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귀재

                                        -홍순지



노귀재 넘으며 노귀재 넘으며 넘으며
노귀재 그 숨찬 가파름은
아직도 내게 묻어 따라 오는
속세의 먼지 속세의 먼지 털어 버리라고
저 아래 계곡으로 떨꿔 버리라고
모조리 다 던져 버리라고

노귀재 이곳은 노귀재 이곳은
사람과의 만남에 묻혀 잊혀온
바람과 만나고 구름과 만나고
푸르름이 푸르름과 만나고 먼산 가까운 산
모두 모두 만나고 잊고 산 것이
무엇인지 다 가르쳐 주고

노귀재 지나면 노귀재 지나면 지나면
도시의 답답함이 싫어
빌딩숲 사이에 숨어사는
비루한 개 같은 시궁창 쥐 같은 삶이 싫어
언덕에서 신선처럼 사는 친구 있어
술잔 놓고 기다려 종일토록 날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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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7-11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봉우리가 노루귀처럼 쫑긋하다고 해서 노귀재일까요? 아..편안한 노래..

이누아 2005-07-11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분의 블로그에서 봤습니다.

"노귀(奴歸)재: 영천에서 청송으로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큰 고개를 만나게 된다,
이곳이 노귀재요, 청송군의 관문이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승승장구 하여 한반도를 약탈 하면서 노귀재 밑까지 쳐들어 왔으나 그곳에서 후퇴를 하였다 한다.이유는 중국의 명장인 이여송(松)과 청송(靑松)의 송자가 일치 하는지라 왜장이 용감한 백성에게 묻길 "저 고개를 넘으면 어딥니까 ?" 주민이 대답 하길 "청송이라는 곳이다" 하여튼 이여송의 松자만 들어도 무서웠던 모양이다. 그 길로 후퇴를 하였으니 오랑캐奴子와 돌아갈歸子를 써서 노귀재라 불렀다 한다."

노奴에 오랑캐라는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놈 저놈 할 때 쓰이는 글자이니 왜놈이라는 뜻으로 쓰였을지도...

비로그인 2005-07-11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 글쿤요! 이거야 원. '왜놈'이란 어휘보단 제가 푼 썰이 더 로맨틱하지 않습니꽈? 예? 으하하하..으쓱으쓱~

이누아 2005-07-11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노루귀라...^^
 
쿤둔
메리 크레이그 지음, 김충현 옮김 / 인북스 / 2001년 2월
평점 :
절판


이제까지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달라이라마의 책은 달라이라마의 생활과 신념, 신앙 등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처음 이 책을 읽어야 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이 책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있다는 말을 듣고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읽으려고 한 것이다. 영화는 상상력을 너무 많이 앗아가기에 가능하면 책을 먼저 읽는다. 영화를 먼저 보면 책 읽는 내내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를테니까. 또 달라이라마는 가족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했으며, 가족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나의 스승이므로 나는 그에게서 어떤 배울 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읽고보니 달라이라마가 주인공인 그런 책은 아니다. 그의 가족사로, 그의 부모와 형제가 주인공이며, 그는 조연이다. 이 선택받은 가문에서는 쿤둔 외에도 세 명의 형제가 린포체의 환생으로 인정받았지만 모두 환속했다. 그들의 삶은 치열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누구도 그들을 비난할 수 없을 것만 같지만 황폐해진 티벳이, 절규만이 남은 티벳이 그들을 비난과 우울, 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티벳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으므로.

책을 읽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책을 읽은 후 이전엔 내게는 링린포체나 달라이라마밖에 안 보였는데 이제 티벳이 보인다. 내 눈에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티벳이 달라이라마에게는 왜 희망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그에게 있는 그 낙관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쿤둔은 자신이 티벳의 한 사원에서 생을 마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늘 그가 미소짓는 사진을 보며 따라 웃듯이 그의 낙관을 나도 믿고 싶어진다.

그의 비폭력이 정말로 성공했으면 좋겠다. 영화 [미션]이나 [로베로](제목이 맞나? 남미에서 순교한 신부님 이름)에서처럼 비폭력으로 대항한 신부님들이 현실적으로는 실패한 듯이 보였다. 부처님도 그랬다. 자기 나라를 침략하는 적 앞에서 길을 막고 세 번이나 앉아 계셨다. 그러나 네 번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적들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에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대로 폭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나라는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도 사실, 누가 승리했는지는 모른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내 눈은 얉아서 울부짖는 티벳인의 고통이 보인다. 고통. 혼돈스럽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 번민하고 절망하고, 병들었던(지금은 극복했지만) 쿤둔의 형제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바른 견해, 지혜와 자비심,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내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것들이 두려움과 혼란을 걷어내리라. 그런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달라이라마는 수행에서 온다고 단언한다. 그는 바쁜 일정중에도 네 다섯 시간을 수행에 보낸다. 다짐만 하고, 실천이 없는 이런 생활을 끝장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생이 언제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간 내 가족이 말해주고 있다. 내 가족 중 두 명이나 생명을 마친 뒤에도 내게 가르침을 전한다. 가족. 출생과 함께 하게 되는 그들은  어떤 형태이든 우리의 스승임에 틀림이 없다. 쿤둔에게도 그러리라.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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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7-1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오지 않는 생..잘 살고 싶은데..에효~ 요즘 정말이지 정신의 힘, 이란 것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절절히 느끼게 해 주는 나날입니다. 이누아님, 실천 없는 다짐, 이젠 끝장냅시다! (전 빼주시고..이누아님만, 흐..^^a)

2005-07-11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 무덤 - 祭亡妹歌
       

                                          -기형도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零下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날으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 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딪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뒷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히며 河口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神經을 앓는 中風病者로 태어나

全身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쉰 목소리로 어둠과 싸웠음에랴.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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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낯선바람 >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1989, 세계사

 

                

늘 지나가고 놓치고서야 이 시를 되뇌인다.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ㅠㅠ

있을 때 잘하자,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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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혜덕화 > 수타니파타 중에서(이누아님께)

화살

인간의 목숨은 예측할 수도 없고 언제까지 살지 알 수도 없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괴로움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뒤따른다.

살아있는 존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늙으면 이윽고 죽음이 오나니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것들의 운명이다.

제 아무리 잘 구워낸 도자기도 마침내는 모두 깨어져 버리고 말 듯

인간의 목숨도 이와 같은 것.

늙은이도, 젊은이도,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자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무릎을 꿇는다.

사람들은 죽음에 붙잡혀서 저 세상으로 가고 있지만

그러나 아버지도 그 아들을 구할 수 없고

친척도 그 친척을 구할 수 없다.

보라, 친척들이 지켜보며 슬퍼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는 온 곳도 모르고 가는 곳도 모른다.

탄생과 죽음의 양끝을 모르면서 왜 그리 구슬피 울고만 있는가.

슬피 우는 것으로 무슨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현명한 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슬픔에 젖어 있으면  괴로움만이 괴로움만이 더할 뿐이다.

죽은 사람을 위해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가는 슬픔을 또 다시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비록 백년을 산다고 해도 마침내는 친지들을 떠나서

이 생명을 버려야 할 날이 온다.

그러므로 훌륭한 이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 "그는 이미 우리의 힘이 미칠 수 없는 곳으로 갔다"

이렇게 생각하고 슬픔을 거둬야한다.

비탄과 고뇌의 화살을 뽑아 버린 사람은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는 일 없이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슬픔을 극복한 다음 더 없는 축복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ps: 이누아님

통속적인 위로 밖에 나눌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작은 언니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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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6-07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운 좀 차리셨는지요?
이누아님의 기척을 들으니 뭔지 조금 안심이 됩니다.
워낙 큰 슬픔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