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시대의 우울과 아픔을 자살로 표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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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문득 일기장을 들여보고서 문서를 정리했다.


년도별로.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서 그의 생애에 대해 잠깐 들추어 볼 기회가 어제 있었다. 그의 삶을 보면서 그가 죽고 나서 남긴 유작들과 작품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문학에 대한 욕망...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서 나오는 문학에 대한 짤막한 언급으로 말미암아 들었던 ‘카프카전집 1권’…변신…
그것은 아마도 인간존재의 상실과 인간성의 상실과 소외를 다룬 작품일 것이다.
문학은 언제나 인생에 대한 청사진을 제공한다.
그것은 인생에 미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카프카가 1913년 쓴 그 작품이 지금의 시대의 모든 것들을 반영해주고 있지 않은가?
사람을 도구로 생각하고, 사람의 물질의 도구와 메커니즘으로 생각하면서 돈을 벌어오지 못하고
오히려 짐승처럼 변해버린 아들, 오빠인 그레고르를 통해서
카프카는 많은 상상력을 동원할만한 여지를 남겼고,

그것은 오히려 ‘변신’이라기 보다는 ‘변질’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 싶다.


인간이 변해버린, 인간성이 말살되어진 상태는 하나의 변질이다.
가족이며 공동체의 구성원이었고 사랑하는 아들이자 오빠인 그레고르가 하루아침에 짐승처럼 변해서 일도 못하고,
가족을 위해 뼈빠지게 6년 동안 일을 한 그가,
군대도 소위계급까지 달았던 그가 이제는 이상하게 변신 아니 변화되어져 버리자, 가족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불안해하며 두려워하더니만 차츰 그를 소외되게 하고 심지어 벽과 천장을 기어 다니는 그의 행태를 보면서 인간 취급 조차하지 않는다.


그레고르는 이제 가족이 떠 안아야할 하나의 짐이고 ‘거추장스러운 부담’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의 방을 청소해주고 음식까지 챙겨주던 동생,
바이올린을 켜던 여동생 그레타는 이제


‘그가 없어졌음 좋겠다. 그는 더 이상 그레고르가 아니다’


라고 발언하면서 작품의 막바지에 도달하기에 이르른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그레고르,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 몇 개월동안 그가 맛 본 육체적, 정신적, 영혼의 타격과 상처와 아픔과 데미지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자본주의 거대한 틀 안에 갇힌 인간은 이처럼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하나의 물질적 메커니즘으로 전락, 변질하기에 이르른다.


오빠인 그레고르 때문에 더 실용적인 집으로 이사가지도 못하는 가족들의 처지.
왜냐하면 그레고르를 어떻게 이사할 때 숨겨서 간다는 말인가?
그런 여러가지 복잡한 걱정을 곧 떨쳐 버리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그레고르는 차디찬 시체로 변해 버려 파출부에 의해 쓰레기더미 치우듯이 버려져 버렸다.
그리고서 결근계를 내는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그들은 그들만의 자유와 후련함과 시원함으로 전철 여행을 즐긴다.
부모는 하나뿐인 딸이 이제 성숙한 처녀로 변해가는 것을 흡족해 하며 좋은 사윗감을 골라 짝을 지어 주어야겠다는 아주 현실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채 ‘변신’의 막은 내린다.


문득 <필경사 바틀비>의 마지막장면이 스치고 지나간다.
더 이상 희망없는 바틀비의 깊은 절망, 그리고 그의 마지막 최후. 코끝이 시큼했다. 바틀비의 고개 떨군 모습에 가슴이 먹먹했다.


카프카가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는가? 하는 대단한 도전을 받았다.
카프카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내가 이전에 읽다가 만 ‘화부’라는 단편소설부터 읽기 시작하여 ‘변신’까지 읽게 되었는데 정말 Kafka는 대단한 상상가이다.


반 유태계 독일인으로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카프카의 흩어진 원고들을 모으고 그리하여 겨우 조금씩 조금씩 그의 작품은 세상에 고개를 내밀었다.
카프카는 죽기 전에 몇몇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원고들과 습작들과 기록들을 불태우라고 말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문학비평가인 막스 브로트가 아니었더라면
그의 글은 세상의 조명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은 지독히 넓고,
인간의 지성은 대단히 탁월하며,
문학의 세계는 그로테스크하다.

---2003년 7월 5일 토요일 새벽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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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6-23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프카의 단편소설과 아포리즘은 보면 볼수록 매력 있어요.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릅니다. ^^

카알벨루치 2018-06-23 12:06   좋아요 0 | URL
제가 사이러스님을 따라갈수가 없죠^^ 체호프 단편 아껴가며 읽고 있네요~
 
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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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매한 이유는? 고전읽기를 위한 안내서로 구매한다. <공감필법>에서 그 느낌을 받았다. 고전에 더 다가가기 위해 유시민의 도움을 좀 받고 싶다는. 유시민의 글은 일단 재미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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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을불과 아들 사유


병사가 훈련중에 졸다가 쏜 화살에 맞은 왕 을불. 미천왕이다.
대신들은 소년 병사의 불찰을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을불은 용서했다. 백성을 향한 왕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을불은 그 사고 이후로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도 저하된다.

최후의 전쟁에서, 노쇠한 기력 탓에 전장에서 얼굴조차 내밀지 못한 을불이지만, 그는 마지막 온 힘을 다해 전쟁터에 얼굴을 비춘다. 군사들은 이제껏 왕의 부재가 왕의 죽음이 아닌가 하는 흉흉한 소문이 정말 소문에 불과했음을 알고 사기가 한껏 충전된다. 전쟁엔 이겼으나, 두 아들 사유와 무의 부축으로 겨우 고구려 기를 들고 있었던 을불, 그의 마지막 모습, 미천왕의 최후였다.


아버지 사유와 아들 구부


40년 집정기간 동안 ‘백성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백성에게 무기를 쥐게 하지 않고 평화롭게 쟁기과 농기구를 들게 해주어야 한다는 원칙이 대신들, 충신들을 다 떠나가게 하고 모용황에게 태후를 두번씩이나 볼모로 잡히게 한다. 두번째는 왕후까지, 5만여 백성들까지 포로로 끌려갔다. 그는 무력으로, 전략으로, 아영태후의 지략으로 모용황 선비족을 궤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풀어주었다. 충신들, 태후와 왕후, 동생 무까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들 구부만이 아버지의 통치원리를 이해했다.


전쟁은 뺨을 때리는 거와 같다. 뺨을 먼저 때리고 전쟁을 멈추기를 원하지만, 아버지 사유는 자신의 뺨, 고구려가 먼저 뺨을 맞고 멈추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태후도, 왕후도 그에게서 멀어져갔고, 그는 평생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백제가 말 길들이는 백제인(포로)을 돌려달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걸어왔다. 사유는 그는 이미 단호했다. 고구려로 귀화한 포로는 돌려보낼 수 가 없다. 그는 이미 고구려백성이기 때문이다. 도망쳐온 백제군 백성은 돌아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기도 했다. 사유는 단 한 사람의 고구려백성의 안전을 위해 나라의 위기를 자초한다.

그가 모르는 사이, 백제군 포로 가족을 백제군 부여고에게 보냈다는 소식을 듣자, 사유는 갑자기 전쟁을 선포한다. 모든 주변인들이 놀라했다. 고구려군이 을불 때와는 달리 전쟁에 익숙치 못한 상황이었다.

다음날 아침, 성문을 여는 군사가 하나 있었다. 누구인가? 그는 바로 고국원왕 사유였다. 평생 처음으로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선 왕!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갑옷을 입은 셈이다. 그는 화살에 맞아 최후를 맞이한다.

아들 구부는 백제군과의 대치상태에서 이전에 부여고 왕과 약조한 ‘빚‘을 갚으라고 한다. 구부는 어릴 적 방황을 많이했다. 궁을 떠나 방랑하던 시절, 백제왕의 소원이었던 연의 재상 송해를 제거하는 일을 세치혀로 성취했다. 구부는 이 순간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한다.

‘말잡이‘포로 가족을 다시 고구려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다.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아끼는 마음.


다시 고구려 vs 백제의 대치상황.
부여고왕은 고구려의 군사들의 눈동자가 어제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40년 통치기간 동안 적극적으로 전쟁을 치르지 않고 전쟁을 피하며, 때론 굴욕적으로 항복만 해서 나라를 꼴아박게 만든 사유 왕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쟁참여는 왕의 최후를 맞았기 때문이다. 백제군은 이 전쟁에선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란 판단하에 회군한다. 백제는 이전의 백제가 아니라 상승곡선을 타는 상승세의 백제였다.

이전 백제가 고향이었던 실향민들이 고구려에 흩어져있었다. 이제 다시 고향, 백제의 땅으로 돌아온다면 그들을 관대히 선처해줄 것을 약속한다는 소문을 낸다. 백제군의 회군 길에 길가에 나온 백성들은 백제군을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향해 돌을 던진다.
백성들, 그들은 원래 백제민이었으나 지금은 고구려 땅에 뿌릴내렸다. 그들 백성들은 생각한다.


‘그들의 왕은 사유 왕이었다고!‘


진정한 백성의 왕은 바로 사유였다. 고구려 16대 왕 고국원왕이었다.
한 사람, 한 군주의 처절한 외로움과 피말리는 통치는 이해하기 어려운 여정이었고, 독자에게 분노까지도 이글거리게 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진정한 왕됨, Kingship을 심어주고 떠났다. 왕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확실하게 방점을 찍어주고 떠났다. 고구려는 그런 왕들이 즐비한 나라였다.
을불이 그러했고, 사유는 또 다른 색깔로 그러했고, 아들 구부와 이련 또한 그런 왕됨을 보여주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다!


김진명의 ‘고구려‘를 읽은 이후로 역사와 픽션의 경계 때문에 ‘고구려왕조실록‘을 구매했다. 같이 보고 있는데, 요약은 잘 된 듯 한데, 내가 워낙 역사의 문외한이다 보니 잘 모르겠다.


김진명의 소설의 핵은 ‘고구려‘이다. 방대한 만주벌판을 대륙적 기상을 품고 달렸던 고구려의 혼이 우리 민족의 뿌리라고 외치는 소설가이다. 그는 어쩌면 죽기직전까지 <고구려>소설을 쓰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십자가의 그리스도처럼)하고 마침표를 찍지 않을까? 싶은 작가이다. 내 생각이다. 근데 내가 김진명의 소설을 중독자처럼 읽고 난 후에 내린 결론이다. 난 김진명에게 감사한다. 역사와 픽션을 넘나들어 독자를 너무나 헷갈리게 하지만, 그러나, 그가 가진 민족에 대한 애정의 중심은 너무나 존경한다. 개인적으로 김진명을 통해 나는 한국사를 접근하고 있다.


그런데, 너무 힘들다. 역사전공자가 아니라서 힘든 것도 있지만, 아파서 그렇다. 몸이 아픈게 아니라 마음이 힘들어서 한국사를 읽는다는게 요즈음은 부담이 된다. 진도도 잘 안 나간다. <조선총독부> 이것도 반 쯤 읽고 지지부진이다. 지적 환기가 좀 되고 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은 한국사의 치부로 발을 들여놓을 자신이 없다. 대학원때 그렇게 들었던 친일파 전통이었는데, 더 깊게 들어가보려하니 겁이 난다. 그게 우리의 역사인데.

또 한 가지는, 내가 배운 역사가 정직하지 않은 역사일 수도 있다는 패러다임 충격때문이다. 역사가 이처럼 정직하지 못하게 기술할 수도 있다는 프레임을 가진 이후로 더 그러하다.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이 책은 평가를 못하겠다. 제대로 읽어보지를 못했다. 다시 역사순례가 이어지면 읽을 듯 싶다.


원래, 아버지의 아들, 부자관계를 중심으로 ‘어버이 날‘ 기념으로 페이퍼를 쓰고자했는데, 늦어버렸다. 소설<고구려>는 미천왕부터 광개토대왕까지 이어지는 김진명의 아이템이다. 왜? 광개토대왕이 고구려대륙의 최고 정점을 찍었던 군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진명의 소설에서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소재가 주구장창 나온다. 지겹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 양반의 마지막 정상은 ‘광개토대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미치면서 글을 내는 불굴의 에너자이저가 우리나라에 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권력을 둘러싸고 자기 배를 불리기에 급급한 좀비들이 천지인 이 땅에 그래도 김진명이란 작가가 있음에 위로받았음 좋겠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 부자관계에 대한 좋은 책 하나,
고구려가 아니고 이번엔 <조선>이다. 도서관에서 이 책 발견하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감동의 물결이다. <조선의 아버지들>이다. 백승종 교수가 쓴.
여기엔 정약용, 이황, 박세당, 김숙자, 이익, 유계린, 김장생, 김정희, 이순신, 김인후, 이항복과 영조이야기를 다룬다.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특히, 이 황이 자기 아들에게 대한 부분은 우리세대가 본받아야 할 대목인 듯하다. 책 읽으면서 눈물 훔친 적이 얼마나 많은지. <조선의 아버지>는 나중에 리뷰를 적기로.


독서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독서를 많이 한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고, 내 안에 소화되지 않은 지식들이 가득 있다는 것, 아웃풋이 안 된 인풋만 가득한 것은 정말 그것도 문제란 생각이다. 독서법 책들을 읽으면서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어제 오늘 경험하고 이렇게라도 배출을 해야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겁나게 적었다. 너무 길다. 아...다들 안 읽고 넘어가려나? ㅎ 그래도 좋다. 배설하고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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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란 말은 참 듣기 좋은 어감과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영‘을 발음하다가 ‘웅‘자가 발음될 때 무언가 하나가 날아가는, 비상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표피적인 차원에서이고 진정한 『영웅』, 그 말 한 마디만 들어도 대단히 설레고 떨리고 그러한 긍정적인 긴장감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웅...
영웅이 사라진지는 오래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어쩌면 영웅에 대한 향수nostalgia에 더 목 매는지도 모른다.
영웅의 이야기를 언급하면 우리는 현대의 Context라는 시대성을 떠나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세나 고대나 그런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되추적해야만 우린 우리의 영웅의 얼굴Mask을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는, 현대는 영웅이 없기 때문not exist이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라는 기독교 사상가는
현대에 영웅주의,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두 가지로 들고 있다.


하나는 남을 헐뜯는 현대인들의 습관이다.


솔제니친은, 스탈린이 너무나 의심하기 좋아하는 인물이어서 ˝불신이 그의 세계관이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현대인들 모두다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서 의심의 대가들로 군림하고 불신의 습관들에 길들여져 있다. 따라서 영웅주의는 자동적으로 의심받게 된다.

우리는 매스 미디어의 영향을 너무나 받아서 다들 뉴스앵커나 기자로 둔갑해 버렸다. 사소한 술자리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건과 환경과 삶에 대해 비판하고 비난하기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또 하나는, 실제로 영웅이 이전보다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영웅적인 자질이 어떤 영예로운 성취와 연계되어 있었다.
진정한 성취나 업적을 이룩한 영웅의 자질-그것이 인격이든, 덕이든, 지혜이든, 예술이든, 스포츠든, 전쟁이든 간에-에 영예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매체, 멀티미디어가 유명세를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을 제공한다. 즉, 진정한 위대함에 수반되는, 예를 들면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가진 힘, 전투능력, 사람에 대한 믿음, 아내와 자식에 대한 신앙,목숨을 내건 검투사로서의 싸움...이러한 것들이 없이도 순식간에 가공된 명성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영웅이 아닌 유명인사의 부류the famed로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 유명할 뿐이다.
매체는 그 사람의 인격과 다른 어떠한 위업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그의 외적인 이미지에 무게중심을 더 둔다는 것이다.


이제, 영화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볼까 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는 영웅주의를 다룬 영화이다.


로마제국의 번성기의 한 인물, ‘막시무스‘라는 한 전쟁영웅(장군)이 제국의 황제인 시저(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왕권을 은연중에 승계 받지만 이를 안 시저의 아들 코모두스의 계락으로 막시무스는 죽음의 직전까지 갔다가 처절한 검투사의 노예생활로 전락하게 되고, 코모두스가 황제가 되는 대립구도는 영화의 흥미를 더 해준다.
영화에서는 막시무스의 인격, 전쟁능력, 리더쉽, 진정한 영웅의 자질, 황제의 자리에 욕심을 두기보다는 선왕(先王)의 뜻에 더 큰 대의(大義)를 두는 범상치 않은 자질,
그리고 볼거리-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에게 있어 최고의 관심-를 제공해준다. 스펙타클한 전쟁scene, 원형경기장에서의 결투scene...그리고 이 영화의 감독이 리들리 스콧트Ridley Scott임을 기억하자.


군중심리...변덕스러움이 그들의 특징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도 유대백성들의 군중심리가 한 몫을 한 것을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가 없다. ‘글래디에이터‘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등장한다. 그 군중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고자하는 황제는 결국 막시무스와의 결투에 지고, 선은 악을 이긴다.
막시무스도 결국 유명을 달리하는데 그가 그토록 바랬던 아내와 아들이 있는 그 곳으로 가게 된 것이다.

마치 바람이 갈대밭을 만지작거리면서 부는 것처럼
막시무스가 갈대 숲을 손으로 헤치면서 움직이는 그 첫 장면과 마지막장면은 참 인상적이다.


영웅부재시대의 영웅주의의 아름다운 영화를 한 편 감상한 기분이 멋쩍다. 우리 시대는 과연 영웅이 존재할 수 있을지 회의의 미소만이 감돌뿐이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영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여론과 매체의 영향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만이 가진 진정한 소명the call-글레디에이터의 ‘막시무스‘처럼-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리라.

영웅이 되고자하는 사람이라면 여론에 먼저 무감각해지는 훈련을 해야할 것이다.여론은 절대 중립적이지 않다. 자본과 권력과 상업성에 의해 언제나 치우치는 것이 여론이다. 그 여론에 의존하지 않고 삶을 거닐 수 있는 조건은 오로지 ‘소명‘뿐 일 것이다.
그러한 자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고백처럼-윈스턴 처칠이 한 번은 동료 국회 의원의 악한 공격을 받는데도 왜 고통스러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존경한다면 그의 의견에 신경을 쓰겠지요.
그러나 그를 존경하지 않는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자기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자신의 삶과 삶의 방향the call을 감당하리라.


˝내게는 단 한 분의 청중the audience of one밖에 없다.
네 앞에서는 내가 입증해야 할 것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이 모토motto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 막시무스에게 너무나 적절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난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요즘 읽고있는 오스 기니스의 ‘소명the call‘이란 내용과 너무나 오버랩O.L이 되어서 책과 영화를 오락가락하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2007년에 적은 듯한데, 적절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텍스트는 날 떠나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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