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일 Vol.1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 중에서
나무
-곽재구
숲속에는 내가 잘 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그 나무들 만나러날마다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이 숲길로 오겠지요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言語(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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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언니가 부엌 벽에 붙여둔 시.
소년 -윤동주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운문사에서
-윤중호
청도계곡의 득음(得音)도, 선지식의 한 소식도 나는 알 바 없다네.
그저, 먹물 장삼 스치는 소리에 얼굴 붉히는
배롱나무꽃만 바라볼 뿐.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 수용소의 제십사 야전 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씩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씩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씩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