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18일
연세대 강연


얼굴은 본적이 없지만 이따금 이메일을 교환하는 사람들이 몇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얼마 전에 광주항쟁에 대해 잘 모르니 알 수 있는 책이나 사이트를 소개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좀 의외였습니다. 그는 요즘치곤 꽤 반듯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는 대학생인데 어떻게 광주를 모를까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했습니다. 지금 대학생이면 1980년엔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어린아이였으니 말입니다. 당시 고3이었고 청년 시절 내내 광주를 품고 살았던 저희 세대와는 다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저와 비슷한 세대이면서 광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사태”라고 할 때는 “사태”인 줄 알고 “항쟁”이라고 하니 “항쟁”인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지요.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무식하다’고 합니다. 유식하다 무식하다는 제도교육 학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회의 한 성원으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볼 줄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무식한 사람입니다. 한국 사회는 갈수록 그런 무식한 사람들로 가득 차고 있습니다.

하여튼 광주는 25년이 되었고 다른 모든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현실 속의 사건이 아니라 역사 속의 사건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광주항쟁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당부하고 싶은 건 광주항쟁에 대해 따로 공부를 하라는 겁니다. 광주항쟁을 제대로 모르면서 한국 사회와 역사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학술적인 책을 사볼 것까진 없고 여러분들 아마도 매일 인터넷에 들어갈 테니 시간을 조금만 헐어서 광주항쟁 관련한 사이트를 찾아보기 바랍니다. 기본적인 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은 5.18기념재단도 있고 여럿 있습니다.

광주항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것은 광주항쟁을 통해 이른바 ‘민주주의’의 뜻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광주 전의 민주화 운동은 반독재 운동, 즉 선거나 개인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의 절차를 회복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좀 딱딱하게 말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이었지요. 그러나 광주 이후의 민주화운동은 좀 더 근본적이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운동으로 바뀝니다.

그 동기는 미국입니다. 광주가 계엄군이 일시 퇴각하고 해방된 상태이던 80년 5월 24일 미국 항공모함 코럴씨 호가 부산항에 들어왔다는 소식에 시민들은 자유의 나라 미국이 우리를 구하러 오는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론 신군부의 쿠데타나 계엄군의 작전은 미국의 암묵적인 승인 아래 진행되고 있었죠.

광주를 거치면서 한국의 사회운동은 미국에 대한 자각이 생기는데 이건 미국이라는 일개 나라에 대한 자각을 넘어 미국식 민주주의,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자각으로 발전합니다. 80년 5월 22일부터 닷새 동안의 해방 광주의 모습은 바로 그 진정한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그런 세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광주를 진압한 군사 파시즘은 더 강력한 공포정치에 들어갔지만 그럴수록 저항은 되살아났습니다. 80년대 중반이 채 되기 전에 한국의 사회운동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좇는 부분이 남아있었지만 그 성원의 대부분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좇는 변혁적인 성격을 갖게 됩니다.

87년 6월 29일 대통령 당선자 노태우가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한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을 거쳐 절차적 민주주의는 계속 정착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80년대에 변혁운동을 했던 운동세력의 상당수가 변신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민주주의니 변혁이니 하는 건 다 지나간 일이라는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두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사회주의가 80년대 말 무너지자 그들도 함께 무너지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그들이 그들 자신을 속이기로 한 것입니다.

절망감에 빠진 많은 청년들이 사회운동을 포기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사람을 욕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운동 안 했던 사람에 비하면 백배 훌륭한 사람들이지요. 모든 사람이 활동가로 살 수는 없는 것이니 현실적인 삶을 살면서도 얼마든 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력을 사용해서 주류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불거지는 경우는 이른바 ‘386정치인들’입니다. 학생 시절의 신념은 슬그머니 뒤로 버리고 그 운동을 통해 얻은 제 명망을 사용해서 제도 정치권에 들어갔습니다. 세상이 달라졌다느니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느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만 다 개소리고 그들은 결국 국회의원 배지를 달기 위해 운동을 했던 것입니다. 기분 나쁘게 들리겠지만 10년 쯤 지나면 이 자리에서도 역시 그런 사람이 나올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운동의 종목을 바꾼 사람들입니다. 바로 90년대 중반 이후 급성장한 시민운동입니다. 활동가라면 한눈에도 체제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 영등포나 구로동에 구질구질한 사무실에서 구질구질한 옷차림으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젠 시내 한 복판에 번듯한 사무실에 넥타이를 맨 활동가들이 나타났습니다. 운동의 주제는 근본적인 것에서 시민의 일상과 관련한 것들, 다시 말해서 체제를 넘어서는 게 아니라 체제 안의 문제들을 위주로 했고 시위나 싸움보다는 텔레비전이나 신문 같은 미디어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빠른 시간 안에 대중의 각광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안티조선운동을 비롯한 언론개혁운동, 정치개혁운동들과 결합하고 확산되면서 결국 정권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그런 개혁운동들이 갖는 의미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안티조선 운동의 초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제가 만들었던 아웃사이더라는 잡지는 일종의 좌우 합작이었지만 공동의 적은 조선일보라고 밝히고 있지요. 저는 개혁운동의 진보운동의 일부라는 사실과 기존의 진보운동이 놓치고 있던 부분을 잡아냈다는 사실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그 운동이 갖는 반동성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 운동이 여전히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진보운동을 철지난 운동,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행태로 몰아붙이는 부분에 대해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도하든 안 하든 개혁운동이 ‘오늘의 진보운동’을 자처하는 한 필연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혁운동이 진보를 자처하면 한국사회는 보수 대 진보의 구도가 아니라 극우보수 대 개혁보수의 구도가 되고 진보는 아예 무대에서 밀려나버리는 것입니다.

개혁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개혁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야만과 폭력성을 제거하여'합리화'하는 운동입니다. 세상이 바뀐다고 하는 것은 나쁜 신문이 곤경에 처하고 비리 정치인이 잡혀 들어간다고 되는 게 아니라 세상의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도 언론이나 정치란 바로 세상의 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왜곡이나 비리가 줄어든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바뀐다는 건 바로 그 언론이나 정치의 뿌리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경제의 문제이고 계급적 문제입니다. 그 부분에서 한국사회는 민주화와 개혁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양극화되고 있다는 건 이젠 한나라당 의원들도 인정하는 일입니다. 노동자들의 생활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 절반은 비정규노동자고 그 비율은 늘어가는 중입니다. 농업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포기한 지 오래지요. 그런 문제들은 개혁운동에서 배제되고 촛불시위에서도 배제됩니다.

이런데도 여전히 언론개혁이나 정치개혁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한다면 초인적으로 순진한 사람이거나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이 학교 안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 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근래 맑스주의가 어떻고 좌파가 어떻고 말하는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기도 모르게 개혁운동의 최면에 빠져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파시즘 상태에 있습니다. 새로운 파시즘, 군사파시즘이 아니라 자본의 파시즘이지요. 군사파시즘은 억압과 폭력으로 우리를 다스리지만 자본의 파시즘은 우리에게 자본의 욕망을 심어서 스스로 복종하게 만듭니다.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자본의 매우 충성스런 백성들입니다. 얼마 전 고대에서 일어났던 일과 그와 관련한 반응들은 바로 그 사실을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은 고대나 고대학생들의 태도가 “밥그릇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인터넷 신문에 보니까 그 발언을 두고 “직격탄을 날렸다”고 적혀 있던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밥그릇 때문”이라는 말은 속으론 인정하지 않지만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어쩔 수없이 인정한다는 뜻인데 제가 보기엔 그게 아니라 그들은 진짜로 진심으로 이건희를 인정하고 존경합니다. 그들은 이건희와 다른 건 이건희보다 돈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노동자 착취와 정경유착과 온갖 비리로 부자가 된 아버지를 둔 덕에 부자가 되어선 다시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 재산을 제 자식에게 상속하는 사람이 한국이 자랑하는 기업인입니까? 노조조차 만들 수 없는, 노동자들의 위치추적을 하고 협박을 하는 회사가 세계적인 첨단 기업입니까? 지금 한국 사람들이얼마나 어려운 시절을 보내는지 뻔히 알면서 프랑스의 스키장을 통째로 빌려서 스키를 타는 인간이 과연 철학을 가진 인간입니까? 그런 인간에게 이 나라의 대표적인 명문대학이라는 곳에서 명예 철학 박사학위를 주려고 작전을 벌이고 그나마 정신이 제대로 박힌 학생들이 현실을 깨우쳐주었는데도 총장은 엎드려 용서를 빌고 보직교수들은 사퇴서를 내고 수천명의 학생들은 총학생회를 탄핵하는 서명을 하고, 이게 대체 정신병원입니까 대학입니까?

그러나 바로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 한국인들의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건희라는 파렴치한 인간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한국인들에게 더 이상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진지한 고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성이라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먹고사는 게 원수라 저런 놈 밑에서 일한다”고 부끄러워해도 신통치 않을 판에, 그런 파렴치한 인간을 왕처럼 떠받들며 노조조차 없는 회사에서 ‘삼성맨’의 자부심에 젖어 삽니다. 참으로 무지한 그러나 돈은 많은 주인 아래서 배불리 먹여준다는 걸 자랑으로 삼는 머슴들이지요.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런 삼성맨을 부러워합니다. 대학생들은 삼성맨이 못되어서 안달이 나고 그들의 아버지들은 이건희처럼 살수 없다는 것을 인생의 한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 모든 사람이 자본의 권력에 자발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사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탄압받고 억압받아도 정신만은 해방되어 있던 시절보다 스스로 정신을 내어준 시절은 더욱 끔찍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절보다 나은 음식을 먹고 자가용과 휴대폰을 갖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의 욕망이 인간을 억압하는 걸 넘어 우리 스스로 자본의 욕망에 젖어서 인간성 자체를 파괴하고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서 우리가 아이들에게 뭘 가르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오늘 부모들은 아이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로지 경쟁에서 동무를 누르고 이길 것만을 가르치고 사랑이나 존경조차도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지요.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서 엘리트가 된다 한들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돈으로 안락을 살 수 있지만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박사학위를 얻을 수는 있지만 그 박사학위는 내가 아니라 돈에게 수여된 것입니다.

이건희가 돈이 없다면 누가 그를 존경할까요? 모든 사람이 그의 돈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이건희 씨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아무리 돈이 많다고 프랑스에 가서 스키장을 통째로 빌려서 울타리 밖에선 다 보고 있는데 혼자 스키를 타는 사람이 과연 자의식을 가진 인간일까요? 여러분 같으면 쪽팔려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정신이 완전히 파탄 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런데 이건희라는 사람은 그렇게 합니다. 대체 얼마나 추켜올렸으면 사람이 그 지경이 되었을까요?

오늘은 5.18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부른 이유도 오늘이 5.18이기 때문입니다. 아까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묵념도 했지만 5월에 죽어간 사람들, 사람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보여준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광주는 처음엔 엘리트 지식인들, 대학생들이 주도했지만 마지막에 가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떠납니다. 계엄군과 협상을 해서 더 이상의 희생을 줄여야 한다, 헛되게 죽지 말고 힘을 기르자, 이런저런 합리적인 이유를 주장하던 수습파들은 떠나고 무릎 꿇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항쟁파만 남습니다. 그 순간부터 시민군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순간부터 광주 인민의 군대라고 해야 맞습니다. 항쟁파의 대부분은 평소에 인간 취급 못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본 인간으로서 품위가 목숨보다 귀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 취급 못 받고 사는 세상,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처럼 살자. 결국 그들만이 인간의 품위를 간직했습니다.

지나간 일, 자신의 삶과 직접 관련을 갖지 않는 역사 속의 사건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하는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아주 진보적이라는 역사학자 한 분이 대학생 시절의 추억까지 끌어대면서 유시민 씨를 두둔하고 나서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현실 속에서 체 게바라나 김산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한다면 그렇게 살지는 못해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 현실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을 존경할 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하는 우리는 현실 속의 체 게베라나 김산엔 관심이 없거나 그들을 비웃곤 하지요.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광주에서 끝까지 싸웠던 사람들을 훌륭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고뇌가 있었을까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다시는 만난 수 없는 늙은 어머니, 처음으로 입을 맞춘 날의 두근거림이 그대로 남은 애인, 제 목숨보다 귀한 새끼와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의 독립군들처럼 죽고 나서 존경과 명예가 남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폭도요 빨갱이로 남는 것입니다. 남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으로 인해 언제까지 어떤 고통을 겪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끝까지 총을 들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게 바로 광주의 정신입니다.

여러분들 매일 밤 인터넷에서 활동하지요? 지금 이 나라의 젊은 사람들 대부분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 먹고 나서 인터넷 세상에 들어가 다들 사회평론가로 활동합니다. 바야흐로 온 국민이 사회평론가인 시절이지요. 그러나 마치 세상을 다 안다는 얼굴이지만 그 대부분은 개혁이라는 체제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을 뿐입니다. 체제는 그들에게 “세상을 바꾸는 네티즌”이라고 부추기고 그들은 다시 “세상을 바꾸는 네티즌들”로서 활동합니다. 오로지 체제가 제공하는 이슈에 매일 밤 메뚜기 떼처럼 몰려다니며 좀 더 근본적인 사회적 모순들을 은폐하는 데 동원되지요.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 광주의 정신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당장 실현가능한 문제에만 매몰되지 말고 우리가 인간임을 진정으로 증명할 수 있는 문제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아니 설사 내 생애에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라 해도 그것이 옳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면 그 일에 대한 신념을 버려선 안 됩니다. 중세의 암흑 속에서 근대라는 세상이 올 거라고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신념을 버리지 않은 아주 적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당대의 사람들에게서 어떤 소리를 들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들”이라고 했겠지요. 그러나 바로 그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들”이 깨지고 또 깨지면서 결국 중세는 무너집니다. 우리의 암흑도 그렇게 무너질 것입니다. 그게 바로 광주의 정신, 진정한 민주주의의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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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 Moth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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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영화를 보고난 첫 느낌은 기억에 관한 진실이었다. 영화의 전개와 내용과 반전의  모든 기반은 기억에서 시작한다. 첫장면에 엄마의 춤은 마지막 장면의 춤과 연결되며, 그 중간에 기억에 대한 잔인한 진실이 있었다. 영화는 그 진실을 찾아 떠나는 어머니의 모정을 잔인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마더'는 '모정'과 '살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고편을 보면 모자란 아들이 살인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힘없고 지식없고 오직 자식에 대한 사랑 하나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애쓰는 어머니를 그리는 영화로 보인다. 어쩌면 감독은 예고편부터 본 영화의 반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기획으로 작업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은 과거의 사실을 밝히기 위해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나 기억은 쉽게 망각되거나 변형되거나 심지어는 왜곡되기도 한다. 그대로 투명하게 존재하는 기억이란 가능한 것일까? 그러나 '마더'에서의 기억은 단락져 숨어 있을지는 몰라도 재생할 때 왜곡되거나 변형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의 반전이 극적이기 보다 도식적으로 보인다. 여기서 영화의 힘이 빠져 버리는 것이다.   

'마더'의 살인은 잔혹스럽지 않다. 오히려 '마더'에서 드러나는 맹목적 모정이 살인보다 더 잔인하고 독하다. 이미 과거에도 어머니의 '모정'은 잔인했었다. 어렸을때 도준에게 농약을 주고 같이 죽으려던 어머니는 이제 아들과 악착같이 살아 남으려 한다. 이 영화의 비극은 자신이 힘없고 약하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피해자임을 자각하고, 모질게 살아남으려는 모정이 결국 자신보다 더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점이다. 자식을 향한 모정이 자신보다 더 억울한 피해자들을 만들어도 그냥 무시하는 '모정'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지.... 가끔 이 영화보고 감동 먹었다는 분들은 도데체 어디서 감동을 먹었다는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마더'에서 기억은 두가지 역할을 한다. 봉인되어 있는 기억은 진실을 은폐하고 해제된 기억은 진실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봉인되어 드러나지 않았던 기억이 해제되는 순간 진정한 비극은 시작된다. 여기에 영화의 여운이 남아있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도준의 기억을 봉인해 놓는다. 하지만 도준의 기억은 영화 요소요소에서 드러나듯 어느순간 해제되어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에 대한 도준의 태도는 명확하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도준의 생각인 것이다. 여기에 어머니의 비극이 존재한다.    

피해자였던 모자는 어느새 가해자로 변해있고, 아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재생될 아들의 기억은 어머니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파국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보여준 어머니의 슬픈 춤사위는 이미 그 비극을 감당하고자 하는 마지막 살풀이 같다.  

봉감독이 아니었음 별을 4개 이상 주고 싶었다. 봉감독 작품이라 3개 준다. 단, 이 영화가 그냥저냥 평균작이란 뜻은 아니다. 오히려 평균작 이상이란 이야길 하고 싶다. 사실 봉감독의 영화를 평하자면 봉테일이란 별명답게 영화 요소요소에 대한 디테일을 이야기 하지 않고서는 제대로된 평을 하기가 힘들다고 보여진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줄이고자 글을 썼더니 추상적인 이야기만 늘어놓게 되고 세심한 부분에 대한 언급을 하지 못했다. 세부적 사항에 대한 보물찾기가 봉감독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의 묘미일텐데.... 별3개는 그냥 내가 너무 봉감독에게 기대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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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 2009-06-02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리뷰 정말 마음에 드네요. '이 영화의 비극은 자신이 힘없고 약하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피해자임을 자각하고, 모질게 살아남으려는 모정이 결국 자신보다 더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점이다.' 이 문장에서 덜컹 가슴이 내려앉아요. 저도 그 사실이 무척이나 슬펐거든요. 저는 이 영화를 오히려 그 이유때문에 참 좋게 봤어요. 저런 현실들, 망각을 무기삼아 우리가 저지르는 수많은 일상적인 범죄들을 잘 보여주는것 같아서요. 하여간 생각할거리를 많이 안겨주는 영화였습니다.

머큐리 2009-06-02 13:45   좋아요 0 | URL
하하 ^^; 처음 듣는 칭찬이라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해이] 2009-06-03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영화평입니다ㅋ 제 생각이 바뀌겠어요^^ 하지만 아직도 그의 이야기가 "엉성"하다는 데는 변함이 없지요 ㅋㅋ

머큐리 2009-06-03 08:06   좋아요 0 | URL
ㅎㅎ 그냥 끄적인거구요..요즘 '스토리텔링의 비밀'을 읽고 있는데...읽을수록 더 모르겠더라구요... 언제 신촌에서 헤이님 한 번 뵈야 하는데...ㅋㅋ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한지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토요일이 다가왔다. 정신없이 보낸 일주일....금요일마다 숨어있는 책에 들려 이런저런 책을 구경했지만, 금요일인 29일이 영결식이고 늦게나마 영결식에 참석하는 바람에 숨책에 갈 시간이 없었다. 토요일 아침 일찍 '마더'를 보고 시청에 들렸다. 빈소는 부서져 있었고, 광장은 다시 견찰들이 버스로 틀어막아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시민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신촌에 잠깐 들려 숨책에 다녀왔다. 시청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들과의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기에.... 

숨책에서 건진 보물들이다.  

 

 

 

 

 

 

 

이른바 서구지성사 3부작이다.  

서구지성에 대한 일천한 지식으로 얼마나 소화해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책들을 다 소화해내면, 나름 서구 지성에 대한 안목이 늘어나길 소망할 뿐.... 욕심은 항상 부리지만 과욕으로 판명나고 있는 터라 살짝 부담스럽다.  

그리고 건진책 

로렌 슬레이터의 '나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이다. 이 책은 그저 저자의 이름 하나로 골랐다. 심리학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스키너의 심리상자열기'의 저자인 관계로 어떤 책인지 살펴보지도 않고...골랐다.     

뭐 심리학 책 아니겠는가? 

예전에는 심리적 안정에 대한 서비스를 종교가 주었다면, 현대에는 심리학이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아직도 인간에 대해 모르고 인간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다. 다만, 질문을 신에게 하지 않을 뿐이고 인간에게 던지고 있을 뿐이다.  우주의 끝으로 도달하기도 힘들지만, 인간 내면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기도 힘들다.  

그래서 심리학 책을 읽으려한다.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리고 여성에 관한 책.... 누구보다 시대를 안고 살아간 여성들의 짧은 이야기들이 있는 책이다.  

레니 리펜슈탈, 마거릿 버크화이트, 오리아나 팔라치, 레이첼 카슨, 로자룩셈부르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에바 페론, 라일라 할레드, 마거릿 싱어, 베티 프리던, 글로리아 스타이넘, 케이트 밀레트, 사라 베르나르, 안나 마냐니, 이사도라 던컨, 빌리 홀리데이, 카미유 클로델, 케테 콜비츠, 조지아 오키프, 에스테 로더. 

낯익은 이름도 있고 잘 알지 못하는 이름도 있다. 여성으로서 세상을 향해 도전한 아름다운 이들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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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57930.html 

한국처럼 이념과 정치가 과잉인 사회에서는 세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권이다. 한국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바다가 갈라지듯 편이 갈라져 정부 관련 일에 대한 접근 기회가 완전히 박탈당하거나 무한정 풍성해지는 사회다. (.......)

정권 비판에 늘 접근 기회가 박탈당한 것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원한과 저주가 끼어드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보수 인사들이 발산한 원한과 저주를 기억하시는가? 그들의 처지만 놓고 본다면, 그들이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금 이명박 정권이 형편없이 망가지고 있는 건 그 세월에 대한 복수욕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황석영 변절’ 논란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겪으면서 해본 생각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편가르기’와 그에 따른 ‘승자독식주의’는 한국 정치가 필요 이상으로 살벌한 이전투구로 전락하는 주요 이유가 아닌가. 현 정권 사람들이 복수욕과 탐욕의 수렁에서 탈출해 진정으로 국민 화합을 이루는 길이 무엇인지 고뇌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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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앞 빈소를 차린 시민단체들은 빈소를 철거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영결식날 시민들은 정말 오랫만에 시청광장를 탈환(?)하였고, 그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경찰들은 시민에게 경고방송을 하면서 "경찰들이 많이 참고 있으니 그만 해산하라" 고 하고.... 물론 참고 있었겠지 얼마나 물리력으로 쓸어버리고 싶었을까.... 여기저기 눈치 보려니 더 큰 불이 날까봐 조심조심 한 것 알고있다. 그 날 새벽까지 광장에 있다가 돌아오면서 시민들을 도로에서 몰아내더라도 빈소만은 건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지들도 머리가 있는 놈들이면 그렇게 무도하게 나가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역시 이 정권은 꼭대기나 바닥이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은 왜이리 똑같은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빈소를 밟아버렸다. 그것은 떠나간 사람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집요한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고, 떠나보낼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대한 도발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이 시절..... 이제 6월을 맞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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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9-05-31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노를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정말 쳐죽일놈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