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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평점 :
이 책의 뒷 표지에는 작가가 왜 이 글을 썼는지에 대해 쓴 말이 적혀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무시하기로 한다. 그의 의도 역시 섬을 지배하려 했던 초기의 로빈슨처럼 인위적이며, 이 책의 자유로움을 앗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를 쓴다. 또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책 뒤편에 놓인 작품해설도 읽지 않는다. 내 마음대로, 나오는 대로 하겠다. 나는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겠다. 모든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므로, 또한 우주이므로. 로빈슨이 자신이 스페란차와 합일되는 듯이 느끼듯이 나는 이 이야기와 한 덩어리가 되어 간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대구 외곽에 있는 광덕사라는 절에 간 적이 있다. 그날은 무슨 행사가 있어서 공부도 하고, 거문고 연주도 듣고, 초를 들고 탑돌이도 하고, 캠프파이어도 했다.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흥분되고 기뻤다. 캠프파이어라는 것도 처음 해 봤다. 그 불가에서 스님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바람이 불었다. 어떤 작은 틈이 있어서 서늘한 바람이 내 따뜻한 행복 언저리로 불어 오고 있었다. 뜨거운 불가에서 느낀 그 서늘함을 나는 곧 잊어 버렸다. 그러나 대학교 3학년 때가 되어 내 내부에 있는 틈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 틈은 어둡고 서늘해서 모든 의미들을 삼켜 버렸고, 나는 "무의미"에 갇힌 듯한 답답함과 그 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두려움을 술로 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틈은 점점 커져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커다란 틈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틈 앞에서 이제 그 틈 속으로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 이야기를 나는 단편소설이라는 형식으로 그려 내려고 시도까지 했었다.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이 틈은 로빈슨이 그의 배에서 스페란차로 이동하는 그 순간이기도 하며, 그가 점차 한 인격체로서 스페란차를 받아 들이기 시작할 무렵 어둠 속에서 걸어 들어가는 동굴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게다가 그가 진흙 속에서 발가벗고 누워 한없이 늘어질 때, 그리고 그 진흙 속에서 나왔을 때의 후회감 역시 비슷하다. 무의미가 엄습하는 때에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계획적인 삶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용솟음친다. 그래서 나는 로빈슨이 진흙에서 일어나 성서를 꺼내 읽고, 농사를 짓고, 법률을 정하고 하는 계획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 까닭을 알 수 있다. 그런 회의와 불신은 축 늘어진 어깨와 막막함을 가져다 줄 뿐이기에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거가 필요했던 것이다. 기억할 수 있는 과거와 그 유물들로, 누구나 살아왔다고 여겨지는 그 삶으로 얼른 돌아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자가 필요했다. 첫번째 타인은 하느님이자 성서였다. 그는 권위 그 자체인 하느님의 말씀의 찌거기를 따라 살기로 한다. 거기에서 부여되는 권위의 한 자락을 자신에게 부여하고, 물시계를 통해 삶을 통제하려 한다. 두 번째 타인은 항해일지였다. 그의 항해는 끝난 지 오래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저 일기라고 하지 않고 항해일지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유지시킨 채 글을 쓴다. 어느 수필가의 말처럼 "모든 쓰여지는 것은 보여지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일지는 나중에 그 글을 읽게 될 타자(그것이 시간이 지난 후의 자기 자신이 된다 할지라도)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은 것이다. 그 세 번째는 바로 스페란차였다. 그는 그녀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다가 어머니로, 연인으로 변신시킨다. 왜냐하면 그녀만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생명을 탄생시키고 있었으므로 그도 그의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하느님이나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타자보다는 그녀가 필요했다. 살아 있는 가축이나 그 개 텐과 같은 움직이는 생명체가 있었으나 그들을 타자로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위나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하며, 끝없이 착하고 다정하신 하느님과 언젠가 만나게 될 인간과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는 여인, 그리고 생명의 바탕을 이루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물시계까지 갖춘 그는 완벽했다. 그런 그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아야 했지만 스스로 진흙으로 돌아갈까봐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까 두려웠던 것이며, 이 완벽함 속의 틈을 불쑥불쑥 느꼈을 것이다. 틈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 자신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릴 용기가, 아닌 그런 생각조차 불경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대신해 그것을 무너뜨릴 존재가 필요했다.
그 존재는 방드르디였다. 저자는 방드르디가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한 모양이지만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다. 여전히 이 책의 주인공은 로빈슨이다. 방드르디는 로빈슨의 틈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것이다. 로빈슨이 스페란차에 온 초기에 발견한 그 환상의 배와 같은 것이다. 그 배 위에 서 있는 여인이 죽은 자신의 누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본 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던 바로 그 장면말이다. 하느님의 권위 아래 질서를 창조했으나, 그의 딸까지 피어나게 했으나 오래도록 홀로 있었던 그는 환상의 방드르디를 만나게 된다. 로빈슨이 총을 들고 죽이려고 했던 바로 그 존재, 권위로부터, 과거로부터 벗어난 그 존재는 로빈슨 자신이었다. 기막힌 우연-그러나 나는 그것을 로빈슨의 속마음, 혹은 무의식이라고 생각한다-으로 살아남은 그 존재는 금요일이다. 예수가 죽은 그 금요일. 그러므로 로빈슨에게서 떠나지 않았던 과거와 권위를 죽이러 온 존재였다. "쌍둥이가 달 속에서 태어난다. 서로 마주 붙은 그들은 마치 수백 년 동안의 잠에서 깨어나듯 서서히 움직인다"(p.287)라는 구절에서 보듯 그들은 애초부터 하나였던 것이다.
애초부터 하나였던 그를 만나는 순간, 그는 틈에서 부는 바람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 익혀간다. 계획된 삶 바깥의 틈 쪽으로 얼굴만 돌리면 바로 진흙 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는 오류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것이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항상 우위에 서 있어야 할 것 같았던 자신을 버려야 했으므로. 스페란차와 그 안의 모든 것은 그의 소유였고, 그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러나 방드르디는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그것들과 교감하고, 히히덕대고 있었다. 아무 노력도 없는 듯 보였다. 그것이 로빈슨에게 불타는 질투심을 가져다 주었고, 방드르디에게는 매질을 당하게 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는 태어나서 모든 사회적 활동을 익히지만 죽음을 익히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갑작스런 것이기도 하다. 마치 그가 일궈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듯이. 방드르디는 죽음이다. 애써 외면해 왔던 죽음, 동시에 갈망해 왔던 그것. 그것의 자연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어서 어떤 상황과 마주쳐도 놀라지 않는다. 심지어 화이트버드호에 들어갔을 때조차 그는 히히덕거리며 그곳에 원래 있었던 존재처럼 행동한다.
이 책에서 그런 자연스러움에 대한 질투는 부러움으로 변해가고, 결국 문명과 계획된 삶을 암시하는 하얀 새-화이트버드호- 대신 검은 독수리가 사는 곳에 머물기로 한다. 이제 그는 겨우 죽음, 혹은 틈에 익숙해지고 있었으므로 삶이 만들어낸 익힌 음식을 토해냄으로써 완전히 스페란차에 정착한다. 그러나 방드르드는 떠난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인 그를 자신 속에서 살려냈기에 분리된 그가 이제는 필요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떠나도 된다. 그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고, 누구도 곁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이므로 어디에 가도 그의 존재방식은 자연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니 그를 염려하지 마라. 이제 남겨진 로빈슨을 보자. 그에게 또 하나의 존재가 생성되었다. 그것은 화이트버드로부터 버려진 어린 로빈슨이었다.
이전에 그는 삶 쪽에 서 있었다. 그가 갈망한 죽음은 그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과 하나되기 위해 그의 성기로 파종하며 "대지와 혼인한 자가 죽어 잠들다"(p.155)는 표현처럼 은밀한 자신만의 성, 혹은 죽음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죽음 혹은 방드르디는 이제 한 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새로운 생명, 어린 로빈슨이 그의 곁에 남았다. 그는 자연스러운 삶과 죽음의 조화로 존재하면서 어린 로빈슨을 보살피지 않고 던져 둘 것이다. 어린 로빈슨의 이름은 목요일이다. 어린아이들의 일요일, 그는 로빈슨이 자신이 노인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아니 노인이 되지 않았던 것처럼 언제나 어린 아이인 채로 존재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