 불만이 많은, 즉 하고 싶은 말들로 가득한 타입의 작가를 선호한다. 그래서 나는 세르반테스를 좋아한다. 그의 작품이 <돈키호테> 외에는 거의 전무하지만, 나님은 무인도에 책 하나만 가져가라면 망설임 없이 <돈키호테>를 집어 들 것이다. 김호연 작가님이 돈키호테에게 보인 집착의 이유도 내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모든 것이 과열된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돈키호테와 산초가 적절히 섞인 하이브리드형 인간이다. 여기서 더 나빠질 수가 있을까,했던 사회 분위기는 날로 날로 갱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 살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보다도 자신을 지탱할 무언가가 절실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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