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님 서재에서 퍼온다.

 

작년부터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은 정치철학자라면 단연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다. 그의 주저 <불화>도 소개될 예정이기에 (일부 불만에도 불구하고) '랑시에르 붐'은 한동안 더 이어질 듯하다.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을 소개/해명하는 글이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필자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와 <무지한 스승>(궁리, 2008)을 우리말로 옮긴 양창렬씨다.  

 

고대신문(09. 05. 10) 민주주의는 모든 정체의 아나키적 원리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원상 ‘인민의 지배’를 뜻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단어는 아무데나 쓰이고, 그만큼 의미 없는 단어가 되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민주주의를 표방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 앞에 붙는 수식어에 따라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을 가리킨다. 다양한 수식어만큼이나 민주주의는 닳아빠진 개념이 된 듯하다. 이처럼 모호한 개념을 유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랑시에르에 의하면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 관념들의 고유함은 그것이 다의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대상이 된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다를 수밖에 없고, 바로 그 차이가 불화를 가능하게 한다. 정치적 투쟁은 바로 그 단어를 전유하기 위한 투쟁이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되찾기 위해 랑시에르는 그 단어의 희랍적 어원 그리고 그것의 역사적 분절을 되짚어 본다. 특히 플라톤이 범례적으로 보여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주목하면서 말이다.  

『국가』, VIII권에서 플라톤은 여러 정체들을 검토하면서 민주정을 과두정에 대한 빈자들의 전복으로 간주한다. 이 아카데미아의 철학자는 민주주의적 인간형을 서술하는 데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정체란 정부 형태만이 아니라 그 체제 하에서 공통으로 살아가는 존재 방식과 습속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주의적 인간은 노예와 구별되는 신분상의 자유, 의회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유 뿐 아니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 플라톤은 561c-e에서 이소노미아를 누리는 사람의 삶을 묘사하는 데, 이 민주주의적 인간형은 오늘날 공화주의자들이 비판하는 소비사회의 탈근대적 개인을 예견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 제멋대로 하는 자유는 민주정 자체가 정체들의 잡화점과 비슷한, 무정부 상태의 다채로운 정체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플라톤은 이소노미아에 가장 분개하는데, 그것은 법 앞의 평등만이 아니라, 오히려 법을 비롯한 공적 사안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평등을 가리킨다. 그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바로 추첨이었다. 추첨은 통치를 ‘아무나’에게 ‘우연’하게 맡길 뿐, 통치자의 어떤 자질이나 지식도 따지지 않는 제도다. 지식과 정치적 탁월함을 가진 자에게 기하학적 평등에 따라 통치의 특권이 돌아가야 한다고 보았던 플라톤에게 추첨은 무질서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는 정치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 지식을 갖고 있는 전문가가 있는가라는 랑시에르의 주요한 화두와 연결된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320d-324d)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신화에 주목하자. 에피메테우스는 다른 생명체들에게는 기술을 나눠주면서 정작 인간에게는 생존에 필요한 성질들을 부여하는 것을 잊는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에게서 불과 기술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준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흩어져 살 뿐, 도시국가에 모여 살지 못한다. 결국 제우스는 멸종할 위기에 처한 인간에게 정치적 덕(염치와 정의)을 주기로 작정한다. 헤르메스가 그 덕을 기술을 나눠주듯 분배해야 하느냐고 묻자, 제우스는 모두가 그 몫을 가질 수 있도록 분배하라고 답한다. 소수만이 그 몫을 갖는다면 도시국가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여기에서 프로타고라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말해주고 있다. 정치와 관련해서 전문가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평등한 능력을 갖고 있다. 심지어 이 평등이 모든 정치 질서, 모든 정치 공동체를 정초하는 전제가 된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평등 전제’라고 부른다. 앞서 언급한 추첨 그리고 프로타고라스가 들려준 신화가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누가 누구를 정치적으로 지배해야할 자연적 원리(archē)는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정부 형태는 이 원리의 부재, 정당성의 부재에 토대를 둔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여러 정체들 중 하나의 정체가 아니라, 모든 정체의 아나키적 원리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 평등전제를 입증하고 활성화시키는 정치를 뜻하기도 하며 그것은 반드시 정치적 주체화를 거친다. 이 점에서 데모스라는 단어가 내포한 이중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인민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빈자들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인민은 본디 정치적 주체인 동시에 배제된 자라는 이중적 신체를 가진 분열된 주체인 것이다. 정치적 주체화는 항상 말과 사물 사이의 틈에서 생겨난다. 가령 헌법에 기록되어 있는 인민의 권력을 몫 없는 자들이 실제로 행사하려할 때 그것은 정치 질서 자체에 분리와 불일치를 가져오는 사건이 됨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빈자들, 노동자들, 여성들도 인민인가?’, ‘우리는 이 나라를 통치할 주인의 범주에 셈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들은 언제나 말과 사물, 담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폭로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질문들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내는 역량과 행위야말로 정치요 민주주의다.  



랑시에르에게 가장 많이 쏟아지는 비판 중 하나는 그가 정치를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것, 다시 말해 드문 사건으로 묘사하며, 선거나 투표와 같은 제도를 치안의 장치로 보는 등 제도의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고로 정치를 어떻게 이어갈지, 민주주의 또는 평등을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지에 대해 그가 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비판에 대한 몇 가지 답변들로 결론을 대신하자.

첫째, 우리는 앞에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란 하나의 정체나 통치 형태가 아니라 정치 자체의 전제이자 원리임을 밝혔다.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다. 둘째, 랑시에르는 바디우처럼 모든 투표에 기권하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지난 2005년에 있었던 유럽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지배자들의 합의에 맞서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 투표 속에서 인민주권을 연출하는 한 방식이라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작년에 쇠고기 재협상과 대통령 재신임을 국민투표에 부치자던 주장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사실 그것은 인민으로 바꿔 읽을 수 있으며, ‘아무나’에게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한다—으로부터 나온다’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정치 무대에 올리는 한 실험이 될 수도 있었다.  

셋째,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짧은 임기로 연임할 수 없게 의회의 대표를 뽑고, 국가의 공무원이 인민의 대표를 중임할 수 없게 만드는 등 고대 그리스의 ‘추첨’을 연상시키는 주장들을 한다. 물론 이것들은 대의제를 ‘민주적’으로 이끄는 최소치이지 그러한 제도 변화 자체가 민주주의는 아니다. 넷째, 랑시에르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무너지며, 촛불에 불이 붙고 사그라지는 짧은 봉기의 순간에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최근의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그는 ‘사건과 돌발’의 사상가가 아니라 ‘해방’의 사상가다. 역사는 국가 형태에서 벗어나는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을 발명하려는 다양한 노력과 실천들의 망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그가 간헐적인 사건들의 불연속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선형적 시간이 아니라, 공존하는 여러 시간성들의 집합을 통해 역사를 사유하기 때문이다.(양창렬_파리1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09.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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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남미 하위주체 연구’ 권위 美 존 베벌리 교수

“지금 세계가 직면한 신자유주의적 모델의 위기를 남미는 이미 10년 전에 경험했습니다. 남미의 좌파 정부들은 그 같은 경험의 산물이며 새로운 변화를 대변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존 베벌리 미 피츠버그대 교수(65)는 14일 “지금 남미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모델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역적인 협력을 돈독히 하는 등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베벌리 교수는 남미 하위주체(subaltern·서발턴)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최근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지난 13일 ‘라틴아메리카니즘이라는 ‘사건’-인식지도 그리기’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

그는 1992년 결성된 ‘라틴아메리카 하위주체 연구그룹’의 핵심 멤버다. 이들은 하층민이나 소외 계층의 구체적 삶에 주목하는 인도의 하위주체 연구를 수용, 90년대 남미 좌파의 실패 원인을 진단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이들의 이론은 볼리비아 좌파 운동 등 현실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계급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국가, 인종, 민족, 젠더 등 다양한 범주에서 지배·종속 관계가 작동하고 있는 현실을 포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촛불시위와 관련해선 “남미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소개했다.

“92년 베네수엘라에서는 누가 조직한 것도 아닌데 빈곤층이 들고 일어난 ‘카라카소’가 있었고, 94년 멕시코에서는 사파티스타 봉기가 일어나는 등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들이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이는 기존 틀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베벌리 교수는 최근 10년간 남미에 좌파 정권이 잇달아 들어선 현상을 두고 ‘분홍색 물결’ 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이 ‘붉은색’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혁명적 좌파와 다르다는 의미다.

“이들 정권은 극단적인 계급투쟁이나 이념투쟁이 아닌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는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원동력이 되어 탄생했습니다. 좀더 다원적이고 다문화적인 걸 허용한다는 점에서 이전 좌파들과 달라요.”

이들 소위 ‘좌파’ 정권들이 스스로 ‘사회주의 정권’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남미의 좌파 정권들을 ‘좋은 좌파’와 ‘나쁜 좌파’로 나누는 시각에 대해선 이의를 제기했다. 남미 각국들의 상황이 다르기도 하거니와 이들 국가가 미국이나 우파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이들을 둘로 나누는 시각은 남미 좌파의 헤게모니를 약화시키려는 시도로 “남미 내부가 아니라 미국 측 시각”이라는 설명이다. 베벌리 교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 같은 이분법에 빠지기보다는 남미를 더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와 함께 남미 좌파의 ‘신보수주의적 전환’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60년대 급진적이었던 미국의 자유주의적 좌파가 80년대를 지나면서 보수주의자가 된 것과 비슷한 일이 남미 좌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는 “80년대 남미에서 좌파 혁명을 꿈꾸었던 지식인들은 지금처럼 새로운 형태의 정치상황이나 다문화주의, 하위주체 등에 대해서는 못마땅해 한다”고 설명했다. 베벌리 교수는 남미의 상황이 고정된 틀로는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계속 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도 구좌파들은 자신들의 틀로 해석하려다보니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베벌리 교수는 “새로운 후기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아시아와 남미는 새로운 연결 고리를 가질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와 남미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글 김진우·사진 정지윤기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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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2일은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청계광장에 앉아 함성을 외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봄비 내리는 광장은 쓸쓸하기만 하다. 이상화가 살아있다면 아마도 ‘빼앗긴 광장’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노래했을 것이다. 1년이 되어서인지 촛불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가 나온다. 촛불에 덴 자들이 해대는 뻔한 얘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1년 전 즐겁게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 속에서도 촛불의 후유증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목소리로 외쳐댔건만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 사람들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한 모양이다. 다시 이런 판이 벌어져도 나가지 않겠다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촛불은 성공한 운동이었나? 나에게도 몇몇 기자가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3·1운동은 성공한 운동입니까?” 기자들은 물론 성공한 운동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1920년 3월1일에도 사람들이 3·1운동을 성공한 운동이라고 평가했을까? 조선이 독립되었나, 민족이 해방되길 했나, 수천명의 희생자만 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3·1운동을 한 30년쯤 흐른 뒤에 평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 어떤 운동의 성패를 가늠하기에 1년이란 너무 짧은 시간이다.

촛불과 비교할 때 3·1운동은 단기적으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 민중들에게 사과하지는 않았지만, 통치방식을 바꾸었다. 이른바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한 것이다. 촛불에 대하여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무서운 속도로 역주행을 하여 ‘무단통치’의 시기로 회귀하고 있다. 일본 통치배들조차 열어주었던 언론의 자유는 급격하게 유린당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촛불 관련자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기소하고 있다. 촛불 관련으로 기소된 사람이 10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유모차 끌고 나온 엄마들이 조사받질 않나, ‘피디수첩’ 관련자들이 줄줄이 체포되질 않나, 미네르바가 구속되질 않나, 촛불 직후의 경찰과 검찰은 바쁘기 한량없다. 3·1운동 후 상해 등지로 망명하였던 독립운동가나 열혈청년들이 1년쯤 지난 뒤 국내로 돌아와 아무 탈 없이 지냈다는 것은 어느 태평성대의 이야기였던가? 지금 이명박 정부가 하고 있는 짓은 한마디로 일본 총독부보다도 치졸한 것이다. 그래서 창피하다.

운동도 상대가 있는 법인지라 모진 놈 만나면 응당한 변화를 단기간에 끌어내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급해할 이유는 없다. 3·1운동 덕분에 상해임시정부도 수립되고, <동아일보>, <조선일보>도 만들어졌지만, 나는 3·1운동의 진정한 성과는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 바로 3·1운동을 겪은 사람들이 변한 것이다. 물론 그때도 당장 독립을 이루지 못한 데 실망하고 좌절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일제 시기의 독립운동사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3·1운동의 체험이 얼마나 뼛속 깊이 한 사람을 변화시켰는지를 절감했을 것이다. 3·1운동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태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3·1운동의 한계를 딛고 넘어서서 새로운 운동을 펼쳐나갔다. 3·1운동의 맛은 준비된 선수들만 참가했던 의병운동이나 애국계몽운동과는 달리 그야말로 시장 보러 나왔던 장삼이사들이 진하게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촛불에 나왔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마음의 촛불을 끄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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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에 대한 평가와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촛불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했다는 사실 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내 주변에 몇몇은 촛불로 부터 세상을 보는 관점과 인식이 틀려졌다고 고백하고 있다. 물론 소수지만 난 그 소수가 참으로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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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연대 박종태지부장의 죽음과 이에 대한 전반적 노동권에 대한 고찰이 고작 사회갈등과 불법시위정도로 축소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무엇보다, 노동은 생계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노동에 대한 합리적 보상은 상식이다. 때때로 상식이 뒤집혀서 회사의 이윤자체가 노동의 유지가 되는 현실에서 약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약자의 반발이 거세지면 불법의 이름으로 탄압을 자행하는 지배자의 현실논리는 사실 타당하지 않다. 법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강자의 이익을 지켜주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법이 그렇게 시행된다면, 이런 사태자체가 벌어지지 않았겟지만.... 뉴스에서는 민주노충의 집회는 원천적으로 허락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며, 집회결사의 자유를 저렇게 무시하는 경찰들의 행태를 보면서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는 어려워도 무시하기는 정말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걱정되는건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실제로 위력을 가지고 진행되지 않으면, 그야말로 이 정권이 진보세력을 절멸시킬 또 다른 기회를 주지 않을까하는 점이다. 탄압은 교묘해지고 강도는 점점 세지는데, 내부의 역량은 아직까지도...아직까지도라고 해야 할 만큼 튼튼하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내부 사정을 모르는 내 기우기길 바란다. 민주노총 역시 이번을 기회로 삼아 임시직, 특수직 노동자에 대한 실질적 대변자로 거듭나지 못하면 다시 한 번 생존의 기로에서 허덕이게 될 것 같다.

 

“떠나는 차량 덮쳐 전원연행”
“새벽까지 물 한모금도 안줘”  

 

» 16일 대전 서구 둔산동 정부대전청사 남문광장에서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총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전국 1만5천여명의 화물차주로 구성된 화물연대는 이날 집회를 하고 총파업을 결의했다. 대전/연합뉴스 

박종태 화물연대 광주지부 지회장의 죽음을 계기로 촉발된 특수고용직 노동권 보장 문제를 두고 정부와 노동계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화물연대가 총파업을 결정한 가운데 16일 대전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노동자·시민 457명이 무더기로 경찰에 연행된 것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대규모 연행 사태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발이자 일방통행식 노조 탄압을 감추기 위한 의도된 폭력”이라며 총파업 일정을 앞당기겠다고 밝혔다.

■ 무더기 연행 사태 민주노총과 화물연대는 16일 오후 4시30분께 전국노동자대회를 마치고 대전 중리동 네거리를 거쳐 박 지회장의 주검이 안치된 대전중앙병원까지 거리행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위대가 저녁 6시30분께 대한통운 대전지사까지 진출하려다 경찰과 충돌이 빚어졌고, 일부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를 뚫은 뒤 대한통운 앞에서 집회를 벌이고 저녁 8시20분께 해산했다.

그러나 해산 과정에서 경찰이 곧바로 진압작전을 펴 시위대가 대거 연행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날 서울에서 내려온 임영기(39)씨는 “대한통운 앞 집회를 마치고 가려는데, 전경 한 명이 대나무(만장 깃발)를 들고 쫓아와 전경버스에 몰아세운 뒤 얼굴과 오른쪽 팔다리를 수십 차례 때렸다”고 주장했다.

박혜영 민주노총 법률원 차장은 “비에 젖은 연행자 80명을 대전 서부경찰서 강당 안에 남녀 구분 없이 수용하는 등 경찰이 인권을 보호하지 않았다”며 “새벽 3시까지 모포와 물 한 모금 주지 않아 연행자 대부분이 감기 몸살 증상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17일 성명을 내어 “집회장을 먼저 떠난 차량의 탑승자 전원을 연행하고, 고속도로 나들목에서 우비나 조끼를 입은 사람을 잡아들이는 등 경찰이 ‘함정 연행’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은 “대나무를 이용한 불법집회가 이어지면서 경찰 부상자가 속출했고, 경찰버스·진압장비 등을 부수거나 빼앗는 등 집회가 도를 넘어서 검거자가 많아졌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날 밤까지 대전 동부경찰서 등 5곳에서 연행자를 조사했으며, 사진 채증 자료 등으로 가담 정도를 따져 사법 처리 수위를 가릴 예정이다.

■ “총파업 앞당긴다” 화물연대는 노동자대회에 앞서 조합원 총회를 열어 △택배기사 전원 복직 △노동3권 보장 △운송료 삭감 중단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결의했다. 정호희 운수노조 정책실장은 “정부와 대한통운 등 사쪽과 대화한 뒤 추이를 지켜볼 방침”이라며 “파업을 계획 중인 건설노조 등과의 연대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도 이날 노동자대회 대회사에서 “6월로 예정된 민주노총 총파업을 가급적 앞당기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혀, 화물연대 파업을 필두로 노동계의 전면적인 투쟁이 예상된다. 이승철 민주노총 대변인은 “산별노조의 임단협이 6월에 집중된 만큼 연대파업의 형식을 띨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는 화물연대 조합원은 노동자가 아니어서 파업권이 없다며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국토해양부는 17일 “2003년 이후 7차례 집단행동으로 경제에 피해를 입혔음에도 화물연대가 또다시 불법 집단 운송거부를 하려 한다”며, 집단행동에 참여한 화물차주에 대해 △유가보조금 지급 중단 △차량 시위 때 운전면허 정지 △화물운송자격 취소 등의 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한통운도 이날 보도자료를 내어 “광주지사의 택배 수수료(920원)는 다른 곳보다 높은 수준”이라며 “하지만 택배사업자 개인과의 협의는 문을 열어놓겠다”고 말했다. 대전/오윤주 기자,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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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잠시 외출했다가 교보문고 부천점에 들렸더니 '용의자 X의 헌신'을 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미여사의 '모방범' 때문에 일본 추리소설에 한 동안 푹 잠겨 있었는데... 무언가 조금 아쉬운 듯 하면서도 끊임없이 신간이 나오면 읽게 만드는 것이 게이고의 소설이었다. 잠시 한 눈 판 사이 못보번 책들이 나온 것을 보니 나름 게이고도 한국의 팬들이 많은 모양이다. 하긴 '용의자 X의 헌신' 말고도 일본에서는 그의 작품들이 드라마나 영화로 많이 제작된 되었으니, 일본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질 법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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