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아침
_강현덕 


열쇠를 찾아 들고 신발을 신는다 
현관을 나서기도 전 먼지들이 일어나고 
저 문을 열기만 하면 난 이제 내가 아니다 
듣다만 칸타타도 이제는 그들의 몫 
지폐 몇 장의 낡은 지갑만이 유일한 내 얼굴이다 
하루를 써버리기 위해 저 문을 열기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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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_강현덕


내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수숫대를 어지럽히던 작은 벌레 몇 마리가 
내 뼈의 중심으로 와 
날 갉아 먹는갑다 

아, 나는 삭을 것인가 툭툭 꺾일 것인가 
스멀대는 벌레들만 떼지어 웅성거리다 
어느 날 껍질만 남을 
바람 속의 빈 집처럼 

내 안에서 들리는 벌레들의 이 소리 
날 먹을 벌레들의 어이없는 이 장난 
기어코 주저앉을 낡은 집 
보고야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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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
 __김창완밴드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
예순 둘은 예순 둘을 살고 일곱 살은 일곱 살을 살지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 일천구백칠십 년 무렵
그날은 그날이었고 오늘은 오늘일 뿐이야

여자들은 여자들을 살고 남자들은 남자들을 살지
어린애는 어린애로 살고 어른들은 어른들로 살지
내가 일흔 살이 되면 이천이십 삼십 년 무렵
그날은 그날일 거고 오늘은 오늘일 뿐이야

미리 알 수 있는 것 하나 없고
후회 없이 살 수 있지도 않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지만
다 겪어 봐야 알 수 있는 게 있지

꿈이 자라나던 내 어린 시절
내 꿈을 따 먹던 청춘 시절
이제 꿈을 접어 접어 날려 보낸다
묻어 버린 꿈 위로
나비춤을 추네 꿈이 춤을 추네
나비 날아가네 꿈이 날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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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를 읽는다. 시집 한 권을 다 읽도록 한 편도 이해하지 못하는 날도 있다.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어 놓을 수 없다는 듯 단숨에 읽기도 한다. 어떤 날엔 책을 덮으면 머리 어디가 찢기거나 뜯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간혹 그 틈으로 바람이 불고 새가 날고 햇살이 비친다. 그 새는 밖에서 온 것인지 머리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찢어진 틈이 안팎 경계를 무너뜨리나 보다. 밤이 오고 깊이 잠들면 어느새 새는 햇살과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설픈 바늘자국이 머리에 남는다. 무슨 조화일까. 눈을 뜨면 나는 다시 시를 읽고 그런 어떤 날에 실밥은 뜯겨지고 다시 다른 새가 날고 있다. 그들은 모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점점 헐거워지는 머리가죽에도 왜 머리는 가벼워지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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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행로(狂人行路)
_심보선

 
길 위에서 나는 두려워졌다. 대낮인데도 어둠이 날 찝쩍댔다. 어젯밤 잠 속에선 채 익지 않은 꿈을 씹어 먹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병에 담아둔 꽃이 다 뜯겨 있었다. 신물 대신 꽃물이 올라오고 발바닥에 혓바늘이 돋았다. 걸음이 떠듬대며 발자국을 고백했다. 나는 두려워졌다. 아무 병(病) 속으로 잠적하고 싶어졌다. 마침 길가에 <藝人>이라는 지하 다방이 있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전날 샀던 시집을 한 장 한 장 찢으며 넘겼다. 나는 두려워졌다. 종업원이 유리컵에 물을 담아왔다. 거기에 코를 박고 죽고 싶어졌다. 맛을 보니 짭짤했다. 바닷물인가? 아님 너무 많은 이들이 코를 박아서 이미 콧물인가? 나는 두려워졌다. 산다는 게 꼭 누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 같았다. 한숨을 쉬니 입김이 뿌옇게 피어올랐다. 누군가 내 안에서 줄담배를 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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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5 13: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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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5 15: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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