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선을 말하다
케네스 렁 지음, 진현종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숙희야, 네 생일이 다가오는구나. 네 생일이 되면 주려고 샀던 책을 다 읽었다. 요즘은 리뷰도 안 쓰고 지냈는데 네게 줄 이 책을 빌미삼아 여기에 편지를 쓴다. 게다가 오늘은 16살, 17살의 우리가 음악회에서 처음 만난 날이기도 하구나. 그때도 우린 이런 대화를 나누었지.

이 책은 우리가 나누던 대화와 벗어나 있지 않다. 이 책에서는 책을 읽기 전에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 이 주제와 관련되어 떠오르는 모든 선입관을 죄다 떨쳐 버려야 한다(p.12)고 하는구나. 그러나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어야 야, 선입관, 저리 가 라고 할 수 있겠니?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이미 안착한 내 머리 속의 선입관이 있구나. 행여 이 책이 예수를 선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로 책을 열었던 거다. 그 의심 덕에 처음엔 좀 엉성하고, 어색한 무엇을 느꼈다. 나중엔 점점 사라져 갔지만. 심각하지만 않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내게 아주 와닿고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오늘은 이 구절만 얘기할까 싶다. 왜냐하면 너는 이 책을 읽지 않았으니 다 읽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테니 말이다.

미래에 주의를 고정시키면 불안이 끝이 없을 것이다. 예수는 지옥을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마가복음 9장48절)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말한 비유의 직접적인 출처는 예언자 이사야인 것으로 보인다. -p.206

깊은 선입관을 가지고 보건대, 이 구절은 내가 늘 말하던 그 구절이다. 나는 늘 생각을 벌레라고 표현한다. 생각의 벌레들...게다가 분노와 부정적인 감정은 불과 같다. 꺼지지 않는 불처럼 고요하다가도 바람만 불면 확 하고 타오른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그것을 생각이나 부정적 감정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

예언자 이사야가 그들의 불과 그들의 벌레라는 말을 쓴 것은 고통의 근원이 내면적인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지옥의 불이 다른 불과 달리 꺼지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안에서부터 타오르기 때문이다. 그 불의 출처를 찾아 정신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방법을 얻지 못하면 불을 끌 방법이 전혀 없다.마찬가지로 벌레 역시 적절한 비유인데, 벌레는 안에서부터 먹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이 죽지 않는 까닭은 우리의 내면 세계에서 자양분을 얻기 때문이다.......그들은 내면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하늘나라가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좀비처럼 살아가고 있다. -p.207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불과 벌레를 어떻게 끄고,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그것들이 처음에 왜 만들어졌을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화살을 맞아놓고 화살의 성분분석을 한 뒤에야 뽑겠다는 어리석은 사람이었구나 싶다. 지금까지. 좋은 생일맞이 책에 지옥이야기가 뭐냐고 할지 모르지만 손바닥을 뒤집기만 하면 천국이 거기에 있으니까.

손바닥을 뒤집듯 쉬운 이 일이 쉽사리 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은총이 부족한 것일까? 은총을 저자는 우아함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연습이나 행위가 바로 그 우아함의 전제조건이라고 하는구나. 예술가인 네게 유익한 내용이다. 293페이지에 있다. 안 옮기마. 아니, 그 페이지 제일 마지막 구절만,

노력할 필요가 없게 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영성의 경우 노력의 무익함을 깨닫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다.

요즘 읽는 모든 책에서 비슷한 구절을 발견하는구나. 노력이 필요한 강한 선입관 때문에 눈에 띄는 거겠지. 이제 눈치챘겠지만 이 책은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끝나지만 성경 구절만 잔뜩 인용한 그런 책은 아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싶었지만 예수를 이해하지 못해 멀어져 갔던 저자가 선수행을 통해 다시 예수를 만나고 있는 책이라 해도 되겠다. 나 역시 전체 성서 중에 요한복음이 내게 더 와 닿았던 역사적 배경도 좀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얼마전 네가 얘기했던 유다복음 같은 책들이 엄청나게 많다. 좀 황당한 내용이 많은 숱한 외경들 외에도 1945년 발견된 토마복음서 같은 것도 있다.  이 복음서에는 곽노순이란 분이 해석을 하셨는데 그게 따로 책으로 나와 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집에 오면 잡지에 실린 복음서 내용을 보여주마. 이 책을 읽을 때 그런 복음서들의 내용이 들어있지 않을까 했는데 저자는 현재 공인된 성서의 내용들만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 

이야기가 길어졌구나. 미리 생일 축하한다. 중국 다녀와서 보자. 잘 다녀와라. 네가 읽고 나서 더 풍성하게 이 책을 뜯어 먹어보자. 네 덕에 이 책을 읽었구나. 고맙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팽이 2006-04-2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번 읽어보면 좋을 책이라 생각했는데..
이누아님이 먼저 글을 올려주셨군요..
잘 읽고 갑니다.
공부에 힘이 붙기까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
그래서 평범한 우리들은 노력해야 한다는 말...와닿네요..

2006-04-27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6-04-27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별로 노력하지 않고 금방 지치는 가벼운 마음을 들여다 봅니다.

속삭이신 님, 예전에 아는 선배가 위빠사나 명상 하는 데 열흘 정도 참가했다고 해요. 불자는 아니지만 그 이후로 마음의 단추를 하나 얻은 것 같다는 말을 했어요. 화가 나거나 엉뚱한 생각이 일면 그 단추를 누른다구요. 벌레들을 잡는 데에는 뭔가 단순하면서 결단력 있는 방법이 필요할 것 같아요. 천국이 별 건가요? 그 벌레들과 꺼지지 않는 불들이 없으면 곧 평온이지요. 평온. 평온하게 살고 싶어요.
 
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 - 일상용품의 비밀스러운 삶
존 라이언.앨런 테인 더닝 지음, 고문영 옮김 / 그물코 / 200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의 리뷰를 읽고 사다두고는 잊고 있었다. 책장 책들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구보 씨의 하루, 펼친다. 얇군. 읽다보니 앞에 있던 경고문구가 떠오른다.

이 책의 초고를 읽은 사람들은.......당황하거나 절망감에 빠졌다고 고백했다.......여러분들이 알게 모르게 소비하는 일용품들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기를 바라고, 그것을 반성적으로 성찰할 수 있기를 희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기쁘지 않을 것이고, 다만 끔찍한 경악만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p.14).

그랬다. 녹색시민들이 해야 할 일을 유심히 볼 뿐 본문은 되도록 빨리, 듬성듬성 읽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아주 무거웠고, 다음에는 해야 할 일을 찾아야 겠다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발적 가난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신문이나 책을 되도록이면 구입하지 말고, 돌려 보자고 한다. 우리의 신문들은 내가 읽지 않아도 부수 이상을 찍어낸다. 광고를 위해서. 어쨌든 그래서 돌려 보았다고 하자. 시민A가 다니는 출판사가 문을 닫을 처지에 놓이게 되고, 그는 직장을 잃을 것이다. 그랬다고 치자. 책을 찍어내지 않게 되자 인쇄업자와 제조업자들이 불황이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랬다고 치자. 저 저임금에 헤매는 3세계 국가의 노동자들 역시 나무 베는 일이 없어져서 실업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 모른다고 치자. 내수경기가 안 좋아서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내수경기가 좋아지려면 누군가 소비를 해야 한다. 그러니 소비를 미덕이라 부르는 것은 마땅하지 않는가.

자전거를 타자. 그런데 더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기 전까지 선구자적 자전거 타기 인간이 겪게 될 일들이 있다. 자동차 멀리하기 첫번째, 이 책에서 제시하듯 대중교통이 잘 발달된 곳에 산다...부자들이 외곽에 살고, 도시의 공동화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 공기 좋은 곳에 살고 싶다. 두 번째, 아침에 자전거로 출근하라...유산소 운동을 하면서 온갖 매연을 다 맡게 된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여라. 세 번째, 그래도 자전거를 타려면 차에 자전거를 싣고 어디론가 가야 한다. 산악자전거처럼. 역시 차가 필요하다.

소비하지 않아도 불황을 겪지 않는, 혹은 불황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에서, 우리가 일시에 자전거를 타기로 결심하는 일이 벌어질까?

언젠가 인도여행을 다녀온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인도사람들이 대변을 보고 모두 화장지를 쓰게 되거나 중국인들이 모두 신문을 읽게 되는 날, 지구엔 단 한 그루의 나무도 남지 못할 것이라는 대화였다. 한 트럭의 종이는 나무 일흔 두 그루라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나눈 대화가 실현되고 있다. 지구의 문명이란 애초부터 모두가 누릴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 일부만이 누릴 수 있는 것. 이젠 물도 사먹는다. 물을 사먹는 걸 상상이나 했는가...신선한 공기도 부자들만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소비가 지구 전체의 환경에 끼치는 나쁜 영향에 대해 구보 씨와 같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다. 드디어 나도 약간 알게 되었다. 나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사람인 게다. 아니면 내 생활을 바꾸고 싶지 않아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거나...그래도 책에 실천할 것들은 의외로 많다. 간단하게...음료수를 적게 마시라든지, 건조기 대신 빨래줄을 이용하라든지 인권단체나 환경단체를 지원하라든지...그러고보니 많네. 할 수 있는 것들 혹은 하고 싶은 것들은 하련다. 하기 싫은 거, 어려운 거, 안 하련다. 이러니 뭐가 되겠는가. 환경이나 소비의 문제가 지구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데, 지구가 우리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데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다면 말겠다니. 이래 가지고야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정신차려라!!! 이누아.

당신이 무엇을 입고, 신을 것인가에 너무 신경쓰지 말아라. 자발적 가난을 서약하라(P.60).

자발적 가난에 대한 서약의 유무에 관계없이, 무엇을 입고 신을 것인가에 대해 엄청 신경쓰인다. 이 책 읽기 전보다 훨씬. 가격보다 가치가 소중한 입을 것과 신을 것...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바람 2006-03-07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어렵지요. 이거. 자발적 가난을 서약하라니. 제가 찾은 답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예요. 저희 동네에서 '음식물 쓰레기 안 버리기 서약 운동' 캠페인이 있었어요. 누가 할까 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서약을 하시더군요. 동네 아줌마들을 꼬실까 했는데 너무 쉽게 서약서에 자기 이름을 쓰더라구요. 물어봤지요. 자기 진짜 음식물 쓰레기 안 버릴 자신 있어? 애 둘 딸린 아줌마 친구가 너그럽게 웃으며 말하더라구요. 설마~, 근데 먹을 만큼만 먹으면 되지 않겠어! 뽀뽀해주고 싶었어요. 너무 무겁지도 그렇다고 싱겁지도 않은 말이었어요. 제가 아이들 유모차 안 태우기 운동하면 유모차 회사로부터 압력을 받겠지요. 근데 엄마들은 맘만 먹으면 유모차 안 태울 수 있거든요. 같이 걷는 거예요. 세상을 향해 발을 뗄 수 있게. 넘어지고 넘어지는데, 조금만 기다려주면 되거든요. 그러면 아이는 자발적으로 유모차를 거부하게 되어요. 대신 엄마랑 손을 잡게 되지요. 전요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자발적 가난을 서약하는 건 좀 어렵고 귀찮잖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전세계적으로 아이 안 낳기 운동을 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이 무서운 세상에 아이를 내보낼 수 없다. 무정자 무난자 캠페인이지요. 그러면 지도자들이 좀 겁을 먹지 않을까요. 환경도 좀 보호해보겠다고 약속도 좀 하고, 전쟁도 안 하겠다고 서약서에 도장도 찍고 그러지 않을까요. 내 자식이 없으면 남의 자식이 더 귀히 보이지는 않을까요. 굶어죽는 아이들도 좀 보살필 수 있지 않을까요. 내 자식에게 쏟을 정성으로 말이지요. 사실은 인류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해법이 우리의 2세대를 낳지 않는 것을 담보로 해야 할 만큼이라고 생각하면 서글퍼요. 좀 전에 읽은 책인데요. <자발적 복종>이라는 책이 있더라구요. 핵심은 왜 사람들은 자발적 복종을 스스로 선택하는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가인데 이게 1548년에 저자가 18살에 쓴 책이라고 하니 시사하는 바가 많았어요. 배가 고프면 배에서 소리가 나는데 영혼이 고프면 어디서 소리가 나지요? 왜 많은 문학작품에서 심장을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내 몸속의 물이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한번은 꼭 한번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싶어요. 의도되지 않았고 습관화되지 않은... 앗 뜨거!

달팽이 2006-03-07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번은 꼭 한 번은 내 영혼의 눈물을 흘리고 싶어요.
자발적 가난에 대한 님의 답변에 공감합니다. 돌바람님

이누아 2006-03-0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새벽에 쓰셨네요. 저거 쓰면서 실천은 없이 불평만 늘어놓고 있는 제가 보여서 흑색시민이라고 한 거예요. 아이 안 낳기 운동...제 친구가 아이를 낳고 제게 한 말이었어요. 한번도 지구를 염려해 본 적이 없는데 내 아들이 살 곳이라 생각하니 50년 후도 걱정된다고. 그나마 아이들이 있어서 이 정도인 건 아닐까요?^^

돌바람님, 달팽이님, 내용이랑 상관없는 이야기에요. 눈물요. 몸이 아프거나 하품을 하면 눈물이 물처럼 흘러요. 근데 마음이 아프거나 슬픔이 가득차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정말로 뜨근뜨근해요. 아, 이래서 뜨거운 눈물이라고 하는구나 싶을만큼. 전 그 눈물이 심장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거라 그렇게 뜨거운가 생각했는데...심장은 피 때문에 맨날 빨갛게 보이잖아요. 빨간 건 좀 뜨거울 것 같고.^^

니르바나 2006-03-0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 이 세상을 아끼는 모든 분들을 돌바람님 버젼으로 사랑한다 표현하고 싶군요. ㅎㅎ

돌바람 2006-03-08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그래요. 맞아요. 아이가 있고 보니 드는 생각이 맞습니다. 그러니 '아이 안 낳기 운동'이란 얼마나 황당하고 씁쓸한 기쁨을 포기하는 일이겠나요. 달팽이님과 니르바나님, 이누아님 늘 제가 한 수 배웁니다. 넓고 깊게 보는 것과 굵고 세세하게 보는 것은 늘 밀고 당기네요. 좋은 날 되세요.^^

이누아 2006-03-10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쑥스러워하지 마시고 표현하시지요.^^
돌바람님, 뭘 한 수 배웠다는 말씀일까요? 님도 좋은 날 되세요.
 
침묵의 뿌리
조세희 지음 / 열화당 / 1985년 9월
평점 :
품절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우리는 날마다 죄 지으며 도시에 와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도시가 우리의 고향은 아니다.-p.80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눈,  만지면 까끌까끌할 터진 입술, 바람과 먼지에 찌든 머리칼과 때묻은 옷을 입은 짙은 쌍꺼풀의 소녀...그 소녀가 이 책의 표지에 붙어 있다. 침묵이라는 말이, 뿌리라는 말이 가져올 무게가 책을 펼치기도 전에 배경이 보이지 않는 이 소녀의 사진에 실려 있다. 책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아마 사진 때문에 선택했을-맨질맨질한 종이 위에 펼쳐진 글자들이 아이들의 일기에 가 닿았을 때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고등학교 때 읽고 하루 종일 울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렇게 울었던 걸까? 하고 묻자 오빠는 그런 책을 읽고도 울지 않는 사람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라고 했다. 아이들이 적은 글자 사이사이의 침묵이 무거웠다. 덮었다. 책을 덮어도 표지는 보인다. 공부하는 작은 상이 있다. 이 책을 그 상 위에 올려놓지 않고 상 아래에 두었다. 그 상 옆에서 기도를 하는 나는 책표지의 소녀가 매일 날 바라보고 있는 걸 봤다. 그런데도 우리는 눈이 마주쳐지지가 않았다. 이 죄 지으며 사는 도시를 떠나 고향에 가 닿으면 우리, 서로 눈 마주칠 수 있을까? 소녀의 얼굴에 먼지가 앉을 쯤에야 나는 책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한참 후에 가방에 넣어 두었다. 가방을 멜 때마다 그 소녀를 업고 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은 일요일. 일터에 나왔다. 일요일의 일터는 조용하다. 조금의 일을 하고, 비는 시간이 많아 가방을 여니 소녀가 있다. 다른 책도 없고, 나는 가볍게 소녀를 만나기로 했다. 글자를 다 읽었다. 사진을 본다. 그러다 나는 또 운다. 사진 때문인지, 아침에 받은 친구의 마음 아픈 소식 때문인지, 내 가슴의 돌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운다는 것처럼 쉽고 자연스러운 일은 또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제일 쉬운 방법으로 비극에 대처했던 셈이"(p.124)라고 하는 작자의 말처럼 나는 그렇게 제일 쉬운 방법으로 이 모든 이유에 대처했다.

사실, 얼마간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책 읽는 내내 꿈 이야기를 하는 듯 느껴졌다. 뒤섞여 있다. 아마 내가 책을 집중해서 읽지 못하는 탓일게다. 이렇게 꿈처럼 여길까봐 그는 두 번이나(내 기억에 그렇다. 더 많이 얘기했는지도 모른다) 같은 말을 했다. "우리땅 어느 곳의 역사가 20년밖에 안 된다는 것은 곧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p.41,p.138). 그가 내내 이야기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꿈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어떤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모르는 척 울기만 했다.

책표지의 그 소녀 이야기만 하고 그만두련다.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남의 집 이야기처럼 감상을 말하고 싶지가 않다. 아니면 내 안의 침묵의 뿌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입을 막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것에도 이렇게 입을 꼭 다물게 하는 내 침묵의 뿌리는 무엇일까? 이 모든 이야기에 내 책임이 있다고 하는 작자의 말에 겁을 먹은 것일까? 이게 그냥 70,80년대의 이야기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허튼 생각을 하다 책을 덮는다. 그 소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소녀...책을 덮는 순간, 소녀의 얼굴...그 얼굴은 이 책 자체이다. 하여 이 책은 덮어지지 않는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팽이 2006-02-26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나라 어느 곳을 다녀보아도 2-30년 전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산업화와 물질화의 속도에 빼앗겨버린 우리들의 마음과 영혼이 때로는 텅 빈 폐허의 도시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여러번 있습니다.
퇴근하는 길에서 쳐다본 고층 아파트의 군집들이 마치 꿈처럼 환상처럼 보이는 경험들 말입니다.
아, 삶이 꿈이 아닐까? 환상이 아닐까? 하는 느낌들이 가끔씩 마음에서 올라오곤 합니다.

이누아 2006-02-26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정 우리집이 양옥이 되기 전, 마당이 있고, 한가운데, 그리고 또 가장자리에 꽃밭이 있었어요. 늘 이집저집 이사를 다녔던 제게 그 집은 처음으로 우리집이었고,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는 집이었어요. 그 작은 꽃밭에 오만 가지 꽃들과 나무들이 뒤섞여 살았어요. 아침에 세수대야에 물을 받아놓으면 장미 꽃잎이나 감잎이 떨어져 있곤 했었지요.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저는 그저 꿈을 꾼 걸까요? 저 소녀는 그저 사진일 뿐일까요? 아니면 사진 속 저 소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파란여우 2006-02-2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덜한 도시 뒷골목에 유기된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리뷰입니다.
이런 사진은 들여다 보는 일만으로도 가슴속이 자꾸 뭉쿨뭉쿨 아려오죠.

이누아 2006-02-27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동감입니다.

icaru 2006-02-27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일터라니...으아...너무 고즈넉하네요~ 이누아 님처럼...
열화당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열화당 사장님하고 조세희 님하고 오랜 친구라 하대요... 심지어는 조세희 님 아드님도 그 출판사에서 오래 일을 했다고~

이누아 2006-02-27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화당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어감은 열나고 화난 것만 같아요.^^

비로그인 2006-02-28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뭔 말을 못하겠더라구요. 지금은 어른이 되었을 법한 '애들' 일기가 참..가슴이 많이 아팠어요. 누덕누덕 꼬질꼬질한 삶..저도 분명 그런 시기를 보냈지만 생각해보면 또 그때만큼 행복했던 적도 없었어요. 부모님이 계셨고, 가난했지만 공부에 대한 부담없이 자연 속에서 몽상을 즐기고..나름 좋았어요. 막연히 그리워져요.

이누아 2006-03-05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하고 병든 이웃의 모습이 간혹 텔레비전에 나와요. 모자이크 처리도 없이. 누가 그런 모습을 모두에게 보이고 싶을까요? 한 피디 말이 보통 200만 원을 준대요. 가난한 사람들은 그 돈이 몹시 큰 돈이라 얼굴을 내보인다고. 물론 그 결과로 도움을 받는 일도 많지만요. 우리 과 선배는 영화감독이에요. 단편영화 내용..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여자가 있어요. 흉터난 아이의 얼굴을 찍어요.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마 약속하고. 세월이 흘러 그 여자, 길가다 누군가를 만나요. 고등학생 나이가 된-학교는 다니지 않지만- 그 아이가 사진을 봤다고 해요. 자신의 사진. 상을 타셨군요. 하고 인사하고 지나가요. 웃으며, 가볍게. 여전히 얼굴에 상처가 있는 채로. 이 책의 저자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옮겨 적고, 사진을 찍었겠죠.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면 우릴 울리지도 못했겠죠? 어쨌든 문득 어른이 되어 이 글과 사진을 읽는 아이, 어떤 마음이 들까 싶었어요. 우리처럼 아무 말도 못할까요? 아니면 그 꼬질꼬질했던 삶을 그리워할까요? 끔찍해 할까요?...횡설수설횡설수설.....
 
간화선 - 조계종 수행의 길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 엮음 /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조계종은 선종을 표방한다. 선종은 참선을 주로 하는 종파이고, 그 참선 중에서 조계종은 화두참선을 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경허 선사로부터 지금에 이르는 선풍은 자세히 말로 가르쳐주고, 자상하게 일러주는 전통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러한 자상함은 알음알이를 키우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늘 알 수 없는 선문답이 오고가는 것이야말로 이 가문의 특징이었다. 지금도 법문을 들으면 우선 주장자 한번 내리치고 숱한 선종의 일화들로 내용을 가득 채우는 스님들이 계신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끈질기게 앉아 듣기가 쉬운 일이 아닌 듯, 어르신들 말씀대로 젊은이들이 위빠사나나 다른 현대 명상을 찾아 떠난다. 그 때문일까, 요즘 참선에 대한 학술적인 모임이나 간화선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법문들이 종종 눈에 띈다. 아마도 이 책도 그런 일환으로 지어진 것일 것이다.

화두 하나 줄테니 그냥 한 마음으로 자나깨나 그것만 생각하고, 의심하거라 하고 던져둘 수 있었던 것은 스승이 곁에 있고, 인가를 해줄 선지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까이 스승을 모실 수 있는 환경이 수행자 집단에서조차 쉽지 않은 터라 자신이 바르게 수행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생겼는지 모른다. 책은 간화선의 역사적 배경부터 실제로 화두를 어떻게 참구해야 하는지, 삼매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할 때 어떻게 점검해야 하는가 등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두었다. 조금이라도 간화선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궁금해할 만한 내용에 대해 잘 정리되어 있다.  

특별히 기억나는 이야기는 참선수행을 할 때의 열 가지 병통에 대한 부분이다. 그 가운데 마지막 열 번째의 병통은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라"는 부분. 수행을 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한다. 수행하는 중에 깨달음을 헤아리면서 그것을 기다린다면 무수 겁 동안 수행하더라도 결코 깨달을 수 없다. 대해 선사는 이에 대해 전도된 생각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알음알이의 장애를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과 스스로 깨치지 못했다고 말하여 달게 미혹한 사람이 되는 것과 미혹한 가운데서 의도된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p.258)이라고.

의도하는 마음 없이 무엇에 간절해지고, 간절한 무엇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간절함에는 어떤 심각성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던가...하고 싶지 않은 일이 생기면 수행이라 여기자 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수행은 하기 싫은 일을 불평없이 하는 것인가. 무의식중에 수행은 불편하지만 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지는 않았는가. 무상하고 닥치는 삶의 고단함에서 헐떡이고 싶지 않아서 겨우 열어제치는 창문...왜? 내 수행에는 즐거움이 빠져 있는가. 물론 어떨 땐 환희에 차기도 하지만 대체로 꾸역꾸역 먹는 약 같지는 않았는지...간혹 어두운 심각함 속에 놓여 있는 것은 깨닫고자 하는 그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뭔가를 기대하거나 뭔가에 기대려하지 않는 수행. 수행이라 할 것도 없는 즐거움. 그런데도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것.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팽이 2006-02-24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나 아무때나 화두를 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같이 곤이지지한 사람들은 옆에 훌륭한 스승이 있어서 이끌어줄 때에라야 화두가 들리는 법이죠.
한 때 화두를 들고 있다가 머리로 기가 쏠려 토할 것 같은 나날들을 몇 일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이미 그 때에는 공부한다는 욕심이 앞섰던 것이지요.
스즈끼 순류 선사의 '선심초심'이란 책을 보면서
공부는 한다는 생각도 없이 하는 것이라는 말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부는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스스로 되어지게 해야지 억지로 욕심이 앞서면 대체로 머리로 기가 몰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가 잘 될때에는 한다는 생각 한 점없이 그저 되어지니까요.
참스승의 바른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과정에 조그만 이상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공부하기 위해선 끝없이 모르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책이 나오게 된 것도 저같이 사회생활에 몸을 둔 일반인으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놓아버려라는 선승들의 말씀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게 받아들여집니다.
세세생생 선지식만나 마음 더욱 밝아져 부처님 전에 복많이 짓기를 발원합니다.

이누아 2006-02-26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3때 공부한다는 생각도 없이 공부했습니다. 그게 공부인 줄 몰랐으니까요. 내내 왜 나는 내 주인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온몸을 채우고 다녔습니다. 스승이 없었던 탓에 신경성 두통이라는 병명으로 1년을 아파 지냈습니다. 바른 가르침이 절실합니다. 지금도 때로 머리에서 피고름이 터집니다. 열심히도 하지 않고 욕심만 가득차서 머리가 터져 나오나 봅니다. 괜히 머리통에게 분풀이하지 않고, 목마르지 않아도 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 어린왕자처럼 가만히, 천천히 걸어보렵니다. 님의 발원에 합장하고, 함께 합니다.
 
그대 자신을 알라 깨달음으로 가는 길 5
바가반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 지음, 김병채 옮김 / 슈리크리슈나다스아쉬람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처음 읽은 마하리쉬의 가르침은 "나는 누구인가"였다. 다시 그는 내게 "그대 자신을 알라"고 말한다. 다른 일체의 것들은 허망한 것이다. 그대 자신을 향해라.

어떻게? 마음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라. 언제 말인가? 생각이 일어날 때. 생각은 어디로부터 일어나는가? 나.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식으로. 화두참선처럼 의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가장 가슴에 닿은 구절,

슬픔도 하나의 생각일 뿐인가요?/ 모든 생각들은 슬픈 것이다./ 기분좋은 생각들 조차 슬픈 것이겠군요./ 그렇다. 왜냐하면 생각들은 참나로부터 관심을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p.152).

화두참선을 하거나, 자아탐구를 하거나 심지어 염불이나 독경을 하는 중에도 깜짝 놀라게 된다. 생각들. 뿌리도 없이 흔들거리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구름들처럼 해를 가리는 그것들. 그것들의 힘에 놀란다. 거의 모든 생각은 과거와 미래에 가 있다. 그것들이 집착을 끌어당겨 힘을 갖는다. 자체 힘을 가지게 된 생각들을 우리는 자아라 믿게 된다. 그러니 생각은 슬프다. 진리의 해를 가리니.

혼자서 어둔 밤길을 가는 것은 두렵다. 길을 아는 자가 안내해 주거나 등불이 필요하다. 수행에는 신이나 스승의 은총이 필요하지 않은가. 마하리쉬는 길 위에 선 순간, 이미 은총을 받았다고 대답하신다.

나를 찾겠다는 갈망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바로 신의 은총 덕분이다. 일단 이 갈망이 그대를 붙잡으면 그대는 은총의 손아귀에 붙잡힌 것이다(p.168).

그러나 갈망이라기엔 너무 약하고, 갈망이 아니라기엔 꽤나 오래된 "나"에 대한 탐구는 도대체 무슨 진전이 있는가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누군가의 은총이라 할지라도 나는 예전과 같이 우울과 권태와 게으름, 생각과 감정에 붙들려 있다.  누군가 나와 같았던 모양이다. 마하리쉬께 비슷한 질문을 하고 있다.

바가반이시여, 저는 지난 몇 해 동안 꾸준히 이곳을 찾아왔지만 아직도 아무런 진전이 없습니다. 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나쁜 죄인일 뿐입니다. / 이 길에는 이정표가 없다. 그대는 자신이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왜 그대는 기차의 일등석 승객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그는 차장에게 자신의 목적지를 알려준 뒤, 문을 닫고서 잠을 잔다. 그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정확히 그 역에 도착하면 차장이 그를 깨울 것이다(p.189).

또한 거듭하여 노력하면 깊이 뿌리박힌 경향성들 역시 제거할 수 있다고 하셨다(p.189). 그는 세상을 등질 필요도 없다고. 세상 속에서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하신다. 낡은 엽서에서 보았던 작자가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의 말처럼 "얼만큼 왔는지 돌아보지 말고 사랑을 다해 걸으"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마하리쉬의 가르침은 붓다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그분은 우파니샤드에 기초해서 말씀을 하신다. 즉 우리의 진아, 아트만이 온전한 신, 브라흐만임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이다. 알다시피 붓다는 우파니샤드적 철학체계를 비판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폈다. 진아란 것은 없다. 여기에서 무아사상이 생겨난다. 한때 그러면 불성은 무엇인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불성은 부처될 씨앗이다. 그러니 가능성이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지 진아와는 다른 것이다. 또 한가지 마하리쉬는 이웃에 대한 자비심 역시 방해되는 생각 따위에 불과한 것처럼 말씀하신다. 다른 철학과 실천체계이지만 붓다의 집에 편안히 앉아서 바라보는 마하리쉬의 가르침은 수행상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쨌든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이는 것을 아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신다.

질문들은 좋지만, 이런 문제들을 지나치게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명상을 하고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마음으로 하여금 영적 심장의 동굴 속에 있는 참나 위에 고요히 쉬게 하라. 곧 이것은 자연스러워질 것이며, 그 뒤에는 질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을 비활동적이라는 뜻으로 상상하지 말라. 침묵이야말로 유일한 진정한 활동이다(p.263).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절로 화두가 잡힌다. 에너지가 굉장하다고 느낀다. 마하리쉬의 미소는 아직도 살아 있다. 영성이 느껴진다.  편안한 마음으로, 오직 한 수행만을 의심없이 행한다면 스승이 없다고 불안해 하거나, 진전이 없다고 포기할 필요가 없으며, 세상의 삶을 핑계댈 수도 없다고 하신다. 그저 있는 자리에서, 쉬지 말고 탐구하고 수행하라고 하신다. 그분의 이 간단명료한 가르침 앞에서 구구한 질문들이 오고 가고, 그 오고 가는 질문들이 나의 입에서 나오는 것만 같아 민망하다. 왜 이토록 말이 많은가. 마하리쉬의 미소를 따라 가만히 웃어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혜덕화 2006-02-16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하리쉬의 눈빛을 좋아합니다. 그분의 눈빛에선 편안함이 느껴집니다. 편안함이라고 하니 너무 세속적이네요. 글쎄 말 할 수 없는 평안과 사랑의 에너지를 느낍니다. 생각만 슬픈 게 아니고 저는 요즘 사람 몸 받아 사는 것 자체가 슬픔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 극장을 보면서, 소소하게 얽히는 주변 사람들과 저는 보면서, 이 생에 내가 몸 받아 온 이유를 , 잘 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행복할 때 조차도 슬픈 것, 삶이 그런 것 같아요. _()_

이누아 2006-02-16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쓰는 작은 상 위에 접어 세워두는 액자가 있습니다. 한쪽엔 달라이라마와 링린포체가 함께 찍으신 사진이 있고, 다른 한쪽엔 마하리쉬가 있습니다. 아침에 그분들 얼굴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어립니다. 눈빛이란 게 참 신기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