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머즈 하이 1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박정임 옮김 / 함께(바소책)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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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본의 손꼽히는 베스트셀러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의 2003년 작품. 세계 최대의 항공기 추락 사건을 맞아 취재 전쟁을 벌이는 지방신문사의 기나긴 일주일이 박력있게 펼쳐진다. 1권 256쪽, 2권 248쪽이라는 극악의 분권으로 이토록 재미있고 좋은 책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린 출판사의 무신경에 화가 날 정도다. 그러나 분권으로 상한 마음을 너그럽게 용서해준다면 이보다 재미있는 책은 쉽사리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평생 일선 취재기자로 남고 싶었던 고참 기자 유키가 52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항공기 추락 사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총괄데스크가 되면서 긴장감은 고조된다. 사건의 경중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부장 기자들의 정치싸움과 특종을 터뜨리고 싶은 욕심에 불만이 고조된 부하 기자들 사이에서 유키는 고군분투하기 시작한다. 국내에 소개된 전작 <사라진 이틀>을 보신 분들이라면 요코야마 히데오가 조직안에서 벌어지는 암투를 얼마나 잘 그리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클라이머즈 하이>에서는 조직내 파워게임을 그리는 작가의 솜씨가 더욱 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왼쪽 페이지 첫째줄을 읽고 있던 눈이 순식간에 오른쪽 페이지 맨 아래줄로 움직여버린다. 놀라운 흡입력이다.

 

항공기 사고가 기둥 줄거리라면 산을 좋아하는 친구 안자이와의 우정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들과의 반목과 화해를 그리는 것이 보조 줄거리이다. 기나긴 취재 전쟁을 끝내고, 결국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유키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단 두 작품을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작가의 취향이 짐작이 가는데, 미스터리의 얼개를 빌려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를 추구하는 것이 작가의 장기라고 할 수 있겠다.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눈물을 참기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중년남성의 심리 묘사에 탁월함을 보인다. 일만 알고 살아온 인생이지만 가족도, 보람도, 명예도 잃은 중년남성의 자조와 비탄의 정서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러나 결국 그의 주인공들은 참된 인생의 의미를 깨달으며 지난 날을 따뜻하게 바라보게 된다. 저무는 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묘사할 줄 아는 작가다.

 

다만 감동에 치우쳐 마무리가 작위적일 정도의 감동 일변도로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사라진 이틀>에서도 이 점에 불만을 가진 독자들이 많았다. 무언가 그럴듯한 미스터리가 있는 것처럼 독자를 끌고 가다가 결국 한바탕 눈물로 마무리짓는다는 것이다. <클라이머즈 하이>에서도 이런 불만에서는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결말 직전까지의 놀라운 박진감은 진도 7의 메가톤급 지진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았다.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는 12년 동안 기자로 재직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신문사의 모습을 이토록 정확하게 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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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3-16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는 미스터리가 아닌 휴머니즘을 바탕에 둔 인생 자체가 미스터리라는 시각인 것 같아요.

한솔로 2006-03-17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잇, 보관함에 있는 걸 장바구니로 끄집어내야겠군요ㅎ

jedai2000 2006-03-17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동감입니다..^^;; 인생 자체가 미스터리라는 시각이 심포 유이치랑 웬지 비슷한 거 같습니다.

한솔로님...재미있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쓸쓸함의 주파수
오츠 이치 지음, 채숙향 옮김 / 지식여행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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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츠 이치는 젊은 작가입니다. 1978년생으로 저와 한 살 차이 밖에 나지 않네요. 열일곱 살 때, 잡지의 소설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고 합니다. 상당히 촉망받는 젊은 작가로 2002년작 GOTH가 대표작입니다. GOTH라는 작품은 호러소설의 분위기와 본격 미스터리의 분위기가 공존하는 단편집이라는데 평이 대단히 좋아 꼭 읽어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국내에 오츠 이치는 <너밖에 들리지 않아>와 <쓸쓸함의 주파수>라는 두 권의 단편집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쓸쓸함의 주파수>에는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첫 작품인 <미래예보>에서는 미래가 보이는 소년이 자신이 본 미래를 노트에 적습니다. 마치 유명한 일본 만화 <데스노트>와 같은 설정이죠. 하지만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작품인 <손을 잡은 도둑>은 깔끔한 소극입니다. 벽에 구멍을 뚫고 도둑질을 하려던 남자, 뚫어놓은 벽에 손을 집어넣다 우연히 한 여자의 손을 잡아 버립니다. 달빛이 아름다운 밤, 벽 사이로 도둑과 손을 맞잡은 여자의 기막힌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세 번째 이야기인 <필름 속 소녀>는 호러풍의 단편입니다. 소심한 영화 동아리 여대생이 우연히 발견한 필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무서운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잃어버린 이야기>는 교통사고로 오른팔의 감각만이 살아있는 남자와 아내와의 소통을 그리고 있습니다.

 

전부 특색이 있는 단편들로 오츠 이치의 다채로운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작가 후기를 보니, 그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전업 작가가 될까 아니면 평범한 샐러리맨이 될까 망설이던 시기가 있었답니다. 대학 이전부터 글을 썼지만 유명 작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글만으론 생계가 곤란합니다. 하지만 기계 부속품 같은 샐러리맨 생활은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죠. 이런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잡지사 편집자가 애절한 이야기 단편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쓴 게 <미래예보>입니다. 이 작품이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이긴 하지만, 아무런 꿈과 비전도 없는 주인공의 출구없는 답답한 생활에서 오츠 이치의 고민이 많이 투영된 듯 합니다. 젊다는 것은 가능성도 많은 법이지만, 그만큼 미래에 대한 암담함에 고민이 많은 시기이기도 하니까요. 젊은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 해볼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미래예보>의 주인공과 오츠 이치에게 괜시리 친근감이 듭니다. 오츠 이치는 딱 저의 세대 작가이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에 더 가깝게 느껴지네요.

 

<필름 속 소녀>는 같은 잡지의 무서운 이야기 특집에 실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래예보>와 <필름 속 소녀>는 의뢰를 받아 아이디어를 짜내서 쓴 것이기 때문에, 자살충동까지 느꼈다고 합니다. 이 작가는 근본적으로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써야지 마음 편하게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나 봅니다. 그래서 우연히 떠오른 착상으로 신나게 써내려간 <손을 잡은 도둑>은 어느 정도 만족한다고 후기에 적었더군요. 제가 보기에도 이 작품이 가장 근사한 단편이 된 것 같습니다. 달밤에 양손을 마주잡은 도둑과 젊은 여자라는 상황도 절묘하고, 묘하게 웃음을 쿡쿡 나게 합니다. 잔잔한 마무리도 인상적인 좋은 단편입니다.

 

하나의 단편집에서도 각각 다른 장르로 재미를 주는 오츠 이치의 재능을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묘하게 매력이 있는 작가로, 쉬운 문장을 구사하며 머리 속에서 바로 그림이 그려지는 회화적인 이미지 표현에 능한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기회가 닿으면 술 한 잔 하고 싶은 친구같은 느낌이 드는 작가였습니다. 현재는 GOTH로 받은 인세를 탕진하며 쓰고 싶은 글들을 마음껏 쓰고 있다고 합니다. 꿈을 이룬 것이 부럽기도 하고, 샘도 나네요. 한창 기세가 올랐을 때 신작을 쏟아내지 않느냐고 주위에서는 면박을 주지만 자신은 지금이 행복하답니다. 작가 소개에 보니 취미는 한 밤중에 조깅하기랍니다. 왜 밤이냐 하면 낮에는 창피하니까. 그런데 밤에도 조깅하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몰래 나무 뒤에 숨어서 발각되지 않기를 기도한다네요. 자기 작품만큼 섬세하고 감수성이 독특한 사람 같네요. 이제부터 저도 이 귀여운 작가의 팬이 되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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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랑데뷰 2006-03-15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하시다가 전업작가로? ㅋㅋ

jedai2000 2006-03-15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오츠 이치와 제가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츠는 GOTH로 대박을 터트려서 이제 고민이 필요없는 위치가 됐죠.
저와 오츠가 가장 다른 게 재능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흑흑.
저도 대박을 쳐서 그 인세로 평생 쓰고 싶은 글이나 쓰면서 소일하고 싶은데...^^;;
 
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지음 / 동방미디어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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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본의 60년대에는 학생 운동이 꽤 과격했다고 합니다. 흔히들 전공투(전학공투회의)라고 알고 계시는 학생 연합과 정부와의 대결이 극심했다고 하더군요. 일본에서는 60년대 대학을 다니며 투쟁에 동참한 사람들을 일컬어 전공투 세대라고 부른다네요. 그런데 이 전공투의 투쟁 방식은 거의 전쟁이나 다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전공투를 다룬 책을 읽어보면 투석전, 화생방전에 육박전까지...이 작품은 전공투 멤버였던 주인공 기쿠치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60년대, 도쿄대에서 투쟁을 하던 기쿠치와 친구 구와노, 유코는 투쟁의 한계를 느끼고 발을 뺍니다. 그런데 구와노가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바람에 기쿠치와 구와노는 도피 생활을 하게 됩니다. 무려 20년이 지난 현재, 기쿠치는 여전히 도피 생활을 하고 있고, 알콜 중독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신주쿠 공원에서 위스키를 홀짝이며 시간을 죽이는데 공원에서 엄청난 위력이 폭탄이 터집니다.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죠. 그런데 사상자 리스트에는 소식이 끊긴 지 20년이 지난 구와노와 유코의 이름이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세 명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있었다, 기막힌 우연이죠. 기쿠치는 사건을 조사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간략한 줄거리였습니다. 보시다시피 흥미로운 내용을 작가는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기쿠치는 수상한 곳을 들쑤시고 다니며 신주쿠 노숙자들, 야쿠자, 폭발 사건 희생자의 집, 거대 기업 등을 방문합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정보를 수집하면서 마침내 사건의 큰 그림을 그리게 된다는 내용이 긴박감 넘치게 펼쳐집니다.

 

1949년생 작가 후지와라 이오리는 역시 전공투 세대로서 도쿄 대학 불문과를 졸업했답니다. 엄청난 학벌이죠? 본서 <테러리스트의 파라솔>로 우수한 미스터리 신인 작가에 수여하는 에도가와 란포상을 탔으며, 그해에 나오키 상까지 수상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작품에 대한 호평도 작용했겠지만 엘리트 작가에 대한 예우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라 보여지네요. 이 작품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같은 시대를 살아남은 친구들에게/ 그렇지 못하고 사라진 친구들에게' 그렇게 이 작품은 작가와 같은 세대를 힘겹게 통과해오거나, 중간에 낙마한 모두들에게 바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개인적인 감상을 적을 차례인 것 같습니다. <테러리스트의 파라솔>이 전공투 세대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간직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건 당연하겠지만,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그렇게 울림이 크지 않습니다. 설마 일본추리소설을 더 재미있게 보기 위해, 깊이 있는 일본 역사 공부를 요구하시는 분은 없겠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작품이 복잡한 플롯에 비해 명쾌함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사건은 정말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사건, 마약, 야쿠자, 신주쿠 노숙자, 테러리스트 까지 벌려놓은 플롯이 많은데 비해 해결 과정에서는 쾌도난마와 같은 명쾌함이 떨어집니다. 범인의 입으로 그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정리하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웬지 찜찜함이 남는 결말이었습니다. 또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는 귀중한 단서를 기쿠치만 알고, 독자들에게는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허무주의+패배주의+숙명론자 같은 기쿠치의 캐릭터도 마음에 들지 않았구요.

 

시간 가는 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는 책이었지만 90년대 일본 추리소설의 대표작이라고는 할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에도가와 란포상이나 나오키 상을 수상한 하라 료나 기리노 나츠오의 수준에는 아직 못 미친다는 게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별점: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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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3-10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짜요. 그래도 주인공 멋있잖아요~

jedai2000 2006-03-10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인공 멋있죠..^^;; 넘 짠가요. 사실 저도 네 개와 세 개 반 사이에서 격렬하게 망설였는데 밑에 적었듯 기리노 나츠오나 다카무라 카오루 정도의 수준에는 좀 부족하다고 생각이 되서 짜게 줬습니다. 그래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상복의랑데뷰 2006-04-20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솔직히 세 개 정도가 맞다고 봅니다. 주인공의 변화가 지나쳐요. 속이 빈 주사위를 보는 것 같다고 해야하나...
 
캘리포니아 걸 - 에드거 앨런 포 상 수상작, 블랙 캣(Black Cat) 9
T. 제퍼슨 파커 지음, 나선숙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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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걸>은 2005년 미국 에드거상 수상작입니다. 세계 유수의 추리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만 선별해 출간하는 블랙캣 시리즈의 9번째 작품입니다. 꽤 호평을 받은 작품이라서 기대를 하고 읽었습니다. 작가 문장력도 좋고, 문학적인 향기가 많이 나는 작품이라 그런 쪽을 좋아하시는 독자분들은 꽤 마음에 들어하실 것 같습니다.

 

1954년 사소한 시비로 형제간의 3:3대결을 벌이게 된 베커 형제와 폰 형제. 싸움은 베커 형제의 완승으로 끝나지만 그날 베커 형제는 평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한 소녀를 알게 됩니다. 7살 난 폰 형제의 막내 동생 자넬이 바로 그녀입니다. 폰 형제를 묵사발낸 베커 형제는 부모님의 명령에 따라 폰 형제에게 사과를 하러갑니다. 거기서 어린 자넬이 눈에 멍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자기들에게 폭력을 당한 폰 형제가 자넬에게 폭력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베커 형제는 폭력이 폭력을 부른다는 사실을 처음 배우게 되는 거지요.

 

세월이 흘러 베커 형제 중 장남 데이비드는 목사가 되고, 차남 닉은 형사가, 삼남 클레이는 월남전에 참전하고, 막내 앤디는 기자가 됩니다. 1968년, 형제 모두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자넬 폰이 목이 잘린 시체로 발견된 것입니다. 자넬 폰은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끔찍하게도 목이 잘린 시체가 됐을까요? 이 부분은 닉의 입을 통해 작가가 요약한 내용을 부분 발췌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자넬. 주근깨 얼굴. 양 손에 오렌지를 들고 있었던 소녀. 발레 치마와 기타...열네 살 때부터 마약과 술에 빠진 아이...나중에 미스 터스틴으로 선발되었다가 <플레이보이> 표지 모델로 나왔다는 이유로 자격을 박탈당했다...이제 겨우 열아홉. 짧은 생을 뒤로 하고 그녀의 머리는 불결한 통조림공장에 잘려나갔다."     

 

어린 나이에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다 간 자넬 폰의 죽음의 비밀을 벗기기 위해 형사인 닉과 기자 앤디가 수사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자넬 폰은 어찌나 바쁘게 살았던지, 마약 문제와 성범죄를 비롯해 유력 정치인과 엮여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용의자와 수많은 증거들...결국 사건을 완전히 해결하는 데는 38년이 걸립니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평가가 굉장히 좋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격변의 시대였던 미국의 60년대를 깊이있게 소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반은 단정한 머리에 성조기를 가슴에 달고 성실하게 일을 하고, 나머지 반은 마리화나와 LSD에 취한 히피였던 기묘한 시대를 작가는 세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는 존 F.케네디 암살과 베트남 전쟁, LSD, 살인마 찰스 맨슨, 우주선 발사 등 60년대를 상징할 만한 에피소드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그 시대를 살아온 평론가들이 높은 점수를 주었을 것 같습니다만 한국 독자들에게는 조금 낯선 느낌이 있습니다. 장르는 완전히 다르지만 <포레스트 검프>에 등장하는 미국의 시대적 묘사를 우리 관객들이 그 나라 관객들만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캘리포니아 걸>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작품의 배경이 미국의 60년대 소도시라는 것입니다. 사건을 조사하는 닉과 앤디의 용의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동네 형, 형 친구, 아버지 친구 등이죠. 취조할 때도 용의자들이 오히려 형사에게 반말을 씁니다. 하긴 뭐 동네 형이니까요. 작가는 좁아터진 동네에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인물 중 누가 마음 속에 악의를 숨기고 있었을지를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드는 힘을 보여줍니다. 그 외에도 시대적 배경이 60년대이다 보니 당시 과학 수사의 한계 같은 것들이 등장하는데 이 부분도 재미있습니다. <CSI>에 익숙한 요즘 독자들에게 옛날 수사 방식은 정말 답답하게만 느껴지죠.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 높은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가장 불만인 것은 이 작품이 미스터리라는 얼개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완성도가 부족했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꽤 많은 분량으로 살인 사건을 다루지만 의외로 추리성이 약합니다. 특히 결국 진범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거의 실소가 날 정도입니다. 정보도 미리 독자들에게 전달된 것도 아니고, 다분히 우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보다 못한 결말로 허겁지겁 맺는 느낌이 강합니다.

 

평론가들이 주는 추리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작품답게 깊이있는 인물과 시대 묘사가 돋보이지만 추리적 재미는 거의 전무하다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입니다. 문학 작품의 느낌이 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즐겁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지만 제 취향은 아닌 작품이라는 게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마지막으로 유독 기억에 남는 대사를 소개해 드리고 짧은 독후감을 마치겠습니다.   

 

"...성에 대해 매우 개방적인 편이었어. 한동안은 술에 대한 태도도 그랬지. 다음에는 각성제. 다음에는 마리화나. 마지막으로 LSD. 이런 것들은 다 함께 가는 모양이야. 섹스와 마약과 음악 말일세."

"68년이잖아요."

 

 

별점: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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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hand 2006-03-10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 미스터리 분야 최고의 기획중 하나인 블랙 캣 시리즈에 대한 응원과 의미있는 작품에 대한 의무감때문에 구입을 고민하고 있지만, 많은 분들의 평은 대부분 "아쉬움"이로군요. 이것참.

물만두 2006-03-10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진짜 읽어볼려고 해도 이리 말리시니 참... 안 읽을 수도 없고 난감합니다 ㅠ.ㅠ

jedai2000 2006-03-10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의미있는 작품인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독자들에게까지 의미가 있는 작품은 아닌 것 같아요. 온전히 미국 독자들을 위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추리적 재미가 전혀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물만두님...480페이지까지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진범이 밝혀지는 순간, 그리고 진범을 어떻게 알게됐나가 밝혀지는 순간 정말 허망했습니다...T.T

한솔로 2006-03-10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대를 그리려는 야심과, 그 야심만큼 어느 정도 당대를 그려냈기에 재밌게 볼 수는 있어요. 그런데 제다이님 말씀처럼 추리의 얼개가 너무 빈약하고, 또 죽은 자넬의 영혼이 방치됐다는 느낌이 너무 슬프더군요.

jedai2000 2006-03-10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솔로님께서 좋은 점을 지적하셨네요. 베커 형제 영혼의 치유(?)에는 공을 들였는데 자넬의 영혼은 그냥 방치되는 감이 있습니다.

Lennon 2006-07-27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민의 반은 단정한 머리에 성조기를 가슴에 달고 성실하게 일을 하고, 나머지 반은 마리화나와 LSD에 취한 히피였던 기묘한 시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마도 이쪽으로 보이지만) 그냥 본문에 나온 말을 인용하신 건가요?

jedai2000 2006-07-2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 나온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이 크라임스
조지프 파인더 지음, 이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유명한 미국 스릴러 작가 조지프 파인더의 98년작 <하이 크라임스>를 읽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애슐러 저드와 모건 프리먼 주연으로 2002년에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또다른 유명 스릴러 작가 제임스 패터슨의 <키스 더 걸스>에서도 콤비를 이룬 적이 있습니다. 영화는 보지 못해서 비교할 수 없는 게 유감이지만, 뭐 영화는 영화고 소설은 소설이니까요.

 

성공한 하버드 법대 교수 클레어는 투자 회사의 CEO인 남편 톰, 귀여운 딸과 함께 행복한 가정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을 정도의 행복한 날들은 어느날 무참히 산산조각나고 맙니다. 남편 톰이 경찰에 살인죄로 체포된 것입니다. 여기까지만해도 충격적인데 드러난 남편의 과거는 더욱 충격적입니다. 전직 특수부대출신인 남편이 남미에서 작전 수행 중 사악한 광기를 드러내며 민간인 87명을 사살했다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남편은 모든 사건이 조작되었으며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는 거라고 항변합니다.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클레어는 남편을 변호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남편 톰이 받아야하는건 다름아닌 군사재판. 상식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권위적인 군사재판에서 민간인이, 그것도 군대에서 약자나 다름없는 여성 변호사인 클레어 교수가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법정소설에 가깝습니다. 중반부터 끝날 때까지 군사법정 아래에서의 클레어와 군 검찰관 사이의 공방전을 그리고 있습니다. 거대한 군 기관에 맞서 클레어는 군 출신의 유능한 흑인 변호사 그라임스, 사립 탐정 데브르, 신참내기 변호사 엠브리와 한 팀을 이룹니다. 가끔 삐걱거리기도 하지만 무고한 자를 구한다는 신념으로 증거를 모으고, 온갖 불리한 조건에서도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는 그들의 모습이 멋지게 묘사됩니다. 클레어 측에서 군 검찰관이 들고나오는 증거나 증인들을 면밀한 세부조사로 무너뜨리면, 더 강한 증인이 나옵니다. 클레어 측은 다시 곤란에 빠지고 또 머리를 짜내 허점을 이끌어냅니다. 이런 구도가 계속 반복되어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일단 한 번 잡으면 반드시 끝을 보실거라 확신합니다. 페이지가 쉴새없이 넘어가는 소설을 영어로는'페이지 터너page-turner'라고 한다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최고의 페이지 터너입니다. 

 

또한 조지프 파인더는 정통 스릴러 작가답게 스릴과 서스펜스 창조에 능합니다. 일개 민간인들이 정부의 비밀 은폐 공작을 파고들자 그들은 실력 행사로 응수합니다. 군인이야 사람 죽이는 게 하는 일인데 민간인들 몇 명 제거하기가 얼마나 쉽겠습니까. 시종 계란으로 바위치는 상황이므로, 벼랑 끝까지 몰리는 주인공들(말 그대로 벼랑 끝에 몰립니다.)의 처지에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마침내 손톱을 쥐어뜯게 만드는 스릴과 서스펜스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1958년생인 작가 조지프 파인더는 약력을 읽어보니 정부기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CIA나 군대의 첩보부 등의 일하는 방식을 정확하게 묘사하더군요. 이 작품에도 과거에 있었던 학살을 미끼로 권력 투쟁을 벌이는 미국내 유력기관들의 모습이 숨막힐 정도로 긴장감 넘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한 번 잡고는 다 읽을 때까지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이었지만 결말에서는 살짝 불만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바로 지나친 반전강박증인데요. 요즘 나오는 미국 스릴러 소설에서는 막판뒤집기를 굉장히 선호해 거의 모든 작품에서 반전이 등장합니다. 천편일률적인 반전이 작품마다 등장하니 오히려 시작부터 누가 범인인지를 짐작하게 만드는 뻔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사건이 끝나고도 두 번의 반전이 등장하는데, 한 번으로도 족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느 용기있는 스릴러 작가가 반전이 없는 게 오히려 반전인 작품을 그려봤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책은 재생지 비슷한 지질에 미국의 페이퍼백 형태를 흉내내서 만든 것 같습니다. 분량에 비해 가격도 싸고, 인터넷 서점의 할인률까지 적용받으면 제법 페이퍼백 기분이 납니다. 미국의 페이퍼백 스릴러 시장을 흉내낸 이런 시도도 괜찮은 것 같은데 출판사에서 지속적으로 도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별점: ★★★★

 


p.s/ 본문 시작 전에 '작가의 말'이 있는데 절대로 먼저 읽지 마세요. 중요한 스포일러 하나가 작가의 입을 통해 등장합니다. 저도 당했습니다. 본문이 끝나고 작가의 말을 읽는게 순서일텐데 왜 편집을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네요.

 

 




 
영화 <하이 크라임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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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3-02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 이거 선물 받고 여직도 못 읽었네요 ㅠ.ㅠ

jedai2000 2006-03-02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어요. 3월달에는 꼭 읽어보세요. ^^;;

한솔로 2006-03-02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력한 푸싱이군요. 우선 장바구니로ㅎㅎ

jedai2000 2006-03-0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식 군대(?)를 다녀오지 못해서 군대 내부의 질서를 잘 모릅니다만, 한솔로님께서는 폐부 깊숙한 곳에서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한솔로 2006-03-02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간만 길었지 허투루 군생활을 해서리...

panda78 2006-03-02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본 것이 안타깝네요. ^^;

jedai2000 2006-03-03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솔로님...그러셨군요..^^;; 그래도 군대 문화에 관한 내용이 많아 재미있으실 듯 합니다.

판다78님...아쉽네요. 꽤 재미있는 책인데. 영화보다는 소설이 훨씬 낫다는 게 중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