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 세상과 당신을 이어주는 테크 트렌드
임춘성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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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영애로 인해 유비쿼터스라는 말을 배웠다. 우아한 몸짓으로 리모컨 하나로 불 꺼진 아파트에 보일러를 켜던 그녀. 그러나 지금은 유비쿼터스(언제 어디나 존재한다) 는 지나간 유행어다. 이제 유비쿼터스에서 더 나아가 언제 어디서나 말귀를  알아듣는 로봇형 가전제품들이 홍수를 이룬다. 그럼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바로 사물인터넷이라 한다. '대화와 소통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 되는 것, 쉽게 말해 인간 이외의 모든 사물끼리도 인터넷이 연결되어 자기들 스스로 정보를 주고 받으며 상호 작동' 하는 것을 일컬어 사물인터넷이라 한다.

작년에 새 차를 뽑았는데 신형차는 그야말로 사물인터넷의 실현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과 연결하면 음악에서 TV, 영화까지 모든 것을 차안에서 즐길 수 있다. 가장 신기했던 건 크루즈 컨트롤이라는 기능인데 고속도로에서 장시간 운전을 할 때 100km에 속도를 맞추어 놓으면 자기가 스스로 운전한다. 안전할 뿐만아니라 편리하고 빠르다. 차선 이탈 방지부터 과속 체크까지 알아서 해준다. 또 속도를 더 내고 싶을 때는 스포츠 모드로 변경할 수 있고 조용히 가고 싶을 때는 클래식 모드로 원하는 승차감을 선택할 수 있다. 가장 편리한 건 오래 전 말하는 자동차가 나왔던 액션영화 <전격 Z작전>의 키트처럼 차키를 꺼내지 않아도 차 문이 열린다는 것이다. 조만간 '오셨습니까? 주인님' 하며 자동차가 말 거는 세상이 올 것 같다. 만약 이 기능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다면 무인자동차 시대가 도래하겠지.

<거리 두기>라는 책으로 8가지 인생주제로 친근하게 다가왔던 저자가 자신의 전공을 살려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미래 변화를 주도할 대표적인 기술 8가지를 선정하여 멋진 신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인공지능 _ 진정한 신인류 : 인지·학습·판단을 대신해주는 지식의 신세계
빅데이터 _ 나와 세상을 아는 선견지명 : 수집·처리·분석으로 여는 지혜의 신세계
로봇 _ 귀천 있는 일꾼 : 인간을 초월한 모방과 대체가 불러올 업의 신세계
무인자동차 _ 3,000만 원짜리 내비게이션 : 기술간 융복합이 이뤄낸 휴식의 신세계
사물인터넷 _ 사물과 이야기하다 : 표현·연결·통합이 구현하는 소통의 신세계
클라우드 _ 소유의 종말 : 저장·접근·공유로 더욱 풍성해지는 소유의 신세계
핀테크 _ 모든 것이 돈이고, 아무것도 돈이 아닌 : 신뢰·편의·자산을 담보로 한 돈의 신세계
가상현실 _ 생각이 경험으로, 상상이 현실로 : 자극·경험·현실이 만드는 꿈의 신세계


멋진 신세계는 헉슬리의 소설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그리며 반어법의 표현이었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는 달리 저자의 미래는 아주 멋지다. 그리고 저자는 그 멋진 신세계를 이끌 주역을 '구글'이 될 것이라 한다.  아마도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빠르게 하나로 묶여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글이 주도하는 멋진 신세계. 또 한번의 상전벽해가 이루어질 미래는 디스토피아일까, 유토피아일까? 


무인자동차를 구글이 선도하는 것은 많은 시사점을 가집니다. 구글의 야심? 이런 것들은 제쳐두더라도 대체 왜 IT회사가 전통적인 기계 제조 산업인 자동차에 뛰어들었을까요? 무인자동차는 더 이상 기계와 제조에 국한된 산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동차의 핵심 기술은 IT와 인터넷 그리고 서비스입니다. -P118

더 이상 애플을 빅 브라더라 하기는 적합하지 않아 보입니다. 더욱 무시무시한 지금의 빅브라더는 명백히 구글입니다. 구글은 빅데이터 그 자체입니다. 애플은 ‘기술 분야의 북한’이라 불릴 만큼 폐쇄적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훨씬 더 영리한, 어쩌면 더 영악한 구글은 ‘오픈, 오픈’외치면서 더 큰 빅브라더, ‘비이이이익브라더’를 지향합니다. 구글의 비공식 사훈이 ‘사악해지지말자 'Don't be evil' 이랍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진짜 악마가 스스로를 악마라고 부르겠습니까?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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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랜 친구들이여,
내 안의 살벌함을
내 안의 이기심을
내 안의 모자람을
내 안의 이중성을
부디
이해해주십시요
그러나 이해했다고 해서
멈추라고는 말아주십시오
한발 더 가라해주십시오
한번 더 행동하라
해주십시오
남에게 하던 말을
자신에게 돌리라 해주십시오

_<다시 가슴먹먹해집니다>중에서

#######

내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하다가도
누군가 작은 돌멩이라도 던지면
아주 커다한 파문이 일어
물결에 퍼지는 파동만큼이나
괴로움이 퍼져가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때론 이기적인 생각으로,
때론 살벌함을 지닌 타인을 향한 원망으로도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파문이 잦아지는 것처럼
시간이 흘러야만 해결되는 경우가 더 많다.
아마도 지금의 파문도 그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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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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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는 아버지의 계율을 깨뜨리는 과정의 이야기다. 시미자키 도손이 이 작품을 쓸 당시가 바로 백정의 신분을 신평민으로 바꾸고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할 무렵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는 신분을 타파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지만 한 번 각인 된 차별과 편견이란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고 해도 쉽게 변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파계‘인 듯 하다.

초등학교 선생이 된 우시마쓰에게 유언같은 아버지의 전언은 

“설령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결코 백정이라고 고백하지 마라. 순간의 분노와 슬픔으로 이 훈계를 잊으면 그때야말로 사회에서 버려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이 말은 우시마쓰에게는 거의 종교와 같은 신념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중등부 교사였던 우시마쓰는 신분이 탄로날까봐 학교에서 노심초사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안쓰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이든 하는 전근대 사회의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사람이다.  일찍 죽은 아내대신 아들에게 백정이었던 신분이 걸림돌이 될까 싶어 아들의 학교와는  먼 목장의 소잡는 목부로 살아기길 원했고 결국은  씨소에 받쳐 죽었다.

아버지가 죽을 때 남긴 마지막 유언도 ‘그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마라.‘였다.  그렇게 우시마쓰는  목부의 아들로 살아갔다.  하지만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것, 자신의 존재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우시마쓰에게 끝없는 번민이 되어 깊은 슬픔이 된다. 우울하고 말수가 적은  우시마쓰를 보는 동료교사들은 그의  번민의 이유를 렌타로의 <참회록>에 있다 지적하고 ‘짐승보다 못한 ‘사람의 글을 읽어서 그렇다며 렌타로의 글을 읽지 말라 충고한다. 유일한 희망과 위로였던 렌타로의 책 <참회록>을 읽으면 우시마쓰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렌타로는 백정출신임에도 자신의 신분을 당당히 밝히고 사회의 차별과 싸우는 사회사상가이자 반차별 활동가이다. 우시마쓰의 책장에는 렌타로의 저서만이 빼곡하였고 그는 렌타로의 책을 읽는 것을 이때까지만 해도 자랑스러워 했다.

신분을 속이고 산다는 것은 우시마쓰를 매순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속이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된다. 하숙집 옆집에 백정이었던 돈많은 부자가 혼사일로 잠깐 머물게 되자  온 동네사람들이 항의를 하러 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사람들의 격한 항의에  야반도주하듯 떠나는 부자의 모습을 보며 두려움을 느낀 우시마쓰는 갑자기 하숙집을 바꾸기로 한다.

도망치는 삶,  그런 비애감의 현실에서 자신과 대조적으로  차별과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렌타로의 모습은 영웅과 다름없는 동경을 품게 한다. 렌타로를 향한 동경은 열망으로 이어져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고 편지를 받은 렌타로는 우시마쓰를 방문한다. 둘은 첫 만남에서부터 통하는 구석이 있어 이후 사상적 스승으로 렌타로를 더욱 섬기게 된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만난 정치인의 음모에 의해 우시마쓰가 백정인 것이 학교에 알려지게 된다. 이때 사람들의 이상한 눈초리와 의심을 받고 있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우시마쓰는 렌타로의 책을 헌책방에 가서 팔아버린다. 책을 팔고 돌아오는 길에 흘리는 우시마쓰의 눈물은 백정이란 신분을 숨기기 위해 아주 소중한 무엇을 잃어버리게 된 자괴감에 빠져 고통스러워 하다 병을 앓게 된다.  한바탕 앓고 난후 스승의 사망소식을 듣고 렌타로의 시신앞에서 밤을 세운 우시마쓰는 ‘나는 백정이다‘를 고백하기로 한다.

자신은 그것을 감추려고, 타고난 자연스러운 성질을 닳아 없어지게 한 것이다. 그 때문에 한시도 자신을 잊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제까지의 생애는 거짓의 삶이었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아,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괴로워하는가. 
나는 백정이라고 남자답게 고백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렌타로의 죽음은 우시마쓰에게 이렇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P319

우시마쓰가 백정이라는 신분이 탄로날까봐 노심초사하면서도 아버지의 계율을 따라야하는 전근대적인 사고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떳떳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근대적인 자아의 내적 충돌이 소설의 큰 맥이다. 동료교사들이 이유도 없이 백정을 비하하며 백정을 개돼지 못한 존재로 표현하는 모습 또한 비록 이 소설이 무려 백년전의 소설이지만 차별은 여전히 익숙한 사회적문제임을 떠올리게 된다. 신분의 차별이라는 계급사회는 없어졌을지라도 자본주의의 잠식에 따른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차별적 관계에서부터 성소주자들을 향한 차별과 편견의 잣대와 나와 다르면 무조건 틀림으로 규정하는 패거리 문화에서 파생되는 차별문제등, 우리 곁에는 늘 차별이 존재해 왔다. 그래서인지 차별과 편견이 우시마쓰에게 쏟아져 생채기를 낼 때마다 울고 있는, 익숙한 누군가의 눈물이 오버랩 되어 떠오르곤 했다. 어쩌면 우시마쓰는 언제 어디서고 사회에서 만들어내는 차별과 싸워야 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어차피 지금까지의 나는 이제 죽은 것이다. 사랑도 버렸고, 명예도 버렸다. 뜨거운 눈물이 젊은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진정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생명의 땀이었다.-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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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지음 / 더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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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한다는것에대하여 #인문

투르니에는 단언한다. 예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이며, 그와는 친구가 되기 어렵다고. 우정은 예찬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투르니에의 설명에 따르면 현실 세계는 본래부터 천연색이 아니라 흑백,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무채색이다. 그 현실에 색깔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고 예찬이다. 그러면서 투르니에는 말한다.

“나 그대를 예찬했더니 그대는 백 배나 많은 것을 돌려주었다. 고맙다, 나의 인생이여!”

세상은 불완전하며, 인간 역시 한계에 갇힌 존재이다. 그 둘을 보완하고 연결해 주는 것이 바로 예찬이다. 이름 모를 들풀에서부터 은하의 언저리까지, 아이의 새로 난 앞니에서부터 돌고래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언제나 예찬할 것들을 준비해 놓고 있다. 서로 예찬하지 않으면 인간 역시 볼품없는 존재이다. 예찬보다 더 좋은 치유는 없다.

어느 자연주의자는 말한다.

“아침과 봄에 얼마나 감동하는가에 따라 당신의 건강을 점검하라. 자연의 깨어남에 대해 당신 안에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른 아침 산책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잠을 떨치고 일어날 수 없다면, 첫 새의 지저귐이 전율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눈치채라. 당신의 봄과 아침은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이 나무, 신의 손금 같은 이 잔가지들, 꽃에서부터 밝아 오는 이 새벽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매일 지나치는 똑같은 거리와 도시의 찌든 벽돌담 어딘가에서 무한의 운율을 가진 새를 발견하는 것도 우리 자신이다. 눈을 감고 외면하면 그것들은 증인도 없이 영원한 어둠에 잠길 것이다.

-알라딘 eBook (류시화) 중에서



미셀 투르니에가 말했듯이 예찬할 줄 모르는 사람과는 친구할 수 없다. 자연이 주는 감동에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어있는 영혼과 같기 때문이다.

산에는 가을 준비가 한참이다. 송충이가 부쩍 많아졌고 다람쥐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워졌다. 산길 위에는 도토리 열매잎들이 많이 떨어져있다. 어미애벌레는 도토리안에 알을 깐 후 온몸으로 도토리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다른 벌레들이 도토리 열매를 습격하지 못하게 땅위에서 도토리영양분을 먹고 자랄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어미 애벌레의 이런 희생에 의해 땅위에서 안전하게 도토리영양분 만으로 성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들의 생존법칙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예찬이다. 생을 이어가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들 -사랑하기 위해 살아가며 아낌없이 내 것을 내어주는 희생의 숭고함-에 대한 예찬은 우리라는 존재를 더욱 빛나게 한다.

『지상의 양식』에서 앙드레 지드는 말한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 가듯이 바라보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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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차일드44

전쟁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우리 내면에 잠들어 있는 괴물을 깨울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이 있다면 아마도 전쟁일 것이다.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난 직후, 베를린에서는 9만여명의 여성이 집단강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숫자는 공식적으로 병원치료를 받은 여성들에 국한되며 실상 훨씬 더 광범위하게 강간이 이뤄졌다. 전승국이었던 소련인이 베를린여성들을 강간과 학살로 광란의 2주를 보내는 동안 그 누구도 그 광기를 제어하지 못했으며, 그 누구도 그들이 따뜻한 온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전쟁은 이미 모두를 괴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살인이 일어나지 않아"

<차일드 44>는 전쟁이 깨운 인간 내면의 괴물을 끄집어내는 심리 스릴러 영화이다. 스탈린 체제의 구소련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은 전체주의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다. 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누군가 살인을 일으킨다는 발상자체를 이들은 '자본주의의 고질병'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살인을 감추기 위해 스탈린 체제의 장교들은 스파이와 나치의 소행이나 정신병자의 일탈정도로 치부하며 사건을 덮기에 급급하지만, 주인공으로 나오는 '레오'만은 사건에 관심을 가진다.

레오는 전체주의 속에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유일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2차대전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워 장교가 되었지만 가슴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레오에게 전체주의라는 독재체제는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옷인지도 모른다. 군인들과의 미팅에서 아내 라이사를 영원히 사랑한다고 외쳐대는 모습은 레오에게 닥칠 불운에 대한 복선처럼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스파이를 잡으러 가서는 스파이를 숨겨준 부부를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쏘는 부하직원을 질책하기도 한다. 이런 레오의 성품은 전체주의의 억압과 경직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위태로움을 품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철로에서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어린아이의 시체, 그 시체는 동료의 아이였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천국에서는 살인이란 일어나지 않는다(완벽한 국가에서는 범죄란 일어나지 않는다.'라며 사건을 사고사로 은폐하여 하며 친구를 오히려 설득시키라는 명령을 레오에게 내린다.

오열하는 친구의 부인을 보며
'더이상 문제를 만들지마.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하며 뒤돌아나오지만, 레오의 표정은 무겁기만 하다.

그렇게 한 번의 시험이 지나는 가 싶었더니 다시 내려온 상부의 명령은

'아내를 고발하라.' 이다.

스파이와 내통한 혐의를 받고 있던 아내를 고발하면 레오는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오는 아내를 고발하지 않고 오히려 혐의를 부인한다.

독재체제 충성도 테스트였을까? 아내를 고발하지 못한 레오는 모스크바 장교에서 시골 민병대로 좌천되어 떠난다. 그러나 그곳에서 친구의 아이처럼 죽은 어린 소년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자 그제서야 의문을 품게 된다.

집단체제 속에서 삶에 의문을 품는다는 자체는 죄악이다. 그러나 이제 레오는 억압과 착취속의 학습된 자아가 아닌 자기 삶의 주체적인 자아로 깨어나기 시작한다. 아내 라이사는 그런 레오가 불안하기만 하다.

"의문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요? 우리 둘 다 죽어요."
레오는
'어차피 죽어있었어.'

이때부터 사건을 은폐하려는 정부와 사건을 파헤치려는 레오와의 끈질긴 싸움이 시작된다.

44명의 살인범, 정체는 놀랍게도 레오와 함께 자란 고아원출신의 남자다.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인 1500만 명을 죽임(홀로도모로 대학살)으로 발생했던 고아들 가운데 하나였던 남자. 게다가 레오와 같은 고아원을 다녔던 남자였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하고 자해를 하며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고통에 시달려 왔음을 고백하며 레오에게 이런 말을 건네는 남자.

"우린 괴물이야.
전쟁영웅인 너나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살 수 없는 나나 괴물인 건 마찬가지야."

이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전쟁이 남겨주는 참혹함은 인간은 누구나 가슴안에 괴물과 같은 잔인함을 품고 있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참상은 인간을 더이상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데에 있다. 영화는 진실과 허구라는 두 가지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구소련의 지배층들이 범죄를 나치인들의 보복이라는 하나의 허구의 세계를 만들고 , 다시 또 그 허상이 진실처럼 받아들이도록 함으로 한 세계를 이어나간다.

복직된 레오는 이제 안다.
그 허구의 세계 이면에 존재하는 인간의 욕망을,
체제(이념)라는 것은 어차피 사상누각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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