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로보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민서각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몇년 전에 영화화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화이트 아웃>의 원작자, 심포 유이치의 작품 <스트로보>가 출간되었습니다. 사진가가 주인공이고, 사진을 소재로 한 다섯 편의 연작 단편을 모은 단편집인데 재미있는 시도가 있습니다. 사진가가 쉰살이 되는 첫 번째 단편부터 시작해 마흔 두살, 서른 일곱 살의 모습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리고 있습니다. 많은 관객들이 사랑한 우리 영화 <박하사탕>과 비슷한 구조로 보시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각 단편의 제목을 소개해 드리면...

제5장 영정| 50세

제4장 암실 | 42세

제3장 스트로보 | 37세

제2장 한순간 | 31세

제1장 졸업 사진 | 22세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진을 소재로 한 단편집이라 읽으면서 그동안 찍었던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읽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아르바이트한 돈을 탈탈 털어 무려 비행기를 타고 강릉에 놀러갔다가 돈이 떨어져 비참한 2박3일을 보냈던 일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 어디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밤새도록 강릉 바다만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낡이 밝아 해가 떴습니다. 모두 해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못하고 그 감흥에 빠져 있었는데 마침 뒤에 있던 친구 녀석 하나가 해를 바라보는 우리 일행의 뒷모습을 카메라로 찍었습니다. 그렇게 나온 사진은 찬란한 아침 해를 보며 저 높이 떠오르는 붉은 태양처럼 희망찬 미래를 다짐하는 남자들의 뒷모습이 멋지게 담겨 있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사진 몇 장쯤은 찍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은 가도 사진은 남습니다. 그 사진을 보며 가끔 흐뭇하게 미소짓고, 때로는 눈물짓기도 하지요. 그러고 보면 오래된 앨범 속에 꽂혀 있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생각보다 큰 것 같습니다.  

 

<스트로보>에도 그런 감동이 있었습니다. 각 에피소드마다 핵심이 되는 사진 한 장이 있고, 그 사진에 담긴 비밀이 풀리는 결말에서는 눈물 한 방울이 눈에 저도 모르게 고이게 되더군요. 작가인 심포 유이치가 가장 신경쓴 부분은 역시 감동과 재미인 것 같습니다. 매 에피소드마다 사진을 매개로 한 감동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동은 억지스럽거나 과장되지 않은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감동입니다. 더 파고들면 눈물의 홍수를 만들어낼 수 있을만한 장면에서도 작가는 살짝 멈추고 숨을 고릅니다. 우리네 인생에서 사진 한 장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설교조나 가르치는 듯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고요. 사진의 의미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는 정도로 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소품의 느낌이 나지만 사실 소설(小說)은 소설이지 대설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가 좋습니다. 섭씨 100도로 들끓는 작품이 아닌 인간의 체온과 같은 섭씨 36.5도 정도의 따스하고 안온한 기분이 드는 작품입니다.

 

미스터리 소설가로 유명한 작가답게 미스터리적인 재미를 주는데도 주력하고 있습니다. 각 단편들은 모두 일정한 미스터리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자 사진으로 일가를 이룬 주인공의 사진 선배가 어느 순간부터 여자를 찍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 하는 의문이 주인공과 독자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이 작품에는 그런 일상사의 미스터리에도 시선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작가가 직접 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네요.

 

또한 다섯 장면에는 모두 일종의 수수께끼를 설정해보았습니다. 다만 무엇이 사라졌다거나, 누가 수상한 인물인가 하는 그런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살인이나 불가사의한 사건을 만나게 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되돌아보면 이상하게 보였던 사람의 행동에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 이면에 그 사람의 숨은 본심이 드러나게 되는 경우도. 시각을 바꾸면 이런 상황들은 충분히 미스터리로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가장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무리 없는 미스터리가 되는 게 아닐까.

 

살인이나 실종 등의 범죄가 나와야만 미스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불가해한 것은 사람이 아닐까, 그런 불가해한 사람과 불가해한 행동을 그려보는 것도 좋은 미스터리가 될 수 있다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고 공감이 갑니다.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작품이라 누가 보셔도 크게 후회하지 않을 연작 단편집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위에 적은 것 같은, 남들이 들으면 하나도 재미없지만 저에게는 큰 의미로 남아있던 사진에 대한 기억까지 떠오르게 만든 잊지 못할 작품이었습니다. <스트로보>를 읽고 옷장 깊숙한 곳에 쳐박아 두었던 앨범의 먼지를 탈탈 털고 지난 추억에 잠겨보시는 경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사진이란 참 좋은 거예요."

히로에가 사이드보드 쪽을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구로베가 글라스를 손에 든 채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바로 그리운 옛날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걸."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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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조각상의 그림자 - 상 - 로마의 명탐정 팔코 2 밀리언셀러 클럽 23
린지 데이비스 지음, 정회성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청동 조각상의 그림자>는 전편 <실버 피그>에 이은 로마 시대 탐정 팔코 시리즈의 제2작이다. 큰 기대를 안고 <실버 피그>를 보았지만 약간 실망했는데, 이번 작품은 전편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실버 피그>나 <청동 조각상의 그림자>나 추리적인 요소는 사실 약한 편이다. 그럴싸한 트릭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치도 못했던 의외의 범인이 나오지도 않으며, 반전이 탁월하지도 않다. 다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 로마의 생활상이나 재치꾼 팔코의 재담, 될듯 말듯 아슬아슬한 로맨스 등의 요소가 작품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추리소설로서의 기대를 조금 낮추고, 그냥 추리적 요소가 가미된 대중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꽤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다.

 

로렌스 샌더스의 <맥널리 시리즈>도 사실 추리적 재미는 적은 편이지만 작가 특유의 유머와 느긋한 분위기에 취해 만족스런 독서를 할 수 있는 것처럼 린지 데이비스의 팔코 시리즈를 처음 접하는 독자도 그런 점을 염두에 두라고 조언하고 싶다. 우물에서 숭늉 내놓으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책에서 부족한 부분만 너무 트집잡지 말고 작가가 신경쓴 다른 재미를 찾아 보시라는 부탁을 드리는 바이다. 또한 <청동 조각상의 그림자>는 전편에서 다뤘던 사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시간적 배경도 전편의 열흘 후에 불과하다. 따라서 전편을 읽지 않으면 내용 이해도 곤란하고, 재미도 현저히 줄어드니 꼭 순서대로 읽어 보시기 바란다.

 

전편에서 황제를 끌어내리려는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막은 팔코, 사건의 뒤처리를 하고 있는데 아직 음모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쿠데타 세력의 잔당이 여전히 남아 제국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팔코는 황제의 특명을 받고 쿠데타를 완전 분쇄하기 위한 모험을 떠난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음모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팔코를 처치하려고 눈에 불을 켜기 시작한다. 하지만 팔코는 로마 제국의 운명보다는 신분 차이로 이별을 결심한 연인에게 더욱 신경이 쓰이는데...무수한 위기를 넘기고 마침내 드러난 음모의 실체는 무엇일까.

 

2권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나오는 사건은 많지 않은 편이다. 특히 1편은 로마 시대 휴가지인 바닷가에서 소일하는 내용이 반이다. 그래도 이런 내용이 재미의 핵심이다. 로마 사람들은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며 휴가를 보냈을까, 하는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책을 어디서 또 만난단 말인가. 작가가 고대 로마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쓴 티가 팍팍 나는 대목들이 도처에서 튀어나온다. 여러모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장면들이 많으니 로마 마니아(?)들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추리적 요소는 전편보다는 많이 나오는 편이고, 더 잘 짜여져 있다. 작품 초반부터 쏠쏠히 등장하는 복선들이 후반 음모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하나씩 들어맞는 걸 지켜 보는 짜릿함도 있다. 작가가 추리소설의 작법 면에서 점점 발전하고 있다는 게 보인다. 그래서 3편 <비너스의 구리반지>는 어떨지 기대해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작품의 최고 강점은 유머러스한 팔코의 재담과 연인 헬레나와의 로맨스이다. 입만 열면 재치있는 농담을 쏟아내는 팔코는 그런만큼 헐렁해보이지만 꽤 귀엽고 매력적이다. 언제나 유쾌한 팔코가 귀족에다 부자인 연인 헬레나를 사랑하면서도 놓아줄 것을 결심하는 대목에는 마음이 짠해진다. 만남과 헤어짐, 말다툼과 입맞춤을 반복하는 두 연인이 결국 사랑에 골인할 것인가 하는 것이 이 긴 작품을 끝까지 흥미롭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인 것 같다.

 

전편 <실버 피그>보다는 한층 나아진 모습을 보이는 작품으로, 혹시 전편에 실망하신 분들도 다시 한 번 잡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재담꾼 팔코가 정의를 위해, 사랑을 위해 칼을 뽑는 최후의 대결 장면에서는 본인도 팔코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별점: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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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기억
다카하시 가츠히코 지음, 오근형 옮김 / 이야기(자음과모음)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붉은 기억>은 기억을 소재로 한 단편집입니다. 총7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두 길지 않은 분량이고 내용도 재미있어 금방 읽히는 작품집입니다. 작가 다카하시 가츠히코는 일본 추리소설계에서 꽤 유명한 사람으로 83년에 쓴 데뷔작 <샤라쿠 살인사건>은 일본 걸작 추리소설 리스트에서 항상 상위권에 위치한 작품으로 꼭 읽어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작가 다카하시 가즈히코는 이 작품으로 에도가와 람포상을, <호쿠사이 살인사건>이라는 작품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 장편상을, 본서 <붉은 기억>으로 무려 나오키 상까지 탄 대단한 작가입니다.  

 

<붉은 기억>은 위에도 언급했듯이 작가가 인간의 기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테마로 7편의 단편을 실었습니다. 제목도 표제작인 <붉은 기억>,<뒤틀린 기억>, <말할 수 없는 기억>, <머나먼 기억>,<살갗의 기억>, <안개의 기억>, <어두운 기억>으로 전부 기억이라는 이름이 들어갑니다. 전체적으로 환상소설의 분위기에 공포소설, 추리소설의 분위기와 장점들이 녹아들어가 무언가 신비스럽고 긴장감 넘치는 독서를 할 수 있습니다.

 

기억이라는 한 가지 소재로만 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편들이 전부 나름 특징이 있고 재미있어 만족도가 높은 단편집입니다. 구체적으로 내용을 소개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몇몇 작품의 분위기만 보자면...

 

<뒤틀린 기억>에서는 어렸을 때, 홀어머니가 자신을 남겨두고 자살한 여관을 성장해서 다시 찾아가는 작가가 나옵니다. 여관에서 그 옛날 어머니를 꼭 닮은 여인을 만나 작가는 억압됐던 기억이 점점 돌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점점 밝혀지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충격적인 진상이란?

 

<말할 수 없는 기억>은 성공한 디자이너가 어린 시절의 술래잡기를 기억하며 시작됩니다. 별다를 게 없던 아이들의 놀이였지만 웬지 그날의 기억만큼은 강렬하죠. 디자이너는 그당시 같이 놀았던 친구들과 다시 모여 그날에 있었던 일을 재구성합니다. 소름끼치는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들입니다. 판도라의 상자와 같이 애써 봉인해 놓았던 기억들이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열리고, 주인공은 악몽같은 과거의 진실과 마주친다는 내용이죠. 모두 환상소설+공포소설 분위기지만 유독 추리소설의 면모를 제대로 갖춘 <안개의 기억>이 저는 제일 좋았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26년전에 일어난 일본 여인의 실종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단편들이 모두 동북지방의 이와테현이라는 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알고보니 작가의 고향이라더군요. 본문 중에 냉면으로 유명한 음식집은 조용필도 와서 감동했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조용필도 감동했다니 먹어보고 싶네요.

 

간결하면서도 품위있는 문장과 억지스럽지 않은 반전, 소름끼치는 긴장감과 공포감, 기억이라는 소재가 주는 여운을 잘 살린 멋진 단편집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역자의 말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더군요. 원문 그대로 써 보겠습니다.

 

"단지 이야기의 전개를 답답하게 하는, 너무 빈번하게 나오는 낯선 지명들과 지루하게 나열된 한두 문장은 역자의 재량으로 문맥의 흐름을 가늠하며 줄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역자분이시더군요. 아예 다카하시 가즈히코와 공저를 하지 말입니다. 작가 분이 피땀흘려 쓴 창작물을 본인이 읽기에 지루하다는 이유로 재량으로 줄이다니 어떤 생각으로 그러셨는지 궁금하네요.

 

 

별점: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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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인한다 1
조르지오 팔레띠 지음, 이승수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제목부터가 강렬한 <나는 살인한다>는 한 마디로 유럽식으로 맛을 낸 미국식 햄버거다. 작가 조르지오 팔레띠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50살이 넘은 늦은 나이에 데뷔작 <나는 살인한다>가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20여개국에서 번역 출판되어 절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유럽 색이 지나치게 강하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미국의 현대 스릴러를 몬테카를로의 이국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펼쳐놓은 작품이니까...

 

밤이 되도 불빛이 꺼지지 않는 환락의 도시, 모나코 왕국의 몬테카를로. 인기 라디오 프로가 생방송중인데 어딘지 모를 곳에서 전화가 온다. 자신이 '하나이자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밝힌 그는 곧 살인을 할 거라는 예고를 한다. 그날 밤, 유명한 카레이서와 그의 애인인 체스 선수가 잔인하게 살해된채 발견된다. 엽기적인 것은 범인이 두 남녀의 얼굴 가죽을 완전히 벗겨 갔다는 것...그러고는 그들의 피로 탁자에 써 놓은 한 마디...'나는 살인한다'

 

유명인들의 얼굴을 벗겨가는 살인마에 대항하는 존재는 전직 FBI요원 프랭크 오또브레. 한니발 렉터에게 클라리스 스탈링이, 자칼에게는 르벨 총경이 대항마인 것처럼 살인마를 잡을 사람은 프랭크 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자살로 상심해 경찰계를 떠난 상태. 계속되는 살인에 어쩔 수 없이 복귀하면서 예의 날카로운 추리력과 직관으로 순조롭게 수사를 계속하지만 희생자 중 한 명의 아버지가 미국 군부의 정점에 오른 인물임이 밝혀지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딸을 잃은 미 육군 장성은 직접 몬테카를로에 날아와 범인을 자신이 잡겠다며 설치고 나선다.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건은 과연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가? 하나이자 아무 것도 존재는 과연 누구일까? 결코 결말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빗나갈 테니까...

 

대단히 뛰어난 작품이다. 솔직히 커다란 판형에 2권 분량이라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특히 유럽산 스릴러라 인물이나 배경 등이 모두 프랑스 혹은 이탈리아 이름이라 묘하게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동안 미국이나 일본의 도서에만 너무 매진한 것 같아 반성중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페이지가 넘어가서 사건이 점점 복잡해지면 재미가 확 살아난다.

 

연쇄살인범과 상처를 간직한 형사라는 전형적인 현대스릴러의 대결 구도지만 뜻밖에 옛날 본격 미스터리 장치를 사용하면서 작품은 진행된다. 희생자가 죽어가면서 남긴 피로 쓴 글씨가 다잉메시지가 되고, 암호를 해석하는 등 고전 미스터리의 향수를 자극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하지만 클라이막스, 대결 장면의 빠른 페이스나 모든 사건이 해결됐다고 생각했을 때 또 하나의 반전이 나오는 것은 현대 스릴러의 장점을 충실히 받아들인 듯하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제프리 디버(<코핀 댄서>)를 연상케 한다. 제프리 디버의 작품처럼 이 작품도 반전이 뛰어나며, 현대 스릴러 물에 고전적인 추리물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 말이다. 범인도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인물이 아니며, 작품의 초반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인물 중에 한 명이다.

 

유럽 작가의 작품이라 그런지 묘사나 비유 등의 수사법도 화려하다. 작가의 문장력도 좋은 것 같다. 그래서 작품이 좀 더 품위있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긴장감을 훼손하는 단점은 있다. 이 작가는 어떤 상황이 나와도 문학적으로 한 번 짚고 넘어가는 버릇이 있어, 긴박한 장면에서는 조금 답답할 때가 있다. 여러모로 수준높은 데뷔작이었으며 <양들의 침묵>과 견주어도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작품이었다. 작년에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추리소설의 홍수 속에 사장된 감이 있는데 적어도 이렇게 완전히 묻혀 버릴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권이기 때문에 가격 부담이 제법 크지만 기회가 닿으면 꼭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은 작품이다.

 

작가 조르지오 팔레띠는 재미있는 이력을 가졌다. 무슨 가요제에서 비평가상을 탄 적도 있는 것처럼 음악계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TV 코미디에서 활약하기도 했단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에서도 노래로 범인의 흔적을 뒤쫓는 장면들도 나온다. (산타나의 노래가 특히 중요하게 쓰인다..) 위에서 제프리 디버의 작품과 <나는 살인한다>를 비교하는 말을 썼는데 실제 작가의 경력도 비슷한 것 같다. 제프리 디버도 포크송 음반을 낸 적이 있고, 늦은 나이에 데뷔한 것이 말이다.

 

실제로 작가는 후기에서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훌륭한 작가는 소박하고 정감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걸 보여줬던 친구 제프리 디버에게 감사합니다."

제프리 디버 역시 화답을 한다.

"조르지오 팔레띠는 세계적인 수준의 위대한 작가다."

두 사람이 미국과 유럽의 스릴러 마스터와 마에스트로로 좋은 우정을 쌓으며 앞으로도 굉장한 작품을 발표해주길 기대한다.

 

별점: ★★★★

 



 

 

 
 
 
 
 
 
 
 
<작가 조르지오 팔레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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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6-02-14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읽었어요. ^^ 솔직히 다잉 메시지는 좀 실망스러웠는데.. ^^;;;
캐릭터가 마음에 들어서, 좀 더 읽고 싶었답니다.

jedai2000 2006-02-14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 분만...)

다잉메시지도 그렇고, 범인 집에 비밀통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날 때도 좀 어설펐죠. 거기 빼놓고는 크게 완성도를 떨어트리는 부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프랭크 오또브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후속작이 나올 것 같은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기대해보자구요..^^;;

jedai2000 2006-02-14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해랑님...땡스 투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실 마일리지가 정확히 9,900원이었어요. ^^;; 뭐 한 권 사고 10,000원 채워서 책 한 권 또 사야지 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주문이 가능하게 됐네요. 크나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만약에 읽고 재미없으실까봐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만 좋은 작품이니 꼭 즐거운 시간을 보내실 수 있을거란 약속을 드립니다..^^;;

jedai2000 2006-02-17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습니다. ^^;; 사실 책 살 것이 좀 있어서 주문했어요. 적립금은 10,000원 넘겼구요. 제가 막 조른 것 같네요. ^^;; 심려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망량의 상자> 정말 재미있으니까 기대하시구요. 저도 페이퍼에 올라오는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경마장 살인사건 밀리언셀러 클럽 9
딕 프랜시스 지음, 이순영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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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살인사건>은 경마 미스터리의 거장 딕 프랜시스의 처녀작이라고 합니다. 데뷔작답지 않은 완숙한 기량이 눈에 띄고, 또 딕 프랜시스 작품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다 들어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첫 작품에서 이 정도 수준으로 데뷔한 작가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네요. 저는 여태까지 그 사람 책 3권을 읽어 봤는데 모두 재미있었습니다.



장애물 경마 대회 도중 강력한 우승후보 빌이 갑작스런 사고로 낙마를 하고 사망을 합니다. 빌을 뒤따르며 달리던 라이벌이자 친구, 앨런 요크는 친구가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 무언가를 본 것 같습니다. 경주가 끝나고 친구가 사망한 현장으로 간 앨런은 그곳에서 장애물 위에 둘러쳐진 철사를 발견합니다. 빌은 무사히 장애물을 넘었지만 그 위에 쳐 있던 철사에 걸려 넘어져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앨런은 친구의 죽음을 둘러 싼 비밀을 파헤치기로 결심합니다. 여느 딕 프랜시스 작품과 같이 무수한 위기가 그에게 다가올 것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작가 딕 프랜시스는 그의 재미있는 작품 만큼이나 흥미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실제 기수였던 사람으로 350번 이상 우승하고, 챔피언 기수로 두 번 선정되는 등 그쪽으로도 명성을 날렸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부상으로 은퇴하고 경험을 살려 경마 관련 기사를 쓰는 기자로 일했답니다. 그러다 생활고에 못 이겨 소설을 썼는데 그게 바로 <경마장 살인사건 Dead cert>입니다. 그 뒤 39편의 경마 미스터리를 쓰고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생존해 계시는데, 금슬이 굉장히 좋았던 아내가 2000년 사망하고 나서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아내는 그의 작품의 여성 캐릭터 창조에 도움을 주기고 하고, 리서치를 돕기도 하는 등 아내 이상의 파트너, 동반자였던 모양입니다.



작가가 여러 번의 치명적인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 때마다 불굴의 의지와 투혼으로 재기한 것처럼 그가 묘사하는 인물들도 비슷합니다. 그의 주인공들은 시리즈 캐릭터가 거의 없이 매 편 독자적인 인물이지만 사실 모두 같은 성격입니다. 전형적인 신사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육체적 완력과 행동력, 결단력, 지성 등을 겸비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위기가 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두뇌와 근육을 이용해 위기를 헤쳐 나갑니다. 또 작가가 평생 아내만 사랑했던 것처럼 작품 속의 주인공들도 한 여성만을 깊이 사랑합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맺어지죠. 한 마디로 이상은 높게, 사랑은 뜨겁게, 열정은 가슴 깊이 묻고 사는 싸나이 중의 싸나이들이라는 것입니다. 뭐 이런 인물들이 비현실적일 수도 있겠고, 질릴 수도 있겠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거의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니 소설에서라도 실컷 봐두는 것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사실 딕 프랜시스 작품은 일종의 모험소설, 내지는 첩보소설의 분위기가 강하게 납니다. 비밀을 간직한 조직에 용감한 주인공이 잠입해 정보를 모으고, 그러다 치명적인 위기에 빠지면 멋지게 탈출해 진상을 밝혀낸다는 게 꼭 그렇죠. 더구나 그 와중에 아름다운 여성과의 로맨스도 전개되니까요. 매 작품마다 이런 구조로 약간 천편일률적인 느낌이 나서 손이 잘 가는 작가는 아닙니다. 그런데 막상 읽다 보면 또 그렇게 몰입이 잘되니 대단한 작가예요. 부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의 작품이 대부분 대동소이하다고 해서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작품들의 수준이 대단히 높으니까요.



<경마장 살인사건>은 세 번째 작품인 <흥분 For Kicks>만큼 흥분의 도가니탕을 연출하지는 못하지만, 후반부 말을 타고 탈출하는 장면의 긴박감은 대단합니다. 딕 프랜시스의 작품은 모두 재미있습니다. 추천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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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랑데뷰 2006-01-26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흔히 말하는 기본은 하는 작가인듯합니다. 게다가 워낙 필력이 좋으시니 ^^

jedai2000 2006-01-26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그 기본의 수준도 대단히 높지요. 부러울 따름입니다. <흥분>같은 작품을 한 권만 써도 대단한데 39권을 쓰다니..-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