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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경 신부의 장자 읽기
정호경 지음 / 햇빛출판사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장자라...처음 [장자]를 만난 것은 학민문화사에서 나온 검고 두꺼운 책 속이었다. 한자도 어렵고, 해석은 더 어려웠다. 한 구절을 두고 이게 무슨 말인가? 해석이 안 되어 며칠 후에 다시 펼쳐보고..그러다 그게 이 말이구나 싶으면 참 기뻤했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도 결국 끝까지 읽지 못했는데, 정호경 신부의 장자는 아무래도 간단해 보이는 것이 읽기는 다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책이 다소 얇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장자 내편만을 다루고 있다. 장자는 내편 7장, 외편 15장, 잡편 11장으로 모두 33장이다. 나도 전에 내편까지만 읽었는데 또다시 내편만 읽게 되었다. 조금 여유가 생겨 다른 편들을 끙끙거리며 원문으로 읽고나면 다시 이 책처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나게 되리라. 장자가 지은 책의 본래 제목은 [남화진경]이다. 장자를 남화진인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대로 장자로 되어 있다.
어떤 책은 집중해서 목돈처럼 목시간을 들여서 읽어야 하기도 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가방에 넣어두고 사람을 기다리거나 지하철 안에서 한 구절만 읽고 가만히 생각해보고, 또 정호경 신부님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하는 식으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책상에 앉아 읽으면 몇 시간에 다 읽을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만-히, 문득 읽는 것이 더 맛있을 것 같다.
장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한 예를 보자. 혜자가 말하기를 위왕이 큰 박의 씨앗을 주어 심었더니 다섯 섬이나 들어갈 정도의 큰 박이 달렸는데, 물을 담았더니 무거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고, 갈라서 바가지를 만들었더니 기울어져서 뭘 담을 수가 없어 크기만 했지 어디 쓸 데가 없어 깨뜨려 버렸다고 하였다. 이에 장자는 "그대가 시방 다섯 섬들이 박이 있으면, 큰 술통을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 즐기려는 생각은 않고 어째서 기울어져 아무 것도 담을 수가 없다고 걱정만 하는가"라고 대답했다. 술통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내가 글을 읽을 때는 배로 해석했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안"에 물을 담아 쓸 것만 생각하지 "밖"에 물을 담아 쓸 것을 생각할 줄 모르는 고정된 생각에 유연함을 가지도록 끊임없이 이야기들을 들려 주고 있다.
정호경 신부님은 이야기 단락단락마다 신부님의 생각을 적어 두셨다. "도"를 "하느님"으로 파악하면서. 신부님의 이야기는 어떨 때는 유익하지만 어떨 때는 사족이 되어 읽는 맛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가만히 홀로 명상할 시간에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니 말이다.
가볍게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다. 요즘은 이런 책이 참 많다. 복받은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르는 글자 찾아가며 끙끙거리며 읽는 그 깊은 맛 또한 포기할 수 없는 기쁨이다. 어느 경우이든 [장자]는 두고두고 볼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