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 라이프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역(驛)은 사람이 들고 나는 장소. 오늘도 센다이 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러시 라이프>에서는 센다이 역에서 한 번쯤 스쳐 지나갔을 인간 군상들의 돌고 도는 인생과 기막한 사연들이 신나게 펼쳐진다. 역에는 늙은 개가 있고, 에셔의 그림이 그려진 포스터가 있으며, 하늘 높이 솟아있는 전망대가 있다. 그런 역의 풍경은 누가 봐도 동일하지만 보는 사람의 현재 처지와 품고 있는 사연에 따라 그 느낌은 달라지는 법이다. 여기 역 주변을 서성거리는 다섯 명의 사람이 있다. 우리가 살면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인줄 알았던 이가 훗날 소중한 인연으로 다가오거나 끊고 싶은 악연으로 얼룩지는 것처럼, 서로를 전혀 몰랐던 이 다섯 명의 사람은 무심결에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몇 십억년의 겁을 지나야 겨우 옷깃 한 번 스치는 인연을 만들 수 있다고 불가에서 그러지 않았던가. 과연 이 다섯 명의 인연은 어떤 것일지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최고 속도가 240킬로미터나 되는 신칸센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목적지는 연쇄 토막 살인사건으로 흉흉한 분위기의 센다이 시. 화가 시나코는 엄청난 부자 화상에게 팔리다시피 한 처지이다. 도둑 구로사와는 평소대로 작업(?)에 열중하다 빈 집에서 만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인물을 만난다. 카운슬러 교코는 유부남인 축구선수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의 남편과 축구선수의 아내를 죽이려 계획을 짜고 있다. 자살한 아버지의 기억으로 고통받는 가와라자키는 신흥 종교의 교주에게 마음을 의탁하며 위로받고 있는데, 교단의 중견 간부로부터 뜻밖의 제의를 받는다. 실직자 도요타는 역 주변을 빈둥대다 그곳을 떠돌아다니는 늙은 개와 친구가 된다. 이상 다섯 명의 인물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데 각각의 이야기로 다섯 편의 소설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모두 기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주인공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헤어지고,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지 기발한 이야기가 쉴새없이 펼쳐진다.

 

몇 년 전에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라는 영화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낡은 총을 둘러싸고 그것을 훔치기 위한  여러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얽키고설킨 실타래처럼 보여지다 결말에 이르러 시원하게 풀리는 구조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러시 라이프>는 바로 이런 구조를 차용했다. A라는 인물이 무심코 행한 일이 B에게 영향을 주고, 그런 식으로 모든 일들이 꼬이고 막힌다. 이 작품에서는 멀쩡하던 시체가 잠시 뒤 토막이 나있고, 토막난 시체가 들러붙어 거리를 활보하게까지 되는데, 이 모든 미스터리는 최종장에서 확실하게 풀려 버린다. 등장인물들의 행적을 하나하나 확인하다 보면 마치 퍼즐을 푸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가 제대로 들어맞구 있구나, 하는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엄밀히 말해 추리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원래 추리소설을 좋아했던 작가 이사카 고타로가 추리소설의 자장 아래 작품들을 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국내에 나온 <칠드런>이라는 작품도 은행터는 과정에서 꽤 근사한 트릭을 사용했고, 이 작품에서도 거의 초자연적으로까지 보이는 기괴한 일들도 종국에는 모두 논리적으로 해결을 보고 있다.

 

1971년생인 젊은 작가, 이사카 고타로의 복잡한 이야기를 직조하는 능력은 발군이고 날렵한 복서의 스탭을 보는 듯한 경쾌한 전개도 돋보인다. 거기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미묘한 깨달음을 주는 성장소설의 느낌도 배어 있어 여러모로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다. 국내에는 단 세 편 <칠드런> <러시 라이프> <중력 피에로>가 나와 있지만 작가의 역량을 확인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무엇보다 한 편의 미스터리 소설로도 매력이 있어 이사카 고타로라는 작가의 등장은 거의 신의 선물로까지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천재(天才)라는 말은 이사카 고타로 같은 작가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더욱 놀라운 건 2000년 작인 이 작품에서 스쳐 지나가듯 언급되는 가면을 쓴 은행강도의 이야기가 2년 뒤 <칠드런>에서 사용됐다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들이 교집합과 합집합을 이루며 일종의 이사카 고타로 월드를 형성하고 있다는 건데, 향후에 쓸 작품들까지 염두에 두고 집필을 하는걸 보면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젊고 재능 넘치는, 한 마디로 대단한 작가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이사카 고타로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지만, 10년쯤 뒤에는 동아시아의 모든 독자들이 그의 작품에 열광할 것임을 예언하는 바이다.

 

많은 차들이 모여 정체 현상을 일으키는 러시 아워라는 시간대. 인생도 그렇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전부 각각의 인생이 있으며, 그 많은 인생이 모이고 모여 러시 라이프를 형성한다. 우리는 이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얼결에 누군가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누군가에게, 저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사는 누군가에게, 인생이 뒤흔들릴 만큼 커다란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 말이다. 일본의 젊은 작가 이사카 고타로의 이 작품은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사는 우리 한국의 독자들의 인생에도 작은 영향을 줄 만큼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을 보증한다.

 

 

-츠카모토가 시내를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행객들이 산적에게 살해당하는 얘기야. 여행객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결국 모두 죽어. 그래서 어딘가 비밀스런 장소에 다음에 올 여행객들을 위해 산적들의 약점을 적어두는 거야. 덕분에 다음 여행객들은 산적을 물리칠 수 있었지. 승리한 거야."

"해피엔딩입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아. 이번엔 산적 쪽에서 새로운 패거리를 몰고 와서 여행객들을 죽여 버리고 말았거든."

"비극입니까?"

"어떻게 생각해? 나도 처음엔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또 다른 시점에서 보면 완전히 달라져."

"다르다고요?"

"여행객은 세균이고 산적은 항생물질. 예를 그렇게 든 거지. 새로운 항생물질에 의해 세균이 박멸된다는 이야기야."

"예?"

"이런 단순한 이야기도 뼈대에 조금 손을 대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게 돼. 정의나 악, 그런 것은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반전이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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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26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러시 라이프인가 봐요^^

상복의랑데뷰 2006-05-26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구 이겼네요 ㅋㅋ 저도 조만간 읽어볼 생각입니다~

jedai2000 2006-05-26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그렇죠. 아주 뛰어난 소설입니다. ^^

상복의 랑데뷰님...축구 간만에 재미있었습니다. 꼭 읽어보세요. 아주 좋은 작품이예요.

페일레스 2006-05-27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이거, 뽐뿌질이 장난이 아닌데요? 간만에 사서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 생겼네요 흐흐.
얼마 전에 [우부메의 여름]을 다 읽었는데, 교코쿠 나츠히코라는 작가도 장난이 아닌 것 같아요.
좀 늘어지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jedai2000 2006-05-28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히 말씀드려서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은 꼭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요즘 아주 출간 러시입니다. 기존에 나온 <칠드런>과 이번에 나온 <러시 라이프>, <중력 삐에로> 그리고 오늘 나왔다는 <사신 치바>까지 일본에서의 인기가 한국에서도 이어질 모양입니다. 여러 작품들이 이사카 고타로 월드를 이루고 있으므로 그의 작품 여러 편을 보실수록 재미는 배가될 것입니다. 꼭 읽어보세요. ^^

글구 교고쿠 나츠히코도 매력적이죠. 한때 일본에서 '교고쿠 신드롬'이라는 용어까지 생겼다고 하니까요. 국내에도 그 신비로운 분위기나 엽기적인 사건들, 묘한 등장인물들로 인해 인기가 높죠. 물론 늘어지는 부분이 많지만 뭐 그건 교고쿠 스타일로 잘 봐주자고요. ^^
 
한국추리문학 걸작선
한국추리작가협회 지음 / 태동출판사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한국 추리소설 읽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읽어본 작품집입니다. 무려 28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페이지 수는 놀라지 마시라, 905쪽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단돈 세종대왕 두 장이 안되는 가격에 살 수 있다는 것이 이 작품집의 최대 매력이랄까요. 이러니까 완전 책장사네요. 하하. 아무튼 한국추리작가협회에서 가려 뽑은 수작들을 손쉽게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는 기회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네요.책의 외양은 40년째 불멸의 베스트셀러로 남아 있는 <수학의 정석>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책 표지 하단에 '한국 추리소설의 정석!'이라는 홍보 문구도 삽입했네요. 책 사이즈나 분위기가 정말 홍성대님의 정석과 흡사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것은 판매량이겠지요. 흑,

 

선정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시대별로 단편들을 나누었습니다. 추리소설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런 식으로 사계절로 분류하고 각 시기별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수록했습니다. 예컨대 추리소설의 봄에는 김내성님이나 김성종님 같은 원로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고, 겨울에는 요즘도 활발히 활동하시는 황세연님이나 서미애님 등의 작품이 실려 있는 식입니다. 우리나라 추리소설의 역사도 이제 어언 70년이 넘는 듯 합니다. 앞으로도 뛰어난 작가들이 많이 나와 추리소설계를 이끌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추리소설의 봄'에는 오래된 작품이 많은 관계로 대화나 문장에서 낡은 표현도 많이 눈에 띄지만 두 작품 만큼은 아주 탁월합니다. 일제시대 때 추리소설을 썼던 김내성님의 <타원형 거울>이 그중 한편인데, 일본의 추리소설 선구자 에도가와 람포의 추천을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단편입니다. 작품의 트릭은 지금 봐도 전혀 낡지 않았을 정도예요. 2층 가옥에서 일어난 밀실 살인 사건을 잡지 현상 공모를 통해 해결한다는 내용인데 맨끝에도 반전이 한 번 더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추리소설 작가 사상 가장 많은 책을 팔았다는 70~80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메이커 김성종님의 <어느 창녀의 죽음>이 뛰어납니다. 사회파 미스터리에 가까운 이 작품에서 세상의 온갖 죄악에 괴로워하는 오형사는 말 그대로 어느 창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됩니다. 씁쓸한 마무리가 인상적입니다. 솔직히 김성종님의 작품을 보면 사회파로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모리무라 세이이치와 비교해 부족한 점이 뭔지를 모르겠습니다.

 

'추리소설의 여름'은 80년대 작품들이 많은 것 같은데 강형원님의 <여름 추리학교의 살인>을 보고 쓰러졌습니다. 추리작가들이 모여있는 여름 추리학교 숙소에서 작가들 사이에 살인이 벌어진다는 이야기죠. 실제 추리소설 작가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이건 완전 패러디 극장에나 나올 만한 이야기던데요. 이 작품이 실화가 아니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하.아무튼 여름 쪽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작품은 유우제님의 <빛의 살인>입니다. 시간을 때우려고 극장에 간 한 사나이. 영화 보는 내내 졸던 뚱뚱한 남자가 신경이 쓰이는데 영화가 끝나고 보니 그 남자는 죽어 있습니다. 범인의 정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내용도 공감가지만 섬세하달까, 매끈하달까 문장도 탁월합니다. 그 외에 이수광님의 <M의 사냥>도 볼만합니다. 80년대를 뒤흔들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나름 추측하고 있는데 영국의 유명한 모단편과 흡사하다는 점을 빼면 상당히 그럴듯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화성 범인의 정체 때문에 작가분께서 좀 시달렸을 것 같더군요. 특정 직업을 가지신 분이 항의를 많이 했을 것 같아요.

 

'추리소설의 가을'은 90년대 작품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편수도 다섯 편 밖에 안되고 수준도 그저그래서 확실히 한국 추리소설이 쓸쓸한 바람이 부는 가을로 접어들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백휴님의 <휠체어 여인>은 혼란스런 전개로 인해 끝나고 나서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군요. 이승영 님의 <숲속의 마녀>는 역시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등장시켰는데 작품의 수준을 떠나 범인의 그로테스크한 행태가 기억에 남는 작품입니다. 확실히 화성 사건을 추리작가분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겠죠. 추리소설을 쓰기에 좋은(?) 소재인가 봅니다. 여기서는 장근양 님의 <도시의 신기루>가 볼만 했는데, 유학까지 다녀온 박사가 생활고에 못 이겨 은행을 터는 이야기입니다. 허황된 결말이 걸리지만 은행을 터는 과정이 상당히 치밀하고 박력있습니다.

 

'추리소설의 겨울'은 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는 젊은 작가분들의 작품들입니다. 제 나이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쪽이 읽기 쉬운 문장을 구사하시더라구요. 전체적으로 문장이나 구성이 예전의 작품들에 비해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는 크게 떨어지는 작품이 없었어요. 그러나 한 작품만 골라 보라면 이기원님의 <라스트 카니발>. 이 작품은 이번 단편집의 발견입니다. '벼룩시장'같은 생활 정보지를 통해 희생자를 고르고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의 시점과 그를 추격하는 두 형사의 시점이 교차되는 작품인데 현실감 있는 내용 전개와 착착 감기는 대사도 좋고, 무엇보다 제대로 된 서술 트릭을 보여줍니다. 이기원님의 작품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데 그후 별다른 활약이 없어 안타깝네요. 

 

28편이라는 많은 작품이 실려 있는 관계로 옥석이 섞여 있습니다. 이건 추리소설이야, 낙서야 싶은 것도 있고 꽤 좋은 작품도 많습니다. 그래도 시기별로 한국 추리소설의 대표적인 작가의 단편들을 편하게 읽어볼 수 있음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 중에서 한 10편 정도를 추려 일본이나 구미에도 소개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앞으로 이런 단편집이 10개쯤 더 나올 수 있게 작가분들의 많은 노력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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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23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 단편들이 너무 많네요.

jedai2000 2006-05-24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께서야 뭐 워낙 많이 보셨으니까요. ^^ 저는 한 다섯 편쯤 빼고 다 처음 본 작품이라서 재미나게 보았습니다.
 
초콜릿칩 쿠키 살인사건 한나 스웬슨 시리즈 1
조앤 플루크 지음, 박영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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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칩 쿠키 살인사건>은 앙증맞은 제목과 진저브레드맨 쿠키를 사용한 귀여운 표지가 먼저 눈길을 끄는 작품입니다. 제목과 표지만 봐도 웬지 편안한 분위기의 작품이라는 예상이 되시죠. 그렇습니다. 이 작품은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추리소설의 소장르 중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코지 미스터리(Cozy Mystery)라는 장르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코지는 사전적 의미로 기분 좋은, 따뜻한, 아늑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살인과 범죄가 등장하는 추리소설을 기분 좋고 편하게 읽는 것이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초콜릿칩 쿠키 살인사건>을 읽으시면 좋겠네요.

 

출판사 설명에 따르면 코지 미스터리란 추리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잔혹한 살해 장면들을 배제하고, 이웃간에 밥숟가락은 몇 개를 놓고 사는지도 다 아는 작은 소도시에서, 밝고 명랑한 주인공이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 좌충우돌하다 사건을 해결해내는 장르를 말한다고 합니다. 코지 미스터리의 기원은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녀의 무수한 명작 중 특히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코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네요. 마을 노처녀들과 벽난로가에서 수다를 떨다가 시덥잖은 대화 중에 단서를 잡고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미스 마플의 특기니까요. 또한 크리스티의 라이벌, 도로시 세이어즈의 작품들에서 흔히 보이는 로맨스도 코지 미스터리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네소타주의 레이크 에덴이라는 소도시에 살고 있는 한나 스웬슨이 작품의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쿠키단지'라는 이름의 쿠키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나이는 혼기 꽉 찬 서른이라 엄마한테는 늘 결혼하라는 잔소리를 듣고 삽니다. 두 여동생은 미모가 특출난데 비해 외모적으로는 별로 매력이 없는지라 남자들한테 그다지 인기도 없고요. 물론 본인도 연애에 별로 집착하지 않습니다. 평소와 같이 이른 아침에 출근하던 한나는 자신의 카페에 유제품을 납품하는 배달원이 차안에서 총에 맞아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한나는 자신의 바로 아래 동생 안드레아의 남편이자 경찰로 일하고 있는 빌의 승진을 위해 살인사건 조사에 발벗고 나섭니다.

 

짧은 내용 소개만으로도 어떤 분위기일지 짐작이 가시겠죠. 한나는 조사에 임할 때 특출한 추리력이나 우수한 두뇌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편하게 볼 수 있는 코지 미스터리의 특성상 고도의 두뇌싸움은 등장해서는 안될 테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마을 사람들과의 수다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한나. 예를 들어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스티로폼 컵에 묻은 분홍 립스틱 자국을 조사해 보니 미혼모로 어렵게 살고 있는 화장품 외판원이 그 립스틱을 판매한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 외판원은 한나의 막내 동생 친구입니다. 외판원의 집에 가서 화장품 몇 개 팔아주면서 분홍 립스틱을 사간 사람이 누구냐, 살살 구슬러 봅니다. 그렇게 밝혀진 분홍 립스틱을 사간 여자는 마을 고등학교 미식 축구 코치의 아내입니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단서를 얻고, 용의자를 한정해 범인을 잡는 과정이 알기 쉽게 그려집니다. 머리를 격하게 굴리지 않아도 책만 쭉 따라가다 보면 범인이 밝혀지기 때문에 퍼즐식의 본격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분은 좀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가볍고, 편안하고, 기분 좋게가 모토인 코지 미스터리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실 것을 충고드리고 싶네요. 결혼하라고 성화인 엄마의 잔소리나, 한나의 외로운 처지를 상쇄시켜주는 애완 고양이, 드레스나 화장품에 대한 수다, 나중에는 삼각 관계 로맨스까지 등장해 남성보다는 여성의 취향에 맞을 작품으로 보입니다. 작품 중간중간에는 한나가 만드는 쿠키의 레시피까지 따로 소개될 정도랍니다. 실제로 코지 미스터리를 쓰는 대부분의 작가가 여성이고, 독자도 여성이라고 하네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밝은 미래를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와 쿠키를 만드는 한나의 조수, 리사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물건을 싸게 팔면서도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위해 원래 문제가 있는 물건이었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드레스 가게 주인 등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밝고 따뜻한 인물들이라 기분 좋은 독서를 할 수 있지요. 물론 그만큼 현실감은 엷어집니다만. 사실 <초콜릿칩 쿠키 살인사건>에 나오는 따뜻한 사람들보다는, 여자의 피부를 벗겨 옷을 만드는 <양들의 침묵>식의 범죄가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50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수 명의 사람이 잔인하게 죽어 나가는 추리소설에 지치신 분들이라면 가볍게 읽어볼 만한 작품입니다. 가볍고, 기분 좋고, 편안하게 말예요. 그러나 그만큼 가볍고, 단순하고, 무난하다는 약점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책 자체에 오타도 많고, 편집상의 실수도 많이 보여 약간 실망스럽네요. 표지만 이쁘고 본문에는 오타가 많은 책은 얼굴은 예쁘지만 머리가 빈 미인과 마찬가지라는 지적을 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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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22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별 세개는 짜요 ㅠ.ㅠ 이거 시리즈가 나왔음 바란다구요^^;;;

jedai2000 2006-05-2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세 개면 평균 아닌가 싶습니다. ^^ 저는 평균 정도의 작품이라 평작 별 세 개를 줬구요. 평균작 정도의 느낌인 이 작품에 별이 과도하게 붙으면 만에 하나 제 글을 읽고 이 책을 읽을 독자분들께서 실망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뭐야 별 4~5개라더니 뭐 이래, 하면서 말예요. 오히려 별이 3개인데 비해 재미있었어,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할걸 기대하고 준 거예요.

시리즈가 나왔으면 좋겠지만, 요즘 해문출판사에서 너무 소식이 없어 솔직히 별 기대는 안되네요. 그래도 꼭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상복의랑데뷰 2006-05-23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개인적으로는 별 세 개가 적당하다고 봅니다. 내용도 무난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무엇보다도 오탈자의 정도가 너무 심해요. 교열을 안본게 아닐까 하는 느낌까지 들더군요.

jedai2000 2006-05-24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나오는데 보통 몇 개월 이상 걸리는 것 같던데, 교정. 교열은 안보고 그 시간에 무엇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별점에 관해서는 요즘 제가 쓰는 리뷰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가급적이면 별점을 빼려 합니다. 좀 폭력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별점 선정 기준도 애매하고요. 그런데 알라딘은 별점 없이는 등록이 안되니. 쩝. 어쩔 수 없이 나름 최대한 공정하게 주려 노력할 뿐입니다.
 
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에서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의 위상은 우리의 생각보다 한층 더 대단한 것 같다. 우선 미스터리 대중 작가가 받을 수 있는 상은 전부 다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작품 <용은 잠들다>로 일본 미스터리작가 협회상, <화차>가 야마모토 주고로상, <이유>로는 나오키 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의 정점에 올라 있다. 이 외에 자잘한 것(?)도 여러 개가 넘는다. 아마 집에 수상 트로피를 진열해 놓는 전시실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로서 평론가나 심사 위원들이 주는 이런 상보다 더 기쁜 것은 일본 유수의 출판 잡지 <다빈치>에서 독자가 사랑하는 여성 작가 투표에서 7년 연속 1위를 한 것일테다. (참고로 작년의 남성 작가 1위는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2위가 히가시노 게이고) 일본의 수많은 평론가와 독자들에게 모두 사랑받고 인정받는 행복한 작가가 바로 미야베 미유키인 것이다.

 

인기 작가답게 작품 수도 많은 편인데 귀동냥해서 들은 짧은 지식으로는 대략 3가지의 작품군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그녀의 대표작들이 몰려 있는 사회파 미스터리 계열이다. 사회적 병리 현상을 범죄의 틀에 담아 그리는 사회 밀착형 미스터리 소설로 보면 되는데 <화차>에서는 카드 문제, <이유>에서는 부동산의 문제를 담고 있다. 두 번째는 아마도 시대소설이 될 것이다. 국내에서는 소개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소개될 일이 거의 없을 것 같은데 일본의 옛 시대를 배경으로 우리로 따지면 포졸(?)같은 탐정이 활약하는 내용들이 많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종의 판타지 계열이 있는 것 같은데, 본서 <용은 잠들다>나 <크로스 파이어>같은 초능력자를 다룬 이야기도 많이 쓴다고 한다. 워낙 게임광으로도 유명해서 아예 검과 마법이 등장하는 판타지 <이코>를 쓰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니 독자들이 질릴 새가 없는 것이다.

 

<용은 잠들다>는 위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초능력을 소재로 하고 있다. 타인의 마음과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사이킥'이라는 능력자들의 이야기이다. 태풍이 부는 어느 날, 신지라는 신비로운 소년을 만난 잡지 기자가 주인공이다.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신지가 사이킥이라는 것을 알게 된 잡지 기자는 소년의 능력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기존의 사고 틀에 묶여 여전히 반신반의하고 있다. 그 뒤 기자는 또 한 명의 소년을 알게 되는데, 그는 자신이 신지의 사촌형이라 말하고 신지가 어렸을 때부터 거짓말이 심했다고 증언한다. 신지가 보여준 능력의 트릭을 조목조목 밝히며 기자를 설득하는 소년. 기자는 그럼 그렇지, 하고 말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고통받는 신지의 진심어린 고백을 듣고 그의 능력을 조사해보기로 결심한다. 한편 기자는 정체불명의 협박장을 받는 등 두 소년과 관계하기 시작한 뒤부터 여러 가지 사건들이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게 된다.

 

<용은 잠들다>는 공히 작가의 대표작이라 말할 수 있는 <화차>의 1년 전에 쓰여졌다. 서서히 작품 세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작가의 자신감과 역량을 도처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우선 '사이킥'이라는 흥미진진한 소재를 선택해 독자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 초능력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의 것이다. 잘 모르는 것이니만큼 시종일관 집중하며 읽게 된다. 그 외에도 후반부의 유괴 사건에서 보여주는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독특하면서도 현실감을 잃지 않는 등장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과연 미야베 미유키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보통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작품을 쓸 때, 작가 스스로 자기가 쓰는 초능력자들의 능력에 도취되어 요란한 초능력 경연장이 되기 쉬운데 반해 <용은 잠들다>에서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고 있다. 초능력자도 인간이다. 이 작품은 그런 인간을 그리고 있다. 읽다보면 남들과는 다른, 남들에게는 없는 능력으로 인해 오히려 고통받는 사이킥들의 절절한 슬픔이 아프게 다가온다.  

 

미야베 미유키는 특유의 따뜻함으로 사랑받고 있다. 작품 속에 살인과 범죄가 자주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인간을 보는 시각은 따뜻하고 순수하다. 비슷한 연배의 기리노 나츠오의 작품이 칼로 긋는 듯 날카롭고 예리하다면 미야베 미유키는 봄날 햇살처럼 어딘지 포근하다. 예를 들어, 똑같은 범죄가 등장하는 작품이라도 쓰는 방식에 따라 아다르고 어다른 법이다. 그 사람이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렇게 극단적인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목조목 짚어주면 우리는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이해하게 되고 어쩔 수 없어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야베 미유키가 잘하는 게 바로 그런 거다. 그녀 작품에 들어있는 인간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용은 잠들다>도 결국 초능력으로 고통받던 소년이 그 힘으로 옳은 일을 하는 이야기다. 요즘 세상 인심에 비추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할지 몰라도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내용이 아닌가? 인간에 대한 숭고한 애정을 간직한 주인공이 번민 끝에 결국 '옳은' 일을 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초능력을 누구나 마음 속에 갖고 있는 '용'으로 묘사하고 있다. 용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만 어떤 이의 용은 잠들어 있고, 어떤 이의 용은 활발히 깨어 있다. 용은 달리 말하면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잊고 사는 옳은 일에 대한 용기와 신념일 수도 있다. 작가는 마음 속의 용을 깨워 불의와 맞설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 속의 용(초능력)으로 기껏 스푼이나 구부려서야 되겠는가. 누구나 갖고 있는 작지만 큰 힘으로 옳은 일을 행할 때 우리 사회가 한층 더 아름다워질것이라는 점을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순진하다고? 그러나 그것이 바로 미야베 미유키의 메시지이고, 진심을 담고 있음에 우리는 작가의 호소에 귀 기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몸 안에 용을 한 마리씩 키우고 있다. 어마어마한 힘을 숨긴, 불가사의한 모습의 잠자는 용을. 그리고 한 번 그 용이 깨어나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일밖에 없다. 부디, 부디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되길, 무서운 재앙이 내리는 일이 없기를-. 내 안에 있는 용이 부디 나를 지켜주기를-. 오로지 그것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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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19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셨다니 놀라워요~

jedai2000 2006-05-19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번역자 선생님과 친분이 있어 조금 일찍 읽었네요. 만두님께도 곧 배송이 될 겁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탈선 모중석 스릴러 클럽 1
제임스 시겔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공군: 나 왔다.

강군: 또 너냐. 넌 일도 없냐.

공군: 백수 신세가 뭐 그렇지. 심심한데 맥주나 마시러 가자.

강군: 그놈의 맥주는 질리지도 않냐.

공군: 나나 되니까 너하고 맥주라도 마셔주는 것은 모르고.

강군: 하긴. 일세의 혁명가가 나같은 애송이하고 맥주를 마셔준다니 껄끄럽기도 하겠지.

공군: 너도 <삼대> 읽었구나.

강군: 고등학교 때 배웠잖아. 알았다. 술 한잔 하러 가자.

 

공군: 이 집은 좀 시끄럽네.

강군: 그래도 여기가 분위기는 좋잖아. 뭐 마실래? 오늘은 내가 쏜다.

공군: 뭐 뻔하지.

강군: 우리라고 맨날 맥주만 마실 일 있냐. 오늘은 좀 비싼 양주 같은 거 마셔보자. 메뉴판 줘봐라.

공군: 오~ 자식 돈 좀 들어왔나 보네.

강군: 원하는 대로 마음껏 먹어. 난 맥주.

공군: ...나도 맥주.

 

공군: 그나저나 어제는 일요일인데 뭐했냐?

강군: 책 읽었지. <탈선>이라고 스릴러 소설이었다. 

공군: 어째 제목이 너랑 잘 어울린다.

강군: 나쁜 짓 하는 탈선이 아니라, 기차가 탈선했다 할 때 그 탈선이다.

공군: 그렇군. 무슨 내용이냐?

강군: 어. 내용이 아주 재미있더라. 중년의 광고 회사 중역이 있어. 그 사람은 아내랑 딸이 있는데, 딸이 소아당뇨라 가정에 웃음이 사라졌지. 어느날 출근을 하다가 늘 타던 8시 43분 열차를 놓치고 9시 5분 열차를 타게 되는데 거기서 모든 일이 시작된거야. 시작은 조그만 엇갈림이었지만 결국 주인공을 위기의 구렁텅이로 빠트리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공군: 여자를 만났구나.

강군: 눈치가 구백단이네. 주인공은 매혹적인 여자를 알게 되지. 매혹적인 여자와 함께 하면서 오랜만에 죽어있던 마음에 꽃이 피는 근사한 경험을 하게된 주인공은 그 여자와 계속 시간을 보내다 결국 불륜에 빠지게 되지.

공군: 이야, 흥미진진하다. 하기야 불륜같이 금지된 열망에 빠진 주인공을 지켜보는 것처럼 독자를 매료시키는 게 없지. 

강군: 반주가 좋구나. 이야기하는 흥이 난다. 자, 두 사람은 마침내 호텔에 가서 사랑을 나누고 나오려는 찰나에 괴한이 침입해. 괴한은 지갑을 빼앗은 다음 주인공을 폭행하고, 여자는 강간하지.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이냐.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불륜도 해본 사람이 하는거야. 순진한 주인공은 싸구려 호텔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몰랐던 거야.

공군: 좋았던 분위기에 완전 찬물을 끼얹었네.

 

강군: 진짜 위기는 그때부터야. 괴한이 지갑을 가져갔잖아. 거기 적혀있는 주소와 전화번호를 보고 주인공에게 협박을 하는거야. 돈을 내놓으라고 말이지. 괴한은 아주 위험한 인물이라 순진한 주인공의 한수 위에 있어. 주인공이 벗어나려 몸부림쳐봐도 범죄에 잔뼈가 굵은 괴한의 손바닥안에 있는거라. 게다가 두 불륜 연인은 애초 시작이 잘못됐기 때문에 각자 배우자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도 없지. 악몽같은 상황에 빠진 주인공이 어떻게 위기를 벗어날지가 작품의 핵심인게지.

공군: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강군: 정신없이 읽히더라. 하루만에 460페이지라는 두꺼운 분량을 다 읽었어. 기차 여행을 할 때 보면 이보다 더 좋은 책이 없을거야. 무엇보다 주인공이 평범한 인물이라는 게 절묘하지. 특별한 능력도 없고, 완력도 약한, 소심한 중년남인 주인공에게 계속 닥쳐오는 위기를 보면서 역시 소시민에 불과한 독자들이 감정이입을 쉽게 할 수 있다는 거야.

공군: 상대하는 악역 묘사가 좋아야 할텐데.

강군: 괴한의 정체를 모르니까 서스펜스가 가중되는 거지. 실체가 드러나면 그 때부터 공포감이 엷어지잖아. 왜 고등학교 때도 선생님한테 맞기 직전이 무섭지, 일단 맞고 나면 별로 안 무섭듯이 말야. 이 작품에서 괴한의 정체는 마지막까지 자세히 밝혀지지 않거든.

공군: 그렇구나.

강군: 그런 면에서 스릴을 창조하는 작가 재능이 돋보이더라구. 물론 결말이 생각보다 약한 감이 있는데, 결말까지 쭉 끌고 나가는 힘이 있어. 뭐 특별히 남는 건 없겠지만 읽는 동안은 정신없이 재미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다.

 

공군: 나도 읽어보련다. 다음에 볼때 책 좀 가져와라.

강군: 알았다. <탈선>은 중년 남성의 도덕적 일탈이 가져온 위기와 그것에 관한 단죄라는 주제를 볼 때 꼭 히치콕 영화같기도 해.

공군: 히치하이커?

강군: 히치콕! 너 이제 귀에도 문제가 있구나.

공군: 시끄러워서 그랬어. 

강군: 아무튼 히치콕 영화에서 늘 주인공들이 금발머리 여자한테 홀려서 나쁜 짓을 저지르고, 결국 그것에 대한 단죄를 당하잖아. 이 소설이 꼭 그래. 히치콕이 살아 있으면 만들어 볼만한 영화인데, 유감스럽게도 이미 사망했으니 다른 사람이 영화를 만들었지. 클라이브 오웬과 제니퍼 애니스톤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뭐 영화로 만들기 꼭 좋은 소설이지. 스릴 넘치고, 전개가 빠르니까. 엎치락뒤치락 역전과 반전도 제법 있고. 작가 제임스 시겔은 이제 책 3권을 낸 신인급의 작가인데 미국 스릴러 계에서 주목받는 신예란다. 작품들이 다 영화화 계약이 될 정도로 잘 나간다고 하네.

공군: 그래, 잘 들었다. 그나저나 너는 꼭 나를 만나기 전에 준비하고 오는 것 같아. 주저리주저리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 너 혹시 나 기다렸던 거 아냐? 나 오면 책 이야기 말해주려고.

강군: 무슨 소리야!

공군: 에이, 맞잖아. 너 나말고 친구 없지? 그래서 나만 보면 읽은 책 이야기해주고 싶어 안달하는 거 아냐? 불쌍한 놈, 나말고 친구도 없는 녀석. 하하

강군: 아니라니까!!!

 

 

<인상적인 구절>

 

"내가 직접 방아쇠를 당긴 것과 다름 없었다. 간통, 사기, 그리고 이제 살인까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이름 없는 선한 시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체를 태우고 매립지가 있는 스테이튼 아일랜드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엄청난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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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1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어요^^

jedai2000 2006-05-15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방 읽으실 겁니다. 재미있으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