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이]님 서재에서 퍼온다.  

 

 

 

 

 

 

 

 

 

 

 

천개의 고원 서평 / 진태원

 

1.
뢰즈와 가타리, 또는 들뢰즈-가타리, 또는 들뢰즈가타리는 두 개의 구분되는 고유명사이자 서로 뗄 수 없게 연결된 머리 둘 달린 <괴물>(이들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에서)이면서, 또한 수없이 많은 흐름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익명의 뿌리이기도 하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무언가 새로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그들이 이러한 통일성으로서의 다양성, 다원성으로서의 일원성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사실 철학사에서 공동의 저술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유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1846), 『공산당 선언』(1848) 등을 공동으로 저술했으며, 그 외에도 그들의 작업은 늘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에 조금 앞서 루이 알튀세르는 자신의 제자들이자 동료들인 발리바르, 마슈레, 랑시에르, 에스타블레와 함께 공동으로 저 유명한 『자본을 읽자』(1965)를 발표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업은 두 개의 분리된 인격체, 두 명의 독립적인 사상가가 결합해서 그들이 각자 이전에 추구해 왔던 사상과 구분되는 새로운 사상의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전의 사례들과 구분되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2.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은 또한 그 자체로도 매우 새롭고 매우 강력하다. 매우 새롭다는 것은 이들의 사상이 플라톤 이래 서양 사상의 주요 흐름을 거슬러 새로운 노선을 제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매우 강력하다는 것은 이러한 노선이 플라톤주의 철학 또는 초월성의 철학과 지배권력 사이의 본질적 연관성을 드러내 주고, 이를 넘어설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 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은 일차적으로 존재행동학(onto-ethologie)의 관점에 따라 파악될 수 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1968),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1968) 및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1972) 『천개의 고원』(1980) 등에서 체계화된 존재행동학의 요소들은 존재의 일의성 또는 <고른 판>과 역량의 존재론 또는 <기관 없는 신체> 및 일반행동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차이와 반복』에서부터 말년의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일의성은 들뢰즈와 가타리 철학의 열쇠어로 남아있다. 존재의 일의성(univocite)이란 일차적으로는 존재가 하나의 의미로 말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왜 존재가 하나의 의미로 말해진다는 사실이 그토록 중요할까? 이는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의 근간을 이루어온 일체의 초월성의 담론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존재의 일의성을 확인하고 체계화하는 일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존재의 일의성, 존재가 하나의 의미로 말해진다는 것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복합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존재의 일의성의 핵심은 단순히 존재의 하나의 의미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원론으로서의 일원론에 있다. 곧 존재와 존재자들, 근거와 근거지어지는 것들 사이의 존재론적 구분이나 간극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존재의 근원적인 다양성을 인식하는 데 있다. 이들에게 스피노자(또는 베르그송)의 철학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에 따르면 스피노자(또는 라이프니츠)는 <긍정적 무한>의 철학자다. 곧 그는 무한을 단순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무한의 내재적 인식가능성을 긍정하면서, 다양한 무한들, 따라서 환원 불가능한 다양한 질적 차이들의 소통, 관계의 문제를 자신의 철학의 핵심 문제로 삼았다. 이 때 각각의 무한들은 정의상 자율성과 동등성을 함축하기(이것이 소위 <평행론>의 존재론적 함의다) 때문에, 무한들의 소통, 관계는 항상 이미 타율성과 종속관계를 함축하는 초월적 질서인 <신학적 구도>가 아니라, <내재적 평면> 또는 <고른 판> 위에서 이루어진다.

존재론의 영역에서 초월적 구도, 수직적 위계관계를 배제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내재적 평면 위에서 충분한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존재자들 사이의 평등한 자유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론적 일의성은 항상 이미 역량(potentia/puissance)의 존재론 또는 기관 없는 신체론을 함축하며, 이를 요구한다.

역량의 존재론은 서양철학의 두 가지 전통에 대한 비판적 대결을 함축한다. 이 두 가지 전통 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형상론이고, 다른 하나는 원자론이다. 이 두 가지 전통은 서로 비판적인 긴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들뢰즈와 가타리가 보기에 이들은 존재자들의 생성, 즉 개체화의 문제를 내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공통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곧 이 두 전통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요소들(이것이 형상이든 원자이든)의 관점에서 생성의 문제를 다룰 뿐, 요소들 자체의 생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의 문제는 다루지 못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보기에 이는 이들이 존재자들의 내재적 역량을 단순한 가능태(le possible), 곧 그 자체로는 비실재적이며, 초월적인 외부의 원리의 작용에 의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는 허구화된 힘으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니체-베르그송을 따라 이들이 강조하고 있듯이 역량은 그 자체가 실재적인 힘이며, 역량의 내재성 덕분에 존재자들은 자신들의 관계설정을 위해 초월적 원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량의 존재론의 관점에서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운동(비실재적인 무에서 실재적인 현실의 창조라는 점에서 이는 본질적으로 신학적이다)이 아니라 잠재성에서 현행적인 것들(actualites)로의 내재적 차이화의 운동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역량의 존재론의 논리적 귀결은 주체와 객체, 사물과 인간,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존재론적 구분이 실격되고 그 대신 기술적 존재자를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의 활동의 문제를 다루는 행동학(ethologie)의 문제가 실천철학의 핵심적인 문제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에톨로지는 원래는 동물들의 행태를 다루는 생물학의 하위분과중 하나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이는 일의성과 역량의 존재론을 완성하는 철학 체계의 한 부분으로 격상된다. 이런 행동학의 문제설정에 따르면 유와 종의 분류법 대신 역량의 관점에서 존재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분류의 핵심 기준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예를 들면 짐을 끄는 말은 경주용 말보다는 짐을 끄는 소와 같은 부류로 분류된다. 이런 의미에서 일반행동학에서는 목적론적으로 위계화되고 질서지어진 기관과 기능보다는 정서/변용(affection)과 배치가 실천철학의 기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3.
이런 존재행동학의 체계가 다루려고 하는 실천적 문제는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1670)에서, 그리고 빌헬름 라이히가 『파시즘의 대중심리』(1933)에서 각자 제기했던 질문이다. “수 세기에 걸친 착취 이후에도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도 <현실적으로> 착취와 예속을 <원할> 만큼, 모욕과 착취를 감내하고 있는가? ... 대중들은 전혀 순진한 얼뜨기들이 아니다. 어떤 지점, 어떤 일련의 조건들 아래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원했으며>, 해명될 필요가 있는 것은 대중들의 욕망의 이러한 도착(perversion)이다.”(『안티 오이디푸스』) 왜 대중들은 자신의 지배를 욕망할까?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이는 대중들의 본질을 이루는 대중들의 역량이 바로 대중들 자신으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대중과 대중의 역량의 분리를 조직화하는 것이 바로 미시 파시즘의 체계다.

이들의 미시 파시즘 이론을 이해하려면 우선 푸코의 규율권력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코는 17세기 이래 서양 사회의 지배 권력의 작동방식을 규율권력이라는 개념에 따라 이론화했다(특히 『감시와 처벌』 및 『성의 역사 1권』 참조). 곧 푸코는 프랑스 혁명 이래 근대 정치사상이 유포시킨 사회계약론과 주권적 주체의 관점과는 달리,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의 소유물이 아니며, 부정하고 금지하고 억압하는 힘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권력은 자유롭다고 가정되어 있고 또 스스로도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주체들을 생산해 내고,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지배의 체계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푸코는 이를 규율권력이라 부른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19세기 이후 규율권력은 통제권력으로 바뀐다. 통제권력은 규율권력보다 더 심층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며, 규율권력에서는 여전히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는 데 반해, 통제권력에서는 이 양자가 단일한 메커니즘을 구성한다. 곧 규율권력에서는 예속적 주체가 자신의 인성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지배장치에 따라 규율되고 감시되지만, 통제권력에서는 이러한 통일성이 해체되고 지배장치 자체가 예속적 주체의 구성요소에 포함된다. 따라서 통제권력은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나 가치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우리가 이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들 및 능력들 자체를 통제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미시 파시즘이 존재한다.

따라서 문제는 미시 파시즘을 변혁하는 일인데, 미시 파시즘은 본질적으로 우리 각자의 근본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이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내재적 해체/변혁과 맞물려 있는 문제다. 바로 이 때문에 이들에게 생성/되기의 문제가 핵심적인 윤리적-정치적 과제로 부각된다. 그리고 다시 이들에게 다수자의 생성들(devenirs de majorite)이나 소수자의 생성들(devenirs de minorite)이 아니라, 소수화되기(devenir-minoritaire)가 중요한 과제라면, 이는 이 후자의 생성/되기가 피지배집단 내에서도 배제된 타자의 타자(여성 흑인 노예들, 이주노동자들, 동성애자들 ...), 또는 오히려 이들을 타자의 타자로 만드는 메커니즘을 변혁의 핵심 문제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과 집단의 상호구성적 관계, 즉 배치(agencement)를 이론적 문제로 제기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며, 이를 수행적 형식으로 제기한다는 점에서 실천적이다.

 4.
따라서 내가 보기에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지지자들이 결국 여전히 답변해야 할 문제는 실천의 문제인 것 같다. 리좀, 배치물, 지층, 성층작용, 판, 절편, 도주선과 단절선, 파괴의 선, 추상적 기계, 도표, 전쟁기계 등과 같이 이들의 저서에 담긴 현란한 개념들과 정신분석, 기호학, 마르크스주의, 문학 등은 물론이거니와 현대 수학 및 물리학, 화학, 결정학, 분자생물학, 동물행동학, 정신의학, 경제학, 음악 등을 넘나들면서 현란하고 난삽한 논의를 전개하는 이들의 작업에 얼이 빠지고 현기증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는 슬그머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 법하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이 모든 논의들이 여기 나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들의 논의가 노동자들의 분신, 이주노동자들의 자살, 노숙자들의 추위와 굶주림에 대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이는 분명 호의적인 질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의적인 질문도 아니다. 오히려 이 질문들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신들의 사상을 세우면서 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질문들과 다르지 않을 질문들이며, 따라서 그들의 사상을 공감하고 따르는 이들 역시 품어야 하고 또 나름대로 답변해야 할 질문들이다. 아마 그때 비로소 들뢰즈와 가타리는 두 개의 분리된 고유명사이기를 그치고, 새로운 가지들을 만들어내고 퍼뜨리는 익명의 뿌리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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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이]님 서재에서 퍼온 글입니다.

과천연구실의 박상현 선생이 발리바르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진태원선생이 번역한 『스피노자의 정치』에 관한 글입니다. 컴퓨터 문서함에 보니까 이런 글이 있더군요ㅎㅎ 내 컴퓨터에 별게 다 있네;;;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역, <스피노자와 정치>, 이제이북스, 2005  
 
약간의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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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1.
대다수 사람들에게 스피노자는 생소할 뿐만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철학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스피노자의 철학적 개념과 범주는 17세기의 철학적 지반1)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또한 그의 철학적 문제설정은 유사한 개념과 범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대다수 철학과도 구별된다. 그 결과 스피노자의 철학의 우리에게 이중의 노력, 즉 17세기 철학의 일반적 관심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스피노자의 이례성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요구한다.

현대정치의 기원에서 그 기초를 확립한 이른바 사회계약설 또는 '자연권' 사상에 관한 이해는 스피노자의 철학과 정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실마리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독특한 유물론의 전통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스피노자의 거울에 마르크스를 비추어 보는 동시에 마르크스의 거울에 스피노자를 비추어 보는 작업이다(이른바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

1960-70년대 이후 스피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관심이 상당부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접근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3) 에띠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도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이 책은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한 훌륭한 해설서인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의 한계와 공백, 나아가 전화와 일반화라는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과 정치를 이해할 수 있는 지침이 된다. 

2.
발리바르는 그의 스승 알튀세르와 마찬가지로 '저작이 없는 철학자'다. 그는 철학에서의 유물론적 전통이 자기 완결적 철학체계―예컨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완성―의 확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학의 한계와 아포리아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그는 언제나 특정한 정세―정세는 정치와 철학의 해후의 조건이다― 속에서 그것에 대한 개입으로서 유물론적인 철학적 실천을 수행해왔다.

이러한 철학적 작업에서 두 권의 교육학적 해설서는 예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마르크스의 철학}(1993)이고 다른 하나는 {스피노자와 정치}(1985)다. 두 저서는 유사한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정치}도 먼저 스피노자의 입장을 역사와 정세 속에 위치시키고(1장), 그 다음에 시기적 순서에 따라 문제설정의 변화와 단절을 분석하면서 저작들(2장의 {신학-정치론}, 3장의 {정치론}, 4장의 {윤리학})이 재해석된다.4)

그러나 마르크스의 경우 그의 철학이 문제가 되는 반면, 스피노자의 경우는 그의 정치가 문제가 된다. 즉, 마르크스의 '역사과학'에서 유물론적 철학의 실천을 검출할 수 있다면, 스피노자의 철학에서는 독특한 정치를 검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스피노자 해석에서 독자적 위치로 귀결된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포함하여 모든) 철학은 궁극적으로 정치(공동체)에 개입해서 특정한 정치적 효과를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이다.5) 스피노자 해석에서 오랜 논쟁으로 남아 있던 형이상학과 인간학, 그리고 정치와 윤리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재구성될 수 있다.6)  

3.
스피노자의 철학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는 오랜 이론적 공백으로서 '이데올로기'에 관한 대안적 이론을 발견할 수 있다.7) 여기서 정치와 대중,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주제가 부각된다. 특히 사회운동이 언제나 '대중운동'을 지향해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리고 세계화라는 조건에서 국가와 당, 그리고 대중운동의 모순을 새롭게 지양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제기되는 대중과 민주주의의 문제는 특별한 주목을 필요로 한다.

저자는 대중이라는 문제 또는 역사에서 대중의 결정적 역할이라는 문제는 마르크스와 스피노자의 공통적인 이론적·철학적 대상을 이룬다고 지적한다. 마르크스가 대중의 사회경제적 조건들에 대해 연구하고 그 내에서 특수한 형태의 모순을 발견한다면, 스피노자는 대중의 심리적·정신적 조건들 연구하고 그 내에서 특수한 형태의 모순을 발견한다.8)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대중은 일종의 선(先)주체적 범주로서 정치를 사고하는 데 필수적인 역동적 질료를 이룬다. 대중의 역동성은 그 고유한 모순에서 비롯되는데, 발리바르는 이를 대중들(masses)의 양면성 또는 양가성(ambivalence)이라고 지칭한다.

대중―지배자와 피지배자, 대표자와 피대표자 모두를 포괄하는―의 능동성과 수동성, 정념적 동일화에 따른 예속의 경향과 이성적 교통에 따른 (자기)해방의 경향에 대한 동시적 이해는 대중의 '가상(상상)의 생산성'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여타의 스피노자 해석과 쟁점을 형성한다.9) 이러한 관점은 역사와 정치에서 대중의 민주주의적 운동뿐만 아니라 대중의 '도착'―예컨대, 파시즘이나 인민주의(populism)의 사례에서 드러나는―도 동시에 설명한다. 대중의 역능은 결코 선험적으로 보증되지 않는다.

대중의 양가성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의미를 갖는다. 스피노자에게서 민주주의는 일련의 기관들이나 법률적 장치와 같은 정태적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기존의 교통관계를 변형시켜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조건을 구축하려는 집합적 노력의 과정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과정, 즉 공통의 인식에 기초해서 공동의 봉기적 권리를 확립하고 요구하는 일련의 과정, 민주화의 영속적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도 문제는 언제나 대중의 내적 조건으로 귀결된다. 대중들 내부에서 대중들 스스로 극단적 폭력에 대응하고 집합적 인식을 조직하려는 노력을 강화한다는 정치적 전망은 오늘의 사회운동에게 풍부한 통찰을 제공해 줄 것이다.

1) 발리바르는 17세기의 철학과 '현대철학' 사이에는 거대한 단절이 존재하며, 17세기의 철학자들―데카르트를 포함하여―은 '주체의 철학자'가 아니라 '실체의 철학자'라고 주장한다. 특이하게도 그는 로크의 (정치)철학 내에서 현대철학으로의 결정적 단절을 발견한다. tienne Balibar, "What Is 'Man' in Seventeenth-Century Philosophy? Subject, Individual, Citizen", in Janet Coleman, ed., The Individual in Political Theory and Practice, Clarendon Press, 1996. 그는 혁명 또는 봉기와 철학 또는 철학적 개념의 탄생 및 변형이라는 연구주제를 발전시키면서 봉기에 내장된 공산주의적 요소―이른바 평등-자유 명제―에 대한 대응으로 관념론적 철학의 개념과 범주들이 변형·발전되는 역사적 과정을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분석에서 도출된 부르주아 공산주의의 요소, 즉 평등-자유 명제를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정에서 수평파와 공유파(Diggers)의 봉기에도 적용한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철학적 대응으로 칸트가 주체(Subjekt) 개념을 발전시켰다면, 영국 혁명에 대한 철학적 대응으로 로크는 양심(conscience)과 구별되는 의식(consciousness) 개념을 발전시켰다. 혁명과 '공산주의'의 계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tienne Balibar, "Quel communisme apr s le communism?", in Eustache Kouvelakis, dir., Marx 2000, PUF, 2000 (국역: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 사회주의}, 공감, 2002에 수록). 그리고 '의식' 개념의 발견에 이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tienne Balibar, "A Note on 'Consciousness/Conscience' in the Ethics", Studia Spinozana, Vol. 8., 1992. 본문으로 

2) 이 경우 홉즈, 로크, 루소의 정치·사회사상과 스피노자의 철학을 대조시킴으로써 그의 독창성을 이해하는 동시에 현대정치의 기초를 이루는 '자연적 권리'의 구체적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홉즈와 로크의 사회철학을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한 멕퍼슨의 작업은 자연권 사상의 한계를 인식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Macpherson, C. B., The Political Theory of Possessive Individualism: Hobbes to Locke, Oxford University Press, 1962 (국역: 박영사, 1990). 그러나 스피노자에 대한 발리바르의 해석은 홉즈와 로크의 '소유적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3)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수용―종종은 왜곡된 형태의―과 프랑스 내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출현, 그리고 여기서 알튀세르의 역할 등에 관해서는 Andre Tosel, "La Marxisme au miroir de Spinoza", Du mat rialisme de spinoza, Kim , 1994(국역: "스피노자라는 거울에 비친 맑스주의", 트랜스 토리아, 2005, 상반기)를 참조할 수 있다. 특히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철학과 정치를 결합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이에 대해서는 Andre Tosel, "La philosophie politique au miroir de Spinoza", Y a-t-il une pens e unique en philosophie politique?, PUF, 2000을 참조할 수 있다. 본문으로

4) {스피노자와 정치}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발리바르의 저작을 완역한 것이고, 2부는 스피노자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번역자의 해제와 용어해설이 추가된다. 본문으로 

5) 그런 면에서 '정치철학'은 다만 학제적 구분에 불과할 뿐이며, 철학의 모든 개념과 범주는 고유한 의미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때 '정치'는 결코 일의적이지 않다. 발리바르는 현대의 정치관념을 자율성과 타율성, 그리고 타율성의 타율성으로 구분하는데, 이는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의 정치 관념을 비교하는 글에서 잘 드러난다. 본문으로 

6) 자세한 것은 번역자의 해설을 참조할 수 있다. 본문으로 

7)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의 동요와 공백에 대해서는 tienne Balibar, "The Vacillation of Ideology in Marxism" in Masses, Classes, Ideas: Studies on Politics and Philosophy Before and After Marx, Routledge, 1994. (국역: "이데올로기의 동요", 서관모 편역, {역사유물론의 전화}, 민맥, 1993)을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로부터 영감을 얻은 이데올로기 개념의 재구성에 대해서는 The Philosophy of Marx, Verso, 1995. (국역: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문화과학, 1995에 수록)의 3장을 참조할 수 있다. 본문으로 

8) tienne Balibar, "Preface", Masses, Classes, Ideas: Studies on Politics and Philosophy Before and After Marx, Routledge, 1994. 동일한 내용이 {스피노자의 정치} 2부에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에서도 발견된다. 본문으로

9) 대중의 가상의 생산성은 사실 공포, 즉 주권적 권력 앞에선 대중의 공포인 동시에 대중에 대한 주권적 권력의 공포의 생산성이다. Andre Tosel, "La philosophie politique au miroir de Spinoza", Y a-t-il une pens e unique en philosophie politique?, PUF, 200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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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1주년이 지났다. 그간 촛불에 대한 많은 논의 들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되어 촛불에 대한 책들을 한번 모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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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5-10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비의 생각 1권도 추가하심이^^

머큐리 2009-05-11 14:05   좋아요 0 | URL
추가했음...ㅎㅎ
 

 로쟈님 서재에서 퍼온다.  

지젝에 대한 관심은 있어도 난해해서 읽기 어렵기만 하던데...로쟈님 서재를 열심히 뒤져서 지젝과 좀 친해져야 겠다....근데 열심히 뒤진다고 친해질 수 있는 문제인지....  사실 이 글도 잘 이해되진 않는 부분이 많으니...ㅎㅎ

중앙대 대학원신문(260호) '冊과 담론' 코너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을 다루고 있다. '한겨레21'에도 서평을 실은 바 있어서 청탁을 받고 주저했지만 초점을 다른 쪽에 맞춰달라고 해서 결국은 수락했다. 하긴 그렇게 초점을 달리하면, 서평은 몇 편 더 쓸 수도 있겠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9. 05. 07) 저항의 교착상태는 어떻게 돌파해야 하나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은 철학과 과학, 그리고 현실 정치에 대한 그의 이론적 개입이자 그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 이후 이제까지 제시해온 담론의 중간결산이기도 하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지도 새롭게 더하지도 않으며 다만 ‘시차(視差, parallax)’라는 개념을 빌려 지금까지 다룬 문제들을 재정의하고, 자신의 작업을 재구성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지젝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하며 그의 공언대로 ‘주저’라는 말에 값한다. 

시차적 관점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
‘시차’란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시차적 관점’이라는 아이디어는 원래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 (2001)에서 얻어온 것이지만, 이론적 전거로 삼는 가라타니와는 달리 헤겔-라캉주의자로서 지젝은 칸트주의를 헤겔적 사유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접목시킨다.  



그는 이미 <이라크>(2004)에서도 ‘시차’란 개념을 사용하여 이라크전쟁의 ‘진리’를 설명한 바 있다. 곧 “민주주의는 인류에 대한 신의 선물”이라는 부시의 말이 집약해주고 있는 바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이 이 전쟁의 첫 번째 이유요(상상계), 새로운 세계질서 안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주장하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라면(상징계),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이라는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세 번째 이유(실재계)라는 것이다.

요점은 여기서 어느 하나가 나머지의 ‘진리’라는 게 아니라, ‘진리’란 관점의 이동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것이 말하자면 시차적 관점에서의 진리다. 이 경우 한 가지 관점에서의 진리 주장은 그것이 타당한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오류를 면치 못한다. 사태는 이데올로기적이면서 정치적이고, 또 동시에 경제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춘 방책은 일면적인 해결책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차적 관점의 도입을 통해서 지젝은 궁극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하고자 한다. 그가 보기에 시차란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철학의 교착상태뿐만 아니라 ‘저항’의 교착상태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지젝은 알랭 바디우를 따라서 시스템이 더욱 부드럽게 작동하게끔 만들어주는 국지적 행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진정한 위협은 수동성이 아니라 유사-행동이며, ‘능동적’이고 ‘참여적’이 되려는 이 충동은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개입하여 ‘뭔가’를 하고, 학자들은 무의미한 ‘논쟁’에 참여한다. 가령 자유주의적 좌파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도 혁명을 말하지만, 그들은 혁명을 위해 치러야 할 실제적 대가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해나갈 따름이다. 자신들의 학술적 특권이 전혀 위협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거나 급진적인 담론을 쏟아내는 데 열중하는 ‘강단좌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발언을 뒷받침하고 있는 발언 위치, 곧 물적토대와 시스템 자체는 건드리지 않으며 결코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사실 한때 ‘급진적’이었던 과거 전력만큼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공동체에 합류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상당수가 젊은 시절 트로츠키주의자였다는 사실이 그 일례다. 가까이에서 예를 찾자면, 주사파의 대부였다가 전향하여 극우 이데올로그로 활동한다거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열혈분자였다가 수구정당의 ‘강성파’로 활약하는 정치인들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사후적인 주장이 되겠지만, 이들의 ‘저항’이야말로 체계의 재생산에 기여한 흔한 사례가 아닐까. 

혁명은 당위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
지역적 층위의 국지적 저항으로 자본주의 세계화에 맞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지젝은 시차적 관점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한 주장은 우리가 국가로부터 언제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이것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국가기계를 운용하는 책무를 떠맡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즉 국가라는 마당을 너무 쉽게 ‘적’에게 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결국 정치적인 것보다는 윤리적인 것을 더 강조하게 되며, 혁명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서 간주한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진정한 혁명은 다르게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즉 그것은 ‘당위’가 아니라 ‘필연’이다. 때문에 지젝은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영속적이지 않을까라거나 혁명은 결국 안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좌파의 우려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오류는 혁명을 도덕적 의무로 사고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사-행동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물러나는 것, 후퇴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참여와 행동을 통해서 권력을 쥔 자들과 ‘대화’에 나서기보다는 ‘불길한 수동성’으로 퇴각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지젝의 시각이다. 그러한 수동성이 새로운 혁명적 주체와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클럽>(1999)이 암시가 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주인공은 일을 하지 않아도 월급을 내놓아야 한다면서 상사를 협박하기 위해 스스로를 피가 나도록 때린다. 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급진적인 자기비하를 통해서만 ‘순수한 주체’는 나타나게 된다. 자신을 직접 구타하는 것은 더 이상 주인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이면서 주인에게 집착하는 내 안의 어떤 것을 이겨내는 일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위가 아닐까.  

09.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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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노래를 너에게 주고 싶어
이건 너무나 평범해서 더 뻔한 노래
어쩌다 우연히 이 노래를 듣는다 해도
서로 모른 채 지나치는 사람들처럼

그때, 그때의 사소한 기분 같은 건
기억조차 나지 않았을거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건 너무 슬퍼
사실 아니라고 해도 난 아직 믿고 싶어

너는

이 노래를 듣고서 그때의 마음을
기억할까, 조금은

보편적인 노래가 되어
보편적인 날들이 되어
보편적인 일들이 되어
함께한 시간도 장소도 마음도 기억나지 않는

보편적인 사랑의 노래
보편적인 이별의 노래에
문득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때, 그때의 그때

그렇게 소중했었던 마음이
이젠 지키지 못한 그런 일들로만 남았어
괜찮아 이제는 그냥 잊어버리자
아무리 아니라 생각을 해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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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5-10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무한반복해서 듣는 정도는 아니고요ㅎㅎ 듣다보니 좀 질리더라고요;;; 역시 저에겐 해이밖에 없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