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새 아시아 문학선 22
메도루마 슌 지음, 곽형덕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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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판도라 

 

일본인들에게 오키나와는 어떤 의미일까.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닌, 영원한 이방인이며 영원한 타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곳이 오카나와이다.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와 문학에는 미군들의 성폭행 사건이 반드시 등장한다. 그 이유는 오키나와가 한때 미군정 치하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유였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지만, 일본 내 미군시설 면적의 약 75퍼센트가 오키나와 미군기지이다. 아시아의 하와이라 불리 울 정도로 아름다운 섬이지만, 오키나와의 역사는 그 아름다움에 가리워진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미국령이었다가 다시 일본에 속하는 와중에 오키나와인들은 미군 수용소에서 짓밟히며 속박당한 채 살아야했으며 태평양전쟁시에는 가미가제 특공대에 젊은 영혼들을 자살부대에 보내야 했다.

 

무지개 새의 저자 메로루마 슌은 오키나와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키나와의 이런 불편한 진실에 천착하여 오키나와의 현실을 고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물방울로 아쿠카가와 문학상을 수상하며 오키나와의 아픈 역사를 탁월하게 그려내었다는 평을 받는 그는 무지개 새에서는 미군의 폭력이 오키나와라는 섬을 어떻게 망가뜨려 놓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움에 가려져 그 안에 어떤 비극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지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 문학을 빗대어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가쓰야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폭력조직 두목 히가를 만나면서 가쓰야는 히가의 충실한 오른팔로 철저히 길들여진다.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자신을 폭행한 이에게 동화되어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상실한 모습이다. 히가의 오른팔 역할을 하며 히가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쓰야는 동급 아이들에게 상납금을 받고 폭력으로 타인을 길들이는 법을 배운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약에 취한 여자를 매춘에 이용하고 상대 남성을 사진으로 협박한다. 히가는 약에 취해 매춘을 더 이상 하지 못하면 다른 여자로 교체해 준다. 그러던 가운데 만난 마유라는 여자가 들어온다. 마유를 돌보면서 가쓰야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우연히 마유의 등에 새겨진 무지개 새문신을 보면서 부터이다. 마유의 등에 있는 무지개 새는 가끔 반짝거리기도 하며 가쓰야에게 묘한 환상을 심어주는데 안타깝게도 무지개 새의 머리는 누군가 지진 담뱃자국으로 사라졌다. 여러 가지 빛깔의 무지개 새 문신을 볼 때마다 가쓰야는 알 수 없는 상념에 빠지곤 하지만 머리가 없는 무지개 새는 마유와 가쓰야를 포함하여 오키나와인들이 날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만 같았다.

 

가쓰야에게는 오키나와에서 장사를 하는 엄마 그리고 두 형과 누나가 있다. 이들과의 대화는 최근 일어난 미군들이 소학교 학생들을 집단 성폭행 한 사건에 초점이 되어 있다. 이 사건으로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시민들의 집단 시위가 일어나고 있지만, 엄마와 두 형은 미군들에게 군용지 대여료를 받아먹고 사는 사람들이 할 행위가 아니라는 비난을 한다. 누나 히토미만 소학생을 성폭행한 미군을 비난하는데 가쓰야만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소학생 시절 누나가 미군에게 성폭행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히토미는 동생 가쓰야에게 피해가 갈까봐 그 일을 함구하게 하였고 가쓰야는 모른 척 하는 것으로 둘 사이의 비밀이 되어 있었다. 엄마와 두 형제들이 나누는 대화는 아마도 오키나와인들 대부분이 미군정에 갖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일 거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미군들에 의한 성폭행이 거의 일반적인 분위기에서 오키나와인들은 폭력에 쉽게 노출되어 길들여져 갔던 것인지 가쓰야가 중학교 때부터 접하는 폭력의 수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약에 취해 이미 망가져 버린 마유 역시도 소학교부터 당한 성폭행으로 삶은 이미 재생 불가 상태였다. 마유가 접하는 남자손님은 중학생 딸을 둔 마유학교 선생님이였다. 마유는 선생에게 잔인한 복수를 하고 가쓰야는 폭력을 도와주기까지 한다. 약에 취해 더 이상 매춘을 할 수 없는 상태인 마유를 보며 가쓰야는 처음으로 히가를 피해 도망가기로 하는데 전설의 새인 무지개 새가 사는 얀바루 숲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그곳은 베트남 전쟁 당시 특수무장을 한 군인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상적인 곳이었으며 히가를 피해 숨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미 가쓰야와 마유에게 희망은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가쓰야는 무지개 새를 볼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폭력에 길들여진 가쓰야는 답답할 정도로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다. 히가가 가진 힘 앞에서 굴욕적이고 비굴할 정도로 복종하고 성폭행을 당하는 여성들을 촬영하면서도 연민을 가지지만 절대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캐릭터이다. 그러면서도 가라데 유단자이며 가족들에게 충실한 막내 역할을 하는 평범하면서도 훌륭한 인성을 가졌다. 오키나와의 교육이 바른 방식이었다면 절대로 나쁜 길에 들어설 수 없는 건실한 젊은이다. 그런 그가 여성을 사고 팔며 포로노를 찍어주고 히가라는 악당의 편에 선다.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 같은 감정표현조차 할 줄 모르지만, 마유를 만나면서 삶이 조금씩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마유의 무지개 새문신을 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혐오를 품는다. 얀바루 숲에만 사는 무지개 새를 보면 어떤 사람을 살고 어떤 사람은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무지개 새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것이다. 삶이 지옥인 이들에게 무지개 새가 주는 의미는 스스로 삶을 바꿀 수 있는 의지가 전혀 없는 가쓰야와 마유 같은 약자들은 오키나와인에게 신적인 존재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마유의 칼이 가쓰야를 향하자 그는 죽음조차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

 

그래 모두 죽어 없어지면 된다.”

 

무지개 새, 이 책은 가짜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극으로 치닫으며 벼랑 끝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불편할 뿐 아니라 불친절하다. 남성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여성들은 너무 쉽게 짓밟히고 오키나와인은 미군들의 성폭행 사건이 비일비재해도 어린 여자들을 밤에 내보낸 부모들 탓이라며 먹고 살게 해주는 미군들에게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는 말로 미군들을 옹호한다. 가쓰야는 가라데 유단자이면서도 히가라는 절대 권력을 가진 자에게 비굴할 정도로 복종하며 산다. 결국 그 악마가 찾지 못하는 얀바루 숲으로 도망을 선택한다.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자신을 폭행하는 사람에게 감정이 동화되어 폭력을 정당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비이성적인 모습이 오키나와 사람들이 감당하고 있는 역사의 무게이다. 아름다운 섬, 아시아의 하와이, 치유의 명소로 이미지를 덧칠하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미군들의 폭력으로 집단적 몸살을 앓고 있으며 그들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깊게 뿌리내려져 있다. 메도루마 슌l의 무지개 새는 어쩌면 일본인들은 절대 열어서는 안되는 판도라 상자일지도 모르겠다. 상자를 연 순간 어느새 튀어나와 오키나와인 사이에 섞여 금단의 악들이 일본을 물들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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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겐 당신이 있습니다 - 다시, 희망에 말 걸게 하는 장영희의 문장들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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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랜 기억 속에 영혼의 멘토 같은 분이 한 분 계신다그 분은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하여 목발을 짚고 다니셨다그 분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시는데 다른 분을 통해 그분이 고등학교를 다닌 일화를 종종 듣곤 하였다언덕 높은 곳에 위치한 학교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어머님이 업어서 등하교를 시켰는데 겨울에 어머니가 업고 그 길을 오를라치면 같이 등교하는 학생들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해지곤 했다는 것이다그 분을 보면 늘 장영희 교수님을 생각하곤 하였다故 장영희 교수에게도 어머니는 곧 사랑과 희망의 상징이었다그녀의 글에 희망이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녀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이들의 보살핌이 자양분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목발을 짚고

눈비를 맞으며 힘겹게 도서관에 다니던 일,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꼼짝 않고 책을 읽으며 지새웠던 밤들이

너무나 허무해 죽고 싶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외롭고 힘들어도

논문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만을

희망으로 삼고 살아왔는데,

이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셈이었다.

어지러움을 찾고 일어나 침대 발치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에 창백한 유령 같은 모습이 나타났다.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내 속 깊숙이에서

어떤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이었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다시 시작할 수 있어.

기껏해야 논문인데 뭐.

그래살아있잖아논문 따위쯤이야.‘


유방암이 척추로 전이가 되어 죽음을 앞두었을 때 장영희 교수는 살아온 기적살아갈 기적을 마지막으로 집필하였다암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희망을 노래하였던 장영희 교수의 글을 울고 웃으며 읽었던 것 같다절망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의 글을 읽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처음으로 고민해 보았던 것 같다장애인이었기에 차별과 싸우는 일암으로 고통 받으며 포기하고 싶었던 나날의 슬픔을 보며 절망과 희망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장애인을 입학을 허용하지 않는 차별을 온몸으로 겪었고 유학을 하였지만 유방암으로 귀국해야만 했던 날그녀는 누구보다 절망하였다그러나어져서 주저앉기보다는 차라리 일어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어느새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어 갔다세 번의 암 투병을 하며 마지막까지도 희망의 글을 남긴 그녀의 글은 삶에 대한 애착과 감동으로 얼룩져 있다.

  

두세 달씩 있어야 했던 병원 생활,

상급 학교에 갈 때마다 장애를 이유로

입학시험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던 학교들.

 

가끔은 나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누구보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실의 장벽에 부딪힐 때뜻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아직도 좌절이란 이름을 달고 사는 나를 볼 때절망이 문득문득 고개를 들어 흔들어대곤 한다그러나장영희 교수의 글을 읽으면 내게 주어진 절망이나 고통은 어쩌면 익숙하고도 평화로운 나날에 대한 투정에 불과한 것으로 느껴진다故 장영희 교수가 온몸으로 부딪혀 깨달아야 했던 절망과 고통은 나를 부끄럽게 할 정도의 슬픔이었던 것이다그래서일까이 책을 읽으면서 난 다시 희망을 꿈꾸고자 한다삶은 채우기보다는 비워야 하며 높아지기보다는 철저히 낮아져야만 깨달을 수 있는 진경을 이분의 글을 통해 배운다그녀는 떠나갔어도 그녀가 노래했던 희망은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돈다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회자되는 그녀의 희망노래가 넘어진 이들에게 다시 일어설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그러나 내겐 당신이 있습니다』 로 깨달았다.

 

누군가 나로 인해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장영희가 왔다 간 흔적으로

이 세상이 손톱만큼이라도 더 좋아진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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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고독
크리스틴 해나 지음, 원은주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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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의 아름다운 고독
#서평 #문학


달이 눈부시게 밝은 밤에 거대한 고독의 땅에 서본 적이 있는 가…….“

『나의 아름다운 고독』은 알래스카로 이주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책을 읽으면서 알래스카의 얼음평원 배경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197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였던 아빠에게 전사한 친구 보가 알래스카의 집을 유산으로 남기게 되면서 시작된다. 베트남 전쟁당시 포로의 경험은 아버지에게 신경불안 증세를 안겨주었고 알콜 의존증을 키워주었으며 엄마를 폭행하는 비뚤어진 사랑방법을 남겨주었다. 이제 막 사춘기를 지나는 레니의 시선으로 1974년부터 1986년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빠의 병으로 잦은 이사를 하였던 레니의 가족은 알래스카에 가면 모든 고통과 불안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 믿는 아빠의 말을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한다. 새 삶을 향한 그들의 꿈에는 비극의 냄새가 베여있었다.

‘알래스카에서는 한 번의 실수만 저지를 수 있다. 두 번째 실수는 곧 죽음이다.”

도착한 날부터 레니의 가족들은 알래스카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본능적으로 체득하였고 총이 없이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환경이라는 걸 배워야 했다. 오두막 외에는 그 어떤 곳도 안전지대는 없었으며 모든 것을 손수 만들어야 하는 환경이란 걸 깨달았다. 알래스카는 문명사회보다는 야생 그 자체였고 생존을 위한 대비를 하지 않으면 죽음이 늘 가까이에 함께 하는 곳이었다. 여름에는 겨울이 오기 전 식량을 비축해야 하였고 겨울에는 언제 돌변할지 모를 자연의 위험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매해 알래스카의 사람들은 사라져 가고 죽어 나갔다. 그런 가운데 레니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빠의 발작이었다. 역시나 알래스카에 와서도 아빠의 공포와 불안은 줄어들지 않았다. 매번 엄마를 폭행하였고 그럴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로 용서를 비는 일이 되풀이 되었다. 아빠의 폭행이 심해질 때마다 엄마와 레니는 도망가려 하지만 엄마는 번번이 아빠를 이해했다. 슬픈 나날이었지만 레니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매슈와의 사랑이 알래스카의 고독으로부터 레니를 해방시켰다. 비가 오는 어느 날 밤, 아빠의 폭행을 피해 도망가던 매슈와 레니는 절벽으로 추락사하게 된다. 레니를 구하기 위해 매슈가 몸을 던진 그 밤은 그들에게 슬프고도 고독한 무수한 날들을 선물로 주었다. 뇌사상태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는 매슈를 뒤로 하고 알래스카를 떠나는 레니의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엄마 코라는 자신을 향한 폭행은 참을 수 있었지만, 딸 레니에게만은 아빠의 폭행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어 했다. 아빠를 엄마가 총으로 쏜 날, 시애틀로 떠나지만 레니에게는 알래스카로 돌아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매슈였다. 엄마가 폐암으로 죽자, 스물 다섯에 미혼모가 된 레니는 다시 알래스카로 돌아온다. 오래 전 그 밤, 아빠가 죽었던 날을 증언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아가고 재활치료를 하고 있는 매슈를 찾아가 아들과 재회를 하는 것으로 레니의 알래스카에도 봄이 찾아온다.

1970년대 미국은 여성에게는 남편의 동의가 없으면 신용카드 하나 사용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매 맞고 사는 여성은 한 편으로는 그 시대의 표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70년대 역시도 그러했으니까. 코라는 여성으로서 진취적이고 매력적이었지만 남편의 폭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매 맞는 여성은 법적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며 오히려 약자에게 법은 냉혹하며강한 자의 편이었다. 코라는 딸을 위해 남편의 폭행을 참아야 하는 그 시대의 여성상을 대변한다. 그런 엄마를 보며 자란 레니에게 사랑은 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아빠의 폭력에 길들여진 엄마의 사랑보다는 스스로 사랑을 선택하며 그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일찍이 터득하였던 것이다. 70년대 알래스카에 이주하였던 레니 가족의 삶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용사이며 전쟁 포로였던 아버지의 정신이 무너지며 일어났던 비극적 생의 연대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의 이야기이다. 아빠를 죽인 엄마의 죽음, 다시 또 찾아가게 된 알래스카에서 매슈와의 재회. 아들과 매슈와 레니의 새로운 삶이 다시 또 희망이란 이름으로 함께 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알래스카가 아름다운 동시에 공포를 품고 있고 그들 삶의 구원자인 동시에 파괴자였듯이 생존하기 위해서 살아남는 법을 먼저 배워야만 하는 곳에서 레니가 배워야 했던 것은 오로지 자신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문명의 끄트머리,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며 극한으로 몰아대는 자연의 위용 앞에서 고독과 싸워가며 지켜야만 하였던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었다. 한 사람이 성장하게 위해서는 많은 자양분을 필요로 한다. 알래스카라는 미지와 야만의 세계에서 레니가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길고 긴 알래스카의 겨울처럼 혹독하고 차가운 고독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었다. 나의 아름다운 고독은 내일을 희망으로 채우기 위해 오늘의 시간을 어떻게든 견뎌내야 함을 말해주는 것 같다. 레니가 그 고통의 시간을 견뎌낸 후, 매슈와의 사랑을 완성할 수 있었듯이 우리에게 고독의 시간은 완전해지기 위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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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름다운 이유

 

지난 수시입학 전형 때

어느 학생에게

문학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잠깐 생각하더니 그 학생은

문학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그 어느 두꺼운 문학 이론책보다

더 마음에 와닿는 말이었다.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슬퍼도, 또는 상처받아도

서로를 위로하며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를

추구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내겐 당신이 있습니다중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종종 생각하곤 한다.

그것은 오랜 시간 문학과 함께 울고 웃으며

어느샌가 두꺼운 층위를 이루며 나라는 클리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척박하고 피폐한 인생살이에서 문학이 주는 삶의 가치나 의미는

점점 퇴색하며 종종 쓸모없는 것으로 비춰지기 일쑤이다.

본질적으로 문학은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실제 경험할 수 없는

타인의 삶을 살아봄으로써 우리는 여러방식의

다채로운 생을 살아보게 된다.

수백가지의 생, 수천 가지의 생을 살아봄으로써

삶이 얼마나 척박하고 황폐한 것을 체험해 보며 진실을 깨달아간다.

문학은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가장 쉬운 척도이다.

척박함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 인내와 고통의 진흙 속에서

진주처럼 반짝이는 진실의 순간을 낚아 올리는 삶의 어부들.

어두컴컴한 작은 방에 햇볕이 들지 않아 절망하기 보다는

아우성치는 고독과 정념을 한 치의 거짓됨 없이 전해주는 것은

아무리 슬퍼도, 아무리 상처받아도 서로를 위로하며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가를

문학이 알려주기 때문이다.

문학은 내가 상처받고 쓰러질 때마다 일어설 수 있는 동력이다.

또한 문학은 삶을 투명하게 반추해주는 사유의 숲이다.

그 숲 사이에서 건져 올리는 문장들은

오늘도 나를 살게 해주는 아름다운 의미가 되어 

심장에 타투를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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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 반짝이는 설렘을 간직한다는 것 월간 정여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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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늙지 않는 비결은 더 오래, 더 자주 설렘을 느낄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나만의 경험’, ‘나만의 이익을 쌓아 올리는 데 골몰하기보다는 나와 다른 타인의 삶에 대한 마음의 안테나를 활짝 열어둠으로써 둔감해지는 우리의 감각을 예민하게 벼리는 것. 그것은 지나치게 비대해진 에고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기도 하며, 타인의 시선에 길들기보다는 내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싱그러움을 회복하는 마음 챙김 방법이기도 하다..

-월간 정여울 두근두근

 

미셀 투르니에는 예찬할 줄 모르는 사람과는 친구할 수 없다고 했다. 삶에서 감동하며 예찬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더군다나 요즘은 길가를 지나거나 마주치는 사람들에게서 환한 미소를 구경하기가 힘들다. 모두가 다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열중한 나머지 웃을 시간조차 잊고 사는 모습이다. 나이가 들수록 어떤 것에 대한 감동과 예찬이 줄어들어 간다. 그것은 사람이라든지 사물이던지 모두 같다. 아마도 익숙함이라는 나른함과 권태와 같은 나태에 서서히 잠식당해 감각을 상실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끔 두근거리는 순간은 찾아온다. 붉은 빛으로 느리게 물들어가는 저녁 시간을 걸을 때나 첫 봄에 피어난 꽃망울 터지는 소리라든지 하늘을 향해 한껏 목을 늘려 간절함을 품은 코스모스를 볼 때나, 꽃이 지기 바쁘게 초록 선율로 바뀌어 버린 산천을 볼 때 환희와 감동으로 뛰는 심장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두근거림을 매일 느낄 수 있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매번 실패하면서도 삶을 계속하는 이유

영화 디태치먼트에는 매순간 실패하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의 삶에서도, 지역사회의 골칫거리들을 가르치는 일에서도 그는 실패하였다. 무분별한 약물중독과 섹스와 어른들의 무관심과 부모의 학대에 익숙한 십대들은 자신을 가르치려는 선생 헨리에게 거부감을 갖는다. 헨리는 자신의 실패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며 자신이 매번 실패하면서도 삶을 계속하는 이유를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렇듯 우리를 집단적인 바보로 전락시키는 시스템에 저항하기 위해, 책을 읽어야만 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우리의 인식을 고양하고, 우리의 신념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배워야만 해.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영혼을 지켜내고 보존해야만 하는 거야. 배움을 통해서.”

 

그러나, 아이들은 헨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흔히 보여주는 개과천선이나 계도로 인한 변화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다. 헨리는 여전히 혼자였고 불량한 아이들을 품어주려 했던 헨리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한다. 그를 좋아해 쫓아다니던 여학생이 자신을 여자로 봐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헨리 눈앞에서 자살하기까지 한다. 이 영화의 불친절함. 헨리를 끝가지 절망으로 밀어붙이는 삶의 진실은 무엇일까. 헨리는 늘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과 세상을 희망하지만, 그것이 그리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에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적당히 애착하고 적당히 분리되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무심함의 디패처먼트의 헨리는 어쩌면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상실감과 고독감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매일 실패하여 눈물짓지만 그럼에서 헨리는 살아갈 것이다. 그에게는 아주 작은 밀알의 희망,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1퍼센트의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두근두근하는 순간들은 그런 1퍼센트의 희망과 맞닿아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헨리의 무표정함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로 그려진다. 삶의 민낯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숨 막히는 중노동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신은 실패자라 고백한 헨리는 삶의 민낯을 알기에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월간정여울의 마지막 편인 두근두근과 함께하는 화가는 에곤 실레이다. 캔버스에 한 획을 긋는 듯한 붓터치가 싱그러운 설렘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스페인 독감으로 28세 이른 나이에 사망한 에곤 실레는 주로 자화상이나 기묘한 표현들을 그리곤 하였는데 보수적인 미술 시대풍토의 반감을 사곤 하였다. 두근거리는 설렘의 이미지보다는 뭔가 극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느낌이다.

 

월간정여울의 책들은 내게 소중한 글들로 자리매김하였다. 시와 영화감상, 인문, 철학, 심리학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세헤라자드의 끝이 없는 이야기를 듣는 듯 했다. 그간의 저서들을 통해서도 남성작가들은 따라올 수 없는 감성 인문학을 선보여 왔지만. 월간으로 기획한 아날로그 인문서는 무척이나 획기적인 도전이라 보여진다. 그 대장정의 걸음이 여기서 끝난다하니 아쉬움이 드는 책이다. 월간정여울의 시리즈를 읽으며 울고 웃었던 기억이 좋은 여운으로 오래오래 가슴 속에 머물고 있을 것 같다.

 

내 삶의 목표는 내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이 크나큰 사랑보다 조금이라도 더 큰 사랑을 타인에게 남겨준 채 떠나는 것이다.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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