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취임 첫날, 트랜스젠더 광기를 멈추겠다] 선언
https://youtu.be/YIjg6FFAS8k
젠더는 정말로 현대 정치의 최종 심급일까. (이 뉴스 기사보다 유튜브 댓글들이 더 무섭다. 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좀처럼 떨쳐내지 못하는 갇힌 사고방식의 퀴어하지 못한 페미니스트이지만… 아니 그게 뭐든 정체성에 의존하게 되어버리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열심히 읽어보고 써보지 않았더라면 댓글들이 겨냥하는 말들에 아마도 공감하고 있었을. 그런.)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가 재빠르게 표적 삼는 것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에는 자꾸 식은땀이 난다.
미국 사회(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의 PC 주의를 진저리치는 소위 좌파 연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언어는 계속해서 나빌레라 수준으로 섬세해지는 데, 어떤 말들은 너무도 난폭하고 둔탁해지고 거기에 또 어떤 진실을 담지하고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 트럼프 당선을 호재로 여기는 종류의 담론은 또 어떠한가.(나는 혹하는 편이다. 윤석열이 시켜준 민주주의 공부처럼. 사건의 효과는 알 수 없으므로.)
나 자신조차도 빠른 답을 얻어내고 싶어서 질문-질문-질문-을 견디지를 못한다. 공백의 시간을. 침묵의 시간을. 견디기가 어렵다. 그 대답 없는 물음표들이 한가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나는. 우리는. 더 침착하게 느끼기를 당부 받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정말로. 느끼는 것은 언제나 인식의 기준인데. 인식을 다르게 어떻게?
질문하는 게 벅차서 알코올로 마취를 자주 했는데. 그러다 준알중상태에 빠져있다는 인식을 한 후로는 책으로 도피를 하기로 했고. 덕분에 이브에는 환멸과 몰락을 사랑하는 니체를 읽고 크리스마스 당일(오늘)에는 사사키’s 푸코를 읽었다. (텍중…)
규율권력이 가져와야 하는(했을) 주권권력의 몰락이 돌연 인종주의를 매개로 생명권력과 만나는 지점.
이 이항대립을 싫어하는 철학자는 양립하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유착되는 그 지점에 도달한다. 도달.
“(584)우리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무엇으로부터? ‘다른 인종, 열등한 인종, 반-인종의 생물학적인 위협으로부터.’”
“(587) 인종 간의 투쟁은 주권 국가의 것이 된다. 국가의 ‘단일 인종’적 정통성을 옹호하는 요소가 된다. 인종주의라는 주제는 국가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담당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때 앞의 인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의학적-규범화적인 기술’, 즉 생물학을 대거 흡수한다.”
“(594) 그렇다. 생명 권력은 본질적으로 생명을 늘려가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 권력이었다. 인구 증가율을 높이고, 이환율과 사망률을 낮추고, 평균수명을 높인다. 이를 위해 인구 분포와 인구동태를 파악하고, 이런저런 환경과 주거의 변수를 ‘조정’하려는 권력이었다. 강제적으로 ‘살게 만드는’ 권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은 어떻게 죽일 수가 있을까요?’ ‘죽게 내버려 둘 수 있을까요? 이 권력은 본디 살게 하는 것이 목표인데.’ 삶을 유지하고, 보존하고, 증식하려 하는 생명 권력이 살인을 할 때 누구를 죽이는가? 아니, “누구”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다. 어느 ‘인구’를 죽이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푸코는 즉시 대답한다.
“여기에 바로 인종주의가 개입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사실, 인종주의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선 권력이 받아들이는 삶의 영역에 단절을 도입하는 수단입니다. 살아야 하는 자와 죽어야 하는 자 사이의 단절입니다. 인류라는 생물학적인 ‘연속체’에 이런저런 인종이 출현하고, 인종을 구별하고, 인종의 서열을 매겨서 어떤 인종은 우수하고 다른 인종은 열등하다는 평가를 하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권력이 받아들이는 생물학적인 영역을 세분화하는 방법이 됩니다.”
인종주의는 ‘세분화’한다. 생물학적 연속체 사이에 ‘단절’을 도입한다. …. 그 ‘생물학적인’‘연속체’에 단절을 가져오고, 경계선을 가져오고, 인종 간의 ‘구별’을 도입하고, 기꺼이 ‘열등’하다고 판단된 인종의 ‘인구’를 죽일 수 있게 된다. *즉, 학살이 가능해진다.* ‘죽게 내버려둔다’가 기묘하게 ‘죽게한다=죽인다’와 유착해 폭주한다”
“(599)푸코는 단언한다. 나치스보다 규율적이고 생명권력적이었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연결을 끊어내는 것이 특기인 근대인(나는 주로 서백남이라 표현한다)은 명확한 단절이 있어야 평안하므로 경계선을 교란하는 존재를 견딜 수 없다. 현실은 회색지대라고. 혹은 스펙트럼이라고. 아니. 그 혼란과 교란이 바로 삶의 조건이라고. 그러므로 스스로의 불안함과 취약함을 싹둑 잘라내버리고 그걸 자극하는 존재를 악으로 규정하고 경계선을 세우는 것은 지나치게 근시안적이며 빠른 대답인 거라고.
불안에 머물러 있자고. 조금은 열어두자고.
나를 혼란하게 하는 존재들로부터 다른 앎을 생산하자고.
그게 오늘의 크리스마스에 내가 내게 주고 싶은 인식이었나보다.
책을 덮고, 요리를 하고, 한잔해야겠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메리크리스마스.🎄
메뉴는 트러플을 추가한 뇨끼였다죠.
푸코는 단언한다. 나치스보다 규율적이고 생명권력적이었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 P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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