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단체 30곳 2차 시국모임 열어
“6월10일 범국민대회 적극적으로 준비” 

 

주요 시민·사회단체들이 2일 ‘시국모임’를 열고, 민주주의 회복 및 사회통합을 위한 범민주세력의 결집을 촉구했다.

참여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30여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은 이날 오후 서울 정동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시민사회단체 제2차 시국모임’를 열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광범위한 민주주의의 후퇴 현상 등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했다. 이들 단체는 지난달 25일 제1차 시국모임를 갖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민추모위원회’를 결성한 바 있다.

시국회의에 참여한 단체 대표들은 이명박 정부 들어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중대한 위기 상황에 빠졌다는 데 인식을 함께했다. 이학영 한국기독교청년회(YMCA) 사무총장은 “과거 군사정권에서나 쓰던 ‘민주주의 회복’을 21세기에도 말하려고 하니 창피하다”며 “민주사회의 기본권인 의사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가 과거 군사정권보다 더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천준호 한국청년연합(KYC) 공동대표도 “정부는 반대 의견을 수렴해 생산적인 논의로 이끌기보다 힘으로 눌러 이들을 무력화하고 제거하려고 한다”며 “경찰버스로 막혀 있는 서울광장이 소통을 막고 있는 현 정부를 상징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이들은 정부에 △미디어 악법 철회 △4대강 개발사업 중단 △검찰 개혁 △서울시청 앞 광장 개방 등 가시적 조처를 할 것을 요구했다.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지난 1년간 이명박 정부의 국정 운영 방식은 검·경을 앞세운 강압 통치였다”며 “근본적인 국정 운영의 변화가 필요하지만, 당장 눈앞에 펼쳐진 문제인 미디어 악법 철회 등 네 가지 사안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이들은 범민주세력의 결집을 제안했다. ‘민주회복과 사회통합을 위한 시국모임’을 전국 각 지역과 부문에서 열고, 민주회복 등에 동의하는 모든 정당, 시민·사회단체, 사회 원로, 종교계 등과 함께 역량을 모아 국민의 힘을 결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또 이들은 10일 열릴 ‘6월항쟁 계승과 민주회복을 위한 범국민대회’(가칭)를 적극적으로 준비하기로 했다.

이와 별도로 서울대 교수 100여명은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하는 서울대 교수 일동’ 이름으로 3일 시국 선언문을 내기로 했다. 선언문에는 ‘민주주의가 위기 상황에 처했으며, 이명박 정부는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선언문을 준비중인 이준호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노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가만히 있으면 기본적인 양심, 책임을 버리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이날 연세대 교수들 일부도 별도의 시국선언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한성 연세대 교수(법학)는 “일부 교수들 사이에 시국선언 관련 움직임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시민분향소’에서는 언론개혁시민연대 등이 2일부터 매일 저녁 7시30분에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길거리 특강’을 열기 시작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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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뭉쳐서 .... 6월에는 조그만 승리라도 이루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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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9-06-04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저도 마음으로 응원하는 중입니다. 휴... :)
 

박노자 -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면서: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맨 먼저 느낀 것은 비통함과 돌아가신 이의 고통에 대한 동감이었습니다. 역설이지만, 한 번 국가의 수반이었던 사람은 최근 한 동안 국가라는 폭력기구의 수레바퀴 밑에 깔려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비극적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저 본인도 그 입장이 됐다면 자살을 생각해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희나 이명박에 대해서 수사다운 수사를 벌인 적 없는 검찰들이 "상부"의 명령을 받들어 저인망수사를 벌이면서 노무현과 어떤 관계를 가진 거의 모든 사람들을 장기간에 걸쳐 괴롭혀온 것을 생각해보면 그 탄압의 중심에 있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심정을 십분 헤아릴 만합니다. 마치 적군에게 포위 당한 한 성의 장군이 그 성에 갇힌 민간인들을 살리기 위해 "나 혼자 죽겠다! 내가 죽을 터이니 포위를 풀어라!"라고 하면서 적군 앞에서 자결하는, 유럽 중세사 책에서 꽤나 자주 나오는 이야기를 상기해볼 만합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돼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검찰과 같은 공공기관이 정부의 정적이 되는 사람에게 "적군"과 다를 게 없는 존재가 됐는가요? 그러나 조선시대의 의금부나 사헌부보다 지금의 검찰이 "공안"이 아닌 "사안"의 기관이 되고 공공성을 잃은 것은 바로 우리가 직시해야 할 현실입니다. 대한민국이란 사실 극소수 재벌기업과 부동산부자 등 기껏해야 5%가 될까말까 하는 특권층의 사익을 보장해주는 폭력기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21세기 벽두의 우리 자화상입니다. 그러한 사회에서야 노무현의 비극적인 선택으로 귀결된 "노무현 박멸 작전"은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비극을 이야기하자면, 이 대한민국을 그래도 5년동안이나 통치했던 노무현 자신이 사익추구집단에 봉사해주는 이 기형적인 국가 구조를 전혀 바꾸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고인을 애도하면서 이와 같은 말씀을 드릴 것은 아닙니다만, 만약 정치인 노무현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개인 노무현의 자살이란 비극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에서 참 중요한 부분을 바로 봐야 할 것입니다.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십분 지고,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가족, 친척, 친구, 동지들을 위해서 그 한 몸을 던지신 개인 노무현은 대단히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노무현만큼 소탈하고 "편한" 고급 정치인을 대한민국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폼을 잡지 않는" 기질을 제가 인간들에게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성격입니다만, 노무현은 바로 이와 같은 스타일이었습니다. 퇴임 후에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여러 사람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셨던 모습을 봐도, "새 시대의 인간"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바보"로 기억되는 개인 노무현과 구별돼야 할 것은 정치인 노무현입니다. 개인 노무현의 순진해보이는 미소도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지만, 정치인 노무현과 얽힌 수치의 순간들 - 그 중에서는 무엇보다도 이라크 파병 등 -도 우리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개인 노무현도 한국 현대사의 한 아름다운 장이 되겠지만, 정치인 노무현의 실패도 지금 우리 역사의 지워지지 않는 한 일부분입니다. 지금 개인 노무현에 대한 애도와 슬픔이 노무현의 정치적 계승자, 후계자들에게도 일정한 후광을 부여하지만, 조문의 파도들이 가라앉은 뒤에 이들이 과연 민심을 다시 한 번 얻을 수 있을 것입니까? 개인 노무현의 자살을 슬퍼하고 그의 서거를 애도하는 이 순간에도 바로 정치인 노무현의 통치기간에 대한민국이 OECD국가 중에서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 (10만 명에 25명)가 됐다는 사실을 잊기가 힘듭니다.

개인 노무현이 최다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주고 싶어하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정치인 노무현이 그 수단으로 "시장"과 "경쟁"을 선택하는 최악의 오류를 범했습니다. 지나치게 급진적인 개혁도 잘못하면 낭패로 끝나기 쉽지만, 2002-2007년간의 개혁 시도는 "온건"하다 못해 결국 "개혁적" 색깔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개념이 없는 "개혁세력"들이 기존의 체제와 손을 잡으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결국에 바로 그 체제는 "개혁"의 지도자이었던 노무현을 사회적으로 타살시키고 말았습니다. 악어새가 되지 않는 이상, 악어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 악어와 친구가 됐다고 착각하는 순간에 결국 먹이감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더 이상 이와 같은 비극들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이 나라가 진정하게 개혁되기를 기원합니다...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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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6-03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시민 등등의 이상한 놈들이 다시 세를 잡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웃기지도 않아요. 제일 나쁜놈은 수구세력보다는 그놈들이겠죠.

가시장미 2009-06-04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노자는 참 쉽고 참 예리하게 글을 잘 쓰는 것 같습니다. 잘 보았어요 :)

2009-06-04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유님 서재에서 발견했다... 

바라님 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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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이라는 대당의 허상



[기고] 한 편의 ‘희극’이 ‘비극’으로 끝나다



이광일(성공회대)  / 2009년05월26일 10시54분

다소 긴 글을 시작합니다. 어느 분들에게는 듣기 싫은 소리일 수도 있겠지요.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정말 슬픕니다. 넉 달 전쯤 40년 지기를 먼저 보내고 묘 주변에 잠시 혼자 남아 진정 삶과 죽음이 함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다 내려왔는데, 노무현 전대통령 또한 이 세상을 등지며 ‘삶과 죽음이 하나 아닌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글을 쓰다가 혹은 길을 걷다가 나이 50이 되기도 전에 몹쓸 병에 걸려 혼자 깊은 밤을 보내며 죽어갔을 친구의 실존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릅니다.


설상가상 죽음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즈음에 일어난 용산학살이라는 구조적 폭력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저렇게 불에 타 죽어야할 사람들이 아닌데, 살릴 수 있었던 선량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도 모자라 테러리스트라는 딱지를 붙이고 진실을 밝히라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수배, 연행하고, 조문하겠다는 사람들 길을 가로 막고. 그래서 하도 기가 막혀 이명박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덕수궁 앞에서 노무현전대통령의 추모대열을 경찰이 막는다는 뉴스가 흘러나와도 그저 덤덤할 뿐입니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20대의 젊은 시기에도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5.18민중항쟁 시기에 죽임을 당한 평범한 시민들의 처참한 주검을 담은 사진들을 처음 접한 후 매일 TV에 나와 아무 일 없다는 듯 ‘정의구현사회’를 반복하는 전두환씨를 보며 그랬던 적이 있었습니다. 뒤돌아보면 그 역시 부질없는 짓이었지요. 이 두 사람을 보면 그저 “피는 속일 수 없다.”는 말만이 떠오를 뿐입니다. 이런 그들도 과연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생각할까요.


그래도 말단에서 정치학을 공부한다고 사람들이 확인 겸 해서 종종 묻습니다. “이명박정권 등장이후 정치가 실종되었다고 말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이명박식 정치 아닌가요!?” 번득이는 질문에 “그렇지요, ‘정치’지요. 현실 속의 정치는 하나로 존재하지 않거든요. ‘하나인 것처럼 보이는 이 사회’는 여럿의 정치가 서로 모순과 긴장, 적대와 갈등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체적인 모습을 끊임없이 만들어 가지요. 하나의 정치를 말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런 ‘뻔한 대답’을 하면서 이제 이 변변치 않은 지식을 가지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노무현 전대통령도 괜히 했다고 후회한 정치, 진정 ‘정치란 무엇입니까?’라는 자문을 하게 되니 이 무슨 조화인가요.


잠시 과거를 더듬어 봅니다. 전두환정권은 정규군을 투입하여 5.18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한 후 불순분자, 폭도들이 소요, 폭동을 일으켜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기 위해 그 죽임이 불가피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안정됐으니 국민여러분은 생업에 전념하라고 했지요. 지금 이명박정권은 또 어떤가요. 경찰특공대를 투입하여 철거민들을 학살하고 ‘이제 여기 용산은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으니 모이지 마세요, 배회하지 마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 일 없다.’면서도 경찰력을 동원하여 거리를 막고 무엇이 두려운지 4호선 신용산 역 바로 옆의, 학살현장 남일당 건물을 철통같이 ‘경호’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80년대의 양식 있는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처음에 “광주에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데...”라며 소곤소곤 말했지요. 평온해졌다고 하는데도 그 곳에 시선을 주고 귀를 쫑긋했습니다. 전두환정권의 총칼이 두려웠지만 ‘전두환시리즈’, ‘이순자시리즈’라는 것을 만들어 그들을 희화하고 조롱하다가 결국 목소리를 모아 마침내 “거기에서 학살이 있었어요~”라고 큰소리로 진실을 말했지요. “파쇼타도”를 외치며 싸웠지요. 지금 용산은 어떤가요. 많은 사람들이 잊었다 하지만 철거민들이 학살된 것을 잘 알기에, 광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기에 양식 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 그 가족과 함께 억울함을 널리 알리고 거기에서 얼마나 반인륜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있든 그렇지 않든 항상 그 곳을 염려하고 걱정하면서요.


진정 정치란 무엇인가요. 바로 여기에 ‘그들의 정치’와 ‘우리의 정치’가 어떻게 다른지, 그 비밀 아닌 비밀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파시스트의 계보를 지닌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장밋빛 꿈만 말하며 매사에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요. 그렇기에 그들은 지금 죽어가는 사람,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사람들일수록 더 매몰차게 몰아댑니다. 그렇기에 선량한 사람들을 죽여 놓고도 아무 일 없으니 그냥 관심 끄라는 투의 말을 눈 한번 꿈적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자기와 상이한 목소리들은 모두 막아버리고 수색, 압수하여 갖다 버리고 가두어 차단하면 되지요. 이게 ‘그들의 정치’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공안(치안)’입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넓고 깊은 강이 있습니다. 왜냐구요? 그들은 자신들이 임의로 그어 놓은 경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목소리와 삶 자체를 애초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은 ‘주권자’라고 하면서요. 단 한 치의 공간도 내주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치’는 무엇인가요. 오히려 “여기에 어그러짐, 차이, 긴장과 갈등이 있어요.”라고 밖으로 외치는 것이지요. 80년 새벽 광주에서도 신군부파시스트의 ‘공식적인 말’과는 달리 “여기 우리 죽어가요.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그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그 한마디에 이후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에 괴로워하면서 젊은 청춘을 보냈습니다. 그것을 생생히 다룬 임철우의 소설 「봄날」을 기억하시죠. 용산에서도 “여기 사람이 있어요. 제발 생존할 수 있는 공간만은 허용해주세요.”라고 절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결국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외침 때문에 또 많은 이들이 자책하며 잠 못 이루고 눈물을 흘립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니 알아주기를 원치 않는 이들이야 말로 진정 ‘이 시대의 바보들’이지요. 바로 여기에 ‘우리의 정치’가 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말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시공간을 함께 만드는 것이 ‘우리의 정치’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공간일 지라도요. 왜냐구요? 말을 못하면 결국 시들어 죽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노무현전대통령이 몸을 던진 ‘부엉이바위’ 또한 그런 공간을 상징하는 것 아니던가요. 그렇기에 거기에서는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치’에 대해 이처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자본과 부당한 권력이 그 애절한 삶의 목소리들에 관심을 보이겠습니까. 사람의 관계를 비용 대비 생산성, 이윤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자본에게 그런 외침은 그저 어느 가을날 무수히 땅에 떨어져 이리저리 구르는 낙엽소리만도 못한 것이겠지요. “비즈니스 플랜들리”를 말하는 이명박정권의 귀에 어찌 그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국가성장동력의 창출이라는 ‘거대프로젝트’를 방해하는 이음(異音)은 그저 빨리 제거해야 할 ‘무능한 인간쓰레기들의 소음’ 정도로만 취급될 뿐입니다. 이제 왜 그들이 죽어가는 사람,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사람들일수록 더 무시하고 몰아붙이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 집니다. 그들은 오직 추가비용으로만 계상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래서 그런가요. 요즘 많은 저널리스트들, 학자들이 ‘살아 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의 관계에 대해 자주 언급합니다. ‘살아 있는 권력’인 이명박정권이 ‘죽은 권력’을 상징하는 노무현정권을 탄압, 조롱하였고 노무현전대통령은 그 상징적 희생양이라는 평가도 들립니다. 물론 이런 대당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것은 주권자를 대상화, 수동화시킨다는 점에서 그 이데올로기의 혐의를 벗어날 없습니다. 왜냐구요? 어떤 사회이건 민주주의를 표명하는 한 ‘살아 있는 권력’은 오직 ‘자기지배를 실현하고자 하는 주권자’에게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가요. 그것은 이들 두 정치세력들이, 언론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민주주의를 대리주의 토대 위에서만 사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모두가 그저 주권자를 투표하는 기계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살아 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이라는 대립구도 속에서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살아 있어야 할 주권자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살아 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이라는, 즉 ‘집권 엘리트’와 ‘집권하지 못한 엘리트’ 사이의 이런저런 파워게임, 음모와 계략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대당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실은 바로 살아 있어야 할 주권자들이 죽어 있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 주권자가 오히려 위임권력에 지배당하고 있는 ‘벌거벗은 주권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줄 뿐입니다.


그렇기에 묻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권력’, 그리고 지금 ‘죽은 권력’이나 과거에 ‘살아 있는 권력’의 지배 속에서 당신은 주권자로서 살아 있었던 적이 있나요. 직설적으로 묻습니다. 과거 노무현정권은 ‘살아 있는 권력’이 아니었나요. 여전히 착취, 수탈, 배제, 억압, 차별의 관계 속에서 고통 받는 무수한 대중이 존재하는데, ‘민주주의의 대강이 완성되었다.’고 말했던 그 노무현정권은 ‘살아 있는 권력’이 아니었습니까.


민주주의, 즉 ‘자기지배의 실현’을 담보해야 할 주권자로 살아 있다는 것은 지금 이 사회의 다양한 관계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온갖 착취와 수탈, 억압과 배제, 차별의 경계를 넘어 나아가는 크고 작은 실천에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선거를 통해 자유주의적 민주정권이 한두 번 들어섰다고 해서 그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있나요. 선거가 민주주의인가요. 오직 보수정치(학)만이 그렇게 역설할 뿐입니다.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으로 권력이 넘어가 이른바 ‘삼성공화국’이 존재하는데, 그리하여 그것을 문제 삼은 변호사, 기자, 정치인은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는데, 또한 국가권력이 자신들의 오랜 상표였던 중립성의 언술조차 부정하고 ‘비즈니스 플랜들리’를 외치며 자본과 직접 거래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이 시대에, 그리하여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장벽들은 더욱 높아지고 그 와중에 가난한 이들은 저토록 억울하게 죽어나가고 있는데, 아무리 뼈가 빠지게 일해 생산력을 높여놓아도 빈부격차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심해지는데, 그것들을 문제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기지배의 실현’이, 민주주의의 대강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이런 썩을 대로 썩어 문드러진 구조들, 관계들을 덮어둔 채, 이른바 깃털인 ‘박연차 리스트’를 들이대며 ‘살아 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들이 도덕성, 법치 운운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본말전도 아닌가요. 이것이야말로 정녕 웃기는 한 편의 코미디 아닌가요.


그렇기에 진정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는 그의 인식,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그가 이처럼 웃지 않을 수 없는 코미디의 주연임을 자임하며 그것을 비극으로 전환시켰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진정 막후의 검은 손들은 엄숙주의로 가장한 채 지금 이 추모의 순간에도 그의 죽음을 앞세워 ‘국가경쟁력강화’니 ‘국민단합’을 외치며 어떻게 하면 대중을 더 착취, 억압할까를 궁리하면서 저렇게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의 재임 시기에 이런 부당한 구조들, 사회관계들이 낳아지지 않았는데, 그의 민주주의는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그 대강이 완성되었다고 말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완성되었다고 말하자마자 그 코미디는 더욱 극단화되었고 그의 민주주의조차 생명력을 잃게 되었으며 바로 그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그 ‘살아 있는 권력’의 토대가 되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도한 해석인가요.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연인 노무현이 아니라 사회관계의 결절점으로서의 노무현정권에 대한 비판자였기에 그 지지자들에게 묻습니다. ‘정치인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과거 그를 지지했던 어느 배우처럼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냐?”고 반문한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저 또한 이 시대의 재산과 교양을 지닌 분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노무현의 직설화법을 좋아했지요. 항상 가난을 끼고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가난한 자들의 고상치 못한 문화, 민중적 부대낌을 여전히 좋아합니다. 문득 정치인 노무현에게서 그런 면모를 볼 때, 그 누구보다도 친근감을 느낀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저런 무책임한 발언을 하며 그 누구를 정치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를 정치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삶과 죽음뿐만 아니라 타자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를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조금이라도 정치인 노무현에 시선을 준 적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가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는 그 어떤 경계들을 넘어 나아가고자 하였기 때문 아닌가요. 안 그런가요. 그렇다면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그가 그것을 멈추는 순간, 민주주의의 대강이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순간 정치인 노무현을 내팽개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민주주의를 좀 더 진전시키라고 탄핵으로부터 구해주고 그 정치세력을 의회의 다수당으로 만들어 준 것이지 ‘대연정’하라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경계들과 대결하는 것을 포기한 순간 이미 ‘시대의 아이콘으로서의 정치인 노무현’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가당치않게도 그의 반연고주의, 반지역주의, 반특권의 정치적 행보가 좋아 지지한다는 사람들이, 그것도 자칭 지식인이라는 자들이 과거 그와의 인연, 이런저런 회한을 드러내며 추모하는 것을 넘어 그의 죽음을 앞세운 채, 민주주의의 의미를 호도하고 진보세력에게까지 어줍지 않은 ‘분노의 화살’을 돌리는 언술, 행태가 눈에 보이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요. 그와 같은 행태는 추모라는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될, 진정 ‘인간 노무현’조차 죽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것은 최소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의 맹종일 뿐입니다. 그것은 ‘정치인 노무현’을, ‘민주주의자 노무현’을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그를 살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로부터 벗어나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죽은 자를 추모하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 무엇인가를 버리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진정 민주주의자로서의 그의 어떤 모습을 기억하여 그것을 다시 살리고 싶다면, 그를 추모하는 동안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진정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이을 것인지 성찰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이 지성인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정치인 노무현’을, ‘민주주의자 노무현’을 살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그것은 과거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여기에 가로 놓여 있는 그 어떤 부당한 장벽들, 경계들을 비판하고 그것에 저항하면서 그것을 허물고 새로운 삶의 관계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민주주의는 과거의 경력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움직이는 지금 이 순간의 부당한 관계들을 문제시하고 그것을 넘고자 하는 실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죽은 노무현을 잡고 그를 기억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고통 받는 용산을, 특수고용노동자들을, 이주노동자들을, 소수자를, 수탈 받는 환경과 생태의 아픔을 안고 함께 싸우는 것이 진정 그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민주주의, 즉 자기지배의 실현은 그 어떤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꿈을 투사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들만이 “이제 저를 버리라.”고 한 ‘대통령 노무현’의 말을 제대로 독해하는 사람이고 그를 넘어섬으로써 그를 살리는 참다운 지지자가 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정치인 노무현’이 꿈꾸었을 그 어떤 세상이 진정 특권을 지닌 세력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었다면, 그리하여 “이미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대통령 노무현’의 말이 자신의 개혁을 막고 있던 거대자본과 특권의 힘 앞에서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자조와 한탄의 그것이었다면, 그의 꿈은 결코 개혁자유주의자들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과제라는 것을요. 그리고 개혁자유주의자들이 꿈꾸는 ‘아름다운 세계’는 오직 그것을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실현되어져 왔다는 역사를 부정하거나 잊지 마십시오. ‘노무현의 꿈’은 열성지지자들인 당신들이 진정한 민주주의자, 진보주의자로 거듭날 때만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정말 잊지 말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바보 노무현’을 추모하는 저 촛불이 지금 그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는 용산의 착한 이들과 가난한 자들의 삶 속으로 자연히 이어질 때만이, 진정 ‘이 시대의 또 다른 바보들’과 어깨를 할 수 있을 때만이 그 또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요. 이제 당신들의 몫입니다.


인간 실존의 문제인 죽음은 모든 이들을 슬픔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런데 여기 학살당한 지 130일 넘게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냉동고에 보관되어 있는 용산의 가난한 주검들이 있습니다. 호혜적 삶과 관계를 희구하다 결국 스스로 목을 매 삶을 마감한 특수고용노동자 박종태의 주검이 있습니다. 진정 살아 있는 주권자여야 할 그들은 여전히 자본과 권력에 의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조롱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저편에 한 시대의 정치지도자이자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의 죽음이 있습니다.


차별받지 않는 주검들의 세상을 꿈꾸며 이들 모두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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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민주주의로의 초대
부르노 카우프만 외 지음, 이정옥 옮김 / 리북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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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현상태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고 현정권의 반민주적 흐름에 경악하고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단순하게 절차적인 형식으로 이해하는 한 현정권과 같이 무도한 정권은 언제든 다시 등장할 수 있다. 이것을 경계한다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심화라는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고 이 책은 그런 고민에 많은 도움과 시사점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직접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다음 단계로의 진입을 위한 핵심요소이다. 민주주의 확대에 반대하는 자들은 흔히 그 이유로 시민에게는 중요한 정치결정을 내리 만한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인민주권론의 민주주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주장이다. 무엇보다도 현대의 직접 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대의제이게끔 하는 길이다. 직접민주주의가 가장 잘 구현되고 있는 나라로 이 책은 스위스를 모델로 하고 있다. 실제로 스위스의 모든 정치는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발언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처럼 정치에 될 수 있도록 외면하는 구도와는 정반대인 것이고, 정치에 대한 자신의 발언이 언제나 반영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는 3가지 주요절차가 있다. 첫째가 의무적인 국민투표이다. 둘째가 권한을 부여하는 혹은 선택적인 국민투표이다. 세째가 시민발의이다. 의무적인 국민투표는 헌법의 개정이가 부가조문등을 삽입하는 경우 의무적으로 국민투표로 결정한다는 것이고, 두번째 국민투표는 의회에서 법이 제정되거나 개정되더라도 국민투표로 최종 확인을 한다는 의미이며, 시민발의는 일정한 시민이 찬성한 사안에 대한 입법을 국민투표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만일 대한민국에서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했더라면, 2008년의 광우병파동 시 정부가 저렇게 오만하게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국민투표를 행하거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미국산 소고기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해서 정부에 대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되더라도 직접민주주의로 보완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자체는 권력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의 가장 좋은 점은 행함으로서 배운다는 것이다. 시민발의와 국민투표권 덕택으로 투표자들은 정치적 의사결정과 정치의제 설정에 접근할 수 있데 된다. 정치인이 선출되더라도 의사결정권을 독점할 수 없으며, 이를 시민과 나눠가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소수 기득권 청치인들의 수중에 정치자본 또는 정치권력의 원천이 집중화 되는 것을 현저하게 저지할 수 잇는 것이다.  또한 시민들은 간접민주주의에서 보다 시민발의와 국민투표의 과정을 통해 훌륭한 입법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직접민주주의를 이루려면,최소한의 요구조건들이 필요하다.   

-시민들은 스스로 시민발의와 국민투표를 추진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국민투표의 결과는 구속력을 가져야 한다. 구속력없는 단순한 자문은 문제를 풀기보다 문제를 한층 모호하게 하고 때로는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낸다.      

-최소 투표율 정족수 규정은 철폐되어야 한다. 기권의 전술적 사용과 결과의 무효선언도 정족수 규정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고 다수의 삶의 질이 높아지며, 소외받는 소수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경제적 개혁을 통하던 어떤 방법을 통하던 민중이 주인이 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고, 당장 혁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직접민주주의 방식과 실천에 대한 고민 정도는 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혁명 후에도 민주주의의 민주화 과정은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직접민주주의 내용에 대한 쉬운 해설과 방식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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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찾아서
빅토르 프랑클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이서브 / 2001년 12월
품절


섬광처럼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다. 그토록 많은 사상가들이 자신의 삶에서 결론처럼 이끌어낸 지혜의 말, 그토록 많은 시인들이 노래한 진실,그것은 바로 사랑을 통해서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장 귀하고 높은 단계로 솟아오를 수 있다는 진리였다. 인간을 사랑을 통해서만 사랑 안에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문학과 사상과 종교에서 역설해 왔는데,나는 그 궁극적 진리이 의미를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72쪽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라 할지라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가슴 깊이 간직할 수만 있다면, 비록 짧은 순간에 그칠지라도 구원의 빛이 찾아든다는 걸 뼈저리게 이해한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수용소에 갇혀 아무 뜻도 펼칠 수 없는 처지에서도, 올곧게 고통을 견뎌내는 일 말도는 할 수 있는게 전무한 상황에서도, 사람은 가슴속에 간직된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그윽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72~73쪽

사랑이란 어떤 사람의 육체적 존재보다는 그 사람의 정신성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 지금 내 옆에 있다는 것,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건 아니란 사실이다. -74쪽

'그대 가슴에 나를 봉인하여 주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리니' 솔로몬의 아가-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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