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둔
메리 크레이그 지음, 김충현 옮김 / 인북스 / 2001년 2월
평점 :
절판


이제까지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달라이라마의 책은 달라이라마의 생활과 신념, 신앙 등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처음 이 책을 읽어야 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이 책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있다는 말을 듣고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읽으려고 한 것이다. 영화는 상상력을 너무 많이 앗아가기에 가능하면 책을 먼저 읽는다. 영화를 먼저 보면 책 읽는 내내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를테니까. 또 달라이라마는 가족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했으며, 가족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나의 스승이므로 나는 그에게서 어떤 배울 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읽고보니 달라이라마가 주인공인 그런 책은 아니다. 그의 가족사로, 그의 부모와 형제가 주인공이며, 그는 조연이다. 이 선택받은 가문에서는 쿤둔 외에도 세 명의 형제가 린포체의 환생으로 인정받았지만 모두 환속했다. 그들의 삶은 치열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누구도 그들을 비난할 수 없을 것만 같지만 황폐해진 티벳이, 절규만이 남은 티벳이 그들을 비난과 우울, 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티벳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으므로.

책을 읽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책을 읽은 후 이전엔 내게는 링린포체나 달라이라마밖에 안 보였는데 이제 티벳이 보인다. 내 눈에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티벳이 달라이라마에게는 왜 희망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그에게 있는 그 낙관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쿤둔은 자신이 티벳의 한 사원에서 생을 마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늘 그가 미소짓는 사진을 보며 따라 웃듯이 그의 낙관을 나도 믿고 싶어진다.

그의 비폭력이 정말로 성공했으면 좋겠다. 영화 [미션]이나 [로베로](제목이 맞나? 남미에서 순교한 신부님 이름)에서처럼 비폭력으로 대항한 신부님들이 현실적으로는 실패한 듯이 보였다. 부처님도 그랬다. 자기 나라를 침략하는 적 앞에서 길을 막고 세 번이나 앉아 계셨다. 그러나 네 번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적들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에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대로 폭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나라는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도 사실, 누가 승리했는지는 모른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내 눈은 얉아서 울부짖는 티벳인의 고통이 보인다. 고통. 혼돈스럽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 번민하고 절망하고, 병들었던(지금은 극복했지만) 쿤둔의 형제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바른 견해, 지혜와 자비심,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내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것들이 두려움과 혼란을 걷어내리라. 그런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달라이라마는 수행에서 온다고 단언한다. 그는 바쁜 일정중에도 네 다섯 시간을 수행에 보낸다. 다짐만 하고, 실천이 없는 이런 생활을 끝장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생이 언제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간 내 가족이 말해주고 있다. 내 가족 중 두 명이나 생명을 마친 뒤에도 내게 가르침을 전한다. 가족. 출생과 함께 하게 되는 그들은  어떤 형태이든 우리의 스승임에 틀림이 없다. 쿤둔에게도 그러리라. 아마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5-07-1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오지 않는 생..잘 살고 싶은데..에효~ 요즘 정말이지 정신의 힘, 이란 것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절절히 느끼게 해 주는 나날입니다. 이누아님, 실천 없는 다짐, 이젠 끝장냅시다! (전 빼주시고..이누아님만, 흐..^^a)

2005-07-11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달라이 라마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은 행복한가?" 이 책을 읽었을 때만 해도 "그렇다"는 대답을 하기 쉬웠다. 지금은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고, 가끔 길가에서도 눈물이 쏟는다. 언니가 떠나간 후 갑자기 삶이 누추해지고, 죄책감으로 가슴이 막혔다. 친정 옥상에 서 있자니 문득 이 책이 떠오른다. 나라를 잃고, 난민들과 고통스런 상황에서 살아가면서도 진정한 행복을 발견한 사람이 있구나 싶어 다시 책을 집어든다. 책에서 내가 찾는 구절은 죄책감에 관한 이야기다. 살면서 이렇게 지은 죄가 많구나, 이 세상을 여읜 사람에게 이토록 잘못한 것이 많구나...마음을 다하지 못한 잘못이 이렇게 가슴을 옭죄는구나...언니야, 잘못했다, 잘못했다 하는 말이 밥을 먹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나온다. 달라이라마는 죄책감을 어떻게 극복하셨을까?

달라이라마에게 찾아온 노수도승이 높은 차원의 수행법에 대해 물었는데, 그때 달라이라마는 별 생각없이 그것은 어려운 수행법이어서 젊은 사람이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노수도승은 젊은 몸으로 다시 태어나 그 수행을 하기 위해 자살했다고 한다. 달라이라마는 그 당시에 적절하게 대답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지금도 후회스런 감정을 없애지 못했다고...그런데도 후회하는 마음이 자신을 짓누르거나 과거에 얽매이게 만들지 않는다고 하셨다. 뼈저린 후회에도 불구하고 죄의식과 자기 모멸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책에서의 해답은 덧없음에 대한 명상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삶의 본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말들이 지금은 공중에 떠 다니지만 어떤 문제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니 이런 무거운 마음이 어서 변해서 타인을 돕는 데 유익한 것으로 내 가슴에 가라앉기를...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5-06-07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원히 지속되는 문제나 슬픔은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도 하고 안심도 됩니다.
 
용서
텐진 갸초(달라이 라마).빅터 챈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까지 내가 읽은 달라이라마의 책들은 달라이라마 그분이 직접 강의하신 내용들이었지만 이 책은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빅터 챈이라는 그분의 친구가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정리된 것이다. 그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인다.

내 생각의 틀을 넘어선, 인상적인 이야기 하나-티벳의 한 소년이 중국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중국장교가 쇠몽둥이로 그 아이를 때렸다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달라이라마는 처음엔 그 장교에게 화가 났지만 곧 연민을 느꼈다고 한다. 사람과 행위를 구분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그가 그 자리에 있고, 총이 있었다면 그 장교를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깜짝 놀랐다. 빅터 챈도 나와 같았던 모양이다. 불교수행을 했는데도 말입니까? 하고 묻는다. 달라이라마는 "가능하죠. 그런 긴장된 상황에서라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때로는 행동이 먼저 앞서고 생각은 나중에 따라오지요"라고 대답한다.

나는 자비롭고, 존경스러운 많은 이야기들 중에 이 이야기를 말한다. 이 이야기는 언뜻 보면 모든 생명체에 대한 연민과 자비심을 잃지 않는 그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가능하다는 말을 했을 뿐이다. 그분이 내내 강조하시는 연기(상호의존성)의 입장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이란 없다. 모든 일은 가능하다. 심지어 살인까지도 말이다. 그런 잘못을 저지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정되고, 자신만만한 자아를 여의고, 인류가 할 수 있는 모든 선악이 자신이 행위할 수 있는 모든 선악이 되는 것이다. 인류와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을 때, 그것이 비록 살인자의 행위일지라도 자신과 분리시키지 않을 때 연민과 자비가 저절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장교의 행위와 (만약 장교를 죽인다면) 장교에 대한 살인 모두 피해야 할 고통이며, 비난받아야 할 행위가 될 것이지만 그것들이 나와 동떨어진 어떤 옛날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조건과 상황이 다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나는 자주 분노 속에 놓여 있다. 그 장교도 그랬을 것이다. 부하를 죽인 적의 아들에 대한 분노. 달라이라마는 그 자리에서 살인을 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100%란 없다. 고정되고 확실한 자아가 없는 것처럼.

그러나 저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책을 읽고 기뻤으며, 그분을 만나고 싶고, 닮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달이면 정말 그분을 뵙는다. 일본으로 그분이 오셔서 그중에 이틀을 한국인을 위해 할애하신다. 바로 지척인데도 우리나라에서 그분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아서이다. 아무도 해칠 생각이 없는 사람의 방문을 거절하는 이웃이 된 것이 아쉽지만 일본에라도 오신다니 내게는 감사한 일이다. 그 시간을 그분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기다린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5-03-25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가 강력한 자기장으로 머리를 치고 가슴을 옭죄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또 사람의 생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것이 또 인생인 거지, 변명하다가도 너무나 작고 하챦은 일에 자주 분노하는 절 보면 한심스럽습니다. 그러니까 달라이라마의 말씀은 역지사지의 입장과 비슷한 거겠군요. 그나저나 달라이라마가 정말 오신답니까? 존경과 사랑으로 기다리는 분이 오신다니, 축하드릴 일이군요. 글고 이누아님, 저 아함경 몇 주전에 구입했습니다. 옴마나! 깜딱 놀랐습니다!! 책이!! 손바닥만해요! 손바닥!! @,,@
 
중국불교사상사 깨달음총서 7
키무라 키요타카 지음 / 민족사 / 1989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으며 생각나는 책들이 있었다. 道端良秀의 [중국불교사]와 케네스 첸의 [중국불교]이다. 세 책이 모두 시대순으로 중국불교에 대해 개괄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중국불교사]는 그 시대 왕조의 불교정책과 민간에서의 불교의 흐름 등에 초점을 맞추는 즉 중국사 속에서의 불교에 관심이 있는 반면, [중국불교]는 중국불교의 시대적 변화에 따른 사상의 변천 등 좀더 보편적인 중국불교사상에 중점을 두고 있는, 어쩌면 불교사 속에서의 중국사와의 연관성에 관심을 갖고 있는듯하다. 이 책은 [중국불교사]에서 보이는 왕조나 시대상황 등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다. 즉 중국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중국사상을 시대순으로 훑고 있는데, [중국불교]처럼 중국불교사상 전반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결국은 "불교의 중국화"라는 문제를 염두해 두고 쓰여진 글이다. 처음 중국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이 중국불교의 외적인 모습과 경향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중국불교사]를, 사상을 알고 싶다면 [중국불교]를 권한다. 마침, 이런 서적을 읽고 중국불교에 대한 대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이 책을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앞의 두 책이 훨씬 자세하고 읽기가 편하다. 이 책은 앞의 두 책에서 문제삼는 쟁점들이 위주가 되고, 또 서술방향 자체가 [중국불교]의 작은 한 편이 책 한 권이 되어 상세해진 것이라 그렇다. 게다가 맨 뒤 편의 "중국불교사상사 상의 여러 문제"라는 부록은 저자의 논문을 요약한 것인 듯해서 쉬운 개설서를 찾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언젠가 중국의 불교가 효를 강조하기 때문에 인도의 불교와 달리 중국화가 이루어졌다는 식의 논문발표를 보고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인도에서는 효를 강조하지 않았단 말인가. 인도의 효와 중국의 효가 어떻게 다르고, 중국불교에서 그러한 점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는 안 되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발표자는 내 의문을 불필요한 것처럼 여기고 대답도 없이 지나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제기했던 문제에 대해 저자도 고민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따로 인도와 중국의 친자개념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대강의 내용은 인도에서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도리뿐 아니라 부모의 자식에 대한 도리를 함께 강조하는 수평적인 관계인 데 반해, 중국은 자식의 도리만을 강조하는데 중국에서 유행한  [부모은중경] 등은 중국적인 효 개념을 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이 문제는 주로 다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어서 평소의 의문을 풀 수 있었고, 저자의 문제의식이 당연하고, 그러한 문제의식 때문에 개설서이지만 자신의 평소 관점을 가지고 쓰여졌다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교성전
홍신문화사 편집부 엮음 / 홍신문화사 / 200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나는 문예마당에서 나온 같은 제목의 책과 이 책을 혼동해서 구입했다. 그러나 둘다 불교성전편찬위원회에서 엮은 것이니(알라딘에서 홍신문화사 편집부가 엮었다고 소개한 것은 잘못이다) 같은 내용이 아닐까? 아무래도 문예마당에서 나온 책의 주나 다른 부록을 생략한 책인 듯 싶다.  

동국역경원에서 나온 [불교성전]이 부처님의 생애와 초기경전, 대승경전의 내용들을 분류해서 정리하는 데 반해 이 책은 부처님의 생애라는 큰 틀 안에 여러 불교경전의 내용들을 삽입하는 형식을 갖고 있다. [십이장경], [법구경], [법화경], [화엄경], [유마경] 등등 거의 모든 경전들의 내용 중에 편집진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부처님의 삶의 흐름 속에 녹여 보려고 시도했다.

한 권의 책에 그 많은 책들을 한 사람의 생의 흐름에 맞게 편집해서 재구성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아니, 너무 무리한 시도였을까? 중간 중간에 내용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갑작스레 법화경의 한 구절이 튀어나온 듯한 느낌을 주거나 사무량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자비희사 중 자(慈)에 대한 구절만 있다든지 해서 황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잘 읽었다. 잠들기 직전에 아주 조금씩 읽었다. 부처님의 음성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 힘들지, 잘 자거라"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깨어 있거라" 하셨다. 그런데도 평온이 찾아왔다. 그 평온을 베개로 잠들었다.

"생은 끝났다. 수행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이로부터 다른 생은 없다"라는 구절을 매일 열 번씩 읽었다. 이 말이 내 유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해서. 나도 부처님처럼 깨닫고, 행하고, 말할 수 있다면...

책을 읽고 자면 꿈을 꾸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루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셔서 불교공부를 하고 싶으니 불교사전을 빌려 달라고 하셨다. 꿈 속에서 나는 이 책과 불교사전을 드렸다. 이 책을 다 읽고나니 다시 그 꿈이 생각난다. 아버지를 모신 절에 가서 이 책을 올려야 겠다.

한 권의 책으로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다소 부족한 점이 있지만 읽는 동안 평온했고, 희망할 수 있는 유언도 생겼고, 아버지께 드린 선물도 마련한 셈이니 내게는 고맙고 고마운 책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분석하지 않고 나처럼 조금씩 읽으려는 이가 있다면 평온을 얻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천한 자의 집이라도 만약 왕이 찾아갔다면 세상에서는 귀하게 생각"(p.696)하듯 책 편집이 부족하지만 부처님의 말씀이 적혀 있으니 이 책이 더없이 귀하게 여겨진다. 다음 수정판이 기대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5-03-02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은 끝났다. 수행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이로부터 다른 생은 없다' 캬..정말 아름다워요. 무언가 완성되고 충만한 듯한 느낌이 드는 문장입니다. 저, 지금 법정 스님의 [오두막 편지]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잼나요! 근데 불교서적에 입문하려는 사람에게 [불교성전]이 적당한 책일까요? 혹시 아니라면 수고스러우시겠지만 한 권 추천해 주십쇼. 이누아님께서 리뷰감으로 채택하신 아래 책들을 지금 뚜룩~ 훑고 있습니다만, 녜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